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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여권 외 3편/ 정한용
여권을 새로 만들었다. 수십 년 만에 바뀐 새 여권은 표지를 푸른색으 로 입혔고, 로고와 디자인도 훨씬 세련되어졌다. 보기 좋으니 성능도 업 그레이드되었을 테다. 세상 밖 더 멀리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제 떠나야지. 어디가 좋을까?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먼지 나는 시골길을 다시 걷고 싶다. 터키와 그리스 쪽 지중해 바닷가 마을에서 두 달쯤 사는 건? 폴리네시아 남태평양 이름 모를 섬에서 다이빙 실력을 뽐내고 싶기 도 하고. 남미도 가야 하는데 거긴 체력이 받쳐줄지. 호주와 뉴질랜드 가 서 캠퍼밴으로 대륙을 일주하는 것도 좋을 텐데. 꿈은 즐거운 활력이니, 날 말리지 마세요. 지구를 세 바퀴쯤 돌고 나면, 이젠 어머니가 계신 안드 로메다에 가고 싶다. 혹시 거기 아니 계시면, 이번 나사에서 새로 공개한 푸른 은하를 찾아갈 것이다. 어쩌면 거기로 자리를 옮기셨을 터. 엄마 만 나면 어릴 적 먹던 풀빵과 도토리묵을 만들어 달라 조를 것이다. 밀가루 와 도토리는 우주 어디에서나 흔할 테지. 아니어도, 괜찮다. 영원히 원위 치할 수 없다 해도, 내 여권은 여전히 유효할 것이다.
먼지처럼
훗날, 언제일지는 몰라, 그래도 그날, 내가 흙에 묻혀 있을 때, 조금씩 삭아서 흙으로 스며들 때, 바로 그때 당신을 만날 수 있을 거야. 내 흙과 그대의 흙이 손잡을 수 있을 거야. 바람 불 때마다 조금씩 내 살점을 뜯어 날리고, 또 그렇게 그대에게서 날아온 먼지가 내 몸 위에 앉을 거야. 바람 은 불려면 불라지, 불다 지치면 한 세기쯤 쉬었다, 다시 쉼 없이 불겠지. 길모퉁이 우리가 차를 마셨던 찻집의 처마를 지나, 사하라 사막 초입 뜨 겁게 끓던 알리네 집 풀장의 벤치를 스쳐, 조금 더 멀리 태양이 부풀어 지 구와 화성의 눈썹을 그을리고 떠나는 신발주머니에, 우리 섞인 먼지가 찰떡처럼 곱게 가라앉을 거야. 그렇게 다시 만날 거야. 당신이 변한다 해 도, 가늘고 여린 목소리도, 습자지 같던 살결도, 이제 영구히 사라진다 해 도, 그대에게서 나온 신호는 파동처럼 번져 우주 끝까지 갔다 메아리로 돌아올 거야. 우리에겐 서로를 인식하는 예민한 감지기가 있으니, 그만 하면 됐어. 만나서 뭐 하지, 어디 가지, 뭐 먹지, 이런 건 묻지 않아도 돼. 텅 비어 더 황홀한 우주에서, 나는 당신의 얼굴을 닦아줄 거야, 먼지 한 점 없이, 거울처럼.
눈게야, 어디 갔니?
뉴스를 뒤적이다 깜짝 놀란다. 알래스카에서 눈게1 가 사라졌다! 요즘 기막힌 일이 얼마나 많은데, 이게 뭐 대수라고! 코웃음 치는 이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이 사건을 지구가 티핑포인트를 넘는 순간, 그래서 지옥문 이 끼기긱~ 열리는 경고로 읽는다. 베링해에 수만 년 동안 터를 잡고 살 던 눈게 110억 마리가 게눈 감추듯 사라졌다니! 그 많던 눈게를 누가 다 먹어 치웠을까.2 이 미스터리를 풀려고 많은 사람이 오만가지 추측을 내 놓고 있다는데, 아직은 기후변화로 바닷물이 뜨거워졌다는 가설이 가 장 그럴듯하다고 한다. 정확한 원인은 하나님도 모르시겠지만, 내가 단 언할 수 있는 게 하나 있다. 게가 사라졌으니, 다음엔 동태도, 임연수어 도, 정어리도, 오징어도, 고래도 사라진다는 것. 우리가 죄책감을 느낄 사 이도 없이, 사라지는 것들은 우리에게 양해를 구하지 않는다. 조용히 가 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니, 북극곰도, 악어도, 호랑이도, 코끼리도, 호모사피엔스도, ‘이 새끼’ 3 도, 코로나바이러스도, 푸틀러4 도, 일각수 도…… 모두, 끝내, 사라질 것이다. 그러니, 미리, 안녕!
