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류무사 251
제11권
이효가 가까스로 눈을 뜬 건 혼절한 후 세 시간 뒤였다.
“국주님!”
“괜찮으십니까!”
벼락같이 달려드는 집법당의 철무웅과 집사에게 희미하게 웃어 보인 그가 억지로 상체를 일으키고 만
류하는 이들에게 손짓을 했다.
“청해복룡표국주 이효가 그리 약골은 아닐세. 이깟 혼절 한 번으로 그런 눈을 뜰 것까지야 없지 않
나?”
“피를 많이 흘리셨습니다. 그깟 혼절이라니요!”
“좀 더 보중하십시오!”
“허허... 괜찮다니까.”
작은 창 사이로 옅은 노을이 번지고 있었다. 벌써 해가 떨어지나 보다.
창가에 서서 저녁 햇살처럼 아련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아내,
민경추를 애써 외면하고 이효가 괜히 호탕한 목소리로 딴소리를 늘어 놓았다.
약해질 수눈 없다, 아직.
“그러고 보니 점심도 먹지 못했군. 오늘은 생선찜을 준비한다고 들었는데 맛은 괜찮았나?”
그의 농에 철무웅이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거짓말 말게. 자네도 점심을 거른 듯한데 무슨 맛을 안단 말인가?”
“냄새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하하하!”
철담같은 집법당주의 궁벽한 변명에 이효가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아직도 가슴으로 은은한 통증이 전
달되었지만 그는 웃는 낯으로 참아냈다.
“그나저나 연회를 베풀기로 한 약속을 여겨 버려서 어쩐다... 그냥 나 없이도 진행하지 그랬나?”
“국주님이 누워 계신 와중에 표사들의 입으로 잘도 술이 들어가겠습니다!”
“고작해야 식구 하나 빠진 것뿐인데 뭘 그러나? 그냥 표행 나간 셈치면 되지.”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십시오!”
버럭버럭 고함을 지르는 철무웅의 기세에 짐짓 이효가 귀를 막았다. 평소에는 철탑 같은 사내건만 오
늘따라 왜 이리 칭얼거리는지.
“알았네, 내 충분히 알아들었으니 그만 소리 지르게. 귀청 떨어지겠어!”
“죄, 죄송합니다! 속하가 국주님의 몸 상태도 고려치 않고 그만 망발을!”
“됐네, 됐고......”
숨을 한 번 고른 그가 짧은 생각을 끝내고 철무웅에게 모든 사람을 물리치라고 명했다. 민경추까지도.
“십삼조에 가서 고담과 적괴 표사를 오라 이르게.”
“적괴와 고담 대협 말씀입니까?”
“어서!”
국주의 다급한 재촉에 더 이상 토를 달지 않고 철무웅이 급히 방을 빠져나가자 천장을 올려다보던 이
효가 가슴께로 손을 가져갔다.
지독한 통증, 피륙으로 이루어진 사람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만큼 처절한 아픔이었지만 아쉬운 얼굴로
방을 나선 아내의 눈망울을 그려내면서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언젠가 이보다 더한 통증을 온몸으로 감내해야 했던 기억이 있었기에, 그 고통은 치유할 방법조차 없
던 마음의 병이었기에 부서지는 가슴을 안고 뜬눈으로 하얗게밤을 태우곤 했었다. 사랑하는이를 곁에
두고도 힘에 밀려 아무것도 하지 못할 때의 서러움. 고통을 함께할 단 한 사람의 친구도, 동료도 없었
던 시절.
`그래, 지금은 희망과 든든한 동료들이 있지 않은가.`
든든한 동료의 초조한 음성이 들려왔다.
“국주님, 고담입니다.”
“어서 들어오시오.”
문이 열리고 고담과 적괴가 들어왔다. 그들 역시 평소의 얼굴이 아니었다. 늘 웃음을 잃지 않았던 고
담의 수심에 가득 찬 표정을 보고 이효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뭐요, 고 대협? 마치 산송장이라도 대하는 얼굴이 아니오?”
“차라리 송장을 대하는 편이 낫겠습니다그려.”
사람하곤, 하고 피식 고개를 돌렸지만 모든 일에 무심한 산동의 멧돼지의 울음소리가 마음까지 와 닿
았기에 가슴 한구석이 훈훈해졌다.
“역시 당하셨던 겁니까?”
표정에 거의 변화가 없는 적괴였지만 두 주먹을 가끔 말아 쥐었다펴기를 반복하는 모습에서 그의 분
노가 어디까지 이르러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허탈하게 고개를 끄떡이는 이효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창밖을 보던 적괴가 오른손을 슬쩍 올렸다.
“누굽니까?”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닐세.”
“누군지는 알아야겠습니다.”
전에 없이 빛나는 적괴의 눈빛. 고담은 이 염세적인 사내의 타오르는 가슴을 이해할 수 있었다.
실질적으로 적괴를 이해하는 인물은 전 무림을 통틀어 단 두 사람만이 존재했었다. 적괴의 사부와 이
효, 이제 사부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니 남은 건 오로지 청해복룡표국주 이효 하나뿐이다.
“알 것 없다니까......”
“말씀해 주십시오!”
그들의 인연이 처음부터 이리 끈끈했던 건 아니다. 이효는 그저 실회조라는 특이한 조직을 가진 군소
표국의 국주였고 적괴는 실회조로 들어온 누군가를 따라 표국에 들어왔을 뿐이었다.
적괴의 관심은 오로지 당소소와 표물 회수가 전부였다. 당소소는 그의 이상이었고, 표물 회수는 그의
존재 확인이었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하북으로 회수행를 나갔던 적괴를 눈여겨본 팽가의 인물들이 위세도 당당하게 청해복
룡표국에 들이닥쳤다.
불문곡직하고 적괴를 내놓으라는 것이었는데 이유인즉슨 그가 사용하는 무공이 팽가의 삼대절학 가운
데 도난당한 벽력장법과 유사하다는 것이었다.
이효로서는 막막하기그지없는 일이었으나 적괴의 비틀린 미소를 보고 심증을 굳혔다.
혼자 나가 싸우려는 적괴를 말리면서 세상을 모조리 씹어 먹을 것같이 광소하던 그에게 이효는 단호
하게 소리쳤다.
“무릇 생명은 소중한 것이다. 양피지 다섯 장으로 목숨을 바칠 거라면 왜 태어났는가?”
원죄를 같이 짊어질 필료가 없다며 키득거리던 적괴의 어깨를 움켜쥔 이효가 천천히, 그러나 힘있게
물었다.
“왜 태어났는지 스스로에게 단 한번이라도 반문한 적이 있는가?”
존재의 이유.
그때 적괴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을 돌아보았다. 여자 꽁무니나 쫓고 키득거리며 세상을 조롱하라
고 태어난 인생은 아닐 텐데.
“그 질문에 명쾌한 해답을 내릴 때까지 자네 목숨은 자네의 것이 아니라네.”
뭔가 이질적이었다. 이 정도의 충고라면 누구나 생각하고 건넬 수 있는 얘기이거늘, 어째서 이리도
가슴이 울렁거리는 걸까.
멍하니 서 있던 적괴는 곧 이유를 알아차렸다. 그건 몇 마디의 말도, 그걸 말하는 이의 음성도 아니
었다.
`왜 저런 눈으로 날 보는 거지?`
이효의 눈은 단 한치의 흔들림 없이 적괴를 응시하고 있었다. 깊은 슬픔을 담고.
언제 이런 시선을 받아보았던가?
기억 아스라이 사부의 임종이 떠오르고, 그것이 전부였다. 다섯 장의 양피지를 주며 숨을 거둘 때 사
부는 저런 눈으로 그를 보며 힘없이 웃었었다.
그 이후로자신을 단 한번이라도 제대로 마주 본 이는 없었다. 아니, 그 자신 역시 남을 똑바로 보지
않았다. 세상은 썩었으니까.
그가 세상을 등졌던 걸까, 세상이 그에게 등을 돌렸던 걸까.
그렇게 돌아서서 완강히 버티던 세상이건만 갑자기 자신에게 몸을 돌린 이가 여기 있다. 그는 침착하
면서, 의지가 깊었고, 슬픈 울림을 말로 토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제쳐 두고라도 마음 깊숙이 숨어 있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가!”
한마디만 남기고 이효는 홀로 팽가의 사람들과 담판을 지었다. 어떤 말이 오갔는지 모르지만 팽가의
오십여 고수는 깨끗이 물러났다.
그때부터 적과는 예전의 그가 될 수 없었다. 여전히 세상을 비웃고, 외사랑으로 밤을 지새워도 그는
더 이상 예전의 그일 수는 없었다.
그렇게 자신을 일깨워 준 이가, 그렇게 강하고 호기롭던 이가 지금 저런 모습으로 힘없이 웃고만 있
다.
“저는 반드시 그자의 이름을 알아야겠습니다.”
“허어.”
눈을 돌려 고담을 보자 그 역시도 난감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대저 모든 일에 냉소적이고 별 관심
을 두지 않던 인물들이 한 가지에 몰두하면 무서운 집중력을 발휘하는 법이다.
지금의 적괴처럼.
“운조라고 했네.”
“운조?”
들어본 적이 없는 인물이다. 그렇다면......
“역시 국주께서 염려하던 그 일과 상관이 있는 존재입니다?”
“아마도 그런 듯싶소.”
고담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제 올 것이 왔다는 얘기다. 삼백 년간 위태롭게 이어오던 강호의 평화가 풍전등화(風前燈火)의 기
로에 들어섰다는 거다.
“운조라......”
“맞상대하지 말아야 할 것이네.”
같은 이름을 곱씹으며 비릿하게 웃는 적괴에게 이효가 잘라 말했다.
“글쎄요. 킬킬킬......”
“그가 바로 치무환검존과 마지막으로 겨뤘던 거라네.”
쿠궁!
보통이 넘는 고수라고는 짐작했건만 치무환검존과 마지막 대결이라니!
“그렇다면!”
