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월16일 오늘의 역사
2023년 독일에서 3000년전 청동검 원상태 유지로 발견
2020년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
남북공동연락사무소는 2018년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4·27 판문점 선언에 합의함 따라 개성공단 내 남북교류협력사무소로 사용되었던 4층짜리 건물을 97억 8000만원을 들여 개,보수해 그해 9월 문을 열었다. 2층과 4층에 각각 남·북 인력이 상주 근무하며 일상적으로 대면 소통이 가능한 여건이 만들어졌다.
2020년 1월 30일, 남측 인력이 철수했다. 이후부터는 매일 오전 9시와 오후 5시 두 차례 정기적으로 통화했다. 6월 4일, 북한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이 대북전단 살포를 문제 삼으며 "멀지 않아 쓸모없는 공동연락사무소가 형체도 없이 무너지는 비참한 광경[2]을 보게될 것" 이라고 밝혔다.
6월 9일, 12시부터 북남 공동연락사무소를 통해 유지해 오던 남북 당국 사이의 통신연락선, 북남 군부 사이의 동서해통신연락선, 북남통신시험연락선, 노동당 중앙위원회 본부청사와 청와대 사이의 직통통신연락선을 북한이 일방적으로 완전 차단·폐기했다. 6월 16일 14시 50분경 북한이 개성공단에 위치한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탄으로 폭파했다
2016년 일본인 메이저리거 스즈키 이치로(마이애미 말린스) 개인통산 4,257번째 안타(세계 최다)
2015년 의인 고(故) 이수현 아버지, 일본 정부 훈장 받아
2001년 일본 도쿄 JR신오쿠보 지하철역에서 선로에 떨어진 일본인 남성을 구하고 숨진 고 이수현(당시 26세)씨의 아버지 이성대씨가 한·일 친선에 기여한 공로로 일본 정부 훈장을 받았다.
주(駐)부산일본국총영사관은 “이성대 LSH 아시아장학회 명예회장이 16일 오전 주부산일본국총영사 관저에서 일본 정부가 주는 훈장인 ‘욱일쌍광장(旭日光章)’을 받는다”고 밝혔다. 일본과의 관계 개선이나 문화 교류에 힘쓴 외국인에게 주는 훈장이다. 총영사관 측은 “이성대 명예회장이 아들 수현씨의 의로운 죽음 이후 일본과 대한민국의 친선, 그리고 이해를 촉진하는 데 크게 기여한 공로”라고 말했다.
이 명예회장은 일본에서 LSH 아시아장학회를 설립, 일본에 유학 온 아시아 18개국 639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매년 교류 행사를 가져왔다. 또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때는 사재 1000만원을 기부하고, 이수현정신선양회 명예회장 및 피스등산대 명예회장 등을 맡아 활동해왔다. 이에 앞서 2001년에는 당시 모리 일본 총리가 수여한 목배(木杯)를 고 이수현씨를 대신해 받기도 했다.
2015년 한식 코스화의 효시 ‘용수산’ 최상옥 회장 별세
개성 부잣집 딸로 태어난 최 회장은 서울 계동 99칸 기와집 마나님이던 시어머니를 수발하며 요리 실력을 숙성시켰다. “뛰어난 솜씨를 왜 썩히느냐”는 주변의 성화로 53세이던 1980년 삼청동에 개성 비빔밥과 국밥 전문 음식점을 열었다.
외국인에게도 자랑스럽게 한국 음식을 대접하고 싶었던 그는 서양 요리나 중국 요리처럼 한식도 순서대로 내는 방식을 한식당으로는 최초로 도입했다. 뜨거운 음식은 뜨겁게, 차가운 음식은 차갑게 먹을 수 있는 코스식 서빙은 이후 고급 한정식집에서 대세가 되었다.
2015년 부동산 재벌 도널트 트럼프, 미국 대선 출마 선언
미국의 부동산 재벌 도널드 트럼프(69·사진)가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그는 뉴욕 맨해튼 트럼프타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40여분 연설에서 그는 “조국 미국을 다시 위대한 나라로 만들고, 신이 창조한 최고의 ‘일자리 대통령’이 되겠다”며 “나는 돈이 많으니 내 돈으로 선거를 치르겠다”고 했다. 1988년부터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 참여를 저울질하다 27년 만에 무대에 선 것이다.
