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13 章 여난(女難) 무상(無常)
해는 어느덧 중천에 걸렸다.
냉운과 청강권은 냉가장주가 거처하던 견지루에 들어와 있다.
요화들의 내음이 가득했으나 그보다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버지의
체취였다. 그와 더불어 이름 모를 흉수에 대한 원한은 더욱 커져만
갔다.
방 안 한쪽 구석, 얼굴이 대춧빛으로 붉어진 청강권이 정좌를 하고
있다. 운공삼매경에 든 듯 그의 정수리 부근에는 신령스런 백무가 어
려 있다.
내공을 유형화시키는 단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적어도 일백 년의 공
력이 필요하다.
백화궁의 요녀에게 수모를 받으며 광인 행세를 하던 청강권이 어느새
그런 경지에 들어갔단 말인가?
'청강권은 가문의 충신이다. 그는 이런 대접을 받아 마땅하다.'
냉운은 청강권이 진기를 거듭 일주천시키는 것을 보며 흡족한 미소를
띠었다. 그의 얼굴엔 잔잔한 땀방울이 맺혀 있다.
그는 청강권에게 두 알의 삼선단을 복용시켰으며, 약기운을 극대화시
키기 위해 아낌없이 추궁과혈을 해 주었다.
청강권의 임독양맥(任督兩脈)은 시원스레 타통된 상태. 그가 운기조
식을 끝내고 일어나면 절정 고수자라 불리게 될 것이다.
냉운은 이마를 잔잔히 덮은 땀방울을 닦아내며 방문을 나섰다.
"청강권에게 몇 가지 절기를 전수해 주어야겠군."
냉운은 그에게 무엇을 전수할까 궁리하며 화단 근처를 어슬렁거렸다.
냉가장은 텅 빈 채였다.
백화궁 강남단 여인들은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냉운의 일초신위(一招神威)에 놀란 강남단주가 부하들을 이끌고 꽁무
니를 뺀 후이기 때문이었다.
백화궁의 힘은 삼대거파 중 가장 약했다.
지난 봄, 백화궁의 이대궁주가 홀연히 실종되었기 때문이었다.
"백화궁이 좋은 문파인 줄 알았으니……."
냉운은 비웃는 듯한 표정을 하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우연히 마주쳤던 한 여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일타운이란 여인은 착해 보였는데…… 하긴 더러운 연못에서 아름다
운 연꽃이 피어나는 법이니……."
냉운은 중얼거리며 근처를 왔다 갔다 했다.
얼마 후, 냉운은 화단을 바라보다 말고 냉가장의 문 쪽을 향해 고개
를 돌렸다.
"무슨 소리가 났는데……."
냉운은 바람 소리와는 다른 경미한 파공성을 들은 후였다.
절세고수가 경신법을 시전할 때 들리는 것과 같은 파공성이 냉운이
있는 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휘휙!
아니나 다를까, 냉운이 파공성을 알아들은 후 망막 안으로 두 명의
백의복면인이 들어왔다.
냉운은 그들이 삼십 장 먼 곳에 이르렀을 때, 그들 중 하나가 염방채
라는 것을 알아봤다. 등에 메고 있는 쌍검과 낯익은 몸집 때문에 아
주 빨리 알아본 것이다.
'염방채가 여기 오다니…….'
냉운은 놀라워하며 일단 몸을 숨길까 생각했다.
염방채와 함께 다가오고 있는 백의복면인이 바로 자신이 준 삼선단
덕에 내상에서 벗어난 천외옥룡 제소옥이기 십상이기 때문이었다.
냉운은 피하려하다 머물렀다.
'나는 이곳의 주인이다.'
냉운은 피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라 고소를 지으며 품안에서 검
은 수건을 꺼내 얼굴을 가렸다.
염방채와 제소옥은 냉운이 얼굴을 가리고 난 후에야 냉운 앞으로 떨
어져 내렸다.
놀라운 것이 있다면 염방채의 신법이 강남대협의 아들이자 삼기의 절
예를 삼 성 이상 이어받은 제소옥의 신법을 능가한다는 것이었다.
'전에는 제소옥의 절세신공을 부러워한 염 소저가 그 사이 제소옥을
능가하는 고수가 되었군.'
냉운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때, 제소옥이 냉소치며 성큼 다가섰다.