고담이 뭔가 말하려다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 서열에는 오르지 않았지만 이효의 무공은 웬만한 고수들 정도는 별로 개의치 않아도 될 수준이
었다. 강호 서열리라는 것처럼 허풍선이도 없는 법이니까.
그런 그가 점혈을 당했는데 싸운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는 건 점혈자가 그야말로 점혈만 했다는 얘기
다.
점혈만 했다? 자는 상태에서가 아니라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상대방에게 점혈만 했다는 건 무엇
을 의미하는 걸까?
‘단 한 번의 물리적인 충돌없이 순식간에 점혈을 했다는 것, 국주 정도의 고수에게!’
상대, 즉 운조는 그들이 상상하는 이상의 가공할 고수라는 얘기다. 전설의 절대오존을 굴복시켜서가
아니라 청해복룡표국주를 상대로 보인 이 한 수만으로도 그가 어느 정도의 무위를 가지고 있는지 엿볼
수 있다.
“그게 전부는 아니고, 아무튼 고 대협의 허탈한 심정이야 짐작하고도 남지만 지금 내 처지가 이렇게
되어서 급히 부른 거요. 이해해 주시구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고담의 표정은 묘하게 일그러졌다.
‘젠장, 그깨 나도 갔어야 하는 건데!’
천하의 호한을 자처하는 산동의 멧돼지, 고담의 마음속 투덜거림. 무슨 말일까?
“나도 그들이 그런 곳에서 웅크리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오.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면목이 없
소.”
“아아......그게 운명인가 보지요.”
산동의 멧돼지 고담, 그 역시 잃어버린 표물이나 회수하자고 강호인이 되었던 것은 아니다.
지금은 이렇게 몸을 숨기고 있지만 한때 그는 산동에서 조법 하나로 천하를 떨쳐 울렸던 천익방(天翼
幇)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였다.
같은 무학이지만 그 수법의 괴이함이나 독랄함 때문에 조법은 여타의 무공들보다 천시되었고, 천익방
의 차기 방주감으로 지목되어 온 고담에게 이런 편견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장막이었다.
조법은 기본적으로 근거리에서 치명적인 일격을 날려 적을 굴복시키는 무학이다. 그래서 무기인 조
(爪)에 독이나 기타의 약물을 바르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그것 때문에 좌도방문의 무학이라 은근히 푸
대접을 받는 터였다.
같은 맥락이라면 멀리서 치사하게 암기나 날리는 당문이 더 욕을 얻어먹어야겠지만 강호인들 가운데
당문을 욕할 이가 어디 있으랴?
유력전능 무력무능(有力全能 無力無能).
“조법이 천대받는 것은 조법만으로 천하제일을 다툰 인물이 배출되지 않은 탓이다!”
마음속에 품은 원대한 야망을 숨기고 그는 천익방주의 허락을 받아 놀랍게도 군에 투신했다. 그것도
오랑캐들이 극성을 부리는 최전방으로.
살인을 해도 죄가 되지 않는 곳, 살인을 많이 하면 할수록 공적이 오르는 곳. 그야말로 실전을 위주
로 하는 조법을 수련하기에 최적의 장소가 아니겠는가!
그때부터 전장에서는 붉은 옷을 입은 군인 하나가 오랑캐들에게 저주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손속이
잔인하면서도 매우 깔끔하여 두 번 이상 적에게 손을 댄 적이 없었다.
흘러가는 시간만큼이나 쌓여가는 공적. 그리고 그에 수반되는 질투와 시기. 군이나 유생들 간이나 자
신의 위에 선 자를 끌어내리려는 건 매한가지였고 고담으로서는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관과 무림은 서로를 건드리지 않는다는 불문율. 출신이 밝혀져서 좋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위를 탐해서 투신한 군문도 아니었다.
소기의 성과는 거둔 상태.
실전으로 어찌할 수 없는 무학의 깊이에서 고뇌하던 그가 마침내 결단을 내리고 미련없이 자리를 박
차고 나왔을 때 고담을 부리던 장군의 한숨이 천지를 진동했다는 일화는 군에서 꽤나 오래 회자되었다.
그리고 다시 착은 산동. 천익방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사 년 전, 흉몽지겁이 천화를 휩쓸 때 천익방
은 여섯 명의 고수에게 멸문지화를 당했던 것이다.
육천염, 그들 여섯을 그렇게 부른다던가.
한 서린 얼굴로 천하를 주유했건만 그들 여섯 명은 땅으로 꺼졌는지 하늘로 솟았는지, 그 어디에서도
종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낮에는 사냥꾼으로 생계를 대신하고, 밤이면 흉수들의 자취를 탐문하던 고단한 생활 중에 호북의 복
룡표국에서 기이한 조건의 표사들을 모은다는 소문을 들은 고담은 곧 복룡표국주 이효와 독대를 하고
그 즉시 실회조원으로 들어왔다.
종적 없는 흉수들을 쫓던 그는 어느새 오십이 넘어버린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고, 복룡표국주 이효는
그런 고담에게 넉넉한 휴식처를 제공해 주었다. 육천염의 행방 역시 알아봐 주기로 했음은 물론이다.
처음에는 낯선 표사 생활이었지만 이효는 약속을 잘 지켰고, 고담은 거의 식객 수준의 대우를 받았다.
더 정확하게 말해 실회조원 전체를 그렇게 대우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하나둘 조원들이 바뀌었으나 몇몇 붙박이는 그 자리를 지켰고 그들과의 어울림 속에
고담 특유의 입담과 넉살이 어우러져 자연히 그는 실회조의 대형 격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실회조의 정신적 지주로 들어앉은 지 벌써 오 년여,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지만 그 와
중에 단 한순간도 원수를 잊지 않았었다.
비록 황혼의 초입에 들어섰지만 흉수들을 찾았다는 소문이 들린다면 그곳이 제아무리 험준함 오지라
고 달려갈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모든 게 끝나 버렸다. 신기루처럼 잡히지 않던 육천염은 황당하게도 같은 조원들인 세
청년에 의해 고홍이 되어버렸다.
“사람 일이란 정말 알 수가 없단 말이야.”
싱겁게 웃고 고담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지금 이런 얼굴은 좋지 않다. 그 자신에게도, 국주에게도.
“그렇구려. 사람 일이란.”
뭔가 의미있는 대꾸, 순간 고담과 적괴가 반짝 눈을 빛냈다.
‘표국주는 죽음을 각오하고 있다.’
“제가 한번 봐도 되겠습니까?”
침상으로 다가선 고담이 이효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즉시 그의 완맥을 움켜쥐었다.
조법의 고수들은 한 번의 공격으로 치명상을 입혀야 하기에 웬만한 고수들보다도 혈도에 조예가 깊다.
점혈 역시 혈도를 건드리는 수법이고 강호를 떠돌며 수많은 기법을 넘겨본 고담이 나선 건 무리가 아니
었다.
그러나......
“이럴 수가, 정말 점혈된 것이 맞는 겁니까?”
힘업이 고개를 끄덕이는 이효를 보던 적괴가 고담에게 눈짓을 했다.
“그게 말일세......맥의 상태는 지극히 정상적이야. 이건 그냥 일반적인 상태나 다름없다고.”
“그래서 단심주인가 보오. 허허허......”
치명적으로 절대로 드러나지 않는 점혈. 그래서 한마음으로 내리는 저주인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괴감에 두 사내가 질끈 깨물었다. 넉넉한 쉼터를 제공해 주었으며 진심을
담아 자신조차 잊어버린 내면을 바라봐 준 이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오로지 탄식.
“그런 얼굴은 보기 안 좋구려. 이럴 거면 뭐 하려고 두분을 청했겠소?”
“아, 미안하오이다.”
“아니, 아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오. 전에도 말했지만 이제부터가 중요하오.”
회광밪조일까? 갑자기 이효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적괴, 자네는 전에 내가 부낙한 대로 해주게. 한가지, 절대로 운조라는 사내와 맞서지 말게. 가슴
에 구름 문양을 새긴 사내를 만나거든 무조건 피하란 말일세.”
“흐음......”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적괴에게서 눈을 돌린 이효가 고담에게 푸근한 미소를 보냈다.
“고 대협께서는 실회조를 다독거려 주시오. 무슨 말인지 알 거라 믿소.”
이미 얘기가 되어 있었을까? 두 사내는 이효의 간략한 말을 전부 이해하는 눈치였다.
“그럼 됐소. 이제부터 표국의, 아니, 강호의 운명은 두분의 일거수일투족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반
드시 기억해 주길 바라오.”
“알겠습니다.”
“네......”
불끈!
“믿겠소!”
두 사람을 내보내며 이효가 오른손을 들어 주먹을 꽉 쥐어 보였다. 이것은 복룡표국에서 표행을 나서
는 동료들의 안전을 바라는 그들만의 수인사로 단순하지먄 묘한 감흥을 주는 동작이었다.
그리고 지금 국주의 강건함을 가장한 주먹은 너무나 가련하게 떨렸기에 두 사내가 받은 느낌은 평소
와는 또 다른 무엇이 있었다.
“부디 몸 보중하십시오.”
“......”
적괴는 끝내 인사조차 남기지 않았다. 그만큼 분했으며, 그만큼 가슴이 시렸나 보다.
“장유열 표사를 부르라 전해주시오.”
애써 둘의 처연한 눈길을 외면하고 이효가 두 번째로 부른 건 장추삼의 아버지, 장유열이었다.
“구, 국주님!!”
“아아, 오셨습니까.”
방문을 부슬 기세로 들어선 장유열이 이효의 수척한 얼굴을 보고는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전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이, 이런 모습이라니!”
겨우 장유열을 다독인 이효가 뭔가 말하려다 가슴을 한번 움켜쥐었다.
시간이 없다. 발작은 생각보다 불규칙적이었고, 급박했다. 무엇보다 이런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
“너무 피곤해서 오래 얘기를 나눌 수가 없겠군요.”
“하명하십시오. 어떤 말씀이라도 이행하겠습니다!”
늘 한결같은 사람.
