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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서 아침 일찍 첫 고속버스를 타고 대구로 왔다
대구에는 10 여년 전에 상 파울에 살고 있는 아들네를 방문하러 오신 김 집사님과 송 권사님 부부께서 살고 계신다
상파울에 오셨을때 우리와 연배가 비슷한지라 같이 주말마다 등산도 같이 가고
파타고니아 남극 여행도 같이 갔기에 친분을 유지해 왔다
몇해전에 우리가 한국 방문을 했을때도 김 집사님께서 손수 운전하셔서 같이 남도여행도 하고 동해안 여행도 같이 하였다
이제 아들네도 다시 한국에 나와 살고 있기에 더 이상 상 파울에 갈 일은 없으시단다
집사님께서 몇달전에 허리를 다치셔서 움직이시기가 많이 불편하신지라 우리가 집사님네 아파트를 찾아 갔다
그렇게도 건강하고 활발하게 활동하시던 분께서 갑작히 허리를 삐긋하셔서 오래 고생을 하시니
우리 나이에는 조심 또 조심해야지
두 분은 대구 제일교회 안수 집사님이시고 권사님이신지라 예배를 드리러 먼저 제일교회로 갔다
제일 교회와 청라언덕, 은혜 정원은 몇년전에 왔을때도 가 보았지만 그때는 성지 순례라는 개념 없이
그냥 건성으로 보고 갔던지라 마음에 남는 기억이 별로 없다
큰 길 건너편에 보이는 대구 제일 교회 모습이 우람한데 이 건물은 신축된 건물이고
구 건물은 남성로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대구 경북지역 최초의 기독교 교회로 대한 예수교 장로회 통합측 경북노회 소속이다
교회 이름은 남문안 교회, 대구읍 교회, 남성정 교회 등으로 불리었다.
2002년 4월 21일 헌당 예배를 드리며 이름도 남성정 교회에서 대구 제일 교회로 개명하였다
.지금의 교회는 동산동 234번(전 영남신학대학교 부지)일대에 새 성전을 건축하여 1994년 6월에 이전하고
종탑은 2002년 2월에 완공하여 2002년 4월21일에 헌당하였다
교회에 대한 설명은 교회 설명판 사진에 있으므로 참고 바람
설명판에 없는 부분만 보충 설명하면 대구 제일 교회에서 개척하거나 분립하여 나간 교회는
20여 개에 달할 정도로 대구 지역 모 교회의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초대 아담스 목사님을 필두로 2012년 현재까지 13대 박창운 목사가 시무하고 있다
교회 본당과 마주한 100주년 기념관이다
교육 문화관(전 영남신학교 강당 3층)은 7층 연건평 약 1,330평으로 2007년 1월에 완공하여
명칭을 100주년 기념관으로 개칭하여 교육 및 지역주민을 위한 문화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김집사님,송권사님 부부와 함께 예배 드린 후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후
몸이 불편하신 집사님네는 집으로 가시고 우리 부부만 본격적인 순례에 나섰다
날씨는 여전 무지 무지 땡볕에 더운데 그래도 어쩌랴? 오늘 하루 뿐인데..ㅠㅠ
바로 교회와 붙은 청라언덕과 은혜정원을 돌아보고 계산 성당을 거쳐 옛 제일교회 성전을 돌아 보았지만
순례기에는 현재 성전과 옛 성전을 이어서 올려야 읽기와 이해하기에 좋을듯 하여 옛 제일교회 성전부터 올리겠다
베어드 선교사(Rev. William M. Baird = 배위량)는 1891년 부인과 함께 부산에 도착하여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대구 제일 교회는 1893년 4월 22일 당시 부산에 주둔하던 미국 북 장로교회 선교사 배위량 목사의
전도 여행으로 설립된 대구 경북지방 최초의 교회이다.
1895년(고종32년) 미국 북 장로교 선교부에서 부산에 있던 선교 본부를 대구로 옮기며
미 북 장로회 선교부가 남성정(南城町)에 교회 부지를 마련한 것이 1896년 1월이었으며
아담스 선교사가 대구에 정식으로 부임한 것이 1897년 11월이었다.
대구 경북 지방 최초의 기독교 교회인 남성정 교회가 창립된 것이다.
1908년 단층 140평의 예배당을 건축하였으며, 1933년 2층 448평의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1936년 5층 높이의 벽돌로 종탑을 세웠고 1969년 내부 중수 공사를 하였고,
1981년 6월 본당 뒤편으로 156평을 증축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건물의 평면은 남북으로 긴 직사각형이고 앞면 중앙에 현관을 두고 오른쪽에 높이 33m종탑을 세웠다.
벽돌조 2층의 간결한 건물 외관에 고딕양식이 잘 나타나 있어 대구지역 근대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또한, 제일교회는 경북지방에 처음 생긴 기독교 교회로, 선교사들이 이 지방을 개화시키기 위해
선교사들이 근대적 의료 및 교육을 전개하였던 거점으로서 역사적 의의를 지닌 곳이다
대구 제일 교회는 1992년 1월 7일 대구 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30호로 지정되었다.
