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도 중순을 지날 무렵 제노베파는 노트북 위에 여행관련 자료를 올려 놓았다. 얼핏 보아도 감이 잡힌다. 가족끼리 떠나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나에게는 창조주께서 양육과 관련된 모든 일을 위탁하신 아들과 딸이 있다. 아들은 늘 바쁘고 개인적 성향
또한 요즘들어 가족간에 여행보다는 공무와 관련된 일과 친구들과 어울림이 활발한 편이다. 그렇다면 딸내 식구들과 우리 둘이
떠나는 여행인가 보다 지레짐작하였으나 그것은 아니였다. 처형부부와 처남이 동행하기로 한 것이다. 제노베파는 이미 사전
조율을 끝내고 메세지를 최종적으로 나에게 보낸 것이다. 누군 여행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만은, 난 자유롭게 자연의 숲을
떠돌며 만나는 그들과의 교감을 무척 아끼고 사랑한다. 혼자라면 더 좋지만 사랑하고 좋은 인연을 유지하고 늘 가까이 하는 사람
들과 어울려 하는 여행 또한 좋아한다. 강의 원류가 있다하여 강원도 다 청소년기부터 드나들기 시작했던 강원도 여행, 난
그곳을 여러개 광역권으로 구획해 놓고 다니는 편이다. 암릉을 타고 넘는 릿지 암벽등반 목적과 멋진 운해와 단풍을 보기 위하여는 설악을 찾지만 편안한 마음으로 자연의 리듬을 타며 사색하는 수준으로 숲길을 걷고자 할 때는 평창권역을 찾는 경우가 많다.
설악에서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모을 수 있었다면 평창에서는 사색의 바름을 익히고 배운 곳이라 할 수 있다.
토요일 11시경에 서울을 출발한 난 나의 의지대로 차를 몰았다. 여행 동선은 가급적 국도를 이용한다. 여행에 속도가 붙게되면
사물에 대한 관조는 흩으러지기 마련임을 잘 알고 있는 나는 극히 고속도로를 피하는 것이다. 미사리, 양수리, 국수, 양평, 용문, 용두, 풍수원, 힁성, 둔내, 태기산, 봉평으로 길을 잡아 나갔다. 수도 없이 다닌 길이다. 성하의 계절 들머리인 요즈음 숲은 성숙되어 있어 무척 아름답다. 이 아름다움을 보고 느끼며 기뻐하는 것 또한 여행에 깃든 멋이다.
봉평에 도착한 우린 우선 메밀 국수와 메밀전병을 찾았다. 각자 기호대로 주문하고 먹은 후 가산이효석 생가를 찾아 나섰다.
가산과 인연은 국어교과서에 수록되었던 낙엽을 태우면서란 수필을 접하면서였다. 그 후 가산의 여러 단편을 심도 있게 읽곤
했었다. <메밀꽃 필 무렵>에는 기본적으로 세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한 평생 장돌뱅이로 살아온 ‘허생원’과, 그와 같은 처지인 ‘조선달’, ‘동이’이다.
이지러는 졌으나 보름을 갓 지난달은 부드러운 빛을 흐뭇이 흘리고 있다.
대화까지는 팔십 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 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중략)
와인을 즐겨 마시고 축음기를 틀어 음악을 즐기며 글을 써내려가던 가산은 지배계급풍의 브르죠아 였는데 이런 향토색 짙은 어휘를 어떻게 끌어 냈는지 알 수가 없다 .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이런 류의 어휘를 만들어 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바로 나의
생각이다.
가산의 생가를 들러 보고 다리를 건너 주차장 우측에 있는 나귀 집을 찾았다.
소설에서 나귀를 작가는 이렇게 적고 있다. (실은 나귀가 바로 허생원이다. 허생원은 나귀를 통하여 자신을 감추기도 하고 드러 내기도 한다.)
반평생을 같이 지내온 짐승이었다. 같은 주막에서 잠자고 달빛에 젖으면서 장에서 장으로 걸어 다니는 동안에 이십 년의 세월이 사람과 집승을 함께 늙게 하였다. 가스러진 목 뒤 털은 주인의 머리털과도 같이 바스러지고, 개진개진 젖은 눈은 주인의 눈과 같이 눈곱을 흘렸다. 몽당비처럼 짧게 슬리운 꼬리는 파리를 쫓으려고 기껏 휘저어 보아야 벌써 다리까지는 닿지 않았다. 닳아 없어진 굽을 몇 번이나 도려내고 새 철을 신겼는지 모른다. 굽은 벌써 더 자라나기는 틀렸고 닳아버린 철 사이로는 피가 빼짓이 흘렀다. 냄새만 맡고도 주인을 분간하였다. 호소하는 목소리로 야단스럽게 울며 반겨한다.