“다른 게 아니라...... 이번 일이 정리되기 전까지 추삼이를 표국에 들이지 마십시오.”
“예?”
얼른 이해를 하지 못하고 눈만 꿈뻑이던 장유열이 곧 이효의 의중을 눈치 채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망아지 녀석은 제가 책임지고 집에 묶어두겠으니 국주께선 부디 몸이나 보중하십시오!”
“반드시 그래야만 합니다. 아니면 걷잡을 수 없으리만치 일이 커질지도 모르니.”
“옙.”
장유열의 굳은 의지를 느낀 이효가 가느다란 미소로 친형 같은 노인의 등을 떠밀었다.
“만약 추삼이가 터럭이라도 다친다면 저 역시 무슨 일을 벌일지 모릅니다. 어서 가보도록 하세요.
소문이라는 녀석은 생각보다 발이 빠른 편이니.”
몇 번이고 침상을 돌아보던 장유열이 이효의 재촉에 마지못해 방을 나섰다.
‘이제 대충 정리됐나?’
그런가 보다. 참았던 통증이 몰아서 오는 것을 보니.
이제 석양빛마저 자취를 감추고 서서히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마치 가인(佳人)이 살포시 눈을 내
리감는 것처럼.
“괜찮으십니까?”
이제야 들어서는 가인, 민경추를 바라보며 이효는 다시 한 번 자신이 누리는 복록에 감사했다.
‘잘 참아주었소, 부인.’
말은 입에서만 맴돌았다. 그는 어느새 사고의 끈을 놓고 있었으니까.
“그래요, 이젠 편히 쉬세요.”
뭐라고 위로는 해주고 싶었는데. 그러나 참을 수 없는 수마(睡魔)가 이효를 지배했고, 곧 그는 사람
하는 아내의 품에서 잠시의 평화를 누려야만 했다.
강철 같은 사내의 짧은 깊은 밤과 함께 이어졌다. 그리고 그의 곁엔 바람처럼 가냘프나, 마음만 먹는
다면 강철이라도 녹여 버릴 듯한 여인이 차분한 미소로 함께해 주었다.
“알 수가 없다 말이야.”
늦은 점심을 먹고 딩가딩가 배를 두드리던 장추삼이 문득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뭐가요?”
역시 늦은 아침을 먹고 거하게 기지개를 켜던 정화진을 그를 보며 고래를 갸우뚱거렸다.
“아아, 넌 몰라도 된다.”
그럴 거면 혼잣말이나 하지 말지.
불만에 가득 찬 소년의 표정을 싹 무시하고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던 장추삼의 입에서 폭포수와도 같
은 탄식이 터졌다.
그 소리의 유장(悠長)함에 약간 토라져 있던 정화진의 불룩하게 나온 볼이 쑥 들어갔으며 기운차게
설거지를 하던 정혜란의 손길마저 더뎌졌다.
“무슨 일이신데요?”
“아따, 맛난 밥상을 물리자마자 젊디젊은 청춘이 처량하게 뭔 한숨이람?”
동시에 터져나온 두 사람의 질문.
그런데 딱히 해줄 말이 없다. 정화진이야 어리니 이런 말을 해봐야 알아먹을 리 만무하고, 정혜란에
게 시기상조라고 판단했기에 장추삼이 할 수 있는 행동은 그저 ‘엄한 하늘 노려보기’ 정도였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리 궁상이요? 얼른 속을 시원하게 늘어놔 봐요. 무슨 꿍꿍이를 혼자서 그렇
게 바리바리 싸들고 있는가!”
“맞아요.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하잖아요. 제가 비록 어리고 생각이 얕지만 어쩌면 작은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요.”
급기야 부엌을 박차고 나온 정혜란과 뭔가 야무진 표정으로 두 주먹을 꽉 쥔 정화진의 눈빛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에휴~ 관둬.”
이러면 더 궁금해진다.
“지금 뭐 하자는 거예요! 저녁상 제대로 받고 싶으면 신속하게 털어놔요!”
“맞아요. 남자가 돼가지고 그게 뭡니까?”
아쭈......
남자 운운하는 정화진에게 알밤을 한 방 먹이고 싶었지만 저녁밥의 압력은 꽤 큰 부담이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장추삼이 바닥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보자, 뭐라고 얘기를 해야 하나......”
정혜란이 싱긋 웃었다. 역시 여자는 위대하다고 스스로 자찬하면서.
“뭘 뭐라고 얘기하면 되나~ 예요? 그저 간단명료하고 정확하게 말하면 되지.”
“그게 제일 힘든 법이라네.”
그녀의 기운찬 대답에 힘없이 웅얼거린 장추삼이 코를 문지르다 콧구멍으로 머리를 들이민 콧수염 몇
가닥을 잡아 뺐다.
“그러니까...... 음, 이런 거야. 어떤 사람들이 서로한테 여러 번 서신을 교환했거든?”
“편지?”
정혜란의 반문을 무시하고 장추삼이 말을 이었다. 무슨 도움을 바란 건 아니지만 기와지사 꺼냈기에
그냥 쉽게쉽게 얘기를 풀어놓으려 노력했다.
“그게 어떻게 얘기해야 하나, 횟수는 모르지만 아무튼 엄청나게 긴 시간 동안이야.”
“얼마나 긴 시간이요?”
정화진의 천진스런 질문에 그가 피식 웃었다.
“아마도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길겠지.”
“한 십 년쯤 되요?”
도리도리.
“와~ 그럼 이십 년?”
역시 고개를 저은 장추삼이 오른손을 불쑥 들어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였다.
“삽십 년씩이나요?!”
삽심 년이라면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그래서 소년의 놀람도 당연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장추
삼의 입이 살짝 벌어지자 정화진은 물론 배포 큰 정혜란의 동공도 활짝 열려야 했다.
“거기다 0자 하나 더 붙이면 된다.”
“아하, 삼백......삼백 년?!”
순간의 침묵.
정혜란과 정화진은 순간 서로를 보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장추삼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삼백 년이라니. 말이 쉬워 삼백 년이지, 삼백 년 동안 어떻게 편지를 주고받는단 말인가.
“잠깐잠깐, 아무리 장수한다고 해도 사람의 수명이란 게 끽해야 백 년인데 삼백 년이 무슨 소리래?
그 사람들은 무슨 불로초를 상시 복용하나 보네?”
“맞아요, 사람이 용도 아닌데.”
“누가 사람보고 용이라더냐? 그리고 사람 수명 백 년 맞아. 불로초가 무슨 뒷산에서 캐는 나물도 아
니지, 그런데 웃기는 건 삼백 년이 맞다는 거거든.”
“말이 안......”
“사람 말 좀 끝까지 들어! 누가 개인 대 개인의 일이라고 했어? 아까 그랬잖아. 사람‘들’이라
고!”
“아, 사람‘들’.”
“그래, 사람‘들’. 그리고 지금 내가 인간의 수명과 편지 교환에 대해 고찰을 하자고 이 얘기를 꺼
낸 게 아니니까 기간에 연연하지 말라고.”
자꾸 끼어드는 정혜란에게 일침을 가한 장추삼이 뽑은 콧수염을 마담에 휙 뿌렸다.
“다시 돌아가서...... 아무튼 서신을 교환했는데 이상하게도 그 가운데 특정한 하나씩에만 어떤 의
미를 부여했다면 뭔가 이상하지 않아?”
“하나씩이라면?”
“아, 설명을 하지 않았군.”
제 머리를 툭 친 장추삼이 양 손바닥을 활짝 폈다.
“그 서신을 교환했다는 사람들은 열 개의 단체와 하나의 단체...라고 생각하면 돼. 그 하나가 단체
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그렇게 생각하는게 이해가 빠를 거야.”
“열 개의 단체와 하나의 단체의 교환, 그 가운데 하나씩에 의미를 부여했다면......”
“모두 합쳐서 열 개의 편지가 문제로군요?”
정화진의 대꾸에 그가 껄껄 웃었다.
“맞다, 맞아. 열 개지. 그런데 왜 그것들만 문제인지 도통 모르겠단 말이야.”
정혜란이 비죽 입을 내밀었다. 정말 쉽지 않은가? 이런 걸 가지고 고민했다니.
“당연히 그 편지들에 특별한 내용이 적혀 있었겠죠. 무지 간단하잖아?”
“이봐, 정 소저... 내가 바보인 줄 알아? 그런 거라면 안 돌아가는 짱돌을 억지로 굴릴 일도 없지.
근데 문제는 내용이 다 비슷비슷했단 말이야.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거의 같은 내용이라고 봐도 옳
지.”
자신만만했던 정혜란의 표정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그 모습에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장추삼이 정화
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어이, 백지장 공자? 자네 생각은 어떤가? 어서 맞들어줘야 하잖아?”
“으음......”
알 리가 없다. 이런 식의 질문이라고 누가 있어 대답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두 사람은 편지의 내
용은 묻지 않았다. 아니, 앞서의 의문에 사로잡혀 그런 건 물을 생각도 못했다.
“가을바람 좋~다.”
니들이 생각해 봐야, 란 얼굴로 득의만만하게 집 앞뜰에 나온 장추삼이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을 맞
으며 한껏 기지개를 켰다.
요즘 어울리지 않게 너무 머리를 굴려댔더니 뇌가 너무 활성화되는 것 같다. 시도 때도 없이 이런 저
런 생각이 들고, 그걸 또 싹 지우고 그 위에 다른 생각을 덧입히고... 나중에는 출발점이 무었이었는지
조차 잊어버릴 정도가 되곤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빌어먹게도 높네.”
하늘은 그야말로 고고청청(高高靑靑) 더할 나위 없이 높고도 푸르게 걸려 있었다.
“넌 좋겠다.”
문득 하늘이 부러운 것은 활성화된 뇌의 부작용일까.
“아아, 요즘 내가 왜 이러냐. 사춘기 코찔찔이들이나 할 망상을 품고, 내가 미쳐 가는구나.”
한숨을 푹푹 내쉬며 기막혀 하던 그가 들꽃을 보고 툭 잡아 뽑았다.
