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2부를 올리겠습니다.
일단 맛 보기로 올리는 거니깐 아직 완성된게 아닙니다.
김구 대통령이 7월 11일 민의원 해산을 명령하면서 제 2 대 민의원은 41일 만에 해산하였다. 아군이 계속 밀려나는 상황인 가운데 야당인 이승만계열의 대촉회가 이번 전쟁의 대처를 놓고 비난을 한 가운데 김구 행정부는 이러한 어려운 국정 운영을 해결하기 위해 의회해산을 결정했다. 의회 해산에 따라 전시상황에서 진두지휘하는 국방부 장관을 제외하고 내각이 사퇴함으로서 장관에 있던 사람이 물러났다.
김구 행정부는 다음과 같은 내각을 발표한다. 부통령에는 이승만 내무부 장관에는 조병명(趙秉名), 외무부 장관에는 미국에 지원 요청을 하려 간 서세휴를 법무부장관에는 김서선을 그대로 유임하였다. 재무부 장관 표덕연 그대로 였고 농무부 장관에는 문모경(文模庚), 노동부 장관으로는 묵근중(墨根重), 교육부 장관은 신채호는 그대로 유임했다. 그 외에 과학부 장관에는 매사추세츠 공과대학 출신의 제훈규(諸勳圭)를 체신부와 문화부 장관은 그대로 유임하였다.
전쟁중에 임명된 내각은 전시 내각으로 불렸다. 김구와 이승만은 독립활동 실적은 격이 달랐다. 김구는 민족의 독립을 위해 간도자치정부 인사를 받아들여 독립을 이끌었다. 이승만은 잠시 독립활동을 한 적이 있었으나 그것은 잠시 뿐이었다. 대부분 미국에서 보낸 게 전부였고 미국을 잘 아는 사람이었지만, 외교수완이 뛰어났던 서세휴나 위류후에 비하면 뒤떨어진 수준이었다. 게다가 과거에 국제연맹에서 신탁통치 발언으로 큰 독립세력인 간도자치정부 수장으로부터 비난을 받아야만 했다. 그 당시 대한민국 인민은 국내진입작전을 주도한 김구를 지지했기에 해외에서 별다른 성과 없는 이승만 보다는 독립활동을 적극 추진하는 인물이 나았다고 보았다.
김구나 이승만은 정치상으로 볼 때 대립관계였고 두 사람은 독립을 위해 헌신했지만, 실질상으로 김구가 조선의 자주독립을 이끌어 왔고 인민을 이끄는 지도자였다. 당내에서 지지를 받는 건 물론이고 만민이 존경하고 따르는 위인이었다. 인물 어느 하나 결점(缺點)이 없는 인물이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으로 말이다. 이승만은 처음부터 지도자의 그릇에 한참 모자랐다. 왕족의 후손이긴 하지만, 독립협회 사건의 계기로 구황실을 증오하게 만든 원인을 제공하였다.
웃기게도 양녕대군의 후손이 세종의 자손을 원망하는 격이었고 자기 스스로 황실을 증오하였다. 김구와 이승만은 조선의 독립은 공통된 생각이었지만, 부역자 처리를 놓고 의견이 엇갈렸다. 김구는 부역자는 만대에 용서 할 수 없는 사람이니 새 나라에 있을 자격이 없었고 이승만은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런 일을 했다면서 부역자를 옹호했다. 이승만의 생각과는 달리 미군정은 부역자 청산을 용인함에 따라 미국이 부역자를 적극 활용할 것이라는 기대는 산산히 부서졌다.
뭐, 어찌되었든 간에 정부수립과정에 외무부 장관에 올랐지만, 대부분 정부 장관은 모두 간도자치정부 관리로 지냈거나 임시정부를 도왔던 사람으로 채워졌다. 이승만 자신으로선 지지할 세력이 별로 없었던 것으로 알 수 있었다. 정부 수립 뒤에서 주도권을 잡은 임시정부 인사와 재미 임시정부 사이에 대립이 이어졌고 여당인 대한민주독립당과 야당인 대촉회 간에 날카로운 정국(政局)이 계속되었다. 대통령 암살 미수 사건으로 양측 대립이 격화 되었고 이러한 현상은 1차 동아시아 전쟁까지 이어졌다.
두 사람으로 정치 주도권 놓고 대립을 했지만, 때 마침 조선노동당이 일으킨 6.25 대폭동은 두 사람의 대립을 잠시 접고 반역자를 색출해야 한다는 의견이 맞아 떨어졌다. 그리고 도망쳤던 김일성은 중공과 손을 잡아 압록강 이북 2개 지구(地區)를 공격함으로서 나라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그것도 같은 공산주의 계열의 국가와 반국가 단체로 지정된 조선노동당이 말이다. 국군도 국토를 지키기 위해 싸웠지만, 전투 경험 차이로 밀리고 말았다. 중공이 쳐들어온 상황에서 그 이상의 대립은 무의미 했다.
아무튼 민의원이 해산됨에 따라 당분간 참의원이 의회를 대행하게 될 것이다. 선거일정은 나라가 안정된 뒤에 결정할 것이고 전쟁 상황에서 예정된 일정의 선거는 불가능했다. 북부지역 4개 지역이 적의 수중에 넘어간 상황에서 선거를 못했다. 그러니 북부 지역의 선거구를 둔 지역은 해당 지역을 탈환할 때까지는 총선은 없을 것이다. 현재 안동지구와 통화지구, 간도지구, 목단강 지구가 이미 적의 수중에 넘어갔고 평안남북도, 함경남북도 지역이 적의 치하(治下)에 떨어진 상태였다.
전쟁이 터진 상황에서 정상 의회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태이고 이제 막 의회를 구성한 상태에서 이러한 전쟁이 터지니 말이다. 일단 민의원 해산은 대통령인 김구가 혼란스런 난국을 해결하기 위해 내려진 조치이긴 하지만, 이승만으로서 받아들일 수 없으며 일부러 선거 일정을 연기를 하는 것 자체가 믿을 수 없었다. 전쟁 통인 상황에서 선거를 치르는 상황에서 선거를 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것은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후방이 안정하면 선거를 치르지만, 나라 안이 어수선한 상황에 선거를 치르는 건 시기상으로 좋지 않았다.
현재 전선 상황을 정리 해보자면 이렇게 나오는데 중공군과 조선인민군은 압록강 이북을 점령하는 것을 시작으로 한반도 북부지역을 접수하였다. 중공군은 필요한 지역을 점령하여 중요하지 않은 지역은 점령하지 않은 전략으로 속전속결을 했지만, 김일성이 전력 분산을 하는 바람에 예상 보다 사흘을 지연하였다. 이 때문에 북부지역을 점령하는데 예정된 일정보다 늦게 이루어졌다. 중공은 불리한 전투를 피하는데 반해 김일성이 이끄는 조선인민군은 절반을 점령하는 건 내버려 둘 수 없다고 국군이 유리한 지역을 공격했다.
이러한 김일성의 욕심 때문에 조선인민군은 중공군을 원호(援護)해야 하지만,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 중공군 점령에 발을 맞춰 움직여야 하는데 후방을 제대로 정리하기커녕 오히려 인민에게 민페만 저지르고 반공주의자를 잡는다는 명목으로 인민재판을 불법으로 자행하고 현지 주민을 의용군으로 강제로 징발하였다. 김일성의 정책 방식대로 자신을 따르지 않은 자를 모조리 제거하였고 자신의 사상을 의심하거나 당의 정책을 따르지 않은 자를 반공으로 몰아 상대를 가리지 않고 숙청하였다.