물레방앗간은 허생원과 성서방네 처녀와 정분이 난 곳이다. 야반도주로 성서방네 처녀를 다시 만날 수 없었던 허생원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그리고 흐뭇한 달빛을 좋아 했던 허생원은 자신의 옛날 인연을 끄집어 낸다. 이를 계기로 동이는 서름서름 사이를 물리치고 자신의 부모에 대해 이야기를 꺼낸다. 동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허생원을 물에 빠지고 동이가 구하는 과정에서 자신과 같은 왼손잡이라는 사실도 확인하는 순간 혈육을 찾게 되는 것이다. 허생원과 조선달과 동이의 대화가 어색하지 않은 이유는
자연의 영향이 크다할 수 있겠다. 서정적인 자연속에서 허생원과 조선달, 동이 그리고 나귀까지 일체감을 이루어 나가는 모습이
담겨 있기에 독자는 감흥을 받게 되는 것이다. 심미주의 였으며 좌익사상도 가까이했던 가산이였지만 동이가 혈육을 찾는 순간
자연의 위대한 서정성을 찾았는지 모르는 일이다.
“ 장선달 꼭 이런 날 밤이었네. 객줏집 토방이란 무더워서 잠이 들어야지. 밤중은 돼서 혼자 일어나 개울가에 목욕하러 나갔지.
봉평은 지금이나 그제나 마찬가지나, 보이는 곳마다 메밀밭이어서 개울가 어디 없이 하얀 꽃이야. 돌밭에 벗어도 좋을 것을 달이 너무도 밝은 까닭에 옷을 벗으러 물방앗간으로 들어가지 않았나. 이상한 일도 많지. 거기서 성서방네 처녀와 마주쳤단 말이야.
봉평서야 제일가는 일색이었지".......
아름아름 장돌뱅이의 삶과 작가의 서정적 감흥이 휘리릭 살아 동영상으로 다가 온다. 참으로 흐뭇한 마음으로 소설의 줄거리속
여기저기를 탐익하다 다음 길로 나서기 위하여 차로 이동하였다.
자연의 서정성이 가득한 메밀꽃 필 무렵에 대한 기억을 떠 올리며 걷던 길을 멈췄다. 그리고 딸아이 가족을 물레방앗간 정문에
세웠다. 파인더를 통해 보이는 상의 촛점을 점검하고 노출계를 순간적으로 살펴다. 구도, 빛, 그리고 찍는자의 감성이 깃들어야
비로서 사진은 완성된다. 그런 조건들을 전부 갖추어도 기다려야 할 이유가 또 있다. 자유로운 표정이 다가 올 때 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손주는 이젠 제법 표현력에 있어 프로가 되었다. 할배가 카메라를 들이대면 이쁜짓 표정관리로 즉시 몰입하는 것이다. 그런 모습이 주변사람들을 환한 웃음으로 물들게 한다. 메밀꽃이 없는 생가 주변은 황량했다. 역시 봉평은 메밀꽃이 피는 절기에 찾는 것이 제격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숲길을 걷거나 풀 속에 가득한 야생화를 보고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싶다면 6월도 제격이다. 우린 봉평 살핌을 끝내고 태기산 깊은 계곡을 찾기 위하여 흥정계곡 안부를 찾아 나섰다.
차에 오르려는 순간 아름다운 조형물이 눈에 띄었다. 주혁이를 냉큼 안아 올려 놓자 신기한지 연필기둥을 만지작 거리고 마가렛 꽃잎을 들여다 보다, 엄마를 부른다. 이것저것을 엄마에게 묻고 싶은 모양이었다. 아이에게는 엄마가 해결사다.
계곡으로 이동 중 꼬맹이는 할머니 무릎에서 잠이 들었다. 제노베파는 손주에게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내고 사랑을 열심히
나르는 편이다. 아이에게 줄 적당한 것들이 눈에 띄면 준비해 두었다. 꼭 전달한다. 그리고 매일 매일 일상속에 손주의 동태를
딸로부터 전송받아 자신의 겔러리에 저장하고 사본은 나의 스마트폰으로 직송해 주는 사람이다. 아름다운 주변 산책을 권했더니
손주가 잠에서 깬다고 차에서 있게단다. 나는 차를 다시 그늘쪽으로 방향을 잡아 세워놓고 산책을 나섰다.