"백화궁 무리들을 징계하러 왔는데, 괴인(怪人)을 보게 될 줄이야!
얼굴을 가린 것으로 보아 심성은 바른 자는 아닐 것이다."
제소옥의 눈에서는 신광이 어른거렸다.
냉운이 은밀히 던져 준 삼선단의 약효 때문일 것이다. 제소옥은 부상
에서 완치됐을 뿐 아니라 내공마저 늘어난 상태였다. 무공에 자신하
지 않았다면 백화궁이 점거한 냉가장으로 들이닥치지 않았을 것이다.
냉운을 바라보는 제소옥의 눈빛은 비수날보다 날카롭다. 마주하면 눈
알이 베어질 정도였으나 능운은 그저 담담히 받아들였다.
'신안공(神眼功)을 그대로 마주하다니……. 백화궁 계집들이 보이지
않은 데에 이 자의 힘이 작용했단 말인가?'
제소옥은 능운의 무공이 보통이 아님을 짐작하며 공력을 끌어올렸다.
"웬 놈이냐? 여기 머문 까닭이 무엇이냐?"
사자후로 질러대는 음성. 근처의 기왓장이 들썩였으나 능운의 태도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하하……, 주객이 전도된 게 아닌가? 느닷없는 객이 찾아와 주인에
게 누구냐고 묻다니?"
냉운은 음성을 변성시켜 말하며 뒷짐을 지었다.
일순 제소옥의 눈에서 화광이 쏟아져 나왔다.
"어제만 해도 백화궁의 땅이었거늘, 하룻밤 사이 주인이 바뀌었군.
하나, 냉가장은 남의 손에 농락당할 장소가 아니다."
그의 말소리가 지극히 차가웠다.
"하하……, 냉가장과 무슨 연관이 있단 말이냐?"
"물론 있다!"
제소옥이 다짐하듯 말해 나갔다.
"이곳의 원 주인이시었던 냉엽문 장주께선 나의 가문과 절친한 사이
였었다."
"흠, 귀하가 누구인지 궁금하군."
"그것은 알 필요 없다. 이곳을 떠나라! 당장!"
제소옥은 노한 듯 공력을 힘껏 끌어올렸다.
지지직 ―.
그의 두 발이 닿은 면을 중심으로 이 자 이내가 천천히 가라앉아 갔
다.
"대단한 천근추(千斤錐)로군!"
냉운은 감탄하듯 말할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백화궁을 몰아낸 것으로 보아 보통 실력은 아니겠지. 하나, 나의 두
손을 받지는 못한다."
제소옥은 냉운의 오만함을 꺾으리라 생각하며 두 손을 쳐들었다. 이
미 청성비전의 홍광천쇄진기를 끌어올린 듯 장심에 붉은 홍점이 박혀
있다.
이상한 것은 염방채의 태도였다. 그녀는 얼굴을 가린 자가 냉가장의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데에도 꼼짝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냉운의 정혼자. 다시 말해 냉가장의 안주인이라 할 수 있지
않은가.
지금 그녀의 눈은 냉운의 두 눈에 고정되어 있다. 그리고 차츰, 그녀
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내가 어찌 저 눈빛을 잊겠는가. 그래, 저런 눈빛을 띠는 사람은 그
분밖에 없어.'
염방채는 저도 모르게 손에 땀을 쥐었다.
어젯밤, 불현듯 느껴진 냉운의 체취로 인해 이곳 냉가장을 찾지 않았
던가. 눈앞에 얼굴을 가리고 선 괴인. 체형이 달라졌다고 하나 분명
꿈에 그리던 정인이 분명하다.
제소옥이 다짜고짜 일 장을 쳐내려 하는데.
"잠, 잠깐!"
염방채가 부르르 떨며 제소옥과 냉운 사이로 걸어 들어왔다.
"낭자!"
제소옥이 얼떨떨해할 때, 염방채가 왼손으로 얼굴을 가린 복면을 와
락 벗겨내며 냉운 쪽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냉 공자시지요?"
"……."
냉운은 천 근 바윗돌로 머리를 맞는 듯한 기분이 되었다.
염방채가 눈물을 글썽이며 냉운의 옷소매를 끌어당겼다.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셨다고 몰라볼 제가 아닙니다!"
염방채는 흐느끼듯 하며 냉운의 얼굴에서 수건을 벗겨냈다. 냉운은
얼어붙은 듯 그녀의 손길을 만류할 수 없었다.