1. 알래스카 특산물 중 하나인 ‘스노우 크랩(Snow Crab)
2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연상하지 말 것.
3 미국 제 46대 대통령을 지칭하는 출처불명의 용어.
4 히틀러를 닮은 어느 소련 독재자를 가리키는 별명.
선각여래좌상
경주 남산 삼릉계곡을 오르다 선각여래를 만난다. 초입 소나무 숲으로 부터 삼십여 분, 왼쪽 험한 등성이로 꺾어들면, 산 중턱에 높이와 너비가 10m쯤 되는 절벽바위가 있고, 여기 여래가 앉아 계신다. 원래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좌대 바위가 갈라져 조금 아슬아슬해 보인다. 그건 내 생각 이고, 여래께선 뭐가 좋으신지,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고 고요히 아래를 굽어보고 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호빵처럼 둥근 볼때기는 고향 불알 친구 기영이네 아버지를 닮았다. 얼굴 뒤에 그려 넣은 둥근 광배는 우리 할아버지가 귀히 간수하시던 고릿짝 갓 같다. 할아버지는 아흔에 돌아가 셨는데, 여래께선 지금 천 살 잡수셨다고, 그런데 아직 기운이 성성하다 고 자랑하신다. 그리 오래 사시면서 세상을 두루 살피셨으니 모르는 게 하나도 없으시겠네요?
도저히 납득이 안 되어 여쭤보는데요. 내 귀가 이상한 걸까요? 자꾸 ‘날 리면’이라고 우기는데, 할아버지도 그렇게 들리세요? 똑똑하다는 새끼들 이 왜 그 지랄일까요? 언론을 빨래 두드리듯 주무르는 새끼들이 우째 ‘가 난 포르노’도 모를까요? 그 자들 머릿속이 포르노로 가득 차 있는 건 아닐까요? 아, 정말 열 받아서 그러는데요. 여래 할아버지, 갸들좀 어떻게 해 주세요. 물론, 부처도 예수도 마호메트도 산신령도, 뒷짐 짚고 아랫녘 인 간사에 관심 끊으신 판에, 할아버지라고 뭐, 별수 있겠어요? 아, 그리고 요, 제가 자꾸 ‘새끼새끼’한다고, 싸가지 없다고 나무라진 말아주세요. 요 즘 유행어거든요…… 선각여래께선 혀만 끌끌 차고 답이 없으셨다. 산에 서 내려올 때, 누군가 등 뒤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까불지 마라, 입만 나불대는 것들이!
<등단시>
바다에 누워
죽음이 헛되지 않기 위하여 나는
바다에 던져지겠다
무수한 고기떼가 몰려와 내 살점을
뚝뚝 물어뜯고 포식의 기쁨으로 돌아갈 때
바다 가장 깊은 곳에
앙상한 뼈뿐인 뼈로 누워
고요히 수천 년 잠들겠다 기꺼이
한 개 화석으로 굳어지겠다
하늘과 땅이 뒤집히고 어느 봄날 인간은
사라지고 그 신선한 대지 위에
햇살만이 남아 있을 때
우주 저편에서 불현듯 내려앉은 지구의
새 주인들에게
나는 내 모습을 보여주겠다
과거 어느 때 인간은 이런 모습으로
앙상한 갈비뼈와 몇 줌의 살과 슬픔덩이
외로운 육신을 거느리고 살았다고
남겨놓은것 하나 없는 이 허무와 부재 속에
자유와 평등 따위도 다 묻어두고
썩어 석유 몇 방울로 태어나기 위해
이 땅에 입다물고 묻혔다고
그렇게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기꺼이 나는 바다에 던져지겠다
나주집에서의 만남
20년 후의 나로부터 만나자는 문자가 왔다.
20년 전의 나를 데리고 나가겠다고 답을 보냈다.
그렇게 우리는 만났다.
늙은 나주댁 아지매가 아직도 술상을 거들고 있었다.
