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9/05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05 - 한국산 토종 남생이 대량 인공증식 성공
한국산 토종 남생이의 대량 인공 증식이 성공했다.
서울대공원 관리사업소는 5일 천연기념물 제453호인 한국 토종 남생이의 대단위 인공 증식에 처음으로 성공했다고 밝혔다.
서울대공원은 지난해 11월부터 지난달까지 9개월 간 ‘남생이 증식 및 복원 프로젝트’ 전담팀을 가동했다. 전담팀은 남생이 알 총 82개를 인큐베이터에서 배양한 지 63일째인 지난달 2일 이 가운데 14마리를 부화시켰다고 밝혔다.
남생이 인큐베이터는 섭씨 27~29도로 부화에 알맞은 온도가 조성됐고 습도 유지를 위해 알 위에는 이끼를 덮었다.
서울대공원은 남생이의 근친 번식을 방지하기 위해 개체별 일련번호와 전파발신기를 달아 저수지에 방사하는 등 개체 관리를 엄격히 하기로 했다. 또 남생이를 다량 증식해 지방의 동물원과 대학, 연구소 등에 분양하고 환경부, 문화재청, 자치단체 등과 협의해 남생이 서식지 복원사업도 추진할 계획이다.
이번에 인공부화 성공하기 전까지 서울대공원이 보유하고 있던 남생이는 수컷 5마리, 암컷 16마리 등 모두 21마리에 불과했다. 지난 3월 천연기념물 제453호로 지정된 남생이는 개발 여파로 모래·자갈 등이 파헤쳐지면서 산란장소가 파괴되고, 한약재로 남획되면서 멸종 위기에 처했다. 그 결과 토종 남생이가 자취를 감추고 미국산 붉은귀 거북이 무분별한 방생 등으로 생태계를 주도하는 결과를 빚었다.
이호을 기자 helee@hani.co.kr /한겨레 2005-09-05 오후 08:09:23
http://www.hani.co.kr/arti/society/area/62171.html
- 2010 벤쿠버 동계올림칙 빙상 세계제패
2004 - 김연아, 국내 피겨 스케이팅사상 100년 만에 국제대회 첫 우승
2004년 9월 5일 김연아(14)가 국내 피겨 사상 처음으로 공식 국제대회에서 우승했다. 경기도 군포시 도장중학교에 재학 중인 김연아는 이날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끝난 국제빙상연맹(ISU) 2차 주니어 그랑프리 피겨대회에서 합계 148.55점으로 일본의 사와다 아키(136.16점)를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1908년에 스케이팅이 국내에 도입된 이래 피겨 종목에서 국제대회 우승을 차지한 것은 성인과 주니어대회를 통틀어 김연아가 처음이었다. 2002년 ISU 비공식 국제대회인 트리글라브 노비스에서 우승한 김연아는 지난해 최연소로 태극마크를 단 뒤 국내 시니어 대회에서 국가대표 선배들을 제치고 우승하는 등 가파른 성장세를 보여왔다. /조선
- 무궁화위성 발사성공 기념, 1996.3.18 1999 - 방송 통신위성 '무궁화3호' 기아나에서 성공적으로 발사
우리나라 세 번째 통신-방송용 종합위성인 '무궁화3호'가 1999년 9월 5일 남미 프랑스령 기아나의 쿠루발사기지에서 유럽연합 아리안스페이스사의 '아리안 IV' 로켓에 실려 성공적으로 발사됐다.
무게 2,800kg, 길이 19.2m인 무궁화3호 위성은 위성방송시대에 대비, 통신용 중계기의 출력을 기존 14W에서 45KW로 대폭 높여 방송용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한 점과 통신용 중계기의 절반을 방송용으로 돌릴 경우 168개의 위성방송 채널 공급이 가능토록 한 대용량 위성이다.
통신용 중계기 24개, 초고속 통신용 중계기 3개, 방송중계기 6개 등 33개 중계기를 탑재하고 있다. 위성체는 미국 록히드 마틴사가, 발사체(로켓)는 프랑스 아리안스페이스사가 각각 제작을 맡았다. 총 투자비는 1호위성의 2.6배인 2,600억원이 소요됐으며 현대전자, 한라중공업, 대우중공업, 대한항공, 두원중공업 등 국내 5개사가 제작에 공동참여, 국내 우주항공기술을 한단계 높이는 계기가 됐다.
무궁화위성은 9월 9일 적도 상공 3만6천km 궤도에 진입한 후 9월 11일에는 태양전지판을 성공적으로 전개, 35일간의 성능시험을 마친 끝에 목표궤도인 지구정지궤도 동경 116도에 안착했다. 2000년 1월 1일에는 한반도에 머물던 위성 중계지역을 호주, 몽고, 중동 지역 등 아시아 지역으로 확대했으며, 국내 방송3사가 해외에서 주관하는 밀레니엄 해돋이 장면을 생중계하는 데 처음으로 이용됐다. /조선
1997 - '사랑의 선교회' 수녀 테레사(Mother Teresa) 선종
테레사 [Teresa of Calcutta, 1910.8.26~1997.9.5]
`사랑의 선교회`를 설립,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한 자선 활동에 평생을 바친 테레사 수녀가 1997년 9월 5일 밤 인도 캘커타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87세였다.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테레사 수녀의 사망 소식을 듣고 "매우 슬프다"고 애도했으며 인도방송은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테레사 수녀 추모방송을 계속했다. 1910년 구 유고 연방 마케도니아에서 태어난 테레사는 18세 때 가톨릭에 귀의해 주로 인도 캘커타에서 가난한 자들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1950년 그녀가 가난한 자들을 위해 캘커타에 설립한 `사랑의 선교회`는 1백26개국에서 4천4백여명의 수녀와 수사, 수천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일하는 전세계적인 조직으로 성장했다.장례식은 9월 13일 캘커타에서 인도국장으로 엄숙히 거행됐으며 1백50만명의 추모객들이 길에 꽃을 뿌리며 그녀와 작별을 고했다. 장례미사에는 구즈랄 인도 총리, 힐러리 클린턴 미국 대통령 부인을 비롯 20개국 조문 사절 등 모두 1만2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 유해는 그녀가 평생을 몸바친 `사랑의 선교회` 1층 방 한 귀퉁이에 안장됐다. /조선
1995 - 새정치국민회의 창당
새정치국민회의는 1990년대 후반에 존재하였던 대한민국의 정당이다. 1995년 9월 5일, 김대중을 총재로 하여 창당. 약칭은 국민회의.
