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나무에 관한 시모음 32)
겨울나무의 기도 /정연복
사람들만 기도하는 게 아니다
겨울나무들도 기도한다
성당 담벼락에
가지런히 서 있는 나무들
난방이 들어오는
따뜻한 기도처가 아니라
갑작스런 한파가 들이닥친
추운 세상의 한복판에서
푸른 하늘 우러러
온몸으로 기도를 드리고 있다.
고통스럽지만
끝내 인내할 수 있도록
흔들림 없는 굳센 용기
강인한 생명의 힘을 달라고
숨길 것 하나 없는
알몸으로 간절히 드리는
저 겨울나무들의
말없이 정직한 기도.
겨울나무의 순정 /김덕성
따뜻하게 감싸주던 잎새가 떠나
체온 떨어져도
실망하지 않은 겨울나무
순리의 역사로
보다 더 좋은 것으로
진정한 사랑을 이루려는 마음
내일을 아름다움으로
순고한 꿈꾸며
새로운 창출로 승화하려는 의지로
오랜 기다림으로 떠나는
순정어린 겨울나무
기다림은 아름다움이요
내일이 있고 꿈이 있는 삶이기에
나도 겨울나무와 함께
기다리리.
겨울 나뭇가지 /조재완
본인이 가진 소중한 것을 다 내려
놓아버린 겨울나무
새로워지기 위해 낡은 것들을
버렸을 뿐
겨울나무 가지는 가난해 보여도
비어 있는 것이 아니다.
겨울나무 가지는 울지 않는다
텃새가 날아와 울고 갔을 뿐
겨울나무 가지는 외로워서 울지 않는다.
겨울나무 가지는 추워서 떨고 있는
것이 아니다 새로워지기 위해 시련을
견디며 혹한 속에서도 꺾이지 않고
인고의 세월을 견딜 뿐
달이 열리고 별이 맺히고
추억이 서리고 희망이 움트고
구름이 머물고 시가 있다
겨울나무 가지는 비워서 풍성하다.
겨울 나무가 침묵하는 것은 /김홍성
겨울은 눈꽃을 가지마다
달아놓고 새하얗게 웃지만
나무라고 춥고
고달픔을 모르겠나
꽃도 열매도 모두다 내려 놓고
시린 바람에 고독이 흘러 내리는
앙상한 겨울 나무는 쓸쓸하고 외롭지만
침묵하는 깊은 뜻이 있었다
눈꽃은 나무에게 수혈중이었다
혼신의 힘을 다해 버틸수 있는
꿋꿋한 희망의
생명수가 되어
가지끝에서 봄의 기를 모으고
깊은 영혼을 적셔주고 있었던 것은
오늘보다 내일을 향해서다
힘들다고 휘청거리지 마라
희망으로 가는 길이 쉽지 않음이니
조금은 외롭고 힘겹드라도
겨울이 가고 메말랐던 민둥산에
활활 타오르는 꽃들의 잔치로
울긋불긋 온통 물들일 것 아니 겠나
겨울이 없다면 희망도 없는 것
인생의 봄도 그렇게
힘든 고통으로 부터
시작되는 것이니
낮아지고 더이상 낮아질 곳이 없을때
따스한 봄이 찾아 오는 거라고
함박눈 덮어쓴 겨울의 나무가
그렇게 조용히 침묵하고 있었다
겨울 숲 /허태기
옥색 허공은
멀리로 텅 비우고
눈 내린 산은
하얀 소금을 뿌린 듯 무겁다.
새들도 숨죽이는
겨울 숲속의 앙상한 가지들은
마른 몸을 비틀어
찬바람 흘려보내고
한 낮의 햇살을 뿌리로 받아들인다.
허옇게 더덕더덕 붙은
나목 위의 잔설이 사라지고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옷차림이
조금씩 가벼워 질 때면
게으른 숲은
연두 빛 기지개를 켜고
계곡의 얼음 녹는 소리와 함께
노곤한 바람에 실린
새들의 정겨운 수다를 기다린다.
겨울 숲 /김찬일
첫 눈 내리면 그 숲 어디에서
홀연 나타나
내 가슴속으로 걸어왔다.
먼 나라까지 날아가 긴 부리로
계절을 쪼아 먹던 철새도
병 들면
겨울 숲 둥지로 돌아와
날개 접었다.
얼음 밑 흐르는 강물 따라 와
그 숲에 닿은 상처 난 연인들
차디찬 강물에 발 담그고
마른 갈잎 한 움큼 손에 쥐고
북국으로 떠난 여자의
안개 같은 언어가 굴러다니는
그 숲길에서 눈 맞으며
하얀 눈 맞으며
숲의 아픈 울음으로 돌아 온
눈 속 여자여.
나의 가슴에 겨울 숲으로 남아 있는
긴 잠 자는 여자여
겨울 나무 /박성래
오늘처럼 이토록
목마른 날에는
차라리 나목으로 서서
겨울을 나는 편이 좋습니다.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지만
돌보시는 이의 손길이 있어
찬바람 부는 언덕에
호올로 서 있어도
두려움을 모릅니다.
할 수만 있다면
사랑을 원하는 모든 이에게
아낌없이 주고 싶을 뿐입니다.