중공은 인민을 위한 공산주의를 펼치는데 반해 김일성은 자기 자신을 위한 공산주의였다. 이는 만민의 처지를 바램과는 맞지 않으며 공산주의자는 인민에게 평등과 균등을 부르짖지만, 이들은 사실상 지배층처럼 인민 위에 군림을 하고 싶을 따름이었다. 자유주의자건 공산주의자건 간에 나라 속에 지배층이 되는 건 어느 누구나 마찬가지며 한때 하층민에 불과했던 자가 기존의 체제를 무너트리면 한 나라의 주도세력이 된다. 사람의 갖고 싶은 마음은 변치 않으며 나라의 체제가 바뀌어도 사람의 본성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걸 어느 누구나 잘 아는 일일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좋은 사상은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단면으로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이미 자본주의가 뿌리 깊게 내린 영국이나 미국 같은 서유럽 같은 나라는 이미 사상 체계가 확립되었고 사회질서와 법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체제와 법은 나라의 좌지우지하는 지배층뿐만 아니라 이 나라에 속한 만민들 까지도 영향을 미쳤다. 그 사상이 한번 굳어지게 되면 다른 사상은 결코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민족과 나라 차원을 넘어 체제와 사상이 눈으로 확인 할 수 없는 보이지 않은 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번 정해진 사상은 결코 바뀔 수 없을 것이고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사상이 사람 속에 지배할 것이다.
봉건체제를 무너트린 소련도 마찬가지로 대중에게 평등과 자유, 균등을 부르짖으며 수많은 인민에게 지지를 받으며 이들은 한때 무산계급에서 지배층으로 올라섰다. 표면상으로는 인민에게 균등과 분배를 표방하지만, 본질(本質)상으로는 지배계층과 다를 바 없는 행동을 하였다. 이는 어느 지위에 있는지 나라를 주도한 만큼 만민위에 우뚝 서려는 사람의 속된 마음이었다. 나라를 이끄는 단체는 수천명 내지 수만 명 밖에 불과했고 대다수는 나라를 구성하는 인민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자본주의 사회든 공산주의 사회 든 간에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이나 사회를 지배하는 주류계층이은 언제나 민중 위에 군림하기 위해서는 법과 제도, 체제로 수많은 사람의 사고방식을 통제하고 나라를 확고한 지배를 위해서라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결국 누가 권력을 잡든 간에 지배층의 사고방식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 대다수 민중은 지배층이 만들어 놓은 법과 체제, 가치관대로 살아야 할 것이다. 결국 공산주의자나 자본가나 기존 체제를 무너트려도 지배층이 했던 행동을 답습할 것이다. 사람이 바라고 싶은 욕망이 생명이 다할 때까지 말이다.
7월 12일 김구 대통령은 전시내각 체제를 구성한 가운데 경무대에서 비상대책회의를 연다. 이 자리에서 김좌진 국방부 장관을 비롯하여 참모총장 홍범도와 육군참모총장 지청천,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공군참모총장 최용덕, 해군육전대사령관 김현준, 헌병대 사령관 이범석 소장이 있었다. 정가운데 대통령 김구와 부통령 이승만, 국무총리 조만식과 여러 부처 장관이 참석해 있었다. 이 자리에서 적의 지금의 상황과 군국의 현황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1차 한중전쟁 당시 기준으로 각 지역의 배치된 사단은 다음과 같았다. 1사단과 2사단, 3사단, 5사단, 6사단, 7사단 8사단, 9사단은 대한광복군 시절 때부터 존재했다. 정부 수립 이전에 모집한 병력은 중국내 한인이나 간도에서 살았던 한인으로 이루어진 병력이었고 중일전쟁 때 국부군을 도왔거나 중국 동부 지역을 탈환 때 참가했었다. 국내진입작전 때도 마찬가지로 활약했고 총검술에 의존하는 조선 주둔 일본군을 쉽게 격파하였다. 대한광복군에 소속되었던 숙련된 병사나 장교는 전투 경험은 있었다.
이후 대한광복군은 3개 사단을 더 편성하였고 수도사단과 12 사단, 15 사단을 편성하였고 대한민국 정부가 정식으로 수립하면서 명칭도 국군으로 바뀌게 된다. 무기체계는 미국이나 영국에서 들여온 무기였으며 광복이전까지도 영국산 무기를 사용하긴 했지만, 정부수립 이후 미국산 무기로 대체하게 된다. 정부 수립 이후에 입대한 병력은 전쟁경험을 쌓은 훈련교관으로부터 군의 기본을 갖췄지만, 아직 전투 경험이 없었고 전투 경험을 쌓은 선임 장병을 따라가지 못했다. 1차 한중전쟁 당시 만해도 전투 경험이 없는 장병이 전투 경험이 있는 장병 보다 많았다.
1차 한중전쟁이 발발하기 석 달 전인 4월 10일에 군 편제 개편을 하였고 4~5개 사단을 묶은 군단으로 편성하였다. 예를 들자면 1군단은 1사단, 2사단, 3사단, 6사단, 7사단, 16사단이며 2군단은 8사단, 9사단 11사단, 13사단으로 구성되었다. 3군단은 12사단, 15사단, 10사단, 8군단은 17사단, 20사단, 29사단, 19사단 사단 정도였다. 나머지 5~7사단은 최소 3개 내지 최대 5개 사단을 소속 부대로 두었다. 그만큼 나라를 지키려면 자기 나라 군대가 필수이며 평화를 지키려면 군의 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편성된 국군은 군의 기반을 제대로 갖춰지기 전에 눈앞에 닥친 시련이었다. 이는 조선 주재 일본군을 상대 하는 것 보다 어려운 상대였고 오랫동안 전쟁 경험을 한 중공군을 맞서기에는 버거운 상대였다. 그러나 국군으로선 이대로 물러설 수 없는 처지였다. 그저 초반에 운이 나빴을 뿐이었다. 군 장비는 그렇게 복잡하지 않았지만, 새로 들어온 병력의 경험이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전술과 심리전에 밀려 뒤쳐졌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초반에 밀린다고 해서 나라를 책임지는 국가수장이었으니 눈앞에 온 전쟁에서 도망 칠 수 없었다. 조선 시대마냥 책임을 회피하고 백성을 희생하고 피해자를 희생하는 자신의 이익을 지키는 것이 아닌 책임 있고 위급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며 피해자 탓이 아닌 나라를 이끄는 지배층으로서 무거운 짐을 들고서 말이다. 간도자치정부는 정부를 세울 때부터 지도자가 지켜야 할 의무와 나라를 구성하는 지배계층에게 책임을 지는 것이었다. 그런 책임을 다 하지 못하면 그 사람은 그 자리에서 내어 놓아야 하며 그러한 부적격자가 나라를 이끌게 되면 우유부단(優柔不斷)으로 허둥지둥하게 행동을 하다가 구성원은 물론이고 나라 전체가 망하는 길로 내몰리게 된다.
