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리 속에 살아 온 인생
황박연•최진희 가정
1. 어린시절 어머니의 정성
나(황박연)는 1949년 7월 29일(음) 충남 대전시 삼성동에서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거기서 당시 제일 오래된 삼성국민학교에 입학을 했는데, 가정 사정으로 인하여 홍도동으로 이사를 하였다. 그래서 왕복 2시간의 먼 길을 걸으면서 통학했다. 작은 발길로 2시간을 통학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매월 초사흗날만 되면 시루떡을 정성껏 만들어 장독 앞에서 하늘 앞에 비셨다. 사흘전부터 집안 청소는 물론 목욕재계로 정성을 드렸다. 나도 어렸을 때이지만 같이 청소했다. 나는 어머니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몰랐으나, 하늘 앞에 지극한 정성을 들이는 자세를 몸에 익힐 수 있었다. 가정에서 부모의 말과 행동을 자녀가 보고 듣는 것이 바로 살아있는 교육이며 효과가 아주 크다는 것을 일찍부터 체험했다.
가족이 먹고 살기도 힘든 형편이었으나, 어머니는 시루떡을 동네 사람에게 나누어 주셨다. 어머니는 베푸는 마음이 충만했고, 남을 위해 사는 데 친숙했다. 그야말로 착한 어머니셨다. 물건 팔러 오는 보따리장수가 오면 꼭 하나라도 팔아 주면서 위로하고 격려하였다. 거지가 오면 일체 무시하지 않고 뭐라도 한 가지 꼭 주셨다. 이웃의 힘든 모습을 어머니는 공감하셨고, 어떻게 해서든지 도와주려고 하셨다. 위하여 사는 삶이 몸에 배여 있었다.
꾼 돈은 약속 날짜에 꼭 갚았으며, 부모님 모두 자식한테 쌍스런 말이나 욕 한번 안하셨다. 한 번도 손이나 매로 때린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나도 평생 욕 한번 안했다. 어머니는 우리가 공부하는 밤 12시에도 간식을 챙겨 주셨다. 힘든 가사 노동에 잠이 쏟아질 조건인데도 불구하고 참으시며 자녀의 공부를 지지하고 격려해 주셨다. 그 간식은 음식 이상의 가치를 가졌다. 음식을 먹는 것은 부모님의 사랑을 몸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간식은 더 맛이 있었다. 부부 사이에 싸움을 한 번도 안 하셨다.
그런 환경에 익숙하여서 나도 모르게 부모님의 삶의 패턴을 따르고 있었다. 가정교육은 부모로부터 자녀에게로 자연스럽게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 피부로 와 닿았다. 나도 우리 자녀들 앞에 이미지가 좋은 부모가 되기를 노력하였고, 지금은 그런대로 만족한 편이다.
선친 황의순은 대전 열차 기관조사로 일하셨고, 6•25 참전 용사였으며, 성화 이후 국가 유공자로서 국립묘지에 안장되셨다. 내 가슴속에는 자랑스러운 부모님이 자리하고 있다. 부모님을 생각할 때마다 힘이 나고 흐뭇하고 행복하고 훌륭한 가문이라는 자부심이 생긴다. 부모의 사랑은 영원하다고 하는데, 나도 영원히 부모님의 사랑에 뭔가를 효도로써 보답하는 아들이 되어야겠다.
2. 1962년 2월 공립중학교 낙방이 인생의 전화위복
1962년 2월 졸업을 앞두고 1차 공립 한밭중학교를 응시하였으나 탈락했다. 일생 처음 탈락의 고배를 마셨고, 씁쓸한 맛을 체험했다. 김영봉 담임 선생님이 자신있게 나를 추천하셨고, 나도 당연히 합격될 줄 알았다. 그러나 결과는 111점 커트라인에 109점, 2점 차이로 낙방하였다. 열심히 공부한 보람도 없이 낙오자가 되어서 일생의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이것이 인생의 전환점이자 약이 되었다. 나는 2차 사립 중앙중학교에 커트라인 109점으로 겨우 합격하여 입학하였다. 그 당시에 공립중학교와 사립중학교는 하늘과 땅 차이만큼 크게 여겨졌고, 인간 대우의 우열이 심했다. 차가운 눈길을 인내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낙방 후 그렇게 매일 같이 좋아하며 두었던 장기판을 하루아침에 칼날 같이 단절하고 다 없애버렸다. 그 이후로 한번도 장기판 구경도 안 하고, 근처에는 얼씬도 안하였다. 나는 오로지 공부에만 매진했다.
학교가 선화동이라 상당히 멀었지만 가난 때문에 시내버스 탑승은 엄두도 못 내고, 매일 거의 논 밭 사이를 가로지르며 걸어 다녔다. 왕복 2시간 30분 정도가 되었다. 특히 춥고 무더운 한겨울 한여름에도 걸어서 통학하였다. 더위와 추위를 이기는 것은 힘들었다. 나는 통학하면서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한손에는 영어 단어를 들고 걸으면서 외웠다. 그리고 과목 요점 정리 한 것을 쥐고 외우면서 걸었다. 심지어 화장실에서도 시간이 아까워 공부했다.
밥 먹으면서도 단어를 외우면서 식사하였다. 집이 가난하여서 겨우 먹는 음식, 말 그대로 입에 풀칠하는 것은 보리밥이나 국수였다. 지독한 가난의 고통을 뼈 속에까지 새겼다. 나는 가난에서 정말 해방되고 싶었고, 그 길은 공부밖에 없다는 것에 일념을 집중했다. 온통 공부 뿐이었다. 그 결과 8학급 480명 중 전교에서 늘 5등 안에 들었다. 물론 술. 담배. 영화 구경, 연애 등은 생각조차 할 겨를이 없었고, 공부에 방해가 되는 것들은 철저히 차단했다. 독한 마음을 품고 집중 실천했다.
3. 1965년 3월 대전공전 입학을 인생의 디딤돌로
고등학교 입학시험 즈음에 나는 소질과 전혀 무관하게 명문 대전고등학교를 포기하고, 취직 잘 된다는 대전공업고등전문학교(고등학교 3년+ 공과 대학 2년, 5년제 국립 공전)에 응시했다.
전체 학과가 기계, 전기, 토목, 건축 각 40명씩 160명을 모집했다. 기술을 가지면 제일 취직이 잘된다는 관점에서 커트라인이 대전고등학교보다 높다는 것도 무시하고 무조건적으로 기계과를 응시하였다. 중앙중학교 1956년 개교 이래 11년 만에 최초로 최고 명문 대전고등학교를 뛰어 넘는 전국 4대 국립 공전 중에서도 명문 대전공전에 합격하였다. 1965년 3월 입학하는 그 순간은 새 역사를 남기는 날이었다. 한밭중학교 낙방의 비참한 순간이 사라지고, 이제는 자랑스럽게 변했던 순간이었다.
그 때부터 난생 처음으로 부모를 기쁘게 해드릴 수 있었다. 그리고 부모님께서도 희망을 갖고 사시게 되었다. 얼마나 큰 경사였던가! 부모님 앞에 떳떳한 효자가 되어서 가슴이 벅찼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하늘의 큰 행운이었습니다.
다행히 학교는 가까워서 왕복 1시간이라 아주 좋았다. 그 길을 5년간 다녔다. 더욱 정신을 차리면서, 이제부터 새롭게 시작한다는 자세로 쉬는 시간에도 공부하였다. 수업 이외에는 모든 시간을 공부에만 집중했다. 전국 수재들만 모인 학교였다. 그리고 공대였기에 이론과 실기를 병행하는 수업을 해야 했다. 성적은 이론과 실기를 합하였다. 나는 이론 과목에서는 우수한 성적을 올려도 물건 만드는 실기를 잘 못했다. 그래서 1등은 못하였으나 상위는 유지했다. 사실 취직 시험은 실기는 없었기 때문에 그리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자신감이 충일(充溢)했다.
4. 1970년 3월 한국전력 입사를 독립된 인생의 출발로
당시 일류 직장 시험 점수는 350점이었다. 그것은 전공 200점, 영어 100점, 일반상식 50점으로 편성되었다. 드디어 1970년 2월 졸업을 목전에 두고 1969년 10월 졸업예정자로서 공대 최고의 일류 직장인 공기업 한국전력에 응시하였다. 대전에 거주하니까 많이 뽑는 서울 00명 포기하고 그것도 극소수 0명 뽑는 충청도 지역에 응시하였다. 조마조마한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합격 통지를 받았다. 극적으로 합격 한 그 때의 그 순간의 기쁨이란 상상을 초월했다. “이제야 가난으로부터 해방되는구나!”하면서 흥분되었고, 나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오직 공부벌레가 되어서 책만 파고들었던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결과가 좋으면 우여곡절의 과정도 오히려 빛난다.”고 하는 말이 딱 맞았다.
