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구름모자를 쓴 마칼루. 아나톨리는 세계 제5위 고봉인 마칼루를 1994년 무산소로 등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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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톨리 부크레예프(Anatoli Boukreev, 1958년생)는 카자흐스탄 출신 등반가다. 그는 에베레스트(8,848m) 남동릉 3회 등정(무산소 2회, 유산소 1회)과 노스콜~북릉~북동릉 무산소 등정, 다울라기리(8,167m)와 로체(8,516m) 각각 2회 등정 등 히말라야의 8,000m급 고봉 11개 정상을 도합 21회나 밟은 위대한 산악인이다.
아나톨리는 캉첸중가(8,586m) 등정만 제외하고 10개의 봉우리를 모두 무산소로 등정했고, 낭가파르바트(8,125m), 가셔브룸1봉(8,068m 히든피크), 안나푸르나1봉(8,091m) 3개 봉우리만 미등 상태였다. 그는 8,000m 봉우리에서 속도등반을 감행해 다울라기리, 로체, 초오유(8,201m), 가셔브룸2봉(8,035m)을 등정하기도 했다.
라인홀트 메스너는 그를 “이 세계에서 진정한 철인(鐵人) 중 한 사람”이라 극찬했고, 미국의 유명한 무산소 고산 등반가 에드 비에스터스는 그를 “완벽하게 숙련된 산악인”이라고 칭송했다. 아나톨리는 고산 앞에서 자신의 허영심, 탐욕, 공포심에서 해방되려고 노력했다. 그는 고산 등반을 통해 자신의 신체를 단련시키고 자신의 영혼을 완벽한 상태로 승화시키려고 분발했다. 그는 고산 등반 때마다 새로운 인간으로 재탄생되어 문명세계로 귀환했다.
캉첸중가 4개봉 트래버스로 ‘황금 핀’ 수상
아나톨리는 1989년 31세에 26명으로 구성된 러시아의 대규모 캉첸중가 등반대에 선발되었다. 이 등반대에 베르쇼프, 투르케비치, 발리베르딘 등 에베레스트의 남서벽 중앙 버트레스 등정자들을 포함한 구소련의 베테랑 산악인들이 총망라되었다. 그중 베르쇼프와 투르케비치는 나중에(1990년 가을) 로체 남벽의 공동 등반대장이 되어 중앙 버트레스에 신 루트를 개척한 위대한 산악인이었다.
아나톨리는 아르센티에프, 발리베르딘 대원과 함께 캉첸중가 남벽의 중앙 쿨와르에 신 루트를 개척하고 중앙봉(8,482m)을 등정했다. 이어서 그는 동료들 8명과 함께 캉첸중가 서봉인 알룽캉(Yalung Kang·8,433m)을 등정한 후, 그 봉우리에서 이어지는 기나긴 설릉에 연속적으로 설동을 설치하며 트래버스해 주봉(8,586m), 중앙봉, 남봉(8,476m)을 차례로 트래버스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즉 그는 캉첸중가의 높이 8,400m 이상의 봉우리 4개를 모두 등정했다. 그는 캉첸중가를 무산소로 등정할 계획이었으나 등반대장, 초르니의 만류로 안타깝게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당시의 소련 수상 고르바초프는 아나톨리에게 캉첸중가 남벽 신 루트 개척과 4개봉 트래버스의 공로를 치하해 명예로운 ‘국제 스포츠 거장’을 상징하는 황금 핀(pin)을 수여했다.
아나톨리는 1990년 북미 최고봉 매킨리(6,194m) 단독 등정 길에 나섰다. 이 산은 북극권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돌변하는 기상 상태가 히말라야의 악천후 못지않게 혹독했다. 그리고 매킨리는 복병(伏兵), 즉 숨은 크레바스로 악명이 높다. 그는 20kg이 넘는 무게의 짐을 짊어지고 최종 캠프를 출발해 숨은 크레바스가 산재하고 무릎까지 빠지는 심설 속으로 5시간 동안 등로를 개척했다.
그가 심설 속을 등반하던 중에 그의 발밑의 눈이 갑자기 자취 없이 사라졌다. 그는 숨은 크레바스의 크랙에 발이 끼인 채 발 아래 공포의 심연을 내려다보고 전율했다. 그는 그 위급상황에서 체중을 줄이기 위해 배낭을 벗어 자일을 연결한 후, 눈 위에 남겨놓고 맨몸으로 눈밭을 살금살금 기어서 안전지대로 대피한 후, 자일로 배낭을 끌어 올렸다.
