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소설 주제는 김일성 일가의 최후와 대한민국 최초의 애니메이션, 프로스포츠 구단 출범이 되겠습니다.
시기는 1968~1970년이 될 것입니다.
1968년 1월 1일 오후 7시 정각 집집마다 온 가족이 모여 새 프로그램 뭔지 보기 위해 TV 근처로 왔으며 남녀노소 할 것 없이 TV를 응시하였다. 정각이 되자 곧 프로그램이 시작되었고 대체 어떤 프로그램인지 궁금하기 따름이었다. 웅장한 여는 곡과 함께 프로그램이 시작되었으며 그것은 실사가 아닌 2차원 그림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바로 만화영화 제목은 ‘안드로이드 플래틴’이었으며 본 프로그램이 시작하기에 앞서 여는 곡은 프로그램에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 건지 보여주었다. 여는 곡은 프로그램에 있어서 결코 없어서 안 될 소재이며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필요했기에 자주 등장하는 요소 중에 하나였다. 여는 장면에 제작진 목록이 보여졌는데 원작자는 ‘임장휘’였으며 월간 ‘락산’에서 연재 했던 만화였다.
애니메이션 제작은 한천동화사(현:갤럭시 아트)에서 맡았으며 방영은 서라벌 20 채널(현:TV 서라벌) 계열 방송국에서 하였다. 광고대행사는 조선광고사(현:ADC)에서 맡았으며 이 작품을 알리는데 주력했으며 음반을 비롯한 다양한 전개를 이었다는 걸 보여 줄 수 있었다. 그 시기 방송국은 서라벌 20 채널을 포함한 고려 TV, TBC, 대한교육TV(현:TV 아리랑) 4개 민영종합방송국과 국가에서 운영하는 국영방송 KBS이었다. 지금의 TV 서라벌 계열 1968년 당시 기준 지역가맹방송국은 다음과 같은데 평양을 비롯한 남포 일부 지역을 방영하는 류경방송(현:TV 평양), 동해방송(현:TV 관북), 호서도민방송(현:DTV 대전), 전라도민방송(현:JN 전남), 사로방송(현:대구 TV), 동래 텔레비전(현:TV 경남), 패서방송(현:TV 해주), 텔레비전 관서(현:신의주 TV), 청북방송(현:TV 청진), 호북방송(현:뷰 전북)이었다.
그 시기에 방송권역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현 시기처럼 광역방송이 아니었으며 이시기 TV 서라벌도 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중반 까지는 시청권역은 주파수 전파에 한해서만 한정되어 있었다. 그 시기에 크로스 넷 방송국으론 지리산방송(현:진주방송), 금성방송, 영남 TV, 청주 TV 방송, 태백방송, 삼강방송, 낭림 TV 방송, 통화 TV 방송, 반점방송, 두만강방송(현:신두만 TV)였다. 아직 가맹하지 않은 지역방송국은 해당 방송국에서 방영하는 프로그램을 판매 형식으로 방영하였으며 아직까지 서울 소재 방송국에 가맹하지 않은 지역방송국이 상당했다. 해당 소속 가맹방송국은 같은 시각에 프로그램을 방영 할 수 있지만, 다른 가맹방송국에 속한 지역방송국은 며칠의 간격으로 방영 하였다. 물론 이중으로 가맹한 방송국도 마찬가지이며 해당방송국 계열 프로그램에 따라 방영시간을 달리 방영하였다.
이 시기 서라벌 TV 말고도 다른 방송국 지역가맹방송국은 다음과 같으며 고려 TV 경우 안학방송(평양·평남권), 동래방송(부산·울산·동부 경남), 달구벌방송(대경권), TV 압록강(압록강권), TV 함북, 해주 TV 방송(해주권), 강원중앙방송망(영서), 전라도민방송(현:전북 1 채널)(전북), 반점방송, 승주방송, 안동TV(현:영남 TV), 승주방송(한려권), 청주 TV 방송, 양주방송(현:중부경남방송)이었다. 대한교육 TV는 대동방송(지금은 TBN 계열 방송국), 함원방송(현:KBA 함원방송), 홍화방송, 대전 TV 방송망(현:회덕 TV 방송망), 무진주방송(현:광주 TV 방송), 부울방송(현:남경방송), 영남 TV, 태백방송, 해서방송, 지리산방송(현:진주방송/그당시 프리 방송국었음), 텔레비전 청진(현:신 관북방송)(지금은 DNT/DAN 계열국),정주방송(현:묘향산 TV 방송), 단동방송(현:단동방송망)(지금은 TBN 계열 방송국), 도문방송(현:신두만 TV)(지금은 DTN 계열국)이었다.
1964년 12월 7일에 개국한 TBC는 1968년 기준으로 다음과 같은 지방가맹국은 다음과 같은데 아리랑방송(지금은 DNN 계열국), 부산 동양방송, 함원 텔레비전(현:삭방 TV 방송망), 압록방송(현:관서 TV방송망), 대전 텔레비전(현:호서방송), 광주방송(현:전일방송)이었으며 1967년 10월에 개국한 호남도민 텔레비전(현:전북 TV)와 예성방송(현:TV 예성)과 프로그램 제휴를 맺어 가맹방송국이 되었다. 아직까지 가맹하지 않은 지역방송국은 있으며 곧 개국을 앞두고 있는 동아 TV가 개국하면 그동안 독립방송국 형태로 판매 형식에서 서울 직영방송국으로부터 방송내용을 송출 받아 같은 시간에 방영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이크로파 개통으로 서울에서 해당방송국에서 방영하는 내용을 그대로 전달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해외 만화영화가 방영하기 시작한 건 미국 ABC에서 방영중인 록키와 블링크 쇼였으며 방송은 고려 TV가 하였으며 우리말제작은 현음신사에서 하였다. 방송법에 따라 당연히 외국에서 들여오는 영상물은 당연히 우리말 제작을 하게끔 하였으며 수입하는 외화 역시 마찬가지였다. TBS 계열에서 방영했던 철완 아톰 실사판은 대한교육TV에서 방영하였으며, 미국에서 인기리에 방영한 보난자는 고려 TV 계열에서 방영되었으며 당시 미국 CBS에서 방영중인 ‘명견 래시’가 서라벌 20 채널에서 방영하였다. 당시 방송환경은 토크 쇼를 비롯한 토론 및 다큐멘터리 형식 제작이었으며 생활 교양 같은 그러한 프로그램을 제작하였다. 1958년까지 단막극 형식 드라마로 제작되었으며 1959년부터는 드라마를 편수를 정해놓고 제작하게 됨으로서 장편 형태로 발전해 나간다.
그러다가 1963년 고려 TV에서 조직개편에 따라 애니메이션을 방영하고 제작과 수입을 담당하는 만화영상부가 신설되었으며 서라벌 20 채널은 동화운영본부가 설치되었으며 대한교육TV도 동화사업부를 설치하였고 TBC 역시 동화제작부를 신설한다. 이는 방송사가 애니메이션 제작에 관여하며 해당제작회사와 광고대행사가 보조를 해주겠다는 것으로 열악한 환경에서 쾌적한 환경에서 제작을 하려는 것이었다. 이는 극장판 애니메이션 제작을 했던 회사나 작화 하청을 맡았던 회사에게는 기회이기도 하였으며 그동안 한정되었던 만화영화를 브라운관에 보여줄 필요가 있었고 시청자에게 가까이 다가서는 것이었다. 이 시기부터 광무를 비롯한 여러 애니메이션 제작사는 각자의 노하우를 갖췄으며 이제 슬슬 원작만화를 기반으로 애니메이션으로 만들 준비를 하였다.
후지 TV에서 인기리에 방영 중인 ‘우주 소년 아톰’은 1965년 2월 7일 토요일에 방영되었으며 데즈카 오사무 원작인 만화로 일본 현지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만화였다. 방송시간은 매주 토요일 6시 25분이었으며 시청자가 관람하기에 좋은 시간대였다. 중간에 시간대가 오후 6시 30분으로 5분 조정하였고 요일 역시 일요일로 변경하였다. 보통은 주 2회를 해야 하지만, 중복 캐스팅을 막기 위해 1주일 방영을 하였다. 이 시기 어린이에게는 오락거리가 없던 시절에 만화영화가 안방에서 본다는 건 큰 즐거움이었다. 그 외에도 철인 28 호(1작)가 같은 방송국에서 방영되었으며 시청률은 평균 25~30%이며 상당한 인기를 구가하였다는 것을 엿볼 수 있었다.