교회가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대구·경북 지방 최초의 서양 의료기관인 제중원(濟衆院)이 설립되었다.
제중원은 1899년 10월 동산동(현재 위치)으로 옮겨지면서 동산병원(東山病院)으로 개칭하였다.
대구 제일교회는 또한 희도(喜道)·,신명(信明)·,계성 등 학교를 설립하여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
종각 봉헌자 이 주열 권사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베어드 목사의 선교 사역을 시작으로 출발한 대구 선교 기지는 베어드 목사가
서울 지역 교육 담당 고문으로 발령이 나면서 그의 손아래 처남인(베어드 목사의 아내가 애덤스의 누나이다)
안의와 목사(James Edward Adams 1867.5.2~1929.6.25)에게 인계되었다
애덤스 목사는 미국 인디애나 주 맥코이(McCoy)에서 태어나, 1888년 캔사스 주의 워쉬번 대학(Washburn College)을
졸업하고 그후 1년간 존 홉킨스 대학에서 수학한 후 매코믹(McCormick) 신학교에 들어가 1894년 졸업하였다.
졸업 후 목사 안수를 받고 YWCA간사로 일하던 넬리 딕(Nellie Dick)과 결혼하여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로부터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어 1895년 5월 29일 가족들과 함께 누나가 있던 부산에 도착하여 한국 선교를 시작했다.
그는 배위량 선교사로부터 대구 선교를 인계받은 후 부산에서 한국어를 습득하고 선교사 실습을 하였다.
1년 후인 1897년 아내와 아들과 어학 선생과 출산을 앞둔 부인을 위해 임시 보모와 함께 대구에 도착했다.
1897년 말 자신과 함께 대구에 온 가족과 어학 선생, 임시 보모 등 7명을 교인으로 남문안 교회를 창립하였다.
그러나 대구 제일교회는 베어드 선교사가 대구에 처음 와서 선교를 펼쳤던 1893년 4월 22일을
창립일을 정하고 있지만 목회사역은 남문안 교회를 시작하여 목회한 애덤스가 초대 목회자로 기록하고 있다
안의와 선교사가 대구에 부임한 다음 달인 1897년 12월
의사인 존슨(Woodbridge Odlin Johnson, 1869~1951 장인차(張仁車)) 부 부와
1899년 5월 브루엔 (Henry Munro Bruen, 1874~1959,
10월 26일 부임함으로 공식적으로 대구 선교기지가 개설되었다.
이것은 한 선교기지 내에 선교사가 최소한 3명이 되어야 독립된 선교기지로 공인받을 수 있고,
독립적인 예산 편성권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구 스테이션의 개설은 대구가 대구,경북 지방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 지역 기독교 역사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후 남문안 교회는 나날이 성장하여 1900년 봄 존슨 의사의 조수 서자명(徐子明)과 정완식(鄭完植),김덕경(金德卿) 등이
출석하여 세례를 받았고, 이듬해부터 교인이 급증하여 1907년에는 800여명에 이르게 되었다.
애덤스는 1923년 병으로 대구를 떠날때까지 경북 곳곳에 교회를 세우고 선교활동을 펼쳤다
이듬해 건강 악화로 한국 선교사를 은퇴하고 협력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자신의 전 재산과 후원금으로
아담스 복음 전도재단’을 설립해 대구에 66개와 안동에 7개 교회를 개척하는 등
대구·경북 복음전도에 헌신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안의와 선교사는 1924년 건강 악화로 23년간 보낸 이국땅을 뒤로 하고 영구 귀국한 후,
1929년 6월 25일 캘리포니아 리버모어에서 62세를 일기로 소천했다
아내 넬리 딕 선교사도 넷째 아이 유산 후유증으로 1909년에 소천하여 지금 대구 '은혜 정원'에 잠들어 있다
교인 7명으로 시작한 대구 제일교회는 1994년 4월 동산(東山) 위에 웅장한 교회당을 신축하였다.
이처럼 크게 성장하여 현재까지도 대구,경북지방 모(母) 교회로서의 위치를 굳게 지키고 있다
당시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의 3대 선교 거점은 평양,서울,대구였으며, 그 대표 선교사로는
평양은 마포삼열(Samuel Austin Moffet, 1864 ~1939 馬布三悅),
서울은 원두우[Horace Grant Underwood, 1859 ~1916 元杜尤],
대구는 안의와(James Edward Adams1867~1929)라고 할 정도로 한국 기독교 교회사에서 그 비중이 매우 큰 인물이다.
그의 장남 안두화(Rev. Dr. James N. Adams. 1895~1965)목사는 계명 대학교의 창설자로서 대구에 오랫동안 주재하였다.
안의와 선교사 가문의 한국에 대한 사랑과 봉사는 3대에 걸쳐 100년 이상 지속됐다.
