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례>
1.피라밋이 예언했던 그들 20세기가 배출한 불세출의 락스타 비틀즈
2.리버풀 4인방
3.쿼리맨과 핵분열
4.함부르크에서의 지옥훈련기
5.브라이언 엡스타인, 그리고 EMI와의 계약
6.영국을 휩쓸다
7.미국을 정복하다
8.음악적인 발전
9.공연중단과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10.브라이언의 죽음과 분열
11.분열상을 승화시킨 화이트앨범과 Get Back세션
12.Abbey Road와 해산
13.해산 이후와 오늘날, 그리고 Anthology
14.락계의 전설이라 불리는 비틀즈
1.피라밋이 예언했던 그들 20세기가 배출한 불세출의 락스타 비틀즈
세계의 불가사의 이집트 피라밋 내부벽에는 수천년전에 쓰여진
이런 줄이 아직도 남아있다.
"언젠가 4마리의 갑충(甲蟲)이 땅위를 거닐며 기쁨과 지혜를 온
세상에 전하리니 그날로부터 많은 것은 변하리라."
이 묘비명이 쓰여진지 4천년이 지난 1960년대, 거짓말처럼 네
마리의 갑충, 딱정벌레들(Beetles : 원래 비틀즈는 그들이 좋아했
던 미국의 로커빌리가수 '버디홀리'의 백밴드, 귀뚜라미들(The
Crickets)에서 힌트를 얻어 '딱정벌레들(The Beetles)'이라는 이름
을 지은뒤 60년대에 유행하던 비트(Beat)라는 말의 뉘앙스를 살
려 'Beatles'라고 이름지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이 갑자기 세상
을 떠들썩하게 하며 젊은이들에게 기쁨과 음악적인 지혜를 전파하
기 시작했다. 수 많은 후배 가수들이 이들의 음악적 지혜를 이어
받았고 이들이 출연한 이후 대중음악은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했으
니 피라밋의 묘비명은 너무도 정확한 예언이었다.
비틀즈의 멤버 4인의 생년은 전부 40년대의 초반. 20세기를 뜨겁
게 달구었던 2차대전이 한창이던 때였다. 20세기 인류사의 거대한
카오스와도 같았던 2차대전의 와중에 태어난 그들은 전후에 태동
된 락큰롤 음악의 거대한 질서를 확립하였고, 그 기반위에서 오
늘날의 대중음악은 꽃피었다. 2차대전후에 불규칙적인 형태로 태
동되던 서구 대중음악의 모든 요소들을 받아들여 락(Rock)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질서를 만들어낸 비틀즈. 카오스는 광활하고 질서
있는 코스모스의 근원이 된다는 물리학이론의 증거를 멀리서 찾지
않아도 될 듯하기만 하다. 그럼 이제부터 20세기 후반 50년의 음
악질서를 뒤바꿔 버린 4마리 딱정벌레들의 역사를 그들이 태어난
시절부터 더듬어 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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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리버풀 4인방
존 레넌(John Lennon)
본명: John Winston Lennon
생년월일: 1940년 10월 9일생
출생지: 리버풀 옥스퍼드거리 매터니티병원
존은 리버풀 항구에서 선원 노릇을 하던 한량 프레디 레논
(Freddie Lennon)과 줄리아 스탠리(Julia Stanley)사이에서 태어났
다. 그의 아버지 프레디는 존이 어릴때부터 가정을 제대로 돌보지
않고 불규칙적으로 배를 타곤 했다. 이미 존이 태어났을때 그의
부모는 사실상의 별거상태였던 것이다. 남편을 믿을 수 없었던 그
의 어머니 줄리아는 그의 양육을 이모인 미미에게 부탁하고 직장
을 다녔었다. 존은 어릴적부터 부모와 떨어져서 살아야 했던 것이
다. 미미 이모와 그의 이모부는 그를 친자식처럼 사랑해주었지만,
친부모의 공백을 메워줄수는 없었다. 존의 어머니는 미미이모의 집
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살았고, 존과는 자주 만나며 친구처
럼 대해주었다. 존에게 있어 줄리아는 어머니라기 보다는 누나에
가까웠다. 이런 어머니 줄리아는 존이 17세 되던 해에 교통사고로
사망하게 되는데 이는 존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고 그를 평
생동안 마더 컴플렉스에 시달리게 한다. 존은 후일 어머니의 죽
음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어머니를 두번 잃었다. 한번은 미미이모의 집으로 들어가면
서 잃었고, 한번은 어머니의
죽음으로서 영영 잃었다.' 이러한 환경은 존에게 남들과는 많이
다른 성격을 형성해 주게 된다. 존은 이 시기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 '부모님이 없었기에 좌절도 했지만, 부모님이 절대적
이 아니라는 사실을 남보다 빨리 터득했다.'라고. 이렇듯 평범하지
만은 않은 환경에서 자란 존은 전통적인 가치를 중시하기 보다는
반항적인 태도를 길러갔다. 그는 곧 엘비스의 락큰롤에 빠져 들게
되었다. 락큰롤을 거의 방송하지 않던 BBC라디오대신 잘 잡히지
않는 독일의 라디오나 라디오 룩셈부르크등에 주파수를 맞춰가며
락큰롤에 심취했던 것이다. 그렇게 락음악을 들으며 엘비스, 척베
리, 리틀리처드등에 미쳐갔던 존은 오직 기타를 한대 갖는것이 소
원이 되었다. 그의 이모 미미는 이런 존에게 통신판매로 스패니쉬
기타를 한대 사주었으며, 벤죠를 연주할줄 알았던 그의 어머니 줄
리아는 존에게 벤죠식으로 코드를 몇개 가르쳐 주었다. 그렇지 않
아도 락큰롤에 미쳐있었던 존은 기타를 손에 넣은 뒤로는 더욱 기
타연주와 음악에 빠져들게 되었다. 당시 그는 매일같이 기타와 노
래를 연습했는데 이를 보다못한 미미이모가 그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존, 기타는 좋아. 하지만 그걸로 먹고 살수는
없다는 걸 명심해라.' 그는 음악이외에 그림과 글쓰기에도 열정을
보였는데 이때 갈고 닦은 실력은 나중에 스타가 된뒤 두권의 책을
출판하여 호평을 받아낼 정도에까지 이르게 된다. 어쨌든 공부는
등한시 한채 기타와 음악에 빠져들었던 존은 급기야는 교내에서
친구들을 모아 쿼리맨(Qyarryman)이라는 밴드를 조직하게 된다.
초기에 쿼리맨은 밴드라기 보다는 불량패거리에 더 가까웠으며
음악형식도 락큰롤이라기 보다는 당시 영국을 휩쓸던 스키플
(Skiffle : 락큰롤과 재즈의 중간형태라고 볼수 있는 것으로 전기증
폭을 사용하지 않은 어쿠스틱 기타와 드럼, 그리고 빨래판등의 타
악기를 이용한 음악. 락큰롤의 열정은 가지고 있으나 아직 프로
음악으로 다듬어지지는 않았던 형태로서 영국적인 락이 발생하는
모태가 되었다.)의 그것이었다. 교내 행사나 친구들의 생일파티등
에서 매우 낮은 수준의 연주를 보여주며 발전이 없던 쿼리맨은 나
중에 폴 매카트니와 조지해리슨을 가입시킴으로서 음악적으로 점
프를 하게 되고 이는 비틀즈가 되는 것이다.