그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헤라클레스 같은 힘을 소유했지만, 매킨리의 가파른 심설벽을 헤치며 등반한 후 탈진 상태가 되었다. 그런 상태에서도 그는 쿨와르의 설벽을 오르고, 가파른 빙벽을 돌파한 후 설릉으로 등반을 계속했다. 다행히 웨스트 립(rib)이 웨스트 버트레스와 연결 된 후에는 등로가 완만해졌다. 그는 고소 적응이 잘 된 산악인이 3, 4일 걸려 등반하는 코스를 10시간 반 만에 단독 등정한 후, 웨스트 버트레스(West Buttress)로 하산했다. 그는 이 등반 중에 식사를 제대로 했는데도 지나친 체력 소모로 인해 체중이 8kg이나 감소되었다.
- ▲ 매킨리 캐신리지 상의 레지 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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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에베레스트의 속도 등반(당시 프랑스의 마르크 바타르가 세운 에베레스트 남동릉 22시간 30분 등정) 기록을 깨기 위한 등반을 준비하려고, 1990년 여름 텐샨의 칸텡그리(Khan-Tengri·7,010m)와 포베다(Pobeda·7,439m) 속도 등반길에 나섰다. 그는 칸텡그리의 5,800m 지점에서 4시간 만에 단독으로 정상을 밟았고, 이어서 포베다의 전위봉(前衛峰), 즉 바샤프샤벨(Vasha Pshavel) 정상에 올랐다. 그 지점에서 포베다 정상 피라미드까지 높이가 7,000m이고 길이가 3km인 기복이 심한 설릉이 뻗어 있었다.
그가 높이 7,439m의 정상에 도달했을 때 일몰이 시작되었다. 그는 땅거미 속에서 능선을 트래버스해 하산했다. 그는 바샤 프샤벨의 정상 아래에서 설동을 파고 비박한 후 귀환했다.
그는 1991년 봄에 카자흐스탄 다울라기리 원정대에 참가했다. 다울라기리 서벽은 히말라야의 난코스 중 하나로 정평이 났다. 그들은 이 벽에 신 루트를 개척하며 10명의 대원들이 무산소로 등정에 성공했다. 그들은 폭풍에 시달리며 암흑 속에서 비극을 면하고 무사히 제4캠프로 하산했다.
그는 1991년 10월에 러시아 산악인 발리베르딘이 이끄는 러시아-미국 합동 등반대에 참가했다. 이 등반대의 등반 목표는 에베레스트의 남동릉을 최단 시간 내에 등정하는 것이었다. 그해 가을 2명의 스페인 산악인들이 베이스캠프에 도착한 지 17일 만에 에베레스트 남동릉의 등정에 성공했다.
아나톨리는 자신의 자일 파트너인 미국 산악인 케빈 쿠니와 고소 적응 훈련 차 10월 7일 오전 8시 반 아이스 액스 대신 레키 스키 폴을 휴대하고 최종 캠프를 출발했다. 그들은 오후 2시경에 남봉(8,760m)에 도착했는데, 그곳에서 그의 파트너가 등반을 포기하자, 아니톨리는 단독으로 100m 위쪽의 정상을 향해 등반을 계속했다. 칼날 능선으로 세차게 휘몰아치는 강풍도 정상을 향한 그의 발걸음을 제지하지는 못했다. 그는 힐러리 스텝에서 선등대들이 설치해둔 낡은 로프 조각들을 부여잡으며 기어올랐다. 상부의 가파른 빙벽에는 일주일 전 스페인 대가 깎아놓았던 스텝(steps, 계단)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는 단독으로 오후 3시에 무산소로 에베레스트 정상을 밟았다.
오후 6시경에 그가 최종 텐트로 귀환했을 때, 파트너 케빈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케빈은 남봉에서 등산화가 꼭 끼는 바람에 발가락이 마비되어 혈액순환이 잘 되지 않았고, 그는 동상을 염려하여 등정을 포기했다고 말했다.
베이스캠프에 있던 등반 대장과 동료들은 아나톨리가 강풍이 세차게 부는 날 에베레스트를 무산소로 등반했다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아나톨리는 에베레스트의 정상에 박힌 막대에 매달렸던 은십자가(sliver gross)를 기념품으로 가지고 내려왔는데, 그것을 보여주자 그들은 아나톨리의 등정을 믿었다. 그 은십자가는 일주일 전 스페인 대가 정상에 남겨놓은 것이었다.
그의 파트너 케빈이 급한 용무로 미국으로 귀국해 버리자, 아나톨리는 단독으로 에베레스트 속도 등반을 시도했다. 그가 10시간도 안 걸려 베이스캠프에서 사우스콜에 도착했을 때, 제트 기류가 사우스콜에 설치된 거의 모든 텐트를 파손시켰고 강풍에 휘날리는 눈보라와 얼음조각들이 그의 얼굴을 세차게 강타했다. 아나톨리는 파손된 텐트 속에서 강풍 때문에 난로를 피울 수 없어서 눈을 녹여 음료수를 장만할 수 없었다.
