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12 章 쓸쓸한 귀향
작렬하는 태양 아래.
고향을 향해 가는 듯 흐뭇한 표정을 하고 소주(蘇州)로 가는 관도(官
道) 위를 걷는 흑삼청년 하나가 있었다.
아주 준수한 용모의 소유자였다.
그의 등에는 백금 검집을 갖고 있는 한 자루 상고기검(上古奇劍)이
걸려 있고, 허리춤에는 은빛 보따리가 걸려 있었다.
"소주가 백 리 안으로 다가왔구나. 가슴이 뛰는 것도 당연하지."
그는 흐뭇해 중얼거리다가 작은 마을 안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매화나무가 유난히 많이 자라고 있는 마을이었다.
"이 마을의 매실주(梅實酒)가 대단히 뛰어난 맛을 지녔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한 번도 와서 먹어 보지 못했으니 이 기회에 음미해 봐야
겠군."
그는 중얼거리다가 매화루(梅花樓)라는 주루를 보게 되었다.
주루 앞, 건마(建馬) 십 몇 필이 매어져 있는 안에서 떠드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흠, 술도 술이지만 사람의 모습을 보는 것이 더 재미있겠군."
그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주루문을 밀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주루 안에서 웃고 떠들던 사람들이 그를 보고 일순 말문을 잇지 못했
다.
"쳇!"
보검을 멘 장한 하나가 투덜거렸다.
"계집보다도 아름다운 사내놈이 있다니……."
그가 투덜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흑의청년이 모습을 나타내자 주루 안 다른 사람들의 모습은 봉황 앞
의 까마귀같이 추악하게 여겨지게 되었던 것이다.
흑의청년은 중인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인 후 구석진 자리로 가서 나
무 의자 위에 걸터앉았다. 머리를 한 갈래로 땋아 내린 황삼 점원이
주루루 달려와 흑의청년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귀공자! 소인놈에게 시키실 것이 있으십니까?"
점원의 나이는 십오 세 정도였다.
"흠, 나는 이곳의 특산주라는 매실주를 먹어 보기 위해 왔다."
흑의청년의 말소리는 노랫소리같이 아름다웠다.
세속에 물들지 않은 깨끗한 용모, 맑은 빛을 갖고 있는 한 쌍의 눈동
자, 흑의청년은 오랜 세월 수도(修道)의 길을 걷다가 잠깐 외도하는
신선계의 선인(仙人)인 것만 같았다.
"헤헤……, 좋은 술이야 얼마든지 있습지요. 안주는 뭐로 할깝쇼?"
"기름기 없는 것으로 갖다 다오."
청년은 말과 함께 소매 속에서 은자(銀子)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내
려놓았다. 그리고는 흰 이빨을 드러내며 청아하게 말했다.
"빨리 갖다 준다면 이것을 주겠다."
"헤헤헤……, 염려 마십시오."
황삼 점원은 자신이 재신(財神)을 만났다는 것을 알고 크게 기뻐하며
급히 주방 쪽으로 걸어갔다.
흑의청년은 무심중 고개를 돌리다가 두 개 지극히 영롱한 눈빛을 보
게 되었다.
그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는 백의여인 하나가 있었다.
월궁항아(月宮姮娥)같이 아름다운 여인. 궁장 차림이 그녀의 빼어난
용모를 더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여인이군. 왜 나를 유심히 보는 것일까?'
흑의청년은 백의미녀가 얼른 고개를 돌린다는 데 의아해했다.
사실 이상할 것은 하나도 없었다.
백의미녀는 그의 수려한 모습에 호감을 느껴 빤히 바라보았을 뿐이었
다.
그때 주루 문이 열리며 화려한 비단옷 차림의 여인 다섯이 우루루 몰
려 들어왔다.
모두 절색의 미녀들이었다.
'여인 천하군.'
흑의청년이 의아해 여길 때, 다섯 여인들이 백의미인 곁으로 다가가
일제히 장읍을 취했다.
서로 알고 있는 사이임에 틀림없었다.
"연락을 받고 화급히 왔습니다."
여인들의 말소리는 하도 작아 바로 곁에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알아
듣기 힘들 정도였다.
"일궁일사(一宮一寺)의 쌍적(雙敵)과 마객(魔客)들 때문에 길이 지체
되었다."
백의미녀는 여인들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듯 꼼짝하지 않고 위엄 있
게 말했다. 나지막한 말소리였으나 흑의청년은 아주 똑똑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사저께서 최후로 모습을 나타내신 곳이 이 근처라는 것을 알고 있다
."
"죄송합니다, 총순찰(總巡察). 속하들은 공주께서 실종되신 이후 여
섯 달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근처를 뒤졌으나 아무것도 찾지 못했
습니다."
여인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여인의 대답이었다.
"사저의 무공은 천하제일이다. 적과 싸워 실종되셨다고는 보기 힘들
다. 무슨 일이 있어 회궁(廻宮)할 시기를 늦추시고 있음에 틀림없다.
나는 여기서 수 일 머물며 사저의 행방을 찾을 생각이다."
"총순찰, 지내시는 데 불편이 없도록 매사에 준비를 다 해 두었습니
다."
여인들의 대화가 여기에 이를 때였다.
핑!
파공성과 함께 주루 문을 뚫고 들어와 백의여인이 앉아 있는 의자 바
로 앞 마룻바닥으로 파고드는 한 자 길이 쇠화살 하나가 있었다.
빛은 핏빛이었고, 꼬리 부분에 흰천이 매달려 있는 영전(令箭)이었다..
그것이 나타나는 순간 주루 안이 무덤 안같이 조용해졌다.
"신, 신비마전(神秘魔箭)이다."
"마사자(魔使者)가 왔다. 죽음을 부르는 마사자가 왔다!"
모두 겁먹어했다.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단 한 사람이었다. 구석진 자리에 앉아 백의
미녀를 살피던 흑의청년만이 담담한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신비마전이라고? 저것이 당금 강호를 공포로 몰아넣는 물건인가?'
고개를 갸우뚱하는 청년은 주루 밖 십 장 되는 곳, 한 사람이 나타나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신비마전을 던진 사람이 숨소리를 죽이고 십 장 밖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흠, 이것이 내게 떨어지다니……."
백의미녀가 신비마전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 순간이었다.
"으흐흐흐……!"
주루를 떨어 울리는 음침한 웃음소리가 있었다.
화살을 던진 장본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 소리였다.
"백화궁 총순찰인 유화선자(柳花仙子) 일타운(一陀雲)은 듣거라."
얼음 구덩이 안에서 흘러나오는 것같이 냉막한 말소리였다.
대체 어디서 들리는지 알 수 없어 신비스러운 말소리이기도 했다.
"천상천하(天上天下)를 지배하실 신비마제(神秘魔帝)의 사자(使者)가
왔으니, 나와 절을 해라."
주루를 압도하는 말소리가 끝나자.
"흥!"
백의미녀가 냉소치며 몸을 일으켰다.
"신비마제의 졸개가 나를 찾다니 가소롭군. 신비마제라면 모를까, 마
사자 정도는 두렵지 않다."
"흐흐……, 건방진 계집이군. 너는 백화궁과 수라신궁, 그리고 잔혼
사의 우두머리가 신비마제에게 패했다는 강호가 다 아는 사실을 모른
단 말이냐?"