폴 매카트니(Paul McCartney)
본명: James Paul McCartney
생년월일: 1942년 6월 18일생
출생지: 리버풀시, 라이스 107번가, 월튼 종합병원
거의 세미프로뮤지션이었던 짐 매카트니(Jim McCartney)와 간호
원이었던 어머니 메리 패트리카(Mary Patrica)사이에서 폴은 태어
났다. 음악적으로 높은 안목을 갖고 있었던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여러가지 음악을 들려주었고 음악적인 지식도 많이 가르쳐 주었
다. 이러한 아버지덕분에 폴은 어린시절부터 재즈나 스탠더드 팝
을 즐겨들었고 이는 나중에 폴의 음악적 스타일을 구성하는데 중요
한 요소가 된다. 존이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락큰롤 이전
에는 아무 음악도 나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였다'고 말한 것과 대조
되는 부분이다. 이렇게 음악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던 폴은 사춘기
가 되면서 락큰롤 음악에 심취하게 된다. 폴은 존과 마찬가지로
리틀 리처드와 엘비스에 열광했으며 특히 팝적이면서도 소프트한
락큰롤을 부르던 버디 홀리(Buddy Holly)의 음악에 깊게 빠져 들
었다. 그러나 폴은 존과는 달리 학교공부에도 비교적 충실했고 덕
분에 명문 고등학교인 리버풀 인스티튜트(Liverpool Institute)에 입
학할수 있게 된다. 이렇게 부모님과 한명의 남동생과 함께 평범한
가정생활을 하던 폴에게 커다란 사건이 하나 일어났으니 그것은
다름아닌 어머니의 죽음이었다. 비교적 모범적인 생활을 하던 폴
에게 어머니의 죽음은 큰 충격이었으며 이런 아들을 위로하기 위
해 그의 아버지는 트럼펫을 사주게 된다. 기타를 더 원했던 폴은
아버지가 사준 트럼펫을 악기상에서 기타로 바꿔 오게 되고 왼손
잡이였던 폴은 오른손잡이용 기타의 줄을 거꾸로 매어가며 기타
를 연습한다. 음악적 재질이 있었던 그는 곧 기타치며 멋지게 노
래할수 있는 수준에 이르게 된다. 천성적으로 엔터테이너의 기질
을 갖고 있었던 폴은, 어느날인가 야유회의 장기자랑시간에 담당
자를 졸라 난생처음 무대라는 것에 오르게 되고 동생과 함께 노
래를 부르게 되는 것이다. 이후 폴은 노래와 기타실력을 여러곳에
서 선보이게 되었으며 존을 만나게 되는 15세경에는 노래를 직접
만드는 수준에까지 올라가게 된다.
조지 해리슨 (George Harrison)
본명: George Harrison
생년월일: 1943년 2월 25일생
출생지: 리버풀시, 아놀드 그로브 12번지
해럴드 해리슨(Harold Harrison)과 로이스 프렌치(Loise French)사
이에서 태어난 조지 해리슨은 네명의 비틀즈 멤버중 가장 기복없는
가정환경과 성품을 지녔다. 뛰어나게 잘 사는 집안은 아니었지만
버스운전을 하는 아버지 밑으로 많은 형제들이 평범하고 안락한 생
활을 이어 나갔고 조지의 성격또한 낙천적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음악을 사랑하고 즐겨들었기 때문에 조지는 어릴때부터 음악을 가
까이 할 수 있었다. 성장하면서 락큰롤 음악에 빠져든 조지는 친
구로부터 중고로 기타를 한대 구입하여 실력을 연마하게 된다. 그
의 어머니는 조지가 기타를 꾸준히 연습할 수 있게 격려해주었다.
어느정도 실력을 쌓은 조지는 친구들을 모아 The Rebels라는 스
키플 그룹을 결성하게 된다. 폴과 마찬가지로 학업성적이 좋아 리
버풀 인스티튜트에 입학한 조지는 1년 선배인 폴을 스쿨버스 안에
서 만나 공동관심사였던 락큰롤 음악에 대해 이야기하며 가까워졌
고 폴의 소개로 쿼리맨에 가입하게 된다. 이로서 비틀즈의 뼈대가
구성되게 되는것이다.
링고스타 (Ringo Starr)
본명: Richard Starkey
생년월일: 1940년 7월 7일생
출생지: 리버풀시, 마드린가 9번지
리버풀의 빈민가에서 출생한 링고의 본명은 리차드 스타키이다.
어렸을때 부모의 이혼으로 계부밑에서 성장했으며 몸이 허약하여
학교조차 제대로 다니지 못하였다. 몸도 약하고 머리도 둔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링고는 중학교 시절 친구들과 밴드를 조직하게 되
는데, 친구들은 아둔한 링고가 연주할수 있는것은 드럼뿐이라고
생각하여 그에게 드럼을 맡겼다. 그러나 천성적으로 낙천적이며
쇼맨십을 가지고 있었던 링고는 금방 실력있는 드러머가 되고 특유
의 유머와 재치로 친구들과 청중사이에서 금방 인기를 얻게 된다.
여러밴드를 거치던 그는 리버풀의 인기그룹 로리스톰과 허리케인
스(Rory Storm and Hurricanes)의 드러머로 리버풀과 함부르크에
서 맹활약하게 된다. 함부르크 시절 그곳에 진출한 비틀즈와 친해
진 그는 비틀즈 데뷔레코딩과정에서 극적으로 비틀즈에 합류하며
막차에 오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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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쿼리맨과 핵분열
사춘기가 되면서 락큰롤 음악에 빠져든 존은 기타를 손에 잡게
된다. 기타실력을 어느정도 쌓은 뒤 그는 특유의 보스기질로 친
구들을 모아 쿼리맨(Quarrymen)이라는 스키플 밴드를 조직하게 된
다. 말이 밴드였지 연주실력도 형편없었고 밴드라기 보다는 오히
려 불량써클에 가까웠던 쿼리맨은 친구들의 파티장이나 결혼식장등
에서 연주를 하며 이름을 알려나가게 된다. 그러던 1957년 7월의
어느날 쿼리맨은 리버풀 교외의 울튼 교회에서 연주를 갖게 된다.
존의 친한 친구이며 폴과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었던 이반 본
(Ivan Vaughan)은 쿼리맨의 연주회에 15세의 미소년 폴 매카트니
를 불러오게 된다. 자전거를 타고 교회의 강당에 놀러온 폴은 그
곳에서 쿼리맨의 연주를 처음으로 보게 된다. 사실 이때의 쿼리
맨의 연주는 정말로 보잘 것이 없는 수준이었다. 폴 역시 그들의
실력에는 별로 감명받지 않았으나, 그들의 개성과 매력을 보고는
멋지다고 생각했다. 공연 뒤 무대뒤에서 폴은 맥주에 취해있던 존
을 만났고 존은 그에게 노래를 해볼것을 권하게 된다. 폴은 기타를
잡고 Twenty Flight Rock, All Shook Up 등 그당시 히트곡들을
자기식으로 해석하여 멋지게 불러냈는데 존이 그의 노래실력과 기
타실력에 반했던 것이다. 노래뿐만이 아니라 폴은 기타의 조율을
귀로만 듣고 해낼 수 있었으며 게다가 작곡까지 하고 있었던 것이
다. 그러나 존은 폴에게 즉각적인 가입제의를 하지는 않았다. 존은
폴의 가입이 쿼리맨에서의 자신의 주도권에 손상을 주지는 않을것
이라는 판단이 선 일주일 뒤에야 친구를 통해 폴의 가입의사를 타
진했던 것이다. 길을 가다가 우연히 만난 친구로부터 이 제의를
들은 폴은, 은근히 쿼리맨을 부러워하던 차에 흔쾌히 승낙했고 드
디어 비틀즈는 핵분열을 시작했던 것이다. 음악으로서 동료가 된
폴과 존은 이후 남다른 우의를 보였다. 사실 둘은 성격적으로는 거
의 친해질수 없는, 아니 오히려 서로를 싫어할 만한 사람들이었다.