지극히 준수한 모습이 나타났다.
"과연, 과연 냉 공자님이군요! 돌아가시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는 있
었으나 이렇게 뵙게 되니,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염방채가 흐느껴 울었다.
"낭, 낭자……."
냉운은 지난밤 제소옥과 염방채 사이를 오해했다고 여기며 손을 내밀
어 염방채의 손목을 거머쥐려 했다.
그러나 그는 제소옥이 신음 소리를 내는 것을 알고 얼른 거두어들였
다.
'제소옥이 있는 앞에서 무례히 행동할 수 없지.'
냉운은 냉정을 되찾고 더듬는 투로 말했다.
"낭, 낭자는 죽었다고 소문났던데……."
"저는 구사일생 살아났습니다. 사부님이 저를 구해 주셨습니다."
"사부?"
"바로……."
염방채가 입을 열려 할 때.
"흠!"
제소옥은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는 엄한 표정을 하고 진기를 모아
헛기침해 염방채의 말문을 끊었다.
냉운은 야속하다는 마음을 이길 수 없었다.
두 사람 사이가 갑자기 서먹서먹해지는 것 같았다.
바로 그때였다.
"우……!"
"우……!"
두 마디 장소성이 냉가장을 뒤흔드는 가운데 두 명의 절정고수가 허
공을 가로지르며 세 사람이 있는 곳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 중 한 사람은 염방채만큼이나 아름다운 백의미녀였고, 한 사람은
나이 십칠 세 가량 되는 홍의소녀였다.
"너희들이었구나!"
백의미녀가 제소옥을 보고 날카롭게 외쳤다.
"이제 보니 백화궁의 총순찰 일타운과 소궁주(少宮主) 옥향선자(玉香
仙子)이시군. 냉가장에 아직도 볼일이 남았단 말이냐?"
제소옥의 말이 살기로 휩싸여져 근처를 뒤흔들었다.
죽었다고 여겨졌던 냉운이 나타났고, 염방채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본 그의 마음은 너무도 굳어 있었다.
더욱이 협맹과 백화궁은 공존할 수 없는 사이가 아닌가.
협맹은 삼대거파의 협공에 의해 와해되었다. 제소옥의 일념은 삼대거
파를 궤멸시키고 협맹을 다시 세우는 것이었다.
제소옥은 급히 혼신 공력을 끌어올렸으며, 일타운을 향해 쌍장을 쳐
내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아, 아니?"
제소옥을 노려보던 일타운이 근처에 있는 냉운을 그제서야 알아보고
자지러지게 놀라며 냉운 쪽으로 다가섰다.
"냉 소협."
일타운은 너무도 반갑다는 듯 눈물을 떨구기까지 했다.
그녀의 당돌한 행동에 냉운은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 한 번 우연히
마주친 여인에 불과한데 오랜 지기를 만난 듯 정감을 표하다니…….
"낭자……."
냉운이 벌레 씹은 표정으로 아는 체하자, 이번에는 염방채가 충격을
받고 몸을 휘청였다.
"저 천한 계집이!"
염방채가 발끈해하자 일타운과 함께 나타난 옥향선자가 코웃음치며
날카롭게 외쳤다.
"흥! 누가 백화궁 강남단을 쳤는가 했더니, 협맹의 잔당 중 우두머리
천외옥룡과 그의 계집 소의금랑(素衣金 )이시군."
옥향은 삼 년 전, 냉운이 본 바 있는 어린 소녀의 후신이었다.
백화궁주와 힘께 있던 소녀가 어느새 성숙한 여인으로 변해 있었다.
- 옥향의 향내는 너무 짙어 어지럽고, 위태로운 구름은 잡기가 힘이
드네.
백화쌍미로 불리고 있는 일타운과 옥향을 일컫는 말이다.
그 중 살명을 얻고 있는 쪽은 옥향이었다. 그녀의 손속에 의해 죽거
나 불구가 된 무림인은 벌써 일천이 넘었다.
옥향의 말에 충격을 받은 사람은 냉운이었다.
- 천외옥룡의 계집이었군.
소의금랑은 염방채의 별호. 냉운은 어젯밤 자신이 목격한 일이 어김
없는 사실로 드러나자 피가 거꾸로 흐르는 듯한 충격을 맛봤다.