"그것은 과거의 일이다. 다시 겨룬다면 패하지 않는다."
"어리석은 년!"
"마사자, 왜 나를 찾았느냐?"
"흐흐……, 나와 보면 알 것이다."
"흥! 백화궁은 찾아오는 상대를 뿌리치지 않는다."
백의미녀는 강호의 삼대세력 중 하나인 백화궁의 총순찰이라는 놀라
운 지위에 올라 있는 여걸이었다.
그녀의 별호는 유화선자 일타운이었다.
일타운은 백화궁 총순찰인 동시에 무림삼대미인(武林三大美人) 중 하
나로 불리고 있었다.
그녀는 백화궁 총단 안에 머물며 외부 출입을 잘 하지 않았는데 이례
적으로 강호에 모습을 나타냈던 것이다.
일타운은 공포를 느꼈으나 내색하지 않고 주루 밖으로 걸어나갔다.
찬바람이 불어와 옷자락을 휘날리게 했다.
"나와라!"
일타운이 소리치자 땅 속에서 스며 나오는 듯 신비스러운 말 소리가
근처를 뒤흔들었다.
"백화궁은 곧 신비마제께 접수될 것이다. 너는 그것을 알고 있겠지?"
"흥! 너희들이 감히 본궁을 점령하겠느냐?"
"믿지 못한다면 알게 해 주겠다. 본 사자는 너를 잡아 신비마제께서
올해가 가기 전 백화궁을 손에 넣었다는 것을 강호 사람이 다 알게
할 작정이다."
"그럼 나를 잡아가기 위해 왔단 말이냐?"
"물론이지."
음침한 말소리와 함께 모습을 나타내는 흑의인 하나가 있었다.
키가 후리후리했고 등에 고검을 멘 복면인이었다. 두 눈에서 흘러나
오는 눈빛이 아주 흉흉했다.
복면인은 십장을 단숨에 날아 일타운 바로 앞에 떨어져 내렸다.
'절정신법이군. 신비마제의 일개 하수가 이 정도이니, 신비마제의 무
공은 어느 정도란 말인가?'
일타운은 불현듯 두려운 마음이 일었다.
상대는 사람 죽이기를 파리 죽이듯 하는 자. 이제껏 마사자의 방문을
받고 몸이 성한 사람은 없었다.
"흐흐흐……!"
복면인의 눈에서 섬광이 폭사해 나왔다.
"네 사부 백화귀모(百花鬼母)는 원래 화화궁주(花花宮主)였지. 수년
전 음행(淫行)을 저지르고 쫓기다가 절벽에서 떨어졌고, 운 좋게 사
대마경 중 하나인 색혼경(色魂經)을 얻어 백화궁주로 화신하게 되었
지 않느냐?"
"뭐라고?"
"너는 네 사부가 어떤 위인인지 잘 모르는구나. 천하에서 가장 지독
한 탕녀(蕩女)였다는 것을……."
마사자가 비웃듯 말했다.
"닥쳐라!"
일타운이 발을 쿵! 굴렀다.
한 자 깊이 족인(足印)이 새겨졌다.
하나, 마사자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신비마제는 공적(公敵)이 되었다. 그 자는 색마(色魔)이고, 대도(大
盜)다. 무림의 질서를 파괴시키고 있는 자니, 얼마 가지 못해 처단될
것이다."
일타운이 성나 외치자.
"호호……, 그분은 천하의 주인(主人)이다. 그분이 무슨 짓을 하건
욕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알겠느냐?"
마사자가 비웃으며 손을 들어올렸다.
'마사자들은 소수(少數)이나 하나같이 절세고수라지? 마사자 중의 하
나는 잔혼사의 주지승과 양패구상(兩敗俱傷)할 정도로 고강하다고 하
지 않는가?'
일타운은 승리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가 익힌 무공은 특이한 무공이었다. 그녀는 남자의 양기(陽氣)를
흡수해야 절정 수준에 이를 수 있는 마공(魔功)을 익히고 있었다.
하나, 일타운은 아직 숫처녀였다. 그렇기 때문에 마공이 미약했고,
절세고수와 싸운다면 패하기 쉬운 것이다.
일타운이 벌레 씹은 표정을 하고 싸움에 임하려는 찰나였다.
"잠깐!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쓰실 필요가 있겠소?"
낭랑한 말소리와 함께 두 사람 사이로 끼여드는 문약(文弱)한 흑의청
년 하나가 있었다.
등에 한 자루 고검을 메고 있는 흑의청년이었다.
검을 메고는 있으나 무사로 보이지는 않았다.
눈빛이 담담했고 양쪽 태양혈도 밋밋하기만 했기 때문이었다.
마사자가 눈꼬리를 치켜떴다.
"웬 놈이냐? 일타운의 미색(美色)에 홀려 굶주린 똥개같이 침을 질질
흘리고 뒤쫓아 다니는 놈팽이 같은 놈이……."
"하하……, 입이 거칠군."
흑의청년은 웃으며 마사자와 얼굴을 마주하는 자세를 취했다.
마사자는 흑의청년이 성난 표정을 짓지 않는 것에 가가대소했다.
"으하하하……, 죽고 싶어 환장한 놈이군."
마사자의 손이 번쩍 쳐들려졌다.
순간.
"잠깐! 네 상대는 나다."
일타운이 기겁을 하며 흑의청년 앞으로 몸을 날렸다.
일타운은 얼른 흑의청년의 몸을 가리며 전음입밀로 말했다.
"어리석은 사람이군요. 나설 일이 아니에요."
일타운이 꾸짖듯 말하는 중 지극히 부드러운 바람이 일어나 일타운의
몸을 삼 장 밖으로 밀어 보냈다.
일타운이 항거할 수 없는 거대한 잠력(潛力)이었다.
"어어엇?"
일타운은 부드러운 바람에 쓸려 삼 장 밖으로 움직여 갈 수밖에 없었
다.
'절세고수구나!'
일타운은 문약해 보이는 흑의미남이 무공을 숨기고 있는 절세고수라
는 것을 알고 귀뿌리를 빨갛게 물들였다.
흑의청년은 일타운을 향해 미소 지으며 소매 속에서 청옥패 하나를 꺼
냈다.
"이것이 무엇인지 아시오?"
그가 꺼내는 옥패의 표면에는 백화문(百花紋)이 양각되어 있었다.
"그, 그것은 백화신패(百花神 )인데?"
일타운이 얼떨떨해하자.
"하하……, 자초지종은 잠시 후 이야기하겠소."
청년은 백화신패를 소매 속으로 거두어들이며 마사자를 돌아봤다.
"괘씸한 놈! 이제 보니 백화궁의 개였군."
마사자가 주먹을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오해하지 마시오. 나는 백화궁의 사람이 아니니까!"
"흐흐……, 개소리 지껄이지 마라. 백화궁의 간사한 계집들과 놀아나
는 꼴로 보아 겉보기와는 달리 음탕한 놈임에 틀림없겠지?"
"욕이 너무하시군."
흑의청년의 얼굴이 굳어갔다.
"흐흐……, 대가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놈이……."
마사자의 손이 천천히 앞으로 펼쳐졌다.