더구나 나이조차 2살이나 차이가 나는데도 락큰롤 음악이라는 공통
관심사는 그들을 단단한 우정의 끈으로 묶어 놓았다. 이에는 둘다
어머니를 여읜 처지라는 사실도 큰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다. 그
들은 수업을 빼먹고 폴의 집에서 만나 기타 및 노래 연습과 공동작
곡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락계의 전설적인 레논-매카트니콤비
의 출발이 되는 것이다. 이때 이들은 앞으로 자신들이 만드는 모
든 곡에는 누가 만들었던 간에 레논-매카트니라는 말을 달자는 약
속을 하게 되고 이 약속은 비틀즈가 해산할때 까지 지켜지게 된다.
당시 기타실력은 폴이 약간 우위에 있었기에 둘이서 연습을 할때
면 폴이 종종 존에게 새로운 기타코드를 가르쳐 주곤 했다. 존은
후에 이 시절을 회상하면서 '폴은 항상 나보다 기타코드 두개정
도를 앞서 나갔다'고 말하곤 했다. 그들은 폴의 집에 있던 피아노
와 기타를 가지고 다양한 방법으로 노래를 만들어 보면서 더블 작
곡의 노하우를 쌓아가게 된다. 당시 그들이 만들었던 곡들은 수백
곡에 달한다고 하는데, 이는 간단한 형태로 노트에 적혀져 남아
있다가 아쉽게도 60년대 중반 폴의 집 대청소를 하는 과정에서 없
어졌다고 한다. 이러한 수백곡의 습작기를 거친 그들은 상당한 작
곡 실력을 터득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의 작곡실력은 상승했지만
악기연주 실력은 아직 그리 대단한 편이 못되었다. 이렇게 테크닉
적으로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던 그들에게 새로운 친구가 하나
나타났다. 폴은 같은 학교 1년후배로서 스쿨버스안에서 친해진 조
지 해리슨을 존에게 소개했고 그는 인상적인 기타실력을 선보인
뒤 바로 쿼리맨에 가담했던 것이다. 당시 그의 기타실력은 존과
폴을 압도할만 했다고 한다. 이미 그는 테크닉적으로 '완성된'기타
연주자였던 것이다. 아직 테크닉상으로는 이렇다할 발전이 없었던
존과 폴은 조지의 가입이후 그의 기타연주로부터 많은 자극을 받
게 되고, 밴드의 연주실력 또한 한단계 상승하게 된다. 이제 그들
은 서서히 무명의 스쿨밴드에서 벗어나 리버풀의 클럽가로 진출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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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함부르크에서의 지옥훈련기
그러나 당시 그들의 실력은 여전히 10대들을 대상으로 했던 커피
바 등에나 어울릴 정도였다. 리버풀의 캐스바(Casbah)클럽이나 자
카란다(Jakaranda)클럽등지에서 연주하던 그들은 조지의 가입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성과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그들에게 발전
의 기회가 주어지게 되는데 독일의 북부항구도시 함부르크에서
연주활동을 해보지 않겠냐는 제의가 들어온 것이다.. 당시 함부르크
의 유흥가에는 많은 영국출신 아마추어 밴드들이 진출하여 연주
를 하고 있었다. 그곳은 각국의 외항선원이 모여드는 곳으로서 그
들을 상대하는 창녀들과 거친 뱃사람들, 그리고 그 지방의 불량기
있는 젊은이들이 들끓는 매우 퇴폐적이고 험악한 곳이었다. 어린
나이로 외국에 나가 앞날이 보장되어 있지도 않은 연주생활을 하는
것을 두고 비틀즈 멤버들은 고심하였으나, 결국 함부르크로 건너가
보기로 결정하게 된다. 이때 보수적인 아버지를 둔 폴은 상당한 갈
등을 겪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그가 사범대학에 진학하기를 희망하
였기에 함부르크행을 결사적으로 말렸다고 전해진다. 만약 이때에
폴이 리버풀에 남아 그대로 진학하는쪽을 택하였다면 우리는 지금
비틀즈의 음악을 들을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결단끝에 60년 8월
독일의 함부르크로 건너간 그들은 지저분하고 거친 분위기의 클럽
등에 출연하며 실력을 연마하게 된다.(이 때의 그들을 담은 영화
BACKBEAT를 보면 당시의 상황을 잘 알수 있다.) 리버풀에서 기
껏해야 한시간 남짓한 공연을 하던 그들은 함부르크에서는 길게는
하루 8시간까지 노래하여야 하는 지옥훈련과도 같은 연주생활을 했
다. 그들은 이런 시기를 통해 프로뮤지션으로의 역량을 축적해 나
갔던 것이다. 장시간 연주를 하다보니 자연히 연주의 숙련도는 더
해질 수 밖에 없었고, 거친 관객들을 상대하다 보니 강렬한 락큰
롤을 연주해야 했으며, 리드보컬의 피로를 덜기 위해 코러스를 많
이 넣게 된다. 또 당시의 유행음악과 비틀즈의 이 시기 음악을 비
교해보면 상당히 연주가 강렬하다는 것을 느낄수 있다. 아직 전
기기타가 리드악기로 돌출하기 전이고 디스토션의 개념이 거의 없
던 때여서 현대 락음악의 강렬함과는 그 양상이 많이 다르지만,
당시 그들의 연주는 거의 70년대말의 펑크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했
다. 이렇게 기존의 락큰롤보다는 한층 힘있는 스타일을 몸에 익힘
으로서 그들은 성공의 잠재력을 축적해 나갔던 것이다. 그리고 이
시절 그들의 레퍼토리는 자작곡보다는 미국에서 직수입된 락큰롤
이나 리듬앤 블루스 등이 대부분이었는데, 거의 솔로보컬의 독창
력에 의존하는 원곡들을 그들은 코러스위주로 멋지게 재해석해
내었다. 이의 부분적인 이유는 8시간씩 라이브로 연주하다보니 리
드보컬의 부담을 덜어주지 않고서는 견뎌낼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외에 곡 중간에 신나게 소리치는 부분을 넣는다던지 하는 기교들을
하나둘 체득하게 되고 이런 것들은 이후 비틀즈 스타일의 큰 뼈대
를 이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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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브라이언 엡스타인,그리고 EMI와의 계약
이후 그들은 함부르크와 리버풀을 왕래하며 점차 실력과 인기를
동시에 다져 나간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리버풀의 지역스타에
불과했다. 변변한 매니저도 없이 활동하던 그들에게, 이때 한사람의
귀인이 나타났으니 그는 다름아닌 브라이언 엡스타인(Brian
Epstein)이었다. 유태인으로서 리버풀의 대형 레코드매장을 운영
하던 그는 한 고객의 소개로 비틀즈의 연주를 보게 된다. 성공에
확신을 가진 엡스타인은 그들에게 매니저를 맡아주겠다는 제의를
하게 되고, 손해볼것 없었던 비틀즈는 이를 수락한다. 그러나 엡스
타인이 매니지먼트를 담당한 뒤에도 사정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
다. 엡스타인은 비틀즈에게 레코딩계약을 맺어주기 위해 동분서주
했으나 레코드사들의 반응은 냉담했고 그들은 좌절하게 되었다.