교회 설립 50주년 기념비
옛 교회 옆 담장안에 걸린 3.1운동 그림
교회 담장과 붙은 약령시 골목길
3.1운동 만세 운동길
대구 제일교회 새성전 담장을 끼고 올라가는 길로 90계단을 올라가면 바로 청라 언덕에 서게 된다
이 께단은 일제가 공사했는데 조금 가파르지만 당시는 사람과 마차가 통행하였단다
대구 삼일 운동은 순수 기독교인의 독립 만세운동이었다.
당시 대구 제일 교회와 대구 서문교회, 남산교회 성도들과 과거 선교사들이 세운 계성학교, 신명여고 학생들이
1919년 3,8일 조국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대한독립 만세”를 목청껏 외치며
일본 순사들의 감시를 피해가며 서문시장 큰 장터를 향햐 달려가던 애국 혼이 서린 길이다
펄럭이는 아름다운 태극기가 걸린 계단을 오르다 보니 저절로 애국심이 솟아나는 듯 하다
삼일 운동 90계단을 올라서니 대구 시내 한 복판에 청라 언덕이 있다. 청라는 푸른 담쟁이를 일컫는 말이다.
이곳엔 대구 제일 교회를 비롯하여 영남 지역 최초의 서양 의술을 펼친 대구 제중원이 발전한 동산 의료원 자취와
선교사들의 고 주택이 3 채가 옛 모습 그대로 있고 이 땅에 와서 사랑과 수고로 봉사하다 하늘나로로 간 선교사 가족들이
잠들어 있는 은혜 정원과 근대 교육의 산실인 계송 학교와 신명여고 등이 모여 있는 곳이다
그래서인지 이 동산에 오르면 대구가 왜 영남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워 지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수령이 100년이 넘는 아름드리 나무와 잔디밭의 초록빛과 고색창연한 선교사 주택, 경건하기까지 하는 은혜 정원은
회색으로 도배된 도심에서 신선한 충격과 함께 옛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그리움과 함께 포근한 어머니 품 같은 곳이다
청라 언덕에 오르면 맨 처음 만나는 챔니스(O.Vaughan Chamness'1898~1987) 선교사 주택이다
챔니스 등이 거주한 일제 강점기 1910년 경에 완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1911년 계성학교 제2대 교장으 로 취임한 R.O.Reiner와 O.V.Chamnes, Sawtell 등의 선교사들이 살았으며,
1948년부터는 동산병원 의료원장인 H.F.Moffett의 주택으로 사용되어서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현재는 의료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국립 박물관과 대학 박물관을 제외한 개인 박물관이 별로 조성돼있지 않은 대구인지라
해외 기독교인들도 대구를 찾았다면 이곳을 방문한다
챔니스 주택은 의료 박물관으로 사용하는데 주중에만 개방되어 주일이라 들어가지 못하여 아쉽다
건물은 2층이지만 전시관은 1층만 전시실로 사용하는데 한 쪽은 최초 근대 의료기구가 전시되어 있고
다른 한 편에는 한의학 관련 재료가 전시되 있고 대구에 최초로 들어온 피아노도 전시되어 있다
배롱나무 분홍꽃이 화사하게 이쁘다
본 챔니스 선교사는 1925년 대구에 와 '애락원'(현 서구 내당동 대구애락원)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돌봤다.
부원장직을 맡은 그는 농사와 축산 등을 지도하면서 선교활동도 병행했다.
부인 헬렌 씨는 영유아 보건소에서 일하며 아픈 아이들을 돌봤다.
부부의 활동은 1941년 일제에 의해 추방당하기 전까지 계속됐다
청라언덕 한켠에 있는 제중원(1899)을 전신으로 대구 동산병원 구관 중앙 현관입구 ..
대구 동산 병원 구관은 제2대 동산 병원장 플렛처가 1931년 신축한 대구 최초 서양 의학병원으로
1941년 태평양전쟁중에는 경찰병원으로 사용되었고 1950년 6.25전쟁시에는
국립 경찰병원 대구 분원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2010년 대구 도시 철도 3초선 공사로 현관 부분만 이곳으로 이전하게 되었다는데, 참 아까운 건물이다.