지도자의 책무를 한번 맡은 이상 결코 물릴 수 없으며 나라의 주요 정책현안과 만민의 요구 할게 뭔지 그것을 들어야 했다. 대한민국의 내각 구성원은 지난 과거의 교훈을 살리지 못한 조선시대 지배층과는 달리 옛 현인의 교훈을 되새기며 두 번 다시 그러한 잘못된 방향을 가지 않도록 했다. 나라의 위기가 찾아오면 나라를 이끄는 구성원 누구나 이를 알려야 하며 그러한 사실 여부를 확인하여 대책을 세울 수 있으며 상대방의 의도를 확인하여 이에 따른 대비를 하여 나라의 위기를 최대한 막는 것이었다.
대통령을 비롯하여 부통령 대통령 비서실장과 각 부 장관이 여기에 모인 가운데 현재의 적의 동향과 움직임을 탁상위에 한반도 지도가 펴져 있었다. 국방부 차관 주종군(周種君) 막대 끝을 가리키며 적의 배치도를 가리켰다. 황해도 부근에 중공군 10개 사단이 진을 쳤으며 조선인민군 5개 사단이 배치되었다. 함경남도 문천군 부근에는 중공군 2진 8개 사단과 조선인민군 3개 사단이 배치 된 상황이었다. 아군은 황해도 방어선에서 문천군의 방어선에 이르기 까지 방어를 위해 배치된 사단은 6개 사단 밖에 불과했다. 수로 봤을 때는 적이 유리하단 걸 보여주었다.
이런 기세라면 며칠 안에 황해도는 물론이고 강원도 북부가 적의 수중에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어떻게든 간에 미국을 필두로 한 UN군이 도착할 때까지는 그때까지는 버텨야 하는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적이 너무 빠른 남진으로 인해 잠시 숨을 고른다는 거였다. 적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적의 진군이 멈춘 건 확실했고 적이 언제 공격할지는 모르니 상황을 지켜보면서 김구 대통령은 각 전선의 경계를 더욱 강화하라고 지시한다. 아군의 병력 손실이 크니 병력을 보충해야하기에 예비 병력을 병력이 부족한 사단에 충당하였다.
김구 내각이 전쟁의 상황과 대책을 세우는 가운데 황해도와 문천군 부근에서 국군은 두 눈을 부릅뜨며 중공군과 조선인민군의 천막 진지를 보았다. 언뜻 보기에는 적은 막강할 뿐만 아니라 수세로 봤을 때 강해보였다. 이런 가운데 국군 장병은 참호를 파며 다음 전투를 대비하였고 후방에 곡사포가 배치되었다. 황주군 송림읍 부근에는 긴장감이 역력해 보이는 가운데 아직 전투는 시작되지 않았지만, 마치 전투가 시작 될 분위기였다. 적이 무슨 이유에서 인지 진격을 멈출지는 모르겠지만, 언제 전투가 벌어질지는 알 수 없었다.
국군은 섣불리 움직이기는 것 보다는 적의 상황을 주시하는 것이었고 해당 사단장이 쌍망원경으로 고지 너머에 있는 중공군과 조선인민군을 진지를 바라보았다. 상당수에 이르는 적군이 배치되었고 보병을 비롯해 전차와 곡사포가 배치되었다. 황해도와 함경남도 문천군에 이르는 방어선이 구축한 가운데 각자 방어진지를 맡은 부대가 배치되었다. 국군으로서 이대로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었고 어떻게든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서 버터야 했고 여기서 물러선다면, 대한민국이 적화로 물들어 버릴 것이다.
최전선에 나가 있는 국군 장병으로서 공격해오는 적으로부터 목숨을 걸고 지키지 못하더라도 적을 반드시 저지해야 했다. 멀리서 적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지만, 각 사단장은 적의 움직임을 계속해서 주시하며 적을 계속해서 감찰하였다. 어림잡아 적의 수는 수만에 가까웠으니 아군의 수를 넘었다. 이는 적이 얼마나 강대한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
그 무렵 전쟁이 한국에서 서쪽에 자리 잡은 중원에서 중공군과 중화군 간에 전투가 벌어졌다. 산세가 험하기로 유명한 진령산맥에서 고지전이 벌어졌다. 어느 누가 고지를 차지하느라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으며 광원시(廣元,광위안) 부근에서 수천명의 중화군과 중공군 사이에 치열한 교전이 전개되었다. 한치에 양보도 없는 전투였고 총성이 오고가는 가운데 전투는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전개였으며 중공군 측 장병이 고지를 넘으려는 가운데 참호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깃대는 창천백일만지홍기가 휘날렸다.
중화군 포병들이 연신 포격을 퍼붓는 가운데 퍼붓고 남은 포탄 껍데기 열리며 뒤로 나오는 가운데 포병 하나가 포탄 하나를 포구 안으로 집어넣고는 다시 닫아 포격을 가했다. 중화군이나 중공군은 포탄이 어디서 떨어지는 모르는 상황에서 전투가 벌어졌으며 총격전이 벌어지는 가운데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이 전개되었다. 하긴 진령산맥 쪽은 전차라 이동하기에 불편한 점이 많은 곳이었고 중화군 전차가 철갑탄을 날리는 가운데 중공군을 압박하였고 파중(巴中)에서도 진격하려는 중화군과 이를 막는 중공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달주(達州)현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과 국경이 맞닿은 지역에서도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산세가 험한 가운데 중화군은 공격을 계속하였다. 이를 막는 중공군은 기관총과 박격포를 날리며 중화군의 공세를 저지하려 했고 곡사포를 날리며 중화군의 진격을 저지하려고 했다. 사실 진령산맥도 산세가 험했기에 공격측에게는 불리했으며 방어측 진영에게 유리한 지형이기도 했다. 중화군은 중공군이 구축한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 희생을 무릎 쓰고 방어선 돌파를 시도하였다.
강소성 양주 북부에서 중화군과 중공군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중화군 보병이 창천백일만지홍기를 들고 진격하는 가운데 중공군이 퍼붓는 포탄 속에서 진격하였다. 고우(高邮)현 근처에 위치한 보응현은 전투가 한창이었고 중화군 포병이 연신 포격을 퍼부으며 중공군 방어선을 무너트리려 했고 중공군도 이곳을 내주지 않으려고 포격을 계속 퍼부었다. 보응현을 수비하는 중공군으로선 예전과도 같은 졸전을 거듭하는 중화군이 아니었다.
이렇게 격렬하게 밀어붙이는 것을 보면 중화국은 예전에 부패한 중화군이 아니란 걸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비실비실하고 군기가 빈약해 보이는 그런 상대가 아니었다. 중공군으로선 적은 쉽게 퇴각할 것 같지 않기 때문에 전투는 예전 보다 함부로 예측 할 수 없을 정도로 전개하였다. 중화군 전차 한 대가 중공군 진지를 포격을 퍼부었고 날아온 철갑탄이 수비하는 중공군 진지에 퍼붓고는 연기가 뿜어졌으며 포연냄새가 자욱한 가운데 중화군은 중공군 방어선을 계속해서 공격했다.
중공군으로서 이렇게 매섭게 공격해오는 중화군의 공세에 시달렸으며 중화군은 방어선을 구축한 중공군의 방어선을 계속해서 돌파를 시도하였고 포격이 날리는 가운데 수천 명에 달하는 부대가 전진하였고 보병이 소총을 들고 방아쇠를 당기며 진격하였다. 중화군 전차가 연신 철갑탄을 퍼부으며 중공군 참호를 공격했고 방어측인 중공군도 전차도 포구에서 철갑탄을 날리며 중화군 보병에게 날렸다. 그럼에도 중화군은 한 치에 물러서지 않은 전투가 이어지고 공격하는 쪽과 수비하는 쪽 간에 전투가 계속 이어졌다.
