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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와 함께 고양시 아람누리 문예아카데미에서 글공부하는 친구가 올린 글입니다>
제가 우리교실 올 때 다섯살이던 막내가 올해 중학생이 되었어요.
예전부터 샘 동화를 종종 보여주곤했는데
오늘 국어시간에 샘 작품으로 공부했다며 사진을찍어왔어요.
<내 마음의 희망등>이라는 수필이에요.
이걸로 무슨공부를 했냐고 물으니
"비유법이요. 은유법.직유법."
이라고하네요.
비유법만 배우지말고 작품에 담긴 좋은 마음도 함께 배웠으면 하는 아쉬움이 생기네요.
여러분도 함께 공부해보세요~^^
<내 마음의 희망등>
지난봄, 초등학교 시절 담임 선생님이었던 은사님께서 정년 퇴임을 하셨다.
강릉에 계시는 권영각 선생님.
그분을 처음 만난 건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이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오지 마을에 그때 나이로 스물다섯 살쯤 된 새신랑 선생님이 전근을 오셨다.
다른 선생님들은 강릉에서 자전거로 통근했지만, 이 선생님은 전근을 오신 지 한 달 만에 학교 옆에 방 한 칸을 얻어 들어오셨다.
강릉 시내에서 시골 학교까지 자전거를 타고 다니기가 불편해서가 아니었다.
지금도 고등학교와 대학교의 입시 열풍이 대단하지만, 그때는 중학교까지 입학시험을 봐서 들어가던 때라 도시의 6학년 아이들은 거의 모두 입시 과외를 했다.
강릉 시내의 초등학교 6학년 아이들도 그랬다.
그렇지만 나와 친구들에게 ‘과외’는 꿈조차 꿀 수 없는 다른 세상의 이야기였다.
선생님은 낙후된 벽촌에서 도시의 아이들보다 상대적으로 불리한 여건에서 공부하는 우리를 위해 일부러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마을에 들어와 신혼살림을 차린 것이었다.
어린 제자들 공부 때문에 사모님까지 전기도 안 들어오는 우리 마을로 들어와 사셔야 했다.
더구나 그때 사모님은 배 속에 아기를 가진 몸이었다. 지금 같으면 도저히 시골 학교 옆으로 들어와 살 수 없는 상황인데도 선생님과 사모님은 벽촌의 어린 제자들을 위해 기꺼이 시골 마을로 들어오셨다.
그 이삿짐을 우리 반 아이들이 날랐다. 작은 손수레에 이불 보퉁이 하나, 솥 하나, 그릇 몇 개가 전부였다.
낮 공부가 끝나면 각자의 집에서 저녁밥을 먹고 우리는 다시 학교에 갔다.
학교에 가면 언제나 선생님이 수업 준비를 끝내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낮 공부와는 가르치는 선생님도 배우는 우리도 분위기가 달랐다.
그때 우리가 배운 것은 단순히 학교 공부만이 아니었다.
선생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은 '자신감’이었다. 공부에 대한 자신감만이 아니라 앞으로 어른이 되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어디 나가서도 기죽지 않고 자기 뜻을 펼칠 자신감을 어린 가슴마다 심어 주셨다.
가난한 시골 마을이다 보니 한 학년에 쉰 명쯤 되는 아이들의 3분의 1은 가정 형편상 중학교진학을 포기해야만 했다.
우리가 6학년이 되었을 때, 학기 초부터 선생님은 한 명의 제자라도더 중학교에 보내려고 논둑으로 밭둑으로 아이들의 부모를 찾아 다니며 설득했다.
어떤 집은 10리 길을 세 번 네 번 찾아가기도 했다. 그런 선생님 덕에 우리 반은 우리 한 해 위나 한 해 아랫반보다 더 많은 아이가 중학교에 갈 수 있었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면 우리 책상 위에는 등잔불이, 선생님 책상 위에는 작은 남포등이 불을 밝혔다.
선생님 책상 위에 불을 밝히던 남포등에는 ‘희망등’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아마도 그 남포등을 만든 사람은 그 등이 단순히 어둠을 밝히는 것만이 아닌 희망을 비춰 주는 것이 되기를 바랐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이름 탓인지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 남포를 ‘희망등’이라고 부르고, 선생님을 ‘희망등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그때 선생님은 공부뿐 아니라 선생님의 별명 그대로 우리에게 앞날에 대한 ‘희망’과 ‘내일’을 가르쳐 주고 계신다는 것이 어린 마음에도 가늠되었기 때문이다.