현관 안에 있는 고압 산소 치료기
가압장치 안에서 환자에게 산소를 흡입시킨 의료 장비로, 일산화탄소의 급성 중독치료 등에 많이 이용된다
1970년대 초 미국 북장로교 Van Cleve선교사가 가져온 설계도를 바탕으로
대구 한성 메디칼(구 한성공업사) 고 최운한 대표가
국내 최초로 제작한 장비로 1972년 계명대 동산의료원 응급실에 설치된 후 2012년까지 40년간 사용,
이 장비를 모델로 전국에 고압산소치료기가 확산되었으며,
1970-1980년대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사경을 헤매었던 많은 환자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우리 학창 시절에 참 많이 불렀던 '동무생각'가곡을 제법 소리 내어 불러 보니 아련한 그리운 추억으로 젖어 든다
'동무생각'을 작곡한 박태준은(1900-1986)은 1900년 박순조 장로의 차남(장남은 박태원)으로 태어났으며
형인 박태원은 대구 제일 교회 성가대 지휘자로 동생인 박태준은 성가대 반주자로 봉사하였다
대구 제일 교회 성가대는 1917년 7월 최초로 14명의 남녀 혼성 성가대를 조직하였는데 대원으로는 작곡가 현재명도 있었다
그는 대남소학교, 계성중학교, 평양 숭실전문학교에서 공부했으며, 모교인 대구 계성학교 음악교사로
합창과 악대부를 지도했고, 동요 “물새 발자국” “오빠 생각”등을 작곡했다.
박태준은 가곡 등 150여곡을 작곡했으며 그가 작곡한 찬송가 436장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은 지금도 많이 불려진다.
동산 의료원은 1899년 미국 존슨 선교사가 시작한 ‘미국약방’으로 출발했다.
이후 본격적인 치료활동을 하면서 ‘제중원’이라는 작은 진료소를 세우고 영남 최초 서양의술을 펼친곳이 동산의료원이다.
지난 100년간 동산 의료원은 보건과 치료, 교육, 선교를 통해 대구의 근대사를 이끈 견인차였다.
동산언덕에 오르면 이국적인 분위기를 물씬 느낄 수 있는 정원과 나란히 서있는 2층 벽돌집 3채를 만나게 된다.
1910년경에 지어져 선교사들의 숙소로 사용했던 주택은 이제 선교박물관, 의료박물관,
교육·역사박물관으로 각각 조성돼 시민들에게 역사적인 교육장소로 애용되고 있다
미 부장로교 블레어(Blair)와 라이스(Rice)가 살던 집으로 지금은 동산 의료원에서 교육.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주일이라 문이 닫혀 있어 안으로는 못 들어가보고 외향만 보고 나왔다
블레어(Blair, Herbert E.,한국명: 邦惠法 1879-1945.2.20) 선교사
1879년 미국에서 출생하였고, 1904년 11월 20일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했다.
그의 첫 부임지는 평안북도 선천스테이션이었다. 그는 거기서 1907년까지 용천구역 담당 선교사로 일했다.
1908년 강계스테이션이 개설되면서 북부 지역을 단독으로 책임 맡아 그 후 몇 달 동안 후창, 자성 등을 답사하였다.
이때는 평양대부흥운동의 영향이 전국에 확산될 무렵이라 그의 형
윌리엄 블레어(William N. Blair, 방위량)선교사와 함께 겨울 사경회 집회를 인도하였다
.1914년 대구스테이션으로 전임한 그는 그 후 대구 서부 교회를 담임하면서 상주 구역 교회들을 순행하며 관리하였다.
1941년 까지 대구에서 활동하다가 그 해 11월 17일 일제에 의해 강제 출국당해 대구를 떠난 허버트 블레어는
필릴핀 마닐라에서 사역하다가 1945년 2월 20일 필리핀에서 소천하였다.
1905년 10월 선교사로 내한한 그의 부인 수잔 질레트(Susan Gillette) 역시 남편과 함께
선교사역에 종사하다가 1945년 은퇴, 귀국하였다.
서울 마포구 합정동 145-3번지 양화진에는 블레어 선교사 딸(Blair, Honora McClure) 묘비가 있다.
1910년 한국에서 출생하고 1919년 8월 2일 서울에서 사망하여 양화진 제1묘역(다-8)에 안장되어 있다.
또 딸(Antoinette Blair) 하나는 1914년 7월 26일 평양에서 사망하였다.
1910년경에 지어진 건물로 선교사인 블레어(Blair)와 라이스(Rice)가 살던 집으로
지금은 동산의료원에서 교육.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쳄니스와 블레어 선교사 주택을 구경하고 내려오니 은혜 정원이 나온다
대구지역 기독교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곳이 은혜 정원이다.
은혜 정원에는 14개의 묘석(墓石)이 있다.
대구지역 복음 전파를 위해 희생된 선교사들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 바로 '은혜정원'이다
구한말 머나먼 이국땅에 와서 배척과 박해를 무릅쓰고 혼신을 다해 복음을 전파하고
인술을 베풀다가 삶을 마감한 선교사와 가족들이 이곳에 잠들어 있다
이 정원에는 20대 젊은 나이에 순교한 선교사가 있는가 하면 태어난 지 10일 만에 죽은 선교사의 갓난 아기도 있다.
장로교 선교사뿐 아니라 침례교, 구세군 등의 선교사도 있다.
