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사지나 허물어진 유적지에 가면 살아가는 일의 무상함이 가슴을 훅 치고 들어오기 마련이지만, 공주와 부여에 가면 유독 비장함이 감돌아 감상적이 되기 쉽다.
이는 망국의 급박함을 알려주는 황산벌 계백의 결사항전이나 낙화암의 비극적 스토리 때문이겠지만, 5세기 백제의 개로왕과 6세기 성왕이 전장에서 고구려와 신라에게 참살되고 수도를 웅진과 사비로 두번이나 옮기면서 중흥을 꾀하다가 석패한 기록때문일지도 모른다.
4세기 백제의 근초고왕은 고구려를 침략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는데, 5세기 고구려의 장수왕은 3만명의 군사로 선대의 원수를 갚고 백제로부터 한강유역을 빼앗게 된다.
유난히 바둑 좋아하다 그 이유 때문에 고구려의 계략으로 기름지고 교통좋은 수도 알토란같은 한강유역을 빼앗기고 장수왕에게 전사한 개로왕이후의 역사는 웅진(공주)에서 60여년간 전개되었다.
개로왕의 태자 문주왕은 급한대로 황망하게 공주 공산성으로 천도했고, 이후 웅진시대의 전성기를 구가한 무령왕은 중국 남조와 교류하면서 한강유역을 잠시 수복하기도 했다.
부여에 가면 백마강이나 낙화암이 떠오르지만 공주에 가면 무령왕이 차지하는 비중이 대단해서 무령왕릉이나 공주박물관을 답사하는 일은 거의 보물찾기 수준이다.
백제의 유적과 유물들은 부드럽고 섬세하며 격조 높은 백제만의 아름다움으로 인하여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나오는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다(儉而不陋 華而不侈)”는 말이 가슴속에 찬찬히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최근에는 공산성 발굴이 본격화되고 마곡사까지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되면서 학술적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1. 굽이치는 금강 바라보며 공산성에 올라가
이번 4월 우리 답사 여행의 들머리 공산성에 가면 천오백년 전 몽촌토성 부근의 고향을 등지고 떠나온 백제인의 분루와 애잔함 이외에도 의자왕이나 통일신라시대, 조선후기의 역사도 서려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산성은 백제시대는 물론 조선시대까지 지방행정의 중심지로서 백제가 멸망할 당시에도 의자왕이 일시 피난하기도 하였으며, 또 이곳을 거점으로 나당연합군에 대항하는 백제부흥운동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또한 822년에 김헌창의 난이 이곳에서 평정 되었으며, 1623년 이괄의 난 때 인조가 피난하였던 역사가 서려있는 곳이기도 하다
공산성은 문주왕 원년에 한강유역에서 천도하고 다시 성왕 16년(538년) 사비(부여)로 천도할 때까지 5대왕, 64년간 왕도를 지킨 성이다. 고려시대에는 공주산성, 조선시대에는 쌍수산성으로 불리며 백제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오랜 역사가 켜켜이 쌓인 곳이다.
금강을 천연 해자로 삼아 백제 때는 토성으로 쌓았으며, 지금의 모습은 조선시대에 쌓은 석성이다.
굽이치는 금강을 둘러보며 공주시내를 조망할 수 있는 공산성 성벽에는 백제 고분에서 볼 수 있는 사신도의 깃발이 휘날린다.
공산성을 돌아보는 방법은 두가지가 있다. 금서루를 시작해 진남루, 광복루, 만하루, 공북루를 거쳐 다시 금서루로 되돌아오는 완주 코스가 있고, 금서루를 시작해 쌍수정과 추정왕궁지, 만하루, 공북루를 거쳐 금서루로 되돌아오는 코스도 있다. 시계 반대 방향으로 짧은 오르막을 오르면 추정왕궁지와 쌍수정을 만날 수 있는데, 경사가 완만한 성벽길이 S자로 휘어져 제법 그림 좋은 풍경이 된다.
최근 발굴조사로 왕궁지와 산성내 가장 넓고 평탄한 지형에 있는 왕궁부속(건물지, 축대, 도로, 저수시설, 배수시설 등)이 확인됐고 특히 저수시설에선 옻칠을 한 갑옷과 마갑, 화살촉 등이 출토되기도 했다.
공산성안에는 백제시대의 왕궁으로 추정되는 유적들이 아직도 발굴되고 있는데, 다 둘러 보려면 두시간 이상 걸리지만, 이번 답사에서는 한시간 정도에 마쳐야하기 때문에 문화 해설사에게 간단한 설명을 듣고 공산성을 한 시간 정도 둘러 볼 예정이다.