몇 해 동안 대학에 문학 창작 강의를 나갔던 적이 있다. 그때 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초등학교 때나 중·고등학교 때 백일장에 나가서 상을 받아 본 사람 어디 손 한번 들어 봐라.”
그러자 잠시 쭈뼛쭈뼛하던 학생들 거의 모두가 손을 들었다.
그러니까 그 강의실에 앉아 있던 40여 명의 학생 거의 모두 초등학교 때나 중 · 고등학교 때 이런저런 백일장에 나가 몇 개의 상을 받지 않은 친구가 없다는 얘기였다.
다시 말해 그들 나름대로 어린 시절부터 글을 쓰는 일에 반짝반짝 재주를 보였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러나 겸손의 말이 아니라, 나는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단 한 번도 백일장 같은 곳에 나가 상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초등학교 시절엔 초등학교 시절대로 그랬고, 중·고등학교 시절엔 중·고등학교 시절대로 그랬다.
나는 언제나 그런 상으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아주 평범한 소년이었다.
한 학년이 50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 시골 초등학교 시절에도 나는 그들 가운데 특별히 빛나는 구석을 보여 주지 못했다.
내 앞에는 늘 공부로도, 글짓기로도 앞선 친구들이 있었다.
시나 군에서 주최하는 백일장에 나갈 학교 대표를 뽑는 교내 대회에서조차 나는 단 한 번도 1등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가장 잘했던 것이 동시 부문의 2등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40년 지기 친구인, 부산에서 대학교수를 하는 한 친구와 또 그 분야와는 거리가 멀게 은행 지점장을 하는 또 다른 한 친구가 공부에서든 글짓기에서든 늘 내 앞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시골 작은 초등학교에서도 큰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어쩌다 큰 대회에 나가서도 번번이 떨어지기만 하는 나를 선생님만은 믿어 주셨다.
나에게만 특별히 그렇게 대한 것이 아니라 초등학교를 졸업한 지 36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친구들 모두 그 선생님 얘기를 할 만큼 한 사람 한 사람 가슴마다 희망을 불어넣어 주셨다.
우리 초등학교 동창들은 지금도 두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만나 얼굴을 보고 있다.
50명쯤의 졸업생 중 서울에서 살고 있는 친구가 20명 정도이며, 그중 15명쯤이 홀수 달 마지막 토요일에 서울 시내의 한 작은 음식점에서 만나는 것이다.
멀리서는 부산에서, 또는 울산과 광주에서, 때로는 강릉의 친구들도 일부러 서울로 올라와 그 모임에 합류하기도 한다. 물론 서울의 친구들도 강릉 모임에 자주 내려간다.
어디서 만나든 서로 그간의 안부를 주고받은 다음 꼭 빠지지 않고 챙기는 것이 선생님에 관한 얘기다.
이제 내일모레면 나이 50이 되는 친구들이다.
저마다 50년 동안 살아오며, 그동안 각기 자기 분야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나왔겠는가.
그런데도 우리 마음 안에 선생님은 참으로 큰 존재로 남아 계시는 것이다.
얼마 전에 만났을 때 한 여자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그때 선생님이 사모님과 함께 학교 옆에 들어와 사는 모습을 보고, 이다음에 꼭 저렇게 좋은 모습으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고, 20여 년 전 결혼할 때도 앞으로 힘들 때나 괴로울 때나 어린 날 그 선생님을 보며 자신이
부러워했던 모습대로 살아야지 생각했다고.
시골에 들어와 사모님과 사는 모습만으로도 어린 제자들에게 버팀목이 되어 준 ‘희망등 선생님’이셨다.
5학년 2학기 때의 일이다.
나는 교내 백일장에서는 물론 군 대회같이 큰 백일장에 나가서도 매번 떨어지기만 했다.
그때도 역시나 군 대회에 나가 아무 상도 받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온 다음이어서 어린 마음에도 나는 참으로 크게 낙담했다.
