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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보산꾼의 산중산담 山中山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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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간, 정맥, 기맥, 지맥 기타 스크랩 한북정맥 10구간 : 마지막 장명산 구간 - 민족의 애환을 담은 한강과 이별가를 부르다
초보산꾼 추천 0 조회 158 16.02.21 23:34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한북정맥 10구간 : 식사동고개에서 곡릉천까지 마지막 구간

 

 

언제 : 병신년(16년) 시샘달 스무날 흙날

누구랑 : 나홀로

어딜식사동고개 문봉동재 ~ 성동재 ~ 송산고개 ~ 핑고개 ~ 장명산 ~ 곡릉천

               정맥 14.6 km(접속구간 포함)               ( 시간은 사진속에 있습니다 )

 

***  더 많은 사진자료는  http://blog.daum.net/kmhcshh/2904  에 있습니다 *********

 

겨울을 여는 11월 마지막 주에 좀처럼 보기 힘든 11월 눈꽃속에 시작된 한북정맥과의 만남

역시 겨울에 제대로 위력을 발휘하는 강원도의 힘을 몸으로 느끼며 순탄치 않은 한북정맥길을 예감했지만

깊을수록 예년보다 못한 동장군과 친구하며 걷다보니 이제 봄이 오는 길목에서 만나게 되는 동장군의 시샘도

봄의 시작과 겨울의 마지막을 느끼며 걸을 수 있고 한북정맥길도 마지막이라는 의미까지... 담아본다

 

한북정맥 마지막 구간 : 식사동고개에서 곡릉천까지 - 참고용. 식사동고개는 보이지 않음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노고산에서 고양시의 속살로 들어 온 한북정맥길은 송산고개를 넘어 목동삼거리에서 파주시 속살로 들어가게 된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노고산에서 한껏 낮춘 산줄기는 이제 소리 소문 없이 강물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준비하고 

거기에 인간의 욕심으로 있는 산줄기마저 사라지고 없는 마지막으로 향하는 아쉬움을 더욱 무겁게 하고 있다

하지만 한북정맥의 마지막 산인 장명산과 곡릉천이 있는 한 누군가는 걸어야 하고 이어가야 하기에

또한 선답자들이 없는 길을 찾아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기에 고마움을 느끼면서 선답자의 길을 따라 마지막을 걸어본다 

 

원당역 6번 출구에 내려

 

앞에 보이는 마트로 횡단보도를 건너 좌측으로 가면 마을버스 38번만 타고 내리는 승강장이 있다

 

08:20분  벽제초등학교앞에서 하차

 

삼거리방향으로 직진하여 횡단보도를 건너 되돌아 본 삼거리와 버스정류장 방향

 

식사동 방향으로 계속 2차선 도로를 따른다

 

이제 한북정맥 마루금과 접속하고.... 식사동 고개

식사동(食寺洞)

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이  식사동의 대궐고개 부근에서 이성계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견달산으로 도망쳤을 때 도피생활을 하던 공양왕에게

절(寺)에서 식사(食)를 제공했다는 전설로 '식사동'이란 마을이름이 유래되었다 한다

일산동의 동쪽에 위치한 곳으로 본래 원당읍 지역이었으나 분구시 일산구에 포함되었다

 

저번 구간 날머리

 

바로 숲속으로 진행

 

절개지가 나오면 우측으로 해서 돌아가도 되고 좌측으로 해서 바로 광목장 정문앞으로 갈 수가 있다

 

광목장 정문을 지나고

 

앞에 견달산을 보면서 걷다보면

 

삼각점이 있고 현달산 이정석이 있는 견달산 정상

견달산(현달산) 고양시 일산구 식사동과 고봉동 경계

중국의 황제가 세숫대야에 비춰져 그 기운이 중국에까지 도달했다고 하여 견달산으로 부르며 다른 이름으로 본달, 번달, 현달로도 부르고 있다.

