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울 토마스 만 - 바그너와 우리 시대(Thomas Mann, Wagner und unsere Zeit : Aufsatze, Betrachtungen, Briefe, Hrsg. von Erika M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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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바프 씨에게
진정으로 감사드립니다. 세 가지 점에서 당신은 옳아요.
괴테라면 바그너가 원칙에 어긋나는 현상이라고 느꼈을 겁니다.
물론 그는 위대한 사실들이나 효과들에 대해서는 도덕적으로 매우 너그러웠지만, 이따금 그가 우리에게 이렇게 대답하지 않았을까, 하고 자문하게 됩니다.
"그 사내는 너희들에게 는 너무 크다"라고 말이죠.
하지만 그야 물론 그의 문제겠지요.
독일인들에게 '괴테냐 아니면 바그너냐'를 결정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 둘이 함께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나는 그들이 '바그너'라고 말할까봐 걱정입니다.
아니, 어쩌면 아닌가요?
어쩌면 모든 독일인이 가슴 밑바닥에서 괴테가, 폭발하는 재능과 지저분한 성격의 작센 출신 코맹맹이 난쟁이와는 비할 바 없이 존경할 만한, 믿을 만한 지도자이자 민족의 영웅이라는 사실을 아는 걸까요? 의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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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의미에서 예술이 도덕적이거나 미덕이 될 수는 절대 없을 것이다.
진보가 예술에 기댈 수는 절대 없을 것이다.
예술은 신뢰할 수 없는, 배신적인 기본 성향을 갖고 있다.
악명이 자자한 반이성을 향한 열광, 창작하는 '야만성'의 아름다움을 향한 애착을 없앨 수는 없다.
이런 경향을 세상을 위험하게 하는 히스테리, 반정신, 반도덕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죽지 않는 사실이니, 사람들이 그것을 완전히 없애려 한다면, 그럴 수 있게 된다면, 세상을 고약한 위험에서 해방시키겠지만, 동시에 거의 확실하게 세상을 예술에서도 해방시킬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을 바라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예술은 비합리적인 힘이지만, 거대한 힘이기도 하다.
인류가 예술에 집착하는 것은 인류가 합리적인 것, 즉 3항으로 이루어진 유명한 민주주의 지혜의 방정식, 곧 '이성= 미덕= 행복'이라는 방정식에만 기댈 수는 없고, 기대려 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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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내가 내린 정신적 결정들이 당신의 마음에 거슬리리라는 점을 분명히 알고 있었죠.
그 결정이 적어도 선의에서 나왔다는 점만은 믿어주십시오.
음악가에게 주어진 책임감보다 어쩌면 더 엄격할 수 있는 책임감에서 나왔다는 점도요.
당신이야 행복하게 사랑의 힘을 따르면 되지요.
하지만 그런 게 누구에게나 그렇게 쉽사리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스스로에게 유다의 이름을 부여하는, 고통이 없지 않은 의도적인 자기 규율의 경우들이 있거든요.
친애는 마이스터여, 우리가 논하는 작품은 정신 사적으로 위대하고 또 대표성을 띤다는 점에서 이미 오래전에 역할을 다했어요.
우리 현대인은 니체 대 바그너 경우를 저널리즘 방식으로 다루는 게 고작이지요.
니체는 양심선언으로 그에게서 벗어나고서도 죽을 때까지 사랑했던 바그너와 똑같이, 정신적 기 원으로 보면 뒤늦게 나타난 낭만주의의 아들이었지요.
하지만 바그너가 행복하게 자신을 찬미하고 자신을 완성한 사람인 데 반해, 니체는 혁명적인 자기 극복자로서 '유다 가 된 사람이죠.
바그너가 한 시대 최후의 숭배자이며 끝없이 매혹하는 완성자였다면, 니체는 인류의 새로운 미래를 내다보는 예언자이며 영도자가 되었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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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랑'을 성적인 사랑으로 환원하는 것은 분명 정신분석학의 특성이다.
쇼펜하우어의 형이상학의 공식인 "의지의 초점”(성욕, 섹스)과 프로이트의 문화 이론 및 승화 이 론에는 동일한 심리학적 자연주의가 표현된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19세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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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화는 다시 톨스토이를 연상시킨다.
그러니까 늙은 예언자이며 우울한 기독교도인 톨스토이가 순수한 흥에 겨워 장인의 어깨 위로 뛰어올라갔던 그 장면 말이다.
바그너는 자기를 "마에스트로"라고 부르던 테너 가수나 연극쟁이들과 똑같이 예술가였다.
즉, 근본적으로 즐겁고, 남을 즐겁게 하려는 사람, 즐거움과 삶의 축제를 만드는 사람이었다.
니체처럼 판사석에 앉은, 절대적으로 진지한 남자와는 깊고도 매우 건강하게 대조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예술의 가장 장엄한 영역에 자리 잡은 예술가라도 절대적으로 진지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 그에 게는 효과와 최고 오락이 중요하다는 것, 비극과 익살극이 동일한 뿌리에서 나온다는 것을 통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조명만 살짝 바꾸면 이것은 저것이 된다.
익살극은 비밀스러운 비극이요, 비극은 결국은 - 섬세한 익살이니까. 예술가의 진지함 - 이것은 생각을 요구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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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여 말하자면, 그의 작가 특성-예술가 특성은 "우리 시대에서 멀리 떨어진" 시대들과도 연결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인간 두뇌가 현대성-주지주의로의 발전을 이미 완성한 시대들에도 잘 어울린다.