거친 말투로 악명 높은 그는 첫날부터 ‘솜씨’를 뽐냈다. 멕시코에 대해 “성폭행범이나 마약 딜러 같은 범죄자들을 미국으로 보내고 있다”며 “남쪽 국경에 거대한 울타리를 쌓고, 비용을 멕시코에 청구하겠다”고 했다. 오바마 대통령에 대해서는 “불법적인 이민 정책을 강행해서는 안 된다. 내가 대통령이 되면 바로 폐기하겠다”고 하고는 “나는 세계에서 제일 좋은 골프장을 갖고 있다. (오바마가) 빨리 물러나 골프 하기를 원한다”고 했다. 출마 선언과 함께 공개한 트럼프의 재산은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추산했던 것보다 2배 이상 많았다. 포브스는 순자산 41억달러(약 4조5500억원)를 추정했지만, 실제로는 부동산·현금·채권 등 92억4000만달러(약 10조2500억원)나 됐다. 재산 공개는 법에 따른 것으로, 모든 대선 후보는 출마 선언 30일 안에 자신과 배우자 및 미독립 자녀의 재산을 신고해야 한다.
트럼프는 워싱턴 정치에 물들지 않았다는 점, 사업가로서의 성공 등을 무기 삼아 공격적으로 선거운동을 하겠다는 생각이다. 그는 “워싱턴 정치인들은 말만 하지, 행동하지 않는다”며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이들이 우리에게 약속된 땅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지지율은 아직 3% 수준이다.
2015년 원로 무용가 전황 전(前) 국립창극단장 별세
1927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난 고인은 함흥 제일보통학교와 함흥상업학교를 졸업했다. 근대 무용의 선구자인 최승희(1911~1969)의 수제자다.
1947년 최승희무용연구소에 입소, 그녀의 제자가 됐다. 이후 최승희무용단원으로 중국·동유럽 순회공연하며 실력을 쌓았고 1951년 한국민속무용연구소를 개소했다.
1964년 일본 도쿄올림픽 경축 파견 한국민속예술단 총감독 및 안무·연출을 맡은 것을 비롯해 1970년대 정부문화사절단으로 동남아와 유럽 일대에서 순회공연했다.
1992~94년 한국국악협회 이사장, 1996~97년 국립창극단 단장 겸 예술감독을 지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겸임교수도 역임했다. 국무총리표창, 문화공보부장관 표창, 국민훈장 동백장 등을 받았다.
2011년 아이만 알자와히리, 오사마 빈 라덴의 뒤를 이어 알 카에다 지도자로 뽑힘
2011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노동기구 총회에서 가사노동자의 권리를 일반노동자와 같은 수준으로 보호하는 내용의 가사노동협약 통과
2007년 1993년 3월 북송된 비전향장기수 1호 이인모 세상 떠남
2005년 6.15 남북공동선언 5주년 기념 민족통일대축전 폐막(평양)
1999년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소떼와 함께 방북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1999년 6월 16일 북한에 제공할 소 1천마리중 1차분인 소 5백마리를 실은 트럭과 함께 판문점을 통해 방북했다. 정주영 회장은 이날 오후 개성을 거쳐 평양에 도착,7박8일간의 방북일정에 들어갔다. 분단 이후 민간차원의 합의를 통해 군사구역인 판문점을 개방, 민간인의 북한방문이 이뤄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정주영 회장은 새로 개통된 문산-판문점간 통일대교를 지나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 도착,평화의 집에서 방북기자회견을 가진 뒤 판문점중립국감독위 회의실을 지나 도보로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정주영 회장 초청 단체인 북한 아태평화위 부위원장 송호경을 비롯한 관계자들이 판문점 북측지역 판문각에 나와 정회장을 영접했다.
이번 정주영 회장의 방북은 북한당국이 지난 1994년 남북 정상회담 실무회담을 제외하고 김영삼 정부기간 굳게 닫아온 판문점을 민간교류차원에서 열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있다.