국내 애니메이션 회사들도 2~3년 안에 원작 만화나 창작 만화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 TV 방송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한천동화사에서 임장휘 원작 ‘안드로이드 플래틴’ 애니메이션을로 만들기 시작하였으며 다른 경쟁사인 광무 역시 TV 애니메이션 제작에 착수하였으며 판옥선천연동화사도 마찬가지였다. 타국의 하청을 맡으면서 애니메이션의 제작에 노하우를 쌓아 나갔고 아직 걸음마 수준이지만, 점차 발전해 나가며 무한한 잠재성이 아직까지 많다는 거였다. 일부 애니메이션 제작사는 하청에서 벗어나 슬슬 창작 애니메이션이나 원작만화 토대로 하는 애니메이션 제작의 기초로 마련하였다.
미국에서는 1950년대 중반에 TV 애니메이션을 방영하기 시작하였으며 이웃 일본 역시 1963년부터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기에 이른다. 물론 우리나라의 문화의 고유성을 지키기 위해 만화영화를 브라운관에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한편 1965년도 데즈카 오사무의 작품 은하탐험대가 고려 TV 계열에서 방영되었으며 하라이 카즈마사 작품이며 TCJ(현:에이켄)제작한 사이보그 전사 에이트맨<원제:8맨> 마찬가지로 서라벌 20 채널에 방영하였다. 그리고 토에이에서 자체 제작한 애니메이션인 ‘늑대소년 케빈<늑대소년 켄>’이 대한교육TV에서 방영되었다. 물론 대부분 더빙되었기 때문에 녹음해둔 필름은 향후 발매되는 영상매체 위해 반드시 녹음 내용을 보관해야만 했다.
1966년에는 각 방송사는 애니메이션 방영시간 오후 6시에서 8시까지 잡았으며 그 시기는 일본이나 대한민국 모두 좋은 시간대에 배치하여 시청자가 원하는 시간대에 볼 수 있도록 하였다. 현음신사와 녹현 스튜디오, 솔 기획, 현전스튜디오, 황장기획, 소시 프로덕션, 오리엔탈 미디어 같은 녹음제작회사가 있으며 영화제작이나 영화배급, 해외영상물 수입 배급 및 TV 프로그램 제작, 광고제작, 프로모션 이벤트 주 업종으로 하는 회사였다. 국내외 영상물제작 맡았으며 국내에 경우 프로그램 제작에 참여하며 영화도 배급을 한다. 해외에서 수입하는 영상물은 대부분 더빙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며 방송법상 더빙이 의무화되어 있기 때문에 언어권이 한정된 나라에서 대부분 자국말로 제작하는 것이 당연했다.
히사마츠 후미오 원작 SF 만화 미래소년 제타<슈퍼 제타>가 고려 TV에서 방영되었고 토에이 SF물 창작 애니메이션 <우주패트롤 호퍼>가 대한교육TV에서 방영되었으며 평균 시청률이 30%로 육박하며 상당한 인기를 누렸다. 그리고 서라벌 20 채널에서 방영한 정의용사 빅X<빅X>는 데즈카 오사무 작품으로 SF물로서 세계를 정복하려는 악에 무리에 맞서는 정의용사가 인상적으로 묘사하였고 당연히 인기가 높았다. 애니메이션을 접한 이후 계림사에서 데즈카 오사무 작품 만화를 정식으로 번역하여 출판하게 되었으며 애니메이션 방영을 개기로 일본 만화를 정식으로 수입하기 시작한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밖에도 원더랜드 삼총사<W3>가 서라벌 20 채널에서 방영되었으며 후쿠모토 카즈야 원작 SF 만화인 초능력소년 천호<우주소년 소란>이 같은 방송국에 방영하였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 만화정보 잡지가 창간되었는데 천영사에게 발간하는 월간 만락동식(漫樂動式)이었다. 요즘에는 각종 만화 잡지가 즐비하여 각종 애니메이션과 만화를 비롯한 소설 관련 정보와 관개 되는 소식을 다뤘다. 창간은 1965년 4월에 창간하였으며 처음엔 짝수 격월간지로 시작하였으며 판매 부수가 늘어나자 월간지로 전향하였다. 그 당시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었으며 만화 정보 잡이야 말로 출판에서 발간하는 만화 발매 정보를 비롯하여 애니메이션 프로그램 정보를 알려주었다. 지금 가격은 4,500원이지만, 1965년 당시에는 25원 10전이었으며 서점가 진열대에 놓아 사람들 관심을 끌게 하였다. 현재 만락동식은 기술의 발전으로 전자책으로 발행하며 돈을 내는 방식으로 내려 받아 태블릿 PC를 비롯한 모든 기기와 스마트 폰에서 간단히 볼 수 있게 하였다.
일본 보다 먼저 애니메이션 잡지를 애니메이션 잡지를 창간하였고 만락동식(천영사)과 애니인포(본예서문), 동화직번(연집사), 애니저널리(각산서점), 그림천리안(팰리스 에닉스)를 대한민국 5대 만화 애니메이션 전문잡지로 꼽힌다. 그 당시만 해도 만화발행 정보를 비롯하여 출판사 소식을 다뤘지만, 애니메이션 관련 소식도 다뤄졌다. 그 외에도 작가 올리는 소설을 비롯하여 연재하는 만화를 볼 수 있었으며 주요방송사의 편성표를 볼 수 있었다. 저널리즘 다뤄지며 국내 애니메이션 제작 경과를 비롯하여 해외 소식도 중점으로 다뤄지며 각종 기사거리가 다뤄진다. 성우 소개를 비롯하여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담당자와 만화잡지에서 연재하는 작가를 소개하며 만화작품의 설명을 다룬다.
아무튼 대한민국에서도 최초의 주간만화 잡지가 나왔으며 공회당에서 발간하는 주간 일성일이 1958년 10월에 창간하였으며 우함문고 역시 비슷한 시기에 소년 만당을 창간하였다. 천영사는 여성 취향에 맞는 순정만화 잡지를 발간하는데 24 절기 중 하나인 ‘雨水’가 1959년 4월에 창간하였으며 그 전에 명랑만화 잡지인 누리비차 1955년 4월에 창간하였다. 다른 출판사들도 만화잡지를 창간하였으며 계림사는 월간 ‘토끼풀’을 내놓는 등 무조건 타국의 만화를 베끼기 보다는 독자창작을 필요로 하며 선의 경쟁이야 말로 만화의 질을 높이는 것이었다. 음지에 숨어 있는 그림 작가나 글 작가를 찾아내어 해당 만화 잡지의 간판을 내세워 양과 질 향상을 기여함과 동시에 창작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해주었다.
경제성장에 힘입어 먹고 살만해졌고 서민의 삶도 나아졌다 이에 따라 사람 각자의 소비를 할 수 있게 되었으며 만화도 그 중 하나였다. 사실 만화도 고단했던 시기를 보냈으며 경무대 똥통사건과 함남 일보 만평 사건 때문에 고초를 겪었고 이승만 정권은 지도자를 비난한 만화를 짓누려다가 만화·문화 쪽에서 일제히 반발하였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물러나고 만화의 표현의 자유를 다시 허용함으로서 안정을 맞이 하는가 했다. 그러나 5.16 군사정변으로 만화의 표현의 자유가 약간 제약을 받았으며 어떠한 정권을 비방하는 작품을 올리는 용납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러나 해방전후로 기반을 자리 잡은 만화산업을 뒤엎을 수 없은 노릇이며 함부로 짓누려고 했다가는 만화 쪽에서 반발할 수 있었다.
게다가 만화와 만화영화 산업은 수백억 값어치가 높은 산업으로 나라 경제를 뒷바침 해주는 기반이었다. 경제성장을 목표로 하는 정부로서는 꽤 난처한 일이었다. 정부는 새로운 방침을 내놓았고 정권을 비판하지 않은 선에서 부분적으로 표현의 허용하였고 미풍양속 같은 약간의 규제를 달았다. 냉전이 한창 격해진 시기였으며 따라서 반공을 소재로한 만화작품이 나왔으며 극장용 애니메이션 또한 반공을 국시로 하는 만화영화 작품이 나왔다. 현실 역사에서 대본소로 인해 대한민국 만화에 안좋은 영향을 끼쳤고 질적 성장에 제악을 받았다. 창작을 모토로 하는 출판사는 모방이 아닌 작가에게 자기만의 독창성이 있는 작품을 추구하게 하였다. 군사독재 속에서도 대한민국 만화는 어떻게든 활로를 찾으려는 모습이 보였다.