또한 산봉우리가 중국을 향하고 있어 일명 역적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견달산은 하늘과 잘 통한다고 하여 고양시에서 비가 오지 않을 때 기우제를 지내는 산으로도 유명하다.

한국전쟁 당시 치열한 교전이 벌어지기도 한 군사 요충지며 지금도 산 곳곳에 군사시설들이 자리해 있다.

 

 

가야할 고봉산이 멀리 보이고 중간에 골프연습장을 지나게 된다

 

폐지 집하장이 있는 공장이 보이면서 길을 따르면

 

정면에 보이는 골프연습장으로 직진하게 되는 문봉동재 - 동국대병원 방향

문봉동(文峰洞)재

문봉동은 지영동의 서남쪽 그리고 설문동의 남서쪽에 위치한 마을의 법정동 명칭이다. 문봉의 유래에 대해서는 크게 세가지 설이 있는데

그중의 하나는 이곳에 문봉서원이 있었기 때문에 생겼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옛부터 글을 숭상하고 받들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라는 것이다.

끝으로는 이 마을 앞쪽에있는 견달산의 봉우리 생긴 모양새가 마치 붓과 같아 큰 문장가가 많이 나올것 이라는 뜻에서 문봉(文峰)이라 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서는 견달산을 보지 못했네... 정말 붓처럼생겼는지 볼걸...

 

계속 도로를 따라가는데 갓길이 없고 대형차들이 많이 다녀 매우 위험하다. 우측으로 가야할 고달산이 보이고

 

예빛교회 이정표가 보이면서 우측으로 원각사 이정표가 보인다 - 이정표따라 우틀

 

원각사를 지나고

 

군부대 철조망이 나오고 우측길을 따르면

 

마을로 들어서면 좌측에 보이는 고봉산을 포스트 삼아 진행한다

 

마을 빠져나와 막다른 지점에서 산속으로 진입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남쪽의 일산동과 북쪽의 중동,성석동을 연결하는 고갯길인 성동재 - 정면의 시멘트 포장도로를 계속 올라간다 : 영천사 방향

 

좌측으로 마루금을 이어갈 수 있게 띠지를 달아 놓았는데... 영천사를 보기 위해 계속 시멘트길로

 

먼저 만경사가 반기고

 

좌측으로 평화의 쉼터가 있는 마루금과 만나는 지점 - 마루금인 우측은 군부대로 진행 불가. 계속 직진

 

고양팔현(八賢) 모당 홍이상 선생에 대한 안내판도 있고

 

고봉산의 남서쪽을 지킨다는 이무기바위도...

 

영천사 방향을 내려오면 - 작은 돌하나에도 이렇게 생각하기 나름...

 

 

영천사도 지나고

 

장사바위 갈림길에서 잠시 장사바위 방향으로

 

고봉산을 지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장사바위도 지나고

 

고봉산 정상 가장 가까이 갈 수 있는 곳

고봉산(高峰山/208m)

고봉산은 208.8m의 높지 않은 산이지만 고양시 일산구에서는 이름처럼 가장 높은 산으로 옛부터 태미산으로 알려져 있는 산이다.

이곳 고봉산은 높은 산봉우리 또는 봉화를 올린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정상에는 봉수대가 위치하고 있다지만 지금은 군부대가 차지하고 있다

봉수는 나라에 급한 일이 있을 때 연기와 불로 신호를 보내는 통신수단이다. 이곳 고봉봉수는 삼국시대부터 설치된 것으로 보이며 파주시 교하 검단산 봉수에서 신호를 받아 같은 제4노선 봉현 봉수로 전달 하였다

멀리서 보아도 산꼭대기에 커다란 안테나가 있어 다른 산과 쉽게 구별할 수 있는 모습인데, 삼국시대의 기록인 삼국사기에도 나오는 유명한 산으로

한강유역 일대를 두고 고구려, 백제, 신라가 치열한 접전을 벌인 군사, 교통, 전략상의 요충지였다고 한다

 

 

다시 삼거리로 내려와 헬기장 방향으로... 목안내판에는 중산배수지 방향으로

 

