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념 및 명칭
시조는 고려말에서 조선 초에 이르는 기간에 정제되어 조선시대, 개화기를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생명력을 유지해 온 서정시가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명칭으로서의 시조는 이 서정시가가 특히 조선시대에 음악적으로나 문학적으로 다양한 변화를 추구하면서 거듭 발달했기 때문에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서정적인 문학 형태라는 좁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시조라는 명칭은 조선 영조 때에 가객 이세춘이 사용한 '시절가조'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원래 이 '시절가조'란 말은 "당시에 유행하던 노래"라는 뜻인데, 이것이 고유명사화하여 시조라는 명칭이 만들어졌다.
*기원과 발생
시조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의 학설이 나와 있는 실정이다. 그 학설은 크게 외래기원설과 재래기원설로 나눌 수 있는데, 전자는 시조의 기원을 중국의 한시나 불가에서 찾는 견해이며, 후자는 민요, 향가형식, 고려속요 등에서 시조의 기원을 찾으려고 하는 경우이다. 이중 가장 유력한 것은 고려속요기원설로, 고려속요의 형식적 특징 허물어지면서 단형화되어 새로운 단가의 형식 즉 시조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특히 <만전춘별사>는 이 학설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따라서 시조의 발생 역시 고려시대로 보는 것이 유용한데, 고려 말엽에 이미 시조의 형식이 만들어지고 조선시대로 들어오면서 그 형식이 정제되어 시조가 완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성격
여타의 고전 시가가 그렇듯이 이 시조 역시 음악과의 관련성을 무시할 수 없다. 시조는 창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노래로서 불려졌던 것이지 읽혀졌던 문학이 아니다. 따라서 시조 역시 음악이면서 문학이고 문학이면서 음악이다. 즉 문학적으로는 시조라는 詩形과 사실을 의미하지만 음악적으로는 가곡창 혹은 시조창이라는 곡조를 의미한다 하겠다.
*형식
3·4조 혹은 4·4조의 음수율과 4음보의 율격 그리고 3행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시조의 일반적인 형식이다. 그리고 종장에서는 첫 음보가 3음절로 그 다음 음보가 5음절이라면 종장의 '3음절-5음보절'은 '小音步-過音步'의 짜임리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초장과 중장에서의 완만한 시적 전개에 긴장을 주는 역할을 하며, 여기에 이어서 다시 이완의 흐름을 형성하여 한편의 시조를 마무리하는 역할을 한다. 특히 종장의 첫 음보에 감탄사가 많이 오는 까닭도 바로 이런 이유와 연관이 있다.
*종류
시조의 종류로서는 평시조, 엇시조, 사설시조 등이 있지만 크게 보아 평시조와 사설시조로 구분할 수 있다. 평시조는 시조의 기본형으로 단형시조라 하기도 하며, 사설시조는 이 기본형보다 길게 늘어난 시조로 엇시조를 포함하여 장형시조하고도 하기도 한다. 사설시조는 이 기본형보다 길게 늘어난 시조로 엇시조를 포함하여 장형시조라고도 한다. 사설시조는 평시조와는 달리 엄격한 율격적 규제에서 어는 정도 벗어난 산문적인 분위기를 가져오기도 하는데, 조선 후기 서민의식의 각성과 더불어 발달된 시조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사대부 계층 역시 사설시조를 짓지 않는 바는 아니지만, 이 사설시조에는 서민들이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체험한 경험이 발랄하고도 적나라하게 표현되고 있으며, 지배계층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식이 표출된 작품도 있다.