그리고 바로 그 해 공무원 시험에도 합격하니 정부에서 3차에 걸쳐 임용 연락이 왔다. 나는 그 좋다는 상공부 발령마저 포기하고 월급을 많이 주는 한전에 입사하였습니다. 첫 봉급을 받아든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 당시 동사무소 공무원 초년 월급보다 5배가 많았다. 생각하고 듣던 금액보다 더 많아서 깜짝 놀랐다. 묵직한 월급봉투를 들고서 감개무량(感慨無量)하였다. “이래서 일류 직장이구나!” 하는 것을 실감하였다. 고진감래(苦盡甘來)의 맛을 대전공전 입학에 이어 두번째로 터득하는 순간이었다. “이제 나로 인하여 부모님과 형제들도 숨쉬고 살겠구나!”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 동안 못다 한 효도를 하고 형제간의 우애를 다지기로 결심했다.
5. 1971년 8월 15일 입교는 새로운 인생길로
우연히 영천에서 울산가는 시외버스에서 옆사람과 2시간 정도 나누었다. 이름 모를 여성의 입에서 한국과 세계의 미래를 흔드는 충격적인 말씀이 쏟아져 나왔다. 그녀는 통일교인이었다. 종교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는 나였기에, 통일교회에 대해서 기독교가 이단이라고 하는 지도 잘 모르는 상태였다. 그 다음 날 만나기로 한 울산국민학교 정문에서 기다렸으나 나오지 않았다. 새 진리로 가슴에 불이 당겨져 뜨거워진 나는 3시간 동안이나 통일교회를 물어서 찾아 가서, 믿음의 부모 김안자(120가정 홍주식 목사는 성화)사모를 만나 인연이 되었다. 알고 보니 김안자 사모는 3년 임지 동원 기간이었다. 한번은 점심 때 만나 짜장면을 얻어먹었는데 지금까지 잊을 수 없는 맛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렇게 해서 통일교회에 입교하였다. 당시 한국전력 울산화력발전소 사원으로 근무하면서 대학 3학년에 편입하여 공부하던 22살 때였다. 한창 세상을 품을 만큼 호연지기가 강한 20대 초반에 나는 우주를 껴안고 천주를 주관하려는 열정이 나를 에워쌌다. 마치 구름 위에 붕 떠 있는 느낌으로 시간을 보냈다. 두툼한 월급봉투보다도 더 큰 기쁨이 희열로 다가왔다.
입교 4개월만에 서울에서 대학 동계 7일 수련회가 있어서 휴가를 내고 참석했다. 첫날 첫 시간에 “하나님은 존재 하는가?”라는 주제로 강의가 진행되었다. 안창성 강사의 강의를 듣고 하나님이 존재함을 처음으로 확인하고 굳게 믿게 되었다. 실상 늘 그 점이 내가 찾고자 했던 인생의 큰 문제점이었는데, 마침내 답을 찾았다. 놀라운 원리임을 느끼면서, 그 때부터 수련이 끝날 때까지 원리공부에 몰입하였다. 쉬는 시간에도 열성적으로 공부하였다. 취업을 중심으로 전력투구 공부하던 태도가 이제는 영적 차원의 새 진리 터득에 나를 전적으로 몰입시켰다.
당시 울산화력발전소 황덕호 소장에게 인사차 갔더니, 김영휘 통일교회협회장을 잘 안다면서 나를 밝게 받아주셨다. 두 분이 동문이라고 하면서 나에게 잘 근무하라고 격려하였다. 수련을 끝내고 회사로 돌아오니 7일간 휴가가 출근처리가 되어 있었다. 직원으로서 나 자신의 질적 고양을 위한 자아성찰의 시간을 위해 일주일간 자리를 비웠는데, 회사는 그것을 출근으로 인정해 주었다.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늘부모님과 참부모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 한 순간이었다.
그 후 한 1년 동안 열심히 다녔을 즈음에 못다 한 대학 2년을 공부하기 위하여, 입사 다음해인 1971년 2월, 부산의 동아대학교 기계과 3학년에 편입 시험에 합격하여 학업을 시작했다. 먼 거리였으나 피곤을 모르고 다녔다. 울산과 부산을 버스로 오가며 공부하였다. 그 당시는 도로 교통 시설도 충분히 좋은 상태가 아니었고, 자가용도 없었다. 주로 밤에 발전소에서 근무(4조3교대 근무)를 하면서, 주간에 왕복 시외버스 및 또 시내버스로 7시간이나 소요되었다. 옷을 갈아입을 시간이 없어서 작업복 차림으로 교회를 가고, 학교를 가고, 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였다. 어떤 때는 시외버스 시간 때문에 라면을 먹다 말고 갔다 와서 먹기도 하였다. 수업을 마치고 곧장 야간 근무를 위해 그대로 회사 근무복 차림으로 울산화력발전소에 출근하였다. 잠은 버스에서 잤고, 식사도 간단히 하였다. 2년 동안은 그야말로 24시간을 48시간으로 활용하면서, 화장실 갈 틈도 없이 바쁘게 지냈다. 시간과의 전쟁을 치르는 것과 같았다.
그 동안 살아오면서 2년 동안은 생애에서 가장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었다. 다행히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잘 견디었고, 무사히 1973년 2월 졸업을 하게 되었다. 나는 살아서 역사 하시는 하늘부모님과 참부모님을 그 때 절실히 느꼈다. 입교는 1971년 8월 15일로써 비교적 짧은 2년의 신앙생활이었지만 신앙의 신비와 위력을 절절히 체휼하였다.
그러던 와중에 많은 계시를 받아 한 때 신앙에 혼란이 오게 되었고, 내가 새로운 교회를 창단하여 교주가 되겠다는 생각까지 가졌다. 교만의 유혹이 나를 엄습하였던 것이다. 내 안에서 꿈틀대는 일탈의 욕망을 억누르기 위해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였다. 속으로는 대 혼란의 파도가 일고 있었지만, 그래도 근무 시간 외에는 주일 낮과 저녁 예배에 출석했다. 수요일 저녁예배에도 최대한 꼬박 참석하였다.
그 때에 유일하게 김안자 믿음의 부모는 변함없이 나를 대해 주었고, 일주일에 한번은 꼭 심방을 오셨다. 폭풍우에 휘말린 것 같은 나의 영적인 상태를 차분하게 안정시켜 주셨다. 그 정성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는 다시금 새로운 교주가 될 엉뚱한 생각을 포기하고, 통일교회에 열심히 다니기로 결심하였다. 교주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무서운 일인지를 모르는 어린 나에게 불어 닥친 유혹의 고비를 무사히 잘 넘겼다.
6. 1973년 5월 군 입대 및 1975년 12월 한전 복직 후 1년을 10년같이 축복 준비
대학교 군사 훈련 덕분에 군복무 3개월 단축 혜택을 보았다. 그 당시는 34개월 복무를 해야 했기에 3개월 혜택은 엄청난 것이었다. 31개월을 복무 후 1975년 12월에 제대하였다. 곧장 한전 울산화력발전소에 복직하였고, 동시에 울산교회에서는 윤영태 교역장의 열성적인 지도하에 청년회장으로서 40여명의 회원과 단합하면서 시간만 있으면 전도 활동을 하였다. 주일 예배 사회도 보면서, 축복 때까지 3년은 그야말로 1년으로 10년을 커버한다는 생각으로 열정적으로 활동하였다. 그 결과 박판남 교구장의 표창장도 수상하였다.
회장인 나의 지침을 따라서 부회장 최혜식, 총무 이옥주 회원을 비롯하여 모두가 열심히 활동하고 협조하였다. 그게 인연이 되어 훗날 조규조-최혜식 목사 가정이 근무하던 광진교회 소속의 유주완을 우리 막내 황난경의 주체로 맞았다. 최혜식 사모의 도움이 컸다.
나는 주야로 전도에 몰입하였다. 직장은 교대 근무라서 매일 낮에 활동이 가능하였다. 그래서 때로는 혼자 태화강이나 학성 공원 등을 다니면서 주로 중고등 학생들을 위주로 전도활동 했다. 스크랩 북을 갖고 다니면서 원리강의를 하였다.
그리고 부모 형제 전도를 위하여, 특히 부모 전도를 위해 일주일 금식을 2번이나 하였다. 그런 정성이 쌓인 덕분인지, 박정란 모친이 드디어 절을 포기하고 통일교회에 입교하셨다. 입교 후에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고, 교회 권사가 되셨다. 성화하실 때까지 나를 위해 정성을 많이 들이셨다. 그것은 나에게 힘이 되었다. 6000가정 축복의 해인 1982년 기성축복도 받으셨다. 나는 동생들을 전도하여 여동생 황복순 6000가정 축복, 남동생 황수연 6500가정 축복, 여동생 황복자와 황복희를 기성축복이 되게 인도하였다. 그리하여 부모 및 5남매 모두 축복가정이 되었다. 귀한 하늘부모님과 참부모님의 역사와 은사에 감사 할 따름이다.