헬기장

 

삼각점봉에서 좌측 황룡사 방향으로

 

역시 여기도 고양누리길 띠지가 많은 도움을 준다

 

고봉정도 지나고 도로를 만나면 황룡산 이정표를 따라 좌틀하면 중산고개 - 좌측으로 금정굴 안내판이 보인다

중산고개(고봉산 삼거리, 황룡산입구)

중산이란 명칭은 고봉산이 오래전부터 고양지역의 역사와 행정의 중심지여서 붙여진 이름이며

시 승격전에 이 지역을 중면이라 부른데서 유래하였다.(일산 동구청 중산동)

 

횡단보도를 건너면 좌측으로 금정굴 안내판이 나온다.

 

6.25의 아픔을 안고 있는 금정굴을 알리는 것이 왜 필요한지 알리는 안내판등 시설이 있다

 

여기에 쓰여있는 용서와 화해도 좋지만... 역사는 어떻게 든지 밝혀져야 하고 책임을 물어야 하는데... 또 다시 반복하고 있기에...

 

제주 4.3사건을 비롯 전국 곳곳에 아직도 세상을 떠나지 못하고 떠돌고 있는 영혼들이 편하게 잠들 수 있는 날이 빨리 왔으면...

 

철망을 만나 계속 진행하면

 

삼각점이 있는 황룡산 갈림봉(108봉)에서 탄현묘지 이정표따라 좌측으로

황룡산 (134.5m) - 고양시 일산서구 탄현동과 성석동, 파주시 교하면 야당리와의 경계

‘황룡산’이란 이름은 누런 용이 살았다고 해서 붙여진 것. 일산 탄현에는 황룡산과 고봉산 두 개의 산이 있는데,

황룡산 정상은 고봉산 서북쪽 2.5km 지점으로 또한 고양시 최서북단에 위치해 있어 날씨가 맑은 날은 멀리 북녘땅까지 조망할 수 있다.

 

묘지가 나오면 소로길로 좌틀해야 한다

 

계속 직진하면 중학교 담장이 끝나면서 도로가 나온다

 

우측으로 이마트가 보이는 도로를 횡단하여 앞에 보이는 초등학교 좌측으로 해서 큰마을 아파트로 들어가게 된다

 

 

큰마을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 계속 끝까지 진행한다 - 마침 운동하시는 아주머니에게 일산가구 단지 가는 길을 물어보니...

 

아파트문을 나오면 경의선 철도가 보이는 공원이 나오고 - 친절하게 함께 여기까지 동행하며... 감사합니다

 

좌측으로 진행하면 도로로 올라 갈 수 있다

 

 

경의선 철도 다리를 지나 만나게 되는 횡단보도를 건너 앞에 보이는 가구단지 제1문으로 진입

송산고개(일산가구공단 간판)

송산동은 덕이(德耳), 가좌(加佐) , 구산(九山 )의 3개 법정동 마을이 합쳐져 붙여진 행정동 마을 이름.

고양시의 서북쪽 끝 마을로 파주시와 많은 지역이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 지역에 소나무가 많아 붙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송산이란 이름은 조선조 중기 이전부터 사용된 이름으로

지금도 고양시를 상징하는 송포 백송, 가좌동의 음송 마을등이 남아 있다.

 

일산가구단지 골목길을 끝까지 오면 우틀


 

규묘가 대단?한 한소망교회와 그 뒤로 골프 연습장이 보이기 시작하고

 

조그만 도로를 통과하여 교회 옆으로 계속 진행

 

11시 방향 골프장 정문으로

 

커도 너무 큰... ㅋㅋ

 

골프연습장 정문에서 우틀하여 도로로 나온다

 

도로가 나오면 좌틀하여 계속 직진 - 여기서 부터 초보산꾼은 계속 알바의 연속  ㅋㅋ

 

그나마 잃어버린 마루금, 동서대로 사거리에서 좌틀해야 하는데 여기서도 우틀....