고려 말엽의 시조
이 시기의 시조는 비록 시조의 발생기이기는 하지만 이른바 종장 서두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규칙까지 갖추도록 형식을 가다듬고, 특정 작가가 나서서 자기 작품으로 창작한 상층문학 갈래로서의 성격을 확보하고 있다. 그러나 주된 담당 층인 신흥사대부들의 의식이 통일되어 나타나지 못하고 다양한 제재들을 위하여 단편적인 실정을 토로하고 있다는 데서 형성기의 한계를 보여준다. 늙음에 대한 탄식, 군주에 대한 걱정, 호기 가득한 무인의 위국충정, 정치현실에 대한 원망, 기울어져가는 왕조에 대한 지식인의 번민 등이 시기 시조들이 그려낸 다양한 모습이다.
조선 초기의 시조
조선왕조가 새로이 건국되고 문물제도가 정비되면서 사회의 안정이 이룩되자 문화적 역량도 성숙되기 시작했다. 새 왕조의 주역인 사대부들은 본격적으로 시조를 창작하기 시작하여 주된 담당층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였는데, 왕조교체의 시대적 배경을 타고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의식태도를 드러내는 뚜렷한 분화양상을 보였다. 사라져 간 고려왕조를 애닮아 한 고려유신들의 회고의 노래와, 신왕조 건설에 적극 참여한 작가들의 찬양의 노래가 그것이다.
한편 조선초기에는 새로운 왕조의 안정과 더불어 자연에서 한적한 생활을 즐기는 모습을 여유 있게 표현한 閑居의 노래가 있어 훗날 江湖歌道江의 연원이 되기도 하였다. 맹사성의 <강호사시가>가 이런한 방면의 길을 열었다. 그리고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을 둘러싸고 단종에 대한 절개를 노래한 작품도 나왔다.
조선 중기의 시조
16세기에 접어들면서 조선은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 즉 당쟁이 치열하게 벌어졌고 사대부들이 정치에서 물러나는 사례가 자주 발생하였다. 그 결과 벼슬길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면 자연에 은거하여 심성의 도리를 찾는 문학을 창작하는 기풍 즉 사림파의 문학이 나왔다. 이것이 이른바 '강호가도'라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강호가도의 길을 연 사람은 이현보와 송순이며, 이황, 이이, 정철 등이 이를 계승하였다. 한편 기생들이 시조를 짓는 사례도 나타나게 되었는데, 황진이는 그 대표적인 예라 할 것이다. 따라서 사대부들의 전유물이던 시조가 이제는 조금씩 그 담당층이 확산되어 가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조선 후기의 시조
조선 후기는 무엇보다 시조의 담당층이 확산되었던 시기이다. 사대부들에서부터 시작하여 평민에 이르기까지 그 작자층은 상당한 폭으로 늘어났다. 이에 따라 소제와 주제 역시 다양해졌다. 또 서민의식의 각성에 따라 서민들이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체험한 경험이 발랄하고도 적나라하게 표현되고 있으며, 지배계충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식이 표출된 작품도 있다. 한편 이 시기는 소설이 전성기를 맞이한 시기이니 만큼 모든 문학장르에서 서민 의식이 주조를 이루는 산문정신이 부가된 시기였다. 시조에서도 이와 아울러 평시조에서 변형된 장형시조 즉 사설시조가 성장하였다. 물론 장형시조가 그 전대에 없었던 바는 아니지만 이 시기에 와서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麗末鮮初의 시조
시조는 고려말에서 조선 초에 이르는 기간에 정제되어 조선시대, 개화기를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생명력을 유지해온 서정시가이다. 시조라는 명칭은 조선 영조 때에 가객 이세춘이 사용한 '시절가조'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원래 이 '시절가조'란 말은 "당시에 유행하던 노래"라는 뜻인데, 이것이 고유 명사화하여 시조라는 명칭이 만들어졌다.
시조의 형식은 3행, 45자 안팎의 단형적 定型試로, 1행은 4음보격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제 3행(종장)의 첫음보는 감탄사적 성격을 계승한 것으로서 3음으로 되어있고, 제 2음보는 5음 이상으로 되어 있어 破格을 이루고 있다. 이와 같은 시조의 起源에 대하여는 外來 起源說과 在來 起源說이 있으나, 재래 기원설 중에서도 향가 기원설과 고려속요 기원설이 가장 대표적이다.
