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 1:27, 요1:12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1:27)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어떤 목사님에게 아직 유치원에 다니는 어린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 꼬마의 외할머니는 외손주에게 늘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너희 아빠는 하나님의 ‘종’(servant)이란다. 그리고 또 너희 아빠는 하나님의 ‘사자’(minister)야! 너희 아빠는 참으로 훌륭하고 대단한 분이시란다.” 하루는 이 아이가 동네 꼬마들을 집 앞마당으로 불러모았습니다. 그리고는 엄마가 쓰시는 분홍빛 보자기 망토를 어깨에 걸치고 집 옥상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마당에 모여 있는 동네 꼬마들을 내려다보며 말합니다. “야∼! 우리 아빠는 하나님의 '종이다'(paper)! 우리 아빠는 하나님의 ‘사자’(lion)다∼!” 힘주어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자부심은 곧 힘입니다. 담대함도 생깁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나에게 어떤 분인지를 분명히 아는 것이 승리하는 삶의 비결이며 경쟁력 있는 삶의 원동력이 됩니다. 자부심은 우리의 기분을 저절로 좋아지게 만듭니다. 자신이 사랑스럽다는 것을 알게 되면 타인에게 더 많은 사랑을 얻을 수 있습니다. 스스로 중요하다는 것을 알면 다른 사람들보다 중요한 존재가 됩니다. 자신에게 능력이 있음을 안다면 더 많은 것을 창조해낼 힘이 생깁니다. 자신이 우주에서 소중하고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안다는 것은 그 자체로 거룩하고 숭고한 기쁨입니다. 자부심은 교만함이 아닙니다.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자신에 대한 강한 믿음과 사랑입니다. 스스로 중요하게 생각할수록 특별한 존재가 됩니다. 성공한 여성들이 한결같이 지니고 있는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는 확고한 자신감입니다. 그것은 사무실에 들어가는 순간 드러나는 행동방식에서부터 유머감각에 이르기까지 이들이 하는 모든 일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이들이 표출하는 자신감은 다른 사람들의 반감을 사는 오만이나 자기 중심적인 태도와는 거리가 멉니다. 오히려 그것은 확신과 안정이라는 차분한 의미를 지닌 부드럽고 겸손한 자신감인 것입니다. 자신감은 어느 날 갑자기 이를 악물고 결심을 해서 생기지 않습니다. 자기 내면의 실력을 채워갈 때 저절로 생깁니다. 한 가지 희한한 것은 자기 내면을 채우면 채울수록 자신감이 커지는 것은 물론이지만 부드러움과 겸손도 함께 자란다는 사실입니다. 미국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의 아버지는 제화공이었습니다. 귀족들은 신분이 낮은 제화공 아들이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 못마땅했습니다. 그래서 약점 찾기에 혈안이 돼 있었습니다. 링컨이 취임연설을 하기 위해 의회에 도착했을 때 한 늙은 의원이 비아냥거렸습니다. "링컨씨. 당신의 아버지는 한때 내 구두를 만드는 사람이었소. 이곳에 있는 의원들 중 상당수가 당신의 아버지가 만든 구두를 신고 있소. 그런 형편없는 신분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사람은 아마 없을 거요." 링컨은 조금도 불쾌한 감정을 나타내지 않고,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습니다. "취임연설 전에 아버지를 상기시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아버지는 '구두의 예술가' 였어요. 혹시 아버지가 만든 구두에 문제가 생기면 내게 즉시 말씀해주십시오. 제가 잘 수선해 드리지요." 우리는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자녀요, 왕 같은 제사장이라 하면서도 열등감과 좌절감을 가지고 실패자의 모습, 낙오자의 모습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능력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전능하신 하나님께 주신 능력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자녀로서 긍지를 가지고 당당하게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자신감은 자신의 능력을 믿고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는 자에게만 샘솟습니다. ´자기신뢰+자기존중=자신감´이라는 공식이 성립합니다. 자신감의 힘 앞에 무기력의 힘은 그야말로 무기력합니다. “나는 가치 있는 사람이다”라는 주문은 현실 안에서 그 사람을 가치 있게 만듭니다. 세일즈맨을 기업가로, 웨이터를 레스토랑 주인으로, 경리사원을 자금담당 이사로, 비서를 관리자로, 중소기업 사장을 그룹 총수로 그 사람의 가치를 변화시켜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당신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감이 있으면 어려움에 봉착해도 대처방법이 의연합니다. 자신감에 반복적인 주문을 걸어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길러내는 것입니다. 사고의 반복은 현실화로 가는 길을 단축시켜 줍니다. ˝나는 잘 났다, 나는 할 수 있다˝를 반복하다가보면 소금에 절인 배추처럼 숨이 죽고 맙니다. 자신감이 약해질 때는 주님의 도움을 간구하십시오.