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12/14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09 - '날아다니는 호텔' A380 인천공항 취항
에미레이트 항공은 이날부터 26일까지 기존에 두바이~인천 노선을 오가던 보잉777 여객기와 A380을 번갈아 운항하다 27일부터는 A380만 주7회 운항할 계획이다. /0200000000AKR20091214083900004.HTML 28세 요절 고려인… “한 편 만들어 달라” 부인이 유언 러시아 록음악의 ‘전설’인 고려인 빅토르 최에게 헌정하는 러시아 영화가 제작됐다. 제목은 ‘프로스터 호체쉬 트이 즈나치’, 우리말로 ‘네가 알기 원하는 것’이다. 사망한 지 16년이 됐지만 러시아 대중음악계에 큰 영향을 미친 빅토르 최의 생전 발자취를 따라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다. 제작기간 1년 6개월에 상영시간 1시간 5분으로 다음달 14일 모스크바에서 일반에게 개봉될 예정이다. 빅토르 최는 러시아에서 인기 절정이던 1990년 공연차 들른 라트비아 수도 리가에서 자동차 사고로 28살의 나이에 요절했다. 러시아 특유의 아름다운 선율에다 공산주의 시절 저항적이며 자유 지향적인 펑크록 스타일의 노래로 소련 젊은이들로부터 커다란 인기를 모았다. 그의 요절에 충격을 받은 러시아 여성 팬 5명이 자살했고 러시아 내 타타르 공화국 수도 카잔, 우크라이나 키예프, 카자흐스탄 알마티에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생겼다. ‘혈액형’ ‘마지막 영웅’ ‘변화’ 등 수많은 히트곡을 남겼다. 영화 제작자 드미트리 네즈베츠키는 “그의 음악을 들으며 성장했고, 빅토르가 이끌었던 록그룹 ‘키노’ 공연을 보러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모스크바에서 밤새 열차를 타고 다녔다”고 말할 정도의 열성 팬이다. 이번 영화는 2005년에 작고한 빅토르의 부인 마리아나 최가 “빅토르에겐 영화 한 편이 없다”며 네즈베츠키에게 영화를 만들어 달라고 유언, 제작된 것이라고 한다. 모스크바=권경복특파원 kkb@chosun.com /조선닷컴 2006.11.30 00:20 12' http://www.chosun.com/national/news/200611/200611300026.html
2004 - 필리핀의 배우 페르난도 포 주니어(Poe, Jr., Fernando) 사망 포 주니어 [Poe, Jr., Fernando, 1939.8.20~2004.12.14] 프로필 별명 FPJ, Ronwaldo Reyes, D'Lanor, R. Reyes 본명 Ronald Allan Kelley Poe 인물소개 페르난도 포 주니어는 필리핀의 배우이자 문화 아이콘으로 보통사람을 위해 투쟁하는 영웅을 연기해왔다. 1961년 FPJ프로덕션을 세우고 론왈도 레이에스라는 이름으로 9편의 영화를 연출했다. 로날드 레이건 전미대통령과 이름만 비슷할 뿐만 아니라 배우활동을 하다 대통령에 출마한 전력도 비슷하다. 포 감독은 2006년 5월 24일 필리핀 국가 예술인으로 추서되었다. /Daum 영화 http://movie.daum.net/movieperson/Biography.do?personId=281350&t__nil_main_introduce=more
Fernando Poe, Jr. Ronald Allan Poe y Kelley (August 20, 1939 – December 14, 2004), better known as Fernando Poe, Jr. and colloquially known as FPJ and Da King, was a Filipino actor. He did not complete high school but went on to win numerous awards and prizes as an actor and film director. During the latter part of his career, he ran an unsuccessful bid for President of the Philippines in the 2004 presidential election against the incumbent president Gloria Macapagal-Arroyo. He was posthumously declared a National Artist of the Philippines in the field of Cinema on May 23, 2006 by President Gloria Macapagal-Arroyo. This distinction was confirmed by President Benigno Aquino III on July 20, 2012. Acting career http://en.wikipedia.org/wiki/Fernando_Poe,_Jr.
2001 - 피사의 사탑 11년 만에 재개방 [어제의 오늘]2001년 피사의 사탑 11년 만에 재개방 ㆍ480억 들여 ‘삐딱함의 매력’ 보존 삐딱함이 매력인 피사의 사탑. 하지만 그 치명적 매력은 수백년 동안 사람들을 불안케 했다. 흰색의 둥근 탑은 불안과 신비함 사이를 오가며 그렇게 세계의 명소가 된다. 1173년 첫 삽을 뜬 피사의 사탑은 현재의 2배 정도인 110m로 계획됐었다. 그런데 3층이 완성될 무렵 탑이 기울기 시작했다. 약한 지반이 문제였다. 그 후 설계 변경, 공사 중단, 재개를 반복하다 200년이 지난 1372년에야 8층 높이의 탑으로 완공됐다. 임지영 기자 iimii@kyunghyang.com /경향신문 2010-12-13 21:21:48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1012132121485&code=100100&s_code=ap005
1999 - 파나마운하 공식 반환식 (31일 공식 반환) 역사속 오늘[1999년 12월 14일] 파나마 운하 반환 1999년 오늘, 미국이 관리해 오던 파나마 운하의 역사적인 공식 반환식이 열렸다. /YTN 2012-12-14
1994 - 세계최대인 중국 싼샤댐[三峽-] 공사 시작 오늘의 역사 (12월 14일)[1993년] 세계최대인 삼협댐 공사가 1993년(1994년으로 정정) 12월 14일부터 시작됐다. 공사는 만 4년(3년)만인 1997년 11월 1차 물막이공사를 완료했다. 물막이 공사는 강 양쪽에서 토사를 부으며 전진, 강 중심에서 서로 맞닿게 하는 작업이다. 중국인들이 장강으로 부르는 이 양쯔강 물을 가로막는 역사적 장면은 중국 중앙 CCTV를 타고 12억 중국인들에게 중계됐다. 삼협댐 건설은 '물속의 만리장성 공사'라고 불릴만한 대역사이다. 1919년 손문이 처음으로 안을 냈고, 1956년 모택동, 1958년 주은래, 1980년 등소평 등이 의욕을 보였으며, 1992년 4월 중국정부의 결정으로 현실화됐다. 2009년 댐이 완성되면 높이 185m, 길이 2331m 총출력 1820KW, 저수량 393억입방미터로 저수량, 발전용량 모두 세계최대가 된다. 또 양쯔강 중상류 지역에는 평균 너비 1.1Km 길이 6백Km에 달하는 거대한 인공호수가 만들어진다. 그러나 삼협댐은 국내외 환경전문가들의 우려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현재 제기되는 문제는 기후-환경변화와 수질의 변화, 토사침적 등이다. /조선 http://focus.history.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20000510_0014