그리고 축복을 위한 또 하나의 모험을 했다. 축복을 위한 조건으로 21일 수련이 필수이기에 참석했다. 지난 번의 7일 수련에 비할 바가 아닌 긴 기간이기에 직장 동료 및 상사들, 그리고 집안에서도 극구 만류하였다. 직장 상사의 허락이 없었지만, 축복은 직장보다 중요하기에, 그냥 사표 낸다는 각오로 구리 수련소에 입소하였다. 입소 순간부터 1분 1초가 나를 변화시켰다. 만물이 새롭게 보였으며, 수련 기간 21일을 몽땅 천국 생활을 맛보는 기막힌 은혜의 시간들이었다. 고맙게도 1등 수료상을 받아서 더 좋은 수련이었다.
그리고 나서 직장에 출근하러 갔더니 이게 웬일인가! 상사의 꾸중도 없고, 사표 수리도 안 되어 있었고, 21일간도 휴직도 아닌 21일 출근으로 처리가 되어 있었다. 7일 수련과는 비교도 안 되는 긴 기간인데도 불구하고 회사에서는 나의 충심을 이해해 주었다. 나는 정말 깜짝 놀랐고 감사했다. “진짜 기독교인은 황박연이다!” 하면서 동료들이 오히려 나를 축하해 주었다. 환영 인사를 받고 보니까 다시금 다시 살아 역사하시는 하늘부모님과 참부모님의 역사를 체휼했다. 지금도 그 추억이 뚜렷이 내 가슴에 각인되어 있으며, 나의 신앙 길에 힘이 되고 있다.
나는 전도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1978년 10월 약혼식에 참석하러 가는 날도 차안에서 전도 하려고 스크랩북을 들고 올라갔다. 나는 청년회장으로서 울산의 청년들에게 절대 참부모님이 정해주시는 배필을 보이코트 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다짐시켰다.
드디어 기다리던 약혼식! 1978년 10월, 참아버님이 “남자 중에서 대학교 졸업생 손들어 봐!” 하시더니, 지금의 처 최진희를 정해 주셨다. 100번째도 안되어 일찌감치 부부 인연으로 맺어 주셨다. 나는 아무 말도 않고 참부모님께 경배하자고 하면서, 말 한마디 물어보지도 않고 기쁜 마음으로 정말 감사한 마음으로 함께 경배 하였다. 나는 처음부터 불구자만 아니라면 된다고 다짐하면서도 혹시나 내 생각과 어긋나면 어떻게 내가 감당하여야 할지를 두고서 생각도 해 보았다. 실제로 대상을 만나고 보니까 신체가 정상이어서 천만다행이었습니다.
일생일대의 가장 큰 축복이기에 기회만 되면 어디서나 아내를 자랑하였다. 부인 자랑은 팔푼수라고 하지만, 나는 축복을 자랑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아내 자랑을 참으로 많이도 했다. 오늘의 아내 최진희를 참부모님이 정해주셨음에 늘 감사했고, 지금 이 순간까지도 감사 또 감사 할 따름이다.
7. 1979년 1월 한국중공업 입사는 축복가정 출발의 준비로
한전 자회사인 발전소를 만드는 한국중공업에 대리로 입사하였다. 1978년 10월 약혼식 때부터 거의 4년간 임지 생활을 했다. 그 동안에 목회에 전념할까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다. 자문한 결과, 교구장, 김안자 사모 남편 홍주식 목사께서도 “꼭 목회만이 뜻길을 위한 충성은 아니다. 직장 생활하면서도 얼마든지 교회에 충성을 할 수 있다.”는 조언을 하셨다. 나는 직장 근무를 계속하면서 충효의 도리를 다하기로 결심했다.
그런 임지 기간에 협회원리시험도 합격하였는데, 아내 최진희도 임지 기간에 교구 시험을 합격하여 정말 고맙게 생각하였다. 아내에게 원리시험을 치라고 일언반구도 안했는데 합격해서 참으로 감사했다. 부부가 함께 협회시험과 교구 시험에 합격을 함으로써 하늘 앞에 떳떳한 기준을 세울 수 있었다.
실상 아내는 순회전도단 3기를 마치고 전남 무안군 청계면에서 6개월간 개척 전도 활동을 하였고, 다시 5기 순전단에 입단하여 활동하였다. 대천 출생으로 오랜 기간 보령교회 및 홍성교회에서 유치원 교사로 봉사하였다. 아내는 이미 목회 활동을 나보다 먼저 경험한 터전이 있었기에, 훗날 나의 목회 활동을 위해서 큰 힘이 되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미래를 준비해주신 하늘부모님과 참부모님의 역사와 은사에 감사할 따름이다.
동시에 임지 기간 때인 1979년 1월 서울로 발령을 받아 강남교회로 나가게 되었다. 당시 고종원 교회장이 시무하셨고, 총각 집사로는 처음으로 나에게 임명장을 주셨다. 임명장은 나로 하여금 더 열심히 충효의 도리를 다하도록 이끌었다. 인간에게 있어서 인정과 명예 부여는 생각하지 못한 힘을 발휘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그리고 전년도 울산에서 거둔 전도 실적으로써 1979년 5월 김영휘 협회장으로부터 월1인 전도상을 수상하였다. 전력투구한 보람을 느꼈고, 심혈을 기울였던 지난날들의 추억이 스치고 지나갔다.
8. 창원한국중공업 전근 발령은 본격적 신앙의 출발로
회사 근무 때문에 거주지는 창원에 두었지만, 교회를 위해 내가 무엇인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일부러 먼 동마산교회로 출석하였다. 거기서도 청년회장, 교회 총무를 맡았고, 나중에는 제직회장까지도 선거로 해서 맡게 되었다. 그야말로 신바람 나는 교회 생활이었으며 주일날은 아침부터 저녁 예배 때까지 교회에 있었다. 시간이 가는 줄을 모르고 살았다. 교회에 있는 것 자체가 마냥 행복했고 천국이었다.
1982년 1월 한국중공업 입사 3년 만에 총각 과장으로 승진을 하였고, 동마산 김병화 교회장의 승진 축하 예배를 멋있게 진행하였다.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가정 출발 전에 직장에서 과장으로 승진한 것도 회사에서는 특이한 경우에 속하였다. 그리하여 물질 축복도 많이 받았다. 빈손으로 출발한 사회 초년생 직장이었는데, 43평 아파트에 살았고, 아내는 엑셀 자동차를 탔고, 나는 소나타로 출퇴근하였다. 먼저 면허를 받은 아내 덕분에 나는 학원도 안가고 아파트에서 운전 연습을 하여서 면허를 획득하였다. 자가용 2대를 보유하면서 우리 부부는 각자 열심히 뜻을 위해 봉사 헌신하였다. 마음도 뜨거웠고, 그만큼 자동차도 신나게 굴리면서 여기저기로 다니면서 말씀을 전파하였다. 우리는 참사랑의 향기에 도취되어 살았고, 그것이 우리 부부에게는 천국생활이었다. 참으로 살아 역사하시는 하늘부모님과 참부모님의 은혜를 맛보았으며 큰 축복이었다.
가정 출발 후 첫 아들을 낳았다. 사랑의 결실체인 자녀를 얻은 기쁨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 인간과 피조세계 창조 후에 기뻐하셨던 기쁨의 심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호사다마(好事多魔)일까? 출산 후 1984년 아내가 39세의 젊은 나이에 소화가 안 되었다.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았더니, 결과는 “평생 5끼를 조금씩 먹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 부부는 큰 충격을 받았다. 엄마와 아내가 건강해야 가정이 건강하고 화목할 것이며, 특히 전도활동과 사회활동을 활발하게 할 수 있을 텐데… 가슴이 바짝 타 들어갔고, 입술이 말랐다. 밥맛도 없었고, 기쁨이 사라졌다.
우리 부부는 간절한 자세로 하늘 앞에 매달렸다. 그때까지 늘 상비약으로 활용하던 일화인삼엑기스를 매일 아침 식사 전과 밤에 자기 전에 한 스푼씩을 간절히 기도 후에 먹었다. 100일간 먹고 나서 다시 병원을 찾아서 진단을 받았다. 오! 하나님! 참부모님! 아픈 흔적이 싹 사라졌다. 서울대병원에서도 고칠 수 없다고 진단한 위장병을 기적적으로 고쳤다. 정말 하늘부모님과 참부모님의 역사와 은사에 감사 할 뿐이었다. 그러한 체험이 굳건한 신앙의 큰 바탕이 되어 그 이후로 어떠한 시련도 극복 할 수 있었다. 우리 부부 스스로 생각해도 “만족스러운 신앙의 길이요 인생길이 아니었던가!” 라고 회고를 해 본다.
