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 아닌 희망이 되는 나라
-이학영 작품론
박철영
어느 때부턴가 우리가 사는 시대에 주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소중한 시절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세월은 화살처럼 빠르게 우리 곁을 스치고 가버렸다. 한갓 과녁도 되지 못한 삶을 탓할 바도 아니다. 참 무섭게 변해가는 세상이라고 말해야 한다. 주범은 속도다. 느릿하게 가야 할 곳에 직선도로가 생기고 더 빨리 가야 된다고 ktx가 들어간다. 몇 시간씩 걸려서야 들어갈 수 있는 섬을 이삼십 분이면 바다를 가로질러 건너간다. 속도 속으로 소중한 풍경들이 사라져 간다. 몇 백 년 된 마을을 지탱해 준 당산목도 순식간에 뽑혀지고 마는 세상에 살고 있다. 아껴 보존해야 할 우리의 소중한 것들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을뿐더러 기존의 것들은 신상의 개념에서 하찮고 무용한 것으로 치부된다. 그래서 우리의 옛것은 불필요한 것으로 응당 사라져야 한다. 산골이나 어중간한 시골에서 도회지로 한번 들어가면 다시 돌아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미 옛것 같은 산골이나 시골은 대부분 사라지고 없다. 이대로 가면 얼마 남지 않은 깡촌도 기억에서 사라질 테고 순수를 상징하던 시골(촌) 사람도 없어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단지 존재한다면 깡촌과 촌놈으로 몇 자의 서술된 문장이 국어사전에서 더는 필요 없는 말로 남을 것이다. 오랫동안 우리가 살아왔던 환경은 편리 위주로 빠르게 재편되고 고유한 인습과 풍경들이 지워지고 있다. 몇 십 년이 아니고 몇 년 후면 토종 같은 시골과 그 안에서 알콩달콩 살아오던 사람들은 씨가 마를 거라 말하면 너무 앞서가는 것일까?
그나마 다행이라면, 요즘 세태와 달리 변하지 않을 딱 한 사람을 꼽으라면 필자는 알고 있다. "소나무 껍질", "띠 뿌리", "기근"을 이야기해도 "가난"이 꼭 고통만은 아니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우리 사회의 잃어버린 희망을 다시 찾아내야 한다는 사람이기에 그렇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전형적인 산촌에 사는 수더분한 사람처럼, 지금도 그 심성은 여전할 것이다. 순정한 눈빛으로 삽 한 자루 들고 논두렁을 걸으면 천상 농사꾼 같을 그 모습을 기억한다. 언제나 따뜻한 마음으로 우리 곁을 함께 했던 이학영 시인이 그랬다. 이 세상의 불우를 탓하면서도 희망을 놓지 않는 온정한 마음이 담긴 시편을 살피고자 한다.
꽃 핀다 꽃 핀다 하더니
금목서
꽃 핀다 꽃 핀다
하더니
금목서
꽃 진다 꽃 진다
하네
지는 꽃이라도
보랴 하고
찾아갔더니
길 위엔 벌써 가을
금빛 햇살뿐
꽃 보러 오라던 이
자취도 없고
금목서
꽃 진 자리
천리향만 가득하네
-<꽃 핀다 꽃 핀다 하더니> 전문 (2010, 《사람의 깊이》13호)
몸 서리 치도록 고달팠던 금목서의 시간을 잘도 견뎌냈다. 그만의 노고가 깊어진 가을의 서정을 맞기까지는 쉽지 않은 난관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때맞춰 살만큼 살아서일까 금목서가 쌀쌀한 밤의 찬 기운을 눈치챈 듯하다. 며칠 전과 달리 오종종한 별무리를 뿌린 듯 향기를 퍼뜨리고 있다. 적당한 발치에서 봐야 매혹 품은 향기를 제대로 맡을 수 있는 금목서다. 외래종이면서도 토종 같은 유혹을 감췄지만, 눈에 띄는 드문 향 내음에 사람들이 다가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유별한 향기까지 품어 사람을 불러들이고 있는 저 작은 그 안에서 천리 코끝을 유혹하는 매혹을 보며 사람도 그와 같아야 한다는 부러움을 시샘해 본다. 세상을 살며 친근한 마음으로 온정한 눈빛을 나눈 순정 같은 세상을 꿈꾸는 금목서다. 간혹 그 중심에 있는 사람들의 면면을 상상해 본 때가 있었다. 그러고 싶어 한 마음과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은 무엇 때문일까에 대하여 한동안 풀 수 없는 숙제처럼 사람의 심리 속 관계에 골몰한 적이 있었다.