십구공탄에 삽겹살을 구우며
어린 나는 빨간딱지 진로소주를 마시고
지금의 나는 조껍데기 막걸리를 마시고
늙은 나는 이젠 술을 못한다고 콩나물국만 홀짝거렸다.
우리는 각자 가져온 기억을 꺼내 식탁에 올려놓았다.
아내와 아이들 이야기는 빼자고 했다.
서로 조금씩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긴 했지만
망각과 불안이 우리 생의 기본이 아니겠냐고 서로 위로했다.
어린 나는 마르크스를 읽는다고 했다.
지금의 나는 여행서적을 읽는다고 했다.
늙은 나는 책 같은 건 보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 담화는 애매모호하게 시작되었다.
삽겹살 불판을 두 번 갈고 소주잔과 막걸리잔이 섞이고
식은 콩나물국을 다시 데워오는 사이,
나는 가장 즐거웠던 시절이 언제인지 물었다.
어린 나는 원래 행복한 현재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조금 건방지다 싶자 늙은 내가
현재란 과거의 심연이며 늘 새로운 탈로 위장하는 것이니
겨우겨우 인생은 견뎌가는 것이 아니겠냐고 했다.
그 순간 누군가 술잔을 엎었다.
이후 세 시간 동안 끊어진 필름 조각을 이어보면,
어린 나는 ‘진실’과 ‘사실’의 차이를 아느냐고 악을 써댔고
지금의 나는 우리 회사 이부장 ‘썩을 놈’이라고 욕을 해댔고
늙은 나는 오래전 돌아가신 어머니 이야기를 자꾸 꺼냈다.
나주집 아지매가 결국 등을 밀어낸 것은 알겠는데
우리가 어떻게 헤어졌는지는 기억이 없다.
우리 중 누군가가, 다시 또 만나면 개새끼라고
꿈속에서인 듯 말한 것 같기도 하다.
산문시에 대한 고민
지금까지 일곱 권의 시집을 냈다. 꾸역꾸역, 쓰다 보니 40년 세월에 이르러 간다. 첫 네 권의 시집은, 누구나 흔히 그러하듯, 몇 해 써서 모 은 작품을 별 고민 없이 묶었다. 그러다 다섯 번째 시집 『유령들』을 쓰면서 나의 시 쓰기 작업은 극적인 변화를 맞았다. 시집 전체를 하나 의 주제로 엮는 것, 그래서 그때 선택한 것이 ‘제노사이드’였다. 참으로 끔찍하고 아픈 이야기들이었다. 여섯 번째 시집 『거짓말의 탄생』은 판 타지를 통한 현실의 관찰에 초점을 맞추었다. 모든 이야기가 거짓말이 었다. 일곱 번째 시집 『천 년 동안 내리는 비』는 미래 문명에서 인간의 삶이 어떻게 변해갈까를 진단해보는 작업이었다. 그런데 앞 두 시집처 럼, 책 한 권 전부를 디지털 상상이라는 하나의 테마로 채우기엔 많이 부족했다. 그래서 좀 느슨해졌다. 재작년 여덟 번째 시집을 준비하면서, 전략을 어떻게 세워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앞의 세 시집을 통해, 각기 우리 인간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내 나름대로 진단해보려고 애썼다. 성과야 어떻든 내 능력 안 에서 최선의 정성을 기울였다. 그렇다면, 다음 과제는 뭐지? 오래 가 슴에 두었던, 우리 일상에 내재된 폭력의 문제를 다뤄볼까? 왜 인간은 근거가 약한 믿음에 빠지고 신이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거지? 사람은 똑똑한 것 같으면서도 한편 한없이 어리석은 걸까? 지금 세상 이 점점 늪으로 빠져드는 걸 보면 신자유주의가 망가졌다는 게 증명된 거 아닌가? 이런저런 아이디어가 떠오르긴 했지만, 내가 과연 그런 문제를 다룰 힘이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나는 시를 쓰며 약간의 고집 같은 걸 갖고 있다. 동시대 시를 쓰는 우리나라 시인 중 대부분은 아마도 시행의 끝에 마침표를 찍지 않으리라. 그러나 나는 시행마다 마침표와 쉼표를 꼭꼭 정확하게 찍는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시는 ‘문장’으로 이루어지며, 문장에서 부호 사용 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인들이 마침표를 찍 지 않는 데에는 물론 이유가 있지만, 그보다는 그냥 관습을 따르는 것은 아닌지 싶다. 시에서 마침표를 쓰지 않게 된 것은, 아마도 프랑스 상징주의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1970년대 이후이다. 그러니까, 원래 처 음부터 찍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비교적 최근에 벌어진 현상인 것이다. 나는 마침표가 글의 의미를 선명히 하는 데 꼭 필요하다고 판단한 다. 더구나 내 시 상당수가 스토리를 담고 있고 산문성에 기초하기에, 더 이런 생각을 갖게 된 듯도 하다.
