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시대에 웬 로맨틱 바캉스? 각석은 귀신 제사지낸 기념비”
최근 신라사와 관련한 기발한 주장을 40대 초반 한 젊은 고대사 연구자가 거푸 제기했다. 이르되 1970년 발견된 울주군 천전리 각석(刻石)이 신라 왕족이 개입된 ‘로맨틱 바캉스’의 기념물이라고 한다. 효성가톨릭대 강종훈(이하 존칭 생략) 교수가 이런 주장을 펴고 있다. ‘역사탐험’ 제11호에 실린 ‘울주 천전리 각석(刻石)에 얽힌 신라 왕족의 로맨스’라는 글이 여기에 해당한다.
높이 약 2.7m, 너비 약 9.5m에 달하는 이 각석에서는 지증∼법흥왕대(재위 514∼540년) 이후 신라 말까지 시기를 달리하며 새긴 각종 명문(銘文)이 어지러울 정도로 확인되고 있거니와, 그 중에는 작성 연대를 명확히 알 수 있거나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경우가 꽤 있다. 그런 결과만 정리하면 상원(上元) 2년(675), 상원(上元) 4년(677), 개성(開成) 3년(838)이 있고, 746년(경덕왕 5)과 756년(경덕왕 15)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한 병술재(丙戌載)·병신재(丙申載)라는 연대도 보인다. 이로써 각석 일대가 지증∼법흥왕대 이후 삼국 통일기를 거쳐 신라 말까지도 지속적으로 긴요하게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 각석에 대한 연구는 이른 시기 명문에 집중되었으며, 강종훈 또한 이 중에서 내용상 서로 직접 연관이 있는 소위 ‘원명’(原銘)과 ‘추명’(追銘)의 두 명문에 초점을 맞추어 ‘로맨틱 바캉스론’을 전개했다. 원명과 추명은 연구자들이 편의상 서로 밀접한 두 명문을 구분하기 위해 붙인 명칭일 뿐이다. 그렇지만 타당성은 나름대로 구비하고 있으니, 나중에 작성된 추명이 먼저 작성된 원명이 말하는 내용과 연속되어 일어난 사건을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작 시기는 둘 다 법흥왕 때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따라서 원명 스스로 밝히는 제작 시기 을사(乙巳)는 525년(법흥왕 12)이 되며, 기미(己未)라는 제작 연대가 있는 추명은 14년 뒤인 539년(법흥왕 26)에 새겨졌음을 밝힐 수 있다.
이들 두 명문은 일부 글자가 마멸되거나 그 뜻을 추찰하기 어려운 곳이 있어 판독과 해석이 연구자마다 극심하게 다르다. 그렇지만 다음과 같은 점에서는 이론이 있을 수 없다.
첫째, 원명에 따르면 525년 6월18일 어떤 갈문왕(葛文王)이 ‘우매’(友妹)인 어사추여랑(於史鄒女娘. 女娘은 존칭으로 생각되므로 이하 ‘어사추’로 약칭)과 함께 서석곡(書石谷)으로 ‘멱유래’(覓遊來)했다. 이 때 이들을 수행한 사람도 보이는데 ‘작공인’(作功人, 作切人이라고도 함) 2명과 함께 ‘작식인’(作食人)도 2명이 포함되었다. 작식인 중 한 명이 ‘□육지’(□肉智)인데, 그는 ‘사간지’(沙干支)의 처(妻)인 아혜모홍부인(阿兮牟弘夫人)이다.
사간지는 17등급으로 나뉜 당시 신라 관위(官位) 체계에서 제8등급에 해당한다. 이처럼 이 행차는 어사추가 갈문왕을 동행(同行)하는 가운데 여성들로 구성된 작식인이 수행(隨行)했으며, 이들 일행이 천전리를 찾은 행위를 멱유래라고 표현했다.
입종과 조카딸의 근친혼 통해 태어난 진흥왕
둘째, 원명보다 14년 뒤에 작성된 추명에는 갈문왕과 어사추가 그림자로만 남아 있고, 대신 이들과 혈연적으로 연결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아울러 추명을 통해 원명에서는 탈락한 갈문왕의 이름이 사부지(徙夫知)임이 마침내 공개된다. 사부지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모두 입종(立宗)으로 기록됐는데, 지증왕과 연제부인 사이에 태어난 둘째 왕자다.