필자의 눈에는 이학영 시인의 세계관이 그럴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 마음을 잃지 않으려고 무던히 시를 쓰고 세상을 살폈을 것이다. 어떤 이유로도 변할 수 없는 세계의 가치를 담은 한 편의 시를 위한 고통의 세월은 길었다. 마음의 겹을 감싼 꺼풀을 한 겹 씩 벗겨내는 느낌으로 다가온 시 <꽃 핀다 꽃 핀다 하더니>는 필자에게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아득히 잊고 살던 본성으로 회귀해 가는 마음을 잇댄 담벼락과 집들이 촘촘했던 시골이었다. 그 마을 안 깊숙이 이어진 고샅 길을 한없이 걸어 들어간 마음들이 오롯하게 되살아났다. 이학영 시인의 시를 읽던 당시가 2010년이니 세월이 많이도 흘러버렸다. 사실 필자가 평론가의 길로 들어선 단초가 이학영 시인의 시 <꽃 핀다 꽃 핀다 하더니>를 읽고 다음 카페『사람의 깊이』에 몇 자 평을 올린 것이 계기였다. 그 이후 한참의 세월이 더 지나 2016년 봄 평론에 등단을 하였으니 오랜 세월을 돌아온 느낌이다.
당시 필자가 썼던 글을 옮겨보았다 “인생의 생과 소멸의 중간지대에 초목이 있다. 우리는 생을 살아가면서 그 초목을 삶의 변두리쯤으로 놓아두다가 한갓지거나 생의 고통이 극에 달했을 때 비로소 초목이 우리에게 주는 깊은 의미를 알아낼 수 있다. 인간의 마음으로만 보았던 시절에 느끼지 못했던 숭고한 자연의 형상미에 대한 아름다움이 우리의 삶의 한 부분이란 것을 깨달았다. 화자는 "꽃 핀다 꽃 핀다 하더니" 에서 금목서를 통한 세월의 부침 속에서 더 애틋해진 안타까움을 전하고 있다. 흔적 없이 사라진 꽃의 소멸 뒤에도 사라지지 않은 향기를 통해 인간의 삶이 비로소 환해질 수 있고 금목서의 천리를 감싼 향기처럼 살아야 함을 담담히 시인은 말하고 있다. 또한 그렇게 살아온 이학영 시인의 삶으로 발현한 시가 소중하게 가슴으로 다가오는 것이다.”라고 글로 옮겨 놓았었다.
현재도 그런 마음의 감동에 변함이 없다. 결국 이 시가 말하고자 한 금목서의 개화와 낙화는 인간의 삶으로 대비되는 인생무상을 부침이라는 상징성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화자는 누구나 생의 막다른 즈음에 맞닥뜨릴 때에서야 무상감을 깨닫게 된다. 그 막심한 끝은 상상할 수 없는 허무로 긴 삶의 시간을 돌아 나온 길처럼 아득히 멀어진 생의 마지막 진실을 알게 되지만, 너무 늦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진리일 뿐이다. 그런 허무감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변화와도 맞물려 있어 속도의 피로를 견디는 것마저 시차와 맞물려 배가된 현상이라고 말을 해보자. 누구나 빠르게 변하는 세상의 흐름을 쫓아가려 하지만, 그렇지 못한 현실을 말해준다. 금목서의 피고 지는 동안이 한 계절도 못된 잠깐이지만, 자연스럽게 삶의 시간으로 환기되고 있다. 그 말에는 꽃의 시간만이 아니라 인간의 소중한 만남과 이별의 생래적인 전체를 아우르며 못다 한 사람의 도리를 돌아보게 한다. 꽃이나 사람이나 향기는 그 생의 시간만큼을 흔적으로 남긴다. 그 자취가 향기가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그런 것을 생각한다면 삶의 시간은 매사에 가볍지 않은 것이다.
