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음종 총무원장 홍파 스님
유화인욕(柔和忍辱) 품고 출세간 반목·갈등 상생으로 이끈 이 시대 ‘법화보살’
유년시절 이웃이 조계사, 회나무 돌며 숨바꼭질
9살 때부터 법화행자, 17년 물지게 지며 ‘하심’
자비야학· 대불련 사원화, 좌경세력으로 찍혀 체포
상세한 자술서 요구하자, “쓸게 없다”며 아리랑 써
종단협 사무총장 30년, 회장 만도 16명 보필
남북·한중일 불교교류, 증진에 ‘혁혁한 공로’
“2008 범불교도 시국법회는 항거가 아니라 종교편향을 조장하는
정부와 기독교에 내리는 회초리였다”는 홍파 스님은
“우리 스스로 힘을 보여주지 못하면 10·27법난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관음종은 창종 50주년(2015)을 1년 앞둔 2014년 11월
근현대 전법의 사표로 칭송 받았던 개산조(開山祖) 태허 홍선(太虛 泓宣) 스님의
부도와 탑비를 조계산 선암사에 봉안했다.
태허 스님의 출가사찰이기는 하지만 선암사는 조계·태고 분규사찰이다.
한 종단, 한 사찰의 승낙도 어려운데, 두 종단의 허락을 받아내야 가능했던 법회였다.
결코 녹록치 않은 일이었음에도
그날 법회에는 조계·태고 두 총무원장의 축사가 있었다.
한국불교종단협의회 사무총장이자 관음종 총무원장인 홍파(泓坡) 스님의
덕과 역량이 발현됐기에 원만히 회향할 수 있었을 터다.
홍파 스님에게 있어 태허 스님은 불연으로는 개산조(開山祖)요,
세연으로는 부친(父親)이다.
홍파 스님은 1943년 조계사(견지동 45번지) 옆
견지동 44번지(현, 수송공원)에서 4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다.
집 대문 열고 몇 걸음 띄면 절 앞마당이다.
하루에도 수 십 번씩 동네 아이들과 대웅전 층층 계단을 오르내리며 술래잡기를 했다.
지쳤다싶으면 해태 상 한 번 끌어안으며 숨 돌렸고,
땀이라도 송골송골 맺히면 회나무 아래 앉아 식혔더랬다.
1950년.
그 해 봄 햇살이 채 들기도 전에 삶의 터를
조계사에서 숭인동 묘각사(현, 낙산 묘각사)로 옮겼다.
뿌리를 내리기도 전에 6·25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휴가 나왔던 큰 형님이 급하게 부대로 복귀했는데 그 이후로는 영영 만날 수 없었다.
둘째 형님은 9월 서울 수복 직후 해병대에 지원했는데
정전협정(1953.7.27) 보름을 앞두고 전사했다. 아들은 둘만 남게 됐다.
1·4 후퇴!
청량리에서 제천, 영주를 거쳐 부산으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객실은 이미 발 디딜 틈도 없어 네 명의 일가족은 모두 기차 위로 올라갔다.
영주를 지나 강릉에 이르렀을 때 동생이 홍역에 걸렸다. 약은 구할 수 없었다.
어느 산등성이의 눈밭에 만 6살의 동생이 묻혔다.
세 명의 일가족이 그 해 겨울 닿은 곳은
상주. 태허 스님의 법력에 감복한 양반가가
황방촌(黃尨村·황희 정승의 재실)을 내어 주어
피난길에도 품고 있던 철불을 봉안하고는
백화암(白華庵·현 백화암은 황방촌에서 이전 해
모동면 덕곡리에 자리하고 있다)이라고 이름 했다.
‘법화경’에 조예가 깊었던 태허 스님은
상주 백화암과 서울 묘각사를 원동력 삼아 법화사상을 펼쳐갔다.
9살의 외아들이었지만 예불을 빠지면 공양할 수 없었다.
마을에서 절로 이어지는 700m 길에 내린 눈을 치우는 건 온전히 외아들 몫이었다.
절 인근의 옹달샘에서 매일 아침 물 길어 오르는 것 또한 외아들 일이었다.
서울 낙산 묘각사로 돌아와서도 절과 공중수도(현, 공동주차장) 사이의
70m 오르막을 오르내리며 매일 열 지게씩 물을 길어 올렸다.
작은 법회라도 있는 날이면 스무 지게는 길어야 했다.
1968년 숭인동 일대에 수도가 들어와서야
1951년부터 17년 동안 지어 온 물지게를 내려놓을 수 있었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먹지 말라’는 백장 선사의 가르침을
9살 때부터 지켜온 어린 행자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재수 중이었던 1961년 5월 사미계를 받았다.
독재·산업화·민주화 시대를 관통해야 했던 홍파 스님은
불교와 사회 저변에 포커스를 맞췄다.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발기 총회 참여(1963)를 시작으로
한일국교정상화 반대 시위를 주도(1964)했고,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3대 회장(1965)으로 활동하며 불교운동의 지평을 넓혔다.