1997년 금융감독원 신설 발표
정부가 총리 직속으로 금융감독위원회(위원장 장관급)를 만들고,그 산하에 은행-증권-보험감독원을 통합하는 금융감독원을 발족시키기로 최종 결정했다.
또 한국은행에는 자료제출 및 검사요구권, 공동검사 요구권 등 간접적인 감독 기능만 남기고, 한은 총재가 매년 초 설정하는 물가방어 목표를 발표한 뒤 목표를 지키지 못하면 해임할 수 있는 ‘완만한 계약제’ 개념도 도입키로 했다.
강경식 부총리는 16일 과천 종합청사에서 이경식 한은 총재와 박성용 금융개혁위원장이 배석한 가운데 기자회견을 갖고, 중앙은행 제도와 금융감독체계 개편에 관한 정부 최종안을 발표했다.
정부는 “재경원 장관이 겸직해 오던 금융통화위원장 자리를 한은에 내주고, 물가방어에 실패하는 경우 외에는 한은총재 임기(5년)를 보장, 종전보다 한은의 독자적인 통화정책이 가능하도록 독립성을 강화했다”고 밝혔다.
반면 한은의 은행감독 및 외환정책 기능을 대부분 박탈하고 임직원 인건비 같은 경비성 예산은 재경원 승인을 받도록 하는 등 한은의 권한과 기능을 대폭 축소하는 내용이어서, 한은 내부에서는 이 총재 퇴진운동 등 강한 반발이 발생하는 파문으로 번졌다.
한국은행과 증권감독원, 보험감독원의 일부 간부들과 노조는16일 정부 개혁안의 철회를 요구하며 무기한 철야농성에 돌입하기도 했다.
1996년 ‘북청사자놀음’ 예능보유자 변영호씨 별세
중요 무형문화재 제15호 북청사자놀음 보유자 변영호씨는 김수석-동성영-이근화선씨와 함께 ‘북청사자놀음’ 제1세대로서 이 놀이의 명맥을 이어온 예능인이었다.
1907년 함경남도 북청에서 태어난 그의 원래 직업은 가구를 짜는 목수였다. 북청사자놀음은 어릴 적 동네에서 어깨너머로 배운 것이었다. 그의 인생이 바뀐 것은 1·4후퇴 때 월남하면서 월남한 북청 사람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북청구민회에서 그는 사자탈 제작과 퉁소연주에 발군의 실력을 발휘, 자칫 끊어질뻔 했던 북청사자놀음을 전승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변씨는 지난 1970년 7월 북청사자놀음 기능 보유자로 인정받았으며, 병세가 악화되기 직전인 1995년 가을까지도 미수의 나이에도 불구, 함경남도 북청민속예술보존회에 날마다 출근하는 노익장을 과시했다.
1992년 미소정상회담,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 I) 합의
부시 미국 대통령과 옐친 러시아 대통령은 1992년 6월 16일 가진 1차 정상회담에서 양국이 현재 보유중인 장거리 전략핵무기를 2003년까지 3분의 1만 남기고 모두 폐기한다는데 합의했다. 이같은 핵감축은 미국과 구 소련이 15년여의 오랜 협상끝에 1991년 타결한 전략무기 감축협정(START) 합의수준에서 또 다시 절반 이상을 줄이는 획기적인 내용이었다.
START에서 정한 양국의 전략핵탄두 보유 상한선은 미국 9천8백86개 소련 1만2백37개였는데 양국 정상은 이번 회담에서 보유 상한선을 미국 3천5백개, 러시아 3천개로 다시 대폭 하향 조정했다. 양국 정상은 또 가장 가공할 무기인 중형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과 다탄두 ICBM을 폐기키로 합의했으며 이와함께 테러 위험 국가의 핵미사일 공격으로부터 인류의 안전을 확보하는 범지구방어망 구축작업을 함께 연구해 나가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때 합의된 전략핵무기 감축은 두 단계로 나눠 이뤄졌는데 1단계에서 양측은 보유 핵무기를 ICBM 1천2백50기 중형미사일 6백50기 잠수함 발사 미사일 2천2백50기 등 3천8백∼4천2백50개 수준으로 줄이도록 했다. 2단계에서 양측은 보유상한선이 1천7백50개로 제한되는 잠수함 발사 미사일(SIBM)을 포함, 각각 3천∼3천5백개의 핵탄두만 남기고 나머지를 모두 폐기하도록 했다.