그는 다음날 200m를 더 오르고 에베레스트 속도 등반을 포기했다. 그는 며칠 후 서릉으로 8,000m 지점까지 진출하고 강풍 때문에 다시 퇴각했다.
- ▲ 다울라 기리 서벽 등반(1991년).
- 독일대 대원으로 K2 아브루치 루트 등반
1993년 아나톨리는 5명으로 구성된 독일의 소규모 K2 등반대에 참가했다. 등반 대장은 라인마르 요스비크(50세)로, 가셔브룸1봉, 브로드피크, 낭가파르바트 등정자였다. 54세의 에른스트 에베르하트, 30세의 앤드류(앤디) 로크, 그리고 요스비크 대장의 죽마고우로서 낭가파르바트 등정시 파트너였던 피터 메츠거가 참가했다.
그들이 발토로빙하를 따라 캐러밴할 때는 좌우로 늘어선 암탑들과 신비한 바위벽으로 구성된 장관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진풍경을 이루었고, 콩코르디아에서 야영할 때는 K2의 거대한 피라미드가 모든 풍광을 압도하며 하늘높이 솟아올라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그해 파키스탄 관광성은 K2의 입산료를 3배씩이나 올렸는데도, K2 베이스캠프에는 세계 도처에서 모여든 100명가량의 산악인들이 텐트 촌락을 이루고 있었다. 그 해에도 K2의 비극은 되풀이 되었다. 미국의 스테이시 앨리슨 여성 대장이 이끈 캐나다-미국 합동대의 대원 3명은 아브루치능선으로 등정에 성공했으나 하산길에 캐나다 대원 댄 컬버가 눈이 가득 들어찬 보틀넥(bottleneck)의 쿨와르 위쪽 설벽에서 추락사했다. 슬로베니아 대도 등정했으나, 대원 두 명은 심한 동상으로 헬기로 후송되었고, 한 명은 뇌수종으로 절명했다.
아나톨리의 친구들인 영국대의 빅터 손더스, 로저 페인, 그리고 유명한 여성 클라이머 줄리 클뤼마는 아브루치능선에 제1캠프를 구축했다. 아나톨리의 미국 친구 댄 마저는 대규모 국제 등반대를 이끌고 있었는데, 그들의 목표는 K2 서릉이었다. 그밖에 여러 소규모 등반대들이 K2의 난코스를 등반할 예정이었다. 이곳 K2에 모여든 남녀 산악인들의 인간 평가는 그들이 얼마나 많은 재산과 지식을 소유하고 있느냐에 따라 좌우되지 않았다. 또한 그들의 출신국이 선진국이냐 후진국이냐에 따라 평가되지도 않았다. 그들은 다만 K2의 악명 높은 악천후에 얼마나 잘 적응할 수 있느냐, 또한 난코스를 얼마나 잘 돌파할 수 있느냐에 따라 평가되었다.
아나톨리와 피터 그리고 라인마르 대장은 교대로 선등하며, 슬로베니아 대와 캐나다-미국 대가 가파른 구간에 설치한 고정 자일이 심설 속에 깊이 파묻혀 있는 것을 잡아당겨 꺼내며 등반했다. 그들은 허리까지 빠지는 심설 속으로 계속 전진해 제1캠프를 구축했고, 아나톨리는 혼자서 하우스 침니를 지나 제2캠프 예정지인 6,800m 지점까지 2개의 텐트가 포함된 8kg의 짐을 운반하고 돌아왔다.
다음날 그들은 제2캠프까지 짐을 운반해 놓고 돌풍을 동반한 악천후 때문에 베이스캠프로 하산했다. 폭풍이 그치자 아나톨리, 라인마르, 에른스트, 피터는 등반을 재개해 제2캠프에 도착했다. 피터와 에른스트는 3인용 돔텐트를 설치했고, 아나톨리와 라인마르는 2인용 노스페이스 텐트 속에서 취침했다.
다음날 제3캠프를 설치하기 위해 아나톨리와 라인마르는 사람을 날려 보낼 태세의 강풍에 휘날리는 눈보라 속에서, 암벽지대, 빙사면 위를 덮은 무릎까지 빠지는 눈밭을 돌파했다. 가파른 사면에서는 가루눈이 강물처럼 흘러내렸다. 그들은 고초를 겪으며 얼음 능선과 설사면을 돌파했는데도 여전히 고통의 연속이었다. 가루눈이 가슴까지 차올라 그들이 지나고 나면 깊은 눈 도랑이 생겼다. 후등자 피터는 깊은 눈 도랑에서 등반을 포기하고 발길을 돌렸다.