대불련 군승촉진위원회 지도간사장(1967)을 맡아
군승제도 정착에 신호탄을 쏘아올린 장본이기도 한 홍파 스님은
1980년대 접어들며 자비야학(慈悲夜學)과
대불련과 사찰간의 결연을 맺는 ‘대불련 사원화’ 운동을 전개했다.
전국 규모의 야학운동연합까지 창립했던 홍파 스님은
‘좌경 세력’으로 의심을 받았고, 5·18 광주 민주화운동(1980)에 이어
광주 노조사건(1981)이 발생하자 사법경찰에 의해 체포 돼 조사를 받아야 했다.
200자 원고지 한 권을 자술서로 꽉 채우라는 사법경찰의 말에
살아 온 얘기 좀 적어 놓고는 “별 달리 쓸게 없다”며
아리랑 가사를 써 내려갔던 홍파 스님이다.
한국불교종단협의회, 한·일불교문화교류협의회 사무총장(1985)을 맡으면서
국제·남북 불교교류 증진의 산파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한국, 중국, 일본 3국불교 유대강화의 초석인
한·중·일 불교교류협의회를 출범(1995)시키는 데 있어 홍파 스님의 공로는 혁혁하다.
태허 스님 열반 직후 종무원장(1979)에 오른 홍파 스님은
1988년 관음종 총무원장 겸 재단이사장으로 취임하여 오늘날까지 종단 발전을 이끌고 있다.
종무원장 취임 때 관음종 소속 사찰은 75개였지만
현재는 300여개이며, 법인 소속 사찰만도
전체사찰 10%에 해당하는 30개를 확보하고 있다.
태허 스님의 부도·탑비를 봉안 한 다음 해인 2015년 3월,
30년 동안 수행해 온 종단협의회 사무총장 직을 내려놓았다.
그 동안 16명의 회장을 보필하며 대소사를 관장해 온 홍파 스님은
한국불교 현대사의 산 증인이다.
홍파 스님의 시야에 잡힌 불교계의 변화상을 엿보고자
관음종 총무원(낙산 묘각사)을 찾았다.
16명의 종단협의회장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스님은 누구일까?
“박하다식하시면서도 고상한 인품을 지니신 지관 스님입니다.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불법(佛法)이었습니다.
교계 내외 인사들이 지관 스님을 한 번만 뵈면 그 자리서 존경심을 드러내곤 했습니다.
‘감화(感化)란 이런 것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입니다.”
1992년 8월24일 한·중 수교가 맺어지면서 이를 기폭제로 한·중 불교교류가 추진됐다.
서울 신라호텔에서 양국 대표단이 만났는데
조박초 회장이 일본과도 교류하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중국과 일본 간의 불교교류는 사찰과 사찰 간의 인연으로만 이어지고 있었다.
일본으로 건너 간 홍파 스님은 일본불교협회 측에 중국불교협회의 의중을 밀도 있게 전했다.
그 결과 한·중·일 불교교류협의회가 출범했고,
북경에서 제1회 한·중·일 불교우호교류대회(1995)가 열렸다.
“제1회 대회가 북경에서 열린 건 중국불교협회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문화혁명 이후 중국 불교계는 완전히 초토화됐는데,
첫 대회 유치를 원동력으로 중국불교를 중흥시켜보겠다는 겁니다.
한국과 일본은 일불제자로서 흔쾌히 승낙했습니다.
불학원(佛學院)을 열어 승려를 육성하겠다는 뜻도 전해들은
한국과 일본은 각각 5만 달러를 지원했습니다.
그 당시 중국 승려는 1500명이었고, 불자는 25만명에 불과했습니다.
중국불교협회는 한중일 대회를 거듭하며
한국과 일본불교의 교육·운영시스템을 완벽하게 도입했습니다.
현재 중국 불교계에 투입되는 1년 예산은 2조원에 이른다고 합니다.
승려는 4000명으로 늘어났고, 불자는 1억5000명입니다.”
2018년 9월 고베에서 열리는 한·중·일 불교우호교류대회는 21번째를 맞는다.
1977년 결성된 한·일 불교문화교류협의회가 주최하는
한·일대회는 41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4차 대회부터 이 행사를 주관해 온 홍파 스님은
2013년 6월 공주에서 개최된 34차 대회를 기억하고 있다.
“아베 총리가 우리 국민의 반일감정을 조장하는
망언을 쏟아낸 직후의 대회였습니다. 참으로 난감했었습니다.”
2013년 4월23일 아베 총리는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침략에 대한 정의는 학계에서도, 국제적으로도 확실하지 않다”면서
“국가 관계에서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다”고 했다.
제국주의 시절의 동아시아 침략은, 일본의 입장에서는 침략이 아니라는 뜻이다.
“서로 머리를 맞댄 결과 한·일 양국의 갈등 해결에
불교계가 힘을 모으자는데 합의하며 한일 공동선언문을 발표했습니다.