또한 시조의 形成 時期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異說이 있으나, 대체로 고려 중기에 발생하여 고려 말기에 완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초기에 완성되었다는 설도 잇고, 시조의 본격적인 출현은 조선 중기에 들어와서라는 설도 있어 그 시간적 차이는 무려 7, 8백 년이나 된다.
여기서는 고려말을 시조의 형성기로 하여 조선 초 시조의 성장기에 이르기까지의 시조에 대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1. 高麗 末期의 時調
麗末 권문세족과 대립관계에 있었던 新興士大夫들에 의하여 싹트기 시작한 시조는 그들의 세력 신장과 개혁운동의 진전 및 朱子學의 발달과 불교의 쇠퇴, 그리고 俗謠에 대한 유교 지성들의 반립 등 여러 요소들이 시조 형성의 복합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여 鮮初에 이르는 동안 俗謠에 혼용되어 있던 4음보의 음률이 시가의 표면으로 나타나게 되고 유교적 지성이 결합하면서 그 형식이 整齊된 것으로 파악된다.
이 시대의 작품을 내용에 따라 분류해 보면 인생 무상을 노래한 禹倬의 시조와 봄밤의 애상을 노래한 李兆年의 작품이 絶唱으로 꼽히고, 그 밖의 작품들은 5백 년의 고려 사직의 종말을 앞둔 답답한 시대상을 반영한 작품들이다. 공민왕 때의 난정의 일단을 보여주는 李存吾의 풍자 시조,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하여 싸움터에서 살아온 崔瑩의 시조, 혁명의 뜻을 노골적으로 나타내어 정몽주를 회유하려한 이 방원의 何如歌와 이에 대한 圃隱의 절의를 다짐하는 丹心歌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애상과 탄식이 젖어 있는 이색, 서견, 성여완의 시조도 李氏의 신흥 세력 앞에서 멸망의 길을 닫고 있는 고려 왕조의 운명을 체념한 노래들이다.
- 이 時期의 時調作品 -
? 손에 가시를 들고 ? 손에 막 들고
늙 길 가시로 막고 오 白髮 막 로 치랴 니
白髮이 제 몯져 알고 즈렴길로 오더라
〈禹倬〉
우 탁의 嘆老歌 2수 중 하나이다. 충숙왕의 부름에도 세상에 나오지 않고 經書와 易學에 전심하며 초야게 은거할 때 지은 老年期에 늙음을 탄식하는 작품이나 점차 기울어 가는 고려 왕조의 亡國의 한과 어쩔 수 없는 大勢의 운명적 분위기를 함께 느끼게 한다. 형태면에서도 4음보의 율격구조를 갖추고 있으나 중장의 3음보 연첩은 초기 시조의 음률적 未確定性을 보여 준다.
동양적 이미지를 달빛의 명암법에 담아 現代總畵로 再現된 바도 있는 李兆年의
梨花에 月白?고 銀漢이 三更인 제
一枝春心을 子規ㅣ야 아랴마
多情도 病인 냥?면 못드러 ?노라
多情歌는 東洋 정신과 한민족의 정서가 합치한 情의 詩學으로서 서정미학의 절정을 보여준 시조다. 역시 중장 초구의 변형적 음률은 고정되고 규정된 율격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호흡에 연유한 음률로서 시조의 형태가 당초부터 확고한 음률형식을 규정한 것이 아니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점차 중장의 음률구조가 균제되면서 他章과 마찬가지로 4음보률로 整齊된 것으로 보여 진다.