지독한 가뭄에도 물은 맑고 밑으로 흐른다. 한 오년전 이 계곡을 6월 어느날 찾은 적이 있었다. 이른 아침이었다. 안개가 자욱
했고 풀섶으로 발을 옮기면 스치는 초(草)와 달라 붙는 물기가 싱그러웠다.누군가 허름한 판자에 명상의 집이라 적어 걸어 놓은
안내표시를 발견한 나는 무작정 산으로 난 길을 걸었다. 인적은 끊기고 바람소리와 아침을 알리는 각종 풀벌래 소리만 가득한 숲은 살아 숨쉬고 있었다.한참을 걸어 만난 커다란 송림 아래 집, 나의 숨을 멈추게 했다. 아무도 살지 않는 집, 거실 탁자에는 보다 만 펼쳐진 성경책과 묵주가 나의 시선을 끌었다. 송림밑 의자에 앉아 한참을 앉아 있었다. 그리고 햇살이 숲을 파고들 무렵 숲을
헤집기 시작했다. 야생화를 찾아 나선 것이다. 집 안의 화초들은 사람들이 키우지만 들꽃인 야생화는 하늘에서 키워 주신다.
그래서 그런지 조촐하지만 아름다운 생명력이 깊게 베여 있어 보기 여간 편한 것이 아니다. 그런 들꽃을 마이크로 랜즈를 이용
하여 하이톤이 될 무렵인 정오까지 찍었다. 그리고 물이 넘치는 이 계곡에 숨어 몸을 담궈었다. 지금은 집이 서너채 들어 섰다.
오늘중으로 서울로 귀경해야 할 사람이 있어 아쉽지만 숲을 떠나야 했다. 피닉스 스키장 산아래 마을에 들어 선 콘도로가 조금
이른 저녁을 먹은 후 일행을 장평 터미널까지 배웅해야 한다. 오리훈제 고기와 부추 살짝 익힌 쌈으로 싸서 먹은 후 감자 칼국수를
나눠 먹고 배웅하고 돌아 왔다. 그리고 난 사위와 마주 앉아 남은 오리고기를 안주삼아 통음을 시작했다.
다음날,
아침이 먹먹했다. 이건 분명 통음 때문이다. 이젠 조금씩 조금씩 술잔을 줄여야 한다. 아직은 아니지 하지만 분해의 속도가 갈수록 늦어지고 있음을 깨닫는다. 숙취를 맑은 공기로 풀려고 손주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잠시 로비 의자에 앉으려던 손주는 스스로
올라가 편안한 자세로 앉아 있는 모습이 반듯하다. 조금 산책을 하다 돌아와 샤워를 하고 떠 날 준비를 끝내자, 금새 딸 아이가
아들을 안고 샤워실로 가더니 벌거숭이를 만들었다. 어제밤부터 백곰을 보고 싶다 하더니 좋아하는 프로가 방송되는지 텔레비젼
앞에 눌러 앉았다.
요녀석 허리가 콜라병 증세가 보인다. 이 참에 다이어트 시킬까! 아니다 아이들은 하루에도 수십번씩 변화한다. 자랄고비에 들어서면 쑥쑥 자라는 것이 아이들 아닌가 일정을 소화하려면 일찍 나서야 한다. 평창지역은 옛적부터 나에게는 마음의 헛간이었다.
우리들의 마음이란 변화무쌍하다. 어느 때는 본인도 눈치채지 못한채 이리저리 쏠리는 현상을 늦게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라게
되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 우리들 속마음이다. 늘 조심하지 않으면 엉뚱하게 흐르게 되는 것이 마음이다. 놓치거나 버려서는 않될 것들도 많이 있지만 때로는 계륵같은 존재의 마음도 있다. 버리려 하니 아까운 것이 한 둘인가! 이런 것들을 한쪽에 모아 두고 살피고 조정하여 새것으로 만들어 써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는 헛간이 있어야 한다. 그런 헛간을 관리하는 곳이 바로 사색의 공간이다. 조용히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마음 가짐으로 편안하게 되짚어 볼 수 있는 사색의 숲길이 평창쪽에는 많이 있다.