강소성 태주(타이저우) 북부지역에 위치한 강언(姜堰)현에서 중화군이 중공군 방어선을 밀어붙이는 상황이었고 중공군은 이들의 공격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진지와 참호를 구축하고 수비를 펼쳤다. 그러나 중화군은 계속해서 방어선을 뚫어갔으며 중공군이 쳐놓은 방어선이 무너지고 중화군 중(重)전차가 전진하면서 상대편을 압박하였다. 곳곳에서 떨어지며 각 진영의 보병이 죽어갔다. 중공군은 어떻게든 버티려고 하지만, 이를 공격하는 중화군의 공세도 만만치 않았다.
모택통이 6.25 폭동에 실패한 김일성을 돕기 위해 관심을 한국 전선으로 돌렸고 설마 중화민국이 빨리 움직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장개석은 중공이 자기 자신이 신경 쓰지 못한 틈을 노렸으며 즉시 군사를 움직여 북진하도록 명령했던 거였다. 그렇기에 중화민국의 공격이 시작되었으며 모택통도 한국을 공략하기 위해 당초의 병력인 100만 명으로 한반도 전지역을 공략할 예정이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50만명으로 줄어들었다. 이유는 장강과 진령산맥에 병력을 밀려서 안되기 때문에 50만 명으로 줄인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따라서 중공은 두 전선에서 전쟁을 벌인 셈이었고 상대는 자유진영에 속한 중화민국과 대한민국이었다.
중공은 당초에 김일성을 도와 한반도를 적화통일 하여 어떻게든 미국이나 중화민국이 움직이기 전에 빨리 끝냈어야 했지만, 조선인민군이 실책과 실정으로 계획이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게다가 장개석은 중공이 방심하기를 노렸고 시선이 한국쪽에 몰려 있는 틈을 이용하여 중공을 공격하게 된 것이었다. 되도록 한쪽 전선에만 몰두하려는 중공이었지만, 중화민국의 갑작스런 전쟁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국민당으로부터 확보한 영토를 수성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전쟁을 해야 했다.
6.25 폭동으로 시작된 전쟁은 어느 새 이웃의 전쟁으로 번졌다. 냉전체제가 시작 된지 불과 5년 만에 동아시아 공산진영과 자유진영 사이의 밀고 당기는 전쟁이 벌어졌다. 세계가 냉전체제 속에서 벌어진 축소판 전쟁이었고 이는 세계대전으로 번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전 세계가 충격을 안겨준 전쟁이기도 했다. 기득권 축에 편입하지 못한 조선노동당이 한반도를 완전히 손아귀에 넣기 위해 중공과 손을 잡아 연합국으로부터 인정받은 정부를 공격했다.
아무튼 대한민국에서 일어나는 국한 되는 전쟁이 아니라 중원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전쟁이기도 했다. 비록 전세계로 벌어지는 전쟁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두 지역에서 벌어지는 전쟁이기도 했다. 세계사에서 이를 1차 동아시아 전쟁으로 부르는데 한국과 중화민국, 중공 사이에 벌어지는 전쟁이었다. 대한민국에서는 공산반군과 공산세력의 지원을 등을 업고 전쟁을 일으켰다. 중화민국은 2차 국공내전의 빚을 갚기 위해 벌어진 전쟁이기도 했던 것이다.
작년(1949) 1월 5일에 휴전을 한 이후 장개석은 그동안 난잡했던 무기체계를 미국제로 통일하였고 기갑차량은 물론이고 군용기까지 미국제로 대체하였다. 장개석은 이번 2차 국공내전의 패인은 조직 안에 있는 부정부패 때문에 진 것이었다. 미국에서 보낸 고문단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대만으로 쫓겨나 처량한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그마나 다행인 건 진령산맥 이남과 장강 부근 지역을 건진 것으로 지역 기반을 확보 할 수 있었던 거였다.
그렇게 확정된 중화민국의 영토는 바로 이렇다. 강소성 남부와 안휘성 (낭한현, 광덕현, 선주시, 녕국현, 경현, 기덕현, 적계현, 안휘성 석계현, 흡현, 휴녕현, 기문현, 둔계시), 강서성, 절강성, 복강성, 호남성, 광동성, 광서성 원남성, 귀주성, 중경, 사천성과 호북성 남부 지역 이었다. 장개석은 그마나 섬으로 쫓겨나지 않은 선에서 기반을 지킬 수 있었고 이러한 겨우 유지되었던 건 미국이 공산주의가 중국 전체를 물드는 건 원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유진영 어느 하나 잃지 않으려고 했다.
중화민국이 대륙에서 남아 있었던 것은 모두 미국 덕분에 이루어진 휴전협정 덕분이었다. 장개석이 공산당 박멸을 목표로 북진하였다가 오히려 호된 꼴을 당하며 패전을 거듭하자 위기감이 높아진 미국은 서둘려 공산당에게 휴전을 제의하였다. 미국 주도로 이루어진 휴전으로 자유 진영이 대만섬으로 쫓겨나는 것을 면하게 되었다. 아무튼 미국으로선 아시아의 공산세력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중화민국의 강도 높은 개혁이 필요했다. 썩은 것을 도려내야 하며 그것을 방치하면 언제든지 그 일이 반복될 것이 뻔하니 빠른 시기 안에 제거하는 것이 필요했다.
중화민국 정치고문위원단은 다음과 같은 개혁을 제시하였고 그것이 불망숙정(不忘肅政:망설일 것 없이 숙청한다)이란 나라 개혁이었다. 이를 주도한 사람은 중화민국에 파견된 정치고문위원장 리브 E 에드너가 내놓은 중화민국 개혁안이었다. 가장 먼저 개혁해야 할 대상은 본인을 제외한 당과 국가를 섞게 만든 주범을 공직에서 완전히 추방하는 것과 부정부패한 자를 국가에서 쫓는다는 내용이었다.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발전을 저해하는 비밀경찰을 폐지하고 언론의 표현의 자유를 허용하는 것과 비인간성으로 이루어진 법을 폐지하는 것이었다.
장개석으로서 더는 발뺌할 처지가 아니었고 중화통일을 하려고 욕심을 부리다가 결국 장강 이남으로 쫓겨나는 수모를 격게 된다. 이러한 미국이 중공과 맺은 휴전 협정은 곧 살아생전 중화통일의 꿈은 꿈으로만 그치게 되었다. 비록 중화민국은 갈라서게 되었지만, 장개석으로서 자신이 그동안 잘못했던 일을 반성할 수 있는 개기를 마련하였고 그동안 철권 통치를 휘두르는 동안 나라가 섞어 가게 된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었다. 자신의 잘못 때문에 당과 나라를 위기로 내몰렸으며 잘못된 경제 정책과 억압통치로 인해 인민의 지지를 잃을 뻔했다. 그나마 장개석이 정신을 차렸다는 건 지금이라도 인민의 지지를 회복하겠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이기심으로 인해 만민의 원성을 샀을 뿐만 아니라 상대방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았기 때문에 파국으로 몰아 간적이 있었다. 중일전쟁 때 안이한 대처로 인해 만주를 비롯하여 동부 지역과 연안지역을 내어줬을 뿐만 수십 만 명의 인민을 적의 치하에서 고통을 받아야만 했다. 그것이 하나의 정적을 없애려하다가 오히려 이웃 나라에게 침략당해 땅 전체를 잃을 뻔하고 적의 지배에 들어간 지역의 주민은 온갖 고초를 격게 되었다. 중일전쟁이 끝난 뒤에도 장개석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공산당과 싸우다가 만주와 하북 지역을 잃고 남쪽으로 내려와야 했다.