바위 아래 희끗 희끗 잔설이 남은 뒷들로 나가
진종일 매화나무 잔가지들을 쳐주고 내려오는데
그새 둥지에 들었던지 산비둘기 몇 마리
발소리에 놀라 후드득 날아갑니다
고추밭 한가운데 마른 고춧대 사이에
황토 빛 포장을 둘러쓰고 누워있던 경운기 위로
찢어진 비닐조각들도 까마귀 떼처럼
덩달아 풀풀 날아오릅니다
아무리 철이 이르기로서니
썩은 새끼줄이라도 두르고
어정거리는 사람 하나 없습니다
한 번도 와보지 않았던
유령들의 세상에나 온 것만 같습니다
산줄기가 한 눈에 바라보이는
작은 묏등에 쭈그려 앉아
건너 산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려봅니다
거기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아버지도 누워 있는데
도대체 알 바 없다는 듯 말이 없습니다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습니다
예전에 마늘밭이었던지
왕겨를 덮어주지 않았는데도
언 땅을 뚫고 파란 촉들이 돋아나고 있습니다.
돌아보지 않아도 봄은 오는데
겨루어 묻힌 씨앗들을 가꾸어 줄
아수운 사람의 불빛은 어느 고샅에도 없습니다
“인자 눈이 그만 오실란갑다. 달이 붉은 것이······”
금방 내려앉을 듯한 마을 한가운데 혼자 불을 켜는
여든 다섯 내 어머니 중얼거림에
후르륵 미역국을 떠 넣다가
치밀어 오르는 슬픔에 상을 물리고
마당 귀에 나서니
음력 이월 보름달이 앞산에 올라옵니다
미친년 배만 부른다더니
속절없이 붉기만한 달이 떠오릅니다
-<산골 일기> 전문, (2010, 《사람의 깊이》13호)
사방을 둘러봐도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풍경이 곧 고향인 듯하다. 유년의 마음을 아우르던 온기는 온 데 간데없고 인적이 끊긴 산천은 삭막함만 가득하다. 산 밭을 들러보며 인기척을 기대했지만, 적막한 풍경만 더 을씨년스러웠다. “바위 아래 희끗 희끗 잔설이 남은 뒷들로 나가/ 진종일 매화나무 잔가지들을 쳐주고 내려오는데/ 그새 둥지에 들었던지 산비둘기 몇 마리/ 발소리에 놀라 후드득 날아갑니다”라며 말 붙이는 덧말이 민망하다. 사는 것이 힘들어 하나 둘 떠나고 남은 산촌을 찾아들었지만, 겨울 한기보다 더한 삭막함이 온몸을 시리게 한다. 예전 같으면 저 산 밭 길을 오르다 몇몇의 동네 반가운 얼굴들이 있었을 텐데 이제 그럴 가망은 사라져 버렸다. 긴 겨울의 고래 구들장을 데우려면 지천으로 널린 나뭇잎이라도 긁어 불을 지펴야 할 텐데 그마저도 녹록지 않은 현실이다. 남은 사람이라고는 허리 굽어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만 남아 산촌을 지키느라 아예 거동마저 삼가고 있다. “아무리 철이 이르기로서니/ 썩은 새끼줄이라도 두르고/ 어정거리는 사람 하나 없”는 밭고랑의 고춧대며 녹슨 채 세워둔 경운기도 흉물스럽고 덮어놓은 비닐이 심란하게 바람을 타고 날아다니는 풍경이 더해져 마치 귀신 든 폐허 같다. 서글픈 마음이 더해져 그만 산 밭 가에 쭈그리고 앉아 먼 산을 멍하니 바라본다. 화자의 눈에 든 저 산자락에 대대로 모셔온 조상님의 봉분 뵙기마저 민망하다. 아무리 기다려봐도 사람 기척 대신 그 빈 틈을 메우려는 듯 바람에 날린 눈만 속절없이 내리고 있다. “예전에 마늘밭이었던지/ 왕겨를 덮어주지 않았는데도/ 언 땅을 뚫고 파란 촉들이 돋아나고 있습니다./ 돌아보지 않아도 봄은 오는데/ 겨루어 묻힌 씨앗들을 가꾸어 줄/ 아수운 사람의 불빛은 어느 고샅에도 없”다는 산촌의 쇠락에 암담하기만 하다. 아직도 그 안에서 힘든 생을 감당하며 묵묵히 터전을 지키고 있는 화자의 “여든 다섯 내 어머니 중얼거림에/ 후르륵 미역국을 떠 넣다가/ 치밀어 오르는 슬픔에 상을 물리고” 만다. 가슴을 울리는 시의 근원은 추억의 상상 속 재현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심금으로 발현한 온정밴 정감이란 것을 상기해 준다. 단순히 풍경의 묘사가 아닌 그 안에 내재된 오롯한 인정을 실재한 현상처럼 끌어내 공감으로 전언하는 데 있음을 말해준다. 그 많고 많은 세상에서 모두 외면하는 산촌의 핏줄이 되어 살아온 세월이 한탄스럽다. 그토록 긴 시간을 살며 그 생의 기운이 어디까지인가를 묻는 것 마저 민망해진 현실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담담히 분별하고 있다.
