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 관한 시모음 53)
겨울하늘 호숫가 /草岩 나상국
겨울눈이 또로롱 포로롱
춤을 추며 내려 올 것만 같은
손시린 겨울 호숫가
바람 불어도 좋은 날
하늘이 어정쩡 하게
낮게 내려앉은
그 겨울 하늘 호숫가
갈길 잃은 그대의 낮은 목소리
어디선가 날 부르는 듯
귓전에 메아리져 들려요
그대의 발길 따라서
헤매는 어쭙잖은 내 마음
벌거벗은 나목인 양
안절부절못하고
철새들 하나둘 짝지어
한가로이 노니는
호숫가에 노을이 곱게 물들면
굽 낮은 벤치에 등기대고 앉아
가만히 눈감고
언 손 녹여줄
그대의 따뜻한 숨결을
한 없이 그려요
겨울의 시 /민병련
피투성이된 일 월이
비늘을 털며
고딕식 도시를 절이는데
저켠 승냥이 울음 소리는.
불무덤 샛길로 백색 갈증이
운하와 대리석 그 사이를 질주하고
배고픈 모래알들
구두끈만 잠그고 외출한다.
흉터를 남기지 못하는 옷고름에
갉아모은 나의 뼈를 모두우면
비탈길을 걷는 이
맨살로 잠들은 골목을 짊어지고
어디엔가 살아있을
변색된 한쪽 다리라도 주어서
부끄럼없이 잠자리를 넓혀가리.
앙상한 여행으로
빗질도 못하는 녀름으로
미열을 일삼는 마른 어둠이
가끔은 눈 언저리에 장미 피어오르고
오랫동안 닦지 못한 신경들이
수레를 이끌고
보들레르의 아팀 나절을 빌리러 가면
속쓰림만 계속하는 오후
옷깃 사이로 묻어나는
생명
생명.
따뜻한 겨울을 위해 /예당 조선윤
꽃이 아무리 고와도
가슴으로 흐르는 사랑보다 더 고우랴
태양이 아무리 뜨거워도
불타오르는 사랑보다 더 뜨거우랴
영혼의 문 두드려 샘솟듯
맑은 금빛 햇살로 쏟아붓는
마르지 않는 눈부신 사랑
상상을 초월하는 위대한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가치 있는 정열의 사랑
진실의 꽃 피워 세상을 빛내고
삭막한 가슴 곱게 물들여
아름다운 세상 창조하는 사랑은
마음의 갈피마다 피어나
엄동에도 꽃을 피운다.
겨울의 빈자리 /이승복
약속의 그 벤치엔
함박눈만 푹푹 쌓이고
오랜 기다림 세월의 늪에
님의 아련한 모습이 그렇게
홀로 눈 속에 숨어들어
내 사랑이 지워지네
내 꿈이 묻히네
오버랩되는 얼굴이
다시 떠오르고 변변한
대답도 없이 훌쩍 떠난 님이
천일 사랑의 회억(回憶)이 한낱
바람에 날아 가버린 연처럼
숨바꼭질하는 몸짓으로
홀연 모습을 감추었네
엉기는 그리움 놓지 못하고
가늠키 어려운 짙은 안갯속
헤집고 있네. 미련(未練)이 얼마나
미련함이드냐. 곱새긴 절은 가슴이
아리게 저려오는데 겨울의 빈자리
허기진 사랑이 눈 속 깊이
숨어들어 녹아 내리네.
겨울 남새밭에서 /권오범
먹장구름 끄나풀인 듯
고추밭에 말 달리는 바람
알 수 없는 흰소리로 겁박질러
주눅 든 나와 달리
희아리 따먹던 염생이가 알아들었는지
서릿발 오독오독 씹어 입가심하다 말고
혼잣말 잘게 저며
콧방귀와 함께 내 뱉는 단음절, 매해해해
접때 낙락장송 팔 하나 부러뜨리는 걸 못 봤냐고
목덜미 검은 털 들쑤셔 으름장놓자
개갈 안 나는 소리 말라고
빛바랜 고춧잎이 맛있다며, 매해해해
헛다리 짚은 걸 인정하고 산으로 들어간 바람
떡갈나무 이파리 붙잡고 구시렁구시렁
내 무릎에도 서릿발 쳤는가
아까부터 걸음걸음 어긋나는 소리
겨울풍경 /최복준
오늘밤 하늘은 참선중이다.
문풍지 덧댄 창 너머엔
함박눈이 내리고
보이는 것은
쉬지 않고 내리는 하얀
명상뿐
명상이 쌓이는 벌판
들리는 것은
산사(山寺) 처마 끝
고드름처럼 매달린
겨울밤 고요의 뿌리가
키를 늘이는 소리들
오늘밤 하늘은
깨달음이 많은가 보다.
짙은 어둠을 뚫고
쉼 없이 함박눈이 내리는 것은
오늘밤 하늘은 참선중이다.
겨울 /한선미
겨울이다
얼어터진 노인들 야위어진 얼굴에서
거칠어진 손등에서
쩍
갈라진 겨울은
늘어만 가는 청구서에도
꽁꽁 얼었다
겨울은
왜 이토록
얼어 터져야
하는 걸까
깜깜
한 줄 소식 없는 봄
그래서 더욱 목이 터지는
겨울눈(冬芽) /정기현
칼바람 모진 삭풍
벌거벗은 알몸 휘감아
앙상한 가지 할퀴고 지날 때
지난 삶의 흔적 하얀 상고대로
피어오른다.