흑의청년은 그의 손이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며 약간 의아해했다.
"무당파(武當派) 삼원신장(三元神掌)을 익혔군!"
흑의청년이 중얼거리듯 말하자, 마사자가 크게 놀랐다.
'놀라운 놈이군. 무당에서 나만이 알고 있는 수법을 한눈에 알아보다
니…….'
마사자는 상대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고 얼른 수법을 변화했다.
그의 손이 무수한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흠!"
흑의청년이 재미있다는 표정이 되어 입을 열었다.
"마마혈수(魔魔血手)도 익혔군."
"으으, 모르는 것이 없군."
마사자는 피가 역류(逆流)하는 듯 급해져 양 손을 함께 쳐냈다.
꽈르르릉 ―!
뇌성벽력이 일어나며 흙모래가 피어올랐다.
"단천열화장법(斷天熱火掌法)은 수백 년 전 실전된 수법이거늘……."
흑의청년은 마사자의 세 번째 수법마저 한눈에 알아보며 왼손을 비스
듬히 쳐드는 동작을 취했다.
'오 성 공력(功力)을 쓰면 단천열화장을 흩트릴 수 있겠지.'
그는 무림의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하는 무영참룡수(無影斬龍手)의 변
화를 위력으로 닥쳐오는 강풍(强風) 안에 발휘해 냈다.
파팍!
둔탁한 소리와 함께 단천열화장력이 봄눈 녹듯 사라졌다.
직후, 처절한 비명 소리와 함께 펄펄 뛰는 팔뚝 하나가 허공으로 날
아올랐다.
마사자의 왼팔이 허공으로 날아가 버리는 것이었다.
"두고 보자!"
마사자는 한 마디 말을 남긴 후 훌쩍 날아올랐다.
흑의청년은 뒤쫓지 않고 그가 사라져 가는 것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그가 어떤 수법으로 마사자의 팔을 잘라냈는지 알아본 사람은 전무했
다.
흑의청년이 그윽한 시선을 하고 서 있을 때, 일타운이 조심조심 다가
와 포권지례를 취했다.
"은인(恩人)이십니다."
"과찬의 말씀이오."
"아, 놀라운 무공입니다. 마사자는 아직 무패인데……."
"하하……, 잔재주일 뿐이오."
"백화신패를 갖고 계신 것으로 보아 본궁의 친구이신 듯한데……."
일타운이 주저주저 말했다.
흑의청년이 소매 안에서 백화신패를 꺼내 돌려주며 부드럽게 말했다.
"이것을 돌려 드리겠소. 사실 소생은 삼 년 전, 백화궁의 한 분 고수
께 빚진 것이 있어 낭자를 도왔소이다."
"삼, 삼 년 전 어느 누구에게?"
"얼굴에 몽면을 한 여고수가 소생을 도왔소. 옥향이라는 소녀를 전인
으로 두고 있던데……."
흑의청년의 말이 거기에 이를 때.
"그, 그분은 바로 백화궁주이십니다. 그리고 저의 사저입니다."
일타운이 깜짝 놀라 말했다.
놀란 토끼눈을 하는 모습이 아주 매혹적이었다.
"그분은 지난 봄, 실종되셨습니다."
"실종이라니?"
"어떤 사람이 강호에 나타났다는 소문에 놀라 확인하려 강호로 나가
셨다가 바로 근처에서 연락이 끊어졌습니다. 저는 사저를 찾아온 것
입니다."
"흠, 그분은 절세고수인데……."
고개를 갸웃하는 흑의청년은 제이대 무림기인전주 냉운이었다.
'그때 그 여인이 백화궁주였군.'
냉운은 주루 안에서 자신을 구해 준 몽면여인이 백화궁주이고, 얼마
전 의문리에 사라졌다는 데 야릇한 기분이 되었다.
'그 여인은 범모(範某)라는 사람을 잊지 못하는 눈치였지 않는가?'
냉정하고 오만했던 여인. 하지만 냉운에게는 은인임에 틀림없었다.
'그 정도 고수가 소문 없이 실종되기는 힘든 일인데…….'
냉운이 속으로 중얼거릴 때.
"소, 소협은 어떤 분이십니까?"
일타운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냉운이라는 사람이오!"
그가 떠나려 한다는 것을 안 일타운의 얼굴에 동요의 빛이 떠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냉운이 지극히 담담한 말투로 작별을 고하기 시작했
다.
"소생은 갈 길이 급해 그만 물러가야겠소이다. 소저가 백화궁주를 찾
는 일이 성사되기 빌겠소. 그분을 찾거든 소생이 후일 찾아뵙고 지
난 은혜에 보답하겠다는 말을 전해 드리시오!"
냉운은 일타운이 어정쩡한 표정을 짓는다는 데 의아해하며 훌쩍 날아
올라갔다.
냉운은 찰나지간 일타운의 망막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아……."
일타운은 한숨을 금할 수 없었다.
십구 년 고이 간직한 방심(芳心)이 한순간 파란에 뒤집어져 버린 것
이다.
'저분과 함께 다닌다면 얼마나 좋을까?'
일타운은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냉운은 그 길로 소주현을 향해 절세신법을 시전해 갔다.
선풍(旋風)이라 해도 냉운같이 빨리 달리지는 못하리라. 한 걸음 움
직일 때마다 십여 장의 거리가 좁혀진다.
"그 동안 다들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하군."
냉운은 다음 날 아침 즈음 소주로 들어가려던 마음을 바꾸어 곧 소주
로 나는 듯 움직여 갔다.
날이 어두워질 무렵, 냉운은 소주 안으로 발을 디딜 수 있었다. 거리
의 모습은 아무런 변함도 없이 그를 마중했고, 소주를 떠날 때와 마
찬가지로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다.
냉운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냉가장의 소장주가 비록 천하기재로 알려졌으나 늘상 장원 안에 지냈
기에 그의 얼굴을 대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또한 떠나기 전과 너
무도 달리진 모습이 아닌가.
병약했던 흔적은 그에게서 찾아볼 수 없다. 얼굴을 아는 사람이라도
한눈에 그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냉운은 냉가장을 찾기 이전, 염가장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냉가장은 거의 빈집이리라.
절름발이가 되어 구사일생한 청강권 한 사람만이 냉가장을 지키고 있
지 않겠는가?
하나, 염가장은 그의 처가(妻家)가 될 낯익은 장소였다.
친아버지 이상으로 그를 아껴 주었던 염광천과 항상 냉정해하던 냉운
을 지아비로 여기고 있는 염방채가 염가장 안에 있으리라.
냉운은 염방채가 다 컸으리라 생각하며.
"내가 훌쩍 떠났으니 걱정이 많았겠지!"
그는 자신을 찾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수고했으리라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원수에 대한 것은 밝혀졌는지 궁금하군.'
냉운은 강남대협 제영천이라는 이름을 기억했다.
강남대협은 협맹의 맹주가 아닌가!
그가 혼신의 힘을 다해 냉가장의 원흉에 대해 조사했다면 지금쯤 원
흉이 누구인지 밝혀졌을 것 같다.
냉운은 혹시 하는 마음에 발걸음을 더욱 빠르게 했다.
사흘 후면 운명의 그날이다.
