이 논문은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영남학 제28호 2015.12.31에서 발췌하였다. 장달수
임진왜란 초기 경상좌도 안집사 김륵의 역할과 활동
정 해 은*1)
Ⅰ. 머리말
Ⅱ. 전쟁 초기 경상도 안집사의 파견
Ⅲ. 전쟁 초기 안집사 김륵의 활동
Ⅳ. 안집사 김륵에 대한 평가
Ⅴ. 맺음말
국문초록
이 논문은 임진왜란 초기 경상 좌도 안집사 김륵의 활동을 검토한 글이다.
그동안 임진왜란 연구는 경상우도와 김성일을 중심으로 진행되면서 경상 좌
도와 김륵에 대해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임진왜란 초기 경상 좌도는 일본군
침입을 가장 먼저 받으면서 한동안 고립 상태에 있었다. 여기에다가 군령과
민정을 총괄하는 지휘부의 부재까지 겹친 상태였다. 이때 김륵이 안집사로
파견되면서 경상 좌도는 건재한 고을을 중심으로 전열을 가다듬고 군사 활
동을 전개하였다. 김륵은 1592년 4월 말부터 1593년 4월까지 안집사로 활
동하면서 민심을 수습하고 항전을 독려하였다. 수령이 도망간 고을에 守城將
을 임시로 배치해 지역 재건에 나섰으며, 군사 활동을 전개해 일본군 격퇴에
힘을 쏟았다. 또 격문을 작성하여 의병을 촉구하는 한편 의병 활동을 지원하
*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 전자우편: 1for2@aks.ac.kr
제28호(2015)
였다. 하지만 김륵의 활동에는 한계가 있었다. 김륵이 의병의 독자적인 활동
보다는 官軍과 연합을 더 중시하고, 활동 반경이 영주 및 안동 지역에 집중
되면서 영향력을 널리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후대에 김륵에 대한 현창이
활발하지 못한 것도 이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그럼에도 임진왜란 초기 경상
좌도의 전황과 분위기, 관군과 의병을 활동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김륵에 대한 관심을 높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 주제어 ------------------------------------------------------------------------------------
김륵, 안집사, 임진왜란, 경상도, 경상좌도, 관군, 의병, 초유사, 김성일, 류성룡, 김
륭, 박진
임진왜란 초기 경상좌도 안집사 김륵의 역할과 활동(정해은)
359
Ⅰ. 머리말
현재 임진왜란사 연구에서 경상 좌도는 경상 우도에 비해 연구가 저조한
편이다. 경상 우도의 경우 곽재우⋅김면⋅정인홍 등을 중심으로 의병 연구가
활발한 편이며, 이와 함께 전쟁 초기 의병 거사를 이끌어내고 지원한 金誠一
에 대한 관심도 높다. 이에 비해 경상 좌도는 영천성과 경주성의 전투 그리
고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朴晉을 제외하고 큰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1)
金玏(1540∼1616)은 영주 출신으로서 임진왜란이 발발한 초기인 1592년
4월 하순경에 경상좌도 安集使로 임명되었다. 8월~9월 동안 안동 부사로 지
낸 2개월 정도를 제외하고 이듬해인 1593년 4월까지 이 직임을 수행하였다.
김륵은 전란 초기에 경상 좌도 안집사로서 민심 수습과 항전을 독려하는 임
무를 맡아 활동하였다.
그럼에도 임진왜란기 안집사 김륵에 대한 연구는 현재 전무하다 해도 과
언이 아니다. 김륵의 생애와 사상을 다룬 글이 한 편 있으나 연보⋅행장⋅묘
지명을 중심으로 일생을 소개한 글이다.2) 본격적인 연구는 아니지만 임진왜
란 초기 경상 의병에 대한 연구에서 안집사 김륵의 활동을 언급하거나, 초유
사 김성일에 비견하여 안집사 김륵의 역할을 주목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
되었으나 여전히 학계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다.3) 그동안 김륵의 활동이
주목받지 못한 배경에는 임진왜란사가 의병 중심으로 연구가 진행되면서 주
로 경상 우도의 의병 활동이 조명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연구 풍토에서 김륵
1) 임진왜란기 경상 좌도에 대한 주요 연구 성과는 다음과 같다. 최효식, 임란기 경상좌
도의 의병항쟁, 국학자료원, 2004; 정진영, 「안동지역의 임란의병」, 안동문화연구
4, 1990; 이욱, 「임진왜란기의 경상도 의병 양상」, 임진의병의 역사적 의의와 현재적
가치, 선인, 2009; 장준호,「임진왜란시 박의장의 경상좌도 방위활동」, 군사 76,
2010; 김진수, 「임진왜란 초기 경상좌도 조선군의 대응양상에 대한 검토」, 군사 84,
2012; 정해은, 「임진왜란 초기 경상도 수령의 동향과 의병지원 활동」, 조선시대사학
보 70, 2014;김경태, 「임진전쟁 초기 경상좌도 일본군의 동향과 영천성 전투」, 군사 95, 2015; 김진수, 「임진왜란기 박진의 군사활동과 평가」, 한국사학보 60, 2015.
2) 김시황, 「백암 김륵 선생의 생애와 사상」, 동양예학 17, 동양예학회, 2007.
3) 최효식, 앞의 책, 212쪽; 이욱, 앞의 논문, 49쪽, 주17
제28호(2015)
360
에 대해 주목할 수 없었으며, 무엇보다도 김륵과 의병의 연관성이 뚜렷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초기 경상 좌도는 적침을 가장 먼저 받으면서 한동안 외부와 고
립되었다. 이 상황에서 전쟁 초기 경상 좌도는 지휘 계통에 공백이 존재하였
다. 전쟁 발발 직후 김수가 경상도 관찰사 겸 도순찰사를 맡았을 때에는 좌
도와 길이 막혀 명령이 통하지 않았다. 5월 무렵에는 좌도 관찰사 이성임이
부임하지 못하면서 공백이 생겼고, 이후 김성일이 경상 좌도 관찰사로 부임
했다가 바로 교체되어 우도로 되돌아갔으며, 9월초에야 한효순이 좌도 관찰
사로 부임하였다. 이 사이에 김륵이 안집사로서 이 지역에서 활동했던 것이
다. 따라서 전쟁 초기 경상 좌도의 전황과 분위기, 관군과 의병을 활동을 정
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김륵에 대해 관심을 높일 필요가 있다.
이 논고는 임진왜란 초기 경상 좌도의 전황과 관군 및 의병의 활동을 파
악하기 위해서는 안집사 김륵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에서 시작
하였다. 김륵에 대한 기록은 그의 문집인 백암선생문집을 제외하고 풍부한
편이 아니다. 선조실록에도 안집사 시절의 김륵에 대한 기사가 몇 개에 불
과하다. 그래서 이를 보완하기 위해 임진왜란기 영남 양반들이 남긴 일기 자
료들을 대상으로 김륵의 활동을 수집, 정리해보았다.
먼저 임진왜란 초기 경상 좌도의 지휘 계통을 살펴보고 안집사 파견이 갖
는 의미를 검토하였다. 다음으로 김륵이 임진왜란 초기 안집사로서 어떤 역
할을 수행했는지를 세밀하게 살펴보았다. 끝으로 김륵에 대한 평가와 기억들
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검토하여 안집사 김륵의 위상을 조명해 보았다.
이 논고는 김륵에 대한 기초 연구로서 향후 더 다양한 자료의 발굴을 통해
김륵의 활동에 대해 보완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임진왜란기 경상좌도 및
김륵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징검다리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Ⅱ. 전쟁 초기 경상도 안집사의 파견
1. 전쟁 초기 경상좌도 지휘부의 상황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 경상도는 67개 고을로 이루어졌다. 경
상좌도가 37곳,4) 경상우도가 30곳이었다. 전쟁 발발 직전 경상도 관찰사의
본영은 상주이며,5) 관찰사는 金晬였다.
임란 직후부터 7월 무렵까지 경상도의 상황을 보면 왜적의 침입을 받지
않은 곳이 22곳 정도였다. 경상좌도는 안동⋅청송⋅진보⋅영주⋅예안⋅예천
⋅풍기⋅봉화⋅영해⋅영덕⋅청하⋅흥해⋅하양이 적침을 받지 않았다. 경상
우도는 거창⋅안음⋅함양⋅산음⋅단성⋅하동⋅곤양⋅사천⋅진주가 적침을
받지 않았다.6)
경상 좌도는 전쟁 초기에 일본군에 의해 주요 지역을 초토화 당했으므로
도내 군사기관이나 행정관서의 명령 체계를 확립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
다. 임진왜란 초기 조정에서는 군령을 행사할 수 있는 직책으로 도순찰사,
순찰사, 도순검사, 동서로 호소사, 징병관찰사, 초유사, 안집사 등을 두었다.7)
전쟁 발발 초기 경상도는 관찰사 김수가 都巡察使를 겸임하였다. 김수가 도
순찰사의 임명을 받은 때가 4월 22일이었다.8)
그런데 당시 경상도가 낙동강으로 분리되어 있어 좌도와 우도가 긴밀한
4) 경상 좌도 37개 지역(경국대전 권4, 병전조 근거) : 경주, 안동, 대구, 밀양, 영해,
청송, 예천, 흥해, 榮川(영주), 永川, 金山, 양산, 풍기, 울산, 청도, 영덕, 의성, 경산,
동래, 하양, 청하, 인동, 기장, 언양, 용궁, 현풍, 군위, 의흥, 장기, 진보, 봉화, 예안,
신녕, 비안, 영산, 창녕, 연일.