- ▲ 1993년 K2 정상에 선 아나톨리(좌)와 피터(우). 피터는 하산 시에 실종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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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톨리는 깊은 얼음 크레바스, 베르크슈룬트를 가득 채운 가루 눈 속을 헤엄치듯이 건너 블랙 피라미드 지대를 돌파하고 평지에 도달했다. 전년도 러시아 산악인 발리베르딘 대장이 이끌었던 국제 등반대의 제3캠프 자리였다. 그곳에서 그 등반대에 참가했던 미국 산악인 에드 비에스터스의 이름이 뒷면에 적힌, 오렌지색 삽 한 자루와 러시아제 프리무스 스토브 한 대 그리고 버려진 산소통들이 발견되었다.
두 사람은 그곳에 짐을 보관하고 제2캠프로 하산했는데, 라인마르는 캠프 50m 위쪽에서 추락하며 머리와 가슴이 바위에 부딪쳐 두피가 찢어지는 큰 부상을 당했다. 그의 머리 상처에서 출혈이 심해 다음날 그들은 베이스캠프로 철수했다. 영국대의 여의사가 라인마르의 두피 부상을 여섯 바늘 꿰매어 치료해 주었다.
7월 24일, 피터, 에른스트, 라인마르가 제1캠프로 올라갔다. 앤디는 오후에 베이스캠프를 출발했고 다음날 아나톨리가 합류했다. 26일 아나톨리는 7,400m 지점에 올라 텐트를 설치하고, 라인마르가 2시간 후 제3캠프에 도착했다. 강풍에 텐트 한 동이 날려가 분실되었기 때문에 아나톨리는 다음날 심설 속에 3인이 기거할 넓은 설동을 팠다. 그날 저녁 늦게 피터와 앤디가 도착했다.
세계 제2위 고봉 무산소 등정과 비극
7월 29일 출발한 그들은 심설지대를 어렵게 돌파하고 7,900m 지점(숄더)에 도달했다. 제4캠프의 심설 지대에는 슬로베니아 대의 텐트 한 동이 외롭게 있었다. 그들은 한 동의 텐트를 추가 설치하고 두 명씩 2개의 텐트에 들어갔다. 스웨덴 대도 최종 캠프에 도착했다.
7월 30일 아나톨리와 라인마르가 깨어나 보니, 텐트 속에 혹한으로 5cm 두께의 서리가 끼어 있었다. 피터와 앤디는 오전 3시경 먼저 정상으로 출발했다. 라인마르와 아나톨리는 한 시간 더 늦게 출발했다. 아나톨리는 10시 반에 보틀넥에서 피터와 앤디를 따라잡았다. 심설 속의 루트의 경사도가 점점 더 가팔라졌다. 그들은 하산 시에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보틀넥에 고정 자일을 설치하기로 했다.
그들이 등반을 시작한 지 8시간이 지났는데도, 최종 캠프에서 정상까지 거리를 3분의 1밖에 돌파하지 못했다. 선등을 교대한 아나톨리는 피터의 확보를 받으며 트래버스 구간에 고정자일을 설치했다. 아나톨리는 제3캠프에서 설동을 파느라고 바닥났던 체력이 아직 회복되지 않아 등반하는 게 무척 힘들었다. 그때까지 그렇게 힘에 겨운 등반은 경험한 적이 없었다. 탈진 상태에서 모든 동작과 생각이 아주 느리게 진행되었다.
아나톨리는 그들이 금지된 구역의 경계를 넘었다고 생각했고, K2 정상에 위험과 불행이 기다리고 있다는 불안감에 압도됐다. 그는 피터에게 최종 캠프로 하산해 원기를 회복한 후, 다음날 다시 등정을 시도하자고 제안했다. 피터는 대답했다.
“내일은 악천후가 시작될지도 몰라. 그리고 고소에서는 원기 회복이 불가능해.”
검은 구레나룻을 기른 피터가 선등을 시작했다. 아나톨리는 그 순간 자문했다.
‘K2의 정상에 오르는 일이 왜 그다지 중요한가? 우리가 이렇게 힘든 등반을 계속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 순간 그는 정신적으로 자기 보호 본능이 작동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아나톨리는 로봇처럼 기계적인 동작으로 피터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마라톤에 참가한 젊은 선수가 나이 많은 선수들에게 추월당했을 때의 기분을 느꼈고, 50세 피터의 추진력에 영향을 받아 분발했다. 그는 고장 난 ‘정신적 엔진’이 제대로 작동하면서 등반할 기운을 회복했고, 얼마 후 피터를 따라 잡고 앞장섰다.
100m가량의 빙벽과 설벽을 지나자 경사도가 완만한 설사면이 나타났다. 아나톨리의 발밑에서 눈덩어리들이 떨어져 나와 K2의 남벽으로 사라지며 경계심을 강화시켰다.
그는 늦은 오후에 그늘진 남동벽을 내려다보고,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아나톨리는 최후로 남아 있던 힘을 쏟아붓고, 야성적인 자각심을 발휘해 끝내 K2 등정에 성공했다.