동산의료원의 외국인 묘지는 서울의 양화진 외국인 묘지와 같은 대구 지역의 순교성지이다
차순도 동산의료원장은 “사우텔 목사의 비문에 새겨진 ‘I am going to love them(나는 그들을 사랑하노라)’라는 문구처럼
죽어서도 이 땅의 백성을 사랑한 선교사들의 위대한 사랑에 감사한다”며
“하나님의 사랑과 선교사들의 헌신 봉사를 느낄 수 있는 성지가 되도록
앞으로 은혜정원을 더욱 잘 가꾸고 보존할 것”이라고 전했다.
넬리 딕(Nellie Dick Adams,탁넬니)은 대구 최초의 장로교 선교사인 아담스(Adams,안의와,安義窩) 선교사의 아내이다.
그녀는 1897년 11월 1일에 3개월 된 장남 에드워드(안두화 : 계명기독대 창설)를 안고 태평양을 건너와
대구 지역에 발걸음을 디딘 첫번째 여자 선교사였다.
날마다 대구 땅을 향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한 넬리 딕은 남문안 예배당(대구 제일교회)의
유년 주일 학교를 창립했고 제일교회 부인 주일학교 교장, 전도부인 담당, 부인 사경회 인도와 순회 전도, 신명학교 출강,
정규 전도 부인 강습회 출강 등으로 몸을 돌보지 않고 다양한 선교활동을 하는 열성을 보였다.
1909년 10월 31일 넷째 아이의 유산 후유증으로 43세의 나이로 소천하여 은혜정원에 묻힌 최초의 외국인이 되었다.
넬리 딕의 쌍둥이 자매 진(Jean)도 아프리카 선교사로 가서 그곳에서 순교하였다.
넬리 딕 선교사의 묘에는 "She is not dead but sleepeth(죽은 것이 아니라 자는 것이니)" 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는데
죽은 것이 아니라 아직도 이 땅과 이 땅에 있는 한국인들을 위해
자신의 영혼은 살아서 기도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하워드 모펫 선교사와 그의 아니 마거릿 D.매거진의 묘이다
마펫 박사는 1917년 평양에서 태어나 미국 시카고 노스웨스턴 의과대학에서 학위를 취득 했고,
1948년부터 1993년까지 약 45년간을 동산 기독 병원장, 협동 의료원장, 이사장을 역임 하셨다.
평양신학교 설립자요 숭실전문학교 창설자인 Samuel Moffet(마포 삼열) 목사님의 넷째 아들이시다
(참고로 모펫 선교사의 유해는 2006년 장로회 교정에 이장되어 안장되었고
셋째 아들 Samuel A Moffe(마삼락) 선교사 역시 평양서 태어나 장신대 교수와 대학원장을 지나다가
2015년 2월 미국서 소천하였다)
마펫 선교사는 동산병원을 지역의 대표적인 종합병원을 만드는데 평생을 바쳐 공헌했으며
또한 1964년에는 애락 보건병원을 설립, 나병 환자들을 치료하고 어려운 환자들에게는 무료진료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했으며, 미국에서 모은 기부금으로 간호 전문학교
(현 계명대 간호대학)와 근대병원 설립에 기여하였다.
이외에도 1950년 ~ 60년 대 한국인 의사들을 미국으로 유학 보내 선진 기술을 배우게 했으며,
현재의 계명대학교 동산 의료원을 대형 의료원으로 성장시켰다.
마벳 박사는 지병으로 2013. 6. 2(일)향년 97세로 소천 하셨여 은혜 정원에 안장하였다.
마르타 스위처(Miss Martha Switzer, 성마리다 1880,6,22~1929.4.3)
미 북장로회 선교사로서 1911년 12월 11일 내한하여 대구 선교지부에 부임하였다
대구 여자 성경학교 교사 및 교장을 역임했으며 농촌교회 부인 사경회 인도 및 교회 여전도조직에 정력을 쏟았고
일본 나고야와 만주 한인촌에 선교사를 파송했다
과로로 1929년 4월 3일 49세의 독신으로 소천하였다.
대구에서 처음 순교한 그녀가 살았던 주택은 대구시 유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되어 동산의료원 구내에 보존되어 있다.
마르타 스콧 브루언 (Martha Scott Bruen, 부마르다 또는 부마태,傅馬太1902.5.10~1930.10.20)
마르타는 (브루언, 傅海利) 목사의 아내이다.
1902년 5월 10일 내구하여 남문안 예배당(제일교회)구내 초가에서 소녀들을 위한 신명 여자 소학교를 세우고
1907년 동산 위에 있던 부인용 사랑체에 신명 학교를 설립하여 대구 여성 교육의 선구자가 되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화이트 하벤에서 출생한 그녀는 제일교회 부인 주일학교 교사와 농촌교회 여전도회 조직,
부인 사경회를 인도했으며 1930년 10월 20일 55세를 일기로 소천하셨다
부루언의 쌍둥이 두딸이 엄마의 묘비 옆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으로 2007년 10월21일 신명학교 개교 10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면서 유품을 가지고 와서 묘비 제막은 가족들과 신명학교 관계자들이 세웠다.