14대 대선에서 낙선하고 정계를 은퇴하였던 김대중이 1995년 6월 27일 실시된 제1회 지방선거를 앞두고 민주당 후보 경선에 깊이 관여하는 것은 물론 민주당 후보 지원 유세에 나선 결과, 민주당은 서울특별시장을 비롯한 광역자치단체장 4명, 기초단체장 352명, 광역의회 의원 857명을 당선시키는 압승을 거둘 수 있었다.
이에 힘을 얻은 김대중이 그 해 7월 17일에 정계 복귀와 신당 창당을 공식 선언하자, 당시 민주당 소속 의원 95명 중 65명이 민주당을 탈당하고 신당에 참여하면서 국민회의는 창당과 함께 제1야당이 되었다.
1996년의 15대 총선에서는 야당 분열의 결과로 정대철, 이종찬, 김덕규 등의 중진 국회의원들이 대거 낙선하는 등 참패하여 299석 중 79석을 차지하는 데 그쳤으나, 1997년 12월 18일의 16대 대선에서 자유민주연합과의 공조를 통하여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당선시켰다.
16대 총선을 3개월 앞둔 2000년 1월 20일, 새천년민주당이 창당되면서 해소되었다.
* 1995년 9월 11일 등록. /위키백과
1990 - 제1차 남북고위급회담 서울에서 개최
남북총리를 단장으로 하는 제1차 남북고위급회담이 1990년 9월 5일 서울에서 개최됐다. 회담은 1988년 11월16일 북한의 연형묵 총리가 미군철수와 대규모 군사훈련 중지 등을 의제로한 남북정치군사회담을 제안하자 12월 28일 한국의 강영훈 총리가 군사문제를 포함한 남북관계개선에 관한 문제를 포괄적으로 다룰 남북총리회담을 다시 제안했다. 북한의 연형묵 총리가 남한의 제안에 동의해 1989년 2월 8일 첫 예비회담이 개최됐다.
수차례에 걸친 예비회담이 난항을 거듭하다 1990년 7월 남북고위급회담 예비회담 실무회의에서 회담에 대한 의제와 시기 장소 등이 합의돼 마침내 남북총리를 단장으로 하는 제1차 남북고위급회담이 이날 서울에서 개최됐다. /조선
1990 - 피겨스케이팅 선수 김연아(金姸兒) 출생
김연아 [金姸兒, 1990.9.5~ ]
김연아(金姸兒, 1990년9월 5일 ~ )는 대한민국의 피겨 스케이팅 선수이다.
2010년 동계 올림픽여자 싱글 챔피언, 2009년 세계 선수권 챔피언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올림픽 피겨 스케이팅 메달리스트, 세계 선수권 메달리스트이기도 하다. 또한, 2009년 4대륙 피겨 스케이팅 선수권 대회 우승, ISU 그랑프리 파이널 3회 우승을 비롯해, 참가한 모든 국제 대회에서 입상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2009년 세계 선수권에서 총점 207.71을 기록해 여자 싱글 최초로 200점을 돌파하였다. 2010년 밴쿠버 동계 올림픽에서는 쇼트 프로그램 78.50점, 프리 스케이팅 150.06점, 총점 228.56점으로 세계 최고 기록을 경신하였다.
프로필 /위키백과
- 조훈현 9단과 유창혁 4단의 '천지대국' (공중전화카드)
1989 - 조훈현, 제1회 응창기배 세계프로바둑대회 우승
조훈현 9단이 마침내 통쾌한 불계승을 거두고 세계정상에 우뚝섰다. 1989년 9월 5일 세계 프로바둑대회중에서 가장 상금이 많은 제1회 응창기배 결승전 최종 제5국에서 조9단은 난적 중국의 섭위평 9단에게 1백45수만에 불계승을 거두고 종합전적 3승2패로 감격의 우승을 차지했다.
결승전은 싱가포르의 웨스틴 스탠포드 호텔에서 열렸다. 이로써 조9단은 우승상금 40만달러를 받았으며 섭9단은 준우승 상금 10만달러를 확보했다.
응창기배 세계프로바둑대회는 대만의 실업가 응창기씨가 1988년에 5백만달러를 들여 창설한 세계최고의 프로바둑기전이다. 올림픽처럼 매 4년마다 열린다. 1988년 8월 북경에서 세계 16강이 참가한 가운데 1차 2차전이 벌어졌으며 그해 11월 서울에서 준결승전이 벌어졌다. 결승전은 5번기로 치러졌는데 1차전부터 3차전까지는 1989년 4월부터 5월초에 중국 항주와 영파에서 열렸다. /조선
1985 - 북한 특사 허담, 전두환 대통령 면담
[정상회담 막후의 밀사들 /김연철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
1980년대 들어 안기부장 특별보좌관이던 박철언과 유엔대사였던 한시해가 비밀접촉을 재개했다. 안기부는 이 접촉 라인을 ‘88라인’으로 불렀다. 몇 번의 접촉 이후, 북한의 허담(노동당 중앙위원회 비서국 비서)이 서울을 방문했다. 1985년 9월5일 오전 11시 전두환 대통령은 경기도 기흥에 있는 최원석 동아그룹 회장의 별장에서 허담 일행을 맞이했다. 당시 남북 양쪽은 정상회담 개최에 원칙적인 합의를 했고, 밀사 접촉을 통해 정상회담에 포함될 의제들을 협의하는 단계였다.
점심식사를 하면서 대화는 계속됐다. 대화가 끝날 때쯤 전두환 대통령이 “평양에도 골프장 있어요?”라고 묻자, 허담은 “골프장이 하나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전두환은 다시 말했다. “미국에서는 테니스 치는 것보다 골프 치는 것이 더 싸대요.”