- ▲ 마나슬루의 눈사태 광경 (1995년 동계등정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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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문제는 K2 정상이 결승선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K2의 비극은 대부분 하산 시에 탈진상태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정상을 밟는 것보다 안전한 하산이 더욱 중요하다고 느껴졌다. 피터가 오후 6시 조금 못미처 정상에 도착했고, 바로 뒤에 앤디가 따라왔다. 아나톨리는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 몽롱한 상태였다. 세계 제2의 고봉 K2 정상에서 기쁨이나 만족감을 느낄 정신적 여유가 없었다. 그는 더 높은 곳을 향해 고통의 발걸음을 계속해야 하는 고역에서 해방되었다는 사실만이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얼마 후 피터와 아나톨리는 정상에서 하산을 시작했고, 앤디는 정상에서 친구인 스웨덴 산악인 라파엘을 기다렸다. 그들이 200m가량 하산했을 때 정상을 향해 오르는 라인마르 대장을 만났다. 아나톨리는 시간이 이미 늦었기 때문에 그에게 K2 등정을 포기하고 하산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라인마르 대장은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피터는 다운재킷과 헤드램프를 벗어서 라인마르에게 주었다.
그들은 200m 더 아래쪽에서 등반 중인 스웨덴 산악인 다니엘을 만났다. 어둠이 짙어지면서 헤드랜턴도 없이 심설 속에서 하산 루트를 찾아내기 힘들었다. 아나톨리는 기진맥진해 아무런 생각 없이 움직이며 고정자일로 잡고 하산을 계속했다.
고정자일이 10m쯤 남은 지점에서 그의 크램폰 한 짝이 벗겨졌다. 그는 균형을 잃고 고정자일 끝 지점까지 추락해 심설 속에 자빠졌다. 그는 장갑을 벗고 크램폰을 다시 착용했다. 그의 손가락이 혹한에 얼어 마비되었다. 혹한 때문에 그의 심장이 그의 손발까지 혈액을 제대로 순환시키지 못했다. 그는 암흑 속에서 보틀넥으로 하산하면서 거의 10분 간격으로 벗겨지는 크램폰을 다시 고쳐 매야 했다. 혹한이 그의 뼈 속까지 스며들었다. 그는 추락하다가 엎어지며 아이스 액스로 제동을 걸어 힘겹게 추락을 저지시켰다. 그는 기운이 떨어져 수차례 심설 속에 반복해서 넘어졌다.
그는 오후 8시 반에 죽음의 문턱에서 최종 캠프로 귀환했다. 그는 스토브에 눈을 녹여 물을 끓였다. 그는 졸다가 스토브의 뜨거운 물을 엎질러 손을 데었다. 40분 뒤에 앤디 대원이 돌아왔다. 그는 하산 중에 피터를 만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한잠도 이루지 못하고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동료들을 애타게 기다렸다.
다음날 새벽 4시 스웨덴 대의 라파엘이 최종 캠프로 돌아왔다. 그는 동료 다니엘이 뇌수종이 걸려 추락사했다고 말하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는 하산 중에 독일대의 피터나 라인마르를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아나톨리는 절망상태에 빠져 움직일 수 없었다. 앤디와 라파엘은 제3캠프로 먼저 하산했다. 아나톨리는 오후 2시까지 피터와 라인마르를 기다렸지만 그들은 끝내 무소식이었다. 그는 두 동료를 졸지에 K2에 영원히 묻어버린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는 비통한 심정으로 혼자서 하산했다.
15m 높이 차이 때문에 마칼루 두 차례 등정
1994년 봄 미국의 모험가인 토 기서(Thor Kieser)는 마칼루 상업 등반대를 조직하고, 아나톨리를 등반대장으로 초빙했다. 그들은 5,300m 지점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하고 1955년 프랑스 초등대 루트의 6,500m 지점에 제1캠프를 구축했다. 아나톨리는 버나도 대원의 확보를 받으며 마칼루라(Makalu La·7,400m) 밑에 위치한 경사 60도 길이 600m의 얼음 쿨와르 상에 스무 군데 이상 고정 자일을 설치했다.
마칼루라에 제2캠프를 구축한 그들은 정상 1,000m 아래 지점에서 눈과 바람에 마멸되어 가는 시신 한 구를 발견했다. 그의 혼령이 마칼루 정상 주위에 떠돌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영원하고 아름다운 세상은 신들과 사자(死者)들의 세계처럼 느껴졌다. 그들은 그 금지된 구역, 즉 죽음의 지대에 들어섰다.
- ▲ 에베레스트 남동릉(1996년).