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여호수아 1:9)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한복음 16:33) 우리가 자신감을 가지기 위해서는 첫째,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이 말씀은 고침을 바라는 두 소경에게 예수님이 묻는 말씀입니다. "주여 믿나이다."라고 대답하자 "네 믿음대로 되리라"하니까 눈들이 곧 밝아졌습니다.(마9: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마21: 21)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약1:6) 둘째, 확실한 자기비전과 꿈을 가져야 합니다. 감히 두려움이나 위기의식이 접근할 수 없는 위대한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자신이 무엇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고 있다면 자신은 이미 비전의 주인인 셈입니다.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가장 큰 무기는 열정으로 가득한 삶의 비전입니다. 성공에 도전하고픈 모험심과 스릴을 즐길 줄 아는 담대함을 부르는 주문인 것입니다. 간단명료하고 구체적인 그림을 한 번 그려보도록 하십시오. 자신이 어떤 것을 가지고 싶고, 누구랑 살고 싶고, 무엇을 하며 살고 싶고, 어떤 곳에서 살고 싶은지, 자신이 가치 있다고 느끼는 것들은 무엇인지를…. 마음속에 이 영상들을 간직하고 사는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다릅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 영상이 이끄는 대로 삶의 비전에 맞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 곁에는 두려움이란 놈이 감히 접근을 못합니다. 비전의 확실한 보디가드, 자신감이 버티고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긍정적인 사고와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제사장인 사가랴와 그의 아내 엘리사벳은 연로하도록 아기를 갖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가랴가 성소에 들어가 분향을 하는데 주의 사자가 나타나 엘리사벳이 수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며 아기의 이름을 요한으로 지으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사가랴가 천사의 말을 믿지 못하여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 많으니이다"라고 하자 천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서있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입었노라 보라 이 일의 되는 날까지 네가 벙어리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내 말을 네가 믿지 아니함이어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리라' 이렇게 하여 사가랴는 그의 불신앙으로 인하여 그 아들 요한이 태어날 때까지 벙어리가 되어야 했습니다. 우리가 마음에 가진 생각과 하는 말에 따라 우리의 삶은 긍정적이 되기도 하고 부정적이 되기도 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마음을 지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긍정적이고 창조적으로 되어 하나님의 길을 예비할 때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넘치게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게 되며 우리는 하나님의 사역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는 것입니다. ˝나는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자기암시는 성공의 정신적인 씨앗입니다. 꽃을 피우기 위해 씨앗을 심고 물을 주고 거름을 주듯, 비전이 성공이라는 꽃을 피우는 데도 필요한 양분들이 있습니다. 긍정적인 자세로 살아가는 사람은 슬럼프에 빠져도 훌훌 털고 일어설 줄 아는 여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부정적인 자세로 세상을 보는 사람에겐 정신적, 육체적 피곤과 결핍이 따릅니다. ´피로한 자는 세상을 지배할 수 없다´는 광고카피도 있지 않습니까? 세상은 고사하고 자기 자신도 지배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긍정주의는 비옥한 땅이지만 부정주의는 황폐한 땅임을 알아야 합니다. 로버트 슐러 목사는 실패까지도 껴안을 수 있는 긍정을 말합니다. 무슨 일을 하다가 실패했을 때, 이젠 끝이다. 내 인생 역시 끝났다”고 절망하지 말고 “다시 해야 할 일이 생긴 것이다.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라 말합니다. 얼마 전에 중고교생들이 우울증에 많이 걸린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우울증은 원래 장년들이나 걸리는 줄 알았는데 청소년들에게도 우울증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원인은 대부분 외모에 대한 열등감 때문이라고 합니다. 생긴 모습을 바꿀 수는 없겠지만 자기 외모에 대한 마음의 태도는 바꿀 수 있습니다. 믿는 사람 가운데도 자존감이 현저하게 낮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히 외모에 대한 자존감이 낮은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거울에 자기 모습을 비추어보는 일조차 꺼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생김새에 대한 생각을 약간만 달리 가진다면 열등감 없이 살 수 있습니다. 