사하로프 [Sakharov, Andrei Dimitrievich, 1921.5.21~1989.12.14] 오늘의 역사 (12월 14일)[1989년] 소련의 수소폭탄을 개발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나 그후 핵무기의 파괴력에 가슴아파하며 반체제운동과 인권운동에 평생을 바친 사하로프 박사가 1989년 12월 14일 사망했다. 1921년 5월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사하로프는 모스크바 국립대에서 26세때 박사학위를 받을 만큼 비범했다. 1948년 핵무기를 다루는 연구팀에 가담, 수소폭탄개발의 핵심역할을 했다. 이 공로로 그는 젊은 나이였던 32세때 소련과학아카데미 사상 최연소 정회원에 선출됐으며, 스탈린상을 비롯해 소련국민의 최고영예인 노동훈장을 3개씩이나 받기도 했다. 미국과의 핵무기 개발경쟁에서 뒤져 있던 소련이 1953년 수소폭탄을 개발하는데 핵심적 역할을 수행한 그는 '소련 수소폭탄의 아버지'로 불리며 국가의 영웅적 존재가 됐다. 그러나 핵무기의 윤리성에 회의를 느끼게 된 그는 소련이 핵무기 개발을 중지할 것을 주장하며 반체제운동에 가담했다. 1968년 '프라하의 봄'으로 불린 체코슬로바키아의 개혁운동이 소련군에 의해 무력탄압되자 사하로프는 반체제발언의 강도를 더욱 높여 소련정부를 비판해왔다. 소련당국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인권운동을 전개한 그는 국제적 인권운동가로 알려졌으며 1975년에는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됐으나 정부의 박해로 출국하지 못했다. 그후 1980년 모스크바에서 추방돼 외부와의 접촉이 단절된 채 고리키시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그가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온 것은 1986년 고르바초프의 배려에 의해서였다. 1989년 4월 인민대표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어서도 이날 사망할 때까지 체제내 개혁세력으로서의 활동을 계속해왔다. /조선 http://focus.history.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20000420_0032 [삼성전자 반도체 개발 연혁] 2000-09-29 - 세계최고속 그래픽 메모리 출시 2000-05-27 - IMT-2000채용 16MS램 첫 개발 2000-01-04 - 288MD램 첫 개발 1999-10-14 - 1기가 플래시 메모리 세계최초개발 1999-09-09 - 2세대 램버스 D램 양산 1999-08-06 - 450MHz 초고속 4MS램 개발 1999-07-22 - 세계최초 4MF램 개발 1999-06-28 - 세계 첫 1기가 반도체 상용제품 개발 1999-06-24 - 세계최고솔 1기가 알파집 개발 1999-03-16 - 세계최초 256M D램 개발 1998-07-15 - 세계 최초 64M 램버스 D램 모듈 개발 1998-04-30 - 256M DRAM(2세대) 세계 첫생산 1998-03-06 - 세계최초 128M FLASH MEMORY 출하 1996-10-31 - 미가 D램개발 1995-12-12 - 세계 최초 "1기가 싱크로너스 D램" 시제품 개발 1994-08-29 - 256M DRAM 세계 첫 개발 1992-06-26 - 세계최초 64M DRAM 완전동작 시제품 개발 1991-05-21 - 국내최초 VGA칩 개발 1990-08-11 - 16M DRAM 개발성공 1989-12-08 - 4M DRAM 출하 1989-06-15 - 음성녹음 및 재생용 IC 개발 1989-05-03 - 4메가 마스크롬 개발 1989-04-11 - 국내최초 PC IC 개발 1988-12-14 - 256K EEP롬 개발성공 1988-11-16 - 최첨단 반도체 1M SRAM 개발 1986-09-07 - 256K SRAM국내 최초 개발 1986-07-13 - 1M DRAM 국내 최초 개발
- 소백산 운해 (공중전화 카드)
- 소백산 일출 (공중전화 카드)
1987 - 소백산 국립공원 지정 소백산 국립공원: 1987년12월 14일 지정 (국립공원) /위키백과
알레익산드레 [Aleixandre, Vicente, 1898.4.26~1984.12.14] 스페인의 시인. 1927년세대의 일원이었고 1977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초현실주의 시작법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철도기관사의 아들이었던 알레익산드레는 법학과 경영학을 전공했으며, 1920~22년에 상법을 가르쳤다. 1925년 심하게 앓기 시작해 요양기간중 최초의 시를 썼다. 1936~44년 자신의 시가 출판금지되었으나 스페인 내란 동안 스페인을 떠나지는 않았다. 1949년 스페인 왕립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자유시의 대가로 간주되었다. 그 자유시체는 초기 주요저서 〈파괴 또는 사랑 La destrucción o el amor〉(1935)에 나타나 있는데 이 작품으로 스페인 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이 작품에서 인간과 물질적인 우주의 동일성이라는 주제를 탐구했다. 이와 유사한 주제가 〈낙원의 그늘 Sombra del paraíso〉(1944)에서도 등장한다. 인간의 삶을 더욱 강조한 작품은 시간과 죽음, 인간의 고독을 다룬 〈마음의 역사 Historia del corazón〉(1954)·〈광활한 영토에서 En un vasto dominio〉(1962) 등이다. 알레익산드레의 후기 시는 형이상학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완성의 노래 Poemas de la consumación〉(1968)·〈인식에 관한 대화 Diálogos del conocimiento〉(1974)에서는 죽음·지식·경험 등의 문제를 탐구했다. 독창적이고 심원한 시뿐만 아니라 산문작품인 〈회합 Los encuentros〉(1958)도 출판했는데, 이 책은 자신의 동료작가들을 호감을 가지고 묘사한 것이다. /브리태니커