“그놈 참 들꽃처럼 생겼네.”
누가 들으면 정통 바보 같은 소리를 늘어놓으며 이름 모를 꽃을 감상하던 장추삼이 손에 든 꽃을 머
리에 푹 꽂고는 킥킥거렸다.
“자자, 뭔가 제대로 되어가는군.”
그래도 뭔가 미진하다.
“대체 뭘까?”
한동안을 고심하던 그가 곧 빠진 무엇을 찾아내고는 손바닥을 부딪쳤다. 생각해 보니 결정적인 하나
를 빼먹고 있었다.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머리에 꽃도 꽂았다면 마지막으로 해야 할 것은?
“당연히 춤이지!”
라고 소리치며 장추삼이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다.
“우리 원래 뭔가 하면 또 제대로 하는 성격이거든? 대충대충은 못 보지.”
키득거리며 부지런히 발을 놀리던 그가 무아지경에서 문득 춤을 잘 추는 이들을 꼽아보기 시작했다.
그래 봐야 아는 사람이라곤 몇 되지도 않지만.
“루루루루~”
흥이 나도 제대로 났나 보다. 평소엔 하지도 않던 콧소리로 박자까지 맞춰가며 너울너울 몸을 움직이
던-물론 너울너울은 어디까지나 그 자신만의 생각이다. 지금 장추삼의 몸 움직임은 누가 보더라도 어기
적어기적 그 자체였다-그가 지그시 눈을 감고는 천천히 한 사람의 유려한 동선(動線)을 마음속에서 그
려냈다.
‘아아, 당 소저가 어떻게 했더라... 저번에 보니까 기막히던데.’
십삼조 연무전에서 하늘하늘 춤을 추던 당소소의 잔영을 옮겨보려 콧등을 찌푸려 보았지만 장추삼으
로는 그녀가 만들어낸 궤적을 도저히 재현할 수 없었다.
사실 장추삼이 그녀의 흉내를 내지 못할 만도 한 것이 대충 추는 춤으로 보였는지 몰라도 당소소의
몸놀림은 거의 당문의 최상승 암기술을 도구 없이 펼쳐 낸 것으로 동작의 기이함도 기이함이려나와 무
엇보다 부단한 노력이 있어야 실행 가능한 움직임이었다.
“우이씨!”
콧소리? 그런 건 애당초 토해낸 적도 없는 사람처럼 인상을 구기던 그가 평소의 특기인 ‘제멋대로
결론 내리기’를 감행했다.
‘에라, 춤이라는 게 별거있어? 그냥 제 좋아서 흔들면 땡이지!’
멋진 자기 합리화. 아마도 이런 사고방식으로 살아간다면 화병으로 죽을 확률이 현저히 감소할 거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까지는 아니더라고 그렇게 마음먹자 일단 당소소는 제쳐 둘 수 있었다.
‘자, 간다!’
간다, 하고 춤을 시작하는 이가 어디 있을까? 말보다 더 황당한 건 그의 움직임이었다.
파박!
슬슬 발을 풀던 그가 방금 전까지의 곱상했던 움직임은 저 멀리 벗어던지고 쏜살같이 몸을 잡아 뺏다
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또 간다!’
돌아왔다 싶은 순간 다시 발을 교차시킨 그의 몸이 순식간에 여덟의 그로 분열되었고, 그 잔영들이
채 자리를 잡기도 전에 넷으로 줄었다가 다시 두 명의 장추삼으로 변했으며 한 발자국을 떼기도 전에
본래의 하나로 돌아왔다.
‘어라? 이거 재미있네?’
한 번 몸이 풀리자 마치 탄력을 받은 천리마처럼 흥이 난 그가 콧김을 한번 세차게 내뿜고 힘차게 발
을 떼어 마구잡이로 날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추뢰보, 그 다음엔 산무영, 그리고 추뢰무영, 그리고...
급기야 자신이 뭘 하는지도 의식하지 못하고 발을 놀리던 장추삼의 두 손이 어느 순간 살짝 들려져
기묘한 호선을 그리고 시작했다.
팡파방!
힘껏 내뻗는 기세로 보아 유성우일까?
스르륵~ 팍!
그럼 우연하게 모여졌다 천천히 밀리는 모습은 천고의 장력이라는 능신뢰?
스르릉~ 스릉~
두 가지의 모양새가 마구 뒤섞이다 점차 알 수 없는 형태의 곡선을 만들어냈다. 그에 따라 그의 발
역시 산무영도 추뢰보도 아닌 그 무엇이 되어 느릿느릿 움직였다.
몰아일체(沒我一切).
그는 지금 산무영도, 추뢰보도 밟고 있지 않았다. 또한 유성우도, 능신뢰도 펼처 내기 않고 있었다.
그러나 이 네 가지를 모두 펼치고 있었다.
인간의 몸으로는 절대 구현하지 못할 것 같았던 네 가지 초식의 완전한 융합!
그러나 아쉽게도 장추삼의 사고는 저 멀리 어딘가를 배회하고 있었기에 현재의 자신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아니, 만약 현재를 인식했더라면 처음부터 네 초식의 융합은 불가능했을지도.
그렇게 흐르던 시간 속에 오랜 비행을 바친 신천옹(信天翁)처럼 서서히 팔을 거둔 그가 이마에 흐르
는 땀을 기분 좋게 음미하며 한껏 숨을 들이켰다.
“후아아~”
그대 어떤 물체 하나가 담 위로 불쑥 올라왔다.
“자네, 무림고수가 되었다더니 괴상한 취미까지 생겼나 보군.”
“뭐, 뭐야?!”
화들짝 놀라 뒤로 서너 발 물러선 그의 앞에 태양 빛을 받아 반짝이는 무엇이 도도하게 꿈틀거렸다.
그건 붉은 전갈이었다.
“젠장, 왕 노인이잖아. 무슨 일로 우리 집까지 행차하신 거요?”
그나마 다행이다.
‘다른 누군가가 이 모습을 봤다면.’
생각조차 하지 싫어서 머리를 마구 흔드는 장추삼의 괴이한 행동을 멀거니 바라보던 왕노삼이 자기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가져가서 빙빙 돌리는 시늉을 했다.
전엔 몰랐는데 무림고수가 되면 다들 저렇게 미치는가 보다.
‘무림인이 안 되길 정말 잘했어.’
스스로에게 감사하며 고개를 끄떡이는 왕노삼의 반응이 영 마음에 걸려서 장추삼이 버럭 소리를 질렀
다.
원래 방귀 뀐 놈이 성내는 법이다.
“왜 남의 집에 왔냐니까! 알량한 목 운동 보여주려고 온 건 아닐 거 아니오!”
“아, 맞다!”
빛나는 제 머리를 손바닥으로 탁 두드린 왕노삼이 품을 뒤적거리다가 뭔가를 꺼내 들었다.
“이게 뭐요?”
불쑥 내민 봉서를 받아 들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장추삼에게 왕노삼이 입을 가리는 시늉을 했다.
“조용히 하게! 누군지는 모르지만 자네에게 전하라고 신신당부했다네. 그 무림노고수 양방이 시키는
대로 봉서를 열어보지 않았으니 나중에 묻거들랑 반드시 그렇게 말해 주게.”
“그게 누구요?”
장추삼의 질문에 손을 휘휘 저으며 왕노삼이 급히 자리를 피했다. 마치 못 올 곳을 온 사람처럼.
“낸들아나? 아무튼 난 분명히 전했네~!”
얼마나 급하게 내달았으면 마지막의 말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뭐 급한 일이 있다고 저리 서두른담?”
입을 비죽 내밀고 툴툴거리던 그가 손에 들린 봉서를 물끄러미 쳐다 보았다.
“무림노고수라......”
그건 봉서를 준 이의 나이와 위취를 진작케 한다. 왕노삼 영감의 나이도 적지 않은 축에 드는데 그가
‘노’자를 붙였단 함음 전달자가 적어도 왕 영감 또래를 상회한다는 거다.
그리고 무림고수. 왕 영감의 반응으로 보아 전달자를 무척이나 두려워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뒷골
목에서 몇십 년을 굴러먹어서 웬만한 일에는 눈썹하나 흔들리지 않는 왕노삼이다.
몸 상태로 보아 물리적으로 어떤 위해를 입은 건 아니라는 얘기. 그렇다면 전달자는 기도만으로 왕노
삼을 굴복시켰다는 거다.
머리를 굴리던 그가 위의 두 가지 조건에 딱 부합되는 인물을 그려 내고는 턱을 슬슬 쓰다듬었다.
만약 전달자가 장추삼이 가정한 그 사람이라면 이곳에 오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그를 저렇게
할 다른 무엇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손에 든 꽃을 빙빙 돌리며 생각에 잠겨 있던 장추삼이 문득 자신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또 생각을 하고 있지 않는가! 그것도 추리라는 이름의 고등 사고를 말이다!
“미치겠네, 진짜!”
이러다가 얼마 후엔 문사건 쓰고 서적을 잔뜩 들고 다닐 판이 아닌가.
되지도 않은 팔자걸음을 걸으면서......
삼류무사 252
도가도 비상도(道歌道非常道)
일단 저주받을 생각은 거기서 멈춘 그가 봉서를 보다 풀로 붙인 부분을 떼어냈다. 이 안에 모든 해답
이 들었을 것을 뭐 그리 고민하나, 하면서.
그러나...
“연애 편지인가.”
“쿨럭!”
또다시 무언가가 불쑥 솟구쳤다. 이번의 물건은 아까 것과는 비고도 안 될 만큼 컸으며 목소리 역시
강하면서도 차가왔다.
“이, 이 시간에 여긴 어쩐 일이시오?”
“볼일이 있어서.”
`그럼 일도 없는데 남의 집에 오냐, 임마.`
속으로만 씹었다.
“아니, 이게 누구래? 잘 다녀왔어요, 꺽다리?”
기운 찬 소리와 함께 꺽다리 처녀가 튀어나왔다.