5) 이수건, 조선시대 지방행정사, 민음사, 1989, 188~190쪽.
6) 선조실록 권27, 선조25년 6월 28일(병진); 鄭慶雲, 孤臺日錄 1592년 7월 24일.( 역주 고대일록(상⋅하), 남명학연구원, 2009)
7) 심승구, 「임진왜란기 군사지휘권의 추이와 성격」, 임진왜란과 권율장군, 전쟁기념
관, 1999, 36쪽.
8) 李擢英, 征蠻錄 乾, 1592년 4월 22일.(원본은 정만록, 의성문화원, 1987, 역주본
은 이호응 역주, 역주 정만록, 의성군, 2002 이용)
제28호(2015)
362
협조체제를 유지할 수 없었다. 경상도 감영의 구실아치로서 임진왜란기 경상
도 관찰사의 막하에서 활동한 李擢英(1541∼1610)은 전쟁 중 쓴 기록에
“좌도는 난이 발생한 이후로 일본군이 곳곳에서 횡행하여 도로가 막혀서 성
패를 알 수 없다.”9)고 하였다. 그러면서 1592년 4월 21일에 우도와 좌도의
길이 막히게 되었다고 적었다.
이탁영이 좌도 소식에 큰 관심을 기울인 이유는 경북 의성이 고향이어서
모친을 비롯해 온 가족들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탁영은 4월 하순에
이미 일본군 부대가 영산을 침범해서 바로 창녕⋅현풍으로 돌격해 낙동강을
건너려고 하며, 다른 한 부대는 밀양을 거쳐 청도를 함락시키고 큰 길로 내
달아 경산⋅대구 두 성을 함락한 후 바로 팔거⋅인동을 향하고 있다고 기록
하였다.10)
1592년 6월 중순에도 좌도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6월 18일에 김수
는 삼도 근왕군을 이끌고 한양으로 진격했다가 용인 전투에서 패배해 경상
도로 복귀하였다. 이때 이탁영은 “본도에 돌아왔으나 좌도의 성패를 알 길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난이 일어난 후로 석 달이 지나도록 모친과 아
내⋅자식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를 모르니 죽으려도 해도 죽을 수 없다.”11)
면서 탄식하였다.
당시 이탁영은 관찰사 겸 도순찰사 김수를 수행하고 있었기에 그 누구보
다도 경상도내에서 오는 각종 보고를 통해 최신 정보를 접할 수 있었다. 더
구나 모친과 아이들의 생사 여부를 애타게 알고 싶어 했기에 좌도 소식에
그 누구보다도 촉각을 세웠다. 이런 이탁영마저 좌도 소식을 들을 수 없어
애를 태우는 상황은 좌도의 상황이 매우 위급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알
려준다.
더구나 도순찰사 김수는 앞서 언급했듯이 5월 16일부터 6월 18일 사이에
경상도내에 있지 않았다. 김수는 전라 감사 이광, 충청 감사 윤선각과 연합
9) 이탁영, 정만록 곤, 序.
10) 이탁영, 정만록 건, 1592년 4월 21일.
11) 이탁영, 정만록 건, 1592년 6월 18일.
임진왜란 초기 경상좌도 안집사 김륵의 역할과 활동(정해은)
363
하여 삼도 근왕군을 결성해 수원까지 진격했다가 용인 전투에서 패전하고 6
월 18일에 함양으로 돌아왔다. 삼도 근왕병 5만여 명이 참패를 당한 이 전
투에 대해 조경남은 “삼도의 군대가 용인에서 무너졌다.”고 기록했으며, 영
남 사족 정경운은 “관군이 수원에서 궤멸하였다”12)고 기록할 정도로 조선군
의 참패였다.
당시 김수에 대한 여론은 좋지 못하였다. 전쟁 직전에 무리한 성곽 수축으
로 민심을 잃었으며,13) 전쟁이 발발하자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는 비난을 받
았다. 張顯光은 김수에 대해 “전부터 벌써 도 전체의 인심을 크게 잃었고 적
이 쳐들어오는 날에는 가장 앞서서 달아났으니 그 죄가 가장 크다.”14)고 하
면서 여전히 순찰사의 직임을 띠고 있는 것에 대해 통분하였다.
한편, 조정에서는 전쟁에 대처하기 위해 경상도를 좌도와 우도로 나누어서
관찰사를 파견하였다. 여지도서 경상도 감영조에 따르면, 경상도는 1592년
8월에 좌도·우도로 나뉘어 좌도 감영은 상주에, 우도 감영은 경주에 설치되
었다. 1593년 10월에 다시 합쳐 감영을 성주 팔거현에 두었다. 팔거현은 명
장수 부총병 劉綎이 주둔한 곳이었다.15) 그런데 임진왜란 당시 각종 일기 자
료에는 좌도⋅우도의 분리가 이미 5월 초에 실시한 것으로 나오고 있다.
대구에서 의병을 조직한 徐思遠은 5월 3일자 일기에 좌도 감사에 이성임이
임명되었다고 적었다.16) 영주 지역의 학자인 李汝馪(1556∼1631)은 “난이
처음 일어났을 때에 조정에서 영남은 토지가 넓고 군무가 많으므로 특별히 좌
⋅우도에서 각각 방백을 내어 우도는 전 관찰사 김수를 그대로 임명하고, 좌
12) 조경남, 난중잡록 1592년 6월 6일; 정경운, 고대일록 1592년 6월 15일.
13) 정진영, 「경상도 임란의병의 활동 배경과 의의」, 지역과 역사 18, 2005, 244쪽.
14) 張顯光, 龍蛇日記 1592년 7월. 원본과 번역본은 김사엽 번역, 「국역 용사일기」, 김사엽전집 13, 김사엽전집간행위원회, 박이정, 2004를 이용했다. 한국국학진흥
원 유교넷(www.ugyo.net)에 장현광 일기인 文康公避難錄가 올라있는데 두 원본
을 비교한 결과 내용이 같다.
15) 輿地圖書 慶尙道 監營; 김태규·박대현 편역, 대구읍지(1767~1768년 편찬), 대
구광역시, 1997.
16) 徐思遠, 樂齋先生日記 1592년 5월 3일.(원본은 계명대학교 도서관 소장본, 국역본
은 박영호 역, 국역 낙재선생일기, 이회문화사, 2008 이용)
제28호(2015)
364
도는 이성임으로 삼았다. 이성임이 겁내고 두려워하여 감히 오지 않으니 좌도
사람들이 처음에 감사가 있는 줄도 몰랐다. 5월 10일 이후 강원 감사 유영길
이 교지에 근거하여 관문을 낼 때에 ‘좌도감사 이성임’이라 운운하여 비로소
좌도·우도를 나누어 감사를 두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17)고 한다.
그런데 5월 13일 무렵에 좌도 관찰사 이성임은 이미 교체되어 조정에 돌
아와 있는 상태였다.18) 이후 8월 7일에 경상 좌도 관찰사에 김성일, 경상우
도 관찰사에 한효순이 임명되었다.19) 그러다가 9월 7일 무렵 김성일이 우도
감사로, 한효순이 좌도 감사로 바뀌었다.20)
한편, 임진왜란 직전 경상도에는 병마절도사가 3인이 있었다. 관찰사가 겸
하는 병마절도사 이외에 전임의 병마절도사 2인이 있었다. 좌병영은 울산, 우
병영은 창원이었다. 전쟁 발발 당시 좌도 병마절도사는 이각, 우도 병마절도
사는 조대곤이었는데 노쇠하다는 이유로 4월 15일에 김성일로 교체되었다.
그러다가 김성일이 선조에게 일본에 대한 정보를 잘못 전달한 죄명으로
21일에 나포되었다가, 서울로 오는 도중에 사면되어 4월 중순 이후〜4월 말
무렵에 초유사가 되었다. 그래서 김성일을 대신해 조대곤이 다시 우도 병마
절도사에 임명되었다. 좌도 병마절도사는 1592년 5월에 밀양 부사 박진으로
교체되었다.
17) 李汝馪, 龍蛇錄 1592년 4월 27일.(이 날부터 7월 1일까지 날짜를 기록하지 않은
채 5월⋅6월도 함께 기록했음) 원본은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의 자료를 이용했다.
“亂之初生也, 朝廷以嶺南土地廣大, 軍務浩繁, 特於左右道各出方伯, 右道則以前方伯
金晬因任, 左道則以李聖任爲之, 聖任, 恇㥘不敢來, 左道之人, 初不知有監司, 五月旬
後, 江原監司柳永吉據敎旨通關. 有曰, 左道監司李聖任云云, 始知分左右道置監司矣,
聖任亦終不來, 民之疑惑滋甚.”
18) 선조실록 권26, 선조 25년 5월 13일(임신).
19) 선조실록 권29, 선조 25년 8월 7일(갑오).
20) 이탁영, 정만록 건, 1592년 9월 7일.