마르타 스캇 브루언 선교사가 이곳으로 오게 된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녀는 원래 조선을 향한 선교의 마음이 없었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남편 브루언과 함께 할 수 있는 곳이라면,
그리고 브루언을 도와 자신이 힘이 될 수 있다면 그녀는 태평양을 건너올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그녀의 사랑과 내조가 있었기에 브루언 선교사의 사역과 대구땅에 여성학교 교육이 활발히 일어날 수 있었다.
그녀의 두 딸들도 은혜 정원에 함께 나란히 묻혔다.
존 로손 시블리(John Rawson Sibly, 한국명 손요한,1926.10.7~2012.6.24)
1926년 미국 뉴저지에서 태어나 뉴욕에서 성장하였다.
>1952년 노스웨스턴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960년 34세의 나이에 미국 연합장로교 파송 의료선교사로 한국에 왔다
1961년부터 1969년까지 동산병원 외과에서 진료활동을 하면서 당시 구하기 어려웠던
미국의 의학잡지들과 외과 관련도서들을 보급하는 등 선진 외과 지식을 한국에 보급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또한 나환자들을 위해 나환자 재활마을 설립을 도왔고,
미국 나환자 선교회로부터 재정적인 지원을 받아 애락원에 내․외과 병동을 설립하는데 힘을 보탰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치료에 기독병원들이 앞장서야 한다며 당시 동산병원장 마펫 선교사와 함께
미국에 있는 교회와 개인 독지가들에게 후원을 요청하는 수많은 편지를 보내는 일에 동참하여
그리스도 사랑을 전하는 선교사의 삶을 살았다.
닥터 시블리는 한국의 의료소 외지역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1969년부터 거제도에서 의료선교사로 활동하다가 또 다른 의료 빈국을 찾아 태국, 네팔로 건너갔다.
1998년 72세의 나이로 온두라스가 허리케인 피해 현장에도 달려가 구호활동을 할 정도로
그의 생애는 선교와 봉사로 일관된 아름다운 삶이었다.
생전에 닥터 시블리는 “동산병원에서 보낸 나날들을 우리 가족의 삶 가운데
가장 풍요하고 가장 의미있는 시기 중의 하나로 기억하고 있다
함께 일했던 한국에 계시는 여러분들은 가장 소중한 친구로 우리 기억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라고 회고했다
.
미국에 있는 시블리의 부인(Jean B. Sibly)과 딸, 아들 등 유가족 6명은 지난해 6월 24일
향년 86세로 소천한 닥터 시블리의 유해를 품에 안고 2013년 6월 한국을 방문하여
6월 5일(수) 오전10시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 은혜정원에서 유해 안장과 묘비제막 예배를 드렸다
닥터 도슨(Jhon H. Dawson.손요한.1926.6.6~ 2007.2.7)
1963년 - 1966년까지 동산병원 일반외과의사 선교사로 봉사하다가 귀국하여 의료봉사를 하다 81세로 소천하였다
도슨은 6.25 전쟁때 해군으로 한국에 참전했다가 한국인이 고생하는 것을 보고 한국을 다시 찾았으며
죽음직전 가족들에게 "의료 선교 봉사 기간이 제일 행복했다. 한국인을 사랑했다”라고 말하고
6명의 자녀에게 한국 대구 동산병원 은혜 정원에 묻히기를 희망하여 자손들이 병원을 방문 하여/SPAN>
2008. 11. 11(화)10:00 도슨의 가족과 의료원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묘비 제막 예배를 드렸다.
바바라 챔니스 (Babara F. Chamness)는 북장로교 선교사로 1925년에서 1941년까지 대구에서 근무한
챔니스(O.Vaughan Chamness, 차미수) 션교사의 딸이다
챔니스 선교사는 애락원에서 농사와 축산을 지도했으며 애락원 부원장을 역임했다.
은혜정원에는 대구땅과 조선을 위한 선교의 삶을 사시다 묻히신 분들 외에도 곳곳에서 작은 묘비들을 찾아볼 수 있다.
바로 선교사 자녀들의 무덤인데 버디 핸더슨(Buddy Henderson)은
계성학교의 교장 핸더슨(Henderson, 현거선)의 아들로 1920년 6월 5일에 출생해 1921년 9월17일로 단명했다.
마겐 콜러(Magen Khler 1887.6.18~1913.5.23)
1911년 12월 24일 내한한 스웨덴 구세군 여사관 중위인 그녀는 의성과 인근 지방 군영 개척에 노력하였고
장티푸스에 감염되어 동산병원에서 치료받던 도중 사망하였다.
그녀는 사후에 한 계급 승진하여 구세군 정위가 되었다.
체이스 크로포드 사우텔(Chase Crawford Sawtell, 사우대 1881.1.9~11.16)
사우텔은 1907년 10월 16일 부부 선교사로 내한하여 대구 선교 지부에 배치받고
안동 선교지부 개설을 자원하여 갔다가 장티푸스에 감염되어 1909년 11월 1일 소천했다.