`얼씨구, 출장 갔던 서방이라도 맞이하나.`
그만큼 정혜란의 목소리는 밝고도 생기가 넘쳐흘렀다. 누구에게나 살가운 그녀라지만 지금의 음성은
아무리 봐도 지나치게 정겨운 구석이 있었다.
그 소리에 빙글 몸을 돌린 북궁단야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덕분에 잘 다녀왔소.”
이때 장추삼은 못 볼 것을 보고 말았다.
`아, 이럴 수가!`
눈을 부비고 다시 쳐다봤지만 그건 사실이었다. 아직도 버젓이 걸려 있지 않은가. 얼음같이 차가운
얼굴에 살짝 드라운 미소가 말이다.
“에이, 잘 다녀온게 아닌가? 얼굴이 안전 반쪽이 됐잖아? 아유, 피부 까칠해진 것 봐. 아무튼 남자
들은 혼자 두면 자기 관리가 영 꽝이라니까.”
“그렇소? 하하하.”
“아무리 바쁘다지만 삼시 세끼는 챙겨 먹어야지요. 훤한 얼굴을 이렇게 망가뜨려도 왜요?”
...놀고 있네.
처절하게 소외당하고 있는 장추삼을 무시하고 두 남녀는 시시덕거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정혜란의 털
털한 모습이야 그렇다 쳐도 해파리처럼 흐물거리는 북궁단야의 반응은 그야말로 봐주기 어려웠다.
“무슨 일로 왔냐니까.”
그래도 화는 내지 못하고 작은 목소리로 어떻게든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 했으나 북궁단야에게 이건
도전 축에도 끼지 못하는 옹알이었다.
“이 친구는 언제나 이런 표정으로 툴툴거리기만 하는 거요? 소저께서 무척이나 피곤하겠군.”
“설마요. 우리 장 가가가 얼마나 다정한 사람인데. 가끔 사람 귀찮게 하는 구석이 있지만 마음만큼
은 누구보다 넉넉하다고요.”
아주 병 주고 약 주고 다 해라.
말까지 씹히자 기가 막혔지만 북궁단야의 싸늘한, 무언의 눈빛 공격에 일단 꼬리를 말고 사태의 추이
를 지켜보던 장추삼이 그들의 다음 행동에 마침내 폭발했다.
“그나저나 점심은 들었어요? 별로 맛난 찬은 아니지만 남은 음식이있는데.”
“그러고 보니 식전이군. 밥 남은 게 있소?”
탁탁!
북궁단야의 어깨를 마구 두드리며 정혜란이 대소를 터뜨렸다.
“우리 집에서 밥이 남으면 남았지 모자라는 법은 없다고요! 배 터지도록 남을 만큼은 있으니까 얼른
들어가요!”
그럴까, 하며 흐뭇한 얼굴이 된 북궁단야의 넉살을 더 봐줄 도량이 그에겐 없었다.
“우리 집엔 왜 왔냐니까!”
“음?”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북궁단야가 식식거리고 있는 장추삼을 슥 한번 쳐다보고 뭔가 생각하더니 고개
를 끄덕이며 품에서 뭔가를 꺼내 장추삼에게 휙 던졌다.
“잊을 뻔했군. 자, 받아라.”
“엥? 점심부터 뭘 이렇게들 주는거야?”
그가 불쓱 내민 건 우습게도 봉서였다. 무슨 인연인지 모르지만 연속으로 두개의 편지를 받다니. 그
것도 전혀 의외의 인물들에게.
“그렇게나 중요한 얘기요?”
“무슨 말인가?”
“아니, 뭐 편지로까지 해야 할 정도면 어지간히 비밀을 요하는 내용 같아서.”
봉서를 요리저리 돌리는 장추삼을 보던 북궁단야가 짧게 코웃음 쳤다. 워낙 단호하고 날카로운 느낌
이라 듣는 사람 기분을 완전히 뒤집어놓을 만큼 정나미 떨어지는 콧방귀였다.
“내가 네게 편지를? 정말 우스운 발상이로군.”
“내 말이 그 말......?”
저 말은 북궁단야 본인이 발신인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면누가?
“부탁받은 거다. 어서 읽기나 해라.”
“누구 말이오?”
“읽어보면 알 것 아닌가.”
“아니, 보낸 사람도 모르는 정체 불명의 편지를 개봉하라는 거요? 나를 뭐로 보는 거요? 인의예지신
을 고루 겸비한 이 장추삼이가 그런 행동을 할 것 같소?”
“인의예지신이라......”
자꾸 앵알거리는 장추삼이 귀찮았지만 대답을 하지 않았다간 편지를 그대로 버릴 기세라 어쩔 수 없
이 북궁단야는 편지를 준 이에 관해 말해 주었다.
“정말 귀찮군. 전에도 말한 적이 있지 않은가, 우건이라고. 청빈로를 걷는데 말을 걸더군.”
“우건 소, 아니지... 공자가 편지를?”
더 이상 말하기 싫어서 북궁단야가 홱 몸을 돌렷다. 어쨌든 편지는 전달했고, 읽기는 할 것 같았기에
제 할 일 다 했다는 기분이 들었을까.
부엌에서 기운차게 뭔가를 다듬던 정혜란이 이들의 대화를 듣고 고개를 삐죽이 내밀었다. 아무튼 관
심이 많은 아가씨다.
“우건이라고요?”
순간 두 사내가 움찔 몸을 굳혔다.
“얼레, 죄졌어요? 뭘 그리 놀라는 거예요?”
“죄는 무슨.”
“맞아. 죄는 무슨. 아하하하!”
애써 담담하려는 북궁단야와 억지웃음으로 상황을 모면하려는 장추삼의 노력은 실로 가상한 것이었지
만 정혜란의 의미심장한 미소를 거두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됐네요. 그나저나 우건이라면 고서점에서 일하는 총각으로 아는데 남자가 무슨 편지람. 계집애처럼
~”
“그, 글쎄?”
일단 장추삼에게 한 방 먹인 그녀가 멀대처럼 뻘줌히 서 있는 북궁단야에게도 아낌없이 한 방을 선사
했다.
“우건 공자는 눈썰미도 좋네? 어떻게 북궁 공자께서 우리 오라버니와 아는 사이라는 걸 간파했을까?
고서점에서 일하면 다 그렇게 똑똑해지나 보네?”
“으, 으음......”
이마에 내천 자가 패인 북궁단야나 받은 편지를 황급히 갈무리하는 장추삼의 태도가 너무 우스워서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지만 정혜란은 뒷짐을 지고 소리를 질렀다.
여기서 웃어버리면 이들의 꼴이 너무 우스울 것 같아서.
“가자, 밥 먹을 양반은 어서 올라오고 편지 읽을 양반은 한구석에 가세요.”
두 사내에게 이 소리는 그야말로 광명이었다.
어기적거리며 방으로 들어서던 북궁단야가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고개를 한번 갸웃거렸지만 그게 뭔
지 알 길이 없었다.
“거참......”
그 소리는 장추삼도 하고 싶었다. 무슨 날이기에 아침부터 봉서를 무려 두 통씩이나 받는 영광을 누
린단 말인가?
“뭐부터 볼까나?”
라는 신소리를 입으로 뱉고 있지만 그의 손은 이미 봉투 하나를 찢고 있었다.
그것이 두 번째 봉서라는 건 부연할 필요도 없다.
곱게 접힌 종이의 단아함에 뭔가 뭉클해진 장추삼이었지만 편지의 내용은 그리 아름답지 않았다.
몸 성히 돌아왔다고 들었어요. 뜻한 바대로 많은 걸 보고 느꼈는지 모르겠네요. 부디 의미있는 시간
이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말이죠...
무신경해도 분수가 있다고 했지요. 어떻게 사람이 이럴 수가 있어요?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서점에
얼굴 한번 내밀 시간조차 없었나요?
대단하군요. 당신이 그렇게 분주한 사람인 줄은 정말 몰랐네요.
보고 싶어 애가 탄다든가, 뭐 그런 것을 바라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안부 정도는 궁금해야 하지 않은
가요? 그것도 무리한 부탁인가요?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봐요. 무림에서 나를 얼마나 그렸는지, 얼마나 생각했는지 말이에요.
요즘은 내 눈이 삔 게 아닐까, 한는 생각이 수도 없이 을어요. 누구는 무슨 소문만 들어도 가슴이 내
려앉아서 잠도 이루지 못했는데 누구는 돌아와서도 천하태평 코빼기도 비치지 않으니.
만약 저에게 미안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오늘 신시(15:30~17:30) 초까지 봉황루의 이층
귀빈실로 오세요.
한숨이 녹아 이슬이 된다는데, 제 방 작은 창에는 아직도 푸른 하늘이 걸려 있지 않네요.
언제나 여명이 밝아올지......
추신, 비록 허명이라지만 제 이름은 기억하고 있나요?
아아, 마지막 네 줄의 압박!
숨이 막혔다. 어째서 여자들은 단 몇 줄의 글귀만으로 사람의 마음을 후벼 팔 수 잇을까.
`젠장,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라고!`
마음속으로 아무리 변명하고 울부짖어 봐야 어차피 공염불이다. 그의 손에 들려진 편지는 종이라기보
다 거의 비수가 되어 가슴을 콕콕 찔러대고, 변명을 들어줄 이는 저 멀리 어딘가에서 또 다른 칼을 가
는지도 모른다.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오로지 하나. 늦지 않게 봉황루로 뛰는 것뿐이었다.
“정 소저, 나 좀 나갔다 올게!”
대충 소리 지르고 뛰쳐나가려는데 정화진의 물음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그런데 이거 다 모이면 뭐가 되는데요?”
“뭐”?
“아까 말씀하신 열 장 말이에요. 다 모이면 뭐가 되느냐고요?”
지금 그런게 중요한가.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알 게 뭐야? 나 바쁘니까 이만 실례한다!”
벼락처럼 사라지는 그의 뒷등을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던 정혜란이 피식피식 웃으며 따끈따끈한 우육
탕을 북궁단야에게 내놓았다.