임진왜란 초기 경상좌도 안집사 김륵의 역할과 활동(정해은)
365
2. 안집사의 파견
앞서 살펴본 대로 경상도의 관찰사가 자주 바뀌는 사이에 좌도에는 관찰
사의 공백이 존재하였다. 김수가 도순찰사를 맡았을 때에는 길이 막혀 명령
이 통하지 않은데다가 삼도 근왕군으로 출전하면서 도내에 부재한 상태였다.
더구나 좌도 관찰사 이성임이 부임하지 못하면서 지휘의 공백이 생겼고, 김
성일은 경상 좌도로 왔다가 교체되어 우도로 되돌아갔으며, 9월초에야 한효
순이 부임한 것이다.
1592년 7월 15일 김수는 경상 좌도의 상황에 대해 “새 병마절도사 박진
이외에 기타 장수들은 넉 달이 되는데도 아직 임명이 없습니다. 이미 병마절
도사나 수군절도사가 없는데다가 방어사⋅조방사⋅수령도 없어서 몇 개월
동안 늘 절제와 책응할 사람이 없고, 우도와 도로가 막혀서 신의 호령과 지
휘할 곳이 없으니 와해될 기세가 우도보다 더 심합니다.”21)고 보고하였다.
이처럼 전쟁 초기 경상 좌도의 상황은 순찰사의 지휘를 받지 못하였고, 좌
도 관찰사마저 부임하지 않은 상황으로서 도내 최고 지휘관이 부재한 상태
였다. 이 기간 동안에 경상 좌도에 안집사 김륵이 있었다. 김륵이 안집사로
임명되어 좌도에 온 때는 4월 27일 무렵이었다.
김륵은 선조에게 처음 올린 장계에서 “신이 지난 4월 27일에 본도의 풍기
와 영천 등지를 지났는데 양반들이나 일반 민 대부분이 산으로 올라가 찾아
간 마을마다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고 하였다. 이여빈도 4월 27
일자 일기에 김륵이 도착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방어사가 영주에서 풍기로 돌아가면서 전령을 내어 창곡을 모두 흩어지
게 하여 쌓아놓은 곡식을 불태우고, 심지어 민가에 쌓아둔 곡식도 다 흩어지
게 했다. 이 명령이 한 번 내리자 숨어있던 민들이 일어나 도적이 되어 관곡을
탕진하고, 또 부민이 쌓아둔 것을 공공연하게 모여 얼굴을 맞대고 덜어내고
훔쳐갔다. 관에서는 그 아랫사람에게 명령을 내릴 수 없고, 주인은 하인을 제
21) 이탁영, 정만록 곤. 장계(1592년 7월 15일).
제28호(2015)
366
어할 수 없었다. 마치 오랑캐처럼 기율이 쓸어버린 듯 했다. 妻叔 참의 김륵이
안집하라는 명을 받아 이날 비로소 도착했는데 무너지고 흩어진 것이 이와 같
아 착수할 곳이 없었다.”22)
당시 선조는 김륵과 김성일을 동시에 경상도로 파견하였다. 1592년 5월에
승지 柳根이 국왕 선조에게 경상도 사람들이 처음엔 몰라서 싸우지 못했지
만, “저들의 부모 형제와 처자식이 모두 적에게 사로잡혔으니 사람을 파견해
강원도를 기점으로 하여 군사를 모집하면 틀림없이 사력을 다해 나아가 싸
울 것입니다.”고 건의하였다. 그러자 윤두수가 “경상도는 멀어서 호령이 통
하지 않습니다.”고 하자, 선조가 ”김성일과 김륵을 그 때문에 보낸 것이다.”
고 하였다.23) 선조의 지적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김성일과 김륵은 좌도와
우도의 군사 활동을 독려하기 위해 파견한 관료들이었다.
선조가 김륵을 안집사로 임명하면서 내린 전지에서도 영남이 연달아 왜적
에게 함락된 것은 병력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전쟁이 갑자기 발발했기 때문
이라 하였다. 그래서 식견을 가진 사람들을 일일이 깨우쳐 격려하여 관군과
협력해 결사적으로 싸우게 한다면 지금이라도 구제할 길이 있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행 상호군 김륵을 본도에 내보내어 그로 하여금 멀고 가까운 데
사는 백성을 두루 효유하고 충의로운 군사들을 격려하고 권면해 목숨을 바
쳐 근왕하게 하노라.”24)고 하였다.
선조가 김륵을 경상 좌도의 안집사로 임명한 것은 영주 출신으로 지역 사
정에 밝다는 점이 크게 작용한 것 같다.25) 申炅(1613~1653)은 “당시 경상
도 순찰사 김수가 우도에 있었는데 적병이 중간을 가로 막고 있어 좌도와
22) 이여빈, 용사록 1592년 4월 27일. “防禦使, 自榮川歸豐基傳令, 盡散倉穀, 燒其積
聚, 至於民家儲穀, 亦令盡散, 此令一下, 隱民起爲盜賊, 蕩盡官穀, 又及富民儲蓄, 公然
聚衆, 對面攘竊, 官不能令其下, 主不能制其奴, 如蠻如獠, 紀律蕩然, 金參議玏, 受安集
之命, 是日始到, 而潰散如此, 無復着手處.”
23) 선조실록 권26, 선조 25년 5월 23일(임오).
24) 조경남, 난중잡록 1592년 5월 5일.
25) 徐思遠은 김륵이 우도 안집사가 되었다고 기록했다.(서사원, 국역 樂齋先生日記
1592년 5월 3일)
임진왜란 초기 경상좌도 안집사 김륵의 역할과 활동(정해은)
367
소식이 통하지 못하므로, 김륵이 본도의 민정을 상세히 알아서 안집시킬 수
있기 때문에 보낸 것이다.”26)고 하였다. 이 내용은 뒤에서 소개할 류성룡이
남긴 징비록의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또한 경상 좌도의 선비들을 움직이기 위한 원동력으로서 김륵이 이황의
제자라는 점도 중요한 요소였다고 판단된다. 7세에 글을 배우기 시작한 김륵
은 13세에 영주 지역 출신으로서 퇴계 제자인 朴承任과 黃俊良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18세에 이황에게 직접 나아가 四書를 배웠으며 이로써 퇴계
문인록에 이름을 올렸다. 1600년에 퇴계전서가 완간될 때에 연보의 교정
에 참여하였다.27)
이처럼 김륵이 영천 출신이자 퇴계 문인이라는 점은 지역에 영향력을 미
치는 큰 자산이었다. 국조인물고에도 “조정에서 공을 영남 인사의 추앙을
받는 존재라 하여 안집사의 소임을 주고 영남 좌우도의 민들을 불러 모으게
하였다.”28)고 평가하였다. 실제로 김륵을 도와 의병 활동에 적극 참여한 金
隆(1549~1594)이나 金大賢(1553~1602) 모두 영주 출신의 학자들이었다.
김륵을 계속 안집사로 임명해야 한다고 글을 올린 김륭은 이황의 마지막 제
자이자 가장 어린 제자로 유명한 인물이다. 김대현은 성혼의 문인이지만 이
황을 해동공자로 부를 만큼 존숭하였다. 김대현의 아들 김응조의 경우 류성
룡에게 수학하기도 했다.
한편, 김륵은 선조실록에 따르면 8월 1일에 안동부사에 임명되었다.29)
그런데 <安東先生案>을 보면 임진왜란 발발 당시 안동 부사는 鄭熙績이었다.
정희적은 1589년 12월 18일에 부임했는데 언제 교체되었는지 알 수 없다.
임진왜란 직후인 4월 말에 김륵이 안동에 왔을 때에는 종적을 감춘 상태였
다. 정희적에 바로 이어서 禹伏龍이 나온다. 우복룡은 1592년 10월 3일부터
26) 申炅, 再造藩邦志 1(대동야승 권35 수록).
27) 金玏, 栢巖先生文集 續集, 「백암선생연보」.(원문과 번역본은 김준영 편집, 栢巖先
生文集(國譯補訂版), 1999 이용)
28) 國朝人物考 續考 3, 卿宰, 金玏.
29) 선조실록 권29, 선조 25년 8월 1일(무자). 백암선생문집 「백암선생연보」에는
1592년 9월에 안동 부사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제28호(2015)
368
1596년 8월 23일까지 안동 부사로 있었다.30) 이처럼 <안동선생안> 뿐만
아니라 다른 읍지에 실린 선생안에도 김륵의 이름은 빠져있다.31)
하지만 김륵이 안동 부사로 재직한 것은 사실이었다. 김륵이 선조에게 올
린 장계에는 “신이 일전에 안동 부사에 제수되었다가 곧 체직되었습니다. 그
동안에 안집사의 임무를 버려둔 지가 벌써 수삼 개월이나 지났습니다.”32)고
하였다. 그러면서 “이에 비로소 이전의 직임이 그대로 부여되었음을 알았습
니다.”고 하였다. 본인이 올린 이 장계를 통해 김륵은 안집사를 맡았다가 안
동 부사가 되었으며, 안동 부사에서 체직되면서 다시 안집사의 임무를 맡았
음을 알 수 있다.
또 이 문제와 관련하여 1592년 8월 24일, 의주 행궁에서 선조가 여러 신
하들을 인견할 때에 좌의정 윤두수의 발언도 주목된다. 윤두수는 이 자리에
서 안동이 적에게 함락되었다가 오래지 않아 회복했다는 소식을 보고하였다.