냉가장이 피로 씻기던 날, 그날의 참상을 냉운은 단 하루도 잊은 적
없다.
"장례식에 참가하지 못한 불효를 씻어야 할 텐데……."
냉운은 중얼거리며 지극히 낯익은 소주 남대가(南大街) 끝 부분에 도
달하게 되었다.
거대한 장원 하나가 있었다.
그곳이 바로 염가장이었다.
냉운은 반가운 마음에 염가장원이 대문을 향해 걷다가 한순간 벼락맞
은 사람같이 되어 걸음을 멈췄다.
"이, 이럴 수가……?"
냉운은 눈을 의심했다.
염가장원의 대문은 낡을 대로 낡았고, 표면에는 거미줄이 가득 덮여
초라해 보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두 개의 커다란 나무판을 십자 모양으로 교차시켜
문을 열지 못하도록 봉했다는 것이었다.
"폐가(廢家)가 되었다니……."
냉운은 한동안 넋을 잃고 봉해진 대문을 바라보았다.
무당 속가장문인으로 천하에 그 무명이 자자한 염광천의 장원이 어찌
이 지경으로 변할 수 있단 말인가?
그가 떠난 후 냉가장의 흉수가 들이닥치기라도 했단 말인가?
냉운이 망연자실해할 때.
"여보시오!"
누군가 큰소리로 냉운을 부르며 다가섰다.
나이 서른 정도 되는 표사( 士) 차림의 황의인이었다. 그는 냉운을
향해 눈을 부라리며 엄히 말했다.
"근처를 얼씬거리다가는 도적으로 오인받기 쉽소. 어서 그 앞을 떠나
시오!"
"도, 도적이라니?"
냉운이 얼떨떨해하자.
"허허……, 염가장이 멸망한 후 염가장의 재산을 노리는 도적들이 수
없이 많았소. 하나, 도적질하는 데 성공한 사람은 없었소."
화의장한은 그제서야 냉운이 점잖고 온화하게 생긴 청년이라는 것을
알고 누그러진 말투로 말해 나가는 것이었다.
"염가장이 멸망했다니요?"
냉운이 흠칫 놀라 물었다.
"휴! 모두 협맹 때문이지요."
황의장한이 한숨 지으며 괴로운 표정이 되었다.
"협, 협맹?"
냉운이 다시 놀라워하자.
"모르시는군요. 작년, 협맹이 수라신궁(手羅神宮)과 격돌해 산산이
붕괴된 직후 이곳 염가장도 수라신궁에 의해 무너졌다는 것을……."
황의장한은 냉운이 그렇게 평범한 소문을 모른다는 데 놀라워하며 아
는 대로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정파 협사들의 모임인 협맹은 거의 무너졌고, 잔당
몇몇이 권토중래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라 했다.
협맹이 무너진 이유는 너무 많은 적 때문이었다.
협맹의 적은 수라신궁과 잔혼사, 두 파였다.
두 파는 천하에서 가장 막강한 문파가 아닌가!
협맹은 양대 강적과 싸우다가 결국 완전히 무너져 버리고 만 것이다.
"협맹이 무너진 근본적 이유는 삼 년 전, 협맹의 태상맹주이신 비룡
신군 이하 협맹의 절세고수 스물다섯 분이 의문리에 실종되었기 때문
이오."
"네?"
"허허……, 아무것도 모르는 청년이군."
황의장한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해 가며 다시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다
.
삼 년 전, 천하를 놀라게 한 가지 사건이 있었다.
어느 날인가 협맹의 절정고수 수십 명이 떼죽음된 시신으로 발견되었
고, 그 일을 조사하기 위해 수년 동안의 은거를 깨고 나타났던 삼기
의 우두머리 비룡신군이 다시 의문리에 실종되었다는 것이 그 일이다.
'비룡신군께서 실종되셨다니…….'
냉운은 비룡신군이 자신의 반역 제자 하나를 잡기 위해 강호로 돌아
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그의 예언은 맞은 셈인가?
― 노부는 그 반역 제자의 적이 못 된다.
비룡신군이 침통히 한 말이 아직 귀에 생생했다.
황의장한의 말이 다시 귀를 때렸다.
"비룡신군과 강남대협이 사라진 후, 협맹은 천하를 장악하려 하는 잔
혼사에 의해 크게 당했소. 그래서 힘이 반으로 줄어들었다가…… 결
국 가장 강한 수라신궁에 의해 완전히 멸망했소. 이곳 염가장도 그때
멸망했소."
"장, 장주는?"
냉운이 급히 묻자.
"염가장주는 염가장이 멸망하기 훨씬 전 강남대협과 함께 실종되었으
니 생사(生死)를 알 수 없고, 분명한 것은 살아난 사람이 없다는 것
이오."
"다, 다 죽었단 말씀이오?"
"솔직히 이야기하면 그렇소."
"으으……!"
냉운의 눈알이 시뻘겋게 번쩍였다.
냉운을 깔보며 이야기하던 황의장한은 그제서야 냉운이 무공을 숨기
고 있는 절세고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냉운의 눈빛을 감히 마주 볼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황의장한은 식은땀으로 속옷을 적시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냉운
은 그가 사라져 가는 것도 알지 못하고 한참 동안 분노한 눈빛을 폭
사해 냈다.
"수라신궁! 잔혼사!"
냉운은 원통히 중얼거리며 염가장의 담을 바라봤다.
'나를 기다리지 않고 돌아가실 수가 있소?'
냉운의 눈 주위가 붉어졌다.
'낭자를 만나 나의 아내로 맞이하려 했는데…….'
냉운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훌쩍 날아 담을 뛰어넘었다.
휙!
염가장 안의 지리라면 눈을 감고서라도 환히 알 정도였다.
냉운은 염가장원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묵죽헌(墨竹軒)을 향해 흑
선(黑線)을 그으며 움직여 갔다.
사람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넓은 염가장이 완전히 비어 있었고, 화려하고 웅장하던 건물들은 불
타 무너진 채였다.
한스러운 순간이었다.
세상을 원망하는 마음이 생겨나 살기(煞氣)로 화해 갔다.
휘휙!
냉운은 잠깐 달려 묵죽헌을 에워싸고 있는 울창한 묵죽림(墨竹林) 앞
에 떨어져 내리게 되었다.
"염방채마저 죽었다면 수라신궁을 찾아가 개미새끼 하나 남겨두지 않
고 다 죽여 버리리라!"
냉운은 중얼거리며 묵죽림으로 걸어 들어갔다.
"흠!"
냉운은 근처에서 들리는 한숨 소리를 알아듣고 급히 호흡을 멈췄다.
삼 장 앞쪽에서 들리는 숨소리였다.
'누구일까?'
냉운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맹주(少盟主)마저 실패했으니…… 이제 내 차례군."
아주 낯익은 말소리였다.
냉운의 얼굴이 홍시같이 붉어졌다.
목소리가 바로 염방채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지 못할 리 없는 냉운이
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그렇게 착한 여인이 쉽게 죽을 리 있나?'
냉운은 감개무량해하며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발걸음 소리를 죽여가며 열 걸음 걷자, 백의인영(白衣人影) 하나가
보였다.
묵죽헌 앞, 화로 하나를 놓고 쭈그리고 앉아 약을 달이고 있는 절세
가인(絶世佳人) 하나가 있었다.