'두 사람 사이는 무림인들이 다 아는 정인 사이란 말인가?'
냉운은 너무나 상심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아무런 말도 떠오르지 않
았다.
비록 냉정하게 대했으나 염방채는 아버지가 정해 준 그의 여인. 그
여인이 다른 사람의 연인이 될 줄이야.
그의 얼굴은 무겁게 굳어졌다. 그 속을 알지 못하는 일타운 유화선자
가 냉운의 손을 다정히 잡으며 달콤한 목소리를 흘려냈다.
"우리 두 사람은 인연이 있군요. 어제 소협 덕에 살아났고, 오늘 다
시 뵙게 되다니……."
"낭자……."
머뭇거리는 냉운의 얼굴 위로 염방채의 싸늘한 시선이 고정된다. 분
노와 당혹감에 그녀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백화궁의 여인은 하나같이 요녀로 알려져 있다. 백화궁 쌍미 중 하나
가 냉운의 손을 다정스럽게 잡을 줄이야?
백화궁 여인들은 그네들의 남자를 스스로 선택하고 운우의 열락으로
매일 밤을 지새운다고 하지 않던가.
'저 더러운 계집이 냉 공자를 미색으로 홀려 버린 거야. 냉 공자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야. 어떻게 저런 계집과…….'
염방채는 질투를 삭이려는 듯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백화궁 여인들은 미염술과 색환술로 남자를 유혹해 치마폭에 거둔다
고 알려져 있다. 그녀는 흥분한 나머지 냉운이 일타운의 미염술에 걸
려 신지를 잃었다 여겼다.
냉운이 어떻게 살아났으며, 어떤 경로로 절세고수로 화신해 돌아왔는
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으으, 너를 용서하지 않겠다."
염방채가 결국 참지 못하고 일타운을 향해 우장을 후려쳤다.
꽈르르릉 ―!
폭음과 함께 불문(佛門) 항마신공(降魔神功)이 시전되어 일타운의 가
슴을 쪼개려 했다.
"어림없다."
옥향이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붉은빛 도는 기이한 지력(指
力)을 쳐내며 염방채를 가로막았다.
펑!
벼락 치는 소리와 함께 항마신공이 다섯 줄기 지력에 의해 산산이 흩
어졌다. 염방채는 기혈이 뒤집히는 고통에 휩싸이며 뒤로 세 걸음 물
러났고, 옥향은 두 걸음 물러나 신형을 안정시켰다.
옥향의 승리라 할 수 있는 일 초 대결이었다.
"호호……, 백화궁이 신비마제로 인해 휘청거린다고는 하나 협맹의
도당들하고는 비교할 수 없이 막강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옥향이 조롱하여 말했다.
염방채는 아무 말 없이 입술을 꼭 깨물었다.
'무너진 백화궁 잔당들마저 이기지 못하다니…… 이러고도 어찌 협맹
을 일으킬 수 있단 말이냐?'
그녀가 낙담해 있을 때, 제소옥이 미끄러지듯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다독였다.
"실력 때문에 진 게 아니오. 방심해서 후퇴한 것이니, 마음에 둘 필
요는 없소."
"음……."
염방채는 말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
제소옥은 염방채를 안심시킨 다음 시선을 옥향에게 향했다.
"요사한 계집 종년! 암수를 써 염 낭자를 해하다니…… 네년을 그냥
돌려보내지 않겠다."
"흥! 제 계집도 보호하지 못하는 주제에 날 꺾겠다고!"
"네년을 십 초 안에 눕히지 못한다면 성을 갈겠다."
제소옥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흥분해 있었다. 정인이 눈앞에서 고통
스러워하자 견딜 수 없어서일까?
제소옥이 앞으로 나서자 옥향이 지지 않고 마주해 나갔다.
둘의 일 장 대결이 벌어지기 직전.
"모두 멈추시오!"
냉운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대갈일성이 중인을 멈칫하게 했다.
"냉가장에서 싸움을 하는 사람은 용서하지 않겠소."
주위가 물 뿌린 듯 고요했다.
냉운은 한 번의 기도만으로 사람들을 제압한 것이다.
제소옥은 어이없다는 눈빛을 흘리며 염방채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떠납시다. 저런 놈을 위해 냉가장을 되찾을 필요는 없소! 이미 백화
궁 요녀에게 혼백을 홀려 버린 놈이오."