이미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많은 음식물이 차려져 있는 상태. 그러나 어디서 나오는지 몰라도 그녀
는 끊임없이 음식을 가져왔다.
“너무 많은걸.”
젓가락을 들고 뭘 먹어야 할지 궁리하던 북궁단야가 어이없는 얼굴이 되어 손을 내려놓았다.
“이게 뭐가 많아요? 오늘은 찬거리가 없어서 평소의 절반밖에 음식을 만들지 못했는데.”
`절반이라고?`
정혜란에게 눈길을 가져갔던 그가 왠지 식욕이 떨어져서 쓴 입맛을 다셨다.
원래 그런 법이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한번에 너무 많은 음식물이 밀려들어 오면 식욕 자체가 시들
해 질 수가 있고 결정적으로 북궁단야는 이토록 풍부한 식탁에 익숙한 편이 아니다.
방금 전에야 정혜란의 얼굴을 보고 어떻게든 얘기를 이어보려 눌러 앉아 있지만 사실 그근 지금 잡념
때문에 뭘 맛나게 집어넣을 상태가 아니었다.
“뭐 해요?”
“아,잠시 딴생각을 조금 했소.”
탕을 내려놓던 그녀가 피식 웃었다.
“여동생 걱정 그만 하고 식사하세요.”
미끌.
하마터면 의자에서 굴러 떨어질 뻔했다.
“그, 그게 무슨 말이오?”
“사람 말 못 알아들어요? 여동생 걱정 그만 하라고요. 우리 장 가가를 그리 못 믿는 눈치도 아닌데.
그냥 마음 편하게 식사나 하란 말이에요.”
“여동생이라니?”
냉정을 가장하혀 했으나 북궁단야의 차가운 표정은 이미 깨진 상태였다. 당황하는 사람을 지켜보면서
즐기는 악취미는 없는지라 정혜란이 그의 얼굴을 외면하며 젓가락을 바로 해주었다.
상대가 민망할 때는 눈을 마주하지 않는 편이 최선의 배려다.
“몰랐나 본데 우건 공자, 아니, 소저와 꽤 친한 편이에요. 가끔 그 아가씨가 범같이 용맹하고 얼음
처럼 투명하며 송옥같이 잘생긴 오라버니에 관해 조잘거렸거든요. 실언인지 몰라도 이 동네에 있다는
말을 하더군요.”
“그렇다면 왜 나를......”
마지막 저항은 차라리 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그녀의 말을 종합해 보면 무위가 기본적으로 뛰어나겠고, 얼굴 잘 생기고, 거기다 냉기 풀풀 날리
겠고, 마지막으로 이곳에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테니, 양양 천지를 둘러봐도 공자 말고는 위의 조
건에 부합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으, 으음......”
동생의 입방정이 원망스러웠지만 어쩌겠는가. 이니 물은 엎질러졌거늘.
“왜요? 제가 알면 안 되는 일이었어요?”
“그건 아니오.”
“그럼 됐네. 안 들어요?”
안 들 수가 있나.
마지못해서 일단 탕 한수저를 뜬 그가 억지로 입안에 밀어 넣었다.
“......!”
“생각보다 그럴듯하지요?”
“아......”
놀라움에 가득 찬 눈으로 탕과 정혜란을 번갈아 바라보던 북궁단야가 이번에는 야채 볶음을 맛보고
묵묵히 젓가락을 놀리지 시작했다.
이 여자는 비단 음식을 많이 할뿐더러 재료의 맛을 최상으로 끌어올리는 재주까지 있었다.
담담하게 식사를 하던 그가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오리 구이를 맛보고는 끝내 감탄사를 토해야만 했
다. 이런 음식을 먹게 해준 두 사람에게 감사하며.
“정말로 맛이 있군. 정말 맛있어.”
“에이, 급하게 만든 건데......”
침착하게 만들면 어떻다는 건지.
열심히 음식을 밀어 넣던 북궁단야가 문득 젓가락을 세우고 짧은 회상에 잠겼다.
“뭐예요? 아무리 바쁜 일이라도 식사 중에는 잊어야 한다고요.
“음식까지 잘하는 줄 알았더라면......”
“에?”
물처럼 흘러나오는 독백.그는 뭔가를 회상하는 사람처럼 허공 어딘가로 시선을 두고 입가에 작은 미
소를 하나 떠올렸다.
“음식까지 잘하는 줄 알았더라면 그대를 그릴 순간이 다만 몇 번이라도 더 있었을 텐데.”
화끈.
천하의 정혜란도 이 순간만은 붉어지는 볼을 어쩌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날... 생각했었나요?”
가는 떨림을 담고 그녀가 힘겹게 물었다. 만약 이 모습을 장추삼이 봤더라면 열 번은 뒤집어지며 웃
었겠지만 다행히 그는 이 자리를 지키지 못했다.
사실 놀라기는 북궁단야도 마찬가지였다. 용기를 내서 기름기 철철 흐르는 대사를 꺼내본 것인데 이
게 의외로 먹혀들어 가고 있다.
차갑고 이지적인 그의 성정에 어울리지 않는 화법일 것 같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외면적인 모습일 뿐,
사람이라는 동물은 한 가지의 성향만으로 규정되지 있지 않다.
그도 느끼해야 할 땐 얼마든지 느끼해질 용의가 있다!
승부수를 던져야 할 때라면!
다시 한번 북궁단야의 초강수가 날아들었다.
“생각하지 않은 시간을 헤아리는 편이 빠를 만큼.”
그래도 성격은 남 못준다. 이런 순간까지 그는 특유의 절제된 언어로 감정을 표현하고 있었다.
아무려면 어떠랴? 받아들이는 이가 행복하면 그만이지.
한껏 달콤해진 정혜란이 배시시 웃었다.
“이순간에 이런 말하기 뮛하지만, 이번 일이 끝나면 신문으로 복귀해야 하오?”
“음?”
당황한 그녀의 표정이 재미있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린 북궁단야가 하운과의 대화를 말해 주었다.
“소저를 일개 시비로 볼 바보는 없소. 하 형과의 관계, 그리고 소저의 분위기로 미루어 당연히 화산
의 제자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지.”
“이렇게 되니까 피장파장이네요. 아무튼 대사형은 못 말린다니까.”
사람이 너무 좋아서 탈이야, 하고 구시렁거리는 정혜란의 말을 들으며 북궁단야는 적잖이 놀라야 했
다. 지금의 얘기를 놓고 볼 때 놀랍게도 정혜란은 화산의 일대제자급 항렬이라는 말 아닌가.
“그랬었군.”
“뭐가 그랬다는 거예요?”
“아, 아무것도 아니오. 그럼 일이 수숩되면 반드시 복귀를 해야겠구려?”
“글쎄요?”
오른손으로 턱을 괸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다 혓바닥으로 입술을 축였다.
“전이라면 그랬겠지만 이제는 생각이 달라졌어요.”
“어떻게 말이오?”
“산문에 매여 있을 때만 해도 검도의 최고봉이라는 검강이라도 익힐것처럼 달려들었지요. 여자의 몸
으로 전설의 암향부동화를 꽃피워 보겠다면서 침식도 잊고 밤낮으로 검에 매달렸어요. 그런데 말이죠,
아무리 노력을 해도 뭔가 기갈을 느꼈어요. 아무리 먹어도 배를 채울 수 없는 걸귀처럼.”
선머슴처럼 머리를 벅벅 긁으며 웃던 그녀가 어깨를 한 번 으쓱여 보이고 입을 비죽 내밀었다.
“그러다 이곳에 오게 되었지요. 정말 죽을 만큼 싫었는데... 또 지나다 보니 그럭저럭 견딜 만하더
라고요. 이 집 식구들은 웃기는 게, 사람을 너무 편하게 만들어 버려요. 그래서 어느 날부터인가 검에
대한 집착을 버렸었어요. 그냥 이대로의 삶도 괜찮을 것 같아서 말이죠.”
무인으로의 삶, 그리고 여인으로의 삶, 과연 어느 편이 행복할까?
“그렇다고 검을 버린 것도 아니고, 그런 어정쩡한 상태에서 편안하게 지내다 보니 예전의 성격도 다
죽어버리더군요. 예전이 뭘 꿈꿨는지조차도 잊을 만큼 말이에요.”
“뭘 꿈꿨는지조차 잊었다?”
그의 반문에 정혜란이 나무 막대기 하나를 무릎 위에 얹어놓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일반적인 참선의
모습이었지만 밥상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니 어쩐지 우스웠다.
“자, 봐요. 그럴듯하죠? 보통 산문에선 검을 휘두르지 않을 때면 이런 식으로 검과 함께했지요. 아
무리 물어도 안 된다는 식이었다고요. 적어도 하루에 열 시간 이상은 이러고 있었죠.”
그녀의 말에 북궁단야도 고개를 끄덕였다. 정혜란의 지금 모습, 그리 낯선 그림도 아니거니와 그 자
신도 찬바람 맞으며 저런 장면을 수도 없이 연출했었으니까.
“그런데 이 집에서 이런 모습을 보인다고 해봐요. 바로 정체를 들켰겠죠? 어르신들 역시 조심하라고
당부하셨고. 해서 억지로 참았지요. 처음에는 좀이 쑤셨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해지더라고요.”
어릴 때는 그렇게 싫었던 좌선이었는데, 하며 킥킥 웃던 그녀가 이번에는 막대기를 들어 붕붕 휘두르
다가 부엌에서 칼질을 하는 시늉을 연출했다.
“장검은 만질 형편이 아닌데 부엌칼은 하루 종일 쥐어야 하는 운명이 되었죠. 우습잖아요? 화산의
일대제자 정혜란이 부엌에서 야채나 다듬는다는 게.”
별로 우습지 않았다. 그녀가 화산의 일대제자고, 얼마나 대단한 검공을 익히고 있는지 몰라도 북궁단
야에게 지금의 정혜란은 더없이 멋있으니까.