광무를 비롯하여 서울동화사, 한천동화사, 판옥선천연동화사 같은 유명애니메이션 제작회사는 극장판 제작과 하청으로 축적한 기반을 이제 TV 애니메이션 쪽으로 가닥을 잡게 된다. 원작만화를 기반으로 애니메이션을 만들기로 하고 작가와 출판사와 협의하여 애니메이션 제작에 착수하게 되는 것이다. 애니메이션 제작에 가닥이 잡히면 어떤 전개를 나갈 기획을 잡게 되며 이러한 진행을 위해 각본을 쓰게 된다. 여러 작가의 원작만화로 기반으로 만들어지거나 애니메이션 회사가 직접 기획하여 작품을 만든다. 작품 홍보를 위한 광고대행사는 해당작품을 홍보와 향후 상품 전개를 몰색한다. 그 시기(1967) 광무녹영화사가 제작중인 천체 마파람을 비롯하여 류성룡을 주인공으로 다룬 징비록을 비롯하여 판옥선천연동화사가 제작하는 손기중 원작의 전격전사 썬더크로스 였다.
애니메이션 회사는 원작 만화를 기반으로 한 애니메이션을 제작을 기획하였으며 잡지에 연재되었거나 연재중인 만화를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기에 이른다. 한편 만화 잡지사는 다음과 같이 변화가 있었으며 아리랑을 흡수한 본예서문은 월간 청년지 시리우스로 개칭하였고 송엽사는 그림소설 레이블인 화필문고를 창간한다. 만화잡지 '학원' 또한 주류출판사인 환성서간에 흡수되어 월간 카툰 페이지로 변경되었고 '만화세계' 역시 계림사에 편입되어 주간 '코믹유스'로 계칭하였다. 대한민국 만화는 서서히 대본소 만화 틀에서 벗어나 이제 만화 잡지 시대로 돌입하였고 경제 사정이 나아진 만큼 잡지에서 연재한 만화를 단행본으로 묶어 한몫에 보게 함으로서 만화의 내용을 보다 이해 할 수 있을 만큼 해놓았다.
그리고 1968년 이는 대한민국 만화의 획을 그려 놓는 뜻 깊은 해였으며 원작 만화가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져 TV 시대를 맞이하여 브라운관을 통해 생동감 넘친 만화를 보다 쉽게 접 할 수 있게 되었다. 그외에도 광무녹영화사의 천체 마파람은 주간 코믹유스에서 연재한 만화로 원작자는 소영진(蘇英晉)(1926~2008)이었으며 장르는 SF, 액션이었으며 대한교육TV 계열에 방영되었다. 7월에 방영한 전격전사 썬더크로스는 손기중 원작에 천영사에서 발간하는 만화 잡지 주간 존다크에서 연재한 만화로 세상을 위협하는 악의 무리와 맞선다는 내용을 담았다. 거신 갑철(1작)은 계림사 명량 아동만화 잡지 '하얀빛'에서 연재한 한대균(韓代均)(1931~현재)만화로서 1960년대 서울을 배경으로 세상을 정복하려는 악의 무리와 맞서는 내용을 담고 있다.
거신 갑철은 지금의 서라벌화실로 변경하는 서울동화사였으며 동시기에 제작한 애니메이션은 흑백이었으며 이웃나라 일본 역시 1967년까지 흑백 형태로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였다. 그 당시 TV 프로그램은 흑백화면으로 제작되었으며 컬러제작된 프로그램은 얼마지나지 않았다. 또한 류성룡을 주인공으로 한 징비록은 광무녹영화사가 제작을 맡았고 초반부는 흑백으로 제작되었지만, 중반부 부터 컬러로 제작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대한민국 TV 애니메이션의 첫발을 내딛는 것이었고 컬러 TV 보급이 저조한 만큼 아직까지 흑백 TV가 주류를 인 만큼 아직까지 흑백 프로그램이 대세였다. 김구 대통령이 문화는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하며 문화도 자기 국적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만큼 만화도 주류 문화산업으로 급부상하였고 애니메이션도 하나의 문화로 인식되어갔다.
해방 이전 부터 세워진 주류 출판사는 대한민국 만화의 기틀을 잡았으며 일본 처럼 잠시 동안 만화방 같은 환경이었으나 경제 사정이 나아지면서 만화방도 서서히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만화잡지에서 연재한 만화를 단행본으로 묶어 서점에서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으며 수많은 사람이 만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고 판매부수 만큼 인지세를 받음으로서 만화를 그리지는 작가에게 제값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현실 역사와는 달리 만화가는 좋은 대접을 받았고 애니메이션 제작회사는 장편 극장판 애니메이션에서 대중이 쉽게 접할 수 있는 TV 애니메이션 제작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이는 미국과 일본에 이어 애니메이션 제작의 반열에 올랐으며 이는 자국 문화와 민족 정체성을 일깨워 주는 것으로 만화가 서서히 미디어 매체에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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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4월 6일 따스한 봄이 물씬 풍기는 가운데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상암야구장에서 의미 있는 행사가 열리는데 바로 이날이 대한민국 프로야구가 개막하는 것이었다. 원형 경기장 형태로 설계되었으며 관중은 3만 내지 4만명 이상을 수용 할 수 있도록 건설하였으며 아파트 높이 3~4층 정도 되는 크기의 경기장이었다. 주차장 시설이 마련되었으며 주변시설에 편의시설을 마련할 뿐만 아니라 주변 도로는 4차선 이상으로 넓혔다. 수많은 관중이 가득 매운 가운데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역사의 순간을 보기 위해 전국에서 온 사람들도 많았다. 경기장이 만원이라서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집에서 TV를 시청하게 되었고 음식점이나 찻집에서 첫 프로야구 개막을 보려는 사람이 많았다.
대한민국 스포츠 역사를 열린 건 19세기 말일 것이다. 개화기 시절인 1883년 인천 제물포에서 영국 해군 군함이 축구경기를 한 것을 시초로 한다. 배구도 1902년 자강파 일원이었던 문연선(文淵宣)(생몰년도 1861년 3월 23일~1955년 2월 1일)이 미국을 갔을 때 LA에서 동호회가 배구 경기를 관전 하는 것을 보았고 이를 토대로 조선배구회를 결성한다. 야구역시 1904년 필립 질레트가 YMCA 조선 땅을 밟은 후 미군이 야구를 하는 걸 보고 선교활동을 위해 야구장비를 도입한데서 부터 시작하였다. 필드하키 역시 조선간도자치정부 학부 차관으로 지냈던 장양총(張洋叢)(생몰년도 1857년 11월 3일~1944년 2월 5일)은 유럽 각국을 순방하였고 프랑스에서 하키 경기를 관람을 하키 경기를 관람하게 되었고 그것이 대한민국 체육사의 시작이었다.
1908년 4월 13일 조선간도자치정부 학부 관계자가 제 4 회 런던 올림픽을 관람을 하였고 세계 각국에서 파견된 선수가 자기 기량을 선보이며 메달경쟁을 하는 것을 보았고 평화의 제전속에 치처지는 규모가 큰 체육행사였다. '체력이 국력이다' 쿠베르텡의 말 처럼 일찍이 근대화를 먼저 이룬 일본 모든 문물을 개방하여 근대 체육을 먼저 시작하였다. 그러나 경술국치로 국제대회에 출전할 기회를 없어지고 만다. 그럼에도 조선간도자치정부는 지역주민 체력향상과 체육 활동 증강을 위한 학부 육강국(育强局)을 신설한다. 비록 국제대회에서 나갈 기회가 없었지만, 지역민을 중심으로 체육회가 형성되었으며 그 밑거름인 학교 체육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었다. 보통학교 간 친선경기를 실시하여 서로간에 교류를 증진하게 하였고 중고등고등학교로 확대되었다.
최초로 이뤄진 경기는 1915년 9월 20일 용정에서 집안축구회와 연길시민축구회가 친선 경기를 펼쳤고 서로의 기량을 펼치며 물러시지 않은 한판 결판을 벌었다. 경기결과는 3대 2로 연길시민축구회의 승리였다. 그래도 서로간 친선경기를 함으로 지역의 우의를 다졌으며 화합과 협동심을 안겨다 주었다. 그런 와중에 일제의 탄압으로 YMCA 야구단이 망명을 하였고 질레트를 비롯한 허성등 주요 인물이 대한자유야구협회를 창설한다. 이들이 망명했을 쯤에 야구경기를 하기 위해 동호회 지역 구단이 형성되었고 중등교육기관에도 야구를 하는 학교도 있었다. 각 학교간에 야구 친선 경기가 열렸으며 프로야구의 시초라 할 수 있는 조선야구선수권 대회가 개막하였고 대회는 성황리에 치뤄졌다.
조선간도자치정부는 지역민의 체력 증진을 위해 체육을 육성하였고 1917년 난잡해 있던 체육기관을 통일하는데 그것은 바로 '조선체육증진위원회'였다. 즉 육상을 비롯한 다른 경기종목을 관리하며 각 지역에 소재해 있는 체육회를 중점관리하며 구기 종목을 비롯한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종목을 관리하는게 이들 소관이었다. 누구나 체육을 즐길 수 있게 하였으며 한 지역 체육회에 소속하여 지역 대표로서 자신의 기량을 인정받고 상대를 제압하여 승리의 영광을 앉겠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체육 열기는 북미 지역에 있는 재미 동포에게도 그 영역을 넒혔고 서로 간에 친선경기를 선보였다. 체력을 증진하고 체육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늘어남에 따라 조선체육증진위원회는 전국에 광범위한 체육제전을 준비하기에 이른다.