이어서 1985년 10월16일 장세동, 박철언, 강재섭(당시 안기부 연구실장) 등이 개성역에서 특별 열차를 타고 평양을 방문했다. 다음날 오전 장세동과 박철언은 김일성을 만나러 갔고, 강재섭 등 다른 수행원들은 숙소에 남아 <조선의 별>이라는 영화를 관람했다. 장세동은 1984년 북한이 수해물자를 보낸 것에 대해 감사를 표했다. 김일성 주석은 “받은 것이 더 용감하지요”라고 호응했다. 1950년대부터 북한은 인도적 지원을 여러 차례 제안한 바 있다. 당시는 ‘제안 경쟁 시대’였다. 그러나 전두환 대통령은 예상을 깨고 북한의 제안을 진짜로 받았다. 그래서 최초의 이산가족 고향방문단 교류가 이뤄졌고, 최초의 경제회담이 시작됐다.
/한겨레21 2008년05월01일 제708호
http://www.hani.co.kr/section-021170000/2008/05/021170000200805010708012.html
- Pres. Sadat's Signature, Peace Doves (1979.3.31)1978 - 이집트와 이스라엘간의 캠프데이비드회담 시작
미국의 카터 대통령의 제창으로 중동평화실현을 위한 미국, 이집트, 이스라엘의 3개국 정상회담이 1978년 9월 5일 미국 대통령 산장인 캠프데이비드에서 역사적인 막을 열었다.
이집트에서는 사다트 대통령이, 이스라엘에서는 베긴 수상이 회담에 임했다. 9월17일까지 13일간 열린 정상회담 결과 1.평화조약 체결협상 착수 2.요르단강 서안-가자지구 팔레스타인 자치권협상에 합의하는 협상에 조인, 양국의 단독평화협상은 급진전했다.
캠프데이비드협정은 이집트-이스라엘관계의 초석이 됐으며 아랍국으로부터 대이집트제재 등 강력한 반발을 가져왔다. /조선
1977 - 미국, 무인우주탐사선 보이저 1호 발사
[어제의 오늘]1977년 미국, 무인우주탐사선 보이저 1호 발사
ㆍ최초로 완벽한 태양계 모습 촬영
인간이 만든 물체 중 지구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이 물체는 향후 4년 안에 태양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정도로 빠르게 우주로 나아가고 있다.1977년 9월5일 미 항공우주국(NASA)이 미국 케이프커내버럴 우주기지에서 발사한 무인 우주탐사선 ‘보이저(Voyager) 1호’는 현재 태양권의 경계면을 지나고 있다. 보이저 1호는 지난 34년간 시속 6만1155㎞의 속도로 175억㎞ 이상을 날아갔다. 현재 보이저 1호가 있는 곳에서는 태양이 희미한 한 점의 빛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보이저 1호가 보내온 사진 등을 분석한 결과 그곳은 무풍지대인 것으로 확인됐다. 당초 과학자들은 태양권의 경계 지대가 태양풍(태양이 방출하는 입자의 흐름)과 성간풍(별과 별 사이 우주공간에서 생기는 입자의 흐름)이 만나 마치 폭풍이 부는 것처럼 극한 환경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보이저 1호는 원래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을 탐사하기 위해 발사됐다. 그런데 발사된 지 2년 만에 목성을 통과했고, 3년 만인 1980년 토성을 지나며 수많은 사진과 영상을 전송했다. 보이저 1호는 이미 임무를 완수하고 나서도 우주를 향해 계속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태양권을 벗어난 뒤 어느 천체의 중력권에 붙잡힐 때까지 관성에 의해 어둡고 차가운 우주로 계속 나아가며 그 모습을 지구로 전송할 것으로 전망된다. 연료인 플루토늄-238은 2020년쯤까지 쓸 수 있다. 보이저 1호는 1980년 최초로 완벽한 태양계의 모습을 촬영했다. 이 밖에 목성에도 고리가 있다는 것, 토성의 고리가 1000개 이상의 가느다란 선으로 이뤄졌다는 것, 목성의 위성인 ‘유로파’가 얼어붙은 바다로 덮여 있다는 사실 등을 알아냈다.보이저 1호에는 인간이 탑승하지 않은 대신 인류의 각종 문명이 보관돼 있다. 탐사선에는 지구 사진 118장과 90분 분량의 세계 최고의 음악, 개 짖는 소리, 고래의 음성, 새턴 5호 우주선의 발사 소리 등 온갖 지구의 소리, 55개국의 인사말, 사랑에 빠진 젊은 여성의 뇌파, 유엔 사무총장의 인사 등이 녹음된 축음기판이 실려 있다. 천체 물리학자 칼 세이건 연구팀이 수집한 것이라고 한다. 보이저 1호는 외계인에게 지구를 알릴 최초의 메신저가 되지 않을까. 우주에 고도의 지능을 가진 생명체가 존재한다면 말이다.목정민 기자 loveeach@kyunghyang.com /경향신문 2011-09-04 21:22:04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9042122045&code=100100
1973 - 평양 지하철 개통
[책갈피 속의 오늘]1973년 평양지하철 개통
한반도에서 최초로 지하철이 개통된 도시는 어디일까. 서울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된 것은 1974년 8월 15일. 북한의 평양 지하철은 약 1년 앞선 1973년 9월 5일에 첫 운행을 시작했다.
평양 지하철(총연장 34km)은 남북으로 놓인 천리마선(12km)과 동서로 놓인 혁신선(20km), 천리마선의 연장인 만경대선(2km)으로 이뤄져 있다. 모두 17개 역의 이름은 지리적인 위치와는 관계없다. ‘붉은별역’ ‘건국역’ ‘전승역’ 등 북한의 정치 구호를 주제로 한 이름이 많다.
외국인들의 관광코스에서 빠지지 않는 북한의 지하철 역사 내부는 화려하기 그지없다. 샹들리에와 대리석으로 꾸며져 있고, 벽면에는 혁명을 상징하는 벽화와 조각으로 장식돼 ‘지하 궁전’이나 ‘지하 평양’이라고 불릴 정도다. 방문객은 가장 화려하게 꾸며진 부흥역과 영광역 사이의 구간을 타도록 안내받는다. 물론 잘 차려 입은 북한 시민들이 지하철에 동승한다.
그러나 이 구간 외에 평양 지하철이 실제로 운행되느냐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이도 많다. 대부분의 노선이 베일에 싸여 있어서다.