- ▲ K2의 제3캠프와 제4캠프 사이에 형성된 빙탑(19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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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00m 지점에 최종 캠프를 구축한 두 사람은 4월 29일 위험한 빙폭을 돌파하고 마칼루의 정상 피라미드 아래 도달했다. 두 사람이 8,400m 지점을 통과하니 우윳빛 안개가 기복(起伏)이 심한 정상 부근의 루트를 뒤덮고 있었다. 그들은 마지막 빙벽과 바위 부스러기가 쌓인 사면에 고정 자일을 설치하며 등반했다. 울퉁불퉁하고 가파른 두 암벽 사이로 난 통로가 마칼루의 정상으로 추정되는 암탑으로 이어져 있었다. 두 사람은 안개 속에서 첫 번째 암탑이 마칼루의 정상인줄 알고 그것을 밟고 베이스캠프로 하산했다. 아나톨리는 마칼루 노멀루트가 에베레스트의 남동릉보다 난이도가 훨씬 높다고 평가했다.
5월 9일 영국인 알랜 맥퍼슨 대원이 8,200m 지점까지 진출하고 퇴각했다. 토 기서와 아나톨리의 친구 닐 바이들만은 마지막 고정 자일을 돌파하고, 정상에서 120m 아래 지점에서 퇴각했다. 그들은 정상의 안개가 걷힌 상태에서 정상에 두 개의 암탑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아나톨리와 버나드가 올랐던 첫 번째 암탑에서 50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두 번째 암탑은 첫 번째 암탑보다 높이가 15m 더 높고, 그 암탑이 마칼루의 정상이라는 사실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닐 바이들만은 하산하면서 아나톨리가 마칼루 등정에 성공한 줄로 착각하고 제2캠프와 제1캠프에 있는 등반 장비를 모두 회수했다. 그러나 자신이 오른 봉우리가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아나톨리와 그의 친구 닐은 동료들이 문명세계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동안에 피로를 회복하고, 5월 13일 오후 6시 반 베이스캠프에서 마칼루 정상을 향해 출발, 다음날 오전 5시 반 마칼루라에 올라섰고, 이후 한 시간 반 만에 제3캠프까지 돌파했다. 그들은 그런 속도라면 6시간 만 더 오르면 정상을 밟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제3캠프의 텐트가 강풍에 찢겨 쓰러진 상태로 발견되었다. 아나톨리는 하산 시에 대비해 새로운 장소를 깎아내고 부서진 텐트를 옮겨 설치하고 수리해 두었다. 그 작업에 두 시간 이상이 소요되었다. 그리고 이튿날 5월 15일 아나톨리는 동료 닐과 18시간 만에 마칼루를 알파인스타일 방식으로 등정했다.
1995년 봄 아나톨리는 미국의 에베레스트 상업등반대 대장 및 가이드도 고용되어 노스콜~북릉~북동릉(영국 루트)으로 에베레스트를 무산소로 두 번째 등정했다.
그는 또한 이미 등정한 다울라기리를 속도 등반할 작정으로, 1995년 10월 7일 오후 6시 반 홀로 베이스캠프를 출발, 9시경 북동릉 5,700m 지점에 위치한 제1캠프에서 20분간 휴식을 취하고, 돌풍이 몰아치는 제2캠프를 지나 다음날 오전 5시45분 제3캠프에 도착했다.
불가리아 산악인 한 명과 네 명의 스페인 산악인들이 캠프에서 혹한에 떨며 강풍이 멎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두 시간 동안 휴식을 취하고 오전 8시 등반을 재개했다. 그가 정상 밑 능선에 도달했을 때 강풍이 더욱 세차게 몰아치고 있었다. 눈 덮인 북동릉의 얼음 사면을 등반할 때, 그의 발밑에서 커다란 눈 슬랩들이 떨어져 나와 절벽으로 미끄러져 내렸다.
그는 거대한 허공 속으로 오르고 있었다. 주위 산들의 파노라마가 아름답게 전개되었다. 그는 17시간 만에 단독으로 등정, 두 번째로 다울라기리 정상을 밟았다. 그는 8,000m급 봉우리를 한잠 자지 않고 빠른 속도로 등정해 탈진상태에 빠졌다. 그 상태에서 가파른 설벽으로 하산하는 일은 등정보다 더 어렵고 위험하게 느껴졌다.
그는 그해 12월 카자흐스탄 마나슬루 등반대에 참가했다. 그들은 12월 1일 북릉의 6,800m 지점에 제3캠프를 구축하고, 5일 정상 아래 7,400m 지점에 위치한 얼음 플라토에 4인용 텐트 2동을 설치한 다음 10명의 대원들이 5명씩 2개조로 나뉘어 취침했다. 밤새 텐트 밖에서는 허리케인(Hurricane, 초속 32.7m 이상의 싹쓸바람)급 강풍이 몰아쳤다.