조선체육증진위원회 위원장으로 지냈고 해방 이후 첫 IOC 위원으로 선출 된 도윤준(道胤竣)(1866년 7월 30일~1958년 3월 2일)은 지역의 화합과 결의를 위해서 지역 체전이 필요했고 1919년 통화에서 총회를 연다. 대회이름은 전조선체육선수권 대회로 명명하였고 연길에서 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한다. 대회는 보름 남짓 열리며 개최시기는 10월 초중순 쯤에 열린다. 1920년 10월 3일 조선간도자치정부 수도 연길 공설운동장에서 지역 체육 제전이 개막하였다. 첫 행사는 지역의 다양한 무대와 공연이 펼쳐졌으며 지역민이 이 관경을 보기 위해 수많은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 다음은 각 지역 대표하는 선수입장이었고 그 당시에 영토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부군 단위로 지역 대표로 참가하였다.
27개 지역을 대표하는 선수단이 입장이 모두 완료된 가운데 간도자치정부 최고 정부수반이 국무령이 대회를 개회를 선언하였다. 그 당시에는 성화란 개념이 없었고 그 당시 큰 국제대회인 올림픽조차 암스테르담 올림픽 전까지는 성화 채화 과정은 없었다. 개회식 직후 다체로운 행사가 열렸으며 이곳에 모인 수많은 관중도 대회의 성공을 빌며 개회식 장면을 보았다. 이것은 이 대회가 영상물로 기록되었고 이러한 장면은 고스란히 기록되어 흠집이 없을 정도로 영상이 보존한 것을 알 수 있었다. 대회는 보름 동안 열렸으며 각 종목 별로 자기 신의 기량을 선보였고 지역 대표로서 자기자신과 싸움이며 정신과 체력을 어디까지 가는지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이 제전은 승자도 패자도 없었다. 승자에게는 영광을 패자에게는 격려를 해주며 체육정신이야 말로 진정한 근현대 체육의 밑거름이었다.
그렇게 보름이란 열전 동안 27개 지역을 대표 선수는 서로의 우정을 나눴고 지역사회와 화합을 조성하였다. 그렇게 폐막일이 가까워지고 밤이 되자 폐회식은 성대하게 열렸으며 종합우승을 차지한 지역에게 메달과 상장을 수여하고 2위와 3위를 한 이들에게도 메달과 상장이 수여되었다. 전국체전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조선체육선수권대회는 우수한 선수를 발굴하고 이를 육성할 목적으로 대회를 주최하였고 모든 인민이 더불어 체육에 관심이 보이도록 하는 거였다. 대회는 매년 열리며 지역을 순회 개최를 하였고 회가 거듭할 수 록 테니스를 비롯하여 농구 같은 종목이 늘어났다. 비슷한 시기에 열린 전조선야구선수권 대회는 전국체전으로 통합되기 전에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에서 열린 대회였으며 명칭은 조선체육대회였다.
그러나 1934년 관전에서 열린 제 15 회 전조선체육선수권 대회를 마지막으로 중단되었는데 이유는 일본이 중국을 정복하기 위해 만주를 침공하였기 때문이었다. 식민지 조선도 1937년 18회 대회를 끝으로 전조선 종합경기대회가 중단되었는데 그 이유는 일본제국의 강압통치로 인해 조선체육회가 해체되었다. 게다가 2차 세계대전까지 벌어지면서 종합경기대회는 열리지 못했고 광복군이 조국을 해방할 때까지 장기간 공백기를 보내야 했다. 일부 스포츠 선수가 대한광복군에 입대하여 조국 해방을 위해 싸웠으며 각 전장에서 활약하였다. 대회는 전쟁으로 막을 내렸으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문교부 소관된 조선체육증진위원회는 조국이 해방이 이뤄지는 대로 대회를 부활하기로 하고 이러한 계획을 착착 진행해 나갔다.
그 후 대한광복군이 국토를 수복함에 따라 35년 동안 암울했던 시기는 막을 내리고 마침내 해방을 맞이 하게 되었다. 조선체육증진위원회는 조선체육회와 통합하여 대한체육회로 이름을 바꾸었고 체육 관련 분야를 담당하게 되었다. 일제의 강압으로 열지 못했던 조선체육대회와 전조선체육선수권 대회를 통합하여 전국체육대회로 명명하였다. 조국이 해방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여 1945년 10월 11일에 서울 동대문운동장에서 개회식을 열었다. 개회식은 주제는 암울했던 시기를 막을 내리고 새로운 시대를 연대는 취지로 열렸으며 대다수 관중이 모두 입장한 가운데 조국해방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지켜보았다. 군정중인 서간도와 동간도 북간도를 제외한 13도를 대표하는 지역 선수가 입장하였다.
은숭겸(殷崇兼)(생몰년도1881년 4월 20일~1978년 11월 3일) 대한체육회 회장이 개회사에서 조국 해방을 맞이 한다는 의미에서 개회사를 읽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인 김구가 대회를 개회를 한 다는 것을 선언하였다. 대회기가 입장하였고 음악에 맞춰 깃대에 올려졌고 지역의 화합과 번영을 상징하는 대회기는 펄럭이며 대회의 성공개최를 기원했다. 그리고 민족의 영산 백두산에서 채화한 성화는 전국을 순회하며 성화봉을 다른 주자에게 불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성화의 최종주자가 육상트랙을 한바퀴 돈 뒤 왼편에 있는 성화대 근처에 올라가 성화봉을 불에 붙더니 성화가 활활 타올랐다. 이것은 암울했던 과거를 끝내고 영광의 시대를 알리는 것을 뜻하며 앞으로 해방된 조국에서 어느 누구도 외세에 간섭을 받지 않고 자유로운 만민이 된다는 것을 뜻했다.
서울에서 열린 전국체전은 보름가량 이어졌으며 지역을 대표하는 선수가 선의의 경쟁을 펼쳐 자신의 기량을 선보였다. 뿐만 아니라 주국이 해방됨에 따라 이제 누구나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다는 것을 뜻하였다. 수많은 관중이 경기장의 자리를 가득 채우며 선수의 경기 장면을 지켜보았고 먼 지역에서 온 응원단도 해당 지역 대표 선수에게 응원을 보내기도 하였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국제대회에 참가하지 못했으며 한국인으로서 올림픽에 참가했지만, 대부분 일본대표로 나가는게 대부분이었고 베를린 올림픽애세 마라톤 금메달을 딴 손기정이나 동메달을 딴 남승룡도 일본대표로 참가했기 때문에 은메달 딴 영국 선수 보다 원수의 나라의 대표로 나가는 경기에 나서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였다.
이제 민족을 억압했던 일본이 물러나가고 조국이 해방을 맞이 하였으니 독립한 나라로서 국제대회에 참가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렇게 보름 동안 펼쳐진 전국체전은 화려한 폐회식으로 갈무리를 장식하였고 다음 대회를 평양(1946년)를 기약하며 대회를 마무리하였다. 경기종합 순위로 1위는 서울이었으며 2위는 평양, 3위는 경남, 4위는 경기, 5위는 평남으로 차지하였다. 이 경기는 전국 순회개최로 전환하였고 성화 역시 민족의 염원을 담기 위해 최초로 하게 되었으며 채화 하는 곳 역시 민족의 영산 백두산에서 하게 되었다. 대한체육회는 IOC에 가입신청을 하였고 1947년 스톡홀롬 총회에서 회원국 자격을 얻음에 따라 국제대회에 참가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하계 올림픽 보다 먼저 참가하게 된 건 1948년 생 모리츠 동계 올림픽이었으며 이는 처음으로 참가한 대회였으며 비록 어려운 환경 속에서 참가한 대회였지만, 그래도 독립국가로서 참가한다는 건 의미가 있었다. 올림픽에 참가하는 선수와 임원에게 경비를 제공한 건 태화를 비롯한 본예, 옥성, 유성, 백화 같은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헌신한 민족자본이었고 보조는 대한체육회가 맡았다. 비록 메달권에 진입하지 못했지만, 최소한 10위 권에 들었으며 다른 나라 선수와 못지 않은 실력을 보여주었다. 체육이 먼저 발전한 유럽과 미국을 따라가 기에 아직까지 갈 길이 멀지만, 머지 않아 메달을 딸 수 있을 거라 기대가 있었다. 계속해서 투자를 해준 다면 유망 선수를 발굴 할 수 있을 것이고 메달권에 다가 갈 수 있을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열린 런던 올림픽은 대한민국을 주권국가 임을 알리는 대회이기도 하며 85명 선수와 임원을 이끌고 윔블림 경기장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여행경비를 비롯하여 그외 경비를 기업이 제공하였으며 이러한 어려운 여건 속에서 대한민국 선수는 각자가 맡은 경기에 임하였다. 대한민국 대표팀 성적은 그리 나쁜 건 아니었고 금메달은 아니었지만, 각각 은메달과 동메달을 땄으며 다른나라 선수 대표가 아닌 대한민국 선수 대표로서 메달을 목에 걸게 되었다. 보름 동안 축전은 8월 14일에 막을 내리는데 그 다음날이 광복절인 동시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하는 날이었던 것이었다. 공산주의 국가는 참가 초대를 받았지만, 내부 사정 때문에 참가하지 못했고 중화민국은 이런 저런 사정으로 참가하지 못했다.