당시 비틀즈는 영국의 대형 레코드사인 데카(Decca)레코드사의 오
디션을 보게되었는데 아쉽게도 탈락하게 된다. 이때 오디션 담당
자가 비틀즈에게 퇴짜를 놓으면서 한말, '기타그룹은 한물 갔
어!(Guitar groups are on the way out!)' 당시 비틀즈는 리버풀에
서 런던까지 자동차로 피곤한 이동을 한 상태였고, 첫 런던연주라
는 부담감까지 겹쳐 최악의 연주를 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엡스타인은 이때의 오디션 테입을 갖고 이곳저곳의 레코드사를 기
웃거렸으니 가는 곳마다 퇴짜를 맞은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할것
이다. 이렇게 계속 거절만 당하고 있던 비틀즈에게 또 한명의 귀
인이 나타났으니 그는 EMI의 가장 인기없는 레이블인 팔로폰
(Parlophone)의 프로듀서였던 조지 마틴(George Martin)이다. 클
래식 음악을 전공하고 팔로폰레이블에서 코미디레코드 등을 만들
고 있던 조지 마틴은 엡스타인으로 부터 비틀즈의 얘기를 듣게 된
다. 그는 오디션을 본뒤, 비틀즈의 음악적인 면보다는 재치있고 발
랄한 면에 이끌려서 레코딩계약을 체결해주게 된다. 이때 비틀즈
의 계약 조건은 불공정계약이라고 고소당하지 않을정도에 그친것이
었으니 레코딩계약에 대한 그들의 갈망이 어느정도였는지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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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영국을 휩쓸다
이렇게 어렵게 레코딩계약을 체결한 그들은 런던에 있는 EMI
애비로드(Abbey road)스튜디오에서 대망의 데뷔레코딩을 하게 된
다. 데뷔곡은 그들의 자작곡인 Love Me Do. 프로듀서였던 조지
마틴은 비틀즈에게 자작곡이 아닌 다른 스탠다드 넘버를 취입할것
을 권유했으나 결국은 그들의 고집대로 Love Me Do를 녹음하게
된다. 이 데뷔 싱글 Love Me Do는 영국차트 20위권까지 진입했
으나 아직은 평범한 히트에 불과한 것이었다. 더구나 매니저인
엡스타인이 차트진입을 위해 대량의 Love Mo Do 음반을 구입했다
는 이야기도 있으니 말이다. 어쨌든 데뷔싱글로 평균치 이상의 성
공을 거둔 그들은 후속싱글을 무엇으로 할 것인지 고심하게 된
다. 후속싱글로는 Please Please Me가 결정되었는데, 원래 이곡은
느린템포의 리듬 앤 블루스 곡이었다. 프로듀서 조지마틴은 이곡을
들어보고는 빅히트의 잠재력이 있음을 감지하고, 보컬을 더욱 명랑
하게 하고 템포를 빠르게 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후 비틀즈의 프
로듀싱을 도맡다시피 하면서 뛰어난 예술적 감각을 발휘했던 조지
마틴의 센스가 빛나는 순간이었다. 당시 의도대로 녹음을 마치고
난 뒤 조지 마틴은 비틀즈에게 이런 말을 던지게 된다. 'Boys,
You've got your first No.1!'. 조지 마틴의 예측대로 이곡은 영국
차트 1위로 뛰어오르게 되고 비틀즈의 인기는 드디어 점화되기 시
작한다. 충분한 자작곡을 가지고 있었던 비틀즈는 첫 넘버원덕에
인기가 폭발하기 시작하자 그 못지 않은 싱글들을 연이어 내놓아
급격한 인기를 모으게 된다. Love Me Do와 Please Please Me가
담겨있는 그들의 데뷰앨범인 Plese Plese Me는 영국차트에서 무려
30주간 1위를 차지하였고 뒤이어 발매된 두번째 앨범 With The
Beatles는 Please Please Me 앨범의 배턴을 이어받아 곧바로 No.1
자리를 승계, 21주간 1위를 차지하게 된다. 이때의 비틀즈 팬들
의 열광은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어서 급기야는 Beatlemania
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당시 한 매스컴에 의해 처음
사용되기 시작한 이 단어는 현재 영어사전에 나올 정도로 사용빈도
가 높은 말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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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미국을 정복하다
비틀즈는 락큰롤의 본고장이며 세계 최대의 레코드 시장인 미국
진출을 시도하기 시작하는데, 영국에서의 폭발적 인기와는 달리 미
국에서는 소규모 레이블을 통해 그들의 히트곡이 소개가 되고는
있었으나 아직 지명도는 현저하게 낮은 수준이었다. 그러던 64
년초, 그들의 싱글 I Wanna Hold Your Hand가 미국의 한 라디
오 방송국전파를 탄 뒤로 무섭게 인기를 모으더니 급기야는 빌보드
넘버원에까지 뛰어오르게 된다. 이 소식을 들은 비틀즈는 잡혀있
던 일정을 중단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최고의 쇼프로였던 에드 설
리반 쇼(Ed Sullivan Show)에 3주연속 출연하고 각처에서 콘서트
를 갖는등 활발한 활동을 벌이게 된다. 이 때 미국에서의 비틀즈
열풍은 대단한 것이어서 빌보드 차트의 1위부터 5위까지를 비틀
즈의 곡들로 채우기도 하였고, 발매하는 싱글마다 연속적으로 넘
버원에 올랐으며, 어떤 집계에 따르면 한 주일동안 전 미국에서
팔린 레코드의 60%가 비틀즈의 것이었다니 그 살인적인 인기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비틀즈는 미국 순회공연을 하면서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공연을 하는 등 엄청난 강행군을 하였다. 한
평론가는 64년 비틀즈가 미국을 정복할수 있었던 첫번째 이유는 다
름아닌 '체력'이었다고 말할 정도였던 것이다. 이때 비틀즈는 가는
곳마다 구름같은 인파의 환영속에 공연을 갖게 되는데 팬들사이에
서 그들은 이미 신격화 되어 있던 터라 그들이 덮고 잤던 담요를
조각조각내어 파는 장사가 생기기도 하는가 하면, 링고스타가 밟고
간 잔디를 붙잡고 우는 소녀팬의 모습이 LIFE지에 보도되는 등
그들은 거의 집단히스테리라고 해도 좋을 만큼의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급기야는 그들의 호텔방 목욕물을 1병당 1달러에 팔자는
제의까지 들어왔었다고 한다. 그들의 인기는 음악뿐만이 아니라 패
션등 음악외적인 측면으로도 엄청나서, 그들이 입었던 타이트한 정
장차림은 전세계적으로 유행하였으며 전세계의 모든 락그룹들을 비
틀즈 스타일, 즉 정장에 더벅머리 스타일로 바꿔 버리었다. 60년대
의 우리나라 밴드들의 사진을 보아도 비틀즈 스타일로 꾸미고 있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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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음악적인 발전
64년 미국진출에 대성공을 거두고 더불어 세계적으로도 지명도를
굳힌 비틀즈는 이제 스타덤위에서 한숨을 돌리고 65년부터는 음악
적인 성취를 위해 나아가게 된다. 이전까지 비틀즈의 음악은 기
타 두대, 베이스, 드럼의 간결한 락밴드 형식에다가 팔세토창법을
이용한 코러스를 위주로한 보컬라인을 갖고 있었다. 여기서 팔세토
창법이란 비틀즈의 음악을 이해함에 있어서 놓칠수 없는 요소인
데, 맑은 고음을 깨끗하게 뽑아낼 수 있는 폴 매카트니의 목소리
를 십분활용하여 고음의 코러스를 시원하게 넣는 방식을 말한다.