안동에서 전도하다 순교한 최초의 선교사가 된 사우텔 목사는 28세 신혼의 젊은 나이에 순교하였다.
그의 묘비에는 "나는 그들을 사랑하겠노라(I am going to love them)"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죽어서도 이 땅의 백성들을 사랑하고 있을 사우텔 목사의 위대한 사랑을 전해준다.
조엘 로버트 핸더슨(Joel Robert Henderson)은 남침례교 선교사 Willie G. Henderson의 아들로
1964년 태어나서 몇 시간 살지 못하고 사망했다.
헬렌 맥기 윈(Helen McGee Winn)은 태어난지 열흘 만에 죽었다
헬렌의 부모인 미 북장로교 윈(Rodger E. Winn,인노절)선교사는
안동에서 경안노회를 창설하고 안동 성경학교를 설립하였다
루스 번스턴(Ruth Bernsten)은 구세군 대구지방관 번스턴(Brigador Arnold Bernsten)의 딸로 스웨덴 사람이다.
아버지 번스턴은 6.25 이후 중립국 감시위원단 스웨덴 대표로 내한한바 있다.
루스 번스턴은 1918년 10월 7일 출생하여 1919년 1월 28일 사망했다
그녀의 묘비에는 “Our Darling Rut"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무지 막지 더운 날이라 우수도꼭지를 보니 너무 반가워 세수부터 하고선...
동산 의료원 경내에 세워진 대구 선교 기념비 앞면 비문 전문
이곳은 대구 기독교의 발상지로서 19세기말 미국 북 장로교 선교사들이 대구를 선교지로 선택하여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아담스,존슨,브루언,세분의 선교사기 남문안에 있던 선교본부를 이곳으로 옮기며
“우리가 선땅은 천지를 창조하신 여호와이레의 땅”이라고 외쳤다.
브루언은 당시 대구의 읍성을 바라보며 “다윗의 망대가 서있는 예루살렘”같다고 하였다.
그들의 말처럼 이곳을 중심으로하여 교회,학교,병원,이 설립되었고 대구가 제2의 예루살렘이라고 일컫는
부흥의 역사를 이루게 되었다"
기념비 뒷면은 대신대학교,영남신학대학교,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대구기독교총연합회.
2012. 6월 00일/ 글 전재규. 글씨 공석균
경관도 주택도 참 아름답다
대구에서 본격적인 선교활동이 이루어지던 1906년부터 1910년경에 건축된 사택으로,
스윗즈 여사를 비롯해 계성학교 4대 교장인 헨더슨, 계명대학교 초대학장인 캠벨 등의 선교사들이 거주했다.
전통 한식과 양식의 조화가 잘 어우러진 건물로, 1736년 조선 영조대 대구읍성 축조때 사용된
성돌(城石대구읍성 철거시 가져와 사용)로 바른층 쌓기 기초를 하고 그 위에 붉은 벽돌을 길이 쌓기와 1단 마구리로 쌓았다.
지붕은 한식 기와를 이은 박공 지붕이었으나 함석으로 개조되었다가 다시 기와지붕으로 개조되었다.
1981년 동산의료재단에서 인수하여 현재는 의료 선교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마르타 스윗즈(Martha Switzer 1880.8,20~1929.4.15)
스윗즈는 미국 미조리 주의 세인트 루이스에서 출생하였다
뉴욕의 명문인 컬럼비아 대학을 졸업하고 무디 성경학교(Moody Bible Institu를 졸업한 후 선교사로 자원하여
미 불 장로교 선교사로 1911년 12월 11일에 대구로 부임한 이래 18년 동안 사역하면서 1929년 49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이 땅의 억눌린 부녀자들을 위해 살다간 한 떨기 사랑의 꽃이었다.
그녀는 부임하면서부터 이 지역의 부인 전도사업을 총괄하였다.
1912년에 ‘대구 여자 성경 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복음을 통한 여성 지도자를 양성하고 교육하였다
그러나 늘 심장이 좋지 않은 연약한 건강으로 인하여 많은 어려움과 시련을 견디다
결국엔 동산 사택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평생 독신으로 지내면서 열정적으로 사랑하며 사역했던 그녀는 그코록 사랑했던 대구에 은혜 정원에 조용히 잠들어 있다
그녀의 재산 전부를 선교를 위해 사용해 달라는 그녀의 유언대로 대구 '명도 학원’이 개원되었고,
또한 일본 나고야 한인 교회를 위하여 전도부인을 파송하기도 하였다.
-마르타 스위츠를 추모함-
"그녀가 일생동안 바랐던 한 가지 소망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그녀가 임종의 순간에 남긴 한 마디 말은 “주여! 저의 목숨은 당신의 손에 있습니다.”였다.
이 말은 그녀의 죽음을 적절하게 표현하는 말이다.
그녀는 진실로 주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일생을 살았으며, 그 값을 따지지 않았다.
