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오르며 외 6편
김일곤
산을 숨차게 오르는 길, 잠시 신발을 벗고
늙은 소나무 아래서 속살 고운 솔잎을 밟아본다
잘 있었는가, 한 아름 안아보면
내 심장에서 울리는 소리나 그의 몸 속에서 들리는 소리가
별 다를 게 없구나
이 호젓한 산속에 나 아닌 다른 이도 숨을 쉬고 있었구나
누이 앞가슴 같은 능선 위에서
그를 닮은 여럿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또 올라 왔는가
자네도 이젠 어쩔 수 없군, 하는 것 같아
내 걸음 닮은 소나무 아래 솔똥 시원하게 누고 싶은데
도대체 나는 어디쯤 왔는가
평생 내 길이라 여겼던 학교와 아이들
그들이 너무 잘 알고 있는 것 같아 힘껏 껴안아본다
오이꽃 필 무렵
오이꽃이 필 무렵, 그 가지밭
뜨거운 전설을 읽으며
반들반들한 가지 하나 꼭 입에 물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헐떡거린 호흡 고르지 못한 채
밭 언덕을 내려오는데
노란 오이꽃이 눈을 흘긴다.
한 순간, 길 환하던
아무도 몰래 뜨거워지는 상상의 불륜,
맹숭맹숭한 들녘
가릴 곳을 가리지 못한 채 서 있는 가지나무
두어 이랑,
그 너머
무논의 개구리 그리도 울었던.
늙은 염부鹽夫의 노래
햇살을 실어 나르는
수레를 가진 사람이 있다
그가 수염에 녹이 끼도록 평생 해오던 일은
물과 햇살을 잘 섞거나 반죽하였다는
넘치고 스미고 번지고 가라앉고 퍼지는 물의 생리를 잘 알았다는
수없이 물을 밀고 당기며 물의 허공에 눈꽃을 피워 냈다
봄 미나리 싱싱했던 청춘의 한 때
소금밭에 흘려보내고
살아온 날들의 짜디짠 무게를 저울 위에 올려놓으면
환금이거나 환전되지도 않을
쭈그러진 소금가마니 한 짐만 같았을 이마에도 소금꽃이 피었다
노을을 건너고 있는 물 허공으로
텅 빈 수레가 간다
가을바람
가을바람 일 획이
산 허리에
한 아침과 저녁의 물감을 괴어
열 두 폭 그림
이제 막 마감 지었다.
아버지의 시집
아버지의 쟁기질 하는 모습은 언제나
가편이었다.
탈고라도 하듯이 써레질이 끝나면
흙덩이들의 몽니도 저만큼 풀려서 누렁이
한 숨 돌리고 섰던 워낭소리가 풍경이 될 쯤
논바닥은 등을 내밀어 당신의 원고지가 되었다.
푸른 펜촉으로
아버지는 남실남실 시를 쓰셨다
아버지는 무명시인
세 마지기 논배미가 가난한
그의 평생의 시집이었다.
나이 오십이 넘어서서야
그나마 나에게도 어렴풋이 읽혔던
푸른 표지의 시집 한 페이지
어쩌다 섬진들녘 지나쳐 가는 날이면
왜 이리도 아프게 넘겨지던.
꽃 피는 짓
꽃을 보면 차오르는 그 말
'사랑해'
널 보고 있으면
덥석 입맞춤 하고 싶다
전생에 무슨 짓 하고 살았길래
꽃으로 피어나
생각만 해도 마음 밝아지는 영혼인가
세상을 건너는 모습 보아라
나비는 꽃잎으로 건너고
바람은 향으로 건너고
빗방울은 꽃말로 건너간다
꽃 피우는 짓
누구라도 손 내밀어 그 이름을 불러 세우면
사랑이 되는 꽃
세상을 씻어가고
토막 난 사랑도 씻고 가는
비누.
겨울 나무의 뒷모습
한 잎 한 잎 떨어진 발자국 소리
가을 귀 세우며 제 뿌리 찾아가고, 텅 빈 자리
회초리 맞는 벌거숭이 되었구나
젊을 땐 훌훌 벗는 게 싫다던 나무
중년 되어서는 세찬 바람 눈발에 맞선 의연함이
당당해서 보기 좋은 겨울나무, 네 뒷모습은
늘 그랬다
계절의 무늬따라 펄럭이던 언어로
다시 노래하기 위하여
시린 뼈마디의 고통을 그리움으로 다시리는구나
초라한 자신을 잊는구나
네가 사는 회색지대, 나목 숲에 서면
세상과 다른 빛깔이 흐르고
세상과 다른 시간이 흐르고
세상에 또 다른 길 하나 튼다는 걸 알겠다
눈이 내려 더 빛나는 너를 보면서
고통이라고 하는 것이 고통이 아닐 수 있고
그리움도 행복이라는 걸 생각하면
우리 사는 세상이
조금은 더 따뜻해진다는 걸
넌 읽히고 있었다
- 김일곤 첫시집『겨울 나무의 뒷모습』(2010.시와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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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일곤 : 1948년 전남 구례 출생. 1994년 전남대 교육대학원 졸업.
1983년 <교원문예>로 등단. 2003년 <한울문학> 신인상 수상.
산업박람회 문예공모 국무총리겸교육부장관상 수상.
공무원문예대전 행정안전부장관상 수상.
광주 어등초등학교장 등 역임, 2010년 2월 정년퇴임.
첫댓글 첫시집 축하드립니다
심우기 시인님 감사합니다. 정년퇴임을 앞두고 그 동안에 썼던 졸시를 엮어 보았습니다. 뿌끄럽기 그지없습니다. 이제 다시 글 쓰는 일에 몰두하여 더 나은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
첫 시집을 출산하셨군요. 축하드립니다.^^
장혜원 시인님 감사합니다. 잘 계시지요? 출간을 해놓고 다시 설레이기도 두렵기도 하고 묘한이게 시집가는 색시 마음인가도 싶습니다. 좋은 날이 되시기 바랍니다.
행복한 설날이 되시겠어요^^* 올해도 기쁜 일만 있으시길 빕니다.
시집 출판 소개와 졸시를 올려주신 박정원 시인님께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글을 써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열심히 쓰시는 모습에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드디어 좋은 글이 세상에 나왔네요 축하드립니다 ..- 또나른나 -
축하의 말씀 감사합니다.
편편 감사히 읽었습니다. 상당히 부러운 마음으로.. 축하드립니다.^^
미흡한 글들을 엮어보았습니다. 더 열심히 해야겠지요
정년 퇴임을 앞둔 시집 출간, 거듭 축하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분발하겠습니다.
시집발간을 축하드립니다..
료전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