형은 법흥왕이고 아들이 진흥왕이다. 입종은 생전에 형 법흥에 의해 갈문왕(葛文王)에 책봉되었다. 그의 아내에 대해 ‘삼국사기’는 법흥왕의 딸이라고만 했으나 ‘삼국유사’는 법흥왕의 딸 지소(只召)라고 못박았다. 따라서 입종은 조카딸과 근친혼을 해서 아들 진흥왕을 낳았음을 알 수 있다.
추명에 의하면 주인공격인 지몰시혜비(只沒尸兮妃) 일행이 서석곡에 행차한 시기는 (음력)7월3일이다. 계절로 보면 원명과 마찬가지로 여름철이다. 추명은 지몰시혜비가 갈문왕 사부지(徙夫智)의 비(妃)라고 했다. 그러니 지몰시혜비는 지소(只召)인 셈이다.
추명을 보건대 지몰시혜비는 이 때 행차에 무즉지태왕비(卽知太王妃)인 부걸지비(夫乞支妃) 및 사부지왕(徙夫知)의 아들인 ‘심□부지’(深□夫知)와 동행했다. 무즉지(卽知)란 법흥왕이며 부걸지비는 ‘삼국사기’에서 법흥왕비라고 밝힌 보도부인(保刀夫人)이다. 심□부지는 혈연관계로 보아 진흥왕임이 명백하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진흥왕을 심맥부(心麥夫) 혹은 삼맥부(?麥夫)라고도 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이 때 행차는 구성원으로 볼 때 가족 행렬이다. 즉, 부걸지비는 지몰시혜비의 어머니이고 심□부지(=진흥왕)는 아들이다. 그러니 부걸지비는 심맥부지에게는 할머니다.
추명이 담고 있는 구체적 내용 또한 논란이 분분하나, 문맥으로 보아 지몰시혜비가 서석곡을 찾았을 때 그 남편인 갈문왕 사부지는 죽고 없었음이 분명하다. 나아가 지몰시혜비의 행차를 수행한 인물로 원명과 같이 작공인과 작식인이 모두 보인다.
작식인으로는 추명에도 2명이 등장하는데, 역시 여성이다. 그 중 한 명이 □육지(□肉知) 파진간지(波珍干支)의 처인 아혜모호(阿兮牟呼). 원명에서 아혜모홍이라고 표기한 바로 그 여인이다. 14년 사이에 아혜모호 혹은 아혜모홍에게는 중대한 변화가 관찰되는데, 그의 남편 □지가 14년 전에는 8등 사간지였다가 이 때에 이르러서는 최고위급인 3등급 파진찬으로 등장한다.
‘友妹’는 ‘친구 같기도 하고 남매 같기도 한 연인’?
추명에서 주의할 대목 중 하나는 사부지 일행이 서석곡을 방문한 때가 더욱 구체적으로 보충된다는 점이다. 즉, 원명에는 6월18일이라고만 했으나, 추명에는 6월18일 하고도 ‘매’(昧)를 덧붙이고 있다. 매라는 글자야말로 멱유래 및 작식인과 함께 각석 명문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밝혀내는 데 가장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다.
강종훈은 원명과 추명 중 특히 원명을 갈문왕 사부지와 그의 우매인 어사추가 남긴 ‘로맨스의 기념비’라고 본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강종훈은 이 때 행차가 피서 혹은 바캉스였다고 주장한다. 이는 특히 사부지 일행이 서석곡을 찾은 때가 6월18일, 한여름임에 주목한 것으로 ‘피서’(避暑)라는 말까지 동원하고 있다.
이런 견해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사부지와 어사추가 아버지 어머니까지 같은 친남매가 되어서는 실로 곤란한 법. 신라가 아무리 근친혼이 판친 사회였다고 해도 동부동모(同父同母) 남매가 결혼한 사례는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강종훈은 사부지에 대한 어사추의 관계를 규정하는 우매라는 말을 동부동모 형제가 아니라 사촌과 같은 근친이라고 확대해석한다. 강종훈은 이에 따라 사부지와 어사추는 ‘친구 같기도 하고 남매 같기도 한 연인’으로 해석한다. ‘로맥틱 바캉스론’은 이렇게 탄생한다.