“뭐, 그냥 저냥 때운다고 생각했어요. 이 생활 말이에요. 조금만 참자, 조금만 참으면 식순이 면한
다. 볕 들 날이 올거다. 후후후......”
“그런데 도는 어디에도 있더라고요. 경치 수려한 산속에만 있더라는 거죠.”
“지당한 말이오.”
지당하긴.
그의 반응은 잔혀 진지하지 않았다. 오로지 그녀와의 대화를 즐기는 눈치였기에 정혜란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마음에 둔 이와의 시간도 행복하지만 전하고자 하는 의도가 가로막히는 갑갑함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하면 이 남자를 이해시킬 수 있을까.
“문자 하나 읊을 테니 웃지 말아요?”
“얼마든지.”
의자에 등을 기대고 편안하게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북궁단야의 얼굴에 절로 미소가 어렸다.
이 여자, 비단 음식을 잘할뿐더러 말솜씨 또한 일품이 아닌가. 왠지 그는 지금 이 순간이 모든 일이
종식된 어느 날처럼 느껴졌다.
그때라면 배경이 천산이길 바라면서.
“도가도 비상구라고 했지요. 몇십 년을 참선하며 도사 흉내 냈을 때도 그저 자구에 연연했을 뿐 크게
와 닿았던 문구는 아니었지요.”
도가도 비상구.
도가에 몸담은 사람뿐만 아니라 특별히 도가 쪽 사람이 아니더라도 아는 이가 많을 정도로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이 문구는 노자의 도덕경 첫머리에 실린 문장이다.
가만히 북궁단야의 얼굴을 바라보던 정혜란이 막대기를 내려놓고 목소리를 돋두어 도덕경의 첫 구절
을 낭송하기 시작했다.
......도를 도라 하면 참다운 도가 아니요.
이름을 이름이라 하면 참다운 이름이 아니다.
무명은 하늘과 땅의 비롯함이요.
유명은 만물의 어머니라.
그러므로 언제나 무욕으로서 그 오묘함을 보며
언제나 유욕으로서 그 가장자리를 볼 뿐이다.
이 두가지는 같은 것인데, 다만 그 이름이 다르다
이 둘의 같음을 일컬어 현묘하다 하니
모든 오묘함의 문이다......
그녀의 낭랑한 목소리는 좁은 방안을 꽉 채우고도 모자라 집 안 구석구석까지 퍼져 나갔다.
“음......”
“좋은 말이죠?”
“자구(字句)야 좋은 말임에 틀림없는데 그속에 담긴 깊은 뜻까지야 어찌 헤아릴 수 있겠소?”
지그시 눈을 감고 문장을 음미하던 북궁단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왠지 그 모습이 귀여워서-이말은
본인이 들었다면 펄펄 뛰었을 테지만-정혜란이 콧등을 한번 쫑긋거렸다.
“깊은 뜻? 맞아요. 그런 것 때문에 속는 거라니까. 장 가가 말대로 선입견처럼 무서운 건 없어.”
“선입견이라니?”
뭔가 바보가 되어가는 것 같아서 북궁단야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수많은 선입견이 있겠지만 지금의 경우는 `단정` 이라는 이름의 나쁜 버릇이겠지요. 옛 성현의 말
씀을 들을 때면 왜 다들 엄청난 의미가 숨어 있다고 생각할게요? 그냥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면 안 되
요?”
“음?”
번쩍 눈을 뜬 북궁단야에게 정혜란이 손을 내밀어 집 앞 공터로 안내했다. 무엇을 얘기하고 싶기에
이런 곳까지 그를 데려운 걸까.
“어떤 바보 같은 아저씨에 관한 얘기를 해줄 테니 자신의 선입견을 돌아봐요.”
뜬금없이 웬 바보 아저씨?
“변태 중년인인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 에고,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거냐. 아무튼 무학에 꽤
깊은 조예가 있는 사람 같았는데 그런 이들도 흔히 범하는 오류에요. 그게 뭐냐 하면......”
들고 있던 목검을 곧우세운 그녀가 짧은 기합성을 내지르고 태산압 정식으로 내리그었다. 그것을 시
작으로 정혜란은 목검으로 광풍을 만들었는데 그야말로 폭풍검이라는 명호에 어울릴 만한 무위요, 검식
이었다.
짝짝짝!
“훌륭하오.”
마지막 변화를 끝내고 종수식을 밟는 그녀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던 북궁단야가 그녀에게서 목검
을 건네받아 이리저리 휘둘러 보았다.
“굉장하군. 이 보잘것없는 나무 막대기가 방금 전까지 호풍환우(呼風喚雨)의 기세로 천지를 종횡했다
는 건가. 정말 멋진 검식이었소.”
“그래요? 에헤헤......”
기분이 좋아져서 입을 헤벌리고 웃던 정혜란이 정색을 하고 검을 빼앗아 들었다.
“내가 지금 뭐 하는 거냐. 칭찬받자고 이 난리를 부린 게 아닌데......”
스스로 묻고 스스로를 책망하던 그녀가 막대기를 따에 푹 꽂고 빙글 돌아 북궁단야를 쳐다보았다.
“지금 검식을 보고 뭘 느꼈나요?
뭘 느끼긴, 무서운 여자라는 걸 한 번 더 확인한 정도지.
물론 이렇게 얘기했다간 경을 칠 일이라 헛기침을 몇 번 토한 그가 진지하게 말을 꺼냈다.
“일단 검식에 실린 힘이 대단하고, 시전자의 마음이 얼마나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는지를 알 수 있었
소. 소저는 내 예상을 뛰어넘는구려.”
“에고고, 제 예상을 뛰어 넘는 건 공자예요. 그럼 이건 어때요?”
손을 설레설레 저으며 외면하던 정혜란이 다시 목검을 움켜쥐고 몸을 둥실 띄워 손을 떨쳤다.
쿠루릉!
공격을 일으키지도 않았는데 노도와 같은 검기가 공터를 수놓았다. 대단하다면 대단한 검법. 하지만
방금 전의 검식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아까와는 다른 뭔가를 기대했던 북궁단야의 얼굴에 실망감이 맺힐 때 무겁디무거웠던 그녀의 검기가
한순간 씻은 듯이 사라지며 난초와도 같이 유연한 변화를 그려내기 시작했다.
`오!`
무거움에서 가벼움으로의 급작스런 전환도 어려운 일일진대 변환의 시점을 잡아내지 못할정도로 자연
스러웠으니 아찌 감탄스럽지 않은가.
북궁단야의 탄성이 새어 나오기도 전에 버들강아지처럼 하늘거리던 정혜란의 검적이 천지를 메울 듯
한 다변초를 파생시켰다.
이렇게 강약과 변화를 섞어서 한동안을 뛰놀던 그녀가 움직임을 멈추고 재차 물었다.
“이번에는요?”
분명 함정을 파놓고 던진 질문일 게 뻔한데도 검식에 취한 그가 생각나는 대로 대답을 해버렸다.
“중검, 거의 패도적인 기질의 중검식에서 물처럼 유연한 유검으로 거기서 다시 산검식으,로까지의
전환! 오늘 내가 개안을 했소.”
아낌없는 찬사였건만 정혜란의 표정이 뭔가 이상했기에 북궁단야가 자신이 했던 말을 곱씹어보았다. 원
래 여자들은 잘못 선택된 단어 하나에도 민감한 반응을 보이니까.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특별히 기분을 상하게 할 만한 대목은 없었다.
“소저, 내가 무슨 실수라도......”
“중검에서 유검, 그리고 산검이라고 했죠?”
“그렇소. 그게 왜......”
“역시 공자도 그 한심한 아저씨와 똑같은 대답을 하고 마는군요.”
말을 바꾼다면 자신 역시 한심하다는 것 아닌가. 말허리를 두 번이나 잘리면서 성실히 응대했건만 돌
아오는 게 이런 비난이라니.
“말이 조금 지나친 듯하오.”
싸늘하게 내려앉은 그의 말투에 정혜란의 눈이 조금 커졌으나 곧 원래대로 돌아왔다.
“제가 심했다면 사과드리겠어요. 원래 말주변이 없어서... 하지만 공자의 대답은 역시 한심해요. 공
자 정도의 사람이라면 그런 대답을 해서는 안 되죠.”
`나 정도의 사람?`
무슨 말일까.
별말이 아닌데도 묘하게 신경이 쓰여 북궁단야가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까 도덕경의 내용에 속뜻이 있을 거라 했지요? 자, 보세요. 도를 도라 하면 그건 참된 도가 아니
고, 이름을 이름이라 하면 참다운 이름이 아니라고 했어요. 생각해 보세요. 도(道)라는 게 언제부터 도
였어요? 아니, 도라는 게 과연 있기나 한 거예요? 만약 잇다면 도가 뭘까요? 산속에 틀어박혀 신선 놀
음하는 게 도예요?”
천천히 북궁단야의 눈빛이 침전되기 시작했다.
`역시!`
이 남자는 말을 하면 알아듣는다. 알아듣는 정도가 아니라 찿아서 사고하고 되새길 줄 안다.
힘이 난 정혜란이 말을 이었다.
“같은 맥락으로 이름이란 걸 보자고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이름. 그것들이 과연 원래 그 사
물, 또는 현상들을 지칭하는 이름이었을까요? 그냥 누군가에 의해 붙여진 것뿐이잖아요? 뭔가를 표현하
기 위한 편의, 누군가의 필요에 의해 생겨났고, 끼리끼리 약속해 버린 관념덩어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게 이름이거든요. 가령 얘만 해도 언제부터 나무 막대로 불렸는지,나무 막대가 맞기나 한 건지.”
땅에 꽂혀 있는 막대를 손가락으로 퉁 튕긴 그녀가 숨을 한번 들이켰다.
“그러니까......”
하고 얘기를 이으려는데 이마에 몇 가닥 선을 그리며 고심하는 북궁단야의 초상이 그녀의 말문을 막
았다. 아직 이해가 안 된다면 조금 더 원초적으로 들어가 줄 필요가 있다.
