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8일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이 제자가 이 일들을 기록한 사람이다. 그의 증언은 참되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20-25 그때에 20 베드로가 돌아서서 보니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따라오고 있었다. 그 제자는 만찬 때에 예수님 가슴에 기대어 앉아 있다가, “주님, 주님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던 사람이다. 21 그 제자를 본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23 그래서 형제들 사이에 이 제자가 죽지 않으리라는 말이 퍼져 나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가 죽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고 말씀하신 것이다. 24 이 제자가 이 일들을 증언하고 또 기록한 사람이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 25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이 밖에도 많이 있다. 그래서 그것들을 낱낱이 기록하면, 온 세상이라도 그렇게 기록된 책들을 다 담아 내지 못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주님을 사랑하는 방법
오늘 복음을 대하면서 요한 사도는 주님의 사랑을 듬뿍 받은 것 같아 부럽습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을 나타내기를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표현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 받고 사랑하는 사람과 친해진다는 것은 누구든지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과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가장 큰 축복이며 가장 아름다운 것입니다. 나도 정말 세상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고 싶고 사람들을 사랑하고 싶으며, 사랑하는 사람들 속에 언제나 머물고 싶습니다. 그것도 뜨겁고 열정적으로 사랑받고 싶고, 그렇게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합니다. 이 나이에 무슨 주책없는 소리냐고 할지 모르지만 사랑은 나이와 관계없고, 친하고 싶은 감정은 나이에 비례해서 점점 커지는 것 같습니다. 꼭 시소와 같아서 육체적으로 쇠약해지면 정신적으로 사랑은 점점 커지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말씀을 적으며, 주님의 그 크신 사랑을 표현한 요한 사도는 이 말씀을 적을 때는 이미 70이 넘은 노인이었을 텐데도 이렇게 기쁨에 넘쳐 소년처럼, 청년처럼 사랑에 대해서 쓰고 있으니 말입니다.
요한 사도는 자신을 또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제자는 만찬 때에 예수님 가슴에 기대어 앉아 있던>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상상만 해도 그가 얼마나 주님의 사랑을 받았는지, 그리고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주님과 얼마나 친했는지 많은 제자들의 질투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도 요한 사도에 대해서 주님께 여쭈어 보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주님은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말고 무조건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복음을 대하는 나도 질투를 느낄 지경입니다.
우리도 주님을 따르고 주님의 사랑을 받으며, 주님과 친해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주님과 친해지고, 사랑하게 되는 방법에 대하여 요한 사도를 통해서 꾀 약은 방법으로 알아봅니다. 요한 묵시록에서 주님께 친해지는 방법을 아주 구체적이며, 재미있게 전하고 있습니다.
“나는 네가 한 일을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으련만!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 ‘나는 부자로서 풍족하여 모자람이 없다.’하고 네가 말하지만, 사실은 비참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것을 깨닫지 못한다. 내가 너에게 권한다. 나에게서 불로 정련된 금을 사서 부자가 되고, 흰옷을 사 입어 너의 수치스러운 알몸이 드러나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제대로 볼 수 있게 하여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나는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열성을 다하여 회개하여라.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 15-20)
우리도 주님을 정말 뜨겁고 열정적으로 사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미적지근하게 사랑하면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데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고, 구설수에 오를까봐 전전긍긍하는 사랑 방식은 잘못된 것인지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는 자신이 가증스럽기도 하답니다. 주님은 적극적으로 우리의 가슴에 대고 두드리십니다. “나다, 문을 열라, 그리고 너를 사랑하기 위해서 내 가슴에 기대어 살도록 너를 찾아서 왔단다. 자 어서 문을 열어라, 너와 먹고 마시기 위해서 내 살과 피를 가지고 너를 찾아왔단다.”
요한 사도는 주님과 친해지는 방법을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주님으로부터 불로 정련된 금을 사서 부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금을 뽑아내기 위해서 금광석을 아주 뜨거운 제련소의 불로 제련을 하고, 아주 정교한 세공사의 세공을 거쳐 정련된 금을 사라고 하십니다.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세상의 온갖 시련을 견디며, 죽기까지 견디며, 모든 시련을 달게 받으며, 자신을 갈고 닦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공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목숨까지 바치는 시련과 단련을 견뎌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주 비싼 대가를 주고, 적극적인 투자를 해서 주님의 정련된 금을 사야합니다. 경영학적으로 세상의 모든 전략과 전술을 총 동원해서 사랑의 부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늘나라에 보화를 많이 사 두어야 합니다. 아마 지금 내 하늘나라 창고는 텅텅 비어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 주님으로부터 흰옷을 사서 입으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깨끗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세상의 흰옷은 금방 더러워지게 마련입니다. 그렇게 얼룩지고 더러운 우리의 삶에서 깨끗해지는 방법은 주님의 은총으로 우리가 더러운 죄에서 벗어나 지고지순한 주님의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용서받고 주님과 화해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친해지기 위해서 우리는 언제나 주님의 용서를 청하여 받아서 현성용에서 보여주신 빛나는 흰옷을 주님으로부터 선사받아야 합니다. 지은 죄를 뉘우치며 용서를 청하여 받아서 새롭게 흰옷을 입어야 수치스러운 알몸을 감출 수 있습니다. 주님은 아주 비싼 옷을 선물하시려고 고해소에서 안달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얼룩지고 더러운 옷을 입기 위해서 줄을 서고, 목을 길게 빼고 차례를 기다리고 있으면서도 고해소를 가기 싫어한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흰옷은 언제나 보이지 않습니다.
세 번째 주님으로부터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제대로 볼 수 있게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안약은 통회의 눈물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을 슬퍼하면서 다시 돌아와 사랑하게 해달라고 흘리는 눈물입니다. 세상으로부터 눈멀고, 주님의 사랑에 눈을 떠서 주님을 바로 볼 수 있듯이 눈앞을 가로막고 있는 모든 것을 전부 깨끗이 씻어버리는 눈물입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찾지 못하고, 자신의 잘못을 바라보면서 쏟아내는 통회와 회한의 눈물입니다. 주님의 안약을 사서 눈에 넣어보셨습니까? 뿌옇게 내 눈을 가린 모든 것을 전부 씻어버리는 안약을 사서 사랑의 눈을 떠야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잘못한 모든 것을 뉘우치며 슬피 울어야 하겠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주님을 부인하고 슬피 울었듯이, 프란치스코 성인이 너무 많이 울어서 눈이 짓무르고, 눈이 먼 다음에 아름다운 주님의 사랑을 보고, 아름다운 피조물을 찬미 한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안약으로 울어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