등에 쌍검(雙劍)을 메고 머리는 활동하기 좋게 질끈 동여맨 경장 차
림의 여인인데, 용모가 지극히 빼어났고 수려하기가 천하제일이었다.
옷자락 사이로 드러나 보이는 목 윗부분의 피부가 눈보다 희었고, 섬
섬옥수는 뼈가 없는 것같이 보드라워 보였다.
'낭자!'
냉운은 백의여인이 바로 자신의 정혼자 염방채라는 것을 알고 한동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죽은 사람을 만난 듯 반가웠다.
'눈물을 흘리다니…… 바보 같으니라고…….'
냉운은 자기 자신을 책망하며 얼른 소매로 눈물을 지웠다.
수선화 마냥 고운 자태로 성숙한 염방채. 예전의 귀여웠던 모습은 사
라지고 성숙한 여인의 자태가 느껴진다.
사실 염방채는 냉운이 고독하던 시절 그를 지켜 주던 하나의 힘이었
다. 기다리는 여심이 있었기에 그 고통스런 나날을 쉽게 견뎌내지 않
았던가.
냉운이 온갖 상념을 떠올리고 있을 때.
"음, 이제 약이 다 되었군."
염방채는 그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화로 위에서 부글부글 끓는 약
탕기를 가볍게 들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냉운은 그녀를 부르려다가 일순 멈칫했다.
염방채의 모습이 너무도 신중해 보여 감히 방해할 수 없어서였다.
'병자가 있는 모양이군.'
냉운은 염방채의 얼굴 가득 수심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는 데 놀라
워하며 염방채의 뒷모습을 향한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염방채는 무척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약을 짜 귀퉁이가 일그러진 그릇
에 담아 나무 쟁반 위에 얹어 묵죽헌 안으로 갖고 들어갔다.
"으음……."
안에서 사나이의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냉운은 입안이 타 들어가는 듯한 답답함을 맛보았다.
'설마 염방채가 남정네와 함께 기거하지는 않겠지!'
냉운을 부정하려 했으나 그것은 이미 사실로 굳어진 것이었다.
염방채가 들어서는 방 안, 상반신을 벗은 건장한 사나이 하나가 침상
에 반쯤 기댄 자세를 하고 있었다.
얼굴에는 핏기가 없고, 입술이 검게 탄 것으로 보아 내상이 깊음에
틀림없었다.
그의 용모는 매우 준수했다.
그는 염방채가 들어서자 부끄러운 듯 이불자락으로 벌거벗은 앞가슴
을 가리며 한숨 섞어 말했다.
"소저에게 이런 수고를 끼치게 해 부끄럽소."
부드럽고 다정다감한 말투였다.
"아, 그놈들이 독진(毒陣)을 쳐두었을 줄 짐작했겠습니까? 다음 번에
독에 대한 준비를 하고 가야겠습니다."
염방채가 웃는 얼굴을 하고 약그릇을 내밀었다.
청년은 받아 단숨에 들이마셨다.
쓰다는 표정을 짓지 않는 것으로 보아 마음이 어지간히 지독한 사람
일 것이다.
그는 약그릇을 돌려주고 씹어 뱉듯 말했다.
"놈들이 사조(師祖)를 연금해 두는 이유는, 협맹이 다시 일어나지 못
하게 하자는 것이 아니겠소?"
"은옹(隱翁)은 협사들의 지주가 되시는 분입니다. 그분이 구출되는
날이면 협맹이 되살아날 것입니다."
"그렇소. 그들은 감히 사조를 해치지 못하오. 가두기는 했으나 감히
해칠 수는 없소. 기필코 그분을 구할 작정이오."
"마땅히 그러셔야지요."
"물론이지요."
염방채가 슬쩍 웃었다.
"감사하오!"
청년이 염방채의 손을 바짝 끌어당겼다.
염방채는 약간 움찔했으나 그의 손을 떼어내지는 않았다.
"수년 전 실종되신 가부(家父)께서는 협맹의 모든 일을 내게 맡기셨
소. 하나 소생은 불충이도 협맹의 우두머리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
했고, 협맹은 풍비박산이 되었소. 이제 낭자의 도움이 필요하오."
간곡히 말하고 있는 청년은 냉운이 한 번 본 일이 있는 제소옥(帝少
玉)이라는 청년 고수였다.
그의 외호는 천외옥룡(天外玉龍)이었다.
그는 강남대협 제영천이 실종된 후 협맹의 소맹주로 활약했었다.
하나 수라신궁과 잔혼사, 그리고 백화궁은 천외옥룡이 상대할 수 없
이 막강한 상대가 아닌가!
그러고 보면 염방채도 최근에야 염가장 안으로 들어왔던 것이리라.
"제 소협은 아무 심려 마시고 내상 회복에 치중하세요. 이곳은 수라
신궁의 손길이 닿지 않는 장소이니, 편히 쉬실 수 있습니다."
"아, 낭자의 은혜에 어찌 보답해야 좋을지 모르겠군."
제소옥은 눈에 눈물을 매달았다.
숨어 지켜보고 있던 냉운은 제소옥이 염방채를 끔찍이 사랑하고 있다
는 것을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지난 삼 년 간 정이 깊어진 모양이군.'
냉운의 마음은 심해(深海)와 같이 침잠되었다.
'염 소저가 살아 있는 것을 본 것만으로 만족해야지. 나는 죽은 사람
으로 알려지지 않았던가? 염 소저를 나무라서는 안 된다.'
냉운은 염방채가 자신을 잊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삼 년 전, 모든 사람의 기억 속에서 떠난 과거의 인물에 지나지
않았다. 과거를 돌이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로 여겨졌다.
냉운은 착잡한 마음이 되어 있다가 품안에서 약병 하나를 꺼냈다.
마개를 열자 단약 다섯 개가 굴러 나왔다.
냉운은 그 중 한 알을 집고 네 개는 다시 약병 안에 넣었다.
그가 꺼낸 것은 무림기인전 안 불사전에 있었던 기사회생의 영약 삼
선단(蔘仙丹)이었다.
'이것이라면 제소옥을 하룻밤 새 낫게 할 수 있다. 그의 사문 청성파
는 냉가장의 친구이니, 돕는 것이 나의 도리이리라.'
냉운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단약을 가볍게 집어던졌다.
단약은 서서히 떠올랐으며 방안에 다가서는 순간 파공성을 끌었다.
"누구냐?"
염방채가 아주 경미한 파공성을 알아듣고 밖으로 뛰어나오며 냉운이
퉁겨낸 삼선단을 잡아냈다.
아주 놀라운 무공이었다.
염방채는 과거의 염방채가 아니었다. 그의 무공은 절세고수 수준이었
다. 그 사이 기연을 만나 절정무공을 익혔기 때문이었다.
염방채는 파공성을 끌며 날아들던 것이 한 개 단약이라는 것을 알고
기겁했다.
"누, 누가 이런 것을……."
염방채가 중얼거릴 때.
"나는 협맹의 친구가 되는 사람이오. 낭자께서 받아낸 물건은 삼선단
이라 하는 영약이오."
어디선가 신비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서 말하는 것일까?'