선생님은 그런 나와 학교 운동장 가에 있는 커다란 나무 아래에 나란히 앉아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지금은 단풍이 한창이지만 봄에는 나무에서 꽃이 피지?”
“예.”
“너희 집에는 어떤 꽃나무가 있니?”
“매화나무도 있고, 살구나무도 있고, 배나무도 있어요.”
“그래. 그러면 매화나무 예를 한번 들어 보자. 같은 매화나무에도 먼저 피는 꽃이 있고, 나중에 피는 꽃이 있지”
“예.”
“그러면 먼저 핀 꽃과 나중에 핀 꽃 중에 열매를 맺는 건 어느 꽃일까?”
나는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매화나무는 나무들 가운데에서도 이른 봄에 빨리 꽃을 피우는 나무란다. 그런 매화나무 중에서도 다른 가지보다 더 일찍 피는 꽃이 있지. 다른 가지에서는 아직 꽃이 피지 않았는데 한 가지에서만 일찍 꽃이 피면 그 꽃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게 마련이지. 그렇지만 선생님이 보기에 그 나무 중에서 제일 먼저 핀 꽃들은 대부분 열매를 맺지 못하더라. 제대로 된 열매를 맺는 꽃들은 늘 더 많은 준비를 하고 뒤에 피는 거란다.”
“…….”
“이번 군 대회에 나가서 아무 상도 받지 못하고 오니까 속이 상하지”
“예.”
“그래서 이렇게 기운이 없고”
“…….”
차마 그렇다는 대답은 할 수가 없었다.
선생님 얼굴도 바라볼 수가 없어 나는 그저 고개를 떨구고 가만히 땅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네가 그렇게 어른들 눈에 보기 좋게 일찍 피는 꽃이 아니라, 이다음에 큰 열매를 맺기 위해 천천히 피는 꽃이라고 생각한다. 너는 지금보다 어른이 되었을 때 더 큰 재주를 보일 거야.”
그때는 그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몰랐다.
그러나 뭔가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했다.
선생님은덧붙여 이다음에 꼭 좋은 글을 쓰는 작가나 시인이 되고 싶다면, 그때 남들보다 더 큰 열매를 맺기 위해서라도 지금은 책을 많이 읽으라고 하셨다.
“선생님은 이다음 네가 꼭 큰 작가가 되어 선생님도 네가 쓴 책을 읽게 될 거라고 믿는다. 너는 일찍 피었다가 지고 마는 꽃이 아니라 남보다 조금 늦게, 그렇지만 큰 열매를 맺을 꽃이라고 믿는다. 선생님이 보기에 너는 클수록 점점 더 단단해지는 사람이거든.”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나는 닥치는 대로 집과 학교에 있는 책을 읽었고,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든 이해하지 못하든 당시 삼중당에서 나온 《한국 문학대계》12권짜리 두꺼운 책들을 다 읽어 냈다.
어른들이 읽는《삼국지》도 초등학교시절 몇 번을 읽었는지 모른다.
나는 지금도 어린 시절의 독서가 내 작가 생활의 가장 큰 자양이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에게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저마다 방법이 달랐지만, 우리 친구들 모두 그 ‘희망등 선생님’에게 그런 사연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너는 손재주가 참 대단하구나, 또 너는 이런 것을 잘하는구나, 그리고 너는 또 저런 것을 참 잘하는구나…….
또 집안이 가난해 중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에겐, 지금은 집안이 가난해 중학교에 가지 못해도 너는 부지런하니까 이 부지런함만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어른이 되어서도 큰 부자로 살 거다, 하고 선생님은 우리 하나하나에게 그런 말씀으로 용기를 주셨다.
나는 21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작가 수업을 했다.
그러다 보니 신춘문예에만도 열 번 넘게 떨어졌다.
처음 몇 해 동안은 아직 내 공부가 모자라니까 하는 생각으로 버틸 수 있었지만 떨어지는 햇수가 계속되다 보니 중간중간 이것이 정말 내가 가야 할 길인가 하는 회의가 들 때도 많았다.
혹시 재주도 없이 열정만 믿고 이 길로 나선 게 아닌가 싶은 불안감이 들었다.