이때 대개 존은 낮은 음으로 리드보컬을 맡게 되고, 폴이 높은
파트 조지는 낮은 파트의 코러스를 부른다. 이러한 보컬 형식은
Please Please Me, From Me To You, I Wanna Hold Your Hand
등 초기의 수많은 히트곡들에 잘 나타나 있다. 물론 이러한 형식
하나만을 고집한것은 아니었지만 비틀즈 초기의 사운드는 거의 이
러한 구성의 변형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그다지 폭넓
지 못한 상태였었다. 그러나 비틀즈는 영국에서의 성공과 뒤이은
미국진출의 성공등에 자신감을 얻고 서서히 음악적인 다양성과
창의성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 제작된 앨범들
Help!, Rubber Soul, Revolver등은 그들 사운드 및 작곡법의 발전
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Help! 앨범에서 그들은 한층 세련되어
진 코러스를 보여주고 있다. 타이틀곡 Help!에서는 매끄러워진
하모니로 여유있게 리드보컬을 받쳐주고 있고 곡 구성도 한단계
상승한 것을 들을 수 있다. 그 외에 팔세토 창법도 초기의 거친
맛에서 벗어나 Ticket to Ride나 You're Gonna Lose That Girl
등에서 매끈하게 다듬어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 또한 You've
Got to Hide Your Love Away에서는 미국 포크락의 대부인 밥딜
런 스타일을 채용한 것을 볼수 있는데, 이는 단순한 스타일만의
채용이 아니라 비틀즈의 음악이 드디어 가사의 메시지를 중시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앨범의 수
확은 팝사상 불후의 명곡으로 평가되는 Yesterday이다. 유려한 멜
로디에 락반주가 아닌 현악 사중주의 반주가 입혀져있고, 절제되
어 있는 폴의 보컬이 덧붙여져 애절한 느낌을 자아내는 이곡은 이
전까지 비틀즈에 대해 내려지던 호의적이지 못한 평가들을 상당부
분 날려버렸던 것이다. 비틀즈는 이러한 곡들이 담겨있는 앨범
Help!로서 어느정도 음악적 변신에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고, 다음
앨범 Rubber Soul에서 보다 본격적인 음악적 진보를 추구하기 시
작한다. 사실 비틀즈 사운드 발전의 첫 스타트는 이 앨범이 끊은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전까지의 틴아이돌적인 이미지를
벗어보기라도 하려는듯이 어둡고 우수에 젖은 듯한 멤버들의 사진
으로 재킷을 만든 이 앨범은 이전의 단순한 화음구성, 곡구성, 악
기구성에서 탈피한 본격적인 진보앨범이었다. Nowhereman에서
보여준 발전된 하모니 - 이 곡에서 하모니 파트는 리드보컬의 주
도권을 절대 건드리지 않는 노련한 기교를 자랑하고 있다 - 는 그
단적인 예가 될수 있을 것이다. 이전의 곡들은 코러스파트가 리드
보컬을 압도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이 곡에서도 드러났듯이
Rubber Soul앨범에서 비틀즈는 리드보컬을 중시하기 시작한다. 이
전의 작품들은 다소 천편일률적인 보컬스타일로 일관하고 있었는
데, Rubber Soul앨범부터 그들은 곡의 감정에 따라 알맞은 보컬 형
식을 사용하게 되었고, 내면의 깊이있는 감정을 나타낸 곡들이 많
아짐에 따라 자연히 리드보컬 위주의 형태를 취하게 되었던 것
이다. 이는 Help!앨범에서 부터 감지되기 시작하던 것이었는데
Rubber Soul앨범에서 상당부분 확립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리드보
컬을 중시하는 것 이외에도 다양한 음악적 변화가 나타나게 된다.
흔히들 꼽는 것으로는 Norwegian Wood에서의 인도악기 시타
(Sitar) 사용이 있다. 단순한 기타반주로 끝날 뻔했던 이 곡에 도
입된 시타는 가사의 모호함과 맞물려 이국적이며 신비로운 분위기
를 물씬 자아낸다. 사실 이때 조지의 시타연주는 그리 수준이 높
은 편은 아니었다. 시타특유의 주법을 살리지 못하고 소리를 내는
정도에 그친것이었으나, 서양악기 일색이었던 락음악에 색다른 분
위기의 인도악기를 도입했다는것 만으로도 상당한 신선함을 획득
했으며, 실제로 음향적인 효과 또한 뛰어났던 것이다. 이 때를 시발
로 해서 비틀즈의 음악에 인도음악적인 요소가 도입되기 시작하는
데 이는 거의 조지의 공이었으며 이후 다양한 뮤지션들에게까지
파급되게 된다. 인도음악의 성격은 서양음악과는 대조적이라 할수
있다. 화성이나 기승전결의 구성을 중시하는 서양음악과는 정반대
의 접근방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서양음악에 젖어있던
비틀즈는 물론 청중들에게 까지도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갔을것으
로 짐작된다. 이러한 외래 음악에서 얻은 새로운 모티브나 기법
은 그들의 음악을 더욱 풍성하게 해주었을 것이다. 최근에는 서구
팝음악에 제3세계의 음악들이 대거 유입되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이러한 시도는 매우 생소한 것이었으며 팝계가 80년대에 와서야
자각하게된 표현수단의 한계를 비틀즈는 이미 데뷔 3년만에 느꼈
던 것이다. 이러한 표현수단의 한계를 자각하고 그를 극복하기 위
해 벌이는 노력은 인도음악의 도입이외에도 다양한 사운드의 실험
으로 이어지게 되며 이는 뒤에 설명할 Revolver와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앨범에서 꽃피게 된다.