염방채는 목소리의 출처를 찾으려 했으나 허사였다.
그 목소리는 하늘 위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천외옥룡이 복용하면 곧 나을 것이오."
말이 끝나며 죽림 안에서 날아오르는 흑의인영 하나가 있었다.
염방채는 말한 장본인이 바로 근처에서 말했다는 데 놀라워하며 뒤쫓
을 듯한 동작을 취했다. 그러나 흑의인영은 찰나지간 그녀의 망막에
서 자취를 감추었다.
"절, 절세고수다.
염방채는 경악하며 제소옥 쪽을 바라봤다.
제소옥은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누구인지는 모르나 무공이 신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군. 협맹의 친구
분이라니…… 드디어 협맹이 되살아나게 되었단 말인가?"
제소옥은 감루를 흘리고 있었다.
그는 수년 간 모진 고생을 한 결과, 예전과는 달리 마음이 약한 청년
으로 변해 있었다.
'실종되신 아버님은 어디 계실까? 그리고 홀연히 사라진 소청(少靑)
이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제소옥이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을 때.
"비슷한 목소리다. 냉 공자님의 말소리와 비슷한 목소리다!"
염방채는 홀연히 사라진 흑의인영의 잔상을 되새기며 알쏭달쏭한 말
을 중얼대고 있었다.
한편 삼선단을 던지며 묵죽헌을 떠난 냉운은 혼신의 공력을 다해 무
영신법(無影神法)을 시전해 밤하늘을 갈랐다.
휘이익 ―!
검은 구름이 떠가는 듯했다.
대략 십 리 갔을까.
냉운은 소주 외곽 지대 수천 평 넓은 규모를 차지하고 있는 아름다운
장원의 근처에 이르게 되었다.
정문 근처는 불야성(不夜城)이었다.
그것이 냉운에게도 또 한 번 경악을 주었다.
"이럴 수가? 여기가 냉가장이란 말인가?"
냉운은 고향집을 찾아온 것이었다.
한데, 냉가장은 페허는커녕 이전보다 더 화려한 장원으로 변모되어
냉운의 눈앞으로 들어섰던 것이다.
화려하리라 생각했던 염가장은 폐허이고 폐허이리라 생각했던 냉가장
은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을 줄이야, 상상이나 했겠는가?
냉운이 머뭇거리고 있을 때.
"어느 놈이냐?"
"감히 기웃거리다니…… 다리가 부러지고 싶으냐?"
여인들의 호통 소리와 함께 도검을 쥔 무림 여인 일곱 명이 훌훌 날
아 냉운 근처로 떨어져 내렸다.
여인들은 모두 경장 차림이었다.
말이 여인이지 모두 살기등등했고, 몸놀림은 건장한 사나이의 영활한
동작을 능가할 정도였다.
"호호……, 불청객치고는 미장부(美丈夫)인데?"
그 중 한 여인이 조롱하며 말했다.
"어떤 년이 명령을 어기고 바람을 피운 것이 아니냐?"
"호호호……, 그래도 봉을 물었군."
말하는 투가 화적 패거리를 능가할 정도로 거칠었다.
"무례한 계집들이군."
냉운은 불끈 일어나는 화를 참을 수 없었다.
'냉가장은 내가 태어난 곳이고 부모님이 수십 년을 지낸 곳이다. 더
러운 계집들이 점거할 수 있는 장소는 아니다.'
냉운이 눈을 부릅뜨자, 일곱 여인 중 키가 냉운보다도 크고 체격이
작은 등산만큼 우람한 여인이 성큼 걸어 나왔다.
"요놈! 감히 여기 와 눈을 부라리다니… 살고 싶지 않는 게로구나!"
"……."
냉운은 어이없어 할 말을 잊었다.
"호호호……, 자초지종을 말해. 사유가 합당하다면 아무 말하지 않겠
다. 어이해 사내들은 들어올 수 없는 곳에 발을 들였느냐?"
"흥!"
냉운은 뒷짐지며 냉소를 쳐냈다.
일곱 여인이 일제히 놀랬다.
겉보기에는 문약한 냉운이 포위당하고도 겁먹기는커녕 짐짓 황제인
양 위엄을 부리기 때문이었다.
"너희들은 웬 계집들이냐?"
냉운의 호통이 여인들의 고막에 통증을 주었다.
'보기와는 달리 내공을 갖고 있는 놈이군.'
여인들은 은근히 경계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이곳의 주인이 되는 사람이다. 내가 집을 비운 사이 슬쩍 차지
하다니…… 도적 심보라지만 너무하구나!"
냉운이 싸늘히 꾸짖자 여인들이 가가대소를 터뜨렸다.
"호호호……, 이곳의 주인이라고요?"
"네놈이 백화궁(百花宮) 사람이란 말이냐?"
백화궁이라는 말이 냉운을 놀라게 했다.
'이 천한 계집들이 백화궁의 여인들이란 말인가?'
냉운은 백화궁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었다.
망측스럽고 천박한 계집들이 백화궁의 여인들이라고는 쉽게 믿어지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너희들이 백화궁 사람들이란 말이냐?"
냉운이 놀란 표정을 하고 묻자.
"그렇다. 우리들은 백화궁 강남단(江南壇)의 호위(護衛)들이다."
"백화궁 강남단은 손님이 오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기웃거리는 자는
모두 백화궁의 적이다."
여인들 중 하나가 횡소천군(橫掃千軍)의 초식으로 냉운의 허리께를
비스듬히 후려쳐 왔다.
휭!
여인의 주먹이라고는 하나 실린 힘은 수천 근이었다.
그것에 격타당한다면 굳은 바위들이라 해도 산산이 부서져 버리고 말
것이다.
"말보다 주먹이 앞서는군."
냉운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하고 좌측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엇?"
주먹을 쳐내던 여인은 냉운이 슬쩍 피하는 통에 중심을 잃고 앞으로
뒤뚱뒤뚱 일곱 걸음 나아가서야 겨우 신형을 안정시켰다.
"보법(步法)을 알고 있군."
헛주먹질한 여인이 노해 외치며 귀두도(鬼頭刀)를 들어올렸다.
"잠깐!"
냉운은 천한 여인들하고 싸우고 싶지 않아 얼른 손을 내저었다.
"나는 냉가장의 주인이다. 너희 우두머리를 불러라."
"뭐, 뭐라고? 네가 냉가장의 주인이라고?"
"냉가장은 완전히 멸문(滅門)했거늘, 어찌 네놈이 냉가장의 주인이
될 수 있단 말이냐?"
모두 얼떨떨해했다.
그 중 나이 스물 정도 되어 보이는 음탕한 생김새의 홍의녀 하나가
냉운 곁으로 다가서며 앙칼지게 말했다.
"네가 주인이라 해도 상관없는 일이다. 이곳은 이 년 전부터 백화궁
의 영역이 되었다."
"백화궁의 땅이 되었다고?"
냉운은 화가 끓어올라 견딜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호호호……, 빼앗은 것이 아니다. 제 값을 치르고 손에 넣었다. 그
것을 모르고 오다니, 네놈은 미친놈이 아니냐?"
냉운은 곧 여인들의 놀림감이 되고 말았다.
"돈을 주고 샀다고?"
"그렇다."