평양 지하철은 100∼120m의 지하로만 달린다. 이 때문에 지하의 역까지 가려면 수백 m에 이르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야 한다. 평양 지하철이 도심 지하의 군사용 시설과 연계돼 ‘초대형 벙커’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승강장 입구는 60∼80t의 두꺼운 아연 재질의 문이 설치돼 핵폭탄 공격에도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됐다.
전력난을 겪는 북한의 실정에 엄청난 길이의 에스컬레이터를 가동하기란 쉽지 않다. 평양 지하철은 현재 통근용으로 평일 아침과 저녁 ‘첨두시간’(러시아워)에만 운행을 하고 있다고 한다. 절전을 위해 역내에 조명을 희미하게 켜놓거나 아예 꺼놓은 곳도 있으며, 정전으로 터널 속 열차 멈춤 사고도 빈번하다는 보고도 많다.
지하철 개통으로만 따져 보면 1970년대 초반까지 서울과 평양은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30년이 흐른 오늘날, 평양 지하철에 비해 서울 지하철(265개 역·총연장 286.9km·수송 인원 연간 22억 명)의 발전은 그야말로 ‘상전벽해(桑田碧海)’에 가깝다.
전승훈 기자 /동아일보 2006.09.05
http://www.dongailbo.com/fbin/moeum?n=dstory$c_134&a=v&l=0&id=200609050143
1972 - 뮌헨올림픽 이스라엘 선수단 테러
[어제의 오늘]1972년 뮌헨올림픽 이스라엘 선수단 테러
ㆍ구출작전 실패로 인질 모두 사망
1972년 9월5일은 세계 평화와 화합을 위한 축전인 올림픽에서 사상 최악의 테러사건이 발생한 날이다. 더욱이 이 사건은 비극적 결말을 맞으면서 세계를 경악시켰다.
뮌헨올림픽이 중반을 넘긴 이날 새벽 팔레스타인의 극좌단체인 ‘검은 9월단’ 소속의 테러리스트들이 이스라엘 선수촌을 습격했다. 이들은 현장에서 2명의 선수를 살해하고 9명을 인질로 잡는 데 성공했다. 이스라엘이 억류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수감자 200명과 독일·일본의 적군파 요원들을 석방하고 안전한 탈출을 보장하라는 요구 조건이 나왔다.이 사건은 국제 정세가 매우 복잡하게 전개되던 시기에 발생했다. 아랍과 이스라엘은 3차 중동전쟁을 치른 직후였고 미국과 소련의 냉전 갈등은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테러범들은 4시간 안에 요구조건이 관철되지 않으면 30분에 1명씩 인질을 살해하겠다고 위협했다. 서독 정부는 이 요구조건을 놓고 이스라엘 정부와 협의를 시작했다. 그러나 골다 메이어 이스라엘 총리는 테러리스트들의 요구를 한 가지도 들어줄 수 없다고 거부했다.테러범들은 결국 서독 정부와 협상을 벌여 이집트로 탈출하기로 했다. 서독 정부는 이집트행 항공기를 공군기지에 대기시켜놓고 선수촌에 헬기를 보냈다. 서독 정부는 테러범들이 선수촌에서 헬기에 탑승할 때 제압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여의치 않을 경우 여객기 안과 공항 주변에 저격수를 배치하고 인질을 구출한다는 2단계 전략도 짜두었다.테러범들이 숙소 지하주차장에서 차량을 이용해 헬기로 이동하는 바람에 1단계 계획은 실패했다. 헬기가 공군기지에 도착하자 테러범 2명이 여객기를 확인하기 위해 헬기에서 내려 여객기로 접근했다. 이들은 비행기에 조종사가 없는 것을 알고 작전이 시작됐음을 직감했다. 황급히 헬기로 돌아가는 이들에게 저격수들이 총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탈출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 테러범들은 인질들이 타고 있는 헬기에 수류탄을 투척했다. 순식간에 인질 9명이 모두 죽고 테러범 5명이 사살됐다. 3명은 생포했지만 작전은 완전 실패였다. 이스라엘은 즉각 보복에 착수했다. 이스라엘의 대응 수단 역시 테러였다. 시리아·레바논의 팔레스타인 캠프를 폭격하고 특수부대를 동원해 테러에 관련된 ‘검은 9월단’ 관련자들은 끝까지 추적해 세계 곳곳에서 이들을 살해했다.팔레스타인의 테러와 이스라엘의 보복테러는 이스라엘 건국 이후 이들이 치러왔던 전쟁의 한 과정이었다. 세계는 이 사건에 대해 중동문제에 대한 근원적 고찰 없이 ‘어쨌든 테러는 용인할 수 없다’는 편리한 양비론을 폈다. 이 사건이 미국의 유대계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에 의해 <뮌헨>이라는 영화로 만들어졌을 때도 개인적 비극에 초점을 맞추면서 ‘테러는 보복 테러를 부르고 모두가 불행해진다’는 ‘영리한’ 메시지를 담는 데 그쳤다.
유신모기자 simon@kyunghyang.com /경향신문 2009-09-04 18:02:46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0909041802465&code=100100&s_code=ap005
1969 - 미국의 가수 조시 화이트(White, Josh) 사망
화이트 [White, Joshua Daniel 'Josh', 1914.2.11~1969.9.5]
Joshua Daniel White (February 11, 1914–-September 5, 1969), best known as Josh White, was a legendary American singer, guitarist, songwriter, actor, and civil rights activist. In the early 1930s, he also recorded under the names "Pinewood Tom" and "Tippy Barton."
White grew up in the Jim Crow South. He later became a 1920s and 1930s star of race records, with a prolific output of recordings in genres including Piedmont blues, country blues, gospel, and social protest songs. He was billed in concert as "The Sensation of the South". In 1931, White moved to New York and within a decade his fame had spread widely, and his repertoire expanded to include urban blues, jazz, Tin Pan Alley, cabaret, folk songs from around the world, and hard-hitting political protest songs. He soon was in demand as an actor on radio, Broadway, and film. However, his pioneering guitar playing never altered or diminished, while some would even argue it broadened with the expansion of his musical repertoire.