나는 우리 식구들을 오늘 그 곳으로 안내하려고 하는 것이다. 방아다리 약수 전나무 숲길, 월정사 전나무 길, 대관령 옛길, 선자령
길, 강릉 성산 안쪽 소나무 숲길 등등을 걷게 되면 모든 것이 뚜렸하게 다가 온다. 자연과의 일체성은 마음을 서정적으로 이끈다.
조화로운 여유가 있기에 서정성을 얻게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을 스스로 이뤄 나가는 자연처럼, 사람들도 자연에 들면 비로서
합리적 조화를 생각할 여유를 얻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장평, 진부 중심가를 지나 마음과 몸을 함께 묶어 방아다리 숲으로 옮겼다.
숲은 고요하고 아늑했다.
늘 찾으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충만과 여백의 간격으로 형성되어 있는 곳이 바로 숲의 성질이다.
충만한 듯하지만 안으로 들어갈수록 촘촘한 숲사이로 멋진 여백이 보이기 시작한다.
흐르는 공기가 좋고 바람이 나르는 숲의 소리가 모든 긴장을 해갈시켜 준다. 어디 그뿐인가! 피부에 와 부딪치는 숲의 향기가
사람을 아늑하게 한다. 나도 모르게 걸을걸이에 리듬이 달라붙는다.
조금은 가파른 길을 걸으면서 요구되는 산소의 요구호홉, 들이키는 순간순간마다 육신의 정화환경은 거듭거듭 나를 새로운
자로 만든다.
딸 부부를 아들을 안게하고 함께 세웠다.
그리고 오누이가 나란히 섰다. 마침 비가 내렸는지 숲향이 맑고 강했다. 피톤치드가 발향 되는 중점시간에 우린 걷고 있었다.
길이 오붓하고 싱그럽다. 발바닥에서 느껴지는 감촉이 너무 근사하다. 침엽수이면서도 낙엽을 떨군다하여 우린 낙엽송이라 부른다. 마땅한 용재로서 가치가 사라진 이 낙엽송은 옛적에는 건물 비계용도로 사용되어지만 강관 즉 스틸 파이프 비계가 나온 후
설자리를 잃어버 버린 후, 지금은 간혹 전원주택용 통나무 용재로 사용되기도 하는 나무다. 우리는 서로 숲과 어울리며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며 샘을 향해 올랐다.
샘에 도착하자 마자 난 아이부터 챙겼다. 벤취에 앉게한 후 물을 떠 함께 나누며 마셨다. 청량감과 함께 탄산이 입안을 쏘면서
넘어간다. 후감으로 묵직한 철분 냄새가 맛각을 적셔 온다.
꼬맹이는 할머니가 사진을 찍으려 하자 폼을 잡으며 하는 짓이 얼마나 웃기는지 딸과 나는 파안했다.
우린 휴가를 뜻하는 한문을 쓸 때 휴(休)라 적는다. 사람이 나무에 기대고 있는 것이 쉰다는 뜻이다. 가족들 끼리는 서로에게
쉼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재속에서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너무나 많은 팍팍한 환경에 노출되는 경우가 허다해 진다.
끊임없이 몰려 오는 경쟁과 대립, 갈등으로 부터 찾아 오는 수많은 스트레스는 사람의 인성을 메마르게 한다. 그런 하루를 보내고
귀가하여 만나는 사람들은 가족이다. 각자 서로에게 나무 등걸이가 되어 서로에게 쉼터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하는데.... 참으로
쉽지가 않은 일이다. 깊이 생각하며 개선할 일이 아닌가 한다. 사위와 손주를 앞세우고 함께 사진을 찍었다. 늘 손에 카메라를 쥐고 살다보니 나의 사진은 좀체로 볼 수 없다. 의식적으로 누군가에게 부탁하지 않고는 나의 사진을 만들 수 없는 것이다.
오늘은 제노베파에게 부탁하여 몇장을 건졌다.
이젠 꽃마중하러 가자 했더니 딸이 아빠~ 우리도 하면서 포즈를 잡는다. 그래라하면서 샷다를 누르며 화살기도를 받친다.
이 가정에 언제까지나 평화의 안식을 내려 주소서~~ 표정이 재미있어 속사로 여러장 찍었다.
우린 오대산 초입 산기슭에 있는 자생식물원을 찾기 위하여 샘을 떠났다.