"아……."
"우리에겐 할 일이 많소. 여기서 지저분한 년놈들의 작태를 볼 시간
이 없소. 어서 떠납시다."
제소옥이 소매를 끌며 재촉하자 염방채도 결국 수긍하며 아무 말 없
이 냉운 곁을 떠나갔다.
'그냥 가 버리다니…… 아무리 급한 일이 있더라도 그냥 갈 수는 없
거늘…….'
냉운은 염방채의 뒷모습을 보며 배신감에 떨어야 했다.
그가 부들부들 떨 때, 옥향은 까르르 웃으며 다가섰다.
"어느 고수가 일타운 사숙을 구했나 했더니 삼 년 전, 파계삼악승에
게 죽을 뻔했던 나약한 서생 나으리시군."
"……."
냉운은 그 말에 분노가 솟구쳐 옥향을 불끈 쏘아봤다.
"음……."
옥향은 냉운의 노한 눈빛에 간담이 서늘해져 입을 질끈 다물고 말았
다. 냉운이 얼음 구덩이 안에서 흘러나오는 것같이 차가운 소리로 말
했다.
"삼 년 전에 진 빚은 잊지 않고 있다. 하나, 나의 냉가장을 돼지우리
같이 더럽힌 것도 잊지 않는다."
"너, 너의 냉가장이라고?"
"나는 냉가장주(冷家莊主)다. 냉가장을 힘으로 뺏어 이 년 간 요녀굴
(妖女窟)로 만든 죄는 죽어 마땅하다."
"으으, 이제 봤더니 은혜를 모르는 개돼지만도 못한 놈이군."
옥향이 살기등등해 양 손으로 허리를 집었다.
"옥향아!"
일타운이 꾸짖듯 말하며 두 사람 사이를 막아섰다.
"어서 냉 공자께 사과해라. 이 년 전 이곳 냉가장을 강남단으로 만든
것은 엄청난 잘못이거늘, 주인 앞에서도 화를 내다니……."
일타운이 노해 외치자 옥향이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사, 사부께서 실종되셨다고 사숙마저 저를 업신여기는군요."
"그런 게 아니다."
"흐흑! 사숙 마음은 잘 알아요. 사숙은 사부가 죽기만을 바라고 있지
않나요?"
"뭐라고?"
"사숙은 궁주가 되고 싶어 사부가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고 있지 않나
요?"
"닥쳐라!"
"흐흑! 나를 멸시하다니……."
옥향은 징징 울며 원독한 눈빛을 뿌리다가 바람같이 날아 올라갔다.
옥향이 한 마리 붉은 보라매같이 날아오르자 일타운은 발을 동동 구
르며 냉운 쪽을 바라봤다.
"백화궁의 친구라더니, 모두 거짓이었군요!"
일타운은 원망 어린 말을 던지며 옥향이 사라진 방향으로 솟구쳐 올
랐다.
냉운은 땅에 뿌리를 박은 듯 꼼짝도 않았다.
일타운이야 떠나건 말건 상관할 바 아니었다. 냉운은 제소옥과 함께
떠난 염방채로 인해 괴로워했다.
'나를 버리고 갈 수 있느냐?'
마음 한 구석이 무너져 내린 듯 허탈감이 밀려든다. 하늘 위, 짝 잃
은 참새 한 마리가 가을 하늘을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정혼(定婚)이라는 것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규칙이 아닌 이상 염방
채가 나를 버린다 하여 욕할 것은 없지. 염방채 잘못은 아니다. 삼
년 간 죽었던 사람이니……."
냉운은 여인을 잊으리라 결심했다.
비록 부질없는 결심이나 이 순간만은 다시 여인을 곁에 두지 않으리
라 맹세했다. 중요한 것은 가문의 복수다. 애당초 여자 따위는 염두
에 두지도 않았었다.
모든 것은 원한을 해결한 뒤 생각할 문제이다.
해는 이미 서편으로 기울었다. 땅거미가 어슴푸레 깔릴 무렵 견지루
의 문이 열리며 청강권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전히 궁색한 옷차림에 절룩이는 걸음. 하되, 그의 얼굴은 환한 웃
음으로 가득 차 있다. 신광이 번득이는 눈, 그 눈은 이미 절정무사의
풍모를 보이고 있지 않은가.