그래서일까, 다음 시집에서는 주제가 아니라 양식의 변화를 꾀해 보자는, 좀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다. 관심 있게 본 책 두 권이 나를 부추겼는지도 모르겠다. 하나는 『Prose Poetry: An Introduction』 (Princeton Univ. Press, 2020). 이 책은 서양문학을 범위로 하지만, 산문시의 역사와 이론적 배경을 설득력 있게 설명해주고 있다. 다른 하나는 『Great American Prose Poems』(Scribner, 2003)로 미국 문 학에서 중요한 산문시를 묶은 자료집인데, 독자에게 산문시가 얼마나 매력적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을 통해 배운 점이라면, 산문시가 운문시에 비하여 양은 적을지 몰라도, 결코 부속품이나 아류가 아니라, 하나의 독립된 장르로 중요한 위의와 가치를 갖고 있다는 것이 었다. 서사적이며 직설적인 묘사는 운문보다 산문일 때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근래 우리 시단에서 시가 점점 산문화되어 간다는 지적이 있다. 대개는 부정적으로 평가하며 시의 본질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나는 ‘운문성’보다는 ‘산문성’이 지금 이 시대를 훨씬 적합하게 대변할 수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단순히 운문에 곁들여진 산문이 아니라, 산문 자체를 심화시키는 작업이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운문으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영역, 이제 그 어둠의 영역에 빛을 밝혀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새로운 시각은 아니지만, 분명히 큰 가능성의 세계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미 우리 시단에 산문시를 일궈온 선배 시인들이 있었던 걸 환기할 필요가 있겠다. 오래전부터 나는 김수영, 정진규, 이시영 같은 분에 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분들은 산문시가 세상의 진실과 본질을 찾 아내는데 정밀한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제 나는 그분들 이 일구어 놓은 밭에 새로 씨앗을 뿌리고, 흙을 북돋우고, 가지를 다 듬어서, 새 꽃과 열매를 피우고 싶은 욕심이다. 어떤 소득을 거둘지 결과를 예단할 수 없는 농사꾼 심정처럼 조마조마하다. 의지가 있으면 용기가 생기는 법, 하다 보면 뭐가 돼도 되겠지 여긴다.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 해도, 후회할 일은 아니다. 불확실에의 도전, 이 자체가 어쩌면 문학의 본질이 아니겠는가.
* 이 글은 필자의 ‘작은시집’ 『예순 네 개의 손』(전자책, 디지북스, 2022)에 실린 것인데, 지금 여기에 서도 유효한 글이라 여겨 재수록하는 것임을 밝힌다.