그녀를 그리워하는 우리들은 그녀를 주님 계신 곳으로 데려가 편안히 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이다.’
- (Harriet E. Pollard(방해례) 선교사-
주일이라 안에는 들어가 보지 못하였는데 유형문화재 제24호인 선교박물관(스윗즈주택)은
각종 성경과 기타 선교 유물, 성막에 관한 자료를 전시해 놓고 있다.
동산의료원 개원 100주년 기념 종탑...
전국 담장 허물기의 첫 행사로 철거한 본원의 유서 깊은 정문 및 중문 기둥과 담장을 여기에 옮겨다 세우고
그 위에 본원의 초창기에 개척한 수많은 교회의 종들 중 하나를 올려 놓았다.
종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를, 두 기둥은 환자를 돌보는 교직원들의 사랑의 손길을,
1999.10.1.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장
청라언덕 선교사 주택 은혜정원등을 다 돌아보고 갈때는 반대쪽인 3.1 만세길로 돌아서 시내로 나갔다
큰길로 나서니 제일교회 건너련 큰길 건너 계산 주교좌 대 성당이 보인다
이 성당이 한국의 3대 성당 중 하나인 계산 성당으로 서울과 평양에 이어 세번째로 세워진 고딕양식의 성당이다.
이 성당은1886년 대구 지역 선교 활동을 책임 맡고 부임한 로베르 (Robert,A.P. 1853∼1922) 신부가
지금의 계산동 성당 부지를 매입하면서 건립되었다.
1년 만에 화재로 모두 소실되었고 그 후 재건축에 착수하여 로베르 신부가 설계하고,
함석이나 스테인드 글라스 등의 재료들을 프랑스 및 홍콩에서 들여와 3년이 지난 1902년에 완성되었다
.이 건물은 대구 지역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1900년대 초기의 건축물이다.
성당의 평면은 라틴 십자형 (Latin cross)으로 중심의 본랑(nave)과 양쪽의 측랑 (transept)으로 구성된다.
이런 평면 구조는 성당의 평면, 건물의 외부와 내부 공간에서 뚜렷하게 볼 수 있다.
전체적으로는 둔중한 로마네스크 양식을 띠고 있지만 첨탑과 스테인드글라스 등의
고딕적 요소들이 부분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1911년에 종탑을 늘리는 공사를 시작하여 1918년 12월 24일 현재의 모습으로 되었다고 한다.
대구 최초의 서양식 건축물이며, 현존하는 1900년대의 성당 건축물로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는 건물이다
1981년 9월 25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290호로 지정되었다
계산성당 뜰을 한 바퀴 돌아 구 제일교회를 돌아보고 지하철을 타고 집사님네로 가서
가방을 들고 바로 고속 버스로 서울로 올라오니 밤 11시가 넘었다
성루 경기 지방을 제외하고는 불과 8일만에 강행군을 하며 한국 성지순례를 마쳤다
미처 사전 준비를 못하고 갔고 또 시간도 너무 바쁜데다 무엇보다 날이 너무 더워 아쉬운 점이 많고
못 가본데도 많지만 그래도 많은 것을 알고 깨달아 은혜로운 날들이었다
건강을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가는 곳 마다 잘 대접해 주신 목사님과 사모님. 집사님, 권사님,언니. 동생. 고마워요
성지순례를 하며 느끼고 깨달은 바를 나중에 정리하여 올리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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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감상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마지막 성지순레기 대구까지 가셔서 제일교회의 내력을 실어오시느라 수고가 이만 저민이 아니네요 거기다 성당까지 의 내력까지 그 무더위를 견디시면서 참말로 대단하고 존경스럽고 누가 따라갈가 나는 앉아서 읽고 보고 하는 것도 때로는 버거운되 권사님같은 분이 계셔서 살맛나네요 애많이 쓰셨읍니다 넘넘 감사하고 많은것을 알게 해 주시는 권사님 흘린 땀 만큼 푹 쉬어가며 건강 하세요
권사님 지난 한 해 믿음안에서 우리 서로 나눈 은혜와 사랑 참으로 감사했고 큰 힘이 되었어요
새해에는 마음에 품은 작은 소망 하나까지라도 주 안에서 다 이루시고 건강하시고 평안하세요 Thanks!
잘 배우고 갑니다, 수고 많으셨어요,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빠짐없이 순럐기 동참해 주시고 오신 흔적도 남겨주셔서 격려가 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권사님 덕분에 국내 성지순례를 많이 알고 배우고 은혜 받았습니다 나갈 엄두도 못낼 폭염속에서 두 분의 사랑의 수고로 인하여 많은걸 깨닫고 가슴 아픈 부분도 많았지요 너무 너무 수고 많으셨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현주님 저와 함께 성지 순례에 함께 해 주셔서 많은 격려와 힘이 되었어요, 고마워요!
새해에는 더욱 영귝간에 강건하셔서 우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귀한 사람되어요 Thanks!!!
감사합니다 bonita권사님 수고가 많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