그리고 아내는 수지침과 방송통신고등학교에 대하여 인식을 하게 되었다. 가정 출발 후 우연한 기회에 수지침을 배웠다. 그 덕분에 평소에 눈이 많이 부신 눈병의 고통을 안과에 안가고 스스로 고칠 수 있었다. 놀라웠고 신기했다. 그리고 여러 사람들의 병도 많이 무료 봉사로 고쳐주었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나의 잇몸이 뚱뚱 부어서 아무것도 먹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희귀병에 걸린 것 같았다. 그런데 아내가 내 잇몸병을 수지침으로 단 한번에 치료했다.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때부터 나는 아내를 우리 집안의 의사로 인정하고, 나도 본격적으로 수지침을 배우기 시작했다. 나는 성격이 어떤 목표가 정해지면 전적으로 몰입하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수지침에 전력투구하였다.
내가 수지침을 배우면서 아내는 수지침을 그만 두었고, 그 동안 못다 한 학업의 꿈 실현에 도전하였다. 아내는 일찍이 1970년 15세 때에 입교해서 뜻한바 있어 중학교를 졸업하자 곧 바로 3기와 5기 순회전도단에 들어가서 활동했다. 뜻길에 혼신을 다했기에 학업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마침내 가정출발 후, 늦게나마 마산방송통신고등학교에 입학하여 고등학교 3년 과정을 신청했다. 아내도 나 못지않게 집중력이 대단하였고, 시작하면 끝을 보는 성격이었다. 마침내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내가 첫 애기 아들을 유모차에 태우고 아내 마중을 위해 학교에 가기도 했다. 그 시절 아내는 만학 의지에 깊어서 두 눈동자가 반짝였다. 학구열에 불타는 20대 연령에서 볼 수 있는 안광(眼光)이 비쳤다. 힘들었지만 부부가 함께 하였기에 감사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고통이 있었기에 그 만큼 기쁨도 컸다. 고통과 고난은 기쁨과 행복에 비례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체험했다.
나는 그렇게 신나게 교회 생활을 한 덕분에 난 40세 때에 6000가정 최초로 장로가 되었다. 비록 목사는 안 되었지만, 평신도로서는 큰 은사였다.
9. 1991년 12월 환고향은 시련 속에서도 축복을 귀하게
참부모님의 명령이기에 절대복종의 마음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늘에 맡기고 1991년 12월 42세 나이에 내가 출생한 대전으로 환고향했다. 그 좋은 직장도 포기하고 모든 인연을 남겨둔 채 고향으로 갔다. 그 때부터 후 본격적인 시련이 오기 시작하였다.
아쉬웠던 것 하나는 교회에서 사장(社長)들만 30명 정도를 개인적으로 관리하여, 매월 동마산교회에서 1회 식사와 모임을 가지며 친교를 강화했는데 그것을 중단해야 하였다. 회비도 매월 상당하게 받으면서 미래를 기대했다. 그런데 그들을 이끌고 가려면 어느 정도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나의 형편이 빈곤한 상황에 직면하였기에 추진을 못했다. 모처럼 사장들을 교회로 인도하고 축복가정으로 바칠 기회를 얻었는데, 그만 잃고 말았다. 대전으로 이사를 와서는 재취업도 안 되었다. 어쨌든 생애 가장 힘든 환경에 처하게 되었다. 건강 하나만 남겨 놓고 차도 없어지고, 집도 없어지고 단칸방에 애들 3명과 부부, 5명이 옹기종기 살아야 하는 기막힌 가난의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다.
우리 부부는 심기일전을 다짐했다. 아침 새벽부터 리어카 1대에 호두과자와 붕어빵을 만드는 고된 노동일을 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리어카 장사를 해 보게 되어 어색했으나 다른 방법이 없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상황이라서 다른 생각을 해 볼 여유가 없었다. 무조건 현실에 도전할 뿐이었다. 그 동안 하늘부모님과 참부모님께서 우리 가정을 기적적으로 지켜주신 것을 상기하면서 다시금 우리 가정에 새로운 전기(轉機)를 마련해 주실 것을 굳게, 그 믿음 하나로 밀고 나갔다.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일했다. 그래도 일요일 주일 예배만큼은 꼭 참석 한 후에 다시 돌아와서 빵 굽는 장사를 하였다.
아내는 같은 장소 옆에서 낡은 트럭을 구하여 떡볶이를 팔았다. 그런데 걸핏하면 관청에서 단속이 나와서 이리저리 피해 다니며 쫓기어 다니는 일이 빈번하였다. 공무원들은 가끔 단속을 나오는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단속이 왜 그렇게도 많은가 하는 야속한 생각이 들었다. 홍도동 전세 집에서 멀리 떨어진 갈마동 아파트 옆 한자락 땅에서 매일 같이 아무도 만나지도 않고, 오직 하루 종일 일하였습니다. 눈물이 베여있는 빵을 먹어보아야 인생의 의미를 안다는 격언의 의미를 깨달았다.
최고 일류 직장을 다니던 화려한 경력은 지난 과거일 뿐이다. 해보지도 않은 육체노동을 난생 처음으로 하였다. 돈 벌이도 별로 안 되었다. 그야말로 하루 벌어서 하루를 연명하는 처량한 현실에 기막히고 눈물이 나는 생활이었다. “이 또한 무슨 하늘의 섭리인가? 뜻인가!” 하며 수많은 회개와 반성을 하면서, 가슴 아픈 사연을 안고 살았다. 무엇보다 나에게 기대가 컸던 하늘 앞에 면목이 없고, 아내와 자식 앞에 당당하지 못한 신세가 되었다. 특히 묵묵히 나를 따라와 주었던 아내 앞에 면목 없는 신세였다.
그래도 평생 해 왔던 십일조와 주일 예배만큼은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계속하였다. 십일조는 그날 매출의 10%를 매일 모아서 준비했다가 봉헌하였다. 그리고 단 한번도 하늘부모님과 참부모님과 교회를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나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이요, 자신도 모르는 어떠한 탕감의 역사인지도 모르겠다.”고 하면서 감사하면서 인내했다. 가난의 벽에 부딪쳐서 뜻 앞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 것이, 아니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는 것에 늘 하늘 앞에 죄송하고 속상했다. 그런 와중에도 하늘부모님과 참부모님께서 우리 가족을 지켜주셨다. 아이들도 건강하게 잘 지냈고, 그럭저럭 일용할 양식을 굶지 않고 먹을 수 있는 것 자체가 감사했다. 환고향 후 거의 2년을 주일 예배 이외는 각종 모임의 초대를 모두 끊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학창 시절 나의 친구였던 박건영이 찾아왔다. 그는 나와 함께 대학 공부도 하였고, 한전 취업도 같이 했고, 한국중공업 직장도 함께 입사하여 정말 절친한 사이로 가족처럼 지냈다. 박건영이가 문득 내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서 백방으로 수소문하고 물어서 마침내 나를 찾았다. 그는 내 형편을 보고 깜짝 놀랐다.
10. 1993년 12월 현대문구점 인수는 시련 속에서 희망도
그 때가 1993년 12월 내 나이 44세였다. 한창 일할 젊은 나이에 붕어빵 장사로 지내는 나의 능력이 아까워서 친구가 3000만원이라는 거금을 나에게 빌려 주었다. 친구는 “이것을 가지고 가게를 알아보라. 다시 재건해서 당당하고 멋지게 살아라.”고 격려하였다. 하늘부모님과 참부모님께서 그 친구를 우리 가정으로 보내주신 것은 또 다른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반전(反轉)의 기회가 되었다. 막다른 골목에서 소생의 빛을 보게 되었다. 할렐루야! 아주!
우리 부부는 인동에 있는 현대문구점을 인수하였다. 길거리에서 비바람을 맞고, 수시로 단속을 피해 도망을 다녀야 하는 빵 장사보다는 여러 가지로 좋았다. 그 동안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일하면서도 “언젠가 내가 하늘 앞에 보탬이 되는 날이 올 것이다.”는 생각을 하고 희망을 갖고 지낸 것이 결실을 이룬 것이다. 삶의 짐이 무겁고 감당하기 힘들어도 믿음과 소망의 끈을 붙잡고 버티면 하늘이 역사해 주신다는 것을 다시금 체휼하였다.