대한축구협회는 정부 수립 이전인 간도자치정부 시절인 조선족구연합회 설립한 날인 1910년 2월 24일로 기준으로 삼았다. 명칭을 대한축구협회로 변경하였고 동호회 축구를 비롯한 전국실업축구와 초중고 축구경기를 운영하는 주체가 되었다. 1946년 4월 3일 중고등학생 전국 축구대회인 황호배(黃虎杯)가 개최되었으며 전국에 속한 중고등 교육기관에 속한 축구부가 대회에 참가하였다. 그리고 프로축구의 시초가 되는 전국축구대회가 열렸으며 24개 실업 팀이 참가하였다. 이는 일제강점기 압박을 받았던 민족체육이 해방을 맞이 하면서 협회와 단체를 세울 권리를 갖게 되었다. 각자 개성에 맞은 체육을 선택하며 자신에게 맞은 운동을 하였고 선수를 발탁하는 프로구단은 소속팀의 이름을 걸고 대표 선수를 내세워 다른 팀과 경쟁을 펼쳤다.
1950년에 벌어진 1차 한중전쟁으로 잠시 전국체전은 잠시 중단되었고 소강상태가 접어든 1951년 가을에 전국체전을 열 수 있었다. 그나마 피해가 없는 전라남도 광주에서 치러졌다. 이는 그동안 서울에서 개최하던 전국체육대회를 지방을 순회하여 개최함으로서 특정지역에서 개최하는 틀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전쟁이 끝나면서 각 지역이 너도나도 전국체전을 유치에 나서기 시작하였고 대한체육회도 개최지 선정의 주체가 되었다. 1952년에는 춘천에서 전국 체전이 열렸으며 1953년 해주에서 열린 대한체육회 총회에서 1957년에 열리는 전국대회 개최지를 부산으로 선정하였고 전후 복구의 뜻으로 개최하는 1958년 전국체전 개최도시 또한 평양으로 선정하였다. 이는 앞으로 전국체전을 유치하려고 후보지역이 나설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도 대한빙구협의회와 한국빙상협회, 대한배구협회, 대한농구협회가 창설되었고 필드하키의 경기를 주관하고 선수와 스포츠 구단을 관리하는 대한타구협회가 창설하였다. 1955년 10월 15일 에 실업빙구경기 대회가 열렸으며 12개 팀이 참가하였으며 류경산업빙구단과 덕원빙구단, 서울아이스하키팀, 강계자작나무빙구단 등이 참가하였고 대등한 경기를 펼쳤다. 이외에도 수영을 비롯한 각종 운동 관련 업무를 맡는 스포츠 협회가 생겨났다. 체육에 실무 있는 사업에게 협회장 자리가 주어졌으며 자기 잇속만 챙기는 자는 그러한 자리를 주어주지 않았다. 대한민국 체육 발전을 위해 노력을 기울렸으며 국제경기에 참가하여 실력을 쌓아 앞으로 열리는 큰 대회에서 그동안 쌓은 노력을 보여주게 된다.
올림픽의 지역 대회라 할 수 있는 아시안 게임은 1951년 뉴델리 대회가 시초였다. 그 이전에 극동 선수권 대회가 열렸지만, 일본이 중국을 침략함에 따라 사실상 중단 되었다. 1946년 종전 이후 아시아 국가가 독립하였고 손혁리는 제 14회 런던 올림픽에서 IOC 위원중 한사람 인도 출신 두트 손디와 만나 지역 스포츠 제전을 만들기 위한 논의에 착수한다. 참가국 중에 대한민국 중국, 인도, 스리랑카 등 6개국이 참여했으며 1949년에 몇몇 나라가 참여하였다. 아시아 선수권 연맹을 창립하고 모든 아시아의 스포츠 제전인 아시안 게임을 명명한다. 첫 대회는 뉴델리에서 열기로 하고 구체적 일정을 잡았으며 원래는 1950년에 열 예정이었다. 그러나 손혁리 아시아 선수권 연맹 부회장은 올림픽 직전에 여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년도를 조정한다.
그렇게 개최국인 인도는 아시안 게임 준비를 하였고 곧 대회를 앞두고 있었다. 한편 1950년에 터진 1차 동아시아 전쟁으로 중화민국이나 대한민국은 참가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으나 그 시기는 교착상태에 있었던 터라 그나마 참가 할 수 있었다. 일본은 아직 독립국 지위가 아니었기에 자국기를 들고 참가 할 수 없었고 NOC기로 참가해야 했다. 열흘가량 열린 뉴 델리 대회는 일본이 종합 1위를 하였고 대한민국 2위 중화민국이 5위를 차지하였다. 그 뒤 1955년 제 2 회 마닐라 아시안 게임이 개최되었고 대한민국 전 대회 보다 많은 메달을 따게 되었고 중화민국 역시 그 뒤를 따랐다. 하지만, 중공은 여전히 아시안 게임에 참가하지 못했는데 이유는 중국의 정통성이 중화민국에 있었고 결국 참가하지 못했다.
마닐라 대회에서 일본이 여전히 1위를 유지하였고 대한민국이 2위 중화민국이 3위를 차지하며 대회를 마무리 했다. 1957년에 호주와 뉴질랜드가 AFG에 가입하는데 이유는 보다 나은 큰 대회에 나서기 위해서였다. 그당시 오세니아 국가 올림위원회 회원국가는 태평양 국가들의 인구도 규모도 국력도 작아 사실상 앤잭의 친선전이나 다름 없었다. 이래선 발전이 없다고 생각한 호주와 뉴질랜드는 아시안 태평양게임을 만들자고 제안한다. 당시 손혁리 2대 아시아 선수권 연맹 회장은 오세니아 연안 국가를 참여하여 대회명칭을 아시아와 오세니아를 합친 아시아 태평양 경기대회 즉 아시픽 게임으로 명명한다. 그리고 1959년 제 3 회 아시픽 게임은 군정 지배를 받는 일본 도쿄에서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서 호주와 뉴질랜드를 비롯한 태평양 연안 국가가 참가하였고 성황리에 펼쳐졌다. 그동안 1위를 줄곧 차지하던 일본은 호주와 뉴질랜드의 등장으로 예전 대회 보다 금메달 수가 조금 줄어들었고 힘겹게 1위 자리를 유지 할 수 있었다. 도쿄 대회에서 일본은 1위 호주가 2위였으며 대한민국 3위, 중화민국이 4위를 차지하였다. 1963년에 열린 제 4 회 멜버른 대회 였는데 원래 자카르타에 개최해야 하지만, IOC로 부터 제명조치를 받기 때문에 아시픽 게임의 개최국을 박탈 되었고 대체 개최지로 1956년 올림픽이 열린 멜버른에서 열렸다. 정치적 파행으로 얼룩진 인도네시아 보다는 그나마 나았고 대회는 순조롭게 이뤄졌다. 이 대회에서 그동안 1위 자리를 유지하던 일본이 종합 종합 2위를 했는데 이유는 개최국 호주의 홈 어드벤티지로 인해 메달 수가 줄어들었다. 군정기 동안 NOC기로 참가했지만, 독립국 지위에서 회복한 이후 대회에서 1위를 내려온 건 처음이었다.