공산성을 내려와 공주의 근대문화 문화유산인 100년 된 중동성당을 둘러보기로 한다. 중동성당은 적벽돌 외관과 아치창 장식, 하늘을 향한 첨탑 등 중세풍 고딕양식의 수직적 요소가 특징인데 분위기가 고즈넉해서 출사하기 좋은 공주의 명소이다.
2. 고전적 단아함의 백미, 중동성당
천주교가 서해안을 통해 충청도 내륙에 들어오면서 현대의 성당건축이 만들어지는데 중동성당은 그 중의 하나로 단아하면서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1898년 불란서 사람인 진 베드로 신부가 이곳에 교당을 세우고 교리 전파를 시작하면서 공주에 천주교가 자리잡게 되었다. 중동성당 건물은 1936년에 착공하여 1937년에 완공한 천주교 성당 건물로, 현재는 본당과 교육관이 남아 있다.
중동성당은 서양 중세기에 유행하였던 고딕건축양식을 따르고 있는데 평면은 약간 라틴식 십자가형이고 내부는 3랑식이다. 가파른 언덕 위에 높은 종탑을 세워 종교건물의 위엄을 표현하였으며 전통적인 목조건물에서 현대건축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모습을 건축 세부에서 살펴 볼 수 있다.
중동성당 건너편에는 충남 역사박물관이 있는데 박물관에서 성당을 바라보는 경관도 매우 아름답다.
중동성당 답사 후 점심 식사는 금강과 공산성이 바라보이는 식당 < 예가 >3층에서 할 예정이다.
3. 송산리 고분군 속의 찬란한 꽃 무령왕릉
점심식사 후 오후 답사는 무령왕릉이 있는 송산리 고분군을 산책과 숭덕전을 지나 공주박물관을 둘러보고 공주 한옥마을을 지나 마곡사로 향한다.
1971년 송산리 고분 보수 당시 우연히 무령왕릉이 원형 그대로 발굴되었을 때 신문 1면 톱으로 대문짝 만하게 금제관식과 지석이 보도되었던 기사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된다.
국보 163호인 무령왕릉 지석의 내용을 보고 당시 발굴에 참여한 김원용 서울대 고고학과 교수와 공주박물관 김영배 관장은 기절할 뻔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시대의 왕릉에서 주인공을 알 수 있는 고분이 1500년간 도굴되지 않은 채 수증기를 뿜으며 모습을 드러냈을 뿐 아니라 엄청난 양의 유물이 원형 그대로출토되었기 때문이다.
무령왕릉 지석의 명문은 다음과 같다.
“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 (寧東大將軍 百濟斯麻王) 계묘년 오월칠일에 돌아가 을사년 팔월십이일에 대묘에 예를 갖춰 안장하다.”
무령왕릉에선 108종, 46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하나하나가 작품이고 보물이다.
왕의 금제관장식(국보 제154호)과 금제귀걸이(국보 제156호), 은제팔찌(국보 제160호), 왕릉의 수호신 역할을 한 석수(石獸, 뿔 달린 동물의 형태, 국보 제162호), 무덤의 주인공 표시와 토지신으로부터 땅을 매입한다는 내용의 매지권이 담긴 지석(국보 제163호), 그리고 이 지석 위에 올려져 있던 오수전(무령왕과 왕비가 묻힐 땅을 구입한 돈) 등 수없이 많은 보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무령왕릉 출토 유물만으로 공주박물관이 차고 넘칠 정도다.
무령왕릉의 유물들은 당시 백제인들의 사상이나 가치관, 사후세계에 대한 관념 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주목받을 또 다른 점도 있다. 벽돌무덤의 무령왕릉 구조가 중국 남조 양나라 지배계층 무덤의 전형적 양식인 전축분이다.
또 백제 도자기가 뿐만 아니라 여러 종류의 중국제 도자기, 쇠로 만든 동전인 중국의 오수전 등이 나왔다. 왕과 왕비의 널(목관) 재료인 나무는 일본 특산인 금송(金松)이다. 이는 당시 백제가 중국, 일본과 활발한 교류를 했음을 잘 말해주며 백제의 개방적인 국제성이 드러난다는 분석이다.
백제 문화사를 풍부하게 복원하게 한 무령왕릉은 보존상 1997년 내부 관람이 중단됐고, 진품 유물들은 인근 국립공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삼국시대 대부분의 왕릉의 주인공을 알 수 없었던 것이 비해 무령왕에서 지석이 발견되어 고분의 주인공을 알 수 있었던 무령왕릉 졸속 발굴은 한국고고학계의 흑역사로 남아있다.