White also would become the closest African-American friend and confidant to the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Franklin D. Roosevelt. Ironically, however, White's anti-segregationist and international human rights political stance presented in many of his recordings and in his speeches at rallies resulted in the right-wing McCarthyites incorrectly assuming that he must have been a Communist. Accordingly, from 1947 through the mid 1960s, White was caught in the vise grip of the anti-Communist Red Scare, and combined with his resulting attempt to clear his name, his career was harmed immeasurably. However, regardless of the purists' debate over the artistic change in his presentation or from those who opposed his politics, White unarguably inspired several generations of guitarists with his new and unique stylings and techniques, and is cited as a major musical and social influence by dozens of future stars, including Blind Boy Fuller, Brownie McGhee, Pete Seeger, Lena Horne, Nat King Cole, Harry Belafonte, Lonnie Donegan, Eartha Kitt, Alexis Korner, Odetta, Ray Charles, Elvis Presley, the Kingston Trio, the Clancy Brothers and Tommy Makem, Merle Travis, Dave Van Ronk, Peter, Paul and Mary, Bob Dylan, Eric Weissberg, Judy Collins, Mike Bloomfield, Danny Kalb, Roger McGuinn, David Crosby, Richie Havens, Don McLean, Roy Harper, Ry Cooder, John Fogerty, and Eva Cassidy.
http://en.wikipedia.org/wiki/Josh_White
1946 - 영국의 록 가수 프레디 머큐리(Mercury, Freddie) 출생
머큐리[Mercury, Freddie, 1946.9.5~1991.11.24]
프레디 머큐리(Freddie Mercury, 1946년9월 5일~1991년11월 24일)는 영국의 대중 음악 가수이다. 퀸의 작곡자이자 보컬리스트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4옥타브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음역대의 소유자이며 곡에 따라 자유자재로 느낌을 달리 부르는 다재다능한 가창법, 그리고 훌륭한 명곡들을 만들어낸 작곡 실력으로 퀸을 대중음악 역사상 최고의 락밴드 중 하나로 만들었다.
경력사항 /위키백과
- Liberation of Belgium, 50th Anniv., 1994, Sept. 5
1944 - 영국군, 브뤼셀 탈환제2차 세계대전과 함께 4년 반 동안 독일군의 수중에 들어가 있던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1944년 오늘 영국군이 이 도시를 탈환하고 장갑차와 탱크를 타고 시가지로 입성한다.
독일 나치스군의 점령 하에서 숨어 지내던 브뤼셀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손을 흔들며 열렬히 영국군을 환호한다.연합군은 석 달 전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유럽탈환의 발판을 마련한 데 이어 이제 벨기에 등 서유럽을 나치스의 손아귀에서 풀어줄 수 있게 됐다. /YTN
- Soyuz 9, A. Nikolayev, V. Sevastyanov
- Gagarin, Titov, Nikolayev, Popovich
1929 - 소련의 우주비행사 안드리안 니콜라예프(Nikolayev, Andriyan) 출생
니콜라예프 [Nikolayev, Andriyan Grigoryevich, 1929.9.5~2004.7.3]
소련의 우주비행사.
1962년 8월 11일 발사된 보스토크 3호 우주선을 조종했다. 포포비치가 조종한 보스토크 4호가 다음날 발사되어 최초로 2대의 유인(有人) 우주선이 우주공간에 머물렀다. 2대의 우주선은 무선통신을 하고 서로 볼 수도 있었으나, 도킹은 시도하지 않았다. 두 우주선은 모두 8월 15일 착륙했다. 집단농장 노동자의 아들인 그는 임업을 전공해 그 일에 종사하다가, 1950년 소련군대에 징병되었다. 비행에 대한 초기의 관심이 계속되어 곧 공군으로 옮겨 1954년에 조종사가 되었다. 그는 1957년 공산당에 입당했고, 1960년 3월 우주비행사 훈련을 시작해 1964년부터 소련 우주비행사 파견대 부대장이 되었다. 1963년 11월 3일 그는, 1963년 6월 우주를 여행한 최초의 여성 우주비행사 테레슈코바와 결혼했는데 자녀 1명을 두고 곧 이혼했다. 1970년 6월 1일 그는 세바스티야노프와 함께 소유스 9호를 타고 궤도에서 거의 18일을 보내 우주에서 가장 오래 머무는 기록을 세웠다. 이 비행은 6월 19일에 끝났으며, 그 임무는 주로 장기간의 우주비행에서 발생하는 영향을 관찰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브리태니커
1906 - 오스트리아의 이론물리학자 루트비히 볼츠만(Boltzmann, Ludwig) 자살
볼츠만 [Boltzmann, Ludwig (Eduard), 1844.2.20~1906.9.5]
루트비히 에두아르트 볼츠만(Ludwig Eduard Boltzmann, 1844년 2월 20일 - 1906년 9월 5일)은 통계역학과 통계열역학으로 유명한 오스트리아 출신의 물리학자이다. 그는 과학적 모델에 대해 대단히 논쟁이 심할 시기에 원자론을 주창한 가장 중요한 사람 중에 한 명이다.
생애-말년
볼츠만은 빈 대학의 여러 동료들과 친해지지 못했는데, 특히 당시 빈 대학의 철학 교수이자 과학사 교수였던 에른스트 마흐와 원자론을 둘러싸고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래서 곧 빌헬름 오스트발트의 초청으로 1900년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이직했다. 마흐의 퇴임 이후에 볼츠만은 1902년에 다시 빈으로 돌아갔다. 거기에 칼 프르지브람(Karl Przibram), 파울 에렌페스트(Paul Ehrenfest), 리제 마이트너(Lise Meitner)같은 학생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빈에서 볼츠만은 물리학 뿐만아니라 철학도 가르쳤다. 볼츠만의 자연철학에 관한 강의는 매우 인기가 많아서 그 시대에 상당한 관심을 받았다. 그의 첫번째 강의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가장 큰 강의실도 모자라서 사람들은 계단사이에 서서 강의를 들었다고 한다. 볼츠만의 철학 강의 때문에 황제들이 궁전으로 초대하기도 하였다. 그가 가르친 학생 중에는 린츠의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도 있었다.