“간단하게 말하죠. 제가 정혜란이라는 여자라는 정도는 잘 알 거예요. 그런데 알고 보면 이 여자가
화산의 일대제자란 말이죠. 또, 알고 보면 천애고아예요. 화산의 이대 이하 항렬에서는 야차 같은 여자
로 통하죠. 사제들은 삼사저라고 부르는데, 사형과 이사저께서는 삼사애라고 불러요. 그리고 여기, 장
대인은 혜란이, 장 가가는 정소저라고 부르죠. 그리고 공자께서는 그냥 소저라고 불러요.”
말을 마친 그녀가 문제라도 내듯 툭 질문을 던졌다.
“그럼 공자께서 강호에 나가 그린 식순이는 정혜란일까요, 화산의 일대제자일까요, 아니면 야차여인
일까요, 그도 아니면 장씨 집안의 수양딸일까요?”
“그모두가 하나일 테고 난 그 모두를......!”
번뜩!
대답하던 북궁단야의 뇌리에 무언가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이를 눈치 챈 정혜란이 방긋 웃고는 자
신의 말을 마무리 지었다.
“쉽죠? 숨은 뜻 같은 건 애당초 없다고요. 간결한 얘기를 복잡하게 만드는 건 오히려 우리들이라고
요. 아까만 해도 저는 그냥 검을 휘두른 것뿐이거든요. 그런데 무슨 중검이니 산검에 유검까지 나와요?
그럼 중검,즉 무거운 검식을 쓴다는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도끼질 하듯 검을 사용하나요? 아니잖아요.
검식이니, 열두 개의 검류니, 하는거 자체가 창조적인 생각을 죄어버리는 사슬 같은 게 아닐까요?”
그저 생활에서 발견한 도에 관한 얘기. 작은 출발점이 무리의 밑바닥까지 이르렀음을 정혜란은 모르
고 있었다.
뭔가를 가르치거나, 알려주려는 의도 따윈 없었으니까.
하지만 받아들이는 이는 달랐다.
`그래, 그래서......`
눈을 감은 북궁단야의 앞에 사방신과의 싸움이 그려진 건 가장 힘들었던 싸움이기 때문일까?
`난 기본적으로 중검수라고 생각했다. 르래서 늘 검을 잡으면 힘을 실어 보내는 쪽만을 생각했다. 건
암이라는 자의 공세 역시 힘으로만 상대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중검이 무엇일까?
문득 생겨난 의문.
중검이란 게 과연 있기나 한 걸까?
관념의 의심은 꼬리를 이었다.
`그렇다면 여태까지 내가 사용했던 검식은 어떤 류의... 아, 또 스스로의 한계를 결정지어 버리는 우
를 범하는구나!“
사무귀일.
시선 하나가 번뜩이면 천지에 남은 것이 없고 모든 것은 하나로 돌아가네.
일현성화.
하나의 성스러운 꽃이 피어오르니 그 앞에 대적할 것이 없네.
그다음, 그다음은!
여태까지 넘을 수 없었던 세 번째 초식의 벽.
`그런데 과연 사무귀일은 사선만을 고집하는 걸까, 그리고 일현성화는?`
투툭.
해체되고 있다.
완강하게 울러쳐 있던 관념의 약속들이 하나하나 모래알처럼 바스라지고 있었다.
완벽한 해체는 폐허, 폐허의 다음은?
...여태 쫓은 것이 과연 힘일까, 아니면 힘이라는 이름이었을까?
차가운 가을바람이 훅 스치고 지나가자 막대기를 툭툭 치며 장난하던 정혜란이 흩어지려는 머리칼을
매만졌다. 이제 겨울이 오려는지 고작 한 줌 바람인데 콧등이 얼얼해졌다.
“그럼 이제 들어가요. 별 얘기도 아닌데 괜히 부산을 떨었네.”
늘어지게 기지개를 켠 그녀가 몇 발자국 걷다 따라오는 기척이 없어서 홱 돌아보았다. 무슨 남자가
동작이 이리도 굼뜬 건가.
`어라?`
그는 아직까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저 생각을 하는 정도가 아니라 일종의 삼매경에 빠져 있었는데
현명한 정혜란으로서는 뭘 그리 고민하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절대 방해해서는 안돼.`
다만...
다만 지금이 북궁단야 일생에 몇 번 맞이하지 못할 정도로 소중한 시간이라는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
기에 그녀는 조용히 지켜보기로 했다.
`이 남자는 고민을 할 때도 멋들어지네?`
어떤 모습이 멋있지 않을까, 콩깍지가 씌었는데.
`바람 한번 좋다~`
뭐가 좋지 않을까, 정인과 함께인데.
북궁단야의 옆얼굴을 훔쳐보며 해실해실 웃던 정혜란이 그가 손으로 무언가를 찾는 시늉을 하는 걸
보고 들고 있던 나무 막대를 불쑥 내 밀었다.
눈을 감은 상태인데도 북궁단야는 정혜란이 내민 막대를 용캐 받아 들었다.
`뭘 하려고?`
그때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한번 흔들었다.
스륵~
물결처럼 유유히 흘러간 궤적. 그런데 정혜란의 귓전에 한줄기의 뇌성이 들린 것은 가을바람의 흥취
에 빠져 그녀만의 착각일까?
`지금 뭐지?!`
“휴우......”
천천히 눈을 뜬 북궁단야가 참았던 숨을 토해내다 놀란 토끼의 눈이 되어 있는 정혜란과 손에 들린
나무 막대를 번갈아 보고는 고개를 한번 흔들었다.
“도가니 비상도라... 정말이지......”
“도가오든 도래도든 지금 뭐 한 거예요?”
도래도.. 도를 부르니 그것이 도였다는 말일 텐데.
“나도 모르오.”
“엥? 한 사람이 모르면 누가 알아요?”
따져 묻는 그녀를 외면하며 북궁단야가 아까의 정혜란을 흉내 냈다.
“단지 검을 휘두른 것뿐인데 무슨 의미를 찿으려고 하는 거요. 의가의 비상의(意可意 (非常意)이니,
애써 의미를 찾으려 들면 그건 더 이상 참된 의미가 아닐 것이오.”
“이런 엉터리!”
“하하하하!”
고개를 젖히고 한껏 웃고는 북궁단야가 나무 막대를 정혜란에게 돌려주고는 정색을 하며 포권으로 그
녀에게 예를 표했다.
“선입견이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던 일개 무부에게 커다란 가르침을 내려준 화산의 정혜란 여
협께 진심으로 감사드리오.”
“그렇게 감사해요? 그럼 보답을 해야죠.”
고개를 숙였던 북궁단야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쳤다.
이럴 경우 정혜란이라면 ‘에이, 관둬요’라든가, ‘쑥스럽게 왜 이래요’ 따위의 반응을 보일 줄 알
았는데.
“무슨?”
“뭘 느꼈고 뭘 얻었는지 몰라도 그렇게 감사하다면......”
허리에 손을 척 얹은 정혜란이 왠지 긴장한 그의 반응이 재미있어서 키득거리며 두 손을 쭉 뻗었다.
“우리 집까지 업어줘요!”
“음?”
잠시 생각을 하던 북궁단야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안 되겠소.”
너무도 단호한 대답. 순간 무릎에 힘이 빠져 주저앉을 뻔했지만 정혜란은 이를 악물었다.
야속하지만 어쩔 것인가. 실질적으로 얘기다운 얘기를 나눠본 건 오늘이 처음인데. 들뜬 마음에 그만
실수를 했나 보다.
"제가 너무 선머슴아 같죠? 미안해요.“
풀죽은 그녀의 사과를 곁눈질로 지켜보던 북궁단야가 짐짓 차갑게 대꾸했다.
“고작해서 집까지라니, 안 될 말이오. 적어도 천산까지는 업어야겠소이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북궁단야가 정혜란을 번쩍 업었다.
“뭐예요? 나쁜 사람! 어서 내려줘요!”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정혜란이 북궁단야의 등을 마구 내려쳤다. 통상적인 여인네의 앙탈.
근데 아프다.
‘이건 타격이 다르군.’
순간 북궁단야는 여태까지 거들떠보지 않았던 외문무공에의 입문을 진지하게 고려하기로 했다.
“무겁죠? 이놈의 키가 문제라니까.”
“무겁다니? 새털보다 가볍구려. 소저는 음식량을 좀 늘려야겠소. 이렇게 가냘픈 몸으로 어찌 아이를
낳을 것이며, 어찌 한 가정의 안주인이 될까?”
생전 처음으로 가냘파진 정혜란이 북궁단야의 등에 가만히 얼굴을 기댔다. 스스로 강하다고 자부했지
만 역시 사내의 뒷등은 든든했다.
“얼음이라 생각했는데 보기보다 말을 달콤하게 할 줄 아네요? 이런 식으로 몇 명이나 꼬셨나요?”
“음......”
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자 정혜란의 눈썹이 역 팔자를 그렸다. 하긴, 이 얼굴에 이 정도의 언변이라면
넘어오지 않을 여자가 몇이나 될까.
그런데 안 될 말이다.
“몇이냐니까? 어서 바른대로 대요!”
“음...한 명!”
“에?”
“정혜란이라는 여자를 꼬셨소. 왜, 아는 여인이오?”
“이런 엉터리!”
“하하하, 정말로 천산까지 가오. 자, 갑시다!”
“아까부터 천산 타령인데, 그곳에 꿀단지라도 숨겨뒀어요?”
“나중에 알게 될 거요, 나중에!”
이질적이면서도 너무나 잘 어울리는 두 남녀가 가을 하늘 아래서 흐드러지게 웃고 있었다. 아무리 무
서운 돌풍이라도 으름장 한번이면 돌아가게 만들 두 사람이지만 서로에게는 한없이 약했으며 한없이 자
애로웠다.
이 순간만큼은 무림의 암운도, 비천혈서도, 고고한 사문도 그들에게 없었다. 그들에게는 오로지 그들
만이 있었고, 그래서 행복했다.
첫댓글 즐감합니다.
천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