 

덕이동 방향으로 진행하다 친절한 주민을 만나 다시 동서대로 사거리로... 역시 동행해 주신다

 

새암공원을 만나니 반갑고... 이제 다시 마루금을 이어간다

 

이마트가 보이는 곳으로 횡단하여 우틀하면 나오는 사거리 - 좌측으로 보이는 건물이 지도에 나와 있는 경기인력개발원이다

집에 와서 지도를 다시 보니 개발원 우측으로 마루금이 이어지고 있다. 여기서 계속 직진해야 했었는데...

 

횡단보도를 건너 좌틀하니 정맥띠지가 반갑게 인사한다. 그래서 아무 생각없이 좌틀해서 계속 직진해 버렸으니...

 

여기서 부터 다시 어디가 어딘지 모르고 그저 길따라 계속 진행하다 지도에 나와 있는 월드메르디앙 아파트를 지나고

 

산길을 갈려면 산이 보여야 하는데 아파트 숲에서 길을 찾으니...  결국 다시 길을 찾지 못해 택시를 이용할려 해도 이곳에는 택시도 없다.

주민의 말에 의하면 이곳은 콜택시 이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운정신도시 사람은 무진장 많이 사는데...

거기에 새벽에 나왔는데 아파트만 있으니 어떻게 식후경할 자리도 없고...  규묘가 큰 공원에서 식후경을 하고

무조건 성재암이 있는 당하리 방향으로 걷다가 우연히 발견한 택시... 산행하면서 택시가 이렇게 반가울 수가... 5000원 지불하고

한번 잘못 끼워진 단추가 결국 끝까지 말썽이네... 

 

성재암에 도착

 

성재암(聖在菴)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당하리 279

조선왕조 세조(재위-1455~1468) 비 정희왕후 윤씨가 창건한 가람이다.

무진(1448)년 비의 친정아버지 파평부원군(윤번)이 졸하고 병자(1456)년 친정어머니 흥령부대부인 인천이씨가 졸하매 애통한 나머지

의경세자(성종의 생부, 추존 덕종대왕)을 보내 명복을 빌고 극락왕생을 발원하기 위하여 현 위치에 36칸의 가람을 창건하여 성재암이라 사액하였다.

그리고 왕비께서 목불을 조성하여 봉안하시고 수행하는 스님 20여분을 상주케 하였다.

 

 

파평윤씨 종중은 경내에 파평부원군 내외분의 재실인 본방능재를 짓고 족보편찬 사업도 하였던 곳이다.

중종(재위-1506~1544) 29년 갑오(1534)년 왕비 문정왕후의 친정아버지 파산부원군 윤지임이 졸하매 수행하는 스님을 더 많이 상주케 하므로 더 번창하다가

을축(1565)년 문정왕후가 붕어하시고 숭유억불책과 왜란·호란 등으로 점점 쇠락하다가 왜정말기 끝까지 수호하던 강덕홍 스님이 광탄 보광사 수구암으로

목불상을 옮겨 모신 후 사실상 폐찰이 되다시피 되고 6.25사변으로 남은 건물마저 헐려진 것을 1994년 파평윤씨교하종중에서 현 위치 부지 500평을 시주하여

성재암을 중건하고 1996년 수구암에서 목불상을 환봉하여 모시고 후일 또 파평윤씨교하종중에서 2000여평의 땅을 사용 승락하니

금일에 이르러서야 옛 가람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찾게 된 것이다

자료 :http://blog.daum.net/whsodhr1/8920317

 

경내에는 약 550년된 성재정이라는 1년 내내 마르지 않는 샘물이 있다.

 

자동차 운전학원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 우측으로

 

당하리 지석묘군이 나타나는데 길옆에 있는 지석묘만 확인하고 바로 위에 또 있는데 다음 기회로...