중화민국 정치고문위원단 주도로 이루어진 정치개혁이 이루어지고 국민당 안에 있는 부정부패한 자를 당에서 쫓아냈고 국가 조직 안에 있는 자를 공직에서 내쫓았다. 부패한 정치인과 경제인을 비롯하여 온갖부정한 고리로 연결된 자를 찾아내 검거하였고 이들에게 부정부패의 죄목으로 처벌했다. 국민당 고위간부는 부정축재를 한 이유로 체포하였고 국부군 고위장교를 비롯하여 부정부패한 자를 투옥하였다. 국민당 안에 있는 부정부패한 자를 숙청하는 것을 시작으로 정치 및 행정 개혁이 이루어지고 형법과 민법 개정이 추진되었으며 시대에 맞지 않은 법은 폐지하여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법을 개정하였다.
기존의 의회체계인 단원제에서 양원제로 변경하였고 미국식 상원제를 도입하여 참정원으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하원은 입법원이 되고 상원은 참정원이 되었다. 정부조직을 개편하고 필요 없는 부서는 구조조정을 단행하였다. 그동안 형식상으로 그쳤던 사회 전반의 개혁을 개시하였고 봉건 잔재를 완전히 철폐하여 시민사회로 가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높은 물가를 잡고 시장을 안정시켰고 금본위제의 금융정책으로 난장판이 된 경제를 바로잡았다. 부적격한 관리는 공직에서 추방되었고 다시는 기용되지 않토록 철저히 관리하였다. 장개석이 미뤄 왔던 사회 전반의 개혁은 미 정치고문단이 이룩한 것이었다.
강남과 화남, 진령 산맥 이남에 남아 있는 빨치산을 토벌하여 후방 공산주의자가 준동하지 못하도록 방지하였다. 그리고 각 지역 현지 주민에게 반공교육을 강화하여 주민의 민주주의 의식을 심어주는 것이었다. 장개석은 자신의 과오 때문에 한직에 쫓겨났던 백숭희를 다시 불려들여 오합지졸이었던 국부군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동안 혼란스러웠던 무기체계를 하나로 정하였고 군장비는 물론이고 함선과 군용기 및 전차를 미국제로 바꾸었다. 그동안 혼란스러웠던 군체계를 개혁하여 무능한 지휘관을 군에서 내쫓고 그 자리에 유능한 지휘관을 각 부대장으로 기용하였다.
지금 당장 중화통일을 추진하기 보다는 먼저 남아 있는 지역을 기반을 완전히 굳히는 거였다. 그렇기에 장개석은 부정부패를 죄악으로 여겼고 부정부패를 저지른 자는 최대 사형에 처할 수 있도록 최고형량을 높혔다. 이는 장개석이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였고 뒤늦게 부정부패가 사회와 나라를 무너트리는 요인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비록 소잃고 외양간을 고치는 격이지만, 이제 부터 라도 부정부패를 척결하겠다는 굳센 결심을 서게 만들었다. 이는 나라 전체를 개혁하기 전에 자기 자신 부터 개혁하는 것이 진정한 개혁이었으며 말 뿐인 개혁이 아니라 행동으로서의 개혁으로 실천을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휴전기간 동안 장개석은 1차 국공내전과 2차 국공내전 때 잃어버린 민심을 회복하는데 주력했다. 조직을 대대적으로 개혁하고 무능하고 부패한 자를 당에서 내쫓았고 부정을 저지르는 자는 최대 사형에 처하는 등 자신이 국민당이 변했다는 걸 당당히 보여주었다. 그동안 미흡하게 처리했던 중국내 부역자 즉 한간을 처벌하였고 왕청위 괴뢰정권 밑에 일했던 자를 회부하여 재판을 하였고 일본에 협력했던 자를 비롯해 직간접으로 한간행위를 저지른 자를 엄정한 법 집행으로 처벌하였다. 그리고 그동안 잃었던 민심을 겨우 회복할 수 있었고 지금 당장 경제 발전 정책 보다는 민생을 챙기는데 주력했다.
휴전 1년 6달 동안 자신의 근거지를 기반을 확립하는데 주력했고 아직까지 남아 있는 빨치산을 완전히 소탕하여 공산당이 배후에 지원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였다. 현지 주민에게 반공교육을 더욱 강화하여 공산주의가 얼마나 좋지 않은지 반면 교사로 가르쳐주었고 삼만주의를 고양하여 민족성을 강화하였다. 강남과 화남, 사천 지역 주민은 국민당이 남아 있는 이상 어쩔 수 없이 현정부를 따를 수 밖에 없었고 공산주의 보다는 먹고 살기 바쁘기 때문에 지금의 정부를 따르는 것 밖에 없었다. 한때 등을 돌렸던 인민은 하나 둘씩 국민당 지지세로 돌아섰고 지금 혼란스런 무정부 상태 보다는 법과 질서가 확립한 정부가 정부를 믿는게 낫다고 여겼다.
그 시기에 군기가 산만한 국부군의 정신력을 강화하였고 기존의 똥군기가 아닌 제대로 한 군기로서 말이다. 이전 전투 때 잃었던 병력을 350만명으로 회복하였고 신병을 철저히 훈련하였다. 2차 국공내전 시기에 잃었던 24개 사단을 병력을 충원함에 따라 회복하였고 각 성에 14개 군단으로 확정하였다. 기존에 맞지 않은 무기체계를 폐기하였고 새로운 무기체계로 통합하였다. 이러한 전운이 감도는 상황에서 국부군은 전력이 증강하였다. 이듬해 1950년 1월 14일 기존의 국부국에서 중화군으로 변경하였다. 그동안 졸군으로 여겨졌던 중화군이 지도자의 대오각성 결심하고 군 처제를 바꾸게 하였고 예전 만큼 일본군에게 밀리는 게 아닌 정상 모습의 군으로 변모했으니 말이다.
중화민국이 변모하는 1년 6달 동안 세계 정세는 급변하였고 미국 중심으로 이루어진 자유진영과 소련 중심으로 이루어진 공산진영이 형성되었다. 유럽에는 철의 장막이 펼치는 것을 시작으로 보이지 않은 밀고 당기는 대결이 시작되었다. 미국은 소련의 태평양 진출을 막기 위해 대한민국을 동반자로 지정하였고 쇠락하는 대영제국을 대신해 미국이 이를 맡았다. 화북지역에 공산정권이 수립되어 그동안 수백년동안 이어져 오던 통일 국가 계보가 여기서 끊이고 다시 분단의 시대를 맞이 한 것이다. 6억명의 한족은 이제 두 나라로 갈라져 같은 민족이 아닌 다른 나라 사람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그동안 중국은 진시황 이후 몇 왕조를 거쳐 통일 국가 체제를 이어져 왔다. 삼국시대, 5호 16국, 남북조, 5대 10국을 빼고 대의명분으로 통일하였으나 이번 분단은 사상이 한족을 갈라지게 만들었다. 분단이 짦을 수록 언어와 생활상은 변함이 없겠지만, 분단이 고착상태로 이루어지면 향후 50년 안에 문자와 언어 자체가 달라질 것이고 주민의 생활 양식이 달라 질 것이다. 중화통일을 부르짖는 두 지도자 사상이 물과 기름 같은 존재로 결코 섞일 수 없는 존재였다. 따라서 사상 때문에 나라가 합치지 못하고 결국 분단으로 이어지게 하였고 한족은 이제 더는 통일 국가 같은 시대는 옛날 일로 여기게 될 것이다.