1971년 7월 발견된 무령왕릉에서는 108종 2906점이란 엄청난 양의 유물이 출토됐다. 그러나 백제사 연구에 큰 전환을 가져온 중대한 발견인데도 무덤 내부의 조사를 불과 12시간 만에 마무리해 발굴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는 많은 역사적 사실을 놓치고 말았다. 발굴 당시 주변의 여건으로 인해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지만, 한국 고고학계가 저지른 돌이킬 수 없는 과오라는 데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당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서울로 이전하려다 공주시민들의 반대로 현재까지 국립 공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데, 공주에 가면 8척 장신에 훈남이었다는 무령왕의 혼이 그대로 살아있는 듯하다.
4. 무령왕의 혼이 가득한 국립 공주박물관 관람
국립 공주박물관에는 주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 108종을 비롯한 4,600여점이 소장되어 있다.
공주박물관 입구에는 옥외전시물들이 즐비한데 중앙에 무령왕릉 입구에서 발견된 진묘수가 볼만하다.
진묘수는 중국 고대로 부터 나타나는 상상의 동물로 무덤을 지키고 죽은 사람의 영혼을 신선의 세계로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진묘수는 머리에 뿔이 있고 몸에는 날개가 달렸으며 신체 일부는 붉은색으로 칠해져 있다
무령왕릉 널길에서 발견된 진묘수를 7배로 확대하여 제작한 것인데 무령왕릉 출토 국보 제162호 진묘수를 박물관 대표 브랜드로 선정하고 관람객과 국립공주박물관을 지키는 수호신의 의미로 설치하였다
공주박물관 내부의 상설전시는 1부 < 한성에서 웅진으로 >, 2부 < 웅진백제의 문화 >, 3부 < 무령왕의 생애와 업적 >, 4부 < 웅진에서 사비로 > 등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는 주로 3부 < 무령왕의 생애와 업적 >을 위주로 관람을 할 예정이다.
3부 < 무령왕의 생애와 업적 >에서는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대부분의 출토품을 전시하여 무령왕과 웅진백제의 문화상을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하였다.
특히 무령왕릉 내부 바닥과 똑같은 크기의 진열장을 설치하고 널길과 널방에 놓였던 석수와 제사용 그릇, 왕과 왕비 목관 등을 원상태로 배치하여 마치 관람객이 무령왕릉 내부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도록 연출하였다.
웅진시대 5명의 왕중에서 4명은 귀족들에 의해 암살되거나 전장에서 죽지만 62세로 수명을 다한 왕은 무령왕뿐입니다. 무령왕릉 지석에서 사마왕이란 글이 나오는 순간 송산리 6호분이 무령왕이란 것을 직감했다고 합니다. 무령왕은 일본 고대사를 서술한 일본 < 서기 >에도 나옵니다. 일본의 섬에서 태어나 사마라는 이름으로 불리운다네요. 일본 왕실에서 그들의 선조를 무령왕계열이라 말한 기록도 있어요.
무령왕릉이 처음 발굴된 후 오랫 전에 공주갔을 때 무령왕릉 무덤 내부를 들어가서 아주 가까이서 본 기억이 있었는데 그 후에 재차 방문했을 때는 왕릉내부 보존을 위해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고 아마 지금도 내부 출입은 불가능하고 겉모양만 보고 옆에 있는 전시관을 둘러보며 아쉬움을 달래야 하리라~~~
첫댓글 나는 유홍준과 함께하는 부여답사란
책이있어 보던참인데
재은씨의 이글을보고
던져 버렸다...
유홍준이 보다 유재은이가 훨 낫다.
2편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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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아셨남?
같은 유씨이지만 더 멋진 분이신걸...
내가 가장 존경하는 고 김준엽총장님의 애제자이시고,우리 막강한 홍보국 국장님이신걸...
끝으로 내 와이프의 고교 선배님이신걸...
웅진시대 5명의 왕중에서 4명은 귀족들에 의해 암살되거나 전장에서 죽지만 62세로 수명을 다한 왕은 무령왕뿐입니다.
무령왕릉 지석에서 사마왕이란 글이 나오는 순간 송산리 6호분이 무령왕이란 것을 직감했다고 합니다.
무령왕은 일본 고대사를 서술한 일본 < 서기 >에도 나옵니다. 일본의 섬에서 태어나 사마라는 이름으로 불리운다네요. 일본 왕실에서 그들의 선조를 무령왕계열이라 말한 기록도 있어요.
무령왕릉이 처음 발굴된 후 오랫 전에 공주갔을 때 무령왕릉 무덤 내부를 들어가서 아주 가까이서 본 기억이 있었는데 그 후에 재차 방문했을 때는 왕릉내부 보존을 위해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고 아마 지금도 내부 출입은 불가능하고 겉모양만 보고 옆에 있는 전시관을 둘러보며 아쉬움을 달래야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