우리 모습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일한 모습입니다. 이 세상에서 나와 같은 모습을 가진 사람을 고르라면 내가 유일합니다. 이 세상에 유일한 것은 모두 가치가 있습니다. 백화점에 걸려 있는 화려하고 보기 좋은 밍크코트보다 골동품상에 있는 골동품이 더 비싼 이유는 무엇입니까? 유일하기 때문입니다. 화려함보다 가치 있는 것은 유일함입니다. 우리 각자의 모습은 유일합니다. 유일함에 대한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자존감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거울을 자주 보십시오. 자기 얼굴을 쳐다보며 자신을 인정해주면서 보듬어 주십시오. ‘나 정도면 괜찮은 사람이야. 나는 유일한 사람이야.’ 자주 그렇게 해보십시오. 더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더 높은 자존감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별 볼일 없는 사람이지만 별 볼일 있는 분인 예수님이 함께 계실 때 우리는 별 볼일 있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귀한 존재가 되는 겁니다. 외모로 본다면 바울 사도는 보잘 것이 없었다고 합니다. 대머리와 매부리코에 키도 작고 양 눈썹이 붙어 있었을 정도라고 하니까 시쳇말로 분명 그는 얼짱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그를 좋아했습니다. 그의 외모를 보고 좋아한 것이 아니고 그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보고 좋아한 것입니다. 우리의 자존감은 우리의 잘 생긴 외모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유일하게 창조되었다는 믿음과 우리 안에 계신 귀한 분 때문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당신은 유일합니다. 나도 유일합니다. 해방되기 전 함북 나남에 한 젊은 여자 거지가 있었습니다. 주변에서 조롱하거나 빈정대거나 심지어 욕설을 퍼부어도 한번도 화를 내거나 대꾸하는 일조차 없이 그저 싱글벙글 웃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를 미친 여자로 치부하고 아예 상대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8·15 해방이 왔습니다. 이 도시 나남에도 소련군이 들어왔습니다. 승전국의 기세로 진주해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 여자 거지가 소련군 중위 계급장을 단 장교로 거리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녀는 거지가 아니라 소련의 밀파 간첩이었던 것입니다. 온갖 모멸과 조롱, 멸시, 천대 속에서도 그처럼 태연하고 여유 있는 자세를 취할 수 있었던 까닭을 알 것 같습니다. 소련군 장교인 그녀는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사명감과 긍지를 가졌고 자기의 능력에 대해서도 자신감이 넘쳤습니다. 오히려 그 멸시 속에서도 남들이 모르는 어떤 보람이나 쾌감을 경험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남들이 대단치 않게 여길까봐 전전긍긍하며 살고 있습니까? 역사상 악역이었던 공산당의 한몫을 담당하는 일에도 그처럼 긍지를 가졌거늘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에게 있어서 더 할 나위가 없습니다. 또 한 분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남태평양’‘하와이’등 유명한 작품으로 이름을 떨친 ‘제임스 미치너’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백악관 만찬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이유로 참석치 못 한다는 편지를 띄웠습니다. 물론 자기 입장을 적어 보낸 글입니다. “…실은 옛날 제게 글 쓰는 법을 가르쳐주신 고등학교 때 여선생님이 한 분계십니다. 그 어른을 위해 가까운 친구들이 만찬을 베풀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 모임에서 몇 마디 이야기하기로 약속했습니다. 이 약속을 한지 사흘 후 백악관의 잔치에 참석하라는 초청장을 받았습니다. 대통령 각하께서는 제가 그 모임에 못 가더라도 과히 섭섭하게 여기시지는 않으시리라 믿습니다만 그 고등학교 여선생님은 아마 몹시 마음 상해하실 것입니다” 이런 편지를 띄우고 린든 존슨 당시 대통령의 만찬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65세의 이 여선생은 대통령보다도 더 큰 영예의 시간을 가졌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모두가 큰 소리로 세상을 향해 외쳐보십시오. “나는 꼭 필요한 사람입니다”라고. 자신의 삶에 큰 기대감을 가지고 살아가면 희망과 기쁨이 날마다 샘솟듯 넘치고, 다가오는 모든 문들을 하나씩 열어 가면 삶에 리듬감이 넘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지만, 그중 필요 없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세상에 희망을 주기 위하여, 세상에 사랑을 주기 위하여, 세상에 나눔을 주기 위하여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나로 인해 세상이 조금이라도 달라져 새롭게 변화될 수 있다면, 그 삶이 얼마나 고귀하고 아름다울까요? 나로 인해 세상이 조금이라도 밝아질 수 있다면, 얼마나 신이 날까요? 자신을 향해, 세상을 향해 외쳐보십시오. “나는 꼭 필요한 사람입니다”라고. 구약성경에 나오는 요셉은 야곱의 11번째 아들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유달리 많이 받았으나 형제들의 미움을 사 애굽상인에게 팔려가 종이 됩니다. 