세계 10대 유적지 경주가「유네스코」에서 선정하는 세계10대 유적지의 하나로 뽑혔다고 한다. 그것은 해마다 한곳씩 세계의 유적지를 골라 앞으로 10년동안 「유네스코」를 통해 국제적인 연구와 조사를 하는 계획을 위한 것이라 한다. 알려진바로는 평양을 내세운 북한대표와 우리나라 대표사이에 상당히 치열한 실랑이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뭘로봐도 고적지로서 평양이 경주를 당해 낼수는 없다. 그러나 꼭 경주가 다른 경합지들보다 뛰어나게 훌륭한 곳이기 때문이라고 기뻐하기는 삼가야겠다. 경주가 왜 뽑혔는지는 아직은 정확히 알수없기 때문이다. 경합한 다른 유적지중에는 일본의 경도도 끼어 있었다. 그곳은 흔히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꼽히고 있다. 『북·오브·리스트』에 의하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는 다음과 같은 차례로 되어있다. 「파리」·「뉴욕」·「런던」·「리오데자네이로」·향항·「로마」·「마드리드」·「시드니」·경도·「스톡홀름」. 한편 「케이드·시몬」여사는 세계에서 가장 멋있는 10대도시로 다음과 같은 곳을 꼽고 있다. 「베니스」·「레닌그라드」·「뉴욕」·「샌프란시스코」· 경도·「이탈리아」의 「시에나」,「멕시코」의 「과나화토」,「프랑스」의 「브르쥐」·「바르셀로나」, 영국의 「요크」. 그 어느「리스트」에나 경도는 끼어있다. 그런 경도를 제치고 경주가 뽑혔다면 순전히 그 역사성만이 문제됐던 모양이다. 기왕에 말이 난김에 좀더 얘기하자면 『북·오보·리스트』에는 세계에서 가장 추악한 도시들이 13곳 열거되어 있다. 그 중에는「이탈리아」의 「브린디시」, 인도의 「캘커타」, 「웨일즈」의 「카디프」, 「스페인」의 「카르타헤나」, 서독의 「에센」, 「리베리아」의「먼로비아」, 「버마」의 「랭군」, 중공의 상해등이 들어있다. 그리고 11번째에는 창피스럽게도 한국의 대서울이 꺼어있다. 서울이 외국관광객들 눈에 얼마나 더럽고 불친절하고 추악하게 보였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아름답고 자랑스럽던 우리의 고도와 오늘의 추악한 수도. 너무나도 명암이 뚜렷하다. 그러나 그 경주마저 꼭 훌륭한 유적지라서 뽑힌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경주쪽에 표를 던진 외국의 대표들은 모두 경주를 다녀간 적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훌륭한 유적들의 보존관리가 너무 보기 딱할 정도로 허술하다고 여긴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하나, 어쨌든 다행스런 일임엔 틀림이 없다. 경주의 유서깊은 남산에 거침없이 「아파트」군을 세울 계획이라는 소식마저 들려오던 참이니 말이다. /분수대 Opentory 05.26 18:09 http://opentory.joins.com/index.php/%EC%84%B8%EA%B3% 8410%EB%8C%80%EC%9C%A0%EC%A0%81%EC%A7%80 - Disco Music - Bee Gees
1977 - ‘토요일 밤의 열기’ 美개봉 [책갈피 속의 오늘]1977년 ‘토요일 밤의 열기’ 美개봉 1977년 12월 14일 영화 ‘토요일 밤의 열기’가 미국에서 개봉했다. 이 영화의 반향은 세계적이었다. 디스코 열풍의 진원지가 된 것이다.
- Wladyslaw Gomulka
1970 - 폴란드, 12월 사건 [오늘의 경제소사/12월14일] 폴란드, 12월 사건 1970년 12월14일, 폴란드 그단스크시 공산당사가 불탔다. 이틀전부터 파업에 들어간 레닌조선소 노동자에 주부 등 3,000여명의 시민들이 가세한 시위대는 공산당사와 경찰서를 습격했다. 시위는 ‘그디니아’와 ‘소포트’ 등 북부항구도시를 거쳐 폴란드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폴란드 ‘12월 사건’이다. 사상자 1,500여명을 냈다. 세계 언론은 12월 사건을 헤드라인으로 뽑았다. 소련의 영향력이 극에 달했던 시절, 냉전의 한복판에서 발생한 시위였기에 파장이 컸다. 1956년 이래 14년간 유지돼온 고무우카(Gomulkaㆍ옛 표기 고물카) 서기장 체제가 무너졌다. 폭동의 원인은 고물가와 경제난. 1966년부터 시작된 제3차 5개년계획이 실패해 5%로 잡았던 성장률이 3.5%에 그쳤다. 당에서 모든 것을 결정하는 ‘계획생산’으로 재봉틀은 넘쳐 났지만 바늘 구하기는 하늘의 별따기였다. 식료품이 30% 오르자 터져 나온 게 12월 사건이다. ‘고물가’가 ‘고물카’를 실각시킨 셈이다. 유혈진압으로 12월 사건은 1주일 만에 진정됐지만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비극의 한 가운데 있었던 27살의 노동자는 10년이 지난 후 새로운 노동조합을 결성한다. 레흐 바웬사(Lech Walesa)와 동구권 최초의 자유노조인 ‘연대(連帶:Solidarity)’다. 다급해진 폴란드 당국은 1981년12월 계엄령을 선포하고 자유노조를 불법화했지만 역사의 물결은 동구권의 자유화 바람과 동서독 통일, 구소련의 해체로 이어졌다. 그단스크시(옛 단치히)에서 태어난 노벨문학상 수상(1999년)작가인 독일의 귄터그라스는 단치히자유시를 배경으로 쓴 소설 ‘양철북’에서 말했다. ‘역사는 반복을 좋아한다.’ 권홍우ㆍ경제부차장 /서울경제 2004-12-13 18:23 http://economy.hankooki.com/ArticleView/ArticleView.php?url= opinion/200412/e2004121318214863820.htm&ver=v002
오늘의 역사 (12월 14일)[1967년] 미국 스탠퍼드대학의 콘버그와 굴리안 박사가 DNA 인공합성에 성공했다고 1967년 12월 14일 발표했다. DNA는 사람을 비롯한 지구상의 모든 생물의 유전을 담당하는 물질로 1953년 크릭과 왓슨이 2중구조를 해명한 이래 DNA구조에 관한 연구가 급속도로 진행돼 1966년경에는 DNA를 만들어내는 4개의 염기와 단백질을 구성하고 있는 20종류의 아미노산과의 대응 등 유전암호도 해독된 상태였다. 콘버그는 1956년에 DNA를 합성하는 것으로 보여지는 효소 DNA 폴리메라제를 발견, DNA합성에 성공했다고 발표해 1959년 노벨상을 수상한 바 있다. 그러나 후에 이 DNA는 생물활성이 아니고 본물(本物) DNA와는 확실히 구조가 다르다는 것이 판명됐다. /조선 http://focus.history.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20000413_0022
1962 - 미국의 마리너 2호가 처음으로 금성을 근접 탐사하다. 마리너 2호(영어: Mariner 2)는 미국 항공우주국의 마리너 계획의 금성 탐사선이다. 처음에는 마리너 1호의 예비기로서 준비되어 있었다. 마리너 1호의 실패에 의해 마리너 2호는 미국 최초로 행성 탐사에 성공한 행성 탐사선이다. 3개월 반의 비행을 거쳐 금성에 도착해 금성의 접근 통과에 성공했다. /위키백과
미국의 금성 탐사선, 201 kg
필리핀의 정치가, 대통령. 판팡가주(州) 출생. 세인트토마스대학을 고학으로 졸업한 후 1936년 변호사가 되고, 1941년 모교의 법학부 교수가 되었다. 1949년 하원의원에 당선되어 하원 외교위원장을 지냈으며, 1951년 대일강화회의 대표를 거쳐 국제연합총회 대표도 역임하였다. 1957년 자유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대통령은 국민당의 가르시아가 당선되었기 때문에 한직(閑職)에 지나지 않았다. 1961년 대통령선거에서는 가르시아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동남아시아조약기구의 강화를 주장하는 등 반공친미(反共親美)정책을 수립하였으나, 1965년 선거에서 마르코스에게 패하였다. 1971년 6월부터 제헌회의 의장직에 있으면서 신헌법 초안을 마련하였으며, 1979년 자유국민연합을 조직하였다. /naver
