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 아부지가 짚신 세대였다면 나와 친구들은 고무신 세대였고 지금의 아이들은 세계적인 브랜드 신발 세대다.
나는 새 고무신을 신고 싶어서 칼로 흠집을 내서 일부러 찢어지게 만들어 울 새 엄니한테 디지게 맞은 기억이 있다.
울 아버지 봉동 장에 가실 때 내 발 사이즈 잰다고 보릿대 잘라서 재본다.
터덜거리는 비포장도로 달려서 봉동 장에 도착해 보면 이미 보릿대는 호주머니 속에서 부러지고 휘어지고…
신발 가게 들어선 울 아버지, 대충 “십 문 칠 주세요~”. 새 신 사 왔다고 신어 보면 맞을 리가 없었다.
손가락 하나가 들락 날락……
신발 앞 코를 눌러보고 “발은 금방 크니 대충 신어라” 하신다.
나는 바꾸려면 또 다음 장날 때까지 지달려야 하니 그냥신고 살았지만
“아부지~ 기워 떨어진 양말 신고 신으면 대충 맞는다” 하면서 머리맡에 두고 잠을 잔다.
생고무 냄새마저 상큼했지만, 다음날부터는 헐컹대는 고무신을 질질 끌고 다녀야만 했다.
고무신도 두 가지였다.
나는 검정보다 흰 고무신이 너무 갖고 싶었다.
흰 고무신은 때가 쉽게 타고 검정 고무신보다 질기지 않아서 어른들만 신고 다녔다.
문수만 틀리지 일률적으로 검은색이라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돌아오면 늘상 남의 신발이 되었다.
하얗게 반짝반짝하는 흰 고무신 신고 다니는 윗집사는 태규가 얼마나 부럽던지.
그리고 운동화 신고 다니는 전상규는 부러움에 대상이었다. “아~ 얼마나 부자였으면…”
검정 고무신이 얼마나 질기냐 하면, 입으로 물어뜯어도 금방 제자리로 돌아온다.
새 신을 신고 싶으면 여하튼 열심히 뛰어다녀 자연마모가 되었다는 것을 증명해야만 했었다.
우리 동네에서 중학교가 있는 개바우 까지는 5㎞, 십 리가 넘는 거리였다.
나는 그 질긴 검정 고무신을 신고 딱 3번만 결석했고 졸업식 때 3년 정근상 상품으로 국어 대사전을 탔다.
요즘 스마트폰처럼 신발 인기가 고무신에서 운동화로 넘어갈 때였다.
운동화 한 켤레 얻어 신는 것이 그 당시 아마 이 오리의 평생 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매번 울 아부지 그러신다. “지금 신고 있는 신발 떨어진 다음에 운동화 사줄게”
그래서, 또 시멘트 담벼락에 박박 문지른다.
지금 같으면 아스팔트에 질질 끌고 댕기면 금방 떨어지는데 그 당시는 우리 동네에서 개바우까지는 전부
흙과 자갈 길뿐이라 문지를 곳은 마을뒤 작단이란 냇가 면 사무소 이층으로 올라가는 시멘트 층층 계단이 전부였다.
당시 면 소재지에 사는 장옥희는 운동화를 신고 다녔다.
옥희는 층층 계단에서 신발을 문지르고 있는 나를 이해 못 하고 “왜 신발한테 화풀이하냐”라고 했었다.
그 당시 을매나 창피했던지
얼핏 봐선 표시가 잘 안 나지만 고무신도 제 짝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 집 신발은 제대로 짝이 맞는 게 없었다.
말캉 밑을 잘 찾아보면 맞는 것도 있었겠지만 말이다.
신발을 벗어야 하는 잔칫집이나, 여럿이 모이는 곳에 한번 갔다 오면 남의 신발은 그렇다 치고
여하튼 짝을 맞춰 오는 적이 드물었다.
우리 집에서 기르는 똥개 이름은 무조건 ‘메리’였다.
그 다음해에는 메리는 아부지가 잡아먹고 새로온 개는 워리였다
나 어릴때 우리집에 오는 개는 전부 서양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발바리 종류는 해피였고..