그리고 1위는 개최국 호주였고 2위가 일본, 3위는 대한민국, 4위는 뉴질랜드, 5위는 중화민국이 차지하였다. 이 대회는 정치 문제 같은 갈등이 없었으며 체육기반 시설이 잘 갖춰진 곳에서 했기에 제대로 된 대회로 불린다. 그리고 제 5회 아시픽 게임은 태국 방콩에서 열렸는데 친미성향국가 이란을 제외하면 여전히 중동국가는 참가하지 않았고 신흥국 선수권 대회에 주도적으로 참가한 중공과 캄보디아는 참가하지 않았고 대회를 개최를 주도한 인도네시아만 참가하였다. 대회 기간 중에 1971년 제 6 회 아시픽 게임을 대한민국 서울로 확정하였다. 중공은 참가하지 않았지만, 신흥경기국 대회에서 스포츠 고립에서 벗어난 걸 보면 앞으로 참가 하게 될 아시픽 게임에서 막강한 상대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방콕 대회에서 지난 대회에서 1위를 내주었던 일본은 간만에 1위를 탈환하였고 대한민국이 2위를 차지하였으며 호주가 3위를 차지하였다. 방콕 아시픽 게임은 그렇게 막을 내리고 다음 대회 개최지는 대한민국 서울에서 만날 것을 기약하며 대회는 마무리 되었다. 이는 대한민국이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국가 발전과 경제 성장을 보여주기 위해서 큰 대회가 필요했고 이는 향후 올림픽 개최를 위한 디딤돌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1968년 기준으로 서울 아시픽 게임을 경기를 위해 경기장은 공사 중이었고 개회식이 열릴 서울 아시아드 주 경기장이 강남에 건설중이었는데 이는 훗날 서울올림픽 때 개폐회식으로 활용되는 잠실주경기장이었고 아시픽 게임 짓는 경기장은 먼 훗날 올림픽 경기장으로 활용하게 된다.
한편 유럽에서 유럽국가를 위한 유로피언 게임이 창설 되었는데 전쟁이 아닌 스포츠로 통한 공정한 경쟁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화합하는 자리를 만들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제 1 회 유로피언 게임은 1951년 7월 29일 런던 올림픽이 열렸던 런던에서 개최되었고 창설국인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덴마크, 서독, 스웨덴, 노르웨이 등이 참가하였고 대회는 성황리에 이루어졌다. 이는 올림픽 개최 직전에 열게 함으로서 올림픽 본무대에서 실력을 확인 할 수 있는 중요한 대회라 할 수 있었다. 이 대회에서 소련이 종합 1위를 하였고 개최국 영국이 2위를 했으며 그 다음은 서독이 3위를 차지하였다. 제 2회 유러피언 대회는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렸고 공산권에 영향권에 있는 동유럽국가와 아시아와 유럽 사이에 있는 터키도 참가하였다.
이스라엘은 아·태 게임에 참가하였으나 서아시아 대다수 나라가 아직도 인정하지 않은 분위기였고 아시안 게임 참가를 못하도록 정치적 술수를 부렸다. 현시점에서는 이란을 제외하고는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는 이슬람국가는 어디에도 없으며 거리 상으로 볼 때 우군은 멀고 적이 가깝다는 뜻이었다. 정치적으로나 종교면에서는 사방이 포위된 형국이었고 이스라엘을 결코 국가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여기는 등 정세가 불안했다. 이번 아시안 게임에 참가하겠지만, 다음 대회에 참가 할 수 있을 지 불투명한 상황이었고 아시아·태평양 경기연맹의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건 석유자원을 무기로 삼는 중동국가였다.
터키는 유럽과 아시아 대륙 어우르는 대륙임에도 아·태 게임에 참가하지 않았다. 유럽의 편입을 바라고 있기에 아시아 국가라는 이미지를 희석시킬 필요가 있었다. 아마도 이스라엘은 1971년에 치러지는 서울 아시안 게임을 마지막으로 중동국가와 정치적 갈등이 없는 곳에서 다음 대회 참가는 아시아가 아닌 유럽에서 치러지는 종합경기대회를 목표로 삼았다. 아무튼 아·태 게임 특정국가에게 쏠리는 메달 쓸어가는 걸 견재하고 호주와 뉴질랜드가 참가함에 따라 죽 1위를 달려오던 일본을 제동을 걸어주었다. 어찌되었든 간에 서울 아·태 게임은 순조롭게 준비가 착착 진행되어갔으며 국제 스포츠 경기 운영에 좋은 경험을 쌓는 거였다.
프로야구의 태동은 손적리 야구협회장은 1957년 10월에 미국 메이저 리그 사무국으로부터 초청장을 받고 월드시리즈가 열리는 뉴욕으로 향했다. 경기를 지켜보며 양팀 선수를 유심있게 지켜보았고 어떻게 경기를 임하는지 지켜보았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도 손적리는 누가 이기든 상관 없이 야구 선수가 어떤 활약을 보여줄지 관심을 보였다. 투수가 공을 강하게 던지며 같은 팀 포수의 글로버에 잡았고 상대팀 선수는 헛스윙을 하였고 심판은 스트라이크를 선언하며 상대팀 선수를 아웃하였다. 자기 팀이 상대팀 점수 보다 만루하거나 홈런을 쳐서 1~4점에 사이 점수를 획득하면 승리하는 경기였다.
손적리는 7차전 까지 끝까지 지켜봤으며 결과는 밀워키 브레이브스(현:애틀랜타 브레이브스)가 우승을 차지하였으며 7차례 격전 끝에 뉴욕 양키스를 꺾고 우승팀이 되었다. 1957년 당시 미국 메이저 리그 참가 팀은 16개 구단이었고 양대 리그로 양분되어 있었다. 각 리그에 정규경기를 치른 뒤 10월에 있을 포스트 시즌 경기를 하게 된다. 각 리그 지구에서 리그 우승팀을 가리기 위해 결승으로 가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펼치며 리그 우승팀을 놓고 7전 4승으로 경기가 치러진다. 내셔널 리그와 아메리카 리그 우승 팀이 맞붙는 월드 시리즈가 열리며 각 리그 챔피언십과 마찬가지로 한 팀이 먼저 4승을 획득하면 남은 경기 결과 상관 없이 이번 년도 우승을 차지 할 수 있게 된다.
미국은 이미 프로야구 인 메이저 리그가 이미 정착 되었으며 이웃나라 일본은 1936년 부터 시작되었다. 이때 부터 손적리는 프로야구 구상을 위한 준비에 착수하였으며, 이를 위한 준비위원회를 구성한다. 북미와 중남이 및 유럽에서 열리는 야구대회 운영방식을 검토하며 어떤 방식으로 구성할지 긴 논의가 이어졌다. 야구대회를 운영주체인 사단법인 한국야구위원회를 1965년 5월 20일에 설립한다. 팀 구성은 주요 도시를 간추렸고 연고지는 서울을 비롯한 평양과 원산, 대전, 광주, 해주, 의주, 함흥, 청진 같은 지역으로 선정하였고 여러 기업이 야구 팀 창단을 위한 심사를 하였다. 이런 가운데 8개 기업이 선정하였고 유성, 백화, 옥성, 태륜, 신성, 태성, 윤영, 천건이었다.
[집필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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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는 1970년 8월 2일 여름이 한창인 중화인민공화국 수도 북경, 이 시기 북중국 상황은 문화대혁명의 시기가 절정으로 달하던 시기였다. 해관파서로 시작된 문화대혁명은 이전 시대에 있던 모든 것을 파괴하고 과거의 존재를 부정하고 이를 막으려는 자는 반동으로 여겨졌다. 공산당 안에 있는 고위 당원이 보수 반동이란 이유로 조리돌림 당하고 당적을 박탈당해 수도에서 먼 지역에 있는 교화소로 보내졌다. 헌법자체는 자체는 무용지물이 되었고 멋도 모르고 날뛰는 홍위병은 제마음대로 난동질을 하였고 법과 질서를 무시하는 무법자 그 자체였다. 바른 말을 하는 충직한 자를 내쫓아 버리고 지도자 곁에 모리배 만 득실거렸다. 어느 누구도 홍위병의 기세등등한 이들을 막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공산당을 비판하는 자는 조리돌림 당했고 피해 입은 사람은 법으로 부터 보호를 받지 못했다. 유소기를 비롯한 공산당 수정주의자는 대거 실각하였고 그 자리를 임표를 비롯한 강청 4인방이 차지하였다. 여기서 김일성의 처우가 결정했는데 김일성을 중앙군사위원회 부장 자리에서 실각했다는 것이었다. 모택동 사후 권력 장악을 꿈을 꾸고 있던 김일성에게는 크나큰 악재일 수 밖에 없었으며 군부 인사 상당수가 숙청된 상황에서 지금 물러나지 않으면 자신의 목숨이 없다고 판단했다. 김일성은 상황이 그런 만큼 자신의 목숨과 자신을 추종하는 계파의 안위를 위해서 물러나는 것이 바람직했다. 1967년 4월 20일 김일성은 중국공산당 군사중앙위원회 부장 자리에서 사직하였고 북경 근교에 있는 장가구 기거 하게 된다.