이에 필자는 이런 견해를 ‘천전리 서석 로맨틱 바캉스론’이라고 정의하면서 다음과 같이 묻고 싶다. 신라시대에 해수욕장이 있었는가. 무주구천동 같은 내륙 피서지가 있었는가. 피서 혹은 바캉스는 근대의 발명품이다.
필자는 전근대에 한반도는 물론이고 중국이나 일본에 여름철 바캉스 여행이 있었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도 없고 비슷한 전통이 있었다는 흔적조차 어느 사서에서도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강종훈은 사부지 일행이 서석곡으로 행차한 때가 한여름이라는 데 집착하면서 ‘바캉스론’을 주창한다. 사실 이런 주장은 그만의 전매특허는 아니다. 이미 그 이전부터 이 비슷한 ‘피크닉론’이 꽤 통용되고 있었다.
‘바캉스’ 혹은 ‘피크닉’과 천전리 각석을 관련짓게 한 또 다른 주요한 근거로는 원명에서 확인되는 멱유래와 원명·추명 모두에 나오는 작식인이 있다. 바캉스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전자를 ‘구경하며 놀러 왔다’, 후자는 ‘음식 만드는 사람’ 정도로 풀었다. 그러한 해석이 맞다면 적어도 원명만큼은 여름철 바캉스론 혹은 피크닉론이 성립할 여지가 있다. 그렇지만 문제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데서 심각성을 초래한다.
무엇보다 사부지 일행이 서석곡을 찾은 때가 ‘6월18일 매’라는 사실이 바캉스론에 심대한 거부반응을 일으킨다. 매라는 글자 그대로 ‘미일’(未日)이니, 해 뜨기 전의 밤 특히 새벽이다. 묻는다. 설혹 바캉스가 신라시대에 있었다고 하자. 그래서 바캉스를 밤에 떠나는가.
사부지 일행은 왜 매라는 시각에 천전리에 (틀림없이 횃불을 들고) 나타나야만 했는가. 귀신을 제사지내기 위함이다. 귀신은 음기(陰氣)다. 지금도 제사를 밤에 지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양기(陽氣)가 판치는 대낮에 귀신이 출몰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가. 매에 도착한 까닭은 말할 것 없이 대낮에는 활동할 수 없는 귀신을 밤에 흠향(歆饗)하기 위함이다.
사부지 일행, ‘바캉스’가 아니라 ‘제사’ 지내러 온 것
여기서 작식인의 실체가 자연히 풀릴 발판을 마련한다. 작식인이 ‘작’(作)한 것은 도시락이나 김밥이 아니다. 귀신을 흠향하기 위한 제사 음식이었다. 이는 원명에는 아혜모홍, 추명에는 아혜모호라고 각각 표기된 작식인을 볼 때 명백하다.
처음 서석곡 방문 때 남편 관위가 8등 사찬(沙=사간지)이었던 그는 14년 뒤 파진찬(波珍) 부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지몰시혜비 일행을 위한 작식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파진찬은 소위 공경대부(公卿大夫)에 속하는 고관대작이다. 이런 남편을 둔 부인이 고작 도시락 만드는 일을 거들기 위해 서석곡까지 지몰시혜비 일행을 수행했다는 말인가.
고대 제의(祭儀)에서 여성이 때로는 제주(祭主)까지 된 증거로는 신라 남해차차웅 재위 3년(서기 6)에 박혁거세를 위해 건립한 시조묘(始祖廟) 제주에 남해왕의 여동생인 아로(阿老)가 임명된 기록에서 우뚝하다. 이런 전통은 고대 중국과 일본에서도 보편적으로 확인된다.
예컨대 중국 고대 의례서인 ‘주례’(周禮)를 보면 ‘대제사(大祭祀)에는 왕후가 강신(降神)할 때 잔을 드린다’고 했고, 이 때 구빈(九嬪=후궁)은 옆에서 거든다고 했다.(제2권) 황후나 구빈뿐만 아니라 공경대부의 부인들도 황후를 따라 각종 제사에 참여한 모습이 곳곳에서 포착된다. 고대 일본에서도 또한 마찬가지였다. ‘일본서기’(日本書紀) 게타이(繼體) 천황 원년조를 보면, 이세대신(伊勢大神)을 제사지내는 제주로 황녀(皇女)가 임명된다.