그러면서 윤두수는 “김륵이 그때 부사로 있었는데 신은 그의 인품을 모르지
만 큰일을 처리하기에는 합당하지 않다고 합니다.”는 의견을 올렸다. 윤두수
는 이 자리에서 안동 부사의 적임자로 우복룡을 거론하였고 선조의 재가를
받았다.33)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면, 김륵은 1592년 4월 말에서 5월 초에 안집사가
되었다가 8월에 안동 부사에 임명되었다. 김륵이 안집사로 임명된 배경에는
영주 출신이자 퇴계 문인이라는 점이 중요하였다. 이후 김륵은 9월 말경에
안동 부사에서 체직되면서 다시 안집사의 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이듬해인
1593년 4월 말에 김성일이 사망하면서 경상우도 관찰사로 옮겨 갔다.
30) 허흥식, 「안동선생안」, 대구사학 19, 1981, 240쪽. 이 선생안은 경북 안동 太師廟
소장본으로, 안동 부사들이 부임한 年月日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31) 永嘉志 권6, 任官(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본).
32) 김륵, 백암선생문집 권5, 狀啓, 又(세 번째 장계). “臣於前日, 恩除安東府使, 而旋又
恩遞, 其間廢置安集之任, 已過數三月, 賊中消息, 或未詳知.”
33) 선조실록 권29, 선조 25년 8월 24일(신해).
임진왜란 초기 경상좌도 안집사 김륵의 역할과 활동(정해은)
369
Ⅲ. 전쟁 초기 안집사 김륵의 활동
1. 가장 임명과 군사 활동
1592년 4월 27일 무렵 안집사 김륵이 한양에서부터 샛길을 이용해 처음
도착한 곳은 풍기를 거쳐 고향 영주였다. 당시 경상 좌도는 외부와 연락이
거의 끊기다시피 하였다. 김륵이 4월 29일, 5월 4일, 5월 29일에 작성해 올
린 보고서들도 조정에 전달되지 못하였다.
4월 29일자 장계는 충청도 제천에서, 5월 4일자 장계는 경기 양근에서, 5
월 29일자는 강원도 통천에서 막혀 되돌아 왔다.34) 외부에 소식을 전달하지
못하던 경상좌도의 상황은 대구부 사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1592년 6월
20일에서야 대구부 관인 裵介壽 등 두 사람이 대구 부사의 치계를 가지고
도순찰사 김수를 찾아 왔다. 전쟁이 발발한 지 석 달 만에 좌도 사람이 김수
에게 치계를 가지고 온 것이다.35) 이처럼 한 동안 경상 좌도는 군정이나 賊
情조차 국왕은 물론 상부 지휘부에게조차 보고하지 못한 채 고립 상태나 다
름없었다.
김륵이 좌도에 도착하자마자 시행한 일은 선조의 宣諭文을 베껴서 각 고
을들에 배포해 창의를 도모한 것이었다. 이어서 김륵은 5월 중순 이후로 안
집사로서 민생을 안정시키고 지역 사정을 파악하기 위해 지역을 순행하였다.
당시 좌도 감사가 체직된 상태였으므로 김륵이 임시로 좌도의 일을 주관하
였다. 김륵은 장계에서 본인이 관찰사의 일을 하기도 하고, 主將, 수령, 里正
등 상황에 따라 업무를 수행하면서 관부를 순시하고 크고 작은 사무를 처리
하였다고 보고하였다.
김륵이 좌도로 내려온 초기에 활동 반경은 주로 영주와 안동 지역이었다.
34) 김륵, 백암선생문집 권5, 狀啓, 條陳慶尙道軍情賊勢狀啓<安集使時 壬辰>, 又(첫
번째).
35) 이탁영, 정만록 건, 1592년 6월 20일.
제28호(2015)
370
김륵이 지역들을 순행하면서 역점을 둔 사항은 지역의 책임자인 수령의 업
무 독려와 假將의 임명이었다. 민심 안정과 지역 재건을 위해 수령의 역할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1592년 4월부터 7월 사이에 경상좌도 37개 고을 수령
들의 재직 상황을 보면 재직이 21명, 도망 10명, 전사 3명, 포로 1명, 미상
2명이었다. 수령이 도망간 고을은 안동⋅예천⋅영천⋅풍기⋅청도⋅의성⋅현
풍⋅의흥⋅비안⋅영산이었다.36)
김륵이 지역을 순시하기 시작하자 영주 인근 수령들부터 관아로 나와서
일을 보기 시작하였다. 예컨대, 김륵이 안집사가 되어 도착한 영주의 경우
군수 이한이 업무를 보기 시작했으며, 영주와 가까운 봉화도 현감 황시가 업
무를 수행하였다.37) 김륵은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수령이 비워있는 고을의
경우 해당 고을에서 학식이 있거나 관인들을 뽑아 假將으로 삼았다.38) 안동
의 경우 전 도사 安霽와 전 검열 金涌, 풍기는 교서 박사 黃曙, 의성은 훈련
권지 權希舜, 예천은 전 현감 李愈, 의흥은 품관 朴淵, 군위는 품관 張士珍
등을 가장으로 임명하여 해당 관서의 사무를 담당하게 하고 군사들을 모집
하게 하였다.39) 종전 후 1603년(선조 36) 임진왜란기 경상도 사적을 정리한
申仡은 김륵의 활동에 대해 “이때 각 고을에 대부분 수령이 없다는 것을 안
집사가 듣고서 이같이 군무를 맡긴 것이다.”40)고 평가하였다.
김륵은 도망한 수령들에게 복귀하여 업무를 수행하라고 독려하였다. 김륵
은 안동에 도착하자 각 읍에 명령을 전달하여 도피한 수령들은 돌아와 직무
를 보게 하였다.41) 김륵은 의성 현령 이여온이 1592년 6월 상순경에 되돌
36) 정해은, 「임진왜란 초기 경상도 수령의 동향과 의병 지원 활동」, 조선시대사학보
70, 2014, 145~146쪽.
37) 이여빈, 용사록 1592년 4월 27일.
38) 이여빈, 용사록 1592년. “其餘醴泉豐基安東義城義興等, 皆棄城遠遁, 故安集使, 令
其各邑所居有識品官人, 爲假將以領之.”
39) 김륵, 백암선생문집 권5, 狀啓, 條陳慶尙道軍情賊勢狀啓<安集使時 壬辰>; 이탁영, 정만록 곤, 장계(1592년 7월 25일). 정만록에는 예천 가장으로 前縣監 李勳을
임명했다고 하는데 李愈가 맞다.
40) 申仡, 亂蹟彙撰 1592년 5월 29일.(신해진 역주, 역락, 2010)
41) 조경남, 난중잡록 1592년 7월 9일.
임진왜란 초기 경상좌도 안집사 김륵의 역할과 활동(정해은)
371
아오자 전쟁이 평정된 후에 처분하되 먼저 공을 세워 스스로 속죄하도록 조
치하였다.42) 영천 군수 김윤국도 영천성 전투 직전인 1592년 7월 21일에
복귀하자 업무에 복귀시켰다. 당시 김륵은 국왕에게 김윤국을 법에 따라 처
벌해야 하나 고을에 亂民들이 많아 일단 부임하게 했으나 조정의 처분을 다
시 기다리고 있다고 보고하였다.43)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 앞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김륵의
활동은 대구나 영천 등지를 넘어서지 못했다는 점이다. 일본군은 4월 21일에
경주를 공격한 후 4월 23일에 영천에 들어왔다.44) 영천은 동으로는 안강을
경유해 경주로, 남으로는 경산을 지나 청도와 대구로, 서쪽으로는 신녕을 통
해 상주로 갈 수 있고 길을 꺾어 의흥·의성을 통과해 안동으로 갈 수 있었다.
영천을 점령한 일본군은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신녕과 안동에 주둔한 일
본군과 교통하면서 주변 지역을 공격하였다. 6월 말쯤 일본군들은 경주⋅영
천⋅신녕⋅의흥⋅군위⋅의성⋅안동 일대를 횡행하였다.45) 김수가 올린 장계
에도 6월 무렵 일본군이 많이 있는 곳으로 부산포⋅동래⋅경주⋅밀양⋅청도
⋅대구⋅영천⋅영산⋅창녕⋅현풍 등을 지목하였다.46)
김륵은 이런 상황에 대해 7월 무렵 아직도 밀양⋅金山⋅양산⋅울산⋅동래
⋅인동⋅기장⋅언양⋅현풍⋅비안⋅영산⋅창녕의 소식이 정확하지 않다고 보
고하였다. 그나마 영천을 포함해 경주⋅영일⋅장기 등지와 간혹 문서를 주고
받을 뿐이라고 하였다.47) 상황이 이렇다보니 김륵의 활동과 영향력은 좌도
전체에 미치지 못하고 제한적이었다. 이것은 좌도에 대한 김성일의 조치를
42) 김륵, 백암선생문집 권5, 狀啓, 又(첫 번째); 이탁영, 정만록 곤, 장계(1592년
7월 25일).
43) 김륵, 백암선생문집 권5, 장계, 又(첫 번째); 신흘, 난적휘찬 1592년 7월 27일.
44) 鄭世雅, 湖叟實紀 권2, 연보, 20년 임진<선생 58세>. 이와 달리 李說은 4월 20일
에 적병이 영천군 북송정에 이르렀다고 썼다.(이열, 용사일기 1592년 4월 20일(
愛日堂實紀 卷上))
45) 선조실록 권27, 선조 25년 6월 28일(병진).