아빠와 다정하게 손을 잡고 가던 녀석이 이름을 부르자 돌아섰다.
나에게로 달려 온다. 다가가 양팔을 벌려 안아 올렸다. 숲속이라 찬 기운이 돌아 가디건을 입혀는데 걷다보니 몸이 덮다.
차에 도착하여 가디건을 벗겼다. 그리고 오대산 입구로 차를 몰아 진고개쪽으로 가는 방향 언저리에 있는 자생식물원 가는 길로
들어 섰다. 최초로 개장하는 날 참석했었다. 그리고 돌아 가신 아이들 외할머니 모시고 창포꽃이 유난히 흐드러지게 핀 8월에
다녀 갔었다. 그리고 씨앗을 얻어 심었더니 좋은 결과를 얻었다. 진천에 7월부터 10월까지 피는 꽃, 벌개미취꽃이 바로 그꽃이다.
광활하게 펼쳐진 언덕위에 두 종류의 꽃이 피어나기 시작하면 무척 아름다운 곳이 바로 이곳이다. 그리고 외래종 보다 자생종 중심으로 키우고 보호해 주어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6.25때 참전용사로 한국에 온 유럽 외국군인이 우리나라 나리꽃에 반해
갖고 나가 개발하여 만든 꽃이 바로 백합이다. 이처럼 육종을 개발하면 개발자에게 로얄티를 물어야 한다. 우리꽃을 지키는 일은
우리의 산천을 보호하는 일이다. 그래서 용인에 있는 한택식물원과 더불어 연인산 아래 아침수목원 등등을 찾게 된다.
들꽃에서 나는 작은 것들에 대한 아름다움을 느끼고 보는 행복을 얻을 적이 많다. 사람을 처음 보았을 때 용모와 말씨와 행동에
있어 겸손과 겸양이 묻어 나고 그리고 극히 절제된 단순함으로 일관된 모습을 대하게 되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의식적으로 무장된 것은 금방 드러나지만 평상심으로 갖추어진 어진 사람에게서는 고요한 평온함과 성자의 광배에서 얻는 느낌
처럼 자비심이 흐르음을 느낄 수 있다. 극화려함과 급성장의 긴장이 베여 있지 않은 꽃이 바로 우리들 산천에 널려 있는 들꽃이다. 그리고 붙여진 이름 또한 아름답기 그지 없다. 늘 보고 살피며 그 조촐함에 자신의 인성을 바로 잡을 일이다.
꽃 속을 걷는 일은 자연을 얻고 그 속에 담긴 평화를 얻는 일이다. 자유가 느껴지고 따라서 평화가 가득함을 느낄 수가 있었다.
걷는 자를 통하여 느끼는 느릿함과 절제된 정원의 공간 그리고 그 모습들의 배경이된 거대한 숲, 이런 것들이 어울려 조화를
이뤄내는 것이 바로 평화로운 모습이다. 자연은 사람들까지도 자연의 한부분으로 감싸 안는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항상 깊은 인상을 주는 것이다. 성자들께서 문명을 버리고 자주 또는 오래토록 머무는지 그 이유를 자연을 보고 깨달을 수 있다.
하늘 말나리 꽃이 반긴다. 화려한 주홍빛이 인상적이지만 그 화려함을 순화시키려 짙은 주황색 점을 점박이로 수놓은 모습을
나는 더 좋아 한다. 이 점이 너무나 좋아 진천 통나무 집에 여러 종의 나리꽃을 심어 놓았다. 내가 보유하고 있는 종 중에 범꼬리
나리꽃이 있다. 긴 대 위에서 바람결에 흔들리는 꽃의 모습이 범이 숲을 거닐며 기분이 좋아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모습같다하여 붙여 진 이름이다.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다.
사진을 찍으려면 일행보다 앞서서 걸어야 하거나 뒤로 처져서 걸어야 할 때가 많다. 숲 터널이 끝나는 지점에서 일행을 기다렸다.
손주가 나를 본 순간 나에게 달려 온다. 그것도 길이 험한 쪽으로... 샷다를 누른 후 달려 가 안았다. 그리고 안도했다.
뺨에 뽀뽀하니 씩 웃는다. 그리고 잔듸 평전에 내려 놓았다.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풀 위를 누빈다. 거침없이 내달리게 놓아 두었다.
내달리기 시작한다.