 

 

 

고인돌삼림욕장 안내판등 시설이 있는 지점에서 계속 시멘트 포장길

 

특수교육시설이 있는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오도동 정류소가 있는 유래를 알 수 없는 핑고개 도로에서 길을 건너 우측  미진봉투사 시멘트포장 마을길로

 

 

산속으로 진입

 

삼각점과 폐쇄된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장명산 직전봉이 나온다

 

그런데 앞에 보이는 장명산을 갈 방법이 없다. 그래서 다시 내려와 건축폐기물야적장?  길을 따라 올라가 본다

 

그런데 헉? 낭떠리지...작업자분께서 사유지라고 길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결국 그렇다고 앞에 있는 장명산정상을 빙 돌아 갈 수도 없고...

좀 위험하지만 다행히 아래 모래 야적장 중간에 대각선으로 오르는 길이 보인다. 작업자는 올라갈 자신 있냐고...

 

모래 야적장으로 내려와

 

위에서 보았던 조그만 대각선 방향으로 올라가 본다. 모래가 무너지면? 상상을 하면서. 이 길마져 곧 사라지면?

 

빙돌아 곡룽천에서도 올라 오는 듯 띠지가 많이 붙어 있다. 우측으로 장명산으로 오른다

 

한북정맥의 종착점 장명산에 오르다

장명산(102m)    장명산은 일명 약산이라고도 한다.

산 주위엔 구절초가 자생하고 있어 이를 많이 복용한 주민들은 수명이 연장되었다고 하여 장명(長命)이라 불렀다 한다.

옛날 조선시대 때 한 아낙아이 갖기를 소원한 나머지 장명산 중턱에 위치한 약수터에 올라가서 약수물에 밥을 지어 먹고 구절초 달인 물을 먹으면서

치성을 드린 후에 아이를 갖게되자 그 소문이 한양 땅에 퍼졌다 한다. 이후 아이를 갖지 못한 양반댁 부인들이 매년 음력 9월9일에 장명산에 올라

약수물에 밥을 지어 먹고 구절초 달인 물을 먹어서 아이를 갖게 된 일이 많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한다.

 

앞에 곡릉천과 멀리 오두지맥의 월릉산이 조망된다

 

바로 뒤에 있는 참호를 따라 계속 내려오면

 

곡릉천과 곡릉천교가 보이기 시작하고

 

곡릉천과 359 지방도가 지나는 곡릉천교. 선조께서 만든 정맥이 단지 한강으로 산줄기가 이어지지 않는다고 도봉지맥이라 부른단다

곡릉천 曲陵川
경기도 양주시, 고양시, 파주시에 흐르는 하천.한강 권역의 한강 수계에 속하며, 한강의 제1지류이다.

양주시 챌봉(516m) 남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長興面 부곡리에서 지방2급하천이 시작되며, 고양시 덕양구 선유동을 지나 덕양구 奈遊洞·벽제동,

일산구 芝英洞, 파주시 조리읍의 경계지점에서 국가하천으로 바뀌고, 파주시 교하읍 오도리 북쪽에서 서쪽을 향해 흘러 한강으로 합류한다

 

한강과 합류하기 위해 열심히 한강 방향으로 오늘도 흐르고 있다.  

초보산꾼과 함께 했던 한북정맥길에서 만난 모든 아쉬움과 즐거움을 함께 담아서...

 

마지막 한북정맥길에서 마루금을 몇군데 놓친 것이 아쉽지만

어차피 이미 많아 사라진 마루금이기에 조금은 위안을 삼으면서 나홀로 진행했던 한북정맥길도 여기서 멈춘다

 

 

 

*****  한북정맥을 마치며... 한강을 생각해 보다  *****************

 

 

18세기 지리학자 여암 신경준선생이 지은 '산경표'에 따르면 각각 1개 대간(大幹)과 정간(正幹), 13개 정맥(正脈)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심에 흐르고 있는 산줄기가 바로 한강 남.북의 물공급원인 한북정맥과 한남정맥(한남금북정맥포함)이다