다음날 새벽 그들은 단단하게 얼어붙은 얼음과 설벽 위로 등반을 계속했다. 모이세프와 24세의 바이바카노프가 앞장서고 아나톨리가 무거운 카메라와 씨름하며 그들 뒤를 따랐다. 그들이 혹한 속에서 눈 처마가 늘어선 정상능선으로 이어지는 가파른 얼음 람페(rampe, 비탈길)를 오르기 시작했을 때, 소볼레프, 가타울린, 말리코브, 수비, 무라보요프가 그들을 따라 잡았다. 미카엘로프와 그레코프 2명의 대원들은 동상의 위험 때문에 최종캠프에서 등정을 포기했다. 8명의 대원들은 사력(死力)을 다해 북릉으로 마나슬루의 동계 등정에 성공했다.
- ▲ 에베레스트 남동릉 상의 8,500m지점 (비박지 19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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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레스트 3번째 무산소 등정했으나 ‘냉혈한’으로 매도당해
1996년 아나톨리는 미국 산악인 스콧 피셔(Scott Fisher) 대장이 이끄는 상업등반대 가이드로 고용되었다. 고객 중에는 67세의 피트 쇼닝도 있었다. 그는 K2 등반에서 얼음 사면에 박은 피켈로 혼자 확보하며 5명의 목숨을 구한 산악 영웅이었다. 유명한 셰르파 롭상 장부를 비롯한 몇 명의 셰르파들도 고용되었다.
스콧 대장은 5월 10일 아나톨리에게 힐러리 스텝에 고정 자일을 설치하라는 임무를 부여했다. 그는 친구 닐(Neal)의 확보를 받으며 칼날 능선을 돌파하고 힐러리 스텝에 고정 자일을 설치하며 선등해 오후 1시 7분에 세 번째로 에베레스트 정상을 무산소로 밟아, 히말라야 등반의 ‘타이거 우즈(세계적인 미국 골프선수)’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그날 남동릉에서 롭 홀이 이끄는 상업등반대, 대만 등반대, 스콧 피셔 대의 대원들 25명이 몰려들어 한꺼번에 등반하는 바람에 힐러리 스텝에서 병목(bottleneck, 停滯)현상이 발생하면서, 등반 시간이 더 많이 소요되었다. 아나톨리는 하산 도중 스콧 피셔 대장을 만나, 자신은 사우스 콜에서 고객들의 안전한 하산을 돕겠다는 의향을 피력했고, 스콧 대장도 이를 허가했다.
그날 저녁 제트기류(jet stream)를 동반한 폭풍설이 에베레스트의 남동릉을 강타했다. 불행하게도 힐러리 스텝의 병목 현상과 체력저하로 인해 늦게 하산하던 여러 등반대의 고객들이 제트기류가 일으킨 화이트아웃 속에 갇혀 속수무책으로 헤매다가, 강풍을 피해 눈 속에 웅크리거나 누워 있었다.
아나톨리는 사우스콜의 텐트마다 돌아다니며 구조 활동에 나서자고 애원했지만, 에베레스트를 등정하고 탈진상태에 빠진 어떤 가이드, 어떤 셰르파도 그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아나톨리는 밤중에 시속 96km의 제트기류에 눈보라가 몰아치는 아비규환의 생지옥 속에서 사경(死境)을 무릅쓰고 단독으로 남동릉의 하단까지 진출해 방향감감을 잃은 3명의 고객들을 안전한 장소까지 인도했다.
그러나 롭 홀 대장은 에베레스트의 남봉 너머에서 더그 한센과 함께 구조를 기다리다가 동사했고, 스콧 피셔 대장은 남동릉 8,300m 부근까지 하산하고 사망했으며, 이 폭풍설 속에서 모두 8명이 조난당하는 대 참극(慘劇)이 발생했다.
스콧 대장은 아마다블람 등정에 이어 1991년 로체를 등정하고, 1992년 미국의 유명 산악인 에드 비에스터스와 함께 K2를 무산소로 등정하는가 하면 1994년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 1995년 브로드피크 등정 등의 기록을 세운 베테랑 산악인이었다. 그는 1996년 에베레스트 등정 때 산소를 사용했다. 그의 사인은 뇌수종으로 추정된다.
존 크라카우어는 롭 홀이 이끌던 상업 등반대에 참가해 에베레스트를 등정하고 일찍 하산해 제트기류의 비극을 피했다. 그는 1996년 에베레스트의 비극을 다룬 책 <Into the Thin Air(희박한 공기 속으로)>를 저술했다. 크라카우어는 이 책 속에서 ‘스콧 피셔 등반대의 가이드인 아나톨리가 등반 복장도 제대로 갖추지 않았고, 고객의 안전을 우선시하는 대신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이라는, 자신의 명예를 수립하는 일에 급급했고, 고객들보다 먼저 사우스콜로 하산해 가이드의 임무를 소홀히 했다’고 주장하면서 아나톨리를 부당하게 매도했다.