대전교구본부 교회를 다니고 있었는데, 남편이 장로인 경우에는 부인을 자동적으로 권사로 임명한다고 하면서 아내를 젊은 나이에 권사에 임명하였다. 장로와 권사는 신도들 중에서 모범되는 자가 임명을 받는 것이다. 부족하지만 우리 부부에게 그런 직책이 주어진 것이 한없이 감사했다. 또 브라질 자르딘 40일 수련회에 갈 사람을 뽑기에 아내를 보내게 되어 감사했다. 문방구 장사로서 그럭저럭 생활비와 남미 파송 비용을 충당할 수 있었다. 단지 나도 같이 가서 참부모님 모시고 교육도 받고 사진도 찍고 해야 하는데, 형편상 그러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지금도 그 마음이 남아 있다. 섭리에서 때를 놓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아내는 식당, 청소, 간병인 일을 하며 집안의 경제적인 책임을 졌다. 간병을 위해서 요양보호사 자격증과 미술심리치료사 자격증 등을 획득하였다. 일이 생기면 무조건 맡아서 처리하였다. 겉으로는 웃으면서도 속으로는 울고 있었을 아내의 모습은 정말 가슴 아픈 일이었다. 나도 남편으로서, 가장으로서 면목이 없는 처지가 되어서 울음을 삼키며 살았다. 둘 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 별 일 없는 것처럼 보였으나 속으로는 울음을 삼키며 살았다.
더욱 감사한 것이 있다. 아내는 심각한 위기의 코너에 몰린 가난 속에서도 단 한번도 나에게 바가지를 긁지 않았고, 묵묵히 나를 지지하고 때를 기다려주었다. 남편으로서 이보다 더 고맙고 감사한 일이 없는 법이다. 참부모님께서 해 주신 축복이 위대한 것을 알고 느꼈지만, 아내의 모습을 보면서 위대한 축복의 가치를 눈물겹도록 실감했다. 한번도 가난하다고 돈벌이에 대해 핀잔 한번 안하고 늘 미소로 대해 주었던 나의 아내 최진희! 정말 참부모님의 축복이 있었기에 지금 이 순간까지, 그 험난한 파도치는 세월을 극복 할 수 있었다. 부부는 보트를 저어서 앞으로 나가게 하는 사공이다. 한쪽이 노를 젓지 않으면 보트가 빙빙 돌거나 아니면 힘들게 항해를 해야 한다. 아내는 기꺼이 나와 함께 사공이 되어 주었고 노를 저어주었다. 그 덕분에 위기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1994년, 나는 45세 아내는 39세, 아이들은 남 10살, 여 9살, 여 8살이었고, 초등학교 1•2•3학년이었다. 한창 돈이 많이 들어갈 때였다. 나는 매일같이 자전거로 40분을 출퇴근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했다. 판매할 문구용품 구입도 자전거로 해야 하였기에 참으로 고달픈 중노동이었다. 자동차로 물품을 이동한다면 얼마나 편리하겠는가! 그러나 그 당시 자동차 구입은 엄두도 못 내었다. 그렇게 문구점을 하면서 미래가 아득 할 때가 많았다. 긴 터널을 지나는 기분, 오리무중(五里霧中)을 가는 기분이 들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악착같이 뛰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남편과 가장(家長)으로서, 장로로서 책임을 완수해야 하였다.
11. 1998년 5월 22일 가수원교회장으로 목회 첫 출발을
그렇게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 던 때, 1998년 어느 날, 아내가 우리 가족의 삶을 통째로 바꿀 기발한 새로운 제안을 했다. 가게를 손해보더라도 처분하고 목회를 해보라고 권유하였다. “이것도 하나님의 계시인가 보다.”라고 생각하고 손해보고 과감히 처분하였다. 주어진 천운의 기회를 맞이하여 망설이면 복을 놓치게 되기 때문이다.
참부모님의 말씀에도 “천운의 때”를 강조한 것이 많다. 공자보다 약 170년 먼저 태어난 관중(管仲, 기원전 723-645)은 이렇게 말했다. “지혜로운 이가 일을 잘 꾸며도, 시기를 딱 맞추는 것보다 못하니라!”(知者善謀 不如當時) 즉 지혜로운 것보다도 하늘이 준비해 주신 천운의 때를 붙잡는 것이 더 현명하고 복된 삶을 누릴 수 있는 기회가 된다. 그래서 나는 손해를 보면서도 과감히 가게를 정리하고 하늘의 지시를 따랐다. 지금 생각해도 아주 잘 판단한 것이었다.
곧장 이규대 대전교구장을 찾아가서 상의하였다. 그리고 가수원교회를 추천받았다. “식구도 적고, 헌금도 거의 없는 상태인데 가볼래?” 하고 물으셨다. 나는 장로까지 한 경험이라도 있으니까 목회에 기본 터전은 된 것이라고 생각하며, 감사하면서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첫 목회 출발을 하게 되었다. 49세로 늦은 나이였다.
그 후 얼마 있다가 신규 목회자 6개월 수련이 있다기에 입소하게 되었다. 교육 내용은 목회 출발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아내가 식당, 청소, 간병인 등의 일을 하면서 목회의 길을 갈 수 있도록 경제적인 책임을 맡아주었다. 개척교회라서 시간 여유가 좀 있었다. 목회자로서 돈 버는 일을 할 수는 없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주제로 기도했다. “병을 고치는 것은 목회하면서도 할 수 있다!”는 계시를 받게 되어 수지침 봉사를 전개하였다. 이미 오래전에 수지침의 놀라운 효능을 알고 있었던 경험이 나를 용감하게 인도하였다.
일본 식구 2명(아꾸쯔세쯔꼬 외)과 함께 일주일에 3번 이상 인근 노인정을 순회하면서 건강 상담 및 수지침 치료 봉사를 하였다. 개인적으로는 대전 서구청 자원봉사회 수지팀장을 맡아서 인근 또는 멀리 외곽 지역으로 다녔다. 때에 따라서는 하루종일 봉사도 하였다. 목표를 정하면 집중하는 나의 성격이 다시금 살아났다.
1999년 6월부터 2001년 12월까지 119 소방대 의료 봉사반 운영위원을 맡았고, 2000년 7월부터 2001년 10월까지 대전 서구청 자원봉사회 총무를 맡았고, 2001년 4월부터 2001년 12월까지 대전 가수원 시립도서관 수지침 강의를 담당하였다. 열심히 활동한 결과 많은 상을 받았다. 서부소방서장 봉사상(1999년 5월), 대전시장 봉사상(1999년 10월), 서구청장 봉사상(2000년 12월)을 수상하였다.
처음 해보는 가수원 교회장 생활도 3년 정도 지나고 보니까 힘든 시기였지만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인생 노정부터 목회 노정까지를 두루두루 체험했다. 목회자로서 노하우를 상당히 터득하게 되었다. 이임 할 때는 대전교구장상도 수상하여 하늘 앞에 감사 할 따름이었다.
12. 2001년 5월 21일 부여교회장으로 부임
부여로 부임하고 보니 당장 해결해야 할 난제가 하나 있었다. 빈 방에 오랜 기간 동안 청년 한명이 월세도 안내고 공짜로 살고 있었는데, 그 어떤 식구도 그 청년에게 나가라고 못하는 것이었다. 혹시 나가라고 하면 그가 폭력을 행사하여서 매를 맞지나 않을까 겁을 내고 있었다. 그래서 그냥 내 버려두고 있었다. 부임 후 얼마 안 되어 저녁 때 인사차 찾아가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오랜 시간 나누게 되었다. 그런 중에 갑자기 그 청년이 “목사님은 대단한 분이십니다. 앞으로 공손하게 스승으로 모시겠습니다. 내일 당장 여기서 나가겠습니다.”라고 하는 이변이 벌어졌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돌변 상황이 일어났다.
이 일로 인해서 많은 식구들이 깜짝 놀랐다. 심하게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기뻐했다. 알게 모르게 교회를 귀찮게 한 그 청년이 나가게 된 것은 결코 나의 힘이 아니라 정말 하늘부모님과 참부모님의 역사임을 체험하는 기막힌 순간이었다. 인간의 미래를 미리 책임지시고 준비해 주시는 하늘의 오묘한 섭리를 느끼면서 감읍(感泣)하였다.