46) 이탁영, 정만록 곤, 장계.(역주 정만록 275쪽)
47) 김륵, 백암선생문집 권5, 狀啓, 又(첫 번째).
제28호(2015)
372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592년 6월 무렵 김성일은 경상 좌도의 상황이 악화
되자 “강을 마주한 세 읍을 어찌 버릴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우도와 접
해있는 영산⋅창녕⋅현풍에 가장과 의병 별장 및 소모관 등을 임명해 창의
를 촉구하였다.48)
또 영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정세아와 조희익⋅곽회근 등 60여 인도 김륵
을 찾지 않고 김성일을 찾았다. 이들은 김성일이 초유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장문의 글을 올렸다. 박진을 비롯한 장수들이 의병을 억누르는 상황과
횡포를 호소하면서 좌도에서는 아뢸 곳이 없으므로 김성일의 지휘를 듣고자
한다는 내용이었다.49)
이런 상황에서 김륵은 인력과 물자가 건재한 지역을 중심으로 각종 군사
활동을 전개하였다.50) 청송⋅진보⋅영덕⋅청하⋅흥해 등 적침을 받지 않은
지역의 수령들에게 경주에 주둔한 일본군을 격퇴하는 데에 힘을 합치라고 명
하였다. 또 용궁 현감 우복룡과 前 판관 조붕에게 용궁과 예천의 군사를 지
휘하여 多仁 등지의 적을 공격하게 하였다. 예안 현감 신지제와 무과 급제
權詮에게는 예안과 안동의 군사를 거느리고 의성 이하의 적들을 공격하게 하
였다. 봉화⋅영주⋅풍기 등의 군사들에게는 다인과 의성 지방의 적을 소탕하
게 하였다.
김륵은 안동 지역의 수복에도 힘을 보태었다. 김륵이 안동을 중시한 이유
는 “인구가 많고 지역도 넓으며 성곽도 있어서 죽령으로 통하는 첫 길목으
로서 보장이 되어야 할 곳”이기 때문이었다. 의성과 함께 안동을 굳게 지켜
주변 지역과 합력하면 일본군이 쉽게 서쪽으로 공략해 들어가지 못할 것으
로 판단하였다. 따라서 김륵이 군사 활동을 펼친 곳도 대체로 안동의 주변
지역들이었다.
48) 李魯, 역주 龍蛇日記, 부산대 한일문화연구소, 1960, 116~117쪽. 이 일기에는
날짜 기록이 없으나, 이 기록에 이어서 김수가 삼도근왕군을 이끌고 상경했다가 돌
아왔다는 기록이 있어 6월로 판단하였다.
49) 이로, 용사일기, 부산대학교 한일문화연구소, 1960, 148~149쪽.
50) 김륵, 백암선생문집 권5, 장계, 條陳慶尙道軍情賊勢狀啓<安集使時 壬辰>.
임진왜란 초기 경상좌도 안집사 김륵의 역할과 활동(정해은)
373
전쟁 초기 일본군은 조령을 넘어가면서 서울 함락에 급급하여 주변 읍들
을 난입하지 않았으나 5월 중순 이후로 용궁 및 예천을 침략하였다. 이에 김
륵이 주변 읍의 군사들을 조발해 전투에 나섰다.51) 6월 10일에 용궁현 접경
을 침범한 일본군들을 여러 읍들의 병력과 힘을 합쳐 격퇴하였다. 하지만 얼
마 후에 재침입한 일본군에게 우복룡과 신지제가 패하고 말았다. 김륵은 흩
어진 군사들을 다시 모으기 위해 직접 산으로 다니면서 사람들을 산에서 나
오게 하고, 관아 앞에 진을 쳐서 군사들의 사기를 진작시켰다. 그 결과 예안
의 적은 7월 9일에, 안동의 적은 7월 18일에 물러나 풍산현 근처로 나갔다
고 보고하였다.52)
이후 김륵은 안동을 지키기 위해 좌병사 박진을 주둔시켰다.53) 박진이 안
동에 들어온 시점은 7월 23일 이후로 판단된다. 향병일기에는 1592년 7
월 19일에 좌병사 박진이 들어왔다고 하나, 또 다른 기록에서는 7월 21일에
풍산의 왜적이 다 나갔고, 좌병사 박진이 군대를 이끌고 왔다는 헛소문이 퍼
졌다고 한다.54) 박진은 청송에 있다가 왜적이 풍산으로 가자 안동으로 와서
안집사 김륵과 회동한 이후에 안집사로부터 안동에 진을 친 후 여러 지역을
제어하라는 명을 받자 안동에 주둔하였다.55) 김륵 또한 8월에 안동 부사로
부임하였다.
안집사 김륵의 활동이 가져온 결과는 6월 도순찰사 김수의 보고에 잘 나
타나 있다. 김수는 “김륵이 지금 안동에서 예안⋅봉화⋅영주⋅풍기⋅예천 등
의 군졸들을 소집하여 그 수가 전일의 배나 되고, 사족들로 발분하여 종군을
자원했다 합니다. 이로 보아 안동 등 6군은 완전한 듯 하나 군사 수는 많지
않을 것입니다.”56)고 보고하였다.
51) 이여빈, 龍蛇錄 1592년(4월 27일부터 6월 9일까지의 기록).
52) 김륵, 백암선생문집 권5, 장계, 條陳慶尙道軍情賊勢狀啓<安集使時 壬辰>.
53) 김진수, 「임진왜란기 박진의 군사활동과 평가」, 한국사학보 60, 2015, 256쪽. 참
고로 1592년 11월 무렵 안동 부사는 김륵이 아니라 우복룡이었다.
54) 필자미상, 倭變日記 1592년 7월 21일. “惇敍來見言, 豊山倭賊盡出, 左兵使朴晉領
軍行, 復聞虛傳也.”
55) 김륵, 백암선생문집 권5, 장계. 條陳慶尙道軍情賊勢狀啓<安集使時 壬辰>.
제28호(2015)
374
요컨대, 안집사 김륵은 4월말에 경상좌도로 와서 국왕의 명을 민간에게
전하면서 군사 활동을 도모하였다. 민생 안정과 군사 모집을 위해 영주와 안
동을 중심으로 인근 지역들을 돌아다니면서 수령이 부재한 지역에 수성장을
세워 군무를 주관하게 하였다. 김륵의 영향력은 대구 및 영천을 포함해 아래
지역에 미치지 못하였지만, 경상 좌도는 초기 지휘부의 공백을 딛고 전열을
가다듬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여기에 1592년 5월에 박진이 좌병사로
부임하면서 더 힘을 얻게 되었다.
2. 의병 지원의 활동과 한계
안집사 김륵의 활동에서 주목되는 활동은 창의를 독려하고 의병과 협력한
일이다. 좌도에 도착한 김륵은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招募文을 지어 도내에
배포하였다. 김륵의 초모문은 전쟁 이후 외부와 고립되어 있던 경상 좌도의
사족과 민들에게 조정의 목소리를 처음 전달했다는 의미가 있다.
김륵은 초모문에서 사족들의 창의를 강조하였다. 그는 “진실로 충성스럽고
의로운 선비가 있어 일거에 창의한다면 멀고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들이 모
두 각오를 새롭게 하여 군대로 달려올 것이다.”고 하면서 몸을 숨기지 말고
분발하여 어가를 도성으로 돌아오게 하고 백성들을 정착시켜 살게 하자고
호소하였다.57)
김륵은 창의를 유도하는 격문을 우도까지 전달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길이
막혀 어려움을 겪었다. 김륵은 장계에서 “우도 열읍들이 혹 보전되었는지 여
부를 대략이라도 파악할 수 없어서 아무리 격문을 초안해 놓고도 전달할 길
이 없으니 일의 난처함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58)고 하였다. 실제로 김륵
의 초모문은 9월 1일에서야 함양에서 의병 유사로 활동하고 있는 鄭慶雲
(1556~?)에게 전달되었다.59) 비록 도착한 시기는 늦었지만 김륵의 활동을
56) 이탁영, 정만록 곤, 장계(1592년 6월).
57) 김륵, 백암선생문집 권6, 雜著, 招募文<壬辰>.
58) 김륵, 백암선생문집 권5, 장계, 條陳慶尙道軍情賊勢狀啓<安集使時 壬辰>.
임진왜란 초기 경상좌도 안집사 김륵의 역할과 활동(정해은)
375
엿볼 수 있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선조수정실록에는 “안집사 김륵이 김성일과 서로 호응하여 함께 격문으
로 효유하니, 향리에 있는 사대부들이 비로소 곳곳에서 군사를 모았다.”60)고
하였다. 실록에는 “모두 군대를 형성하지 못하고 그쳤다.”고 낮게 평가했지
만, 김륵의 초모문은 지역에서 군사를 모으고 의병을 규합하는 역할을 하였
다. 예컨대, “안집사 김륵이 또 통문을 내어 말이 간절하였고, 영주ㆍ풍기의
선비 김대현ㆍ곽수지 등과 향병을 소집하였다.”61)고 하였다. 김륵은 승려 原
悟도 만나 승군 모집을 독려하였다.