여인들이 딱 잘라 말하는 데는 어쩔 수가 없었다.
'설마 청강권이 돈을 받고 냉가장을 팔지는 않았겠지?'
냉운은 청강권을 알고 있었다.
그는 목을 내놓을지언정 냉가장을 더러운 계집들에게 팔아넘길 사람
이 아니라는 것을.
"으음……."
냉운이 벌레 씹은 표정을 하자.
"그 매매의 증서도 있다. 네가 냉가장의 전 주인이라 해도 소용없다.
백화궁은 남의 물건을 거저 빼앗는 사람들이 아니다."
여인들이 의기양양히 말했다.
"얼마 주고 샀느냐?"
냉운이 한참 입을 다물다가 문득 물었다.
"……."
여인들은 금세 굳은 표정이 되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냉운은 부드러운 표정을 하고 청아히 물었다.
"나는 백화궁의 친구다. 그러니 사실대로 말해 다오! 값을 말한다면
다시 살 것이니……."
"백화궁의 친구라고?"
모두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냉운은 굳이 유화선자 일타운의 이름을 들먹이고 싶지 않아 잠시 함
구했다.
여인들은 전에 비해 조심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얼마 주고 샀는지 말해 다오."
냉운이 다시 말할 때였다.
파공성이 일어나며 냉운 앞으로 떨어져 내리는 중년 녹의여인 하나가
있었다.
손에 일곱 자 길이 금지팡이를 든 추악한 여인이었다.
"단주(壇主)!"
"단주님!"
일곱 여인이 일제히 절을 했다.
"흥! 어느 놈이 소란을 떠드는가 했더니 애송이였군."
녹의여인은 두툼한 입술을 쩌억 벌리며 거칠게 말을 내뱉었다.
구역질 나는 모습이었다.
"어느 놈이기에 백화궁 강남단의 정적을 깨뜨리느냐? 이실직고하지
않으면 저승으로 보내 주겠다."
"입이 거칠군."
냉운의 표정이 냉기(冷氣)를 띠기 시작했다.
"흐흐흐…… 백화궁이 신비마제 때문에 퇴조했다고는 하나, 아직 강
호를 지배하는 삼대문파 중 하나이다. 이곳 강남단은 백화궁의 무수
한 분타 중에서도 가장 큰 분타이다. 네놈 따위가 날뛸 수 없는 무
림성지(武林聖地)다. 알겠느냐?"
"이곳이 무림성지이건 지옥이건 상관하지 않는다. 나는 냉가장의 주
인이 되는 사람이다. 너희들이 어찌해 나의 집을 점거하고 있는지
궁금할 뿐이다."
"냉, 냉가장이 너희 집이라고?"
추악한 녹의부인이 흠칫 놀라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렇다. 나는 지난 삼 년간 고향을 떠났었다. 나는 하인에게 이곳을
부탁했었는데, 어찌해서 백화궁의 분타가 되었는지 모르겠구나."
"으음……."
녹의여인은 볼을 씰룩이며 금지팡이를 아주 가볍게 들어올렸다.
자신의 무공을 과시하듯.
"혈겁을 당해 멸망한 냉가장의 후손이었군. 그러나 이곳은 이미 냉가
장이 아니다. 그러니 돌아가라!"
반 협박이었다.
"돌아갈 수 없다."
"흐흐……, 우리는 돈을 주고 냉가장의 가옥과 토지를 샀다. 알겠느
냐?"
"누구에게 샀느냐?"
"……."
"흥! 구린 구석이 있는 매매겠지."
냉운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아니다. 돈을 치르고 샀다."
녹의여인이 정색을 했다.
"얼마를 주고 샀느냐?"
"십, 십만(十萬) 냥(兩)."
녹의부인이 되는 대로 말했다.
'괘씸한 계집들. 냉가장 안에 숨겨져 있는 보화의 값어치만 해도 수
천만 금이고, 집을 짓는 데 들인 돈이 황금으로 일천 근이거늘…….'
냉운은 백화궁에 대한 호감을 계속 갖고 있을 수 없었다.
그러는 한편으로 청강권에 대한 걱정이 생겼다.
'청강권은 어찌 되었을까? 그의 무공을 생각한다면 백화궁의 계집들
을 당하지 못했을 텐데…….'
냉운은 괴로운 표정이 되어 품안에서 네모난 황금상자를 꺼냈다.
중인의 눈길이 냉운이 꺼낸 금상자에 집중되었다.
뚜껑이 열리며 찬란한 보광(寶光)이 밤하늘을 물들였다.
"무, 무수한 보물이군."
"수천만 냥의 값은 되겠군."
모두 얼빠진 표정이 되어 냉운의 행동을 예의 주시했다.
냉운은 상자를 뒤져 손톱만한 야명주(夜明珠) 열 개를 꺼내 녹의부인
쪽으로 내밀었다.
"명주 한 알의 값은 일만 냥이 넘는다. 열 개만도 십만 냥은 족히 될
것이다. 이것으로 냉가장을 돌려받겠다."
그 순간이었다.
"소주인(少主人)!"
어둠에 잠긴 냉가장의 담 쪽에서 허겁지겁 뛰어나오는 절름발이 거지
하나가 있었다.
"소주인, 돌아오셨군요?"
절름발이가 나타나자 근처가 악취로 가득해졌다.
머리는 봉두난발에, 손톱만한 이가 들끓었고, 옷은 걸레보다도 더러
운 청삼(靑衫) 차림의 장한이 냉운 앞으로 다가와 오체복지했다.
"살아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흐느껴 우는 사람은 바로 냉가장의 충복 청강권이었다.
"어, 어찌 된 일인가?"
냉운도 눈시울을 붉히며 청강권 바로 앞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청강
권의 상반신을 일으켜 주었다.
"저, 저는 이 순간만을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청강권의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되었다.
"자네는 그간 어찌 지냈나?"
"속하는…… 소주인이 돌아올 날만을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백화궁의
요사스런 계집들이 저를 개 패듯 하며 갖은 수모를 주었으나 저를
쫓지는 못했습니다. 저는 근처 산 속에 토굴을 파 기거하며 소주인이
돌아오실 날만을 기다렸습니다."
"왜 이곳을 팔았나?"
"팔, 팔다니요?"
청강권이 정색을 했다.
"그럼 판 것이 아닌가?"
"제가 어찌 이곳을 팔겠습니까? 속하는 냉가장을 지키며 저 계집들에
게 냉가장을 뺏기는 불충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 죽고 싶었
으나…… 언제고 소주인이 오신다는 생각에 그 동안 광인(狂人) 행세
를 하며 오줌을 먹고 가시덤불로 옷을 해 입으며 이렇게 목숨을 부지
해 왔습니다."
"광, 광인으로?"
"제가 제정신이었다면 저 계집들이 저를 죽이지 않고 놔두었겠습니까
?"
청강권의 말이 거기 이를 때였다.
"호호호……!"
백화궁 강남단주의 웃음소리가 청강권의 말을 끊었다.
"이제 보니 진짜 미친 것이 아니었군."
녹의여인의 눈에서 살광이 흘러나왔다.
"고얀 년!"
청강권이 벌떡 일어나 녹의여인을 향해 침을 뱉었다.
녹의여인은 날아드는 침방울을 피하여 금지팡이를 번쩍 쳐들었다.