1960 - 마카리오스 주교(Makarios III), 키프로스 대통령에 선출 키프로스는 그리스계와 터키계 2개 민족으로 형성된 1개 국가로 국민들의 반목은 이미 고질화된 상태의 국가였다. 분리를 원하는 터키계 국민들에 비해 그리스계는 그리스와의 병합을 갈망해 왔다. 그리스계 국민수는 8대 1로 터키계를 압도하고 있었다. 섬을 둘러싼 그리스·터키의 대립으로 양국간의 감정이 점점 격화되자 서방국가 반공군사동맹의 분열을 두려워한 영국과 미국이 중재에 나서, 1959년 2월 마침내 취리히에서 양국 수뇌의 비밀회담이 실현됐다. 뒤이어 양국에 영국·미국 대표를 포함한 회의가 2월 19일 런던에서 개최되어, 런던 협정으로 불리는 키프로스 독립협정이 성립됐다. 이 협정으로 1960년 8월 키프로스는 공화국으로 다시 태어나게 됐다. 12월 14일에는 마카리오스 주교가 터키계 경쟁상대를 물리치고 키프로스 대통령에 선출됐다. /조선 (오늘의 역사 - 2월 19일)
[오스트리아 연혁] 1955.05.15 - 오스트리아 주권회복조약 조인 1955.07.27 - 동 조약 발효 1955.10.26 - 중립국 선언(영구중립을 규정한 제2공화국헌법 선포) 1955.12.14 - 유엔 가입
1953 - 미국의 소설가 마조리 롤링스(Rawlings, Marjorie Kinnan) 사망 롤링스 [Rawlings, Marjorie Kinnan, 1896.8.8~1953.12.14] 미국의 소설가. 플로리다의 지방문학을 창시했다. 1918년 위스콘신대학교를 졸업, 기자로서 글쓰는 경험을 쌓으려고 루이스빌의 〈쿠리어 저널 CourierJournal〉과 〈로체스터 저널 Rochester Journal〉 및 연합특집기사배급회사 등에서 일했다. 10년 동안 저널리스트로 일하면서 팔릴 만한 소설을 쓰려고 노력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1926년 플로리다 주에 갔다가 경치에 매료되어, 1928년 플로리다 주 호손의 크로스크릭으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소설 집필에 전념한 끝에 결국 작품이 팔리게 되었고, 1933년 단편소설 〈갤 영 언 Gal Young Un〉으로 O. 헨리 기념상을 받게 되었다. 첫소설 〈South Moon Under〉(1933)에 이어 〈황금 사과 Golden Apples〉(1935)가 나왔고, 1939년 소설부문 퓰리처상을 받은 〈아기사슴 이야기 The Yearling〉(1938)로 유명해졌다. 그녀의 작품은 주변 사람들과 땅에서 소재를 찾았기 때문에 허구성이 적으며 생생하게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분위기가 풍부하고, 플로리다 원주민과 계속되는 좌절에도 절망하지 않는 그들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작품에서 경치를 탁월하게 묘사하여 폭넓은 찬사를 받았는데, 고전에 가까운 〈아기사슴 이야기〉에는 이런 묘사가 잘 나타나 있다. 그밖에도 플로리다의 자기 집을 발견하는 과정을 그린 신비적이고 자서전적인 〈삿강 저너머 Cross Creek〉(1942)와 〈체류자 The Sojourner〉(1953)가 있다. /브리태니커
1950 - 유엔난민기구(국제연합난민고등판무관사무소, UNHCR) 설립 국제 연합 난민 고등 판무관 사무소(UNHCR, United Nations High Commissioner for Refugees)는 유엔난민기구(UN Refugee Agency)로도 불리며 각국 정부나 유엔의 요청에 의해 난민들을 보호하고 돕기 위해 설립된 국제 연합의 전문 기구이다. 1950년12월 14일스위스제네바에 설립되었다. 1954년과 1981년 두 차례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위키백과
유엔난민기구(UNHCR)는 1950년 12월 14일 유엔총회에 의해 창설되어 난민을 보호하고 범 세계적으로 난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제적인 조치를 주도하고 조정할 권한을 부여받았습니다. UNHCR의 주된 목표는 난민들의 권리와 복지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비호 신청의 권리를 이행할 수 있고 자발적 본국 귀환, 현지 동화 혹은 제3국에서의 재정착의 선택을 가지며 다른 나라에서 안전한 피난처를 보장 받을 수 있도록 UNHCR이 돕고 있습니다. /유엔난민기구
국제연합 본부 총회는 제1차 회기중에 유엔 본부를 뉴욕 시에 두기로 결정했다. 맨해튼의 본부 부지는 존 D. 록펠러 2세가 증여한 것이다. 뉴욕 주 롱아일랜드의 레이크 석세스에 임시본부를 설치했다가 1951년 사무국 건물이 완성되어 입주가 이루어졌고 이듬해초에는 총회와 기타 위원회 건물이 완공되었다. 1947년 채택된 '국제연합기'는 밝은 청색 바탕에 흰색으로 유엔의 공식문장이 도안되어 있다. 총회는 매년 10월 24일을 '국제연합의 날'로 지정했다. Macropaedia| 金德千 참조집필 /브리태니커
1939 -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개봉 오늘의 역사 (12월 14일)[1939년] 마가렛 미첼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소설의 무대인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1939년 12월14일 개봉됐다. 조지아주(州)는 이 날을 휴일로 정해 흥행을 도왔고 애틀랜타시(市)는 3일간의 시가 퍼레이드로 흥을 돋구었다. 3년간 600만달러가 투입돼 3시간37분으로 완성된 ‘바람과 함께…’는 개봉전부터 화제가 무성했다. 클라크 게이블을 남자 주인공으로 정하고 촬영에 들어갔지만 정작 여주인공인 스칼렛역(役)을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렀고, 불타는 노을을 배경으로 게이블이 비비안 리와 멋지게 입 맞추는 장면을 촬영할 때는 게이블의 심한 입냄새로 비비안 리가 NG를 연발하기도 했다. 그 해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 여우주연상 등 8개 부문을 휩쓸었고, 상영 1년만에 2500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는데 성공했다. /조선 http://focus.history.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20000404_0010