정한용 충주 출생. 1985년 《시운동》 등단. 시집 『천 년 동안 내리는 비』 외. 시와시학상 외 수상
청려장 외 3편/ 하기정
청려장
지팡이가 가리키는 쪽으로
여름이 자라고 있다
명아주 잎이 물컹하고 비릿하게
매미는 새보다 일찍 일어난다
가로등이 햇빛처럼 비추는 나무 아래서
좋아하는 것들 틈에서
나는 뿔처럼 여름이 자라나는 것을 본다
여린 죽순에 받힌 송아지가 여름을 마주보고 있다
초록의 질투는 등을 다 덮을 기세로 자라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네가 쥐고 있다
등 뒤에서 여름이
여름을 덮고 있다
짚고 일어서는 사람들과 잡고 돌아가는 사람들
풀이 자란 쪽으로 길이 생길 것 같다
손가락이 없는데 움켜쥐고 싶은 것이 있다
바닥을 짚고 일어설 때마다
푸른 지팡이가 자라나고 있다
닿다
그늘과 그늘이 만나면 도로 그늘
그 늘그막 아래서 손을 들면
만세 대신에 부르는 항복이라는 항거
눈 딱 감고 뜨면
한 밤 두 밤
별은 지다가 나뭇가지에 걸리고
최초의 시를 지으며
최초의 죄를 짓기도 하지
흰 손이 될 때까지 씻고 또 씻어도
남아있는 얼룩의 찌꺼기를
말뚝 주위를 빙빙 도는 염소와
생활이 죽음에게 단 한 번
화해의 손을 내밀려 할 때
변기에 끙, 하고 떨어지는 시의 한 문장이
하수구를 타고 궁극의 바다에 흘러 닿을 때
우발적인 범행을 묵인해주는 꽃과 나비처럼
눈 딱 감고 쓰면
한 장 두 장
점자처럼 쓰여진 책의 글자를 더듬으며
일기
어제와 같은 바람, 어제와 같은 토마토, 어제와 같은 연못, 어제와 같은 돛단배, 어제와 같은 소금쟁이, 어제와 같은 내일, 어제와 같은 시계, 어 제와 같은 자동차, 어제와 같은 밥그릇, 어제와 같은 자작나무, 어제와 같 은 입김, 어제와 같은 언덕, 어제와 같은 동굴, 어제와 같은 눈썹, 어제와 같은 주제, 어제와 같은 주전자, 어제와 같은 칫솔, 어제와 같은 잇몸, 어 제와 같은 둥지, 어제와 같은 연필, 어제와 같은 서쪽, 어제와 같은 책, 어 제와 같은 고양이, 어제와 같은 심장, 어제와 같은 오솔길, 어제와 같은 징검다리, 어제와 같은 비밀번호, 어제와 같은 선물, 어제와 같은 소란, 어제와 같은 통로, 어제와 같은 의심, 어제와 같은 베개, 어제와 같은 절 벽, 어제와 같은 하품, 어제와 같은 동료, 어제와 같은 창문, 어제와 같은 그림, 어제와 같은 2월, 어제와 같은 소금, 어제와 같은 장갑, 어제와 같은 의자, 어제와 같은 사막, 어제와 같은 펭귄, 어제와 같은 암벽, 어제와 같 은 구급차, 어제와 같은 사진, 어제와 같은 썰매, 어제와 같은 고드름, 어 제와 같은 안개, 어제와 같은 이웃, 어제와 같은 사람
퍼즐 맞추기
감정은 시가 되지 않는다
뜬눈으로 일어나 이를 닦고
새벽에 먹는 밥이 아침밥이 아니듯
죽은 시계는 있어도 죽은 시간은 없다
등을 힘껏 껴안은 팔이
사실은 내 양팔이었다는 것
이성을 잃고 쓰러진 자리를
무덤이라고 쓴다
죽은 당나귀 귀가 탑처럼 쌓인 거리를
눈 부릅뜨고 걷는다 해도
고백은 자백이 되지 않았다
방백은 독백 처리된다
내가 나에게로 보내는 택배 상자처럼
연민은 시가 되지 않는다
주머니를 뒤집으면 비밀처럼 깊숙하게
어제 산 물건의 목록이 세탁기 속에서 반죽된다
값을 치른 영수증은 증거가 되지 않는다
내가 凸을 보낼 때
반사적으로 凹를 날린다
변죽만 울리다 모서리가 짓이겨진 것들은
퍼즐이 되지 않는다
<등단시>
구름의 화법
구름은 여태 제 모습을 보여 준 적이 없어
형상은 당신 머릿속에나 있지
내가 만들 수 있는 건 물방울이 아니야, 보다 가볍지
당신의 어깨를 적실 수도
당신의 입가를 핥을 수도 있지
그러니 나를 구름이라 이름 짓는 건 아주 치명적이지
네가 구름이라고 부르는 것들, 네가
토끼, 라고 부르면 난 하마처럼 하품을 해 네가
고양이, 라고 부르면 난 호랑이처럼 포효하지 네가
의자, 라고 부른다면 금세 침대를 만들어 줄 수도 있어
만지면 폭삭 꺼지는 먼지버섯, 그러니 나를
버섯이라 불러도 좋아
형상은 당신 눈 속에나 있지
그러니 S라인 B라인은 네 이름
무대가 아닌 곳에서만 춤을 출 거야
내 음악은 내 귀로만 흘러들어 언제든지
다시 태어날 수 있어 나를
이해하려 시도한다면 그것은 서툰 오해
나를 만지려 든다는 건 아주 절망적이야
롤러코스터를 생각한다면 모르지
추락은 오로지 빗물, 눈물
행여 구름을 담아서 팔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마
내가 할 수 있는 건 당신의 시선을 구부리는 일
악어, 라고 하면 도마뱀이 되어줄래?