그리고 남한강과 북한강의 중심에 대간 오대산에서 발원한 한강기맥이 있어 유유히 흐르다 양수리에서 만나 한강의 기적을 이룬 것이다

- 아래 지도 참조

 

한강의 상류는 남한강과 북한강으로 나뉘는데 남한강을 본류로 본다

백두대간을 중심축으로 한북정맥과 한강기맥이 북한강의 물공급원의 역활을 하고

한남금북정맥과 한남정맥 그리고 한강기맥이 남한강의 물공급원 역활을 하게 된다

 

초보산꾼은 오늘 한북정맥 졸업으로 한강의 물공급원의 역활을 했던 백두대간을 진행했고

한남금북정맥과 한남정맥(1구간 남음) 그리고 한강기맥을 모두 걸어 봤다

 

 

그래서 옛 부터 우리나라 허리 부분을 동서로 가로질러 흐르는 큰 강이라 해서 '크다'의 뜻을 가진 '한물'이라 불렀다

또한 '한가람'이라고도 했는데 큰 물줄기의 의미로 크고 넓고 가득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데 한자로 옮겨 쓰다 보니 漢江이 되었고 중국 양자강의 지류이름이기에 지금은 큰 강을 뜻하는 '한강'으로 적고 있다

삼국시대 초기까지는 한강의 모습이 허리에 띠를 두른 것과 같다는 의미로  '대수(帶水)'라 불리었고

고구려 광개토왕비에는 아리수(阿利水)로 표기되어 있는데 서울시의 수돗물에 쓰고 있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

한강이 언제부터 사용됐는지 알 수 없지만 백제가 중국의 동진과 교류하기 시작한 즈음이라 추측된다

또한 교류가 활발해지고 한자가 들어오면서 그 전부터 사용되던 이름은 사라지고 한수(漢水) 한강(漢江)으로 불리어진 것으로 보인다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 청동기 시대에는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고 또 생활의 원천인 물을 이용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이렇게 큰 강이 한반도 중앙부를 지나다 보니 삼국시대부터 쟁패(爭覇)의 중심에 서게 되었고

삼국 통일을 한 고려가 한양천도를 꿈꾸었던 이유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수도를 옮긴 것은 조선이였다

 

조선시대부터 시작된 한강의 시대...

멈추지 않는 물의 흐름만큼이나 인간과 한강이 공존하며 한때 '한강의 기적'이라는 경제성장까지 이루게 해 준 한강

하지만 한강은 한동안 과도한 개발로 자연성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면서 한 때 오염의 대명사로 불리기도 했지만

한강이 동에서 서로 흐르기에 동해안과 서해안의 동서 문화를 하나로 잇는 동맥으로 역할도 충분히 했다

함경도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의 경계를 이루다 보니 민족문화형성의 중심 무대까지...

삶과 애환, 그리고 그 삶에 얽힌 얘기들이 다 역사이고 한강을 중심으로 터를 잡고 살아온 우리 이웃들의 얘기이다

일상이 가져다준 그저 출퇴근시간에 우연히 보게 되는 한강이 아니라

강인한 생명력을 지켜온 우리 민족의 젓줄로 한강을 재발견하는 날이 빨리 오기를 기대해 본다

유구한 한강의 역사만큼이나 아직도 다 보여주지 못한 깊이와 넓이를 가진 한강

한강의 큰 그림만 걸었을 뿐인데도 이렇게 행복한데...

큰 그림 속에 숨겨진 또 다른 얘기들을 담기 위해

이 초보산꾼은 다시 한북8지맥 속으로 들어가 본다

 

 

                          초보산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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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6.02.22 12:29

    첫댓글 형님 남은 구간 잘 마무리하시고, 일부 구간 졸업을 축하합니다. 대단한 열정이십니다.

  • 작성자 16.02.23 08:03

    유연 후배님 감솨... 한북정맥 마무리 하고 또 다른 산길을 찾아 가는 길
    멋진 유연후배님의 응원에 더 힘이 나는 것 같네... 오대산 함께 못해서 미안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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