냉운의 도움으로 갖게 된 절정의 내공. 이제 강호상에서 그를 무시할
사람은 없다 해도 과언은 아닌 것이다.
"축하하네."
냉운이 담담히 말하자, 청강권은 그 사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모르는 채 반갑게 말했다.
"모두 소주인 덕입니다."
"자네에게 고생을 시키기 위해 내공을 주었네!"
"소주인을 따르며 고생하는 것이라면 지옥 안으로 들어가는 고생이라
해도 서슴지 않겠습니다."
청강권은 넙죽 절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자네를 귀검사(鬼劍士)라 바꿔 부르겠네!"
"귀, 귀검사라니요?"
청강권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냉운은 품안에 간직하고 있는 귀검환을 꺼내들었다.
"자네에게 귀검환(鬼劍環)과 귀검팔절식(鬼劍八絶式)을 전수하겠네.
청강권이라는 이름은 이 순간 묻어 버리게."
"감, 감사합니다."
청강권은 감루를 흘리며 다시 넙죽 절했다.
만년한철의 차가운 한기가 느껴지는 귀검환, 그것을 검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적어도 일백 년의 공력이 필요하다. 냉운이 청강권에게 절
정의 내공을 전한 까닭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가장 살기 짙은 검식 귀검팔절식.
천성이 강직하고 순후한 청강권이라면 불귀객으로 죽어 간 귀검마성
의 전철을 밟지 않을 것이다.
청강권, 그는 이제 귀검사로 불리리라. 그리고 그는 백도 사상 가장
잔혹한 검초를 전개하는 무사로 기록될 것이다.
귀검사는 아직 냉운의 신분을 몰랐다. 그에게 전해진 귀검환이 오대
불귀객의 소유였다는 사실도.
아마 알았다면 감격에 겨워 눈물을 서 말쯤 흘렸을지도.
사흘이 지났다.
냉운은 귀검사에게 귀검팔절식과 오대불귀객의 무공 중 빨리 익힐 수
있는 다섯 가지를 골라 전수해 주며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렸다.
교교한 달빛이 냉가장을 비추고 있다.
삼 년 전, 그 달 아래서 벌어진 일장 혈극의 비밀은 아직 풀리지 않
은 채였다.
냉운과 귀검사는 그때 죽은 사람들을 위해 제사를 치뤘다.
"아버님!"
냉운은 상복을 하고 냉엽문의 무덤 앞에 앉아 복수를 맹세했다.
"흉수가 누구인지는 아직 모릅니다."
피맺힌 목소리였다.
"하나, 알아낼 수 있습니다. 그 자는 사대마경 중 하나를 갖고 있으
니, 마경의 주인을 찾다 보면 그 자를 찾을 것입니다. 내년 중추절이
되기 전, 그 자를 잡아 처단할 자신이 있습니다."
냉운이 제문을 대신해 복수의 말을 읊는 사이 귀검사는 무덤을 향해
백 번 천 번 절을 계속했다.
삼 년 전, 죽은 사람 중에는 귀검사의 노부모(老父母)와 젊은 아내가
끼여 있었다. 냉가장은 혈겁의 냉운뿐만 아니라 귀검사에게도 철천
지한을 주었던 겁일(劫日)이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달이 기울 때까지 무덤을 떠나지 않았다.
새벽.
냉운은 귀검사가 감추어 두었던 냉가장의 보물 가운데 귀한 것을 골
라 어깨에 짊어질 수 있는 철상자에 담고 귀검사의 어깨에 지우게 한
후, 냉가장 밖으로 걸어 나갔다.
"복수를 하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
냉운은 깨지 않을 맹세의 말을 거듭했다.
원수가 죽기 전에는 영원한 방랑객이 되리라.
원수의 수급을 갖고야 냉가장으로 돌아오리라.
그들이 태우고 남은 지전(紙錢)의 재가 찬바람에 쓸려 송림 가에 뿌
려지고 있었다.
싸늘한 바람이었다.
이후 무시무시한 혈풍(血風)을 암시해 주듯 뼈에 사무치는 바람이었
다.
두 사람의 모습은 곧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떠난 것일까?
복수의 순간을 위해 무작정 떠나간 것일까?
세상이 한바탕 핏물에 씻기운 후에야 그들 두 사람의 모습이 다시 냉
가장 안에 나타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