이후 교육관에서 원리 강의를 열심히 하였다. 주일 예배 때도 생활원리 강의를 위주로 하였다. 그리하여 예배 상황도 좋아졌고, 헌금도 상향되었다. 특히 다문화 가정들이 많이 좋아져서 큰 감사와 보람이 되었다. 인근 노인정에 꾸준히 주 2회 이상 수지침 봉사를 하였다. 짧은 시무 기간이었지만 나름대로 의미 있는 시간들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가수원교회 시무 때부터 다니던 선문대학교 목회신학대학원을 참부모님의 특별 은사로 2년간 무료로 공부하여 참으로 감사했으며, 2002년 2월 졸업을 하였다. 배운 내용들은 나의 늦은 목회 생활에 실용적인 도움이 되었다. 건전한 신도가 되려면 신앙과 신학을 골고루 배우고 실천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체험할 수 있어서 행복한 시간이었다. 신학은 신앙을 뒷받침해주고, 신앙은 신학에 뜨거움을 제공한다. 이 둘은 물과 불의 관계이다. 인간은 선천적으로 배우면서 무언가를 창조하면서 기쁨을 느끼게 되어 있다. 배움을 통한 기쁨도 아주 컸다. 공자님도 배우는 기쁨이 아주 크다고 강조하셨는데, 참부모님의 말씀을 배우고 목회 현장에서 실천하는 희열은 아주 컸고, 보람이었다.
그리고 이때 고려수지침학회 유태우 회장으로부터 두 번이나 봉사 표창장도 수상하였다(2002.12, 2003.4). 특히 2003년 3월에는 고려수지침학회 학술위원 자격을 획득하여 2020년 3월까지 17년간 학술 강사로도 활동을 하였다. 목회와 수지침 양면에 걸쳐서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내 인생에서 빛나는 기간이었다.
13. 2002년 9월 17일 병천교회장으로 부임
병천교회로 부임하게 되었다. 여러 가지로 열악한 조건이었지만, 이 또한 내가 가야 할 길이라 생각하고 감사하며 시무하였다. 도착하여 짐을 대강 정리한 후, 이웃 마을을 찾아 수지침 봉사를 시작했다. 역시 주 2회 이상 실시하였다. 부임한지 1년 되었을 때 세계평화통일당의 사길자 회장께서 원리강의 교육차 방문하셨다. 강의 후 수지침을 놓아드렸는데, “수지침을 맞고 나니 컨디션이 좋아졌다.”고 하시면서 수지침을 한번 더 맞기 위하여 체류를 하루 연장하셨다.
사회장께서 같이 있던 이영자 회장(송근식 회장 사모)에게도 수지침을 맞으라고 권고하셨다. 이영자회장에게 수지침을 놓아드렸다. 그 다음 날 오셔서 “불면증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는데 수지침을 맞고서 처음으로 해가 중천에 뜨도록 잘 잤다.”고 칭찬하셨다. 그런 연유로 천안 통일회관에서 송근식 회장과 마침 미국에서 돌아온 아들 3명이 함께 와서 나에게 수지침을 배웠다. 시간 관계상 1개월을 배우셨다.
우리 부부는 부임하는 교회마다 식구들에게 항상 전도와 예배와 봉사를 강조하였다. 선문대 팀장인 황수하 집사가 우리 아들 황성무를 선문대 정보통신과에 입학하여 비트(BIT)컴퓨터를 배우게 하면 좋을 것이라고 조언하기에 2003년 3월 선문대에 입학시켰다. 황수하 집사는 선문대 컴퓨터 특별 훈련 팀장으로서 비트 프로그램을 열성껏 잘 지도해 주어서 감사했다. 국가로부터 특별히 선정된 선문대는 국가가 정한 비트 컴퓨터 기술의 대학교 두 개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혹독한 훈련을 받은 이들은 수료와 동시 취업이 100%였다. 어려운 가정생활에 아들이 취업하여서 희망을 갖게 되었다. 하늘부모님과 참부모님 앞에 감사 또 감사 할 뿐이었다.
이 모든 일련을 통하여 비록 삶이 힘들지라도 믿고 기도하며 열심히 하면 내가 모르는 사이에 하늘이 앞서서 인도하심을 실감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규진 집사는(당시 선문대 팀장. 이기성 협회장 친동생) 제직회장으로 열심히 교회장을 보좌하였다. 이 또한 하늘의 큰 은사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14. 2004년 2월 21일 가수원교회장으로 부임
2004년 9월 1일부터 2005년 3월 23일까지 가수원교회 천일국순회사로서 신설된 정림동교회장을 맡았다. 내 나이 55세였다. 그 이후로 2008년 7월 24일까지 가수원교회장을 담임했다. 우리 부부는 환고향섭리를 충실히 따랐다. 제물된 마음으로 절대복종하여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는 자세를 가졌다.
2004년 3월에는 딸 황난이가 공주 사범대 특수교육과에 합격하였고, 2005년 3월에는 막내 딸 황난경이 선문대 순결학과에 합격하여 입학하는 큰 은사를 받았다. 그 때의 빈곤한 가정 형편으로서 학비 조달이 힘들었는데, 순결학과 학생에 대해 등록비와 기숙사비까지 장학혜택이어서 하늘이 내려 주신 큰 은사였다.
사실 힘든 가수원교회의 목회 생활이었다. 게다가 아들과 딸이 줄줄이 대학교 1•2•3 학년이라 학비를 조달하기는 도저히 불가능한 경제적 환경이었다. 그런 속에서도 하늘의 인도로 기적과 같이 모두 학업을 계속 할 수 있게 되어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늘부모님과 참부모님의 은사에 감사 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우리 부부는 참부모주인상을 수상하였다. 지금까지 받은 상(賞) 중에서 최고의 상이었기에 감격스러웠다. 목걸이를 부상(副賞)으로 받았다.
한가지 불미스런 사건이 있었다. 주일, 예배 후, 오후에 2층에서 식구들에게 원리강의를 하고 1층에 내려와 보니 심각한 도난 사건이 생겼다. 사용하던 컴퓨터와 상으로 하사 받은 귀한 목걸이를 장롱 속에 감춰 잘 보관했는데, 그 잠깐 사이에 누가 훔쳐갔다. 원리를 아는 식구들이 모인 교회에서 도둑 사건이 생기다니? 어안이 벙벙했다. 컴퓨터가 없어서 업무에 큰 어려움이 있었고, 목걸이는 참부모님께서 주신 귀한 하사품으로 가보(家寶)로 보관하려고 했는데, 잃어버리게 되어서 아쉽기 짝이 없었다.
황난이가 2008년 2월 사범대 졸업 예정자 자격으로 2007년 첫 임용고시 1차 필기시험을 치게 되었다. 지역을 잘 선택해야 합격하고 취업이 바로 되기에 고민이었다. 그 동안 경쟁이 약했던 강원도에 응시하여 안전하게 합격을 하려던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아내가 “충청남도로 응시하라!”는 꿈을 꾸었다. 계시대로 강원도를 포기하고 충남에서 시험을 보아서 아슬아슬하게 합격하였다. 이 역시 살아 역사하시는 하늘부모님과 참부모님의 은사였음을 실감했다.
최종 2차 실기 시험 볼 때,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나는 목회자 교육 때문에 천안선문대에서 수련 중이었다. 날짜가 일치하여서, 목회자들이 합숙하던 방에서 나와서 시험 응시 하루 전날에 황수하 집사 원룸에서 황난이와 함께 숙박하며, 2차 교사 실기 시험 준비를 하는 혜택을 보게 되었습니다. 나와 아내, 딸 셋이 같이 시험 하루 전에 같이 자면서 기도하고 준비를 할 수 있었다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목회자 수련은 딸 황난이의 합격을 위한 수련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기적적으로 날짜가 일치하였고, 병천교회 목회 시절에 알게 된 황수하 집사를 만난 결코 우연으로 볼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중에 안 이야기이지만, 황난이가 시험 전날 연습했던 실기 항목이 면접 및 실기 시험 때 출제되어서 좋은 점수를 받아 극적으로 최종 합격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또한 하늘부모님과 참부모님이 내린 크나큰 선물이었습니다. 황난이는 졸업한 2008년에 당진 중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아 이후로 힘든 가정생활에 큰 힘이 되었다.
그리고 목회 부임과 동시에 전에 수지침을 가르쳤던 일본 선교사 2명과 함께 인근 노인정을 주 2회 이상 꾸준히 봉사하였다. 그 활약으로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었다. 이후 협회 지침에 의거한 전도 정책의 일환으로 덕산온천에서 매월 2박3일 수련회가 있었다. 그 자리에 노인정에서 알게 된 20~30명을 6개월 동안 수련시킬 수 있었다. 수지침 인연으로 많은 이들을 뜻길로 인도할 수 있었다. 놀라운 하늘의 역사였다. 수련회비는 노인 반(半), 교회 반(半) 부담을 했다. 그러나 기타 경비까지 큰 부담이 되었다. 수련회비만도 60~90만원 이었기에 식구가 몇 안 되는 가수원 교회로서는 수십명의 비용을 충당하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다행히 그 경비를 같이 활동한 아꾸쯔세쯔꼬 집사가 거의 다 충당하였다. 일본 친정에서 도와주는 하늘의 역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6개월 동안 대전교구내 최고 실적이었다. 그 실적과 공적을 토대로 2명의 일본 식구는 대전교구장으로부터 표창장도 수상하였고, 수련이 끝나는 년말에는 2명 모두 그 당시 아주 젊은 나이에 권사로 임명을 받았다. 가수원교회의 경사요 쾌거였다. 100여명의 입회원서도 경비를 부담한 아꾸쯔세쯔꼬 권사 앞으로 받았다.