호북성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데 한천현(漢川縣)에서 중화군 4개 사단과 중공군 1개 사단의 전투가 벌어졌다. 포성과 총성이 울리는 전장터에서 중화군은 목숨을 건 전진을 하는 가운데 보병 옆에 미제 중(中)전차 M4 셔먼 전차 여러 대가 철갑탄을 쏘며 전진했다. 프로펠러 전투기가 중공군의 방어선을 무너트렸으며 갑작스런 중화군의 공세에 서서히 무너지는 곳이 속출했다. 다른 지역이 중화군의 깃발 아래 들어갔으며 근처에 있던 지역 역시 중화군의 손에 넘어가는 쪽도 있었고 버티지 못한 중공군은 무기를 내려 놓고 중화군에게 항복하였다.
기춘현에서도 중화군의 매서운 공격이 중화군 포병이 곡사포를 퍼부어 중공군의 방어선을 압박했다. 날아온 포탄이 앞에서 방어선을 친 중공군에게 떨어졌으며 포탄은 그대로 여러 군데 강타하였다. 그자리에서 중공군 수십병이 포탄에 맞아 죽거나 다쳤고 떨어지는 위치가 불확실한 포탄이 계속해서 떨어졌다. 중화군의 공세에 방어선이 뚫리기 시작하였고 게다가 중화군 공격기까지 폭탄을 떨구는 등 공세를 펼치는 중화군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근처 4시 방향에서 중화군 2개 사단이 전차와 장갑차를 몰고 방어선을 압박하였으며 6시 방향은 무너지기 일보 직전의 상황에 있었다.
중공군 전차가 철갑탄을 쏘며 중화군 경전차를 격파하였으나 중화군 포병이 쏜 대전차포에 맞아 전차는 그대로 찌그려져 폭발했다. 중화군 重전차 M26 퍼싱이 중공군의 T-34에게 유심철갑탄을 쏴 격파하였고 옆의 전차도 유심철갑탄을 쏴 중공군 부대 전차를 격파해 나갔다. 중화군 전투기까지 가세하여 중공군 진지를 공격하였고 미쳐 재정비할 틈도 없이 기관포 공격을 퍼부었고 보병이 계속해서 죽어갔다. 중공군은 공중에서 공격해오는 전투기를 상대로 방어하지만, 지상에서 격렬한 공격을 펼치는 중화군의 공세에 밀릴 뿐이었다. 게다가 방어선은 계속해서 무너져가고 대열히 흐트려져 부대 자체가 전의를 잃었다.
4시 방향에서도 중공군은 중화군의 공세에 밀려 방어선이 계속 무너져갔다. 폭격과 포격이 계속 이어지고 포탄이 떨어져 기관포 사수를 비롯하여 근처의 포병이 죽어나갔다. 중공군은 중화군의 공세에 밀려 결국 맡았던 방어 진지를 버리고 현 중심부로 후퇴하였다. 4시 방향의 고지는 중화군 보병이 창천백일만지홍기를 꽃았다. 중화군 重전차와 보병이 뒤따르는 가운데 고지를 하나하나 접수하였고 퇴각하지 못한 중공군 일부는 포로로 잡혔다. 그곳을 지키는 중공군은 방어선을 치며 중화군을 상대로 버텼지만, 미제 무기로 무장한 중화군의 공세를 버텨내지 못했다.
4시 방향이 중화군에게 점령 당한 가운데 6시 방향에서 중공군 보병이 참호에서 소총을 들고 방아쇠를 쏘며 버텼지만, 상공에서 계속 공격해오는 전투기 기관포 공격에 맥을 못추었다. 중화군 중(中)전차들이 철갑탄을 날리며 방어진지를 무너트리고 있었고 중공군 전차는 견제하려고 하지만, 미국제 전차 보다 성능이 뒤떨어졌다. 아무리 일본군 노획한 전차를 사용한다고 하지만, 그것 만으로는 중화군의 전차를 상대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측면에서 중공군 전차가 중화군이 날린 대전차 포탄에 맞저 격파당하고 옆에 있는 전차는 중화군이 날린 유심철갑탄에 맞고는 격파당해버렸다.
결국 6시 방향은 중화군의 파상공세에 결국 전선을 내주었고 중화군은 기춘현 중심지로 후퇴하였다. 4시 방향 5개 진은 중화군에게 차례차례로 점령당했고 중화군은 방어선을 내어주고 후퇴를 거듭했다. 추자진에서 중화군이 중공군을 압박하였고 포성과 총성이 울리는 가운데 전투는 계속해서 이어져 갔다. 몇시간 뒤 추자진이 중화군에게 장악했고 중화군은 이제 서서히 기춘현 중심지로 향하기 시작하였다. 중화군이 서서히 공격을 펼치는 가운데 중공군은 어떻게든 이곳을 지키려고 했고 중화군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지역을 완전히 장악해야 했다.
이 처럼 중원은 지금 전쟁 분위기였고 장강 유역에서 부터 진령산맥에 이르기 까지 전쟁터였다. 그 전쟁이 한국만 국한된게 아니었다. 세 나라 사이에서 벌어지는 지역 전쟁이기도 했다. 이는 하나라도 땅을 차지 하려는 쪽 간에 치열한 공방전이 이어졌고 밀고 당기는 전투가 이어졌다. 냉전의 분위기가 고조한 가운데 벌어진 이 전쟁은 미국도 소련도 직접개입하지 않았다. 단지 지원을 통한 대리전이기도 했다. 1차 동아시아 전쟁이 세계사에서 큰 영향을 준 전쟁이며 이는 국제 역학 관계 변화를 의미하기도 했다. 양측 전선이 지체함에 따라 전쟁 기간이 갈 수록 늘어만 갔다.
*
중원에서 전쟁이 한창일 때 1950년 7월 1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임시정부의 임시 수도가 된 평양에서 한반도 방면 사령관인 팽덕회와 김일성과 만나 회동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중공측은 중원에서 전쟁이 한창이고 밀고 당기는 공반전이 계속이어지는 상황에서 전진하는 건 별로 좋을 것 없다며 이쯤에서 전쟁을 멈추고 대한민국 정부와 협상을 벌여 전쟁을 그쯤에서 마무리 지어 나라의 근간을 세우는게 우선이라고 했다. 조선인민군이 후창-자성에서 쓸데 없이 전투를 벌이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대전을 점령하고도 남은 시간이었다.
중공군은 필요한 지역을 점령하고 중요하지 않은 지역은 나두었다가 상대방 게릴라가 자중지란에 빠지면 후방을 점령하는 식이었다. 조선인민군은 어디까지나 중공군을 후방을 돕기 위한 병력이었고 점령 지역의 행정과 치안을 책임지는 거였다. 무엇보다 중공군이 싸우는 과정에서 후방에서 지원해줘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그렇지만, 김일성은 한반도 적화의 욕심 때문이 쓸데 없는 지역을 공격하여 쓸데 없는 시간만 낭비하였고 그 결과 국군이 재정비 할 수 있는 시간을 주게 하였다. 전쟁을 빨리 끝내고자 한 중공이었지만, 김일성이 생떼를 부리는 바람에 한반도 적화는 완전히 물건너게 되었다.