1989년 조치훈 명인, 본인방 획득
1987년 해금강 유람선 극동호 화재 사건
극동호. 1987년 6월 16일 14시 50분경, 경상남도 거제군 남부면 다포리 (속칭 ‘솥뚜껑’) 해상에서 관광객 87명(선장·선원 2명 포함)을 태우고 해금강 관광을 마치고 충무로 돌아가던 충무유람선협회 소속 ‘극동호’가 기관실 엔진 과열로 불이 나면서 침몰, 관광객 29명(남3·여22) 이 숨지고 7명이 실종, 51명이 구조되었다.
극동호는 24톤급, 출력 265마력, 속도 17노트의 목조디젤선으로, 정원은 승무원 3명을 포함하여 87명이었다. 충무-한산섬-해금강 구간을 부정기유람선으로 운행했다.
6월 16일 11시경 선원과 승객 87명을 태우고 충무항을 출발한 극동호는 관광을 마치고 14시 40분경 다시 충무항으로 돌아갈 때 배에 과열한 엔진에서 불꽃이 튀면서 선체에 옮겨 붙어 화재가 발생하였다. 객실로 불이 번지자 승객 다수가 객실 밖으로 나와 바다에 뛰어들었다. 구명동의는 줄로 묶여 있었고, 소화기는 작동되지 않았다. 승객들은 10분 만에 모두 뛰어내렸으며, 배는 20분 만에 완전히 침몰되었다.
사고 해역은 물살이 센 곳으로, 인근을 지나던 선박들이 불길을 보고 구조에 나섰으나 87명 중 29명이 사망하고 7명이 실종되었다. 29명은 중경상을 입었고, 21명만이 무사했다. 승객들은 남원과 대구의 단체관광객들로, 부녀자가 대부분이었다. 선장과 기관장은 살아남아 구속되었다.
1984년 캐나다 수상에 존, 터너 선출
1983년 교황 요한바오로2세 모국 폴란드 방문
1983년 소련, 안드로포프 국가원수로 선출
1981년 정부 해외여행 자유화 확정 발표
1980년 KBS TV과외 `가정고교방송` 방영개시
1977년 브레즈네프, 소련 국가원수로 선출
소련 공산당 서기장 브레즈네프가 1977년 6월 16일 소련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에 선임됐다. 브레즈네프는 이로써 당과 국가의 양 쪽을 대표하는 자리에 올라 스탈린 이후 가장 강력한 권한을 갖게 됐다.
소련은 1964년 10월 흐루시초프를 해임한 이래 개인지배를 막기 위한 방편으로 당 서기장과 수상, 최고회의 의장을 각각 분리, 트로이카 방식에 의한 집단지도체체를 유지해 왔다.
브레즈네프는 1964년부터 사망한 1982년까지 스탈인 이후 최장기인 18년 동안을 소련의 지도자로 군림, 국제긴장 완화와 평화공존 이른바 ‘브레즈네프 노선’을 추진해 왔다.
1977년 핵물리학자 이휘소 박사 의문사
1977년 로켓과학자 베르너 폰 브라운 사망
1976년 남아공 소웨토에서 대규모 흑인폭동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 교외에 있는 흑인거주지역 소웨토에서 1976년 6월 16일 폭동이 일어났다. 이날 백인정권의 언어정책에 항의하는 흑인학생 약1만여명이 경찰 300명과 충돌, 최소한 6명이 사망했고 14명이 부상했다.
소웨토봉기는 백인정부가 아프리칸스(네덜란드계의 현지 공용어)를 정규 교과과목으로 채택하려는 데 대해 반대시위를 벌이던 군중에게 경찰이 발포, 13세 흑인소년이 사망함으로써 발생했다. 학생들은 아프리칸스로 수업을 진행하는 정부의 방침에 반발, 수주간에 걸쳐 수업을 보이콧해 왔다.
