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집 원고 3편+약력-김종인>
이 황량한 겨울 들판 외 2편
김종인
털털거리는 경운기 위에서 아우는
공단으로 떠난 친구 얘기에 열을 올리고
아버진 끝내 한 말씀 안 하시며
새터 모래논에 참흙을 넣는다.
모래논엔 참흙이 제일이지
알맹이끼리 어울려 떼알무리가 되어
물스밈도 좋아지고 공기도 들락날락
화학비료만으로 높은 수량 내는 것은
땅힘의 수탈 위에 피는 한철뿐인 꽃이란다.
아우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입을 다문다.
지력의 수탈 위에 피는 단명의 꽃
떠나리라, 타관살이 십 수년에 돌아온 고향
헛되이 살아온 세월, 활활 벗어 던지고
알맹이끼리 어울려 떼알무리 만들어
벼이삭 알차게 하는 참흙.
가을을 위하여 우리는,
황량한 겨울 들판에 흙을 넣는다.
큰 바위 얼굴
김종인
큰 바위 얼굴의 전설과 예언은
이 땅에도 꿈처럼 전해 왔지만,
금을 모으는 사람이라 불린 큰 부자
나이 먹은 살인자라 불린 장군
천의 얼굴을 가진 정치가의 소문들뿐,
사물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시인은 어디 있는가.
지친 사람들이 살아가는 마을엔
인자하고 숭고한 철학자의 말 대신
소득증대, 근면, 자조, 협동,
새마을 스피커 소리만 요란한데,
저마다 살기에 바쁜 사람들이
살아가는 마을엔 노을만 붉게 탄다.
돈을 뿌리고 칼을 휘두르고
천하의 별명을 얻기 위하여
부자도, 장군도, 정치가도
마을로 돌아오지 않았다.
예지의 가슴으로 현실을 바라보던
시인은 돌아왔으나,
바다를 노래하면 두려움에 넘친
깊은 바다가 마침내 출렁이던,
시인은 어둠 속에서 돌아왔으나,
시는 묻혀지고
아무도 읽을 수조차 없는
시를 쓰던 시인은
슬픈 얼굴로 마을을 떠나고
마을은 바다보다 깊은 잠에 빠졌다.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김종인
무더운 장마와 불볕 더위를 거치고
홍수가 천지를 휩쓸고 대지 위에
낙엽이 하나 둘 지고 있다.
없는 사람에게는 더 빨리 찾아오는 겨울이
저만큼에서 제법 쌀쌀한 바람을
우리들 허한 목덜미 사이로 불어넣고 있다.
지난해는 위대했다.
우리들 결코 물러설 수 없다는 의지와
한번 올린 깃발 결코 내릴 수 없다는 신념으로 사수했으므로
눈보라가 몰아치고 사방이 얼음벽으로 가로막혀도
온몸을 부딪쳐 피워 올리는 사랑의 열기로
우리는 오히려 더웠다.
찬란히 밝아올 90년대의 봄,
역사의 한가운데 서리라 다짐하며
우리는 오히려 행복하였다
그러나, 겨울이 채 가기도 전에
배신과 좌절과 절망의 대야합을 보면서도
우리는 꺾이지 않았다
다시 오는 봄을 두 주먹 불끈 쥐고 맞으며
오이팔을 향해 발바닥 부르트게 뛰었다
해맑은 웃음의 아이들을 생각했다
동지들이 타는 눈망울을 바라보았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재촉하며 다짐했다
눈앞의 이익을 바라고 택한 길이 아니라고.
이제는 다들 잊으려 하는 현실도 보았다
입으로만 말하는 공치사 앞에
허허로운 웃음을 날리며 돌아서기도 했다
눈물로 떠났던 사람들
안스럽게 바라만 보던 사람들
부끄러움 거두고 나타났을 때,
우리는 말없이 두 손을 굳게 잡았다.