15. 2008년 7월 24일 강경교회장으로 부임
강경에서 힘든 개척교회였지만 이웃 마을을 찾아 수지침 봉사를 역시 주 2회 이상 실시하였다. 한•일가정인 이장로 가정이 있었는데 그는 같은 동네 사는 평화대사에게 갚아야 할 수천만원 빚 때문에 오랫동안 고통을 받고 있었다. 그것을 내가 잘 이야기해서 해결이 되었다. 이장로 가정은 빚에서 해방되어서 더 열심히 살게 되었다. 내개 큰 보람이었다. 이를 계기로 강경교회 시무하는 동안 심방을 갈 때면 늘 이장로가 항상 자기 차로 협조하였다.
16. 2009년 6월 4일 청양교회장으로 부임
청양으로 부임 후, 곧장 이웃 마을을 찾아 수지침 봉사를 역시 주 2회 이상 실시하였다. 주일 예배 때 마다 아내가 먼 곳에서 사는 식구들을 봉고차로 운전하며 태워서 오고 귀가시키는 일을 하였다. 시골이라서 교통이 아주 불편했다. 대중교통도 많지 않았고, 식구들이 자가용이 없는 까닭에 교회로 오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일요 예배를 위하여 하루 종일 봉고차로 식구를 태우고 다니느라 분주하였다. 주일 저녁이면 피곤하여 온 몸이 파김치가 될 정도였다.
2010년 2월 아들 황성무가 선문대를 졸업하였다. 선문대 공부 할 때 별도로 시간을 내어 비트 컴퓨터를 방학도 없이 열심히 배운 덕분에 최우수 성적 만점으로 수료한 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IT 시대를 맞이하여 이 분야의 인재를 찾고 있는 시대였다. 아들은 컴퓨터 개발자로서 재능을 발휘하여 대기업에 입사하였다. 아들은 현재 신한그룹의 신한라이프 차장으로 근무하고 있어 하늘부모님과 참부모님의 은사에 감사 할 따름이다.
2010년 11월에 참아버님 자서전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자서전 430권 책임 완수로 참부모님상도 수상하였다. 그런데 12월에 내가 성전에서 새벽 기도를 하는 중에 갑자기 쓰러졌다. 구급차를 타고 충남대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은 결과 심장병이었다. 그러나 값비싼 병원의 치료에 의존하지 않았다. 내가 배운 대체의학으로 스스로 처방을 하고 건강관리에 최선을 다 해 왔다. 지금까지 건강하다. 약 한번 복용하지 않고 많은 고통과 시련이 있었지만, 하늘부모님과 참부모님의 특별한 은사로 실로 기적 같은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다.
2010년 10월 황난경 막내딸이 유주완 2세(부모 유종소-이상란 1800가정)와 축복을 받았다. 선문대에 2005년 3월 순결학과에 입학하여 해외 선교는 못나가고, 국내에서 펀드레이징 과정을 거친 후, 축복을 받고 2011년 2월에 졸업하였다.
그 후 사위 유주완은 2021년 1월 Candela medical 이라는 세계 최고의 의료기기 회사 한국지사에 차장으로 일을 하고 있다. 대학 전공과목을 잘 살리고 동시에 만학으로 대학원까지도 졸업하였다. 이 모든 과정이 참으로 하늘부모님과 참부모님의 큰 가호가 있었기에 가능했기에 감사 또 감사 할 따름이다.
청양에서 4년 정도 시무하는 동안 주일 예배 반을 운영했다. 원리강의를 총서론부터 재림론까지 전체를 차근차근히 새롭게 원리무장을 하는 마음으로 진행했고, 식구들의 심정을 부활시켰다. 이때 필리핀 가정을 위해 PPT에 영어 자막을 넣었더니 아주 좋아했다. 그들의 부활 된 모습에 큰 보람을 느꼈다.
그 후 식구들의 정성과 부활로 2010년 교회 종합 실적 우수상을 2011년 3월 문현진 세계회장으로부터 수상하였으며, 연속해서 2011년 교회 성장KPI 종합 실적 평가 우수상을 2012년 3월 석준호협회장으로부터 수상하였다. 이 모두 하늘부모님과 참부모님의 큰 은사였다.
2012년 6월 목회자 수련에서 목회자 모두가 시범 강의를 하였다. 나에게 지정된 아브라함가정 10분 시범 강의가 끝나자 이기성 충남 교구장이 “언제든지 교구본부에서 수련 강의 요청을 하면 응해달라.”고 하였다. 그 때부터 나는 원리강의에 자신감을 갖게 되어 바로 본격적으로 교회에서 원리강의를 많이 하게 되었다. 격려 한 마디가 이렇게 큰 효력을 발휘 하게 되어 지금도 그 격려를 감사하게 생각한다.
2012년 10월 큰 딸 황난이가 이권형 2세(부모 이상규-이영자 6000가정)와 축복을 받았다. 당시 송파교회 소속이었는데 임종혁 교회장과는 목회 때 인연이 있었다. 충남교구로부터 연락이 와서 3개월만에 전격적으로 축복 받았다. 사위는 2022년 3월 한화그룹 본사 과장으로 근무하며 동시에 만학으로 대학원도 졸업하였다. 축복 당시에 비해서 대단히 발전한 모습이기에 이 역시 살아 역사하시는 하늘부모님과 참부모님 앞에 감사 할 따름이다.
2013년 2월 20일 제1회 원모평화재단 봉사상을 한학자 총재로부터 직접 수상하였다. 참아버님의 뒤를 이어서 참어머님께서 교단을 이끄시면서 주시는 상을 받게 되어서 기쁨이 더욱 컸다. 5월에는 목회 15년 근속으로 유경석 협회장상을 수상하였다.
17. 2013년 8월 1일 홍성교회장으로 부임
여러 가지로 열악한 홍성교회였다. 여름에는 성전과 교회장이 거처하는 방이 불볕 더위였다.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뜨거웠다. 당장 지붕을 단열재로 교체하는 공사가 시급했다. 비가 새는 곳도 있고, 전기 시설도 보강도 서둘러야 했다. 성전에서 PPT로 강의 할 수 있는 스크린 빔 설치도 해야 했다. 게다가 차가 없어서 꼼짝을 할 수 없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이란 말이 잘 어울리는 상황이었다.
일단 새로 출고된 12인승 봉고차를 구입하기 위해 2013년 11월 8일 신차 입고 수속을 완료했다. 한 달이 지난 후, 공사비를 예상해 보니까 4500만원이 들었다. 큰 예산이 소요되는 대공사였다. 처음에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동안의 목회 경험을 토대로 중심 식구들과 기도하며 정성을 드렸습니다. 식구들이 처음에는 반대 내지 난색을 표했다. 나는 제직회 정상화를 위해서 그동안 없었던 제직회장을 부임 2개월 후, 36만 가정인 일본 아베도모꼬 집사를 목회자 직권으로 임명하였다. 조직 체계가 확립되어야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중심 식구와 회의를 하였다.
그 때 목회자를 위하여 하늘 앞에 본이 되는 장로가 있었기에 새 역사는 시작되었다. 777가정인 김상목 장로가 사은비를 충남교구 최고로 하자고 하면서 100% 올리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 파격적 제안을 하였다. 부임 3개월 동안은 적자였으나 그 이후로 헌금이 대폭 늘어나 흑자로 돌아서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그리고 제직회장이 선정 된 이후 개인적으로 상담을 한 결과 힘든 고비를 잘 넘기고 11월부터 제대로 된 십일조 헌금에 모범을 보인 것이 또 하나의 큰 하늘의 역사였다.
내가 앞으로 잘 될 거라고 식구들을 격려했는데, 그 말이 예언처럼 실현되었다. 세 가지를 소개한다. 첫번째는 제직회장이 그 다음 달 좋은 직장을 처음으로 갖게 되었다. 그만큼 헌금을 비롯한 각종 봉사 헌신에 앞정서게 되었고, 그것이 식구들을 긍정적으로 자극하는 시너지 효과를 일으켰다. 가정당 100만원 이상 헌금하자는 결의를 하였다. 특히 김상목 장로의 공로가 컸다. 그는 성전 위의 높고 위험한 공사 외에 현관 보호막, 전기공사, 성전 창문 보호막 등을 무료 봉사로 멋지게 시공 완료했다. 덕분에 많은 비용이 절감되었다. 김장로의 헌신에 감사드린다.