1919년 3·1운동 직후에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이 되었고, 1923년 내무총장, 1924년 국무총리 대리, 1926년 12월 국무령(國務領)에 취임하였다. 이듬해 헌법을 제정, 임시정부를 위원제로 고치면서 국무위원이 되었다. 1928년 이동녕·이시영(李始榮) 등과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하였고, 1929년 재중국 거류민단 단장도 겸임하였다. 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 의혈청년들로 하여금 직접 왜적 수뇌의 도륙항전(屠戮抗戰)에 투신하도록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바소프 [Basov, Nikolai Gennadiyevich, 1922.12.14~2001.7.1] 러시아의 물리학자. 1922년 12월 14일 러시아 페트로그라드에서 출생하였다. 러시아과학아카데미회원이며 레베데프물리학연구소의 중심인물로서, 양자전파물리학(量子電波物理學)과 양자전자공학(量子電子工學) 분야를 연구했다. 진동수(振動數)의 양자표준 설정을 비롯하여 양자증폭(量子增幅)의 창출, 적외선 및 가시광선의 발진(發振)과 증폭문제 연구, 양자발진기의 발명, 비선형광학(非線型光學)과 홀로그래피의 전개 등, 양자광학의 눈부신 발전에 지도적 역할을 하였다. 메이저 및 레이저를 발명한 공로로 프로호로프 및 타운스(미국)와 함께 1964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 /naver
역사속 오늘[1918년 12월 14일] 윌슨 미국 대통령 파리 방문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1918년 오늘. /YTN 2012-12-14 1911 - 아문센, 인류최초로 남극점 도달 오늘의 역사 (12월 14일)[1911년] 아문센, 인류최초로 남극점 도달 로알드 아문센은 선원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시절부터 북극탐험을 꿈꾸었다. 오슬로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지만, 아문센은 극지 탐험에 대한 열망으로 항해사의 길을 걸었다. 그는 1903년부터 1906년까지 대서양에서 북극해를 거쳐 태평양에 이르는 북서항로 항해에 사상 처음으로 성공했다. 그러나 1909년 4월 6일 미국의 로버트 피어리가 북극점에 도달하자, 눈길을 돌려 남극 탐험에 나섰다. 당시 남극점에 먼저 도달하기 위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문센이 이끄는 노르웨이 탐험대와 영국 해군 소속 로버트 스코트의 영국 탐험대가 그 경쟁의 주인공들이었다. 그들은 영하 40도의 추위와 초속 30미터의 강풍을 견뎌 내며 한 발 한 발 극점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었다. 1911년 12월 14일 마침내 아문센이 어떤 생명체의 발길도 닿지 않았던 곳, 남극점 도달에 성공했다. 1911년 10월 19일, 아문센은 웨일즈 만의 기지에서 에스키모 차림을 한 네 부하와 개들이 끄는 설매를 이끌고 남극점을 향해 출발했다. 출발 당시 52마리의 개를 데리고 떠났는데 돌아올 때는 썰매를 끌 12마리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죽였다. 동력원은 그 자리에서 식량으로 변했다. 이는 애초에 식량무게를 줄이기 위한 것이었고 아문센이 성공할 수 있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스코트도 한발 늦게 남극점에 도착했고, 귀환 도중 조난을 당해 차가운 빙하 위에서 비극적 최후를 맞았다. 세계 최초로 남극점을 정복한 아문센은 다시 북극으로 관심을 돌려 비행선을 타고 북극해를 횡단할 계획을 세웠다. 1926년 5월 11일 이탈리아의 노빌레, 미국의 엘즈워스와 함께 세 나라의 공동 탐험대가 비행선 노르게 호를 타고 킹즈 만을 출발, 다음 날 1시 25분 북극점에 도달하고 비행을 계속해 알래스카에 도착, 북극해 횡단 비행에 성공했다. 그 2년 후인 1928년 5월, 아문센과 함께 북극횡단 비행을 했던 노빌레가 다시 북극 탐험에 나섰다가 행방 불명이 됐다. 아문센이 그를 구출하기 위해 수색에 나섰으나 돌아오지 못하고 조난사했다. /조선 http://focus.history.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19990804_0361
U보트는 제1·2차세계대전 때 사용된 독일 잠수함의 총칭. 독일어로 잠수함을 뜻하는 Unterseeboot의 약어이다. 1906년 최초의 잠수함이 완성되었는데, 제1차세계대전 초기에는 실용적인 항해용 잠수함으로 발달해, 서전(緖戰)에서 U9가 영국 장갑순양함 3척을 격침시켰다. 대전중 대량 건조하여 통상파괴작전(通商破壞作戰)을 하였고, 한때는 영국을 패전 직전까지 몰아 넣었다. 제1차세계대전 패전 뒤 독일은 잠수함보유를 금지당했으나, A. 히틀러의 재군비선언으로 1935년부터는 건조를 재개했다. 제2차세계대전 시작 당시는 57척을 보유, 대전중에는 각종 합계 약 1200척을 건조하여 통상파괴전을 벌임으로써, 연합국 상선 1357만t을 격침시켰다. U보트의 특징은 은밀성·운동성·대량생산성이 뛰어난 중형잠수함이라는 데 있으며, 제2차세계대전의 주력 잠수함이었던 ⅦC형(수상배수량 700t, 속력 17kn, 어뢰발사관 5기)은 그 전형이다. /야후 백과
오늘의 역사 (12월 14일)[1900년] 막스 플랑크, 양자론 발표 독일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가 1900년 12월 14일 베를린에서 열린 한 물리학 회의에서 전자기파가 연속된 파동이라는 기존의 학설을 뒤엎고 '전자기파 에너지는 서로 구별되는 불연속적인 덩어리들의 집합체'라는 새로운 이론을 제시해 학계를 놀라게 했다. 플랑크는 이 에너지 덩어리를 양자로 명명했다. 물리학계에서는 이 양자이론을 고전 물리학의 종막이자 20세기 현대물리학의 혁명이라고까지 평가하고 있다. 플랑크는 이 공로로 1918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조선 http://focus.history.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20000728_0002