나는 지금 어디쯤 지나고 있는 것일까
먼 어느 별에서 수 억 광년을
반딧불처럼 하염없이 날아와
유프라테스 강 가 갈대숲 언저리거나
바이칼 호수 검은 물 가에 설풋 머물렀다가
수초에 얹혀
빙하에 얹혀
연어의 등지느러미에 얹혀
푸른 한 점 씨앗으로
드넓은 대양을 떠돌다가
눈 덮힌 남녘땅 회문산 장군봉 아래
솔가지 연기 가득한 움막 속에
가마솥에 한 줌 하얀 쌀밥처럼 태어나
가난하지만 치마폭 다수었던
남녘의 서러운 세월을 견디면서
한 세월 결기부리며 지내왔더라만
여전히 시절은 까마귀 울음소리처럼 시끄럽고
애잔한 목숨들은 소리도 없이 스러지는구나
밤하늘에 별들이 하도 많아서
가을날 붉게 떨어져 천지를 덮는 낙엽같으니
한 때 아름답던 소중한 인연들은 다들 어디에 있는가
나는 또 오늘밤 어느 별 어느 세상으로 흘러가서 눈물 한방울 흘리며 다시 만나볼 수 있을까
언제라야 끝없는 그리움의 여정을 마칠 수 있을까
어디까지 또 날라가야 더는 연연하지 않고
생각도 기다림도 없는 영겁의 시간
시작도 끝도 없는 정적의 시간으로 스러져 사라질 수 있을까
-<어디메쯤 나는> 전문, (2022, 《사람의 깊이》25호)
진공관을 비집고 나온 공명음은 파열되어 불안전한 파장을 유발한다. 본래의 청음 같던 진실은 사라지고 그저 소음처럼 반향 하는 메아리로 귀마저 멍해져 버렸다. 이제 믿을 것이라고는 온전한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 말고는 없다. 물신주의에 빠져버린 세상을 벗어나려면 ‘나’의 진정한 근원은 어디에서부터 출발한 것인가를 다시 학습해 보는 수밖에 없다. “나는 또 오늘밤 어느 별 어느 세상으로 흘러가서 눈물 한방울 흘리며 다시 만나볼 수 있을까/ 언제라야 끝없는 그리움의 여정을 마칠 수 있을까/ 어디까지 또 날라가야 더는 연연하지 않고/ 생각도 기다림도 없는 영겁의 시간/ 시작도 끝도 없는 정적의 시간으로 스러져 사라질 수 있을까”를 묻고 있다. 그러나 그 질문에 명쾌하게 답해줄 이 세상에는 아무도 없다. 화자의 고향 순창 회문산의 태초 발원처럼 시작한 생은 그냥 우연한 인연으로 태어났고 그것이 빌미가 되어 현재에 이른 것이다. 그 태생적 인연은 길고도 질겨서 수억 광년의 시간을 건너와 여기에 당도한 것이라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그런 고행적인 파동 구간마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갖은 고통과 위기를 넘겨 여기까지 온 것의 이유가 있다. 그토록 소중한 기회를 얻어 태어난 화자가 “솔가지 연기 가득한 움막 속에/ 가마솥에 한 줌 하얀 쌀밥처럼 태어나/ 가난하지만 치마폭 다수었던/ 남녘의 서러운 세월을 견디면서/ 한 세월 결기부리며 지내왔더라만”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의 자괴감에 빠져든다. 한때지만, 오히려 치열하게 몸을 던져 세상과 맞섰던 과거보다 현실은 더 난감해진 상황으로 치닫고 말았다. 다시 태초의 현상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부쩍 잦아졌다.