고래, 라고 하면 돛단배가 되어줄래?
나에게 나를 너, 라고 불러 줄래?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대표시>
모로 누운 사람
너는 산처럼 모로 누워 내가 잠깐 동안 빌려 간
당신의 어깨가 결린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심장과 가까운 왼쪽을 바닥에 대고
그 겨울 찬 강물이 폐에 차오르는 걸 생각했다
당신은 오른쪽 어깨를 바닥에 대고
한번은 너무 아래까지 내려온 별의 모서리가 찌른다고도 했다
쏟아진 별과 비스듬히 흘려보낸 말들로부터
균형을 잡느라 비집고 들어온 마음자리가 떨리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빽빽하게 우거진 나무 그늘의 깊이를 헤아려 보는 것이었다
감정은 손가락 끝에 매달린 물방울처럼 털어내기를 좋아해서
당신의 오른발로 나의 왼발을 지탱하는 습관이 버릇처럼 생겼다
이렇게 말하면 당신은 꼭 옛날 사람 같지만
꽃은 절대 지지 않을 것처럼 피고
당신은 절대 가지 않을 사람처럼 온다
아주 오래전 방울 소리를 내며 문밖을 서성이며
당신은 절반을 다 내어 줄 것처럼
끝내 돌아눕지 않을 사람처럼
<산문>
빈 문서와 빚문서 사이에서
돌아와 저녁을 지어 먹고 우두커니 앉아 있다. 모니터 앞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된다. 제목 없음. 파일명이 지어지기 전, 빚을 독촉하는 사람처럼 빈 문서의 모니터는 깜빡인다. 자음과 모음이 문장으로 건너오지 않을 때, 누구처럼 내 앞에 난로와 귤이 있다면 귤껍질을 벗겨 뜨거운 불구덩이 속에 집어 던지며 타다닥, 알갱이가 터지면서 내는 소리를 물끄러미 바라나 보고 있을 덴데. 내 앞에는 돌멩이 두 개가 놓여있다. 내가 주운 돌이다. 그 옆에 돌이 하나 더 있다. 네가 주운 돌이다. 돌 위에 돌을 얹는다. 하나는 작고 하나는 커서 무너지지 않는다. 하나는 넓적하고 하나는 동글해서 견고해졌다. 둘 다 넓적했으면 밋밋했을 것이다. 둘 다 뾰족했으면 무너졌을 것이다.
생활의 얼굴과 정면으로 마주하면 마음이 쓰릴 때가 있다. 마음의 표면에 환삼덩굴을 문지르는 것처럼. 전속력으로 끝없이 달려가는 마음에 제동을 걸고 잠깐 넘어지려고 휘청거리다가 다시 제자리에 서려고 하는 것을 ‘마음 관성의 법칙’이라고 하겠다. 휘청거림은 신도 제압 할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흔들리는 몸을, 달려가는 마음에 제동거는 일, 브레이크를 밟고 잠깐 넘어져 보는 일.
두 번째 시집을 낼 무렵, 첫 번째 시집을 냈던 출판사에서 남아있는 시집을 모두 보내왔다. 내가 내게 보낸 소포를 받은 것 같다. 반송된 소포. 나는 이것을 들고 조금 멀리 여행을 떠나자. 가장 멀리까지 가는 기차를 타고 가서 모르고 놓고 내린 책처럼, 시집을 놓고 내리자. 누구라도 읽겠지. 누가 읽지 않아도 종이로 분류되어 재활용될 것이다. 변죽을 울리던 시들은 반죽이 되겠지. 문장은 짓이겨지겠지. 밀가루 반죽처럼 찰지게 짓이겨져 다시 태어날 종이들에 대해. 깨끗하게 지워진 글자들에 대해 하얗게 태어날 종이들에 대해 그 평화와 무한에 대해. ‘제목 없음’의 시작에 대해. 나는 또 빈 문서 앞에서 빚쟁이처럼.
하기정 전북 임실 출생. 2010 <영남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밤의 귀 낮의 입술』 외. 시인뉴스포엠 시인상 외 수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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