Top
9.공연중단과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이렇게 음악적인 변신을 진지하게 시도하였으나 주변상황은 별로
변하지 않아서 음악적인 의미는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는 방송출연
및 살인적인 스케쥴의 순회공연이 이전과 같이 진행되어진다. 지금
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열악한 무대기술을 갖고있던 시기였기에
무대위에서 연주하는것은 여러가지 기술적 제약이 따랐으며, 따라
서 새로운 음악적 기법을 채택했던 그들의 신곡들은 대부분 라이
브 공연에서 연주될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비틀즈는 자신들의 진
일보한 음악성과는 동떨어진 천편일률적인 락큰롤 넘버들만을 무
대위에서 연주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무대 모니터 기
술이 개발되지 않았던 시절이라 자신들이 연주하는 음악이 전혀
들리지도 않는 상태에서 라이브공연을 치러야 했다. 관객들조차도
음악을 듣는것보다는 그들에게 비명지르는 것에 더욱 열심이었으
며 똑같은 레퍼토리를 도시마다 몇번이고 반복해야 하는 일정에
그들은 지쳐갔고 아무런 음악적 의미를 찾아내지 못했다. 이러한
회의를 가득 품은채 다음 앨범인 Revolver작업에 들어간 그들은
자신들을 스타로 만들어주는 대중성보다는 음악적 실험과 진보적인
사운드를 추구하였으며 이는 뚜렷한 성과를 거두게 된다. 뮤지션
으로서의 자각이 커지게 됨에 따라 이들은 그동안 행해왔던 '무대
위의 엔터테이너'에서 벗어나 진지한 음악가의 길을 걸을 결심을
굳히게 되는 것이다. 결국 앨범 작업을 마무리하고 또 다시 예정
되어있던 순회공연길에 오르게 되지만 그것은 곧 비틀즈의 마지
막 무대활동이 되어버리게 된다. 두장의 앨범(Rubber Soul과
Revolver)에서 보여준 새로운 시도를 담은 곡들은 거의 연주되지
못한채 구태의연한 락큰롤 곡만을 연주해대는 라이브콘서트는 그
들에게 더 이상 아무 의미도 주지 못하였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1966년 8월 29일, 샌프란시스코의 캔들스틱파크에서의 공연을 마
지막으로 순회공연을 중단하게 된다. 이 후 그들은 엔터테이너로
서의 빡빡한 스케줄에서 벗어나 잠시 개인적인 활동을 할 시간을
갖게 된다. 존은 영화 'How I Won The War'에 조연으로 출연하
게 되며, 폴은 영화 'Family Way'의 음악을 담당하게 된다. 이는
존과 폴의 개인적 성향의 차를 그대로 드러낸다 할수 있겠다. 그
룹 비틀즈가 아닌 자신만의 일을 할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자 존
은 음악이외의 의미있는 일을 찾았던 것이며, 폴은 자신의 음악
적인 야심을 이루기 위해 영화음악에 손을 댔던 것이다. 당시만
해도 일개 팝그룹의 연주자가 영화음악을 맡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또 조지는 평소 관심을 가져왔던 인도의 음악과 사상에
더욱 빠져들어갔으며 링고또한 개인적인 휴식기를 갖게 된다. 이
때 그들은 그동안 지켜왔던 Mop-top스타일(더벅머리에 정장차림을
뜻하는 말)까지 버리게 된다. 존은 안경을 쓰고 콧수염을 길렀으며
폴과 조지또한 머리를 기른다던지 하여 그동안의 이미지에서 탈피
하게 된다. 매스컴과 팬들은 그동안의 비틀즈모습에서 벗어나 개
인적인 활동을 하는 그들을 보고 해산을 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우려를 가졌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개인적인 휴식기
를 통해 새롭게 충전한뒤 67년초, 새로운 앨범을 제작하기 위해
런던의 애비로드 스튜디오에 다시모인다. 이들은 이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앨범(이하 '페퍼상사앨범'으로 칭함)에서
완전히 새로운 모습을 보이게 된다. 그동안의 앨범들에서는 찾아
보기 힘들었던 다양한 주제, 뛰어난 음향효과 (단지 4트랙 녹음
기만을 가지고 그러한 수준의 사운드를 보였다는 것은 차라리 기
적에 가깝다.), 다양한 악기의 도입을 이루어 내었다. 그러나 무엇보
다도 높게 평가되는것은 이러한 여러가지 새로운 음악적 요소들을
락음악과 '비틀즈 스타일'이라는 하나의 테두리 안에 세련되게 묶
어 내는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긴 레코딩기간
이었던 6개월이 투입되어 만들어진 이 앨범에서 그들은, 당시 젊
은 세대가 안고 있던 여러가지 관심사들, 즉 이성간의 사랑, 학교
에서의 공부, 현실로부터의 탈출,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포괄할수
있는 '이상과 현실'이라는 테마를 음악속에 멋지게 담아냈던 것
이다. 그들은 이제 대중음악도 '감상'의 대상이 될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었다. 그들의 음악은 맞추어 춤추기보다 조용히 감상
할 것을 권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앞서도 서술한 바 있지만 이 앨
범에서 그들은 음악적인 면 이외에도 '음향적'인 면으로 엄청난
진보를 이루었다. 기존의 락큰롤 악기에서는 들어볼수 없었던 음
향들이 앨범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이다. 신디사이저가 개발된 오
늘날에는 시시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으나 변변한 기타이펙터하나 개
발되어있지 않던 그 시절에 그정도의 사운드를 만들어 냈다는 것은
엄청난 성과였고, 이는 그들이 이 앨범으로 그래미상의 베스트 엔
지니어링 부문을 수상했다는 사실로도 증명이 된다. 이러한 음향
적 진보는 그들이 음악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여러가지 것들이
기존의 락큰롤 음향만으로는 나타내는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그들은 우선 몇가지 악기의 음색만
이 아닌 다양한 음색을 이용하기 위해 스튜디오에서 실험에 실험
을 거듭했으며, 필요한 경우는 회로를 만들어 가면서 원하는 음
향적 효과를 얻어냈던 것이다. 이러한 사운드 창조노력은 클래식
음악의 유산또한 놓치질 않아서 그들은 클래식의 악기는 물론 오케
스트레이션까지 본격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하였다. 표현의 한계를
뛰어넘고자 하는 노력은 음향적인 면뿐만 아니라 음악문법적인
측먼에서도 나타났다. 조지의 인도음악 도입에서 자극을 받았는지
그동안의 단순한 기승전결의 구성을 깬 곡들이 대거 등장하였다.
이는 앞선 Revolver앨범에서도 미미하게 나마 감지가 되던 것이었
다. 앨범의 마지막곡 A Day In The Life에서 그들은 이상과 현실
이라는 주제를 담아내기 위하여 존과 폴이 작곡한 완전히 이질적
인 두개의 노래를 절묘하게 결합시키는 파격적인 구성을 선보이게
된다. 존이 작곡한 부분과 폴이 작곡한 부분은 전통음악문법으로
살펴볼때 조성이나 리듬으로도 전혀 어울릴수 없는 이질적인 곡들
이다. 비틀스는 이것들을 불안정한 오케스트레이션과 테이프 역회
전 기법을 이용하여 완벽하게 결합시킴으로서 영원히 합치될수 없
는 이상과 현실이 기묘하게 공존하는, 당시 젊은 세대들의 아니
영원한 인간의 딜레마를 한 곡안에 담아냈던 것이다. 이 앨범을
논할때 빠질수 없는 것이 또 하나있는데, 그것은 하나의 주제로
관통되는 '컨셉트 앨범(Concept Album)'이라는 평가이다. 과연 이
앨범이 컨셉트 앨범인가? 라는 질문에 대답하기는 의외로 쉽지 않
다. 현재 확립되어 있는 개념으로는 컨셉트 앨범이란, 뚜렷한 하
나의 주제를 놓고 앨범의 수록곡들이 엮어져 있는 형태이기 때문
이다. 잘라 말해서 비틀즈의 페퍼상사 앨범은 이러한 구조를 갖고
있진 못하다. 특정한 주제 하나를 중심으로 수록곡들이 묶여 있지
는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이 앨범은, 하나의 주제 아래 통합되어 있
지는 않지만 그동안의 히트곡 나열식 앨범과는 달리 수록곡들 전
체가 앨범의 부분요소로서 기여하고 있는 느낌을 준다. 즉, 곡들이
서로 상관없이 동떨어져 있는 느낌을 주는 것이 아닌 것이다. 첫곡
과 끝곡인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사이에 다양한
곡들이 이어져 있고 곡간에 쉬는 부분이 없기 때문에 듣는이는 마
치 하나의 콘서트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게다가 에필로
그송인 A Day In The Life는 앞선 수록곡들이 표현한 고뇌 - 이
상과 현실이라는 - 를 압축하여 담아내고 있는 형태를 취하고 있
기에 우리는 이 앨범을 단순한 노래들의 나열로만 보지 않는 것이
다. 혹자는 더 나아가 컨셉트 앨범이라고 평하기도 하나 정확한