이렇게 침묵만 하고 있다고
죽은 것은 아니랍니다..
더 많은 열매를 꿈꾸며
잠시 후에는
내 몸을 비집고 나올
아름다운 새싹들을 위해
오늘의 고통쯤은
웃으며 이겨내렵니다
겨울나무들한테 배운다 /안도현
그리하여 삶이란 화투판에서 밑천 다 날리고
새벽, 마루 끝에 앉아 냉수 한 사발 들이켜는 것
몸뚱이 하나, 혹은 불알 두 쪽만 남았다는 생각이 들 때
저 겨울나무들을 바라볼 일이다
스스로 벌거벗기 위해 서 있는 것들
오로지 뼈만 남은 몸 하나가 밑천인 것들
얼마만큼 벗었느냐, 우리도 절망을 재산으로 삼을 도리밖에 없다
희망 같은 것 몽땅 잃어버린 대신에 우리 가진 절망은 또 얼마나 많은 것이냐
절망으로 밥을 해먹으면 한 3년은 버티겠다
바람 찬 노숙의 새벽이여 부디 무사하라 그리하여 쓰러져 길가에 잠들지라도 잊지는 말라
아직도 반성문을 써야 할 일기장의 페이지는 하얗게 비어 있다는 것을
겨울나무들, 이 악물고 떨지도 않고 말한다
두 손 치켜들고 아침을 맞으려면 아직도, 아직도 멀었다고
겨울나무 /虛天 주응규
짙게 드리운 칠흑 어둠 속
망상의 덫에 갇힌 공포에
칼바람 휘몰아쳐
헐벗은 앙상한 가지
오들오들 떨고 있다.
어스름 속으로 한기 서리는
혹독한 고난의 긴 날들
먼동이 희붐히 트는 빛
휘어잡으려 허둥거리다
바들바들 눈물 짓는다.
어여 님 오시어
초들 말라 가는 몸
따스한 체온 불어 넣어
감길 듯 달콤한 입술로
온몸 감빨아
숨결 불타오를 날
애타게 기다리며
냉가슴 앓고 있다
겨울 숲 /윤재철
겨울 숲이 짙게
그늘을 드리워진 것은
빛이 下向을하기 때문이다
한 시절 부시게 아름답던 푸르던 잎새
이제 겸손이 지난 화려했던
三季节(계절)을 내려놓고
차분하고 조용히 휴식을 취하며
초목이 무채색으로 옴추리는
겨울 숲은 스산하고 적막히다
겨울 숲을 걷노라면 까닭 모르게
옛사람이 생각난다
가이 없는 사랑만주고 먼 길 여행 가신
생시에 볼 수없는 부모님
짮은 만남 긴 이별의 가슴 아픈
사연의 한 여인도 ~ ~
이런 땐 쓰라린 옛 추억을 달래주듯
눈이라도 하염없이
내렸음 좋으련만
애오라지 차분한 성찰로
下向의 겸손한 몸짓에
담담한 숲이 야속하지만
그래도 겨울 숲은 고즈넉이
어둡고 길며 점잔해서
아늑하다
해설피 늙은 소나무 가지 사이로
파리한 색깔이 내려앉으며
스산하고 고요한 겨울숲 막다른 빈터
널부러진 낙엽위로
노을빛이 지난날 가슴시린 추억을
쓸쓸이 어루만지고 있다
겨울나무 /류 근
다시 이 삶은 혼자 서 있는 시간으로 충만할 것이다
아주 튼튼하게 혼자여서
비로소 이 세상에 혼자인 것들과
혼자가 아닌 것들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잘 지나간 것들은 거듭 잘 지나가라
나는 이제 헛된 발자국 같은 것과 동행하지 않는다
혼자가 아닌 것은
더 이상 내가 알아볼 수 있는 이승이 아니니,
도심 속 겨울나무 /안정순
잿빛 하늘 아래
빌딩 숲 사이 불쑥불쑥
사치스런 도시의 소음이 귀찮은 듯
세속의 저버린 양심 거두어
어루만지던 손길 가차 없이
내동댕이치던 첫눈이 오던 날부터
상처 난 어깨
이방인인 듯 벽화처럼
마른 귀를 닫고
희미해진 두 눈마저
가슴에 묻고서
땅속 깊은 곳
자유를 꿈꾸는 태동의 숨결
탁해진 영혼 촉수로 흘려보낸다.
겨울 나목 /이경화
거스르지 못하는 자연의 순리 앞에
시간의 강을 따라 유유히
떠나가는 삶의 배는
끝없는 모험에 도전한다
때론 초라한 모습의 시린 겨울이
시련의 낯빛으로 다가와
차가운 현실을 마주하게 하지만
미련 없이 욕망의 옷을 훌훌 벗어 던진
알몸이 된 몸뚱이는
거센 폭풍우에 더욱 단단해져 간다
절망의 골짜기를 지나
찬바람이 달아난 길목에
눈부신 햇살이 다가와
그늘진 동토에 따스한 그리움을
내려놓으면
인고의 시간 위에 잘 여문 삶의 향기는
오색 꿈으로 곱게 피어나고
떠나간 새들이 돌아와
잊혀진 계절을 노래 부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