종살이를 하는 중 주인여인에게 유혹을 받으나 단호히 거절합니다. 그것으로 미움을 사 무고로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애굽을 다스리는 총리가 됩니다. 이 사람의 자존심은 거룩한 자존심인 것입니다. 형제들이 팔았어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고생을 해도 누구를 탓하지 않았습니다. 여인의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임금에게 아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신앙만 지켰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을 지키니 자존심도 지켜진 것입니다. 거룩한 자존심은 신앙을 지킬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벧전 2:9) 자신의 의미와 가능성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큰일을 해낼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하는 일의 의미와 가치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성공할 수 없습니다. 자각은 자신의 잠재력을 능률화하고 극대화하는 기초가 됩니다. 비록 우리는 연약하지만 우리를 강하게 만드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택하신 족속이며 특별한 소명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모든 일들은 정말 엄청나게 중요합니다. 그분 안에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기억하십시오. 피카소의 조각 "황소 머리"는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가치 있는 예술품인데 그 재료는 쓰레기 처리장에 가서 얻어 온 낡은 자전거라고 합니다. 피카소는 "쓰레기는 위대한 가능성을 가졌다."라고 말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쓰레기에 누구의 손과 두뇌가 닿느냐하는 것입니다. 피카소의 손이 닿았을 때 버려진 자전거는 쓰레기가 아닌 예술품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우리들이 교우나 친구들과 어울려 사진을 찍었을 때 그 사진에서 가장 먼저 보는 것이 바로 내 모습입니다. 내 모습이 잘 나왔으면 그 사진을 잘 나왔다고 합니다. 그것은 나 자신이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노만 필 목사님의 이야기 중에 ‘독수리와 닭’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모험을 좋아하는 어떤 소년이 산에 놀러 갔다가 독수리 둥지 속에서 알을 꺼내 가지고 돌아와 양계장의 암탉 품속에 넣었습니다. 그 후 알들이 부화하자 병아리들 속에 이상한 짐승이 나타났습니다. 이 짐승은 부리가 뾰족하고 눈알이 번쩍이고 발톱이 날카롭게 생긴 독수리였습니다. 그 독수리 새끼는 닭들과 함께 닭의 습성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큰 독수리 한 마리가 양계장 상공을 날아서 멋지게 맴돌다가 날아갔습니다. 그때 갑자기 그 새끼 독수리는 자기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리고 ‘나도 저 새처럼 하늘을 날 수 있을까?’하고 날개를 폈습니다. 그는 이제까지의 생각과 행동을 청산하고 날개에 힘을 주며 허공으로 치솟았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엄청난 가능성을 부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분명한 뜻은 죽음이 아닌 영생입니다. 암흑이 아닌 광명입니다. 질병이 아닌 건강입니다. 저주가 아닌 축복입니다. 실패가 아닌 성공입니다. 하나님은 신명기에서 모세를 통하여 교훈하시기를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너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종살이하는 종의 자리에서 떠나 너희들은 하나님의 유업을 계승할 자”라고 하나님의 자녀임을 말씀하셨고 예수님도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이 너희의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을 뿐 아니라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 생명으로 지음 받은 고귀한 인생입니다. 크리스천은 자신의 가치와 능력을 인정하는 사람이요 자기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을 맡기실 때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까지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귀중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귀한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하나님은 우리 개인과 더불어 일하십니다. 예수님도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세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개성과 재능, 인격과 능력을 민족과 교회를 위해서 아낌없이 쏟아 부어 기쁨과 보람이 넘치는 승리의 삶을 살아야 되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과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아름답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