게다가 전쟁이 더욱 길어질 수록 미국이 이를 개입할 명분을 주게 되고 전투가 길어질 수록 공격측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중공으로선 중화민국과 전쟁이 시작했으니 더는 한반도를 더는 오랫동안 공격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중일전쟁을 바탕으로 전투경험을 쌓았다지만, 국군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중공으로서 전쟁이 길어 봤자 좋을 것 하나도 없었다. 그러니 지금 당장의 무리한 진격 보다는 일단 잠시 휴전을 하는 것이 숨을 고르는데 더 나은 방법이었다.
중공으로선 여기서 남진을 멈추고 조선노동당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세우는 것으로 끝난다면, 미국이 이를 눈치채지 못할 것이고 설령 그게 분쟁이라 하더라도 이미 끝이 났을 것이다. 그것이 중공으로서 최선의 선택이고 그렇게 된다면 지금 전쟁 중인 중원전선으로 병력을 돌릴 수 있었다. 후창과 자성에서 벌어진 전투 때문에 사흘을 지연하였고 게다가 몇일 지연하여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였다. 이곳에서 발이 묶일 수 없는 중공이었기에 서둘려 이곳에서 전쟁을 마무리 짓고 다른 전선에 신경 써야 했기에 더는 한반도에 머물 필요가 없었다.
북부지역 주민으로부터 민심을 얻으려면 먼저 쓸데 없는 적대감을 품은 감정을 해소하는 것이었다. 중공군은 점령지에서 쓸데 없는 약탈행위를 하지 않았고 현지주민을 대상으로 몹쓸 질을 최대한 자제하였다. 왜냐하면 현지주민을 학살하면 점령군의 인식이 안 좋은 인식을 갖게 되어 저항군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중공군은 이러한 행위를 전혀 하지 않았고 현지 주민의 심기를 최대한 건들지 않고 거점을 점거하였다. 군에게 약탈과 살인 같은 중범죄를 절제하여 결코 조선을 침략하려온 무법자가 아닌 현정부를 무너트리기 위해 왔다고 해방자의 인식을 심어줘야 했다.
중공군은 이러한 현지 주민의 심기를 건들지 않고 나름대로 군정을 유지했다. 그러나 조선인민군을 지휘하는 김일성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살인과 약탈 같은 잔악한 행위를 하는 것은 기본이고 주민의 사유물을 함부로 사용하여 주민의 원성을 사게 만들었다. 중공군 사령부으로부터 승인받지 않은 인민재판을 실시하여 무고한 인명을 살상했고 거기에 현지주민을 의용군으로 징발하였다. 게다가 부족한 물자를 채우기 위해 현지 주민이 가진 것을 약탈하였고 국가소유의 물자를 갈취하였다.
이것은 중공으로선 원치 않은 행동이었다. 고작 반대파를 없앤다는 명목으로 무분별한 인민재판을 강행한다는 건 민심을 이반 하는 걸 초래할 뿐이었다. 중공군은 조선인민군의 행동을 감시하느라 진땀을 뺐고 어떻게든 틀어진 민심을 수습을 하는데 많은 시일이 걸렸다. 일단은 어떻게든 간에 성난 민심을 수습하고 주민의 이반을 어떻게든 막았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잠시 뿐이었고 빨리 정부를 구성하지 않으면 언제 수많은 주민들이 공산주의를 혐오할 테고 점령군을 증호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공이 한반도 전선에서 전쟁을 끝내려고 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평양시 공민관에서 열린 조선노동당 당수 김일성과 한반도 공격 방면 사령관인 팽덕회가 있었다. 평양이 중공군 치하에 들어간 가운데 평양의 치안과 행정권은 중공군이 쥐고 있었다. 조선인민군이 이러한 만행을 저질렸기에 중공군이 이들을 통제하였고 불법 자행하는 인민재판을 안 하는지 감시하였다. 조선인민군과 중공군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고조한 분위기에서 도시 분위기는 싸늘한 분위기를 느꼈다.
협상장에서 팽덕회는 지금 당장 남진 하는 것 보다는 점령 지역의 민심을 다독거리고 정부를 구상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55만명 병력으로 한반도를 침공했지만, 그 정도로는 한반도 전체 점령은 아주 버거워 보였다. 그러니 1차 목표를 달성했으니 그 쯤에서 전쟁을 마무리 짓고 다음 기회를 노리는게 어떻겠나며 무리한 남진 보다는 점령 지역의 안정이 중요했다. 안그대로 점령군의 민심이 좋지 않은데 이대로 남진을 계속 하면 자칫 주민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킬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중공측 서기관이 기록한 한반도 처리 문제를 놓고 각 인물의 회고록은 다음과 같았다.
-여기서 남진을 멈추고! 그곳에서 정부를 세우고 현지 주민의 민생을 안정을 주력하는데 힘을 보태야 할 것이오.-팽덕회
-무슨 소리요! 여기서 미제 괴뢰정부를 그대로 놔두자는 것이오!!?-김일성
-지금! 정부를 구성하지 않은 상태에서 계속 전쟁을 벌이면 미국이 개입할 명분을 주게 되어 그러니 전쟁을 잠시 멈추자는 것이오! 우리 사정이 복잡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더 파고는 것은 무모한 결정이오.-팽덕회
-여기서 남진을 멈춘다면, 3천만 인민 해방을 어떻게 할 것이오! 이대로 남진을 멈추면 조선 해방은 영원히 이룩 할 수 없을 것이오!-김일성
-현실을 보시오! 김일성 동지, 지금 무모하게 진격을 한다면 전쟁이 길어지고 쓸데 없이 적을 더 늘리는 꼴이 되오! 그러니 이룰 수 없는 꿈을 포기하고 점령 지역의 인민을 잘 다스리란 말이오!-팽덕회
조선처리문제 비록 중에서
중공군 한반도 방면 사령관 팽덕회와 조선노동당 당수이자 조선인민군 사령관인 김일성과 의견차가 있었다. 중공으로선 그쯤에서 전쟁을 끝내고 서둘려 정부를 구성함으로서 민생을 안정하는 것이었다. 일단 땅이 있어야 병력을 공급하기가 쉽고 공장이 있어야 무기와 기갑차량, 군용기 부속품을 만들 수 있다. 물론 주민에게 걷어들일 세금이 있어야 나라의 재정을 축적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라의 기반이 되는 땅이 있어야만 가능했다. 점령해놓고 후방을 안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계속 전쟁을 치른다면 공격 측에게 큰 부담으로 돌아 올 것이다.
중공의 처지로 볼때 지금 3차 국공내전이 벌어져 한반도를 공격하는데 55만명으로 줄어든 상태에서 더 진격하는 것은 무리였다. 깊이 들어갈 수록 적의 저항이 심해질 것이고 상대방이 쳐놓은 방어선을 뚫는데 2~3일을 소요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상태로 한반도에서 전쟁을 계속 치른다면 향후 중원전선에서 중화민국에게 밀릴 것이고 중공으로서 불리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아울러 후방에 아직도 반공 저항부대가 산발성 저항을 이어가고 있어 후방을 방어하는데 애를 먹는 지경이었다. 중공이 한반도에 오래 있어 봐야 좋을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전쟁을 그쯤에서 마무리 하고 싶었다.