무엇보다도 김륵은 예안과 안동 일대의 의병 조직에 큰 힘을 보탠 것 같
다. 그것은 1592년 6월, 학봉 김성일이 안동의 조카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김성일은 “그곳에서는 의병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는데,
안집사가 불러 모으고 있지 않는가? 열읍에서 도망하여 숨어만 있는 것은
적에게 항복하거나 붙는 것과 같은 것으로, 그러다가 온 나라가 마침내 오랑
캐가 되고 말 것이니 어쩌면 그리도 생각이 얕단 말인가?”62)고 썼다. 이 편
지에서 안집사 김륵이 의병 조직에 힘을 쏟고 있는 상황을 읽을 수 있다.
김성일의 편지 내용대로 1592년 6월초에 김륵은 군사를 모집하고 창의를
독려하기 위해 예안 현감 신지제를 찾았다.63) 당시 신지제는 “군사 모으는
한 가지 일은 도모할 길이 없습니다.”고 하면서 병마절도사가 오기로 했는데
군관 2인만 있다고 탄식하였다.64) 현감 신지제는 김륵이 도착하자 곧 원로
와 선비들을 불러 군사를 일으킬 것을 논의했으나 소집할 만한 군정이 없자,
각자 마을의 군정을 점검하여 일본군을 막게 하였다.
그러다가 6월 11일 예안에서 金垓를 의병장으로 추대해 의병 활동에 들어
59) 정경운, 고대일록 1592년 9월 1일.
60) 선조수정실록 권26, 선조 25년 8월 1일(무자).
61) 조경남, 난중잡록 1592년 8월 27일. 細註에 “7월 사이의 일이다.”고 되어 있다.
62) 김성일, 학봉전집 권4, 書, 寄諸姪甥涌瀹澈柳復起柳仁榮<壬辰>; 김성일, 학봉전
집 부록 권1, 年譜, 1592년 6월.
63) 金垓, 鄕兵日記 1592년 6월 1일.(안동문화연구 창간호, 1986)
64) 申之悌, 梧峯先生別集 書, 答雪月丈書.
제28호(2015)
376
갔다. 다른 판본의 향병일기에도 “어가가 서쪽으로 파천하자 배용길⋅김용
⋅김륵 등이 의병을 모의하니 예안의 마을사람들이 의리를 떨쳐 일어났다
.”65)고 되어 있어 김륵이 예안 의병의 결성에 일정한 역할을 수행했음을 알
려준다.
그런데 김륵은 의병의 독자적인 활동에 대해서는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
다. 김륵은 군사를 모집하기 위해 각 읍리마다 급제출신⋅생원⋅진사⋅품관
중에 유식한 사람을 里將으로 임명한 후 유사를 시켜 각 리별로 유시를 전
하여 소집시켰다. 만일 이 명을 따르지 않은 이는 군령으로 다스리겠다는 의
지를 내보이자 이장으로 임명된 사람들이 모였으며, 元軍과 공사천들도 모였
다. 김륵은 이들 중에서 활을 잘 쏘고 용맹하고 건장한 사람을 뽑아 대오를
편성해 출전시켰다. 그 다음의 등급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수성이나 복병, 봉
족으로 정하였다.66)
김륵이 장수와 군사를 모으기 위해 사용한 이 방법은 읍리 단위로 책임자
를 선정하여 흩어진 사람들을 모으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김륵은 “이전에 급
히 군병을 모으기 위해 각 읍리마다 이장과 유사를 정해 관군과 향병을 모
두 함께 모집하여 한곳에 모아놓기는 했으나 별도로 명목을 정하지 않았습
니다.”67)고 하였다. 이장과 유사의 주도로 관군과 향병을 모았으나 관군 또
는 향병 그 어느 쪽으로 명명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6월에 용궁 전투에서 패한 후에는 이러한 태도에 얼마간의 변화를
보여주었다. 김륵은 다시 군사들을 수습했는데, 원래 군사 이외에 특별히 향
65) 김해, 향병일기 1592년 4월 28일.(鄕兵日記⋅梅園日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료총서 제43집). “御駕西狩, 裴龍吉金涌金玏等謀擧義兵, 禮安鄕人奮義, 倭入安東,
倭入禮安, 安東倭出陣豊山.” 이 판본은 안동문화연구에 실린 일기보다 선본으로
평가받고 있다.(신해진, 「현전 향병일기의 선본확정과 그 편찬의 경위 및 시기」, 영남학 25, 2014, 349~350쪽) 그런데 이 판본도 날짜에 오류가 있다. 예컨대
류종개의 활동이 1593년에 기록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따라서 날짜와 사건을
맞춰보면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 논문에서는 두 판본을 비교하면서 이용했다.
66) 이탁영, 정만록 곤, 장계(1592년 7월 25일).
67) 김륵, 栢巖先生文集 권5, 狀啓, 又(두번째).
임진왜란 초기 경상좌도 안집사 김륵의 역할과 활동(정해은)
377
병을 더 모아 고을 사람 중 유식하고 재간 있는 자를 장수로 삼으면서 김해
의 예를 들었다. 김륵은 “안동의 승문원 권지 김해 등이 각각 그 고을의 양
반과 노복을 거느리고 대오를 나누어 함께 약속하여 관군과 협력하기로 했
습니다.”68)고 보고하였다. 곧 이장과 유사의 주도로 군사를 모으다가, 용궁
전투 이후 군사들이 다시 흩어지자 의병장을 세워 군사를 거느리게 한 것이
다. 그럼에도 이때에도 의병장에게 관군과의 협력을 명시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김륵의 소모 활동은 우도의 김성일에 비해 제한이
있었다고 보인다. 경상 좌도에 해당하는 인동에 거주한 張顯光(1554∼1637)
은 4월 20일에 피난에 나섰다가 7월 보름이 지나 처가인 팔거 도촌에 와서
야 곽재우⋅정인홍⋅김면의 창의 소식을 접했다. 그러면서 초유사 김성일에
대해 “우도에 나아와 충의를 떨치고 인심을 격려시키며 의병을 권장하여 분
기하게 하니 그의 공로가 매우 컸다.”69)고 하면서 명신이라 평하였다. 하지
만 정작 좌도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륵에 대한 언급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끝으로, 김륵을 추모하는 여러 글에서 김륵의 공으로 높이는 일이 1592년
7월 하순에 의병장 柳宗介(1558~1592)를 보내 小川의 적을 물리치고, 골적
령 방면으로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격퇴한 일이다. 일본 加藤淸正의 부대 중
일부가 강원도에서 남진하면서 울진으로부터 안동 속현[任內]인 소천으로
침공해 오고, 한 갈래는 영월에서 骨赤嶺을 넘어 침입해왔다. 그러자 의병장
류종개가 안집사와 절도사에게 가까운 고을의 정병을 보내 의병과 협력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때 김륵이 의병장 류종개를 보내 적을 차단하고, 골적령
방면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격퇴했다는 것이다.70) 이 활동은 본고에서 인용
한 자료 이외에 아직 다른 자료에서 찾지 못했지만, 김륵이 의병과 연합하여
군사 활동을 활발히 수행했다는 점을 짐작하게 한다.
한편, 1592년 10월 무렵 김륵이 안집사의 직임을 다시 맡았을 때에는 경
상 좌도의 상황이 달라져 있었다. 관찰사 한효순과 좌병사 박진의 활약 때문
68) 김륵, 栢巖先生文集 권5, 狀啓, 又(두번째).
69) 장현광, 용사일기 1592년 7월 15일 이후.(김사엽전집 13, 256~257쪽)
70) 김륵, 백암선생문집 부록 하, 道內儒生疏; 附錄補, 諡狀.
제28호(2015)
378
이었다. 특히 좌병사 박진의 군사 활동이 활발하였다. 그래서인지 김륵이 다
시 안집사의 임무를 맡았을 때에는 군량과 기민 구휼에 힘을 쏟았다. 김륵은
“군량과 기민구휼의 일까지 겸임하게 되었다.”71)고 했으나 자료에서 이 무
렵 김륵의 군사 활동을 찾기 어렵다.
그 대신에 김륵은 다시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군량과 군기 확보에 공을 더
들였다. 지역을 순시하는 동안 군병은 성균관 권지 김신국, 군량은 군수 권두
문, 군기는 진사 권계옥에서 맡기고 본인은 열읍의 순행에 나섰다. 김륵은 경
주⋅영천⋅신령⋅의흥⋅예천⋅의성⋅하양⋅언양⋅동래⋅양산⋅청도⋅밀양⋅
창녕⋅현풍⋅영산⋅대구⋅울산⋅기장⋅경산⋅군위⋅비안⋅용궁 등지를 돌아
다니면서 군량 확보에 나섰다. 또 한효순과도 함께 민간에서 곡식을 징수하
여 군량을 마련하는 일을 수행하였다.
이와 함께 김륵은 기민 구휼에도 힘썼다. 1593년 봄에는 다섯 차례나 지
역들을 돌면서 진제를 실시하였다. 김륵은 경주에 보관된 곡식 3만여 석 중
곡식을 일부 덜어내어 구휼하였다. 풍기⋅영주⋅봉화 등에 賑濟場을 설치하
여 죽을 끊여 하루 두 차례 제공하였다. 1593년 4월에는 기민 구제와 곡식
종자를 마련하기 위해 선조에게 조정에서 전라도의 감사와 병마절도사에게
통문하여 관곡 운반을 조속히 시행해줄 것을 요청하였다.72)
이상에서 검토한 대로 김륵은 안집사로서 민간의 창의를 이끌어내었다. 무
엇보다도 예안과 안동 일대의 의병 조직에 힘을 보탰으며 의병과 관군의 연
합을 주도하였다. 하지만 김륵의 소모 활동에는 한계가 있었다고 여겨진다.