1906년 9월 5일, 볼츠만은 이탈리아 트리에스테 근방의 두이노에서 여름 휴가를 보내던 중 스스로 목을 매 자살하였다. 자살 당시 그의 부인과 딸은 밖에서 수영을 즐기고 있었다. 우울증이 원인이었다고 추측되지만, 명확한 자살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위키백과
1881 - 오스트리아의 정치가 오토 바우어(Bauer, Otto) 출생
바우어 [Bauer, Otto, 1881.9.5~1938.7.4]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의 이론가·정치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민족문제를 단일민족국가 창설로 해결하자고 제안했고,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는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통일을 앞장서서 옹호했다(→ 독일 오스트리아 병합). 사회주의 교육운동인 '미래'의 창시자로서 여러 정기간행물에 글을 기고하던 바우어는 1904년 사회민주당 의회파의 서기가 되었다. 그의 이론적 재능은 〈민족문제와 사회민주주의 Die Nationalitätenfrage und die Sozialdemokratie〉(1907)가 출판되면서 발휘되었다. 이 책에서 그는 민족간의 갈등을 계급투쟁으로 간주하고,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도나우 강 지역에서 실제로 벌어진 상황을 미리 예측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군인으로 참전하여 러시아군에 포로로 잡혀 있던 바우어는 1917년 고국으로 돌아오자 사회민주당 좌파의 지도자가 되었고, 전쟁이 끝난 뒤 오스트리아 외무장관이 되었다. 1919년 3월 2일 그는 독일과 비밀 '통일' 협정을 맺었으나 후에 연합국은 이 협정을 거부했다. 그는 〈오스트리아 혁명 Die österreichische Revolution〉(1923)에서 이 시기를 다루고 있다. 1919년 7월 사임했지만, 그후 20년 동안 사회민주당을 이끄는 지도자로 남아 있었다. 1929~34년 오스트리아 국가 평의회 위원이었던 그는 1934년 빈에서 일어난 사회주의 반란이 실패하자 체코슬로바키아로 망명했다가 다시 프랑스로 망명했다. /브리태니커
- Chief Crazy Horse (Phone Card)
1877 - 인디언 수족 추장 크레이지 호스(Crazy Horse) 사망
크레이지 호스 [Crazy Horse /TaSunko-Witko, c1840~1877.9.5]
인디언 이름은 TaSunko-Witko.
오글라라 부족의 수족 인디언 추장.
수족이 백인의 대평원 북부 침략에 대항해 싸울 때 가장 뛰어난 전략가이자 결연한 전사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1865년 젊은 나이에 이미 몬태나에서 금광지로 향하는 길을 건설하려는 미국의 계획에 저항하는 부족민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윌리엄 J. 페터먼 대위와 그의 부하 80명을 학살했으며(1866. 12. 21), 4륜마차 전투(1867. 8. 2)에 참여했다(모두 와이오밍 준주에 있는 포트필커니 근처에서 일어났음). 또한 제2차 포트래러미 조약(1868)의 인디언 보호구역에 관한 조항을 받아들이기를 거절하고, 출입이 금지된 들소떼 지역으로 부하들을 데리고 가서 사냥과 낚시를 하는 한편, 적대 부족과 백인에 대항한 싸움을 계속했다.
1874년 다코타 준주의 블랙힐스에서 금이 발견되자 금을 찾는 사람들이 조약에 인정된 수족의 권리를 무시하고, 이 광활한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몰려들었다. 그러자 조지 크룩 준장은 크레이지 호스 일행을 몬태나 준주의 텅 강변과 파우더 강변에 있던 그들의 겨울 거주지에서 내쫓으려 했으나 그는 오히려 언덕 깊숙이 숨어버렸다. 그리고 그는 샤이엔족에 가담해 몬태나 남부에 있는 로즈버드 계곡에서 크룩 장군을 기습공격했다(1876. 6. 17). 공격을 받은 크룩군은 철수했다. 그뒤 그는 북으로 가서 리틀빅혼 강가에 있는 시팅불 추장의 수족 본진지에 들어갔다. 여기서 조지 A. 커스터 중령이 지휘하는 미군 대대를 섬멸한 전투에 참여하고(1876. 6. 25), 부하들과 함께 다시 진지로 돌아와 이전의 생활을 계속했다. 그는 계속해서 넬슨 A. 마일스 대령의 추적을 받았는데, 마일스는 모든 인디언들을 인디언 보호기관에 강제 수용하기 위해 군대를 강화해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의 부족은 추위와 굶주림 때문에 쇠약해졌다. 마침내 그는 1877년 5월 6일 네브레스카 레드클라우드 인디언 보호소에서 그의 오랜 적인 크룩 장군에게 항복했다. 포트로빈슨에 감금된 지 몇 개월 뒤에 죽었는데 아마도 도망치려다가 살해된 듯하다. 마리 상도가 쓴 권위있는 전기 〈크레이지 호스:오글라라족의 이상한 남자 Crazy Horse:The Strange Man of the Oglalas〉(1955)가 있다. /브리태니커
1857 - 프랑스의 철학자, 사회학자 오귀스트 콩트(Comte, Auguste) 사망
콩트 [Comte, Isidore-Auguste-Marie-François-Xavier, 1798.1.19~1857.9.5]
프랑스의 철학자 ·사회학의 창시자.
남프랑스 몽펠리에 출생. 파리의 에콜 폴리테크니크 재학 중 교수 배척운동에 가담하여 퇴학당하였다. 그 후 수학 ·물리 ·화학 ·생물 ·정치 ·도덕 등에 관심을 두고 공부하였으며, 생시몽을 알게 되어 그의 잡지 편집을 도우면서 그에게서 사상적인 영향을 받았다. 콩트는 여러 사회적 ·역사적 문제에 관하여, 온갖 추상적 사변(思辨)을 배제하고, 과학적 ·수학적 방법에 의하여 설명하려고 하였다. “절대적인 격률(格率:maxim)은 하나밖에 없다. 이것은 절대적인 것이라곤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라는 그의 말은,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학설의 의(擬)=절대성을 배격하고, 감각적 경험에 의하여 확증할 수 있는 여러 사실과 이것들의 관계에만 전념한다는 과학적이며 실증적인 상대주의(相對主義)의 입장을 표명하는 것이다.