우리들 다시 돌아오게 해 달라고
우리들 빼앗긴 교단을 되돌려 받기 위하여 서명을 할 때,
차오르는 희망과 가슴속 열기를 주체할 수는 없었지만
순수한 동료애까지 짓밟히는 현실 속에서
억장으로 무너지는 가슴 쥐어뜯었다.
교단에서 쫒겨나 거리의 교사 된지 1년
하릴없이 낙엽은 하나 둘 떨어지고
제법 선들선들한 바람이 목덜미 사이로 불어오고 있다.
그 동안에도 참 많은 아이들이 죽었다
억압과 굴종의 교육현실 속에서
먼저 시들어 떨어지는 못 다 핀 꽃송이들
죽어 가는 아이들 살려내자고 떨쳐 일어선 동지들
연탄 개스로, 암으로 이 세상을 하직하였다.
다시 조여오는 억압의 사슬을 견디지 못해
대구에서, 청주에서 아이들은 죽어가고 있다.
수많은 교사들이 쓰러지고 있다
하루종일 분필가루 속에서 과로하다보니
기관지와 폐와 위장과 간장,
허리 디스크, 관절염, 신경통으로
교사들이 쓰러지고 있다
최루탄과 방패와 쇠파이프에 찍히며
서울로 대구로 집회에 참가하느라
삼시 세끼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동지들
간염, 폐렴, 위장염, 과로로 쓰러지고 있다
어제의 동지들 이제는 어느 하늘 아래 살아가고 있을까
생활고에 시달려 말 못하고 떠난 동지도 많다
좌절과 절망과 불면의 밤을 어디서 곱씹고 있을까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교육을 애타게 바라던 그들
죽어 가는 아이들 살려내는 교육을 하자던 이들이
이제는 아이들과 함께 죽어가고 있거늘
아직도 우리는 논리와 이기에 빠져 있다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내가 선 이 자리, 그들이 떠나간 이 교단에서
지난 날 부끄러움 같은 사치는 이제 버려야 할 때,
툴툴 털고 일어서 대오를 정비해야 할 때,
다시 참교육이란 무엇인가 보여주어야 할 때,
근무여건 개선운동으로 교육유해환경 척결운동으로
작은 것 하나라도 이제는
실천으로 무기 삼아야 할 떄.
낙엽이 지고 나면 어느새
겨울은 우리도 모르게 닥쳐 온다
겨울이 오기 전에 먼길을 떠날 채비를 차려야 한다
겨울로 통해져 있는 먼 길
이미 우리는 이 길을 많이 걸어 왔다
눈앞의 더운 밥을 위하여 택한 길이 아니다
오다가 화적떼를 만나기도 했다
애초 우리들이 택한 길이었으므로
우리들 이미 당당히 걸어온 길이었으므로
가다 보면 또, 어깨동무할 길동무도 만나고
열 고개 스무 고개 넘고 넘어
때로는 눈보라와 비바람에 시달릴 때도 있겠지만
마침내 우리 앞에 펼쳐질
참교육 해방의 지평을 위해서라면
지금은,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우리들이 마침내 도달해야 하는 세상은
우리들이 가고 있는 이 머나먼 길 위에 있다
무더위와 장마, 폭염과 홍수를 지나왔다
낙엽이 지고 눈보라가 몰아치고 봄이 오고
또다시 낙엽이 지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리며
지금 우리는 가고 있다
그날은,
우리가 바라는 그 날은
이 길 위에서 맞이할 것이다
그 날을 위해 우리다함께 어깨 걸고 가는 지금은,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약력 : 김종인
1955년 경북 금릉 초실 출생
1983년 “세계의 문학”에 작품 발표로 등단
* 시집 “별”(1994년 도서출판 사람) “흉어기의 꿈” (1985년 서울 온누리)
“아이들은 내게 한 송이 꽃이 되라 하네”(1990년 실천문학사)
“나무들의 사랑”(2003년 문예미학사)
* “분단시대” “등등시” 동인,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
현재 구미 선주고등학교 근무 * ID : kmt820@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