그 정신은 양국의 불교협회가 존재하는 한 간단없이 이어지리라 확신합니다.”
‘한일 양국의 불교도는 양국의 경직된 국면을 타파하기 위해
국가와 종파, 교의의 다름을 뛰어 넘어 불교의 지혜와 자비정신으로 공감대를 형성하고
인류화합공생기원비 건립정신을 이어받아 역사를 직시하고
우호적으로 미래 지향적인 한일관계를 구축하는데 노력한다.’
남북불교교류의 활로를 뚫는데도 사무총장의 역할은 막중했다.
종단협의회는 1989년께부터 다양한 채널을 통해 조선불교도연맹과의 교류를 시도했는데
1991년 10월 미국 LA에서 그 결실을 맺었다.
해방 후 약 50년 만에 만난 두 대표단은
그 곳에서 ‘남북해외불교도 조국통일기원 남북합동법회’를 봉행했다.
남북이 상생의 길로 들었음을 상징하는 법회로 평가되고 있다.
그 당시 한국대표단은 서울과 평양에서의 합동법회를 제안했는데
조불련은 난색을 표명했다고 한다. 사무총장 홍파 스님이 저녁 공양 후
세납으로 한 살 아래인 심상진 조불련 서기장에 전화를 걸었다.
“심상진 서기장이 머물고 있는 호텔 방으로 가서
공식 회의 때 하지 못한 얘기를 나눴습니다.
서울의 종로· 명동거리를 사진으로 보여주듯 상세히 전했습니다.
제가 사는 숭인동 골목에서 빚어지는 삶의 단면도 얘기했습니다.
그리고는 ‘언젠가 나도 평양으로 갈 텐데
그 전에 서울로 초청할 테니 꼭 오시라!’고 했습니다.”
그날의 만남은 마중물이 되었다. 6년 후, 북경회담(1997)을 통해
부처님오신날 남북 공동발원문 채택이 결정됐고, 종단협 금강산 순례(1999)도 이어졌다.
그리고 서울 봉은사 3·1 남북불교도 합동법회(2003)와
평양 광법사 8·15 남북불교도 합동법회(2007)도 봉행됐다.
남북 경색국면에서도 불교교류 창구만큼은 늘 열려 있었고,
그 중심에 종단협의회가 있었다.
실무책임자가 사무총장 홍파 스님이었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사무총장의 연륜과 종단협의회 위상은 궤를 같이 하며 높아져 갔다.
“1988년 한강 잠실 고수부지에서 봉행한 한강연등대법회에는 무려 20만명이 운집했습니다.
강물에 띄운 연등이 밤 하늘의 별처럼 빛나니 은하수를 보는 듯 했습니다.
국운융성과 88올림픽 성공을 기원하는 법회였지만
불교도의 힘을 유감없이 보여 준 대 법회였습니다.
그 이후 초파일 제등행렬에 나서는 불자들의 어깨가 펴졌고,
30여년이 지난 지금 그 제등행렬은 세계적인 연등축제로 비상했습니다.
4대강, 용산 참사를 다룬 시국법회를 주도한 것도 종단협의회였습니다.
특히 이명박 정부 당시 봉행한 ‘2008 범불교도시국법회’는 항거가 아니었습니다.
종교편향을 조장하는 정부와 기독교에 내리는 회초리였습니다.
우리 스스로 힘을 보여주지 못하면 종교편향과
10· 27 법난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조계종을 중심으로 한 29개 종단의 총무원장을 아울러야 했다.
50년 가까이 서로 다른 길을 걸었던 남북 불교도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야 했다.
국제정세 급변에 일어 난 반한, 반중, 반일 감정도
3국의 불교협회가 다스릴 수 있도록 애써야 했다.
자신의 마음을 거문고 줄 고르듯 조율할 줄 아는
사무총장이었기에 가능했던 대작불사였다.
‘법화경’ 전반에 흐르는 보살행이 있다.
자비로운 마음으로 중생을 보살펴야 하며,
유화인욕(柔和忍辱)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 일체법공(一切法空)으로
자타를 구별하지 않는 보살행을 실천해야 한다.
출세간을 아우르며 법을 전하는 홍파 스님은
이 시대가 원하는 ‘법화 보살’의 길을 걷고 있다.
그 발걸음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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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파 스님은
· 1943년 서울 출생· 1961년 사미계 수지
· 1965년 대불련 3대회장
· 1979년 관음종 종무원장
· 1985-2015년 종단협 사무총장
· 1988-현재 관음종 총무원장
“옛 사진첩을 뒤지고 갖가지 자료를 찾아 나섰다.
중도에 이런 것을 굳이 책으로 남겨야 하나 하는 생각이 밀려오기도 했지만
나의 기록이 한국현대불교사에 의미 있는 자료가 된다는
학자들의 권유에 다시 용기를 내 계속하였다.”
- ‘바람따라 물결이네’ 저자 홍파 스님의 책머리에서
2018년 8월 22일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