폭동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1년간 남아공 전역으로 확산됐으며 이 기간중 사망자수만 575명에 달했다. 아프리카 비동맹제국과 스웨덴, 파나마 8개국은 이 사건의 원인은 남아공 인종정책에 있는 것으로 판단해 유엔안보리에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 폐지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제출했다. 유엔안보리는 5월 19일 만장일치로 이 안을 채택했다.
1973년 소련 브레즈네프 제1서기 방미
브레즈네프 소련공산당 서기장이 1973년 6월 16일부터 10일간 워싱턴을 방문, 닉슨 대통령과 회담했다. 닉슨 미대통령과 브레즈네프 소련공산당서기장은 18일 오전과 오후 두차례 백악관에서 의제 확정없이 제1차회담을 시작으로 24일까지 계속될 미소정상회담을 시작했다.
이번 회담에서 미국과 소련은 미소 핵제한 기본협정, 두 개의 통상관계의정서, 원자력평화이용을 위한 과학협정, 문화교류, 해양탐사, 농업협력, 민간항공 확장, 소득세 등 모두 9개의 협약에 조인했다. 그리고 25일 핵무기제한, 크메르평화, 양국교역증대, 유럽안보 등에 공동 노력을 기울일 것을 다짐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워싱턴 정상회담을 폐막했다
1972년 제1회 소년체전 개막
1972년 6월 16일 부터 6월19일 까지 4일간 서울에서 제1회 스포츠 소년단 창단대회 및 소년체전이 전국의 어린이 6652명이 참가한 가운데 막을 올렸다
소년체전은 초등학교 5,6학년과 중학생들이 각종 경기를 하여 승부를 겨루고 있는 대회 이다
경기종목은 배구를 비롯하여 19개 종목을 실시하였으며 1위는 충남, 2위는 전북, 3위는 경기도가 차지하였다
.
1972년 남북적십자 예비회담 실무회의,본회의 의제확정, 합의문서교환
1971년 국립의료원 인턴들 처우개선 요구 의료파동 일어남
1968년 시인 김수영 교통사고로 사망
시인 김수영에게 4·19는 분기점이었다. 모더니즘으로 출발해 설움·비애 등의 소시민적 정서를 표현하던 시(詩)세계가 이 때를 전후해 현실참여 쪽으로 완연히 기울었다. 물론 그 전에도 술만 마시면 자유당과 이승만을 욕했지만 아직 모더니즘의 형식주의를 완전히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다. 좌절과 미완이었지만 김수영에게 4·19는 언제나 꺼지지 않는 횃불이었다.
분단상황도 지울 수 없는 아픔이었다. 김수영 자신이 6·25 때 의용군으로 끌려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풀려났었다. 황혼무렵이면 발걸음이 명동의 전주집이나 은성 부근을 서성거렸지만 그는 언제나 원고료를 꼬박꼬박 집에 가져간 철저한 생활인이기도 했다. 한때는 양계로 가족을 부양하기도 했다.
1968년 6월 15일 늦은 밤, 김수영은 문단의 지인들과 밤늦게까지 술을 마신 뒤 귀가하던 중 갑자기 덮친 버스에 치였다. 이튿날 오전 9시경 병원에서 숨졌다. 47세였다.
1967년 브라질 최초의 인공위성 발사실험에 성공
1966년 장창선선수, 세계아마 레슬링대회서 금메달
1963년 발렌티나 테레슈코바, 세계최초로 여성 우주비행에 성공
“여기는 갈매기. 기분 최고. ” 1963년 6월 16일, 최초의 여성 우주비행사가 된 소련의 발렌티나 테레슈코바(당시 26세)가 우주에서의 감동을 이렇게 전했다. 갈매기는 그녀의 호출 부호.