의미의 컨셉트 앨범은 아닌것이며, 컨셉트 앨범의 '가능성'을 충분
히 보여주었다는 데서 더 올바른 의미를 찾을 수 있을것이다. 비
틀즈는 이 앨범의 음악적인 작업을 마무리하고 난뒤, 이 앨범의 겉
모습을 손질하는 과정에서도 새로운 모습을 보였다. 가장 흔히 얘
기되는 것은 앨범의 재킷이다. 너무도 유명한 이 앨범의 재킷은
Mop-top이미지를 벗어던진 비틀즈 멤버들과, 역사상의 유명인사들
이 단체로 나와있는 사진으로 되어있다. 가상적인 비틀즈의 무덤
앞에서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가 기념사진을 찍
는 모습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과거의 비틀즈에서 탈피하여 새로
운 모습으로 거듭나겠다는 그들의 의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이렇
듯 음악의 거의 모든면은 물론 음악외적인 면에서까지 기존의 비
틀즈음악에서 크게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었던 이 앨범은, 당연히
엄청난 문제작으로 떠오르며 문화적인 대충격을 주게 된다. 이는
단순히 대중음악계에만 미쳤던 충격이 아니었으며 지식인 층은 물
론, 클래식 음악계에 까지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레너드 번
스타인은 이 앨범을 듣고 비틀즈를 바하와 브람스에 비견했으며
최근에도 이 앨범은 오케스트라에 의해 리메이크되기도 했다. 더
구나 이 앨범의 주제는 당시 미국사회를 휩쓸고 있던 히피주의와
정확하게 맞물려 더욱 큰 상승작용을 나타내었으니, 단순한 히트앨
범 이상의 영향력을 나타내었던 것이라고 평할 수 있겠다. 이러한
성공을 거둔 앨범을 두고 멤버들은 만족감을 표시했으며, 스스로에
대한 칭찬에 인색하기로 소문난 존 레논조차도 '앨범에 대단히
만족한다'라고 평할 정도였다. 이 때 밴드로서의 비틀즈는 최정점
에 올라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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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브라이언의 죽음과 분열
그러나 달도 차면 기운다고 비틀즈에게도 균열의 조짐이 나타나
기 시작했으니, 그것의 시발점은 바로 그들을 성공시킨 전설적인
매니저 브라이언 엡스타인의 죽음이었다. 단순한 팝그룹에서 벗어
나 음악적인 발전을 추구해 나가는 비틀즈로 부터 소외감을 느끼기
시작했던 브라이언 엡스타인은, 67년 8월 페퍼상사앨범이 세상을
뒤흔드는 가운데 약물과용으로 숨을 거두었다. 그동안 음악에만
몰두해왔던 비틀즈에게 매니저 브라이언 엡스타인의 죽음은 충격
이었다. 그는 비지니스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개성이 강한 네명을
하나의 밴드안에 묶어두는 뛰어난 능력까지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죽자 비틀즈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네명이 결속력뿐만이 아
니라 비즈니스적인 면까지 혼란이 생겼고 이러한 상태는 비틀즈가
해산할때 까지도 개선되지 않았다. 이렇게 구심점이 없어진 비틀즈
는 분열하기 시작했고, 폴 매카트니가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나서기 시작하였다. 이전부터 스튜디오에서 조지마틴 다음가는
음악감독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일들을 처리했던 폴은 자
신의 방식대로 밴드의 문제들을 해결하려 하기 시작했고, 자존심이
강했던 나머지 멤버들은 이러한 폴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폴은 폴대로 밴드의 흔들리는 위기를 바로잡아보려고 이러한 행동
을 한 것이었으나 이는 불가피한 마찰을 불러오게 되었다. 어쨌든
밴드의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폴은 TV영화 Magical
Mystery Tour를 기획하여 각본에서 편집까지 자신의 주도하에 제
작하게 되는데 이는 엄청난 혹평을 받게된다. 비틀즈는 데뷔 이후
실패라고는 해본적이 없었던 터라 이러한 결과는 밴드에게 상당히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고, 폴의 리더쉽에 대한 나머지 멤버들의 불
신을 더욱 뿌리깊게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밴드는 점점 분열
되어 갔고 멤버들은 개인활동에 더욱 관심을 쏟게 된다. 이 시기
존에게 큰 변화가 일어났으니 그것은 잘 알려진 대로 일본출신의
여성 전위예술가 오노요코와의 사랑이다. 66년 런던에서 처음 시
작된 둘의 관계는 이 시기에 이르러 본격적인 애정 및 협력관계
로 발전하게된다. 그녀는 존과 함께 음악작업을 하기도 하면서 존
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이는 밴드로서의 비틀즈에게는 결
코 좋지 않은 영향을 주게 된다. 또한 나머지 멤버들도 이미 스
튜디오에서의 음악작업말고는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이 없어졌기
에 점차 개인적인 작업에 몰두하게 된다. 이미 그들은 성공이 최
대의 목표이던 시기를 벗어났고, 서서히 개인의 의도를 앞세우기
시작했던 것이다. 멤버간의 갈등은 여러가지 양상으로 나타났다. 우
선 그들은 모두가 작곡의 능력이 있었던지라 앨범의 수록곡 수를
놓고 갈등이 빚어졌다. 특히 존과 폴에게 밀려 한 앨범당 한두곡
정도만을 수록할 수 있었던 조지의 불만이 가장 컸다. 또한 공동
작업보다는 개인의 곡을 나머지 멤버들이 세션해주는 정도의 작업
이 계속되면서 상대방의 연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주문을 많이하
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고 이는 서로간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게 된
다. 연주인에게 있어서 자신의 플레이에 대한 참견을 듣는다는 것
은 상상외로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며 그렇지 않아도 갈등이 상존하
던 비틀즈 멤버간의 경우에는 그 악영향이 더욱 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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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분열상을 승화시킨 화이트앨범과 Get Back세션
그러나 비틀즈는 이러한 분열상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새로운 앨
범을 제작하기 위해 스튜디오에 모이는데 이 앨범이 바로 The
Beatles(하얀 재킷 때문에 화이트 앨범으로 불림)가 되는것이다. 멤
버간의 분열상이 극에 달했던 때에 제작되었기에 멤버들은 앨범
수록곡을 선정함에 있어서 자신의 곡들을 양보하려 하지 않았다.
결국 앨범은 두장짜리 더블앨범으로 만들어지게 된다. 그때는 물
론이거니와 지금도 팝뮤지션이 두장짜리 앨범을 충실하게 만든다
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기에 웬만하면 시도하지 않는데, 비틀즈
의 분열상은 이를 불가피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극과 극
은 통한다고 했던지, 극도의 분열상을 배경으로 나온 이 앨범은
최고의 다양함을 선보이고 있다. 분열상이 다양성으로 승화되었다
고 평할 수 있을 정도로 당시 존재하던 모든 대중음악 장르를 포
괄한 다채로운 음악들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앨범
의 음악적인 성과가 분열을 덮어주지는 못했다. 존은 여전히 요코
와의 개인 작업에 몰두했고 나머지 멤버들 또한 밴드의 일 보다
는 자신의 작업에 더욱 깊이 빠져들어갔던 것이다. 비틀즈멤버들
은 물론 주변인들 조차도 비틀즈의 균열을 피부로 느낄 정도가
되어갔는데, 당시 밴드의 여러가지 일을 도맡아 처리하고 있다시
피했던 폴 매카트니는 밴드의 분열을 막기 위해 여러가지 처방을
내놓게 된다. 우선 균열의 첫번째 요인으로 폴은 66년 공연중단
이후 '함께 하는 연주가 사라졌음'을 들었다. 락밴드는 라이브연주
를 통해 결속력을 다지고 생명력과 추진력을 얻게 되는 것인데,
음악적 성취를 위해서 비틀즈의 음악작업을 스튜디오 안으로만 한
정지은 후 밴드의 결속력이 약화되었다는 것이었다. 음악적 성과
는 얻었을지언정 하나의 밴드로서의 결속력은 심하게 금이 가벼렸
다는 진단이었다.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스튜디오 레코딩에서
는 악기및 보컬을 각각 따로 녹음하여 나중에 편집을 하게 된다.