장가구 거처를 옮긴 김일성은 어떻게든 문화대혁명이란 광란이 자자들 때까지 그때까지 조용히 있기로 하였다. 설마 모택동이 자신을 제거 하기 위해 술수를 부른 만큼 섣불리 움직이는 건 그만큼 위험부담이 컸다. 비록 직책을 내려놓았으나 여전히 공산당 고위간부으며 자신을 따르는 조선노동당 고위 인사가 중국공산당 내부에 포진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김일성은 자신을 따르는 계파 주요 인물에게 지침을 전달하였고 이러한 홍위병의 난동이 멈출 때까지 칩거하라는 거였다. 이는 즉 특별한 때까 아니면 쓸데없이 움직이지 말라는 것이며 공식행사 참석을 하지 말라고 하였다. 김일성으로서 모택동이 드디어 자신을 제거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끼고 어떻게든 표적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북중국 전역에 홍위병이 날뛰었고 공산당 내 보수파가 숙청당했으며 모든 분야에 표적이 되었다. 문화재는 닥치는대로 파괴되었으며 휴전지역을 제외한 상당수 옛 것이 주 표적이 되었다. 위인의 무덤을 비롯하여 사적지와 오랜된 건물이 주 표적이 되었으며 게다가 공자 사당까지 스스로 파괴하는 만행을 저질렸다. 이는 북중국이 스스로 문화를 부정하였고 이로 인해 문화수준이 중화민국 보다 못한 존재가 되었으며 결국 최다 보유국 지위를 스스로 헌납해버린 것이었다. 비단 유교 뿐만 아니라 불교와 다른 종교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고 상당수 유교 사당이 훼손되었고 19세기 때 세워진 교회와 성당도 파괴되었다. 유물은 구시대 통치를 위한 도구로 여겨져 파괴되었고 부장품을 비롯한 장식품 마저 이러한 광란을 피해 갈 수 없었다.
지역이 워낙 한정되어 있다 보니 장강 이북에 있는 문화재는 홍위병에게 표적이 되었고 유명 위인의 사당과 무덤은 파해쳐졌고 심지어 관에 있는 뼈조차도 갈아버렸다. 통일왕조 진 부터 청에 이르기 까지 각종 문헌을 비롯하여 남겨진 유물과 황실 장식품까지 광란을 피할 수 없었다. 주은래는 그나마 남아 있는 문화재가 거의 없어질까 두려워 했고 자금성마저 없어지면 오래도록 이어진 유구한 문화의 단절을 뜻하였다. 자금성에 경비병을 배치함으로서 홍위병의 광란에서 보호하였다. 모택동이 호위병을 국가의 적으로 돌릴 때까지인 1975년까지 문화파괴 행위가 극성을 부렸다. 이로 인해 북중국 문화 수준이 현격히 낮아졌고 이로인한 세대단절을 불려왔으며 문화혁명은 북중국에 기리 남을 수치스러운 역사로 남고 만다.
문화대혁명을 일으켜 자신을 따르지 않거나 자기 사상을 의심하는 자를 당에서 내쫓았고 권력을 넘보려는 자를 숙청한 모택동은 아직 걸리적 거리는 존재가 남아 있었다. 바로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에서 물러난 김일성이었다. 지금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언제 복귀 할지 모르는 상황이었고 따라서 김일성과 이를 추종하는 조선인민자치공화국 주류파인 갑산파를 완전히 토멸해야 했다. 그렇게 조용히 때를 기다리며 상황을 노리는 김일성이었지만, 문제는 임표의 측근이 김일성에게 찾아간 것이 그 발단이었다. 명분을 얻게 된 모택동은 거칠 것 없이 홍위병을 선동하였고 김일성을 비롯한 조선도당을 없애라고 지시한다. 그토록 외부 첩촉을 안할려는 김일성이었지만 설마 그 화가 자신에게 미치게 될 것이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다음 날 새벽 장가구 있는 공산당 고위 간부가 사는 저택에서 수백명의 갈색 인민복을 입은 무리가 횟불을 들고 김일성 있는 집으로 향했다. 당연히 김일성은 식구와 함께 깊은 잠에 빠졌고 불길한 움직이 가까이 다가 왔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홍위병이 처들어올 당시에는 경호원이 없었고 아니 모택동의 지시로 빠져 있는 상태였고 게다가 친분 있는 조선인민자치공화국 주석보위조차 없었다. 그는 무방비로 홍위병들에게 노출된 것이었다.
"뻔단!!(멍청이) 반동 김일성 나와!!!"
욕설이 섞인 중국어 고성이 그를 깨웠다. 대체 무슨 일인지 확인 하기 위해 커튼을 걷고 밖에 살폈다. 김일성은 크게 놀랐고 벌써 집주변에 홍위병이 가득 메워진 상태였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김일성이었으나 빠져 나갈 틈도 없이 꼼짝없이 포위된 상황이었다. 다시 말해 도망칠 수 없는 상태였고 자신을 지켜줄 호위 조차 없었다. 이는 즉 수많은 홍위병에게 포위당한 상황이었고 자기 격투 실력만으로는 수백에 이르는 인원을 도저히 상대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결코 도망도 못가는 상황이었고 정면 돌파는 사실상 불가능했고 호위도 없는 상황에서 강제 해산은 불가능했다.
홍위병은 김일성의 집 앞에 있는 대문을 부셔버리고 이내 마당안으로 진입하였다. 쇠파이프와 몽둥이 및 돌맹이를 가지고 김일성 일가 사는 집에 돌을 던졌다. 수십개 이르는 돌이 창문 깨트리고 집안으로 들어왔고 깨지는 소리에 놀란 일가 식구는 대체 무슨 일인지 몰랐지만, 밖에서 들리는 고성과 집안에 바닥에 까진 유리조각을 보아 하니 아무래도 집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게 분명했다. 평소대로라면 경호원이 24시간을 지켜야 하지만, 그자리에 없었다.
굳게 잠겨진 문을 부수고 들어왔으며 잠겨진 창문 안으로 들어왔다. 자신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 김일성은 얼른 자기 식구를 데리고 이곳에서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홍위병은 김일성은 그렇게 쉽게 보내려 하지 않을 분위기며 진정으로 공산주의를 따르지 않은 반동을 보내릴가 만무했다. 장롱 안에 권총과 탄창이 있었으나 그걸로는 많은 인원을 뿌리 치기 힘들었고 진압용 최루탄이 없었고 물대포도 없었다. 빈약한 무장으로는 수많은 인원을 상대하기 어려웠다. 서서히 다가오는 홍위병은 김일성 본인 앞으로 다가왔고 서서히 자신을 잡으려 가까이 다가왔다.
이러한 소란스런 소리에 김일성 식구들은 당황하다가 문을 박차고 들어온 홍위병에게 도망치지 못하고 붙잡혔다. 김일성은 도망칠 곳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무리하게 강행돌파를 하려고 했다. 수십명에 이르는 갈색 옷을 입은 홍위병이 김일성 주위를 에워쌌고 마치 덤비려는 분위기였다. 상대는 많았고 격투로는 많은 상대를 쓰트리는 것은 무리였다. 게다가 틈이라도 보이면 한번 맞으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그대로 맞게 된다. 결국 김일성은 무리하게 강행돌파를 감행하고 홍위병은 일제히 몽둥이와 쇠파이프를 쳤고 한 걸음 못간채 그만 붙잡히고 만다.
온몸이 꽁꽁 묶인 채로 결박당한 김일성은 김정일과 후처 김성애와 김평일과 김영일과 딸 김경진과 함께 끌려나왔다. 뿐 만 아니라 일가 친척까지도 집안에서 끌려나왔으며 김일성과 관련된 모든 인물이 결박당한 채로 끌려 나왔다. 날이 밝자 김일성 일가는 판대기에 적힌 죄명이 적혔으며 죄명은 간첩, 반동, 매국노, 이단자 등이었다. 모택동으로 부터 지시를 받은 홍위병은 고성을 지르며 김일성에게 욕설을 내뱉았다. 설마 자신의 말로가 일찍 찾아왔다는 걸 전혀 예상치 못한 김일성은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주변을 살펴 보지만 보이는 것은 오로지 홍위병의 광기 뿐이었다.
한 홍위병 단원이 김일성의 죄명을 낭독하고 그 내용은 심히 과장되고 허무맹량한 것이었다. 김일성은 한국전쟁 때 무고한에게 행했던 인민재판이란 것을 알게 되자 조그이나마 남아 있던 김일성의 희망의 불꽃은 여지 없이 사그라 들었다. 홍위병 여러명이 김일성의 머리와 양 팔을 쥐어 잡고는 다른 사람이 겪었던 제트기 형벌을 받았다. 그 다음 감당하기 힘든 고성과 욕설이 들려오고 심약한 자는 바로 스러지지만, 곧바로 물이 쏟아 깨웠고 끔찍한 행위가 반복되었다. 그리고 인민최고법원에 회부되어 형식적인 죄목과 함께 판결이 내려지고 최장 징역인 교화 50년형을 선고 받았고 각기 다른 교화소로 끌려가게 되었다.