김륵이 의병의 독자적인 활동보다는 관군과 연합을 더 중시했기 때문이었다.
또 앞서도 지적했듯이 김륵이 활동 반경이 영주에서부터 안동까지의 지역이
중심이 되면서 영향력을 널리 미치지 못한 것도 원인이었다고 본다. 그리고
안동 부사에서 체직한 후 다시 안집사를 맡았을 때에는 군사 활동보다는 군
량 확보나 기민 구제에 더 힘을 쏟았다. 이때 도내에서 관찰사 한효순과 좌
71) 김륵, 백암선생문집 부록 하, 道內儒生疏; 附錄補, 諡狀.
72) 김륵, 백암선생문집 권5, 장계, 又(세번째); 김륵, 백암선생문집 續集, 啓辭, 請賑
飢播種啓<癸巳四月, 安集使時>.
임진왜란 초기 경상좌도 안집사 김륵의 역할과 활동(정해은)
379
병사 박진이 주도적으로 군사 활동을 수행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Ⅳ. 안집사 김륵에 대한 평가
김륵은 본관이 예안이며, 자가 希玉, 호가 栢巖이다. 김륵은 영주군 북쪽
의 백암리에서 태어났는데 백암이라는 호는 이를 딴 것이다. 아버지는 생원
金士明이고,73) 어머니는 창원 황씨다. 아주 어려서 백부 김사문의 후사로 들
어갔다. 1576년(선조 9) 문과에 급제한 후에 승문원 권지부정자를 시작으로
관직에 첫 발을 내딛었다.
김륵은 <표 1>에서 보듯이 청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종2품직까지 올랐다.
주로 임진왜란 및 그 이후에 벼슬이 올라 대사헌⋅대사간⋅참판⋅대사성 등
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관직 생활이 순탄하지 않아 여러 번 사직과 체직 또
는 파직을 거듭하였다. 임진왜란 직전에도 형조 참의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
였다.
김륵에 대한 평가에서 인상 깊은 것은 김륭이 순찰사 김수에게 올린 글이
다. 김륭은 1592년 8월에 김륵이 안동 부사에 임명되자 글을 올려 김륵에게
계속 안집사의 직책을 맡게 하여 지역 민심을 안정시켜야 한다고 건의하였
다. 김륭은 “뜻하지 않게 지금 갑자기 안동으로 내려가라고 명하니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황망하여 마치 아랫사람이 그 두목을 잃은 듯 하고, 자제들이
그 부형을 잃은 듯합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어린아이와 여자들까지 안집
사를 잃었으니 누가 우리의 거처와 우리의 읍과 우리 도를 편안히 지켜주는
임무를 감당할 수 있겠느냐면서 탄식하고 있다고 하였다.74)
앞서 언급한 대로 김륭은 영주 출신의 학자로 김륵과 함께 朴承任의 문하
에 있었으며 퇴계에게 나아가 배웠다. 김륭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격문을
73) 국조인물고 에는 김사명이 進士로 나와 있다.(國朝人物考 續考 3, 卿宰, 金玏)
74) 金隆, 勿巖先生文集 권2, 書, 上方伯<金夢村睟>書.
제28호(2015)
380
지어 창의를 호소하였다.75) 김륭과 김륵의 관계를 감안하더라도, 마치 김성
일의 사례처럼 김륵을 계속 안집사로 남게 해달라는 청원은 김륵의 평가에
서 눈여겨볼 만하다.
연도 나이 경력 비고
1540(중종 35) - 영주 북백암리 탄생 백부 김사문 양자
1555(명종 10) 16 인동 장씨와 혼인
1557(명종 12) 18 퇴계 이황 문하에서 수업
1564(명종 19) 25 생원시 합격
1576(선조 9) 37 문과급제, 승문원 권지부정자
1579(선조 12) 40 예조좌랑
1583(선조 16) 44 부수찬
1590(선조 23) 51 光國原從功臣
1591(선조 24) 52 승지, 형조참의
1592(선조 25) 53 4월 안집사, 9월 안동 부사 선조실록:8월 안동부사
1593(선조 26) 54
5월 경상우도관찰사, 대사
간, 대사성
1594(선조 27) 55 대사헌, 이조참판, 부제학
1595(선조 28) 56 대사간, 체찰부사
1598(선조 31) 59 대사간, 부제학
1599(선조 32) 60 예조참판
1600(선조 33) 61 형조참판
1603(선조 36) 64 대사성
1604(선조 37) 65 안동부사
1605(선조 3) 66 선무원종공신 녹훈
1608(선조 41) 69 대사성
1610(광해 2) 71 대사헌
1616(광해 8) 77 향리에서 졸
1653(효종 4) - 이조판서 증직
<표 55> 백암 김륵의 주요 경력 (근거자료: 백암선생문집 연표)
75) 이익, 성호선생전집 권68, 傳, 勿巖金先生傳.
종전 후 김륵에 대한 기억도 안집사에 집중되어 있다. 1603년(선조 36)에
임진왜란 사적을 정리한 신흘은 “안집사 김륵이 경상 좌도에 와서 머물며
교지를 널리 알리는 포유문을 지어서 안동 등 몇몇 곳을 수습하고, 약간의
군사로 복병을 두어 왜적의 통로를 차단하는 방책을 마련하자 이때부터 민
간이 비로소 조정의 호령을 듣기 시작하였다.”76)고 평가하였다. 류성룡도 신
흘과 유사한 평가를 내렸다.
당시 경상도 관찰사 김수가 우도에 있었는데 적병이 중로를 가로막고 있
어 좌도와 통신이 되지 않았다. 수령들이 모두 관직을 버린 채 달아나 버려
민심이 더 흩어졌다. 조정에서 김륵이 영주사람으로 그곳 상황을 잘 알고 있
어 안집할 수 있다고 여겨 그를 파견했다. 김륵이 당도하자 좌도 백성들이
비로소 조정의 令을 듣고서 조금씩 다시 모여 들였다. (징비록 1592년 4
월 29일)
성호 이익도 김륭에 대한 전기에서 “당시 안집사 김륵 공이 매우 알맞게
조치하여 민심이 조금 안정되었다.”77)고 적었다. 19세기 중반에 편찬된 梓
鄕誌(순흥)에도 김륵에 대해 “임진왜란에는 의병을 일으켰고, 1593년에 경
상도 안집사가 되어 민들을 깨치고 격려하니 멀고 가까운 지역에서 감동하
였다.”78)고 하였다.
또 서인 계열의 인물들에게 영향을 받은 李肯翊(1736∼1806)은 연려실
기술에서 “김성일은 영남에 이르자 도내에 널리 격문을 발송해서 타일러
깨우치고, 조정에서 또 영주 사람 김륵을 경상좌도 안집사로 삼아 임금의 전
지를 가지고 본도에 와서 멀고 가까운 곳의 모든 충성스럽고 의기 있는 선
비들에게 두루 諭示하게 하였다.”79)고 기록하였다. 이긍익이 역사를 서술하
는 방식이 不偏不黨과 述而不作이기 때문에 안집사 활동에 대한 평은 없지
76) 신흘, 난적휘찬 1592년 5월 3일.
77) 이익, 성호선생전집 권68, 傳, 勿巖金先生傳.
78) 梓鄕誌(順興邑誌), 名賢.
79) 李肯翊, 燃藜室記述 권16, 선조조고사본말, 壬辰義兵.
제28호(2015)
382
만 활동을 기록한 것 자체가 안집사의 활동이 후대까지 기억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이러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안집사 김륵에 대한 이야기
는 민간에 많이 유포된 것 같지 않다. 시기는 알 수 없지만 경상도 유생들이
올린 상소문에는 “元帥가 그의 공을 아뢰지 않아 조정에서는 그 실상을 알
지 못하여 마침내 세상에서 드물게 보는 공적이 장차 없어지게 되었으니, 영
남사람들이 모두 분통해하고 가슴 아파하는 것이 이 때문입니다.”80)고 하였
다. 그러면서 우도의 김성일과 좌도의 김륵의 공로는 한 도에 그칠 것이 아
니라 나라 전체의 공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김륵은 1653년(효종 4)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그리고 1788년(정조 12)
에 ‘敏節’이라는 시호를 받았다.81) 이미 숙종 연간에 김륵에게 시호를 내려
야 한다는 논의가 한 차례 있었다. 이 논의를 주도한 사람은 1693년(숙종
19) 이조 판서 李玄逸과 예조 판서 柳命賢이었다. 당시 정국은 1689년 기사
환국으로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집권한 시절이었다. 이현일은 이황-김성일
-장흥효로 이어지는 영남 학통의 계승자로 ‘己巳山林’으로 조정에 들어왔다.