1897 - 미국의 정치가 스미스(Smith, Margaret Chase) 출생 스미스 [Smith, Margaret Chase, 1897.12.14~1995.5.29] 미국의 정치가. 미국 역사상 최초로 상·하원 의원을 역임한 여성이었다. 이발사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고등학교 시절 농구에 재능을 보인 평범한 학생에 불과했다. 졸업 후 교편을 잡기도 하고 전화 교환수로도 일하다가 지방지 〈인디펜던트 리퍼블리컨 Independent Republican〉에 여비서로 들어갔는데 그곳에서 나중에 남편이 된 발행인 클라이드 스미스를 만났다. 1936년 남편이 의원으로 선출되자 그녀는 비서로 활동했다. 1940년 심장병으로 쓰러진 남편이 대신 선거에 출마할 것을 권유한 것을 계기로 의회에 진출한 스미스는 8년 동안 하원의원으로 활동하다가 1948년에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고 '상원의 양심'이라는 평판을 받았다. 스미스는 국가안보와 방위를 지지한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 그러나 1950년 상원에서 양심선언을 발표하며, 공화당에서는 처음으로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의 반공주의 마녀사냥을 비난하기도 했다. 스미스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소련을 상대로 핵무기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 니키타 흐루시초프는 그녀를 '여자의 탈을 쓴 악마'라고 할 정도였다. 자기 주장이 강했던 스미스는 민주당 출신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 법안을 지지했으며, 공화당의 닉슨 대통령이 2명의 대법관을 지명했을 때 이를 거부하기도 했다. 1954, 1960, 1966년에 압도적 표차로 재선에 성공한 스미스는 여성으로서는 가장 오랫동안 상원의원을 지냈다. 1952년에는 부통령 후보로 물망에 올랐고, 1964년 공화당 전당대회에서는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4차례의 임기를 마치고 1972년 5번째로 상원의원에 도전했으나 이미 노란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고 의사당 복도를 오가는 74세의 노령이었다. 이 선거에서 윌리엄 해서웨이에게 패배하자 정계에서 은퇴하고 낙향했다. 1989년 미국 자유훈장을 받았다. /브리태니커
둘리틀 [Doolittle, James Harold, 1896.12.14~1993.9.27] [오늘<1289>(12월14일)] 제임스 둘리틀 둘리틀 공습은 1942년 4월18일 미국 항공모함 호네트호에서 출격한 B25 폭격기 16대가 둘리틀 준장의 지휘 아래 도쿄(東京)ㆍ요코하마(橫濱)ㆍ가와사키(川崎)ㆍ나고야(名古屋)ㆍ고베(神戶)ㆍ와카야마(和歌山) 등 일본 주요 지역을 폭격한 사건이다. 일본군이 진주만을 기습한 지 4개월 만에 이뤄진 이 반격은 일본 본토에 대한 미군의 첫 공격이었다. 둘리틀은 이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끈 공로로 미국 의회 훈장을 받았다. 사상자 360여 명, 파괴가옥 350여 동으로 둘리틀 공습이 일본 측에 초래한 피해가 치명적인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일본 해군 핵심부는 본토에 대한 미군의 공격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였고, 제해수역(制海水域) 확대를 위해 그 해 6월 미드웨이 해전을 도발하는 최종적 계기로 삼았다. 그러나 일본군은 암호 관리 소홀로 사흘간의 미드웨이 해전에서도 미군에 참패해 병력 3,500명, 주력 항공모함 4척, 항공기 300대를 잃는 수모를 당했다. 둘리틀 공습은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4년 ‘도쿄 위에서의 30초’(Thirty Seconds Over Tokyo)라는 선전영화로 만들어져 미국인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이미 제1차 세계대전 말기에도 항공장교로 참전한 둘리틀은 1930년에 퇴역했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다시 군대로 돌아왔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중 태평양 전선에서만이 아니라 북아프리카, 유럽 전선에서도 미 공군을 지휘했고, 종전 뒤 셸 오일사(社) 이사로 일하다 은퇴했다. http://news.hankooki.com/ArticleView/ArticleView.php?url= life/200412/h2004121314585025340.htm&ver=v002
- 'Paul Eluard', by Picasso 1895 - 프랑스 시인 엘뤼아르(Éluard, Paul) 출생 엘뤼아르 [Éluard, Paul, 1895.12.14~1952.11.18] 본명은 Eugène Grindel. 프랑스의 시인. 초현실주의 운동의 창시자 가운데 한 사람이며 20세기의 대표적 서정시인이다. 제1·2차 세계대전, 스페인 내란, 독일군 점령, 레지스탕스, 공산당 투쟁, 연애, 시사 동향, 만남, 우정, 꿈 등 자신의 인생 경험을 소재로 작품을 썼다. 1919년 앙드레 브르통, 필리프 수포, 루이 아라공 등 초현실주의 시인들과 알게 되어 1938년까지 매우 가깝게 지냈다. 첫번째 주요작품인 〈고통의 수도 Capitale de la douleur〉(1926)에서는 새로운 언어기법을 실험했고, 꿈과 현실의 관계에 대한 이론을 적용했으며, 의식의 흐름을 자유롭게 표현했다. 뒤이어 〈대중의 장미 La Rose Publique〉(1934)·〈풍요로운 눈 Les Yeux fertiles〉(1936) 등을 발표했는데, 일반적으로 이 3권의 책에 실린 시들은 초현실주의 운동이 낳은 가장 탁월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또한 이 시기에 앙드레 브르통과 함께 〈무염시태(無染始胎) L'Immaculée Conception〉(1930)에서 정신불안증세의 진행과정을 연구했다. 스페인 내란 뒤에는 초현실주의 실험을 그만두었다. 후기 작품에는 정치적 투쟁 성향이 잘 나타나 있으며, 독재를 반대하고 행복을 추구하는 기본 입장이 더 확고해졌다. 1942년 공산당에 들어갔으며, 인간의 고통과 동지애를 다룬 작품 〈시와 진실 Poésie et vérité〉(1942)·〈독일군의 집합소에서 Au rendez-vous allemand〉(1944)·〈살 만한 가치 Dignes de vivre〉(1944) 등은 제2차 세계대전중 비밀리에 유포되어 레지스탕스의 사기를 높였다. 특히 〈시와 진실〉에 수록되어 있는 그 유명한 시 〈자유 La Liberté〉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저항시로 알려져 있다. 전쟁이 끝난 뒤 발표한 〈모든 것을 말하라 Tout dire〉(1951)·〈불사조 Le Phénix〉(1951) 등은 시어가 간결하고 표현이 생생하여 프랑스의 대표적 서정시로 꼽히고 있다. /브리태니커