그의 본질을 구성하는 악마성과 시민성의 끝없는 혼합은 바로 이런 현대성에 해당한다.
이 점에서 쇼펜하우어도 아주 비슷하며, 그렇게 보면 두 사람은 동시대인이고, 개인적으로도 가장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가 음악의 틀 안에 욱여넣은, 그의 본성의 비시민적 극단주의 - "음악은 나를 온전히 경탄하는
인간으로 만든다.
그리고 내가 내 소리들을 떠나는 순간, 감탄 부호가 내게 유일하게 만족스러운 구두점이다"라고 그는 말한다.
이런 극단주의는 그의 모든 정신 상태, 특히 우울할 때의 열광적인 특성에 드러난다.
이런 특성 은 그의 외적인 운명들(운명은 성격의 결과니까), 세상과의 불화, 찢기고 쫓기고 추방당해 이리 저리 휘둘린 삶으로 표현된다.
그는 이런 자 신의 운명을 베발트-지크문트의 대사에서 서정시로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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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는 독일의 정신이 전부였고, 독일이라는 나라는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이미 <장인가수>의 핵심적 발언에서 그는 이 사실을 공표했지요.
"신성로마제국이 안개 속에 스러진다 해도, 신성한 도이치 예술은 그대로 남으리."
이번에 우리가 다시 관람할 이 거대한 작품에서 그는 황금의 저주를 가르치고, 또 권력욕이 내적으로 개심 하여 오로지 자유로운 권력 파괴자 만을 사랑할 수 있게 만들지요.
그의 진짜 예언은 "재물도, 황금도, 당당한 화려함도 아니고, 혼탁한 계약의 속임수 결탁도" 아닙 니다.
그것은 <신들의 황혼> 마지막에, 지상을 지배하던 불타는 성곽에서 솟아오르는 천상의 멜로디입니다.
이 멜로디는 독일의 또 다른 생명시, 세계시의 마지막 말과 동일한 것을 말합니다.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위로 끌어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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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즘이란 바로 다음과 같은 뜻이지요.
"나는 어떤 종류든 사회적 해결책에는 관심이 없어. 내가 원하는 건 그냥 민속 동화야."
현실에서 나치즘은, 정치의 영역에서 동화는 거짓말일 뿐이라는, 또 다른 사실에서 튀어나온 지저분한 야만입니다.
형언할 수 없는 온갖 비열함을 지닌 나치즘은 독일 정신이 지닌 신화 성향과 정치적 순진함의 비극적 결과입니다.
여기서 비어렉 씨보다 조금 더 나아가보지요.
나는 문제 많은 바그너의 문헌에서만 나치즘의 요소를 보는 게 아니라, 그의 음악, 그의 작품에 대해서도 비슷한 의문을 품고 있으니까요.
물론 더욱 높은 의미에서 그러는 거지만. 지금도 나는 바그너 작품 세계의 몇 소절이 내 귀를 때릴 때면 마음이 깊이 설렐 정도로 그것을 사랑합니다.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열광, 우리를 자주 사로잡는 장엄한 감정은 오로지 가장 위대한 자연이 우리에게 만들어내는 감정하고만 견줄 수 있지요.
높은 산봉우리 위의 저녁놀이나 폭풍우 치는 바다가 불러내는 감정 말이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르네상스 이래로 지배적인 사회와 "문명에 맞서도록” 창조되고 지휘된 이 작품이, 히틀러 사상과 동일한 방식으로 부르주아-인문주의 시대를 벗어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되겠지요.
'바갈라바이아'라는 의성어와 두음, 땅에-깊이-박힌-뿌리와 미래를-향한-눈길의 혼합, 계급 없는
사회를 향한 호소, 신화적•반동적 혁명론 - 이 모든 특성을 지닌 이 작품은 오늘날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는 '정치 초월' 운동(나치즘)의 영적 선구자였어요.
이는 유럽에 진짜 새로운 질서가 나타나면 물러나야 할 운동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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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과 같은 삶을 돌아보면서 사람들이 때늦은 부끄러움을 품고, 얼마나 생각 없이 나를 지속적으로 불안과 불확실성 속 에 방치해두었는지, 그런데도 내가 그런 상황에서 그런 작품을, 그러니까 지금 내가 만들어낸 것과 같은 그런 작품을 만들어냈다는 것이 그 어떤 기적인지를 깨닫는 시간이 올 거요.’
그것은 정말로 기적이었으니, 세상은 참기 힘든 이 인간을 부당하게 대우한 일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하지만 세상은 기억력이 없으니, 오늘날 그의 작품에 탐닉하면서도 세상은 한때 그런 작품을 불가능하고 부조리한 것이라 여겼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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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이라고? 꿈이라고? 시간이 흘러 그것은 진짜가 될 참이었다.
또는 아주 진짜는 아니라도 어쨌든 '바이로이트 극장'이 나타나서, 입장료 20마르크에 왕들과 황제들, 국제적인 벼락부자들과 끔찍한 바그너-문필가들이 관객이 되었다.
이 작은 도시 전체가 비즈니스와 집값 상승, 찬란한 리셉션과 가든파티들. 거기 덧붙여 불꽃놀이까지.
그리고 오류 없는 교황(바그너)의 불손함과 망상에서 전혀 자유롭지 못한 ‘반프리트(Wahnfried 망상 없는 평화)’저택. 이것은 성공한 유토피아였고, 니체는 여기서 도망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