시린 가지마다
숨죽인 앙증맞은 어린 눈
어미가지 부여잡은 손길에
품을 떠난 아픈 잎자국
송곳으로 파고들고
늙은 억새처럼
메마른 거친 숨으로
하얀 동면(冬眠)의 언덕을 넘는
애달픈 나목의 모정 속에
비바람 불고
눈보라 치던 날
꺽어지고 휘어지던 아픈
상흔의 기억 남몰래 지우며
새근대며 잠든
어린 잎눈의 숨결로
꽃피울 새 봄의 희망으로
시린 나목 가슴이 부푼다.
겨울에 온 편지 /이병율
초겨울 편지를 받고 싶어
겨울 안개비에 젖어
바람에 우수수 흩어지는
붉게 물든 낙엽위에
아직도 남아있는 사연들이
더 아쉬운 사람들에게
내 것 좀 나눠주고, 마음 밭에
내 향기로움이 흩어지는
고궁의 넉넉한 빛
까치는 돌담 위에서 울고
아침 바람에 업혀오는 편지는
셔터 소리로 담는다
어떤 겨울 풍경화 /정연덕
女人 하나
급한 몸짓을 내놓고
산길을 돌아 간다.
아무것 없어도
빈들 밖으로 빠지는
저녁 눈보라.
흔들리는 나무가지
그 가지 끝에 맺힌 구름밭
혼자 놀고 있다.
뒤에 남은
산마을 감기든
수캐가 입을 연다.
겨울 당초문 /유재영
북극성을 비껴 가는 외기러기 울음소리
보랏빛 별을 보던 그 소년도 떠나가고
우물 속 가을 잎새가 일생을 보내는 밤
먹물 삭은 궁서체를 운문으로 읽다 보면
누군가 먼저 짚은 아득한 감탄사여
미닫이 밝힌 절구(絶句)가 댓잎보다 푸르다
겨울 창 넘어 /정헌영
고즈넉한 겨울
창문 넘어 앙상한 나무숲
까치집 두 개
금새 눈발이라도 내릴 것 같은
잿빛 하늘
하얀 입 김내 뿜으며
길 모통이에 서 있는 저 여인
고향 뜰앞 그림자처럼
떠날 줄 모르는 첫사랑의
그리움만 가득 쌓인다
지금은 흔적 조차 없는 내 고향
을씨년스런 들판엔 까마귀 날갯짓
울적한 마음에 외로움만
유리창에 하얗게 서린다
겨울의 전설 /김하인
당신을 좋아하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당신을 사랑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을 그리워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허락해 주셔서 고맙고 감사합니다. 같은 하늘 밑에 살고 같은 땅을 산책할 수 있도록 당신이 존재해 주셔서 늘 가슴이 미어질 만큼 눈물겹습니다.
당신 이름을 쓰고 얼굴을 그리고 목소리를 듣고 당신 손을 잡고 그 품을 안고 머리칼 쓸어내리며 바라보는 당신 어깨 뒤에 펼쳐진 황량한 이 겨울 산야.
이대로 살았으면
이대로 죽었으면
그렇게
눈물 흘리며 입속으로 끝없이 되뇌어봅니다.
모든 좋아함과 사랑함과 그리움을 당신 겨울에 바칩니다.
겨울 약속 /김수잔
우리가 혜어지면서
무언의 약속이지만
꼭 겨울에만 만날 수 있는
우리의 운명이라
하얀 겨울
나를 보면 넌 반가워
내 곁에만 찰싹 붙게 되지
순백 천사, 눈으란 이름으로
세상을 하얗게 덮으면
눈 삽 鈒인 넌 반기면서도
나를 멀리멀리 밀어낸다.
*눈삽..눈을 치울 때만 사용하는 특별한 삽
겨울 서정 /에델 조선영
아 어젯밤 꿈결이던가
쇠기러기 슬픈 울음소리에
내 어린몸이 자라던
초가 뒷문을 열면
뒤울엔 싸락싸락 은빛으로
하얗게 흰눈이 적시던 밤
기적소리처럼 멀어진
그리운 초록빛 얼굴들은
마른 풀잎처럼 누워
그 기억조차 희미한데
사나운 승냥이 울음 들바람소리
잠시 멈추었다 가는
들녁 끝집 노란 추녀 끝에
밤마다 고드름은 송곳처럼 내리고
지금 쯤 펄펄 송이눈 흰 옷자락 날리며
텅빈 겨울 들판을 가로질러
누군가 밤중처럼 돌아오고 있을까
겨울 /이준규
해가 지고 있다. 해가 지고 있어. 그가 말했다.
그래 해가 지고 있지. 그녀가 말했다.
술 마실까. 그가 말했다.
모르겠어. 그녀가 말했다.
울지 마. 그가 말했다.
안 울어. 그녀가 말했다.
울지 마. 그가 말했다.
안 울어. 그녀가 말했다.
울고 있는 거 같은데. 그가 말했다.
안 울어. 그녀가 말했다.
술 사 올까. 그가 말했다.
그래. 그녀가 말했다.
그는 술을 사러 나간다.
해 지는 겨울. 그가 술을 사러 나간 사이에 그녀는 죽지 않겠지.
그는 빨리 걷기 시작했다.
해가 지고 있다.
그는 가게를 지나쳐 계속 걸었다.
그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해가 졌어. 그녀는 중얼거렸다.
겨울 아침의 시 /강명주
겨울 강
백두대간 숲 속 깊은 정 두고
예와 서
슬픔으로 우는 까닭은
인연이 되지 못한
인연의 함정 같은 것들
버릴 것 아니 버릴 것
아는 까닭으로
지나던 바람 강물 꼬집어도
적당히 외로워진 체온으로
시려 보는 피톨들
동지섣달의 강이
슬퍼서 어는 까닭은
속 깊은 정
그리움의 옥토가 된 까닭에
아 저 겨울 강 속
인생의 빗장
수런대는 풍경들
아침이면
이슬로 피어날 것 들
봄이면
시계가 일어날 것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