한 동안을 풀밭에서 정신 없이 뛰놀던 손주는
엄마가 부르자
다가 오면서도 뒤에 미련이 많이 남아 있는지 ... 시선은 뒤에 가 있다.
꽃의 정원을 산책하는 모습에서 속도감이 없으니 얼마나 보기 좋은가!
꽃 경계점에 사위와 손주를 세우고 추억을 만들어 주었다.
가족들을 몽땅 세웠지만 간격이 무시되어 여백의 맛이 사라졌다. 그렇게 고래고래 소리쳐 떨어지라 했건만.......
일체감은 좋지만 여유로움이 사라진 것이다.
창포꽃이 아름답다.
사실은 분홍바늘꽃 재배 면적 더 넓다. 화각을 조절하고 구도로서 그 면적을 줄이고 전면부에 창포꽃을 넓게 펼친 것이다.
양립된 넓음은 아름다움을 회석 시켜버리고 만다. 인간과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세상일도 그렇다. 이 세상을 구하고 아름답게
꾸미는 사람들은 겸손된 작은자들이지 힘을 갖은자들은 아니라는 것이다. 힘을 갖은자끼리 만나게되면 그 즉시 긴장감이 연출되고 분쟁으로 끝을 맺지만 작은자들은 평화를 이끌어 내는 것이다. 왜 가난해야 하고 겸손해야하며 단순해야 하는지, 난 자주
자연을 통하여 익히고 배운다.
분홍바늘꽃이다. 초록빛과 극히 어울리는 빛이 분홍빛이다. 자연의 빛인 초록은 어떤 바탕이되어도 아름다운 것은 사실이지만
꽃빛과는 전부 어울린다.
압화 전시장에 들렀다. 백합과로 한라산에서 자라는 한라 부추다. 압화는 생화에서 느끼지 못하는 색다른 맛이 있다.
압화는 가을의 정취를 얻을 수 있다. 흙에서 난 것들은 흙으로 다시 돌아 간다. 흙으로 돌아갈 무렵이 다가 오면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생기를 잃어버리고 초췌하게 변해 버린다. 스스로 정을 때기 위한 하늘의 섭리라 생각한다. 퇴락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그 상태를 유지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다. 그 시점이 오면 사람은 모든 것을 체념하게 되는 것이다.
계곡으로 나가는 나무 다리, 이곳에 식구들을 세우고 촬영을 .... 종일 걷고 걸었던 손주는 주저 앉아버렸다. 일으켜 세워 보지만
어림도 없다.
쇠기둥에 메달아 놓은 새집들이 이색적이다. 손주는 그 모습을 보더니 달려 가 하나를 붙잡고 흔들어 본다.
그러더니 이젠 아주 흙위에 엎드려 버렸다. 나는 일부러 내버려 두었다. 흙과 친화력을 지니고 살아야 사람은 정직해 지고
자연의 이치를 깨닫고 살 수 있는 것이다. 흙을 느껴야 한다. 흙에서 와서 흙위에 살며 흙에서 나는 것들을 먹으며 일생을 사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문명은 자꾸 흙과 거리를 두게 한다. 그런 단절이 인간을 고립시키고 어둡게
만들어 가고 있다는 지론이 나의 각별함이다. 불필요한 문명도 스스럼 없이 버릴 줄 알아야 하는데....
나머지 일정을 소화시키려면 서둘러야 한다. 아직도 일정이 많이 남아 있지만 시간상 오늘은 월정사 전나무숲 길을 끝으로 귀향해야 겠다.
월정사로 자리를 옮기면서 불가에서 유래되어 오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범종각에 걸려 있는 법고, 범종, 운판, 목어
이야기와 더불어 일주문 천왕문, 해탈문과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도착하자 마자 샘으로 가 물을 마시고 범종가 아래에 자리 잡은 불교용품 판매소에 들렀다. 딸아이가 소리친다. 아빠~ 무소유책이 절판되지 않았어요! 그 소리에 제노베파가 다가 가더니
책을 살핀 후, 아니야 정찬주 작가가 쓴 소설책 이름이네 한다. 그러면 그렇지 법정님의 소신을 무력하게 할 자 누가 있겠는가
법정님계서 불일암을 등지고 깊은 산골에 계시던 곳이 바로 이 부근이다. 무소유~ 많은 사람들에게 마음의 위로와 삶의 방향을
가르치셨던 귀중한 책이였다. 그리고 평생 소신과 더불어 생각하시고 행동하시며 살아 오신 족적이 참으로 귀하고 맑다.