게다가 진격하는 과정에서 병력 손실도 만만치 않았다. 가는 곳 마다 국군이 그곳에서 길을 내어 주지 않기 때문에 뚫는데 반 나절이 걸렸고 이 과정에서 하루에 수십에서 수백이나 되는 사상자를 낳았다. 본국에서 파견한 예비 병력으로 어떻게든 버티는 중이지만, 계속 전진할 경우 상당한 병력 손실이 더해질 수 있었다. 비록 상대가 신생 국가 군대라고 하나 각 부대 장교진이 일본군과 싸운 경력이 있어 그래도 방심하지 못했다. 중공이 생각했던 국군의 전력을 과소 평가 했을 뿐만 아니라 군 내부의 질서가 확립했을 뿐만 아니라 군기가 확실히 잡혀 있는 군대란 것을 말이다.
중공은 서둘려 이곳의 일을 마무리 짓고 한반도 방면 군대를 장강과 진령산맥쪽으로 돌리고 싶었다. 영원한 숙적은 장개석 하나만으로 족하니 더는 쓸데없는 적을 늘리고 싶지는 않았다. 자유진영의 맹주인 미국의 힘이 막강할 뿐만 아니라 태평양 전쟁 때 무제한 군비 생산으로 일본을 나락으로 내몰았고 추축국의 주범인 나치를 무너트린 초강대국이었다. 따라서 지금의 중공의 국력으로는 미국을 이길 수 없기 때문에 전면전은 최대한 자제하려고 했다. 대한민국에서 공산봉기에 실패하고 쫓겨난 김일성을 돕기 위해 남진을 하였고 한반도 완전 공산화가 아니라 일부 지역을 점령하여 공산정권을 세우는 거였다.
그것이 미국과 전면 대결하기 이전에 전쟁을 빨리 끝냄으로서 실리를 얻고 중원을 놓고 다투는 중화민국과 싸움에서 조금 유리한 고지를 얻을 수 있었다. 중원의 지금 상황으로 볼 때 각 전선에서 막상막하 상황이 전개한 상황이었고 중화민국이 1년 6달이란 휴전 기간 병력과 군 전력을 회복했기 때문이다. 전선을 뺐고 빼았는 전투가 계속 이어지는 상황에서 한 곳을 제대로 집중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니 중공은 대한민국 정부와 휴전협정을 벌어서 황해도 경계선에서 원산 부근 까지 휴전해서 일단 한반도 전쟁에서 손을 떼고 자기들 일에 집중하려고 했다.
그렇게 실리로 미국과 전쟁을 최대한 피하려는 중공의 전략이었지만, 한반도 적화지배의 꿈을 버리지 못한 김일성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누구 덕에 이곳에 온 것을 모르고 적반하장으로 날뛰고 있는 것이었다. 사람이 환란에 닥쳤을 때 상대방으로부터 은혜를 졌으면 반드시 갚아야 하는 것이고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는 건 말도 안되는 행동이었다. 조선노동당 당간부와 김일성 본인은 자유진영의 등뒤에 있는 초강대국을 만만히 보았다. 게다가 자신들 힘으로 남침 한 것이 아니라 중공의 등을 업어 참여한 전쟁이었다. 결코 김일성의 주도로 전쟁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중공의 주도로 참여한 전쟁이기도 했다.
협상이 진전이 없는 가운데 박헌영은 일단 정부라도 세워야 적화 지배를 이룰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렇기에 먼저 정부를 세운 다음에 지지 기반을 쌓고 인민에게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하는게 급선무라고 여겼다. 이틀 동안의 협상 끝에 점령지역을 우선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세우기로 결정한다. 이는 중공이 일방으로 정한 결정이었고 한반도 적화 지배를 꿈꾸는 김일성에게 짱박혀 있어야 하는 뜻이었다. 다시 말해 아직 기반이 마련 안 된 상태에서 남진 하는 건 위험한 짓이라고 판단했다.
그렇게 어렵게 얻어낸 합의였지만, 그대로 김일성은 그것을 만족하려 하지 않았다. 일단 이들이 있어야 할 근거지는 마련했다. 그러나 아직 이북에 잠재한 반공 반군을 어떻게 진압해야 할지 변수로 작용하였다. 후방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비합법 인민재판을 강행하여 민심을 성나게 만들었고 그렇지 않아도 조선노동당에 나쁜 평판을 갖던 현지 주민의 반감을 더욱 사게 만들었다. 조선노동당 지도부로서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하는게 급선무였고 먼저 민심을 회복해야 나라의 기반을 세울 수 있었다.
설령 근거지가 될만한 땅을 얻었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도 만족 할 수 없었다. 김일성은 외세의 등을 업은 남쪽의 괴뢰정부를 몰아내겠다고 하지만, 그건 자신도 외세의 도움을 얻어 한반도를 침공한 것이었다. 박헌영 같은 다른 조선노동당 지도부는 근거지를 두어야 적화지배를 기약 할 수 있다고 지금이라도 점령지의 성난 민심을 회복하는게 먼저라고 했다. 7월 20일 김일성을 대표로 조선민주주의인민 공화국 총리 자리에 올라 자신들이야 말로 조선의 합법 정부라고 선포했다. 현지 주민은 이런 건 합법으로 세워진 절체로 이뤄진 선거가 아니라 강압으로 세워진 나라라고 비아낭 거렸고 아무도 이를 지지 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조선노동당이 조선민주주의인민 공화국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다며, 김일성과 조선노동당 역적패당은 외세의 등을 업어 국토를 유린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대한민국을 비롯하여 미국이나 자유진영은 조선노동당이 세운 조선민주주의인민 공화국은 어디까지나 중공이 내세운 괴뢰정부라고 비판했다. 조선노동당을 인정하는 곳은 공산진영을 제외하고 아무도 없었고 어느 누구도 주권국가로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렇게 세워진 한반도 북부 지역의 공산주의 정권이었지만, 국가 주석인 김일성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미국이 이 문제를 끼어들기 전에 한반도를 완전히 손아귀에 넣어야 미국이 개입하지 못할 것이라면서 어떻게든 군을 움직여야 했다. 만에 하나 중공측이 휴전을 하게 되면 적화 통일은 물건거 갈 것이다. 조선노동당 지도부는 점령지역 안정이 최우선이라고 하지만, 김일성은 반쪽으로 갈라진 상황에서 사회 안정은 있을 수 가 없다며 한반도 적화 지배가 우선이라고 여겼다.
중공이 그렇게 미국과 직접 대결을 피하고자 휴전 협정을 하고자 했지만, 한반도 적화 지배를 노리려는 김일성 때문에 서서히 틀어지기 시작했다. 잠시 잠잠했던 전선이 한 사람의 욕심으로 인해 다시 재개 되었고 그것이 전쟁이 길어지게 한 원인을 제공 했을 뿐만 아니라 또 다시 근거지를 잃은 행위를 자초했다. 김일성의 어처구니 없는 욕심은 미국이 1차 한중전쟁에 참전했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이 반격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 김일성이 비밀리에 군사를 움직임으로서 잠시 멈췄던 전쟁이 다시 시작될 조짐이 보였다.
-----------------------------------------------------------
이번 편을 끝으로 당분간 새글이 올라올 예정이 없습니다. 시간이 생기면 올리겠습니다.
출처 : 밀리터리-전쟁소설 카페의 깜찍이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