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사과라 부르기로 한다 어느 날 입 안에서 튀어나온 새까만 눈동자 까슬한 눈빛을 준 후 볕 바른 곳에 너를 묻는다 하루, 이틀, 닷새 동안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흙으로 돌아갔을 거라 생각했고 씨앗 너머의 세계로 갔을 거라 믿었다 하얀빛이 어둠을 삼키며 순백의 아이로 거듭나는 걸 본다 흙 속의 바람을 세상 밖으로 민다 한 입 베어 문 흔적 고스란히 기록된 너의 머리 연둣빛 물이 오르고 초록 싹 돋는 걸 본다 아장아장 작은 너의 땅이 생길 때까지 견디고 견딜 것이다. 너는 나에게 한 알의 숨이 되었으므로
알지 못하도록 초록
난 늘 초록이었어 초록이어야만 하는 패를 쥐었으니까
가을로 물드는 너를 보며 갈색 꿈을 꾸기도 했지
너는 무감하게 말하지 갈색은 겨울나기를 위한 순서일 뿐이라고 그러므로 좀 더 진한 초록을 품어야 한다고
뇌척수막염을 끌어안고 척추뼈에 한 뼘 크기의 바늘을 꽂았을 때 애벌레처럼 웅크린 태아가 된 듯했어
몸속으로 스며드는 한기가 아무 데나 흐를 때 구멍마다 절망이 들어앉는 소릴 들었어
버렸던 꿈을 다시 꾸는 시간으로 초록으로 돌아가기 위한 아픔으로 척수액에 몸을 녹였지
새로 돋을 시푸른 초록을 위한 기꺼운 기침
꽃인 줄 모르고 핀다
별을 모아 겹겹이 두른 동백림
새들은 상두꾼 소리 따라 울고 뚝, 뚝, 떨어진 붉은 꽃송이
숨가쁘게 아버지를 곡한다
"유리창 너머 자꾸 나를 부른다 어여 가, 어여가 훠이"
새를 쫒듯 팔 내젓던 아버지 꽃무등 타고 떠나신 길
"너에게는 보이고 싶지 않구나"
"아버지. 무거운 날개 이제 내려놓으세요" 동박새 날아온 이른 봄
아버지 놓고 간 자리마다 움트는 눈 그늘 아래 꽃인 줄 모르고 핀다
어디쯤
당신, 오고 있나요 풀꽃 방석을 깔아 드릴 테니 한번 다녀가세요 봄이 죽은 산기슭엔 온통 얼음새 꽃이 피었어요
쌓인 눈이 추억에 구멍을 뚫은 게 분명해요 그렇지 않고서야 지하로 가는 뿌리가 눈 속에서 파르르 피어날 리 있겠어요 한 손에 황금잔 들고 소의 불룩한 배를 어루만지기만 했는데 얼레지 보랏빛 치마가 춤을 추어요
숨소리로 유혹한 독배를 드는 시간 적막과 혼돈의 자궁 속에서 바람이 혈서를 썼어요 늑골의 맥을 이승의 인연으로 끌고 가네요
어느 마을에 물고기 비가 내려 바닥이 펄떡거렸는데 이 봄을 지핀 불이 거기서부터 시작된 게 분명해요 갈증을 참은 듯 한꺼번에 타올랐어요
첫댓글 웅숭깊은 박시인님 글속으로 풍덩 빠져듭니다.
시 너머의 시, 감동이 쓰나미처럼 밀려듭니다.
문장 사이 발걸음 배회하다 멈추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