"저 두 놈을 당장 죽여라!"
직후, 근처에 서 있던 일곱 여인이 검을 뽑아내어 냉운과 청강권을
현란한 검막(劍幕) 안으로 가두었다.
스스슥 ―.
하늘을 가릴 듯한 만천검광(滿天劍光).
냉운은 다가오는 검날을 보면서도 피할 생각조차 않았다.
"천한 계집들!"
노한 목소리와 함께 한 줄기 강풍이 일어났고, 그 순간 검막이 거두
어졌다.
펑! 펑!
"크으으으……!"
"으악!"
백화궁의 여고수 일곱이 거의 동시에 피를 뒤집어쓰고 허공으로 날아
올랐다. 그녀들이 어찌해 실 끊어진 연처럼 튀어오르는지 아는 사람
은 냉운 한 사람뿐일 것이다.
녹의여인은 사색이 되어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절, 절세고수였군."
"흥!"
냉운은 냉막이 외치며 손을 들어올렸다.
"일 장에 쳐죽이리라!"
"으으……!"
녹의여인은 단 일 초로 일곱 고수를 허공으로 날려보낸 냉운의 무시
무시한 무공에 겁을 집어먹고 식은땀을 비 오듯 흘렸다.
냉운은 손을 후려칠 듯하다가 음, 소리를 내며 손을 내려뜨렸다.
"일각의 기회를 주겠다. 그 동안 냉가장을 완전히 비워 놓아라. 그렇
지 않으면 이런 꼴이 되리라!"
냉운은 중얼거리듯 말하며 손을 슬쩍 휘둘러 푸른 기류(氣流)를 쏟아
냈다.
벼락 치는 소리와 함께 오 장 밖에 서 있던 사 장 높이 잣나무 한 그
루가 산산이 박살나 허공에 뿌려졌다.
"으으으……!"
녹의여인은 오금이 얼어붙는 듯해 냉가장 안으로 줄행랑쳐 들어갔다.
순간.
"소주인! 꿈만 같습니다."
청강권이 냉운의 두 다리를 붙잡으며 오열을 터뜨렸다.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죽었다 여기던 소주인이 절세의 무사가 되어
돌아왔으니…….
"속, 속하는 지금 죽는다 해도 여한이 없습니다."
"청강권, 자초지종을 말해 보게. 어찌 된 일인가?"
"흐흐……, 이 년 전까지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모두 소주인이 객
사했다고 믿었으나 속하만은 소주인이 살아 계시리라 믿고 냉가장을
지키며 소주인이 돌아오실 날만을 기다렸습니다."
"……."
"이 년 전, 염가장이 수라신궁 무리들에 의해 멸망한 후 냉가장은 백
화궁의 소굴이 되었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염 소저가 있어 도적들이
범접하지 못했는데, 염 소저가 돌아가신 후……."
"염 소저는 살아 있네!"
"예? 염 소저께서 살아 있다고요?"
청강권이 깜짝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내 눈으로 보았네. 그러니 심려 말게!"
"아, 하늘의 도우심입니다. 염가장이 냉가장같이 피로 씻긴 후 아무
런 소식도 없어 염 소저도 죽은 것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청강권의 모습은 아주 초췌했다.
그는 냉가장을 뺏기던 날 무공을 잃었고, 그 후 인간 이하의 생활을
하느라 다 죽게 된 상태였다.
"지난 삼 년, 너무도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협사(俠士)들의 모습은
어디 가도 볼 수 없습니다. 모두 백화궁, 수라신궁, 그리고 잔혼사
무리 때문입니다. 그들이 수많은 협사들을 죽이고 도적질을 일삼아
세상이 어지러워졌습니다."
"백화궁을 친구로 알았는데……."
냉운이 씁쓸히 중얼거리자.
"백화궁을 친구로 아시다니요?"
청강권이 아연실색해했다. 그리고는 성난 눈빛을 하고 원통히 말했다
.
"매우 악독한 계집들입니다. 그리고 음탕해 사내를 보기만 하면 발정
한 암캐같이 날뛰는 무리들입니다. 속하도…… 지난 이 년간 그 계집
들의 놀림감이 되어 무진 고생을 했습지요."
"하하……, 고생은 이제 없을 것이야."
냉운은 번잡해진 마음속을 확 풀어 버리는 듯 통쾌히 웃었다.
그러는 사이 일각이 지났다.
냉운과 청강권은 냉가장의 정문을 통해 위풍당당히 들어갔다.
사람의 모습은 없었다. 그러나 반가이 맞아주는 것들이 너무도 많았
다. 기와 조각 하나, 풀 한 포기도 낯설지 않았고, 그 안의 공기도
다정하기만 했다.
안은 지분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백화궁의 요녀들이 냉가장을 크게 훼손시켰고, 수많은 물건들을 부숴
버려 이전보다는 아름다움이 덜했다.
그러나 정든 고향집임에는 틀림없었다.
두 사람은 바삐 걸어 죽림 사이의 야트막한 둔덕에 이르게 되었다.
그 위, 잡초 무성한 봉분이 두 개의 사발같이 나란히 누워 있었다.
하나는 오래 전에 만들어진 무덤이었고, 하나는 삼 년 전에 만들어진
무덤이었다.
냉운의 어머니 아버지가 묻혀 있는 곳이었다.
"제가 있을 때는 항상 돌봐 깨끗했는데…… 요사한 계집들이 들이닥
치는 통에 묘지를 손질할 수 없었습니다."
청강권은 송구스러움을 감출 수 없다는 듯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냉운은 봉분을 보는 순간 두 줄기 회한에 찬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버님!"
냉운은 낯익은 어머니의 묘 옆에 만들어져 있는 묘가 자신이 없는 새
매장된 아버지 냉엽문의 묘라는 것을 알고 봉분을 부둥켜안았다.
"소자, 이제야 돌아왔습니다."
냉운은 한참 동안 눈물을 거두지 못했다.
<일대영걸냉엽문공지묘(一代英傑冷葉文公之墓)>
묘비가 서 있었다.
비문을 새긴 사람은 냉엽문의 죽마고우(竹馬故友) 염광천이었다. 냉
엽문은 상서(尙書) 자리에 올랐던 사람이나 항상 초야(草野)에 묻히
기를 좋아했던 담백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일대영걸이라 비문에 적었
던 것이다.
냉운은 새벽이 되도록 무덤가를 떠나지 못했다.
'사흘 후면 기일이니, 그때까지 여기 머물러야겠군.'
냉운은 마음속으로 무엇인가를 결심한 후 새벽안개 속으로 걸어 들
어갔다.
청강권이 어깨를 으쓱으쓱거리며 그 뒤를 따랐다.
아주 조용한 새벽이었다.
하나, 지금 이 순간은 무림 역사의 일장(一章)을 이룰 만한 순간이었
다.
불귀의 전설을 깨고 강호로 들어선 무림기인전주, 그의 가슴 속에는
풍운이 변색할 결심이 굳어지고 있었다.
풍운!
이제 일어날 풍운은 지난 삼 년 간의 풍운을 일거에 날려 버릴 대폭
풍이 될 것이다.
< 2권으로 계속됩니다. >
첫댓글 감사합니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