순간도 멈추지 않도록
바람아 나를 흔들어다오
잔등에 올라선 노루처럼
멈춰서 뒤돌아보지 않도록
날아오는 시간의 화살에 쏘여
지옥 같은 추억의 늪으로
떨어져
고통의 가시지옥에서
심장이 할퀴어 나딩굴지 않도록
바람아 뒤흔들어다오
순간도 제 정신으로
멀쩡하게 서있지 못하도록
-<바람아> 전문, (2022, 《사람의 깊이》25호)
잘못되어 버린 세상에 눈 감고 살아가려면 온전한 정신으로는 버틸 수가 없다며 수단 같은 방편으로 정신적인 혼란 상태의 지속을 갈망한다. 잠깐이 아니라 더는 이 불공정이 판치고 있는 불합리한 세상에 대하여 사리를 분별하지 않도록 자학하려 한다. 자신 속에 존재하는 또 다른 자신(타자)에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없었다. 기껏해야 부당함을 탓하지 못한 자신에게 있다며 모든 것에 대한 타당한 대가를 치르겠다는 통렬한 반성이다. 지금까지 진실 되게 세상을 바로 보려 한 것에 대한 모든 행위들을 삭제해버리고 싶은 충동에 빠진 것이다. 아예 지금껏 해왔던 생각들을 더는 지속할 수 없도록 정신적인 혼란을 야기해 달라는 주문을 외고 있다. 스스로 신명을 받아 자신이 생각했던 모든 것을 지워버리고 정상적이지 못한 세상에 대하여도 전혀 불편해하지 않으면서 살게 해 달라는 신탁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 그만큼 화자가 바라본 세상은 모든 것이 비정상으로 왜곡 환원되어 버린 현실을 두고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이다. 그토록 염원하던 세상은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누군가는 또 그 희망을 노래하며 변화를 위해 노력할 것이다. 마치 유행가 가사처럼 한참의 세월이 지난 뒤에서야 진가를 발휘하듯 화자가 바랐던 세상이 왔다며 환호할 그날이 그리 멀지 않을지도 모른다.
가끔 졸다가
내려야 할 곳에 제대로 내리지 못하고
지나쳐버린 적이 있었다
온 몸에 땀이 돋고 후회로 막막했던 기억들
한번은 수습할 힘도 없어
산줄기를 들락거리며 달리는 열차 안에서
일을 마친 세탁기처럼
차창에 머리 대며 실려가고 있는데
문득 어두운 터널 끝으로
옥양목같은 하늘이 밀려 들어오고
그 아래 연분홍 치마를 널어놓은 듯
화사한 복숭아 밭이 이어지고 있었다
꿈인듯 실눈 뜨고 바라보다가
비로소 한순간 깨달았네
아무리 잘 못 들어선 길이라도
때론 환하고 아름다운 순간도 있다는 것을
-<잘못 들어선 길에도> 전문, (2015, 《사람의 깊이》18호)
색 바랜 검정 코트를 입고 서울에서 늦게 도착하는 그맘때 어둠보다 환한 모습으로 순천작가회의 연말 모임이 있는 연향동의 ‘창 넓은 집’에서 보았던 이학영 형을 기억한다. 서울서 내려오느라 피로한 안색이 좋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한사코 웃음만은 넉넉했다. 절절하게 다가온 시처럼 삶도 너무 흡사했다. 인생살이란 게 일상의 연속으로 벌어진 일이기에 힘들고 잘못된 일들이 한두 번 만 있었겠는가? 그렇지만 어지간해선 내색하지 않고 참아내는 삶이었을 것이다. 시인은 어딘가를 가다가 그만 내려야 할 기차역을 "지나쳐버"린 일을 떠올리고 있다. 황망한 경우라서 당혹스러운 상황은 상상이 되고도 남는다. 그렇지만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인다. 산골의 삶이 그렇듯이 서두르거나 가로질러 갈 수 없는 태생으로 물려받은 성정부터가 그래서일까? 