그러나 아나톨리의 그날 임무는 힐러리 스텝의 고정 자일 설치였고, 그는 이 임무를 훌륭히 완수했으며 스콧 피셔 대장도 그의 하산을 허가했다. 히말라야 8,000m 지대의 상업등반대에서 가이드 역할은 난코스에 고정 자일을 설치하며 등로를 개척하는 일, 짐을 운반하는 일 등에 국한된다. 가이드가 알프스 등반에서처럼 고객을 부축해 안전하게 하산시키는 일은 두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는 일이어서 불가능하다.
아나톨리는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처지에서 자신에 대한 악평의 막대한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그는 천성적으로 남 앞에서 분노를 터뜨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인간성 좋기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그는 혼자 분노를 삭이면서 웨스턴 드왈트와 공저로 1996년 에베레스트의 비극을 다룬 <The Climb(더 클라임)>이라는 책을 저술해 크라카우어의 터무니없는 비난을 조목조목 해명했다. 미국 산악회는 나중에 아나톨리가 사우스콜에서 3일 동안 가이드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며 길을 잃고 헤매던 3명의 고객들의 생명을 구조한 공로를 인정해 그에게 용감한 산악인에게 수여하는 ‘데이비드 소울스(David Sowles)’ 상을 수여했다.
- ▲ 1997년 가셔브룸2봉을 등정한 후의 아나톨리.
- ▲ 아나톨리(좌)의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 (19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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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푸르나 서벽에서 눈사태에 맞아 유명 달리해
아나톨리는 에베레스트의 비극을 겪고 난 후, 베이스캠프에서 이틀간 휴식을 취하고, 5월 17일 로체 단독 등반에 나서 21시간 16분 만에 알파인 스타일로 등정했다.
그해 가을 그는 초오유 베이스캠프를 찾아갔다. 그곳에서 러시아 대가 등반 중이었다. 그는 노멀루트 제3캠프로 혼자 오르고 러시아 대의 첸야 대원과 마지막 구간을 함께 등반해 정상에 올라섰다. 당시 일본대의 유능한 산악인이 무산소로 등반하다가 의식을 잃고 사망하는 비극을 목격하기도 했다. 그는 10월에 돌풍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시사팡마의 북봉(8,008m)을 단독으로 등정하기도 했다.
1997년 그는 인도네시아 에베레스트 등반대 대장으로 초빙을 받았다. 그는 4월 26일 사우스 콜에서 산소를 이용하며 9시간 동안 무릎 위쪽까지 차오르는 심설을 헤치며 루트를 개척하고 남봉에 도달했다. 그는 셰르파들에게 짐 운반을 일임하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생각해 셰르파들과 똑같은 무게의 짐을 짊어지고 등반했다. 그는 선등을 하며 힐러리 스텝에 고정 자일을 설치하고 셰르파 아파(Apa)와 등정했다. 그는 에베레스트를 네 번째 등정했고, 셰르파 아파는 8번째 등정이었다. 그는 동료와 로체-에베레스트의 트래버스를 시도하려고 로체를 다시 등정했지만, 기상 악화로 에베레스트까지 트래버스를 중단했다.
그해 여름 그는 미국인 친구 개리 넵튠 대장이 이끄는 카라코룸 등반대에 참가, 7월 7일 브로드피크를 36시간 만에 등정했고, 7월 14일 가셔브룸2봉을 빠른 속도로 등반해 8시간 47분 만에 등정했다. 그는 등반에서 “사람이 산정에 잠시 머물다 내려온 행위를 정복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가당치 않다”고 주장한 사람이었다.
아나톨리는 1997년 12월 동료 2명, 이탈리아 산악인 디마 소볼레브, 시모네 모로(30세)와 함께 안나푸르나 남벽에 새로운 등로를 개척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 해 안나푸르나 남벽에 적설량이 기록적이어서 눈사태의 위험이 너무 컸다. 그래서 그들은 서벽으로 등로를 변경했다.
12월 25일 그들은 안나푸르나 서벽의 쿨와르를 등반 중이었다. 위쪽에서 눈 처마가 무너지며 승용차 규모의 커다란 얼음 덩어리가 선등자 시모네를 가까스로 비켜 떨어졌다. 그 얼음덩어리는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며 눈사태를 일으켰다. 후등자 디마 대원과 50m의 자일을 운반하던 아나톨리는 쿨와르 속에서 갑자기 덫에 걸린 쥐 신세가 되었다. 두 사람은 피할 사이도 없이 눈사태에 파묻혀 사라졌다.
이렇게 허무하게 위대한 산악인 아나톨리는 안나푸르나 서벽에서 순간적으로 39세의 짧은 생애를 마감했다. 아무리 위대한 산악인이라도 등반을 계속하는 한, 고산에서의 추락, 낙석, 눈사태, 숨은 크레바스, 고산병의 위험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