따라서 사부지와 함께 서석곡을 찾은 ‘공주’ 어사추 또한 제주(祭主)였거나 제주인 오빠 사부지를 보좌하는 중요한 구실을 했음이 명백하다. 14년 뒤에 이곳을 찾은 지몰시혜비 또한 같은 역할을 수행했음이 분명하다.
작식인으로 기록된 여인들은 이들 왕녀나 왕비를 보좌해 제수용 음식을 만들거나 보좌하는 일을 맡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멱유래란 먹고 놀자판의 바캉스와 거리가 한참이나 멀다. 멱(覓)이나 유(遊)라는 글자에 종교적 색채가 짙게 가미되어 있음은 이제 새삼스러운 주장도 아니거니와, 어찌하여 이런 측면들은 간과한 채 ‘피크닉론’을 주창하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다.
나아가 강종훈은 원명에서 사부지에 대해 어사추가 우매로 표현된 대목을 혈연적 친남매는 아니며, 사촌과 같은 근친 관계로 보았거니와, 이것이 틀렸음은 당장 추명이 폭로한다. 즉, 추명에는 사부지와 어사추가 14년 전에 행차했음을 지몰시혜비가 회상하면서 분명히 ‘사부지 갈문왕과 여동생 어사추’(徙夫知葛文王妹於史鄒)라고 했다. 이는 우매에서 ‘우’(友)가 단순히 수식어일 뿐이요, 어사추가 사부지의 누이동생(妹)임을 밝혀주는 증거 아니고 무엇이랴. 따라서 둘은 남매가 아닌 근친이라고 주장하면서 로맨스 운운하는 주장은 입론 그 자체가 붕괴한다.
바캉스론에 의하건대 서석곡 일대는 신라시대 피서지로 신라 말기까지 그렇게 활용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것이 어불성설임은 ‘성법흥대왕’(聖法興大王)이라는 표현과 을묘(乙卯)라는 간지가 보이는 또 다른 명문에서 방증된다. 이 명문은 법흥왕 22년(535)에 작성되었음이 확실하거니와 여기에는 을묘년 8월4일(乙卯年八月四日. 음력)이라는 제작 연대가 보인다. 이 때는 초가을에 해당하므로, 그렇다면 이 명문은 단풍 구경 기념비인가.
나아가 원명이나 추명과 동시대, 혹은 그보다 앞선 시기에 작성되었음이 명백한 또 다른 명문에는 을축년 9월 중(乙丑年九月中)이라는 작성 연대가 보이거니와, 이 때는 양력 10월이니, 이 때도 신라인들은 바캉스에 다녔는가. 또 다른 ‘단풍 관광의 기념비’인가. 따라서 로맨틱 바캉스론은 그 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다.
■ 천전리 각석은 ‘화랑세기’ 증명하는 또 하나의 증거
원명·추명과 일치되는 내용 필사본에 존재
필자는 이 각석을 둘러싸고 봉착하는 두 가지 문제를 해명하고 싶다. 우선 귀신을 제사지낸 기념비가 천전리 각석이라고 했거니와, 그렇다면 왕녀 혹은 왕비까지 나서서 흠향하게 한 귀신의 실체는 도대체 무엇인가. 둘째, 어사추는 또 누구인가.
전자와 관련해 필자 또한 명확히 이런 귀신이라고 확증할 수 있는 근거가 현재로서는 없다. 다만, 서석곡이 자리한 곳이 앞으로 강이 흐르는 깊숙한 산 계곡이라는 점을 존중한다면 ‘명산대천’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신라가 명산대천 곳곳에 제사지내었음은 ‘삼국사기’ 제사지가 바로 웅변한다. 여기 수록된 제사지를 지도화하면 전국 곳곳에 산재한다. 여기에 수록된 제사는 말할 것도 없이 신라 왕실 혹은 조정이 관리한 제사일 뿐이니, 이 외에 민간 혹은 지방에서 자체적으로 주관하는 제사는 더욱 많았을 것임은 재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물론 이 제사조에 수록된 제사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를 기준으로 한다는 점에서 필자가 다룬 삼국통일 이전 법흥왕 때 사정은 아니라는 한계는 있다. 그럼에도 이러한 각지에서의 명산대천에 대한 제사가 통일 이전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서석곡에서 제사지낸 귀신이 명산대천이 아닌 다른 존재일 수 있으나 그것이 무엇이든 천전리 서석은 제의(祭儀)의 기념물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적어도 법흥왕대 이후 신라 말기까지 서석곡이 줄기차게 활용된 까닭이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명문과 함께 서석을 온통 장식한 각종 무늬 새김 또한 주목을 요한다. 강종훈을 포함한 압도적 다수는 서석 중간쯤에 평행선을 그어 상단부는 청동기시대, 그 하단부는 신라시대 흔적이라고 하나,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조각 새김법에 주목한 많은 이가 상단부는 쪼고 두드려 점각(點刻)한 소위 조탁법(彫啄法, pecking style)을 쓴 데 반해 하단부(下段部)는 예리한 칼날 등을 이용한 선각문(線刻紋)이라고 해서 이런 주장을 한다. 그러나 묻거니와, 신라시대에는 선각문을 하고 그 이전 청동기시대에는 조탁법을 썼다는 근거는 하늘에 있는가, 땅에 있는가.