가시는 길 조차 초라한 행색으로 일관하신 성품을 우린 두고 두고 잊지 못할 일이다. 개인적으로 성 프란치스코의 회칙과 회헌,
유언 등등이 교과서였다면 법정께서 들려 주셨던 것들은 귀한 참고서였다. 성자의 가름침은 일관되고 일치를 이루고 있다.
법정님께서 출간하신 책은 전부 소유하고 있었는데... 딸아이 말로는 무소유책을 읽고 싶어진천 서가를 뒤졌는데 책이 없단다.
누군가 들고 간 모양이다. 아니면 내가 보다가 어느 구석에 처박아 놓았는지도 모르겠다. 내려가는 날 살펴 찾은 후 딸아이에게
빌려 주어야겠다. 여름 들머리 깊은 산사에는 이젠 여름 나절도 노루꼬리 만큼 남은 것 같다. 딸아이는 상원사도 들러가자 하지만
후일을 도모해야겠다.
월정사 천왕문을 나온 후 금강교 앞에서 난 일행들과 갈라 섰다. 일행은 전나무 숲길을 걸어 일주문으로 향하고 나는
주차장 세워 둔 차를 몰고 일주문으로 가 대기하기로 했다. 금강교를 건너 다리 아래 물에 비추는 잔상 구경을 했다.
불가에서 금강경이란? 금강처럼 단단하여 어떠한 번뇌와 집착이라도 깨트려 버릴 수 있는 부처님의 말씀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와 중국에서 가장 많이 읽혀지고 있는 경전으로서 원명은 금강반야경이라 부른다. 금강교 다리를 건너 가고 오면서
부처님의 금강경을 들었으니 번뇌와 집착을 버릴 일이다. 금강교를 떠나 차를 몰고 일주문 부근으로 갔다. 산사를 찾아 절집으로
들어 가려면은 처음 만나는 문이 일주문이다. 일주문이 있는 주변에는 항상 물가가 있다. 우리들이 성당에 들어가면서 성수를 찾아 성수로 재속의 사악한 일과 그 밖의 잘못된 일을 씻어 내고 성스런 마음을 모으듯 불가에서도 산문에 들어 가면서 세속의 온갖
것들을 물로 씻어낸다는 의미에서 일주문을 물가에 세우는 것이다. 식구들이 평화의 걸음 걸이로 가쁜하게 걸어 내려 왔다.
차에 오른 다음 나는 진부읍으로 차를 몰았다. 읍내에 가면 순 강원도식 거친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곳이 있다. 찬은 거의 산채이고
생선을(청어나 꽁치)를 장처럼 담궈 두었다가 조려 내주고 손두부는 직접 만들어 내는 집이다. 찬이 거칠지만 강원도 특유의
맛이 느껴지는 곳이다. 커다란 양푼에 비벼먹을 수 있도록 요청하면 고추장에 참기름을 넣어 주기도 한다. 된장찌게는 알싸하면서도 깊은 장맛이 감돈다. 장작불과 가마솥을 이용하여 만들기 때문에 깊은 맛이 감도는 것이다. 식사를 끝낸 후 나는 차키를 처남에게 넘겼다. 나의 가이드 임무는 식사를 끝으로 해방되었다. 1박 2일간의 가족끼리 여행은 평창 진부에서 1차 정리를 끝냈다.
여행의 끝은 최초 출발지인 자신의 가정으로 되돌아 갈 때 까지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자연의 서정적 자유로움 속에 묻어가며
보낸 우리는 서울에 도착하여 저녁을 함께 나누며 가을 즈음 소록도 여행을 계획하고 헤어졌다. 여행이란 되돌어 올 곳이 있기
때문에 성립되는 것이다. 여행이란 아는 만큼 눈에 보인다고 한다. 나는 이 말을 이렇게 바꾼다. 숲을 찾는 여행이란? 마음을
여는 자연의 서정적 바람이다. 자연과의 일체감은 바로 우리에게 기쁨을 주기 때문이다.
첫댓글 꽃과,아기와,숲과,그 안에서 행복 하신 가족들~~주님의 작품입니다.
주님,제노베파 가정을 통하여 마음껏 찬미 받으소서.
고맙습니다. 꾸~벅. ^*^ ~~ ^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