모든 것이 불편하지만 그렇다고 그 삶을 저버릴 수 없듯이 현실로 그렇다는 것을 묵묵히 터득한 것이다. 그런 환경에서 사람의 도리란 것은 어떤 경우라도 꼭 지켜야 할 최후의 보루였다. 우리 사회가 내로남불처럼 불공정과 부도덕한 것에 둔감해진 사회의식도 화자에겐 몹시 불편했을 것이다. 잘못되어 가는 현실을 용인하듯 되어버린 사회 전반에 대한 고뇌가 깊어졌을 것이다. 과연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자유와 민주주의란 어떻게 구현되어야 마땅한가를 고뇌해야 했다. 그 누구도 부당함을 말하지 않는 현실에서 그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저버릴 수 없다. 세상이 강요한 대로 살지 않고 법으로 교묘하게 가려진 진실을 말뿐이 아니라 행동으로 당당하게 실행하고자 한다. 남들이 외면하는 그 길이 자신의 삶이 되어버렸다. 누구나 인생을 살며 절박한 경우를 한 두 번씩은 겪게 된다. 그런 상황을 대처하는 모습에서 그 사람의 됨됨이를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물론 기차를 이용하다 정거장 몇 군데 지나쳤다고 인생이 거덜 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황당한 실수에서 빠르게 평상심을 되찾는 것은 쉽지 않다. 포기의 대가로 터널을 빠져나오자마자 "옥양목같은 하늘"과 순창의 낯익은 "복숭아 밭"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고향의 어머니가 그토록 아껴 입으셨던 곱디고운 옥양목으로 지은 한복이 생각난 것이다. 화자는 잘못된 길을 들어 일정을 포기했지만 "옥양목" 빛깔의 하늘을 보며 어머니를 떠올렸고 먹먹했던 가슴이 이내 환해졌으니 오히려 얻은 것이 많다. 피로에 지친 순간을 지혜롭게 극복하는 마음으로 일순 놓친 기차를 깡그리 지워낸다. 설령 "잘못 들어선 길"로 들어섰다 해도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깨우치게 된다. 모든 것에서 긍정은 화자의 올곧은 삶이 되었고 오늘도 어디에선가 고뇌에 찬 마음을 실천할 것이다. 그런 행동은 곧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토록 희망하던 삶의 방향이어야 한다. 그런 세상을 온전히 누릴 수 있어야 한다며 고향의 어머니를 떠올리고 있다. 그토록 소망한 세상을 어머니는 누리지 못했음을 말하는 것으로 그렇게 된 근본적인 이유를 질문하고 있다.
며칠 전 윤구병 선생이 오셔서 이야기를 들었다
선생님 아버지는 아들 아홉을 두었는데
사람을 낳으면 서울로 보내라는 말을 따라
일병이부터 구병이까지 아들 아홉을 데리고
논 팔고 집 팔아 서울로 이사를 했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육이오가 터져
아들 셋은 국방군에 아들 셋은 인민군에 나가 죽고
혼비백산 다시 시골로 내려오셨다는데
전쟁 끝에는 꼭 따라붙는게 기근이라
온 산천 소나무 껍질, 띠 뿌리로 연명하는데
배만 남산처럼 불러오며 황달이 오더란다.
질긴 나무껍질 풀뿌리만 씹어 삼키니
마른 수제비처럼 엉킨 똥들이 뱃속에 가득하여
누렇게 똥독이 올라 식구들이 다 죽게 생겼드란다
살기 위해서 마른 솔가지로 똥구멍을 파낼 수 밖에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하다" 란 말이
그제사 은유도 환유도 아닌 직설임을 알았드란다
가난이란 전쟁처럼 피똥 싸는 일임을 알았드란다.