따라서 각 연주자들이 동시에 호흡을 맞추며 연주하는 데서 얻어
지는 장점들은 고스란히 놓칠 수 밖에 없다. 폴은 이러한 문제점
을 해결하고자 순회공연을 재개를 제안했다. 그러나 나머지 멤버
들은 이를 즉각 반대한다. 폴은 차선책으로 그들이 무명시절 및
데뷔 초기에 만들고 연주하던 스트레이트한 락큰롤 앨범을 제작
하자는 의견을 내놓게 된다. 나머지 멤버들은 이를 받아들였으며
이러한 접근 방법을 가진 새 앨범의 제작이 시작되게 된다. 비틀
즈는 또한 베일에 싸인 수퍼스타로서의 이미지를 벗기 위해 그동안
가려졌던 레코딩 과정을 생생하게 다큐멘터리 필름으로 제작할 것
을 기획하게 된다. 그래서 새 앨범의 레코딩 과정은 카메라와 함
께 하게 되고, 이는 나중에 Let It Be라는 필름으로 일반에 공개되
게 된다. 그러나 비공개적인 창조의 과정이어야 할 레코딩과정이
카메라에 노출됨으로서 멤버들은 부담감과 피곤함을 느끼게 되고
급기야 앨범작업은 고통스러운 것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비틀즈
보다는 요코에 몰두하는 존과, 음악적인 면이나 음악외적인 면에
서 독선을 부리는 폴, 자신의 음악적 실력을 과시하고 싶으나 존
과 폴에게 무시당하는 조지, 그룹내에서 자신의 존재감에 회의를
느낀 링고등 각 멤버들은 그동안 축적되어왔던 갈등을 고스란히
내보이게 된다. 그러나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앨범작업은 끝이 났
다. 이 앨범은 비틀즈가 분열상을 극복하고 '돌아왔다'는 의미의
'Get Back'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발매될 예정이었으나 멤버간의
갈등 및 비지니스적인 문제로 인해 발표되지 못한채 창고로 들어가
게 된다. 이때 이미 멤버들은 비틀즈의 종말을 감지하게 되는 것이
다.
12.Abbey Road와 해산
69년 7월, 그들은 아마도 비틀즈의 마지막 앨범임이 확실시 되는
앨범을 만들기 위해 런던의 EMI 애비로드 스튜디오에 다시 모인
다. 이 때 그들은 겉으로 표현은 안했지만 이번 앨범이 마지막이
라는 것을 다들 느끼고 있었다고 한다. 자신들의 젊음을 바쳤던
비틀즈의 분열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 앨범의 녹음과정에서 그동안의 분열상
을 무색하게 하듯, 최고의 팀?떻을 보이게 된다. 거의 전곡이 베스
트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뛰어난 완성도를 보이는 이 Abbey Road
앨범에서 그들은, 그 동안 잊혀졌던 멤버간의 뛰어난 화음, 각자의
개성을 살리면서도 비틀즈의 분위기가 살아있는 연주 - 그들은 상
대방의 곡에 최고의 화음과 연주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 를
보여주고 있다. 이 앨범에서 비틀즈가 얻어낸 음악적 성과는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앨범에서 얻어내었던 성과와
는 또 다른 것이었다. 각자의 개성이 충분히 발휘되었으면서도
비틀즈다움을 잃지 않았던 이 마지막 앨범은 비틀즈 음악의 또 다
른 정점이라 할만하였다. 그러나 그 정점다음에는 깊은 절벽이 기
다리고 있었으니, 비틀즈의 존속에 근본적인 회의를 느낀 폴 매카
트니가 70년 4월 매스컴에 비틀즈 탈퇴선언을 하게 되고 이때 비
틀즈는 영원히 해산하게 되는것이다.
앞서 발매가 보류되었던 Get Back앨범은 해산이후 Let It Be로
이름이 바뀌어 쓸쓸히 발매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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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해산 이후와 오늘날, 그리고 Anthology
해산이후 각 멤버들은 마치 준비라도 해두었던 것처럼 경쟁적으
로 솔로 음악을 발표하며 왕성한 활동을 벌인다. 비틀즈 해산후
그들의 재결합설은 요즘의 서태지 컴백설 만큼이나 자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으나 당사자들은 강하게 부인하며 솔로활동에 전념
하였다. 조지는 비틀즈 멤버중 처음으로 넘버원 싱글과 앨범을
만들어내며 가장 먼저 인기가도를 달렸고, 뒤이어 폴과 링고, 존의
순서대로 대중적 인기를 얻어 나갔다. 조지는 솔로앨범 All
Things Must Pass의 성공을 출발점으로 자신의 음악세계를 펼쳐
나갔다. 비틀즈 시절 존과 폴에게 눌려 실력발휘를 해보지 못했던
그는 솔로앨범을 통하여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된다. 그는 70년대를 거쳐 80년대에까지 꾸준히 솔로 앨범을 발표
하였다. 현재는 솔로 활동이 잠시 주춤해 있으나 곧 어떤 형태로
든지 음악활동을 재개할것으로 전망된다. 폴은 비틀즈 해산후 자
신의 그룹 WINGS를 이끌며 가장 성공적인 솔로활동을 하게 된다.
70년대 중반 WINGS의 인기는 60년대 비틀즈의 인기를 연상시킨
다는 평이 있을 정도로 대단했고 내놓는 앨범마다 넘버원을 차지하
였다. 그는 80년대에 넘어와서도 꾸준히 히트곡을 내어놓는등 왕
성한 활동을 벌였고, 90년대 초반에는 대규모 세계순회공연을 가
짐으로서 아직도 건재함을 입증하였으며 이제는 클래식작곡에까지
본격적으로 손을 대고 있다. 링고는 비틀즈 멤버중 가장 음악적
역량이 모자란다는 주변의 우려를 일축하면서 많은 히트곡을 만들
어 내었다. 그는 음악작업외에 영화출연도 여러번 하였으며, 최근
에도 미국의 TV프로에 출연하는등 만능 엔터테이너로서의 경력을
이어가고 있다. 존은 성공적인 음악활동 이외에 신좌파운동과 민
권운동등에 깊이 참여하는등 행동하는 뮤지션으로의 삶을 이어
나갔다. 그러나 그는 5년만의 재기앨범을 발표한 1980년 12월 8
일, 한 광적인 팬의 총을 맞고 뉴욕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살인
동기는 아직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존이 사망함으로서 세명이 되어버린 그들은 1995년 다시모여 신곡
을 녹음하게 된다. 그 곡은 다름아닌 Free As A Bird. 존이 죽기
전에 간단하게 만들어 놓은 데모테입에 생존 멤버들이 하모니와
연주를 입혀 완성한 곡이다. 이는 Anthology시리즈 작업의 일환이
었다. Anthology시리즈란 비틀즈의 미발표 곡들과 레코딩과정을 모
은 다큐멘터리성 앨범과, 멤버들의 육성 인터뷰로 구성된 다큐멘
터리 필름을 말하는 것. 총 CD 6장과 8시간의 영상으로 구성된
이 시리즈는 95년에 시작되어 96년에 끝을 보았는데, 이 시리즈로
인해 서구각국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다시 비틀즈 붐이 일고 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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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락계의 전설이라 불리는 비틀즈.
30년이 넘게 흐른 지금에도 그들의 음악이 우리에게 감동을 전해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그들의 음악이, 우리들 인생
의 여러 측면들을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솔직하게 담아냈기
때문일 것이다. 진실한 음악은 영원하다는 말이 있다. 그들의 음악
이 아름다운 진짜 이유는 복잡한 음악적 기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다양한 모습들을 꾸밈없이 노래속에 담아낸, 그 진솔함에 있
을 것이다. 우리가 삶의 진실을 사랑하는 한, 비틀즈는 우리들과
함께 영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