綠衣霜蹄 지게 먹여 시 물에 싯겨 고
龍泉雪鍔을 들게 갈아 두러메고
丈夫의 爲國忠節을 세워볼가 ?노라
〈崔塋〉
趙日新의 亂을 평정하고 倭寇와 홍건적 등을 격파한 고려의 장수 최영의 충절과 기백이 역력하게 표출된 呼氣歌는 武臣의 丹忠과 志操를 중심 내용으로 한 의지적 시조로서 이러한 시정의 정조는 鄭夢周의
이몸이 주거 주거 一白番 고쳐 주거
白骨이 塵土ㅣ 되어 넉시라도 잇고 업고
님 向? 一片丹心이야 가싈 줄이 이시랴
丹心歌의 情操와 맥락을 같이하는 것으로 시정신의 한 전통을 수립한 것이다.
고려 유신들의 懷古歌의 주제는 대개 忠義思想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정서적 主調는 懷古之情이지만 시정신은 忠節의 의지적 표현으로서 麗末 시조의 주종을 이루고 있다.
白雪이 자진 골에 구루미 머흐레라
반가은 梅花 어 곳에 픠엿 고
夕陽에 홀로 서 이셔 갈 곳 몰라 ?노라
〈李 穡〉
五百年 都邑地를 匹馬로 도라드니
山川은 依舊?되 人傑은 간 듸 업네
어즈버 太平烟月이 이런가 하노라
〈吉 再〉
興亡이 有數?니 滿月臺도 秋草로다
五百年 王業이 牧笛에 부쳐시니
夕陽에 지나 客이 누물계워 ?노라
〈元天錫〉
위의 세 작품은 모두 고려 유신들의 소작으로 한결같이 亡國의 설움과 회고의 정을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이색의 시조에는 고려에 대한 충성과 신흥 조선왕조에 대한 敬畏의 갈림길에서 고민하는 심정이 토로되고 있으며 길재와 원천석의 시조는 夕陽으로 상징되는 亡國의 설움과 회고의 정이 온건파 士大夫들의 모습과 그 志向性을 대변해 주고 있다. 麗末의 시조는 夕陽이 상징하는 시간적 배경 위에 형성되었으며 전체 시조가 풍기는 哀想的 情調는 이 경우 오히려 자연스러운 흐름이라 할 수 있다.
2. 朝鮮 初期의 時調
고려가 멸망하고 새로 건국한 신흥 조선왕조는 모든 면에서 자주적이며 혁신적인 시책을 폈다. 그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이 崇儒斥佛의 國是였다. 그리하여 고려조의 정신적 지주였던 불교를 물리치고 새로운 학문인 性理學을 받아들여 治國의 이념으로 삼았다. 문학면에서는 궁중 음악의 가사로 쓰기 위한 創業을 송축하고 왕실의 발전을 기원하는 樂章이 유행하였다.
이 시대의 시조는, 고려 유신들의 懷古歌系와 신흥 세력의 頌祝歌系로 상반되는 작품들이 지어졌다. 이것은 왕조의 교체와 신구의 갈등에서 오는 당연한 현상이었다. 조선 시조의 서두에는 고려 유신들의 회고와 은거의 노래가 지배적이었으나, 이들 懷古歌는 나약하여 반발이나 도전 따위는 상상도 못하고, 그저 無常에 대한 탄식으로 시종되어, 글자 그대로 회고에 그치고 말았다.
건국 초의 혼란도 가시고, 세종 같은 어진 임금이 나타나자 안정과 태평이 감돌기 시작하였다. 세종 25년에 창제된 訓民正音은 시조뿐만 아니라 국문학 전반에 걸쳐 참된 시발점이 되었다. 이 시대에 들어오자, 태평 시대의 한가한 백성들로서의 자연 예찬과 임금의 은혜에 감사하는 노래가 많이 지어졌다. 오늘날 전하는 시조의 태반이 한적하고 평화로운 敍情詩로 되어 있음은 이 시대부터 싹트기 시작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것으로 대표적인 것이 맹사성의 '江湖四時歌'다. 이것은 우리 고시조에 있어 江湖歌道라고 일컬어지는 큰 흐름의 源流가 되었으며, 특히 연작 형태의 발굴은 時調史上 새 轉機를 이룩하였다.