그때 다시 힘을 내라는 좋은 얘기들과 좋은 격려도 많았지만, 이런저런 회의로 불안한 나를 다시 책상에 불러 앉혀 더욱더 치열한 습작 생활을 하게 했던 것은 어린 시절 그 나무 아래에서 들었던, ‘너는 제대로 열매를 맺을 큰 꽃이 될 거다.’ 라는 선생님의 말씀 한마디였다.
내가 이제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그 말씀이 또 한 번의 희망과 오기를 가지게 했다.
내가 작가가 되었을 때, 또 작가 생활을 하며 이런저런 문학상을 받게 되었을 때 가족 다음으로 가장 먼저 전화를 드린 분도 바로 내 어린 시절의 ‘희망등 선생님’이시다.
그 선생님은 나에게 만이 아니라 나와 함께 선생님 댁을 찾아 뵈었던 우리 집 아이에게도 인생에 큰 힘이 될 만한 가르침을 주셨다.
아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내가 선생님께 약주를 대접하는 옆에 앉아 있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우리 아빠를 이렇게 훌륭하게 키워 주신 아빠 선생님께 저도 술을 한잔 따라드리고 싶습니다.”
이 말을 들은 선생님께서 우리 아이에게 이렇게 말씀해주셨다.
“선생님은 네가 다니는 학교의 선생님이 아니어서 네가 공부를 잘하는지 못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렇지만 선생님이 보기에 너는 나이가 어린데도 인사성도 밝고, 또 이렇게 어른들을 즐겁게 해 주는 마음도 넓은 걸 보니 이다음에도 많은 사람이 너를 좋아하겠구나. 그리고 너도 많은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해 주는 아주 좋은 사람이 되겠구나.”
내가 보기에 우리 아이도 그날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큰 자신감을 얻은 듯했다.
앞으로 자신이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그날 그 말씀 한마디로 완전하게 배운 듯했다.
또 그것이 아이에게 어떤 일에서든 늘 자신감을 주는 것 같았다.
그때 선생님이 아이에게 말씀하셨던 것도 바로 자신감에 대해서였다.
“다른 아이들이라면 그러고 싶은 생각이 있어도 이렇게 말하기가 쉽지 않은데, 아빠 선생님에게 술을 따라 드리고 싶다고 말하는 것도 큰 자신감이란다. 이 자신감만 가지면 너는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을 해도 다 잘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어린 시절 누구에게 어떤 말을 듣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걸 어린 시절 내 모습에서도 보고 지금 중학교 3학년이 된 내 아들의 모습에서도 본다.
같은 선생님께 받은 가르침으로 인해서.
그런 선생님께서 지난봄 정년 퇴임을 하셨다.
42년간 교직에 있으면서 스무 살 이후 온 인생을 그 시절 우리 같은 어린 제자들에게 다 바쳐온 것이다.
그날 퇴임식에 우리 제자들도 참석했다.
지금은 대학교수인 예전 우리 반의 한 친구가 그 시절의 선생님의 은혜에 대해서 말할 때 단상에 앉아 계신 선생님도, 사은사를 하는 친구도, 그것을 듣는 우리와 젊은 시절 선생님이 거쳐 간 다른 학교의 제자들, 또 그날 퇴임식에 오신 다른 선생님들도 모두 눈시울을 붉혔다.
모두 어른들인데도 저절로 그렇게 눈물이 나왔다.
선생님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 인생의 큰 스승으로 우리 마음 안에 ‘희망등’을 들고 서 계신다.
멀리 떨어져 자주 찾아 뵙지는 못해도 우리 마음 안에 그 선생님은 지금도 환하게 ‘희망등’을 밝히고 계신다. 지난번 뵈었을 때, 선생님은 훌륭한 제자들을 두고 있는 삶이야말로 얼마나 아름다우냐고 하셨지만 훌륭한 선생님을 마음속에 두고 있는 우리의 삶이야말로 얼마나 아름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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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때 그시절이 생생합니다.
등잔불 켜놓고 공부하다가
까딱 졸아 앞머리 태워
가위로 움푹 오려내기도 했지요~~ㅎ
저도 많이 태워먹었어요. ㅎㅎ
읽어내려 가는 동안 눈물이 자꾸 나네요
부럽고 감사합니다
지금도 살아계시고, 이따금 연락드리는 은사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