조지 6세 [George VI, 1895.12.14~1952.2.6] [역사 속의 인물] 언어장애를 극복한 영국 조지 6세 윈스턴 처칠, 마릴린 먼로, 미국 조 바이든 부통령 등의 공통점은 말더듬으로 고생하다가 이를 이겨내고 각 분야의 정상에 섰다는 것이다. 2011년 나온 영화 ‘킹스 스피치’의 주인공인 영국 왕 조지 6세(1895~1952)도 말을 더듬었지만 잘 극복해낸 대표적인 인물이다. 톰 후퍼 감독이 만들고 콜린 퍼스가 주연한 이 영화는 아카데미상 4개 부문을 휩쓸 정도로 전 세계에 진한 감동을 줬다. 그의 부친인 조지 5세는 아들의 언어 장애 치료를 위해 당시 최고로 평가받던 오스트레일리아인 치료사 라이오넬 로그를 붙여 주기도 하고 아끼던 윈저 성 내의 왕실 별장을 아들에게 내주면서까지 언어 장애를 치료하도록 배려했다. 이 이야기는 킹스 스피치에 묘사돼 있다. 왕세자 신분으로 있으면서 일탈을 일삼던 형을 대신해 왕위에 오른 그는 힘없는 국민에게 다가가는 정치로 큰 사랑을 받았다. 2차 세계대전 때인 1940년 9월 독일 전폭기의 공습으로 죽을 뻔하기도 했지만 피란 가지 않고 고통 받는 민중들을 만나 그들을 위로하곤 했다. 무엇보다 그의 진가는 끊임없는 노력과 국민의 애정을 바탕으로 말더듬을 이겨냈다는 데 있다. 1895년 오늘은 그가 태어난 날이다. 최정암 편집부국장 /매일신문 2013.12.14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61581&yy=2013 1883 - 그리스의 작곡가 마놀리스 칼로미리스(Kalomiris,Manolis) 출생 칼로미리스 [Kalomiris,Manolis, 1883.12.14~1962.4.3] Manolis Kalomiris(1883-1962), Greek composer, studied at the Gensellschaft der Musikfreunde in Vienna, then taught at the Obolensky Lyceum in Russia. Returning to Athens, he taught at the Athens Conservatory, founded and directed both the Helenic Conservatory and the National Conservatory. He composed operas, orchestral works, concertos, and other instrumental music. 레너 [Renner, Karl, 1870.12.14~1950.12.31] 오스트리아의 사회민주주의 정치가, 총리(1918~20, 1945), 대통령(1945~50). 제1차 세계대전 후 독일 오스트리아 병합을 주장했으며 1945년 독일의 점령이 끝난 뒤에는 자치질서 회복에 힘썼다. 농민가정에서 태어나 빈대학교에서 법률을 공부했고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에 입당해 온건파로 활동했다. 1907년부터 하원의원을 지냈으며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함께 왕정이 무너지고 공화정이 들어서자 초대 총리에 취임했다. 레너는 이탈리아·체코슬로바키아·유고슬라비아에 상당 규모의 영토를 빼앗기는 것을 막지 못했고 9월 10일에는 소신이었던 독일-오스트리아 합병을 금지하는 생제르맹 조약에 서명했다. 1918년 11월부터 1919년 10월, 1919년 10월부터 1920년 6월까지 2차례 총리로 있으면서 국제연맹 가입, 조약의무 이행, 그리고 철저한 중립외교를 주장했다. 1920년대에 사회민주당 우파를 이끌었으며, 1930~33년 국회의장을 역임했다. 1938년 레너는 나치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을 지지했다. 1945년 독일이 패하고 소련군이 오스트리아를 점령하자 소련 관리들과 함께 오스트리아의 재건을 위해 임시정부를 구축했고 1945년 4월 새로 탄생한 오스트리아의 초대 총리에 취임했다. 1945년 12월 20일 상원은 만장일치로 레너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다수의 저작을 남겼으며 중요한 것으로 〈오스트리아의 부활 Österreichs Erneuerung〉(3권, 1916~17)과 회고록인 〈두 시대의 교차점에서 An der Wende zweier Zeiten〉(1946)를 들 수 있다. /브리태니커
퓌비 드 샤반 [Puvis de Chavannes, Pierre(-Cécile), 1824.12.14~1898.10.24] 프랑스 화가. 1824년 리옹에서 출생했으며 1898년 파리에서 사망했다. 23세 무렵 처음으로 이탈리아를 여행한 뒤 화가가 되고자 결심하고 앙리 셰페르(Henry Scheffer)의 화실에서 1년 정도 공부한 뒤에 들라크루아와 쿠튀르의 화실에서 일했다.
- USA, 1$ (Banknote) 워싱턴 [Washington, George, 1732.2.22~1799.12.14] 오늘의 역사 (12월 14일)[1799년] 1799년 12월 14일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6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워싱턴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 로 불린다. http://focus.history.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20001107_0010
카를로스 3세 [Carlos Ⅲ, 1716.1.20∼1788.12.14] 나폴리 왕(1734∼1759)·에스파냐 왕(1759∼1788). 24년 동안 나폴리 왕으로 있다가 이복형 페르난도 6세가 죽은 뒤 에스파냐 왕위를 계승하였다. 계몽전제군주로서 근대화를 목표로 우수한 인재를 등용하여 개혁을 시도하였다. 특히 군직정비를 비롯하여 해군 개혁 및 공공사업에 공적을 남겼는데 현재 마드리드의 역사적 건축물의 대부분은 이 시대에 건설된 것이다. 그러나 가톨릭교도이면서 중앙·남아메리카를 포함한 에스파냐 영토에서 예수회를 추방하였으므로 바티칸과 긴장을 초래하였다. 또한 영국에 대항하기 위해 1761년 프랑스와 가족협약을 맺었고 7년전쟁 종결을 위해 1763년 파리조약에서 영국에게 플로리다를 양도하였으며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를 양도받았다. 식민지정책에서는 페루를 비롯한 중앙·남아메리카 여러 나라의 독립운동을 저지하지 못하였다. /yahoo
1702 - 주신구라 [오늘의 경제소사/ 12월 14일] <1575> 주신구라 '주신구라(忠臣藏).' 연말연시면 으레 일본의 TV에 등장하는 특집극 소재다. 내용은 주군을 잃은 사무라이 47인의 복수극. 각급 학교의 교과서에도 빠짐없이 나온다. 1년 9개월 동안 칼을 갈아온 47인의 로닌이 거사에 나선 것은 1702년 12월14일 밤. 원수인 기라의 에도 저택을 습격해 주군의 원수를 갚았다. 이튿날 아침 원수의 수급을 쳐들고 주군의 묘소로 행진하는 로닌들에게 에도 시민들은 박수 갈채를 보냈다. 복수에 성공한 로닌들은 쇼군의 할복 명령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일본인들에게는 영원히 살아 있다. 권홍우편집위원 /서울경제 2009/12/13 18:05:55 http://economy.hankooki.com/lpage/economy/200912/e2009121318055597490.htm
1583 - 러시아-우크라이나 '인쇄술의 아버지' 페도로프(Fedorov, Ivan) 사망 페도로프 [Fedorov(Fyodorov), Ivan, c.1510(1525)~1583.12.14(16)] Ivan Fedorov (Іван Федоров) (died December 14, 1583), was the father of Russian and Ukrainian printing. He was also a master cannon maker and the inventor of a multibarreled mortar.