테레슈코바가 1인승 우주선 ‘보스토크 6호’에 몸을 싣고 하늘로 날아오른 것은 낮 12시30분이었다. 장시간의 우주여행이 남녀의 몸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를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소련은 이를 위해 발레리 비코프스키 중령을 태운 ‘보스토크 5호’를 이틀 전에 발사, 그녀와 함께 비행하도록 했다. 모스크바 방송은 무중력 상태를 실연(實演)하는 그녀의 모습을 오후 3시30분부터 생중계하기도 했다. 보스토크 6호는 70시간50분 동안 지구를 48바퀴 선회한 뒤 19일 오전 11시20분쯤 지구에 착륙했고, 보스토크 5호는 81바퀴를 돌며 119시간6분 동안 우주에 머무는 신기록을 달성한 뒤 같은 날 오후 2시쯤 지구로 돌아왔다.
흐루시초프는 “여성은 약하지 않다”며 소련에서 6번째, 세계에서 10번째의 우주비행사가 된 테레슈코바의 장도를 축하해주었다.
1960년 일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방문 취소
1960년 6월 16일 일본정부가 강력한 좌익계 시위자들에게 굴복하고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의 신변이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방일을 연기할 것을 정식으로 발표했다. 좌파 사회당원들과 공산주의자들은 아이젠하워 대통령 방일 연기발표에 즉각적인 승리의 반응을 보여줬다.
전날 15일에 미-일 신안전보장조약과 관련해 발생한 유혈충돌에서 여학생의 희생에 의한 결과였다.
이 때문에 당초 일본을 방문한 후 22일경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었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3일 앞당겨 19일 한국에 방문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극동 친선방문의 마지막 목적지인 하와이 호놀룰루 주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도착, 9일간의 일정을 마쳤다. 이번 순방 기간 중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대만에서 우호적이고 열광적인 환영을 받은 며칠간 아시아지역에서 공산주의의 존재가 더욱 분명히 드러났다. 중국은 아이젠하워 대통령 방문 수시간전에 대만 앞바다의 섬들에 공격을 가했다
1956년 국내 최초 TV방영 시작
1956년 적십자사, 납북자 신고 접수
1954년 고 딘 디엠, 베트남 수상에 취임
1954년 제5회 월드컵 스위스서 개막
1950년 여간첩 김수임에 사형 언도
1947년 제1회 유엔아시아극동경제위원회(ECAFE) 상해서 개막
1945년 일제 조선국민의용대 조직 요강 발표
1944년 프랑스 역사가 마르크 블로크 사망
1940년 프랑스 페탱 내각, 독일에 항복
1932년 로잔배상회의 (독일의 배상액 절하)
1924년 중국, 황포군관학교 개교. 교장 장개석
1920년 멕시코의 대통령(1972-82) 로페스 포르티요 출생
1917년 제1회 러시아 소비에트 대회
1910년 페루의 대통령(1968-75) 벨라스코 알바라도 출생
1903년 미국 포드자동차사 설립
1902년 이상재 등 개혁당사건에 관련되어 구속
1901년 손문, 일본에 망명
1840년 아편전쟁 발발(양력 7월 18일)
1840년 6월 16일 영국이 철갑선 `네메시스`(신의 보복)를 비롯, 48척의 함대를 동원해 이른바 아편전쟁을 시작했다. 영국의회는 4월 10일 271대 262라는 근소한 표차로 전쟁을 결의한 바 있다. 100여년 동안 중국에 아편을 팔아 막대한 부를 벌어들였던 영국은 중국정부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히자 보복차원에서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은 광주에 부임한 임칙서가 `아편금연대업(阿片禁煙大業)`에 나서면서 촉발됐다. 임칙서는 중국인 밀매자들을 적발해 처벌하고 밀수선들을 억류하거나 이를 보호하고 있는 영국 상관을 포위하는 등 강력한 무력시위를 감행했다. 압수한 아편 전량을 폐기하기도 했다. 아편전쟁은 인류역사상 가장 추악한 전쟁의 하나로 평가받았다
1762년 실학자 정약용 출생
1583년 스웨덴 역사상 가장 유능한 총리로 불리는 악셀 옥센셰르나 출생
1461(조선 세조 7) 간경도감 설치
1432년 조선, 월식 발생
1232년 고려, 몽고의 침입으로 강화로 천도 39년간 몽골에 항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