또한 그의 유명한 3단계 법칙에서는, 인간의 지식의 발전단계를 신학적 ·형이상학적 ·실증적인 3가지로 구분하고, 최후의 실증적 단계가 참다운 과학적 지식의 단계라고 주장하였다. 나아가 실증과학의 체계는 대상의 복잡성에 따라 차례로 수학 ·천문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사회학(질서에 대응하는 社會靜學과 진보에 대응하는 社會動學으로 구분된다)으로 성립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만년에 클로틸드 드 보 부인과 사귀게 되어, 그녀를 환상적인 애정으로 사랑하였으나, 2년 후 그녀가 죽고, 또 실직하자 친구들의 도움으로 생활하였다. 그의 까다로운 성품 때문에 친구들이 이반(離反)하는 등, 당시의 상황도 원인이 되어 마침내 신비주의에 빠져 인간성을 숭배하는 인류교(그 자신이 대주교이며, 보 부인은 성녀)를 주창하게 되었다. 즉, 전기의 객관적 과학주의는 주관적 ·종교적 상징주의로 변모하였는데, 이 모순적인 변모 속에 인간 콩트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저서로는 《실증철학 강의 Cours de philosophie positive》(6권, 1830∼1842)와 《실증정치학 체계 Systeme de politique positive, ou traite de sociologie, instituant la religion de l’humanite》(4권, 1851∼1854) 등이 있다. /네이버
- Independence Hall1774 - 최초의 대륙회의,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비밀리에 소집
대륙회의(Continental Conference)는 미국 독립혁명 시기에 아메리카 13식민지(독립 이후 각주)의 통일적 행동을 군사 ·외교 ·재정에 걸쳐 지도한 기관으로, 대륙이라는 말은 각 지방 의회와 구별하기 위해 편의상 사용한 말이다.
1774년 영국의회가 제정한 ‘참을 수 없는 법’에 대항하기 위해 버지니아 식민지 의회의 요청에 따라 9월 5일 제1차 회의를 필라델피아에서 열고, 대표 55명은 영본국(英本國:영국)의 압제로부터 식민지의 권리와 자유를 수호할 것과 영본국과의 통상단절을 결의한 뒤 10월 26일에 해산하였는데, 제1차 회의에서는 독립을 목적으로 하지는 않았다.
제2차 회의는 1775년 5월 10일부터 개최되었는데, 이미 시작된 영본국과의 무력충돌에 대처하는 지도기관으로서 군대조직 ·통화발행 등을 결의하고 G.워싱턴(1732∼99)을 식민지 총사령관에 임명하였으며, ‘평화의 청원’을 영본국에 보냈다.
그러나 본국의 태도가 강경하였으므로, 급진파 사이에 독립을 강력히 주장하여 76년 7월 2일 독립선언을 채택, 7월 4일 공포하였다. 1777년 11월 미합중국 초기헌법이라 할 수 있는 연합규약(聯合規約)을 기초하였으며, 81년 이후 연합의회(聯合議會)로 개칭, 독립전쟁을 지도하여 영본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였다. 1787년 서북(西北) 토지법 등을 제정하였고, 89년 연방헌법 제정으로 신정부가 수립되자 해체되었다.
- 'Cairn in the Snow', 'Man and Woman Looking at Moon'
- 'The Age of Man' - 'Sail Boat'
- 'Self-portrait'
1774 - 독일의 화가 카스파르 프리드리히(Friedrich, Caspar) 출생
프리드리히 [Friedrich, Caspar David, 1774.9.5~1840.5.7]
19세기초 독일의 낭만주의를 개척한 화가.
자연의 힘 앞에 인간의 무력함을 나타내는 거대하고 신비스러운 풍경화를 그렸으며 숭고미를 낭만주의 운동의 주요개념으로 확립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1794~98년 코펜하겐에 있는 아카데미에서 공부했지만 주로 독학했다. 드레스덴에 정착한 뒤 화가인 필리프 오토 룽게 및 작가인 루트비히 티크와 노발리스 등으로 이루어진 미술·문학 서클에 가입했다. 세피아로 그린 세련된 초기 양식의 데생들은 괴테의 칭찬을 받았으며 1805년 바이마르 미술협회에서 주는 상을 받았다. 최초의 중요한 유화인 〈산중의 십자가 The Cross in the Mountains〉(1807경, 드레스덴 회화관)는 압도적인 고립감을 특징으로 하는 그의 성숙한 양식을 뚜렷이 보여주는데, 이것은 종교적인 그림에서 전통적으로 볼 수 있었던 상징적 표현을 자연에서 끌어낸 상징으로 대체하려는 시도였다. 그밖에 〈북극의 난파선 Shipwreck in the Ice〉(1822, 함부르크 미술관) 같은 상징적인 풍경화들은 그의 숙명론과 죽음에 대한 강박관념을 나타내고 있다. 그의 작품들은 자연의 면밀한 관찰에 기초를 두었지만, 채색은 발트 해안과 하르츠 산지에서 그가 느낀 경외스럽고도 불길한 분위기를 반영하며 그의 풍부한 상상력을 거쳐 이루어졌다. 1824년 드레스덴 아카데미의 교수가 되었다. 오랫동안 그의 작품은 잊혀져 있었지만, 20세기에 들어와서 그의 작품에서 독특한 실존주의적 고독이 인식되면서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브리태니커
1733 - 독일의 소설가, 시인 크리스토프 빌란트(Wieland, Christoph) 출생
빌란트 [Wieland, Christoph Martin, 1733.9.5~1813.1.20]
계몽주의 시대에 활약하였던 독일의 소설가 ·시인.
비베라흐 근교 오버홀츠하임 출생. 계몽주의 시대에 활약하였으며, 독일어 문체에 평이하고 우아한 어조를 도입하고, 클로프슈토크가 경시하였던 운율에 올바른 위치를 되찾아 주는 등 독일문학에 많은 공적을 남겼다. 또한 유머나 위트의 요소를 독일문학에 도입하였고, 이국취미(異國趣味)나 역사소설을 개척함으로써 후일 낭만파로 통하는 길을 열었다.