브라헤 [Brahe, Tycho, 1546.12.14~1601.10.24] [오늘의 경제소사/12월14일] 티코 브라헤 잔혹한 영주이자 보이지 않는 거인. 역사상 최고의 천문관측학자로 꼽히는 티코 브라헤(Tycho Brahe)의 면면이다. 브라헤가 없었다면 천문학 발달이 한 세기 늦어졌을 것이라는 평가까지 받는 인물이다. 브라헤는 1546년 12월14일 덴마크 명문가의 12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으나 백부 밑에서 자랐다. 자손이 없어 조카를 유괴하듯 빼앗아간 큰아버지의 강권으로 법률을 공부하던 그는 결투에서 코의 일부를 잃어버린 뒤 별자리 연구에 빠져들었다. 초신성을 발견해 명성을 얻을 즈음, 해군 사령관이던 백부가 바다에 빠진 국왕을 구해낸 뒤 후유증인 패혈증으로 사망했을 때 국왕은 보답의 표시로 후손인 브라헤에게 여의도 크기만한 섬을 내려주고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설비를 갖춘 천문대를 지어줬다. 30세에 ‘하늘의 도시’라는 뜻의 우라니엔보리천문대를 맡게 된 그는 국왕과 사이가 틀어진 후 프라하천문대로 옮겨 사망(1601년)할 때까지 육안으로 관측한 777개 별자리 이동에 대한 방대한 기록을 남겼다. 아쉽게도 브라헤의 천문대는 남아 있지 않다. 프라하천문대는 케플러를 굶어죽게 만들었던 30년 전쟁 때 파괴됐다. 우라니엔보리천문대는 덴마크 최고 부자였으면서도 악착같이 세금을 짜내던 브라헤의 흔적조차 지우고 싶었던 주민들의 손에 무너졌다. 사람도 시설도 사라졌지만 관측기록만큼은 제자였던 케플러에게 온전히 전해졌다. 케플러가 해석하는 데만 4년이 걸린 관측기록은 케플러의 행성법칙을 거쳐 뉴턴의 중력법칙 발견으로 이어졌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멀리 보았다면 거인(선배 과학자)의 어깨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라는 뉴턴의 명구에 등장하는 거인으로 데카르트와 케플러ㆍ갈릴레이를 꼽지만 그 바닥에는 브라헤라는 보이지 않는 거인이 서 있다. 권홍우 편집위원 /서울경제 2007/12/13 17:38 http://economy.hankooki.com/lpage/opinion/200712/e2007121317380563820.htm
1542 - 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스 5세(James V) 사망 제임스 5세 [James V, 1512.4.10~1542.12.14] 스코틀랜드의 왕(1513~42 재위). 통치기간 전반 절반에 해당하는 시기에는 미성년이었기 때문에 친(親)프랑스파와 친잉글랜드파 사이의 싸움판에서 볼모와 같은 처지였다. 정부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한 이후에 그는 로마 가톨릭 신앙을 지지하며 프로테스탄트 귀족들과 대립했으며 프랑스와 동맹관계를 이룩했다. 제임스는 생후 17개월에 부왕인 제임스 4세(1488~1513 재위)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했다. 친프랑스 입장에 있던 올버니 공작 존 스튜어트와 친영국편의 선두에 있던 앵거스 백작 아치볼드 더글러스 사이에 권력 장악 싸움이 심화되는 가운데 각 진영은 서로 어린 국왕의 영지를 차지하려고 했다. 제임스의 어머니 마거릿 튜더는 남편인 앵거스와의 제휴를 중단하고 올버니와 손을 잡음으로써 일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1524년 올버니는 프랑스로 물러났고 앵거스는 제임스를 1526년부터 연금시켰다. 제임스는 2년 동안 연금 상태에 있다가 1528년 탈출했고 앵거스를 잉글랜드로 몰아냈다. 1530년 이미 제임스는 스코틀랜드에서 자신의 권력을 굳혀놓고 있었다. 1534년에는 숙부인 잉글랜드의 왕 헨리 8세와 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1538년 프랑스의 귀족 마리 드 기즈와 결혼함으로써 프랑스와 동맹관계를 맺고 잉글랜드와 대립관계에 놓였다. 1542년 헨리 8세의 군대가 스코틀랜드를 공격하자 프로테스탄트 귀족들의 이반(離反)으로 무력해진 제임스의 소규모 군대는 잉글랜드로 국경을 넘었으나 1542년 11월 24일 국경 근처 솔웨이모스에서 힘없이 꺾였다. 이 패배는 제임스로 하여금 신경쇠약에 걸리게 했을 정도로 비참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딸이며 적자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메리 스튜어트(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가 태어난 지 1주일 만인 1542년 12월 14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서자들 중에는 메리 스튜어트가 1567년에 스코틀랜드의 왕위를 포기했을 때 섭정이 된 머리 백작 제임스(1570 죽음)가 있다. /브리태니커
노스트라다무스 [Nostradamus, 1503.12.14~1566.7.2] 오늘의 인물 (1503.12.14) 노스트라다무스 Nostradamus 1503년 12월 14일 태어남 / 1566년 7월 2일 죽음 노스트라다무스는 지구종말론으로 세기말을 가슴 졸이게 한 프랑스의 예언가이다. 원래 그는 16세기 중엽 남부 프랑스에 페스트가 창궐했을 때 손수 개발한 약초 치료제를 써서 많은 사람을 구해낸 의사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1537년 부인과 아들을 역병으로 잃고 유럽 전역을 방황한 끝에 자신의 예언가적인 능력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1544년 다시 세상으로 돌아온 그는 프랑스 살롱에 정착해 다시 의료활동을 펼쳤으며 한편 1555년부터는 예언서 <세기들 Centuries>을 펴내기 시작했다. 이 책은 4행시 1,100여 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프랑스어, 스페인어, 그리스어, 라틴어, 히브리어 등 여러 언어의 조합인데다 뒤섞인 암호들과 난해한 문장 일색인 탓에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정확하고 결정적인 해석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브리태니커 "1900, 90의 9년, 7의 달
- 노스트라다무스, <세기들> 10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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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