-<가난 이야기> 전문, (2015, 《사람의 깊이》18호)
몇 년 전에 상영된 최종병기 활이라는 영화가 떠오른다. 장가가는 날이 하필이면 청의 기병들이 들이닥쳐 신랑과 신부가 꼼짝없이 포로가 되어 잘 나가던 한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듯이, 서울로 이사를 오자마자 전쟁이 터져 "아들 셋은 국방군에 또 아들셋은 인민군"으로 나가 죽었다는 기막힌 집안의 이야기다. 가슴 아픈 근 현대사를 관통하는 6.25 전쟁의 아픔은 오랜 시간이 흘러 죄다 치유된 것 같지만 당해 본 사람들한테는 치부가 되어 가슴으로 전해지고 있다. 6.25 전쟁도 그렇지만 당시 가난은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가 될 정도의 절박한 삶의 화두였다. 여기에서 흥미 있는 것은 시의 형식이다. 담담하면서도 지루하지 않게 읽어갈 수 있는 구체적 구술 방식을 보여준다. 살펴보면 "들었다"에서 시작해 "오더란다", "생겼드란다"의 의미 전달체계가 독특함을 알 수 있다. 후반부에서 윤구병 선생이 직접 구술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렇기에 더 실감 나게 읽고 느낄 수 있도록 한 배려다. 누구나 가난은 죄업처럼 느껴서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려고 몸부림친다. 하지만 어린아이들 입장에서는 자기 의지가 전혀 반영될 수가 없다. 어쩔 수 없이 부모의 의지에 따를 수밖에 없어 서울로 이사를 왔을 것이다. 여기까지는 부모의 의지이다. 가장의 판단이 잘못되었다 해도 잘 되기를 위한 결과라서 누구를 원망할 수가 없다. 그러나 전쟁이 터지고부터 시작된 긴 고통이 한 가정을 덮치기 시작한다. 그 원인은 개인의 잘못이 아닌 국가적 환경에서 비롯되었지만, 고스란히 힘없는 국민에게 전가되고 만다.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예나 지금이나 국가 권력의 변방에 존재하는 힘없는 백성의 몫이었음은 당연한 것이다. 그 가난의 고통은 너무도 커 어떠한 은유나 환유로도 대체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렇기에 전쟁과 피똥은 상관관계로 설정되어서는 더더욱 안될 역사 속의 처절한 현실이었다. 해방 이후 극심한 정치 사회의 혼란과 더불어 사상 이데올로기로 번진 민족상잔의 아픔은 더 극심한 가난을 악화시키고 말았다.
천둥 번개 내리치는 태풍 같은 시절을 견디며
동구 밖 저 느티나무 하늘 받치고 서 있는 것은
지켜야 할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수많은 세월
폭포처럼 짓누르는 지구의 중력을 받치며
앉아버려, 주저 앉아버려
속삭이는 바람의 유혹을 견디며
저 느티나무, 수많은 세월
검은 가지 가지 손 내밀어
하늘 떠 받들고 서있는 것은
찬바람 어둠 속에서도
반짝이며 꿈을 꾸는 별들이 있기 때문이리라
저 나무, 저렇게 당당하게 서기까지
얼마나 많은 유혹과 고통의 밤을
스러지지 않는 꿈으로 버텨왔으리
-<저 느티나무> 전문, (2015, 《사람의 깊이》18호)
"앉아버려, 주저앉아버려" 누군가에게 바람이 말을 건다. 분명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은 없고 커다란 나무만 있다. 이런 관심법으로 터득한 것은 시골에서 부모님이 한 것을 보았음이 틀림없다. 집 뒤의 수령이 꽤 된 느티나무에다 소원을 빌던 어머니의 모습을 나도 보았으니 가능한 일이라고 본다. 나무는 효험을 비는 말을 듣고 있을뿐 어떤 내색도 없다. 오감으로 전해온 느티나무의 기운에서 나이테 속 강인한 의지를 읽어내고 전달하는 역할까지가 화자의 몫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 관계된 모든 대상에 그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려 든다. 우리가 하찮게 여기는 "저 느티나무"도 "당당히 서"고 싶은 직립의 꿈을 이루기 위해 산다고 생각한다. 하물며 인간은 신이 부여해준 직립의 본성을 잃지 않기 위해 얼마나 피나는 자기반성이 필요한가를 반문한다. ‘천둥’, ‘번개’, ‘중력’, ‘유혹’, ‘고통’에 대한 공포심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찬바람 어둠 속에서도/ 반짝이며 꿈을 꾸는 별들이 있기 때문"이라며 그것을 이루기 위한 희망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시인이 바라보고 있는 대상(세계)은 눈에 보이는 것만은 아니다. 이 땅의 어머니들이 그렇게 살아왔기에 우리들이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그 정신을 이어받아 지금껏 살아온 서사를 살펴보면 마치 화자의 자서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사물성으로 지시된 "저 느티나무"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느티나무가 아니다. 긴 세월을 꼿꼿하게 견뎌온 우리의 삶과 동일시한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다. 그런데 묘하게 반 사회적인 행동을 하고 산다. 개인의 이익을 극대화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럴때 대속할 수 있는 특정한 사람이 필요하고 고통 속에 그들이 희생된다. 그 고통의 몫은 크고 깊다. 상처투성이인 "저 느티나무"를 바라보다 고통에 겨웠던 과거를 떠올린 것이다. 지금의 모습으로 건재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늘"을 떠받드는 지극함이 있어 가능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한 마음이 화자가 지향하는 따순 사회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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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박철영평론가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박철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