그리고 육진 개척으로 공이 큰 김종서의 '호기가'와 26세에 병조판서를 지내고,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남이의 의기에 찬 노래는 이 시대 武人들의 기백을 보여 주는 雙璧이라고 하겠다.
단종 때 들어와 세조의 왕위 찬탈을 에워싸고 일어난 피비린내 나는 政變은, 고려 말 정 몽주의 '丹心歌'를 계승한 많은 절의가를 낳게 하였다.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잡혀 세조의 모진 고문에도 끝내 굴하지 않고 一片丹心을 외치며 刑場의 이슬로 사라진 死六臣의 노래와 어떠한 회유에도 넘어가지 않고 草野에 묻힌 生六臣의 작품이 16수나 전하고 있다. 이들 노래는 하나같이 忠臣不事二君이라는 유교적인 節義를 대표하는 작품들이다. 아무튼 이 시기에 들어와서 시조는 형식면에서나 내용면에서나 완전한 틀이 잡히고, 懷古·頌祝·節義의 노래들을 주류로 하면서 강호의 노래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 이 時期의 時調作品 -
仙人僑 나린 물이 紫霞洞에 흐르르니
半天年 王業이 물ㄹ소 이로다.
兒嬉야 古國興亡을 무러 무엇 ?리요
〈鄭道傳〉
納氏歌, 新君歌 등 조선왕조를 찬양한 노래를 지은 정도전의 이 시조에서 찬양과 칭송의 직접적인 의미는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많은 유신들이 고려에 대한 그리움과 회고의 정을 노래하고 있는데 反하여 이 시조는 한 왕조의 멸망을 물소리에 부치고 '古國興亡을 무러 무엇 ?리요'라고 재론의 여지조차 없음을 단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어느 정도 국가의 기틀이 잡히고 사회적으로 안정기에 들어서면서 태평연월을 누리게 되자 세종대 孟思誠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生의 悅樂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江湖에 봄이 드니 미친 興이 절노난다
濁 溪邊에 錦鱗魚ㅣ 안 로다
이 몸이 閒暇 옴도 亦君恩이샷다
江湖에 녀름이 드니 草堂에 일이 업다
有信? 江波 보내 니 람이로다
이 몸이 서 옴도 亦君恩이샷다
江湖에 이 드니 고기마다 져 잇다
小艇에 그믈 시러 흘리 여 더뎌두고
이 몸이 消日 옴도 亦君恩이샷다
江湖에 겨월이 드니 눈 기픠 자히 남다
삿갓 빗기 고 누역으로 오슬 삼아
이 몸이 칩지 아니 옴도 亦君恩이샷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四季로 나누어 노래하고 있는 이 江湖四時歌는 표면상 太平聖代의 閒暇한 情趣를 노래하고 있지만 '이 몸이 閒暇 옴도, 소일 옴도, 춥지 아니 옴도' 모두 임금의 은혜로 돌리고 있으며 종장의 중요성으로 보아 내면적 의식은 군왕의 칭송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시조사상 江湖歌 내지 閒情歌의 출발적 의미를 갖고 있는 강호사시가는 하나의 主題가 4로 이루어진 최초의 聯詩調로서 그 내용과 더불어 형태상 중요한 의의를 지니는 것이다.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 ?니
蓬萊山 第一峰에 落落長松 되야이셔
白雪이 滿乾坤 제 獨也靑靑?리라
〈成三問〉
房안에 혓는 燭불 눌과 離別 ?엿관
것츠로 눈물 디고 속타는 쥴 모로는고
뎌 燭불 날과 갓트여 속타는 쥴 모로도다
〈李 塏〉
千萬里 머나먼 길에 고은 님 여희 고
내 음 둘듸 업서 냇 에 안자이다
져 물도 내안 도다 우러 밤길 녜놋다
〈王邦衍〉
死六臣이든 生六臣이든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節操와 戀主之情은 같은 것이다. 不事二君의 君臣 관계가 유교의 윤리관으로 더욱 강화된 것도 사실이며 君主 곧 國家라는 개념이 愛國心으로 발현되었다. 이러한 봉건사회의 정신은 비단 유학자들의 작품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武人들의 우국충정과 호방한 기개도 忠節에 바탕을 둔 것이며 고려 유신의 회고가나 신흥국가에 대한 칭송의 노래들도 그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시조전통의 한 갈래를 이뤄 개화시조에 이른다.