이현일은 “임진왜란 때에는 영남 안집사의 명을 받아 흩어지거나 도망한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의병을 격려하여 영남 일도가 유리 분산하는 염려가
없게 하였으니, 선조께서 하교하여 크게 칭찬하시기를 ‘백성이 안도하고 적
도가 넘보지 못한 것은 경의 힘이다.’고 하셨습니다.”고 하면서 시호를 내리
는 은전을 요청하였다. 류명현도 贈職에 따라 시호를 내려야 한다고 요청하
였다.82) 이 의견에 대해 비변사에서는 김륵의 품계가 생전에 정2품에 미치
지 못한다면서 반대하였다. 숙종은 비변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증시
하게 했다.83) 하지만 숙종의 명에도 불구하고 증시는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후 1784년(정조 8) 후손 金一鍊이 김륵의 증시를 요청하였다. 이때 예
80) 김륵, 백암선생문집 부록 하, 道內儒生疏.
81) 정조실록 권25, 정조 12년 4월 6일(무술).
82) 비변사등록 숙종19년 11월 13일.
83) 비변사등록 숙종19년 11월 20일.
임진왜란 초기 경상좌도 안집사 김륵의 역할과 활동(정해은)
383
조에서 이미 숙종 대에 증시하라고 특별히 명을 내렸으니 이에 따라 증시하
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제출하였다. 정조는 예조의 건의를 받아들여 김륵
에게 증시할 것을 명하였다.84) 그 결과 1788년에 시호가 내려졌으며, 언제
인지 알 수 없으나 김일련도 효릉 참봉에 임명되었다.85) 김륵의 증시는 당
시 남인들이 소론 및 일부 노론과 時派를 형성해 정계에 진출해 있는 상황
과 연관이 있다고 판단된다.
이처럼 김륵이 수행한 안집사 활동은 지역의 인사나 남인 계열의 학자를
중심으로 현창되었다는 특징을 갖는다. 물론 이긍익의 기록에서 안집사의 활
동이 경상도를 넘어 기억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만 미진한 상황임을 부
인할 수 없다. 여기에는 김륵이 안집사 시절에 그 영향력을 경상 좌도 전체
에 미치지 못한 점이 크게 작용한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Ⅴ. 맺음말
이 논문은 임진왜란 초기 경상좌도 안집사 김륵의 활동을 검토한 글이다.
김륵은 1592년 4월 하순부터 1593년 4월까지 안집사로 활동하였다. 그 사
이 안동 부사를 잠시 역임하면서 1년여 동안 경상 좌도에서 안집사로서 활
동하였다.
안집사 김륵에 대해서는 그간 초유사 김성일에 비견하여 그 활동을 주목
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으나 구체적으로 연구된 적은 없었다. 그간 김륵의
활동이 주목받지 못하는 배경에는 몇 가지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
다도 임진왜란사가 의병을 중심으로 연구가 진행되었으며, 경상도의 경우 주
로 경상 우도의 의병 활동이 더 조명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연구 풍토에서
김륵이 좌도의 의병 운동을 지원한 정황이나 활동들이 뚜렷하지 않아 주목
84) 승정원일기 1565책, 정조 8년 8월 22일(을사).
85) 승정원일기 1748책, 정조 19년 7월 21일(경오).
제28호(2015)
384
을 받기 쉽지 않았다. 김성일의 활동 중에서 주목받은 주요 활동도 초유사로
서 무너진 관군을 대신하여 거의를 적극 지원한 부분이다.
임진왜란 초기 경상 좌도는 일본군의 침입을 가장 먼저 받은 지역이었다.
더구나 낙동강을 중심으로 좌도와 우도가 서로 연락이 긴밀하지 못한 상태
에서 한동안 고립 상태에 있었다. 여기에 군령과 민정을 통괄하는 지휘부의
부재까지 겹친 상태였다. 김수가 도순찰사를 맡았을 때에는 길이 막혀 명령
이 통하지 않은데다가 삼도 근왕군으로 출전하면서 도내에 부재한 상태였다.
더구나 좌도 관찰사 이성임이 부임하지 못하면서 지휘 상의 공백이 생겼고,
김성일은 경상 좌도로 왔다가 교체되어 우도로 되돌아갔으며, 9월초에서야
한효순이 부임한 것이었다.
이처럼 경상 좌도가 전쟁 발발 초기에 일본군의 침입으로 고통받고 있으
며 지휘부의 부재까지 겹치면서 큰 어려움에 직면해있었다. 이때 김륵이 안
집사로 파견되면서 경상 좌도는 건재한 고을을 중심으로 전열을 가다듬고
재정비에 들어갈 수 있었다. 김륵은 격문을 작성하여 거의를 촉구하고, 수령
이 없는 지역에 수성장을 임시로 배치해 지역 재건에 나섰다. 그리고 군사
모집을 수행하고 의병 활동을 지원하면서 관군을 중심으로 하여 일본군 격
퇴에 적극 나섰다.
1592년 5월 박진이 좌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부임하고 8월말 9월 초에 경
상좌도 관찰사 한효순이 부임하면서 안집사의 활동도 다소 소강기에 접어들
게 되었다. 10월 이후로 김륵은 군사 활동 보다는 군량 확보 및 진휼에 전
력하였다. 그리고 1593년 4월 김성일이 사망하자 경상우도 관찰사에 임명되
었다. 이로써 안집사로서의 활동을 마치게 되었다.
후대에 김륵에 대한 평가는 미진한 점이 있었다. 안집사로서 김륵의 활동
이 영주 및 안동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면서 경상 좌도 전체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안집사 김륵의 활동은 주로 지역의 인사나 학자들
을 중심으로 높게 평가되었다. 이 외에 당대나 후대에 안집사 김륵에 대한
영향력을 가름할 수 있는 자료들이 잘 발견되지 않는다. 이런 측면에서 안집
사 김륵에 대한 기억과 평가는 향후 더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김륵에 대한 연구는 임진왜란에 대한 기억과 평가라는 측면에서도 흥미로운
과제를 던져주고 있다.
※ 이 논문은 2015년 11월 9일에 투고 완료되어
2015년 11월 20일부터 12월 5일까지 심사위원이 심사하고,
2015년 12월 10일 편집위원회에서 게재 결정된 논문임.
참고문헌
栢巖先生文集(김준영 편집, 栢巖先生文集(國譯補訂版), 1999)
征蠻錄(征蠻錄, 의성문화원, 1987; 이호응 역주, 역주 정만록, 의성군,
2002)
孤臺日錄(역주 고대일록(상⋅하), 남명학연구원, 2009)
樂齋先生日記 (박영호 역, 국역 낙재선생일기, 이회문화사, 2008)
鶴峯全集(金誠一), 龍蛇錄(李汝馪), 再造藩邦志(申炅), 湖叟實紀(鄭世雅)
龍蛇日記(李說, 愛日堂實紀 卷上), 亂中雜錄(趙慶南), 懲毖錄(金誠一)
勿巖先生文集(金隆), 星湖先生文集(李瀷), 燃藜室記述(李肯翊)
국역 龍蛇日記(張顯光, 김사엽 번역, 김사엽전집 13, 박이정, 2004)
역주 亂蹟彙撰(申仡, 신해진 역주, 역락, 2010)
역주 龍蛇日記(李魯, 부산대 한일문화연구소, 1960)
鄕兵日記(金垓, 안동문화연구 창간호, 1986; 鄕兵日記⋅梅園日記, 국사편
찬위원회, 2000)
김태규·박대현 편역, 대구읍지(1767~1768년 편찬), 대구광역시, 1997
정진영, 「경상도 임란의병의 활동 배경과 의의」, 지역과 역사 18, 2005
이수건, 조선시대 지방행정사, 민음사, 1989
심승구, 「임진왜란기 군사지휘권의 추이와 성격」, 임진왜란과 권율장군, 전쟁
기념관, 1999
허흥식, 「안동선생안」, 대구사학 19, 1981
최효식, 임란기 경상좌도의 의병항쟁, 국학자료원, 2004
신해진, 「현전 향병일기의 선본 확정과 그 편찬의 경위 및 시기」, 영남학
25, 2014
정해은, 「임진왜란 초기 경상도 수령의 동향과 의병지원 활동」, 조선시대사학보
70, 2014
김진수, 「임진왜란기 박진의 군사활동과 평가」, 한국사학보 60, 2015
Abstract
Actions of Kim Reuk, who served as the Anjib-sa
magistrate in the Gyeongsang Jwa-do Province, in the
early years of the Imjin-year war with the Japanese
Chung, Hae-eun
Examined in this article are the actions of a local official named Kim
Reuk, who served in the capacity of a provincial Anjib-sa(安集使)
magistrate in the Left part of the Gyeongsang-do province, during the
early stages of the war that broke out by the invading Japanese forces
in 1592.
For a long time, studies of the Imjin Wae’ran war concentrated upon
examining the Gyeongsang Wu-do(the right part of the
Gyeongsang-do province) as well as renowned figure Kim Seong-il,
while not paying enough attention to the other part of Gyeongsang-do,
and especially Kim Reuk. In the early stages of the war, the
Gyeongsang Jwa-do province was the first to be invaded by the
Japanese forces, and remained isolated from the rest of the country
for quite some time. Also, leaders who should have led the troops and
cared for the distressed citizens were literally gone. That was the
situation Kim Reuk first faced, when he arrived at the region, assigned
as Anjib-sa.
He served in that capacity from April 1592 through April 1593, and
tried to stabilize the region as well as the lives of the people. H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