문양 중에는 여성의 성기를 표현한 것임이 확실한 것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나아가 음과 양이 조화되는 모습을 짙게 풍긴다. 특히 기하학 문양은 도교에서 귀신을 불러내고 물리치는 데 지금도 널리 활용되는 부적(符籍)을 형상화한 것임이 틀림없다. 이처럼 완연하게 음양 사상을 모티프로 하는 고고학적 흔적은 신라에서는 적석목곽분이 등장하는 4세기 무렵 이후가 되어야만 가능하다. 요컨대 명문은 물론이고 문양 또한 신라시대 유산이다.
마지막으로 어사추는 분명 갈문왕 사부지의 동생이라고 했다. 사부지는 입종이고, 입종은 법흥의 동생이며, 법흥은 지증왕과 연제부인 사이에 난 아들이니, 이로써 보건대 어사추 또한 지증왕과 연제부인 사이에 난 딸이요, 공주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지증왕에게 딸이 있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오직 하나를 제외하고는 없다. 그 오직 하나가 ‘화랑세기’ 필사본이다.
‘화랑세기’ 필사본에 따르면 지증과 연제 사이에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보이는 법흥(=모즉지, 牟卽知)과 입종(=사부지)의 두 아들 외에 조선시대 경주 김씨 족보에서 보이는 진종(眞宗)이라는 또 다른 아들과 함께 보현(普賢)이라는 딸이 있었음이 확인된다. 그런데 1965년에 사망한 박창화라는 인물이 필사했다는 ‘화랑세기’ 필사본에는 천전리 서석 원명 및 추명과 완전히 일치하는 이런 내용이 들어있다.
물론 각석에서는 어사추라고 했고, 필사본에는 보현(普賢)이라고 했으니 두 인물이 같다는 증거가 없다고 반박할 수 있다. 그렇지만 법흥왕을 모즉지 혹은 원종이라고 하고, 입종을 사부지라고 하며, 진흥왕을 심맥부 혹은 삼맥부라고 했다는 데서 증명되듯 법흥∼진흥왕 무렵 신라인들이 순 한문 이름과 함께 순 신라식 이름을 함께 갖고 있다는 점에서 보현을 어사추라고 했다고 해서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화랑세기’가 남당 박창화라는 인물이 꾸며낸 역사소설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소위 가짜론자들에게 묻는다. 1965년에 사망한 박창화가 1970년에야 발견된 천전리 서석을 보고 ‘화랑세기’를 조작해 냈다고 주장할 것인가. 그 표기가 어사추든 보현이든, 박창화에게 무슨 앞날을 내다보는 신통력이 있어 사후에 천전리 각석이 출현할 줄 알고 법흥왕과 입종에게 여동생이 있다는 사실을 만들어 낸다는 말인가. 혹자는 딸을 만들어 내기 쉽다고 할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지증왕의 딸이기는 하되 그 딸이 법흥왕과 입종의 동생이라는 것은 무슨 신통력으로 만들어 낸다는 말인가.
선언한다. 필사본 ‘화랑세기’ 논쟁은 어사추로써 종결되었음을.
김태식 연합뉴스 문화부 기자
첫댓글 김태식 정말 대단하다.
어떻게 밤에 간 걸로 제사지내기 위해서 갔다는 걸 생각할 수 있는지?
나도 지금까지 당연히 사부지갈문왕과 어사추안랑의 로맨스로만 생각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