그런데 그 메리는 얼마나 영리했던지 동네 사랑방에서 신발을 바꿔오면 잽싸게 아버지 신발을 물어왔다.
또 추운 겨울 사랑방에 놓인 신발 중 메리가 깔고 앉아 뜨뜻해진 것은 울 아버지 것이었다.
또 학교에서 놀이 중 최고 인기 종목이 모래밭에서 신발을 뒤집어 자동차 놀이하는 것이고
신발 높이 차올리는 것이었다. 땄
다, 뺏기기를 몇 번 하다 보면 짝 맞춰서 집에 돌아간 적이 거의 없었다.
참외나 수박 서리하다 들키면 무조건 신발 벗어 손에 들고 튀어야 했었다.
땀에 잘 미끄러져서 뛰기도 힘들 뿐 아니라, 뛰다가 그냥 확~ 벗겨져 버리면 환장을 한다.
그거 주으러 돌아갔다간 바로 그냥 멱살 잡히니 신발 하나 버릴 것 각오해야 했다.
그때 고무신 중에 인기 있었던 상표가 타이아표 진짜 고무신이었다.
왕자표, 범표도 있었고 기차표 고무신도 있었는데 간중리 우리 집은 전부 타이아표였다.
여자 타이아표 검정고무신은 가운데에 타이어가 아닌 꽃이 그려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엿장수조차 검정 고무신은 안 받고 흰 고무신만 받았다.
얼마나 엿이 먹고 싶었는지 방죽골 외갓집에 가서 할아버지가 팽나무 밑에서 주무시고 있던 사이
흰 고무신과 엿을 바꿔 먹어 할아버지와 엿장수 간 다퉜던 적도 있다.
나는 친구들과 싸울 때 고무신을 요긴하게 사용했다.
힘이 좀 부치면 고무신을 뻗어 따귀를 한 대 갈기면 여지없이 이긴다.
그러면 영배넘 볼 테기에 (약간 뻥을 섞으면) 타이아 고무신 상표가 찍혔었다.
옹기골 사는 영배나 오천리 사는 행노, 나한테 검정 고무신으로 많이 맞았을 것이다.
지금이야 내가 영배나 행노보다 작지만, 그 당시는 결코, 작지가 않았다.
여름날 미역 감으러 운절리 에서 초댕이 산 넘어가기 전 개울은 신발이 떠내려갈 정도로 물살이 셌다.
맨발로 건널 정도였지만, 거기에는 물고기가 많이 살았다.
개울을 진흙으로 막고 검정 고무신 두 개를 맞대고 물을 품기 시작해서 한 시간 정도 품어 재끼면
붕어와 미꾸라지가 득실득실 나온다.
하굣길에 들러 빈 밴또(도시락)에 이빠이(가득) 담아가면 새엄뉘는 묵은 김치에 붕어 몇 마리 집어넣고
푹 끓여 저녁을 내놓으셨다. 비록 보리밥이지만 배 터지게 채웠다.
“새 신발 신고 뛰어보자 폴짝, 머리가 하늘까지 닿겠네”,
작은 일 하나에도 한없이 기뻐하는 ‘난 오리’는 2024년은 흰 고무신(백신)이 아니라 ‘
확실한 코로나 19 백신’이 개발되는 해가 되길 기도해 본다.
대한민국 궁민 여러분!
얼마 남지 않은 2023.년도 복 많이 지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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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신발이 바로 조선 나이키 였습니다.ㅎㅎ
우리때나
조선나이키 이야기하면 알쥬
은빚한테만 허두~~~몰라유 할껄
에잇
동동구루무 노래나 듵고
디비 자야겄다~~
60년대 태생들이 그런 신발을 왜 몰라..그시절에는 시골이나 시내나 거의 고무신발들만 신었는데..
@난폭한오리(전주)185 몬 소리유
낸두 초딩3학년 까지만 신었슈
윈성군 신림면 성남리 살때만
그 다음 제천으로 나와서는
스파이크 운동화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