시조가 당초 유학자들의 손에 의하여 整齊된 형식이지만 유교적 이념을 표출하기 위한 도구적 문학관에서 출발하 것은 아니다. 전문적인 시인이 아닌 그들의 시조에 대한 인식은 特情詩形이었으며 그들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詩歌形式이었다.
秋江에 밤이 드니 물결이 노 라
낙시 드러치니 고기 아니 무노 라
無心? 빗만 싯고 뷘 저어 오노라
〈月山大君〉
불교적 허무사상을 바탕으로한 이러한 시조에서 또는 多情歌 등에서 서정적 自我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시정신의 본질과 그 다양성과 아울러 세종대의 한글 창제는 시조의 口誦性을 벗어나게 함과 동시에 고려이후 漢文中心의 문학이 國文中心의 문학으로 발전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하였으며 순국어체 문체의 성립에 기여하게 되었으니
간밤에 우던 여흘 슬피우러 지내여다
이제야 각?니 님이 우러 보내도다
져물이 거스리 흐르고져 나도 우러 네니라
〈元觀瀾〉
순수한 우리말이 시어로서의 기능을 발휘하는데 부족함이 없음을 이 시조는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말이 서경적 묘사에 부족함이 없듯이 서정적 시어로서의 기능을 갖추고 있음으로써 일찍이 순국어체의 詩文體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이며 정극인의 賞春曲과 같은 歌辭文學의 出現과 발전을 가져온 계기르 마련했던 것이다.
*
이상 고려 말의 시조와 조선 초기의 시조에 대하여 살펴 보았다.
고려말의 시조는 비록 시조의 발생기이기는 하지만 이른바 종장 서두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규칙까지 갖추도록 형식을 가다듬고, 특정 작가가 나서서 자기 작품으로 창작한 상층문학 갈래로서의 성격을 확보하고 있다. 그러나 주된 담당 층인 신흥사대부들의 의식이 통일되어 나타나지 못하고 다양한 제재들을 위하여 단편적인 실정을 토로하고 있다는 데서 형성기의 한계를 보여준다. 늙음에 대한 탄식, 군주에 대한 걱정, 호기 가득한 무인의 위국충정, 정치현실에 대한 원망, 기울어져가는 왕조에 대한 지식인의 번민 등 이시기 시조들이 그려낸 다양한 모습이다.
조선왕조가 새로이 건국되고 문물제도가 정비되면서 사회의 안정이 이룩되자 문화적 역량도 성숙되기 시작했다. 새 왕조의 주역인 사대부들은 본격적으로 시조를 창작하기 시작하여 주된 담당층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였는데, 왕조교체의 시대적 배경을 타고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 의식태도를 드러내는 뚜렷한 분화양상을 보였다. 사라져 간 고려왕조를 애닮아 한 고려유신들의 회고의 노래와, 신왕조 건설에 적극 참여한 작가들의 찬양의 노래가 그것이다.
한편 조선초기에는 새로운 왕조의 안정과 더불어 자연에서 한적한 생활을 즐기는 모습을 여유 있게 표현한 閑居의 노래가 있어 훗날 江湖歌道江의 연원이 되기도 하였다. 맹사성의 <강호사시가>가 이런한 방면의 길을 열었다. 그리고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을 둘러싸고 단종에 대한 절개를 노래한 작품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