작품 중 유명한 소설은 《아가톤의 이야기》(1766∼1767)이다. 여기서 플라톤의 이상주의에 심취한 주인공이 갖가지 체험을 한 끝에 결국은 이상과 현실의 타협인 일종의 체념에 도달하는 모습을 그렸다. 그밖에 《돈키호테》를 모방한 《로잘바의 돈 실비오》(1764), 금욕주의가 여성의 아름다움에 무릎을 꿇는 운문(韻文) 이야기 《무자리온》(1768), 기지(機智)에 찬 소설 《압데라의 사람들》(1776) 등의 작품이 있다. /네이버
- 'Self-portrait' - 'Self-portrait with Lace Cravat'
- 'Voltaire' - '18 c. Child'
- France, 50 Francs (1991, Banknote)
1704 - 프랑스의 화가 캉탱 드 라투르(La Tour, Quentin de) 출생
라투르 [La Tour, (Maurice-)Quentin de, 1704.9.5~1788.2.17]
Maurice Quentin de Latour라고도 씀.
프랑스의 파스텔 화가.
얼굴의 특징을 날카롭게 포착한 생생한 초상화들로 18세기 프랑스에서 가장 성공한 초상화가이자 가장 많이 모방되는 화가의 한 사람이 되었다.
일찍이 젊은 시절에 파리로 간 라 투르는 플랑드르의 화가 자크 스푀드의 화실에 들어갔다. 그뒤 랭스·캄브레(1724)·잉글랜드(1725경) 등지를 다니다가 1727년경 파리로 되돌아와 그림 수업을 다시 했다.
1737년 150점의 훌륭한 초상화들을 처음으로 전시했다. 이 초상화들은 그후 37년 동안 살롱전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그는 초상화의 모델들에게 매력과 지성을 갖춘 독특한 분위기를 부여했으며 미묘한 얼굴 표정을 포착하는 데 뛰어났다. 그가 그린 인물들 중에는 작가인 장 자크 루소와 볼테르, 그리고 루이 15세와 그의 연인인 퐁파두르 부인 등이 있으며 특히 그 부인의 초상(1756)은 실물 크기로 그렸다. 1746년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으며 1751년에는 미술원의 평의원이 되었다. 1750년 왕의 초상화가가 되었고 1773년 신경쇠약에 걸려 그 직에서 물러났다. 라 투르는 나이 80세에 은퇴하여 생캉탱으로 갔다. /브리태니커
1638 - 프랑스의 왕 루이 14세(Louis XIV) 출생
루이 14세 [Louis XIV, 1638.9.5~1715.9.1]
루이 14세는 1643~1715년 재위한 프랑스의 왕이다. 루이 대왕(Louis le Grand Monarque), 또는 태양왕(Le Roi Soleil)이라고도 한다. 그가 통치한 시기는 프랑스 역사상 최전성기 중 하나였다. 5세가 채 안 되어 왕위를 이어받았지만 1648년 시작된 프롱드의 난으로 어려운 어린시절을 보냈다. 1661년 루이는 절대왕정을 선언한 이후 스스로 신이 내린 절대권력을 가졌다고 생각하며 자신에 대한 모든 불충과 반란을 죄악시했다. 그는 모든 일을 직접 주관하고자 했으며, 내란의 주인공인 귀족들을 무력화시키는 데 몰입했다. 또한 루이는 새로운 궁전을 짓는 일에 열성이었다. 그 중에서도 베르사유 궁전은 건설 당시 많은 비난을 받았지만 완성 후에는 유럽 여러 나라의 감탄을 자아낼 만큼 유명해졌다. 그는 종교개혁을 이해하지 못했고 개신교도들을 적으로 여겨, 1685년 낭트 칙령을 철회하고 개신교도에 대해 무자비한 박해를 가했다. 루이는 치세 동안 여러 차례 전쟁을 겪었다. 1667~97년 일련의 전쟁에서 합스부르크를 희생시켜 프랑스의 동쪽 경계를 늘렸고, 1700년 스페인의 카를로스 2세가 루이의 손자에게 왕국을 물려주자 유럽 동맹에 맞서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을 벌였다. 죽기 전에 왕위계승자를 결정한 유언장을 작성했는데, 이것이 결과적으로 왕정의 몰락을 재촉했다. /브리태니커
"짐이 곧 국가다. "
- 루이 14세
1568 - 이탈리아의 시인, 저술가, 철학자 토마소 캄파넬라(Campanella, Tommaso) 출생
캄파넬라 [Campanella, Tommaso, 1568.9.5~1639.5.21]
R.데카르트에 앞서 방법적 회의(懷疑)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당시 높아가던 자연에 대한 관심과 전통적인 스콜라의 사상을 독자적인 체계 속에 융합시키고자 하였다. 주요저서 《태양의 나라》는 플라톤의 《국가론》, T.모어의 《유토피아》의 전통을 잇는 정치적 대화편이다. /네이버
- 'Catherine Parr' by Hans
Holbein the Younger
1548 - 헨리 8세의 6번째(마지막) 왕비 캐서린 파(Katherine Parr) 사망
캐서린 파 [Katherine(Catherine) Parr, 1512?~1548.9.5]
잉글랜드 왕 헨리 8세(1509~47 재위)의 6번째이자 마지막 왕비.
왕실 관리인 켄들의 토머스 파 경의 딸로, 1543년 7월 12일 헨리와 결혼했는데 그전에 이미 2번 결혼한 적이 있었다. 전남편이었던 에드워드 버러와 래티머 경 존 네빌은 1529년경과 1542(또는 1543)년경에 사망했다. 그녀는 재치가 풍부해 헨리의 마지막 통치기간 동안 헨리에게 좋은 영향을 행사했다. 전 왕비 소생인 헨리의 3명의 자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자녀 교육에 정열을 쏟았다. 인문주의자였던 그녀는 프로테스탄트 개종자들과도 사이가 좋았다. 1546년에는 보수주의자들, 특히 스테판 가디너의 모함에 희생될 뻔했으나 시기적절하게 왕에게 접근해 위기를 모면했다. 1547년 1월 헨리가 죽은 후 잉글랜드의 제독(1547~49 재임)을 지낸 과거의 청혼자 서들리의 시모어 경 토머스와 결혼했으나 첫딸을 출산한 직후 숨졌다. 박식하고 지극히 경건했던 그녀는 말년에 〈죄인의 한탄 A Lamentacion or Complaynt of a Sinner〉을 썼다. /브리태니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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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_@)
출처: 꿈꾸는 다락방에서 원문보기 글쓴이: 행복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