비단 김일성만 숙청된게 아니었다. 1965년 8월 30일에 객사한 박헌영은 북경 혁명열사묘지에 안치되었으나 죽은 시기는 문화대혁명이 다가오는 시기였고 김일성이 교화형을 당하자 마자 박헌영의 무덤까지 홍위병에게 파해치고 말았던 것이다. 비록 모택동에게 적대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지만, 친분은 남아 있어 조선인민자치공화국 주석자리에 지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홍위병은 조선도당을 잡는 다는 광기에 그딴 건 없었고 급기아 관까지 꺼내 백골이 된 박헌영의 유골을 꺼냈다. 그리고 쇠파이프와 망치, 몽둥이로 뼈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산산히 부서졌고 결국 한동안 방치되다가 등소평이 집권한 이후 신원하여 다시 안장되었다.
이학구, 오진우, 이을설, 이강국, 허가이, 최광이 숙청되었데 특히 오진우와 최광은 김일성과 친분이 있었고 항일빨치산 일원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용서 할 수 없었고 군인신분의 이들을 불명예 제대하여 낙양 교화소로 보내버린다. 이미 죽은 김책 역시 무덤이 홍위병에게 무덤이 파해쳐져 사실상 부관참시 당했다. 장한근과 강양욱을 비롯하여 김정재, 한낙규, 장준인 등이 숙청되어 김일성과 연관된 사람을 모두 숙청하였다. 갑산파를 비롯한 소련파, 만주빨치산파가 모두 숙청되었고 이미 죽은 사람 역시 홍위병의 부관참시감이었다. 그나마 연안파에 속했던 김무정과 리승엽(李承燁), 이활, 허만국, 조선인민군 사령관으로 활약한 최용건 뿐이었다.
이로인해 조선인민자치공화국 내각은 문화대혁명으로 대부분 숙청되었고 자신의 말을 잘듣는 연안파를 빈 자리로 방치된 공석을 매웠고, 친모택동파 내각이 되었는데 주석으로는 김무정이 임명되었고 부주석으론 박문규, 내무상으로는 리승엽, 산업상으론 권오직, 농업상은 최장익, 법무상이 맹종호 등이 임명되었다. 이들은 조선노동당의 파벌인 남조선노동당 일원으로서 마르크스-레닌 사상을 지녔기에 중국공산당과 적의가 없었고 소련과 나쁘지 않았다. 그러므로 자신의 은혜를 원수로 갚는 북로당 보다는 그래도 믿음직한 남로당에 속한 사람을 내각으로 채움으로서 중국공산당 하부 조직으로 두게 하는 것이었다. 조선인민자치공화국 내각과 군부는 모두 남로당 인물로 채워졌고 김일성의 만주파는 거의 숙청당한다.
김일성은 주천(酒泉)에 있는 교화소로 보내졌는데 그곳은 메마른 사막 기후인 지역이었고 여름에는 무더우며 겨울에는 몹시 추운 곳인 이 지역은 사실상 중죄인이 살아나갈 수 없는 무덤 같은 곳이기도 하였다. 사람이 힘든 곳에 온 김일성은 혹독한 사막기후와 온갖 행해지는 고문과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자신의 몰락을 재촉하게 만든 건 제 2 회 전국인민대회에서 자신의 복직한 자리에서 시작된 주체사상이었고 그것이 모택동에게 그를 제거할 명분을 주었다. 김일성은 이런 혹독한 사막 기후에서 모진 강제노동을 해야만 했고 계속된 고문으로 인해 몸은 상하기 시작했다.
여섯 달이 지날 무렵 김일성의 체중은 절반 가량으로 줄어들었고 예전의 전성기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급격하게 약해져갔다. 김일성의 식구들은 한중 근처에 있는 양현에서 강제노역을 하는 중이었고 식사는 하루에 한끼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날 다른 수형자와 함께 도로공사를 하려다갔다가 갑작스럽게 낮아진 기온 탓에 김일성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한게 된다. 간수가 왔을 때는 김일성의 몸은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고 사인은 심혈관질환으로 인한 심근경색이었다. 김일성의 시신은 다른 수형자가 묻혀 있는 이름 없는 묘지에 묻히게 되었고 당시 교화소 기록이 남아 있지 어디에 묻혀 정확히 알수가 없었다.
그리고 김일성이 묻혔던 곳은 문화대혁명 직후 등소평의 개혁개방이 이뤄지면서 천연가스송유관이 이설과정에서 잔해와 함께 헐어지고 만다. 김일성의 시신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게 되었고 지금까지도 수수께끼로 남은채 진실은 영원히 묻히고 만다. 김일성의 식구는 어떻게 되었을 까? 후처인 김성애는 혹독한 강제노역으로 인해 죽었고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는 교화소에서 철도보수에 나섰다가 진공해온 중화민국군 병사가 쏜 총에 맞아 그자리에서 사망하였다. 김평일과 김영일은 중화민국군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었다가 출소한 이후 성을 바꿔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가게 된다. 딸 김경희 역시 일본으로 건너가 이름을 바꾸고 일본인과 결혼한다.
김일성의 아들 김정일은 숙주 교화소에서 강제노동을 하다가 마침 1973년 10월 23일에 일어난 2차 동아시아 전쟁때 중공군이 총알받이로 징발되어 형문(荊門) 전선으로 투입되었다. 이후 치열한 격전 중에서 형주(荊州) 중화민국군 포격부대 쏜 포탄에 맞아 상륙정과 함께 그대로 수장되었고 시신은 장강의 물흐름과 함께 흘려나갔다. 그의 나이는 31세였고 정식으로 결혼 배우자는 없었다. 설령 사귀었던 여자가 있다 하더라도 없을 것이다. 김정일은 아버지와 달리 정식으로 결혼한 여자가 없었고 이 나이가 되도록 배우자를 만들지 못했다. 아니 결혼 전에 사귀었던 여자가 있었다.
그 이름은 성혜림이었고 6.25 동란 때 부모는 길림으로 망명한 상태였고 아버지 성유경은 조선노동당 대표부장이었고 어머니 김원주는 조선노동당 관영기관지 노동신문 부장 자리에 있었던 자리였다. 월북 작가 이기영의 아들 이평과 결혼 상태인 유부녀이었고 시동생인 이종륜이 장가장에 있는 김일정일 집에 드나들었는데 이때 불륜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고 김일성과 김정일이 반동으로 숙청되었기 때문에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한다. 이 때 아이를 가진 상태였고 남편 몰래 북경과 가까운 천진의 어느 병원에서 낳았는데 훗날에 김정남이 되는 아이었다.
그러나 이 아이를 친정이나 시댁에 맡길 수 없다고 판단한 성혜림은 김정일의 측근이었던 사람에게 맡겨졌다. 젖먹이 아이와 함께 측근은 일본으로 밀항하였고 조선노동당과 김일성과 김정일과 연관성을 끊기 위해 성과 이름을 바꾼다. 김정남이란 이름으로 지어질 예정이었던 아이는 가네이 마사오(金井 正男)란 아이로 살아가게 된다. 친정인 성씨 이나 시댁인 이씨 집안에서 김정일과 관계를 맺어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은 언급이 없으며 천진 어느 병원 역시 세월이 흐르면서 다른 건물을 이사하는 과정에서 진료기록을 파기되었기 때문에 진상은 알 수 없게 되었다.
모택동의 뒤를 이어 중공의 지도자가 되려는 김일성의 권력욕은 그렇게 허망하게 끝나버렸다. 자신의 독재왕국을 만들려하다가 일이 틀어지고 그는 머나먼 이국 땅에서 비참한 삶을 마감했다. 그가 창당한 조선노동당은 중국공산당의 거수기로 전락하였고 항일동지는 같이 숙청되었으며 조선인민자치공화국 내각은 자신의 정적인 남로당 인원으로 채웠다. 그는 조직이 멸망하는 것을 보지 못한채 세상을 떠났다. 역사에서 김일성을 민족을 팔아먹은 반정부조직 수장이며 민족에 씻을 수 없은 상흔을 남긴 자라고 평하였으며 경주 김씨 문중에서 이를 언급하지 말아야 할 자로 남게 되며 족보에서 지워진다.
다음화 14화 서울 아시안 게임과 궁정동 사건입니다.
다음화 내용은 서울 아시안 게임과 장진 동계올림픽으로 이어지며 박정희의 몰락인 궁정동사건이 되겠습니다. 이 후자는 다소 논란이 될 수 있으니 주의해주시기 바랍니다.
출처 : 밀리터리-전쟁소설 카페의 깜찍이님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