둘째는 부임 다음 해인 2014년 1월 직장 출근 중에 빙판에 자가용이 낭떠러지에 떨어져 차가 박살났는데도 사람은 별로 다친 데 없이 무사하였다. 식구 모두가 하늘의 기적과 은총을 느끼는 사건이었다. 셋째는 야마모토사유리 집사가 밖에 나와서 일을 보고 다시 아파트로 귀가하였는데, 집안에 가스 불이 켜진 상태로 남편이 출타 하는 바람에 집안에 가스와 화염 연기가 가득했다. 단 1분만 늦었더라면 집이 몽땅 불타버리는 위험천만한 순간에 가스 불을 끄게 되었다. 정말 다행스럽고 기적 같은 하늘의 보호가 있었다. 이 사건을 경험하면서 그 가정은 못하겠다던 100만원 헌금을 하게 되었다.
이런 일련의 일들로 해서 가망 없다던 경비 조달에 식구들의 마음에 희망이 생기게 되었다.
엄청난 공사를 앞에 두고 지지부진 했던 모든 가정당 100만원 이상 특별헌금이 잘 진행이 되었다. 물론 교회장인 우리 가정부터 먼저 헌금하였고, 이어서 막내 사위 유주완, 사돈 유종소, 멀리 외곽에 있던 안창희 권사, 대전의 하태룡 장로 등이 동참했다. 그리고 문두균 당진 교회장 내외가 내방하여 홍성교회에 특별헌금 협조를 하였다. 감사할 따름이다.
봉고차 구입 및 공사 일체 비용은 일단 교회장 본인이 모두 선불로 지급 완료하였다. 차 구입 및 공사비 잔금은 제직회에서 분납하는 것으로 했다. 그 결과 부임한지 만 2년 4개월만에(2015년 12월) 거금을 다 청산하고, 제직회가 완전 흑자로 전환되었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목회기간 중 가장 많은 식구들이 정성에 동참했고, 하늘부모님과 참부모님의 기적같은 은총을 함께 공유하였다.
다음해인 2016년에도 년간 교회 순수 헌금이 1억원을 상회하였다. 작은 3그룹인 교회에서 이런 실적은 식구들의 정성 덕분이었다. 그리고 홍성군청으로부터 글로벌 어학봉사 실시를 하라고 2,000만원을 지원받게 되었다. 교육관에서 다문화가정인 필리핀과 일본 식구들을 통해 영어와 일어를 성화학생 중고생을 대상으로 무료 봉사로 가르친 터전위에, 2015년 홍성군행정동우회 신임회장으로 선출된 전광천읍장 노덕호 평화대사가 정부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 평화대사의 위력을 실감했다. 노덕호 평화대사는 이미 일주일 수련도 받아서 새식구로서 주일마다 예배도 잘 참석하였다. 전국 교회에서도 보기드문 조그만 교회에서 정부로부터 파격적 지원금을 받았다. 이러한 지원금은 2017년에도 계속하여 2,000만원을 받았다. 2018년에도 지원 혜택을 확정 해 놓고, 나는 태안교회로 부임하였다.
3년 연속 합계 6,000만원의 혜택은 실로 대단한 정부 지원이었고, 전국 교회에서도 보기 드문 사건이었다. 정부의 지원은 홍성교회 발전에 여러모로 큰 힘이 되었다. 그 한 예로써 매주 토요일 오후 3시간 및 일요일 오후 3시간씩 영어와 일어를 무료로 가르쳤다. 게다가 토요일에 공부하러 올 때마다 1인당 1만원씩 교통비 명목으로 지급하였다. 성화학생인 수강생에게는 꿩먹고 알먹는 혜택이었다.
2015년 1월 13일 청평 전국목회자 총회시 100일 특별 활동 3그룹 전국 1위 우수상을 유경석 협회장으로부터 수상하였다. 식구들의 정성과 활동이 실로 대단하였고 목회 최고의 황금기로 감사했다. 주일 예배에 특별한 프로그램을 년중으로 계속적으로 다양하게 진행하였다. 1부 목회자 말씀에 이어서 2부에서는 매주마다 선정된 식구가 활동을 보고하였다. 그리고 움직이는 뉴스(Moving News)라고 명칭하여 교회장 및 일반 식구 활동 사항을 시청하였다. 그리고 전도출정식으로 전도 의식을 함양하였다.
매달 마지막 주일 예배에서는 2부, 3부로 진행하여 연주 등 음악 축제를 했고, 그 달의 생일을 맞는 식구들을 위한 케이크 커팅 축제로 더욱 화목한 식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777가정부터 3억6천만쌍에 이르기까지 해당 축복결혼기념일에 축하 예배를 진행하여 선배 가정부터 후배 가정까지 더욱 하나로 뭉치게 하였다. 매월 모범 식구 1명을 선정하여 교회장 표창과 함께 10만원 이상 시상을 하였다. 이로써 식구들이 뜻에 대한 헌신과 용기를 더욱 갖게 되었다. 또 매년 어버이날에 70세 이상의 모든 식구에게 10만원 위로금을 증정하였다. 이러한 위로금은 입교 후 처음이라는 소감 발표도 있었다.
특히 외부 공공 단체, 군청, 학교 등에서 수상을 한 경우에도 별도로 교회에서 항상 5만원 이상 축하금을 증정하였다. 성화학생들이 이로 인해 열심히 공부도 하고, 봉사도 하는 풍토가 조성되었다. 식구 몇사람은 교구장상, 협회장상도 수상하는 등 참으로 열심히 활동한 식구들이었다.
예배 후 중식을 같이 나누고 나서 성전에서 교회 식구들에게 수지침을 가르치고 봉사하였다. 수지침을 배운 식구들과 함께 매주 2회 이상 노인정을 중심으로 봉사하였다. 특히 유이마사꼬 권사, 고지마마유미 집사는 항상 열심히 함께 동참하였다. 이 외에 오오타케타카꼬 권사, 와타나베치즈꼬 권사도 매주 1회 이상 봉사에 참여하였다.
이처럼 마음도 몸도 함께 건강한 홍성교회 식구로 변화되면서 모두가 신명나는 예배가 되었다. 예배 후 오후 늦게까지 식구들이 남아서 다과회와 정겨운 담소를 나누었다. 그야말로 교회는 안식처요 휴식처였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원형이고, 지상천국 생활의 기쁨을 공유하였다.
2016년 2월 8일 문연아 세계회장의 내방과 함께 귀한 주일 예배 말씀에 많은 식구들이 더욱 큰 믿음을 갖게 되어 감사했다. 12월 8일 홍성군자원봉사센터장상을 수상하였다. ‘1004상’으로 누계 9,808 시간을 인증받았다. 이후로도 계속 하여 총누계 봉사 1만시간을 돌파하였다. 이 또한 하늘부모님과 참부모님의 역사에 감사 할 따름이다.
2017년 6월 25일 대국민 화합통일 홍성군 전진대회를 홍성교회에서 성황리에 개최하였다. 주제 강연은 조용옥 UPF 충남도지부장이 했고, 축사로 오배근 도의원, 이종화 도의원 2명이 참석하였다.
18. 2018년 1월 21일 태안교회장으로 부임
차가 없어서 태안으로 부임하자마자 힘들었지만, 2월부터 교회 활동을 위해 개인적으로 승용차 신차 구입 하였다. 바로 인근 노인회관으로 혼자 주 2회 이상 수지침 봉사를 시작하였다.
전진대회 준비를 위해 평화대사협의회 소집 및 회의를 하였다. 회장은 노진용 태흥건설사장 이었다. 4월 20일 노회장의 적극적 협조로 남북통일 전진대회를 태안문화예술회관에서 보수 언론의 중진인 조갑제 회장을 강사로 초빙하여 성황리에 마쳤다. 노회장은 5월 1일, 나를 믿음의 부모로 해서 입회원서도 제출했다. 그는 이미 오래전 20대 청년시절에 수택리에서 40일 승공 수련을 받은 이력이 있었다. 하늘이 준비하신 그와 내가 기적처럼 만나게 된 것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박충진 장로(당시 태안군 노인회 사무장)의 적극적인 협조로 노인회관을 함께 순회하며 수지침 봉사를 하였고, 그 인연을 계기로 430가정 입회원서 접수 활동을 시작하였다. 7월 4일에 430가정 입회원서를 2개월여 만에 접수 완료하였다. 7월 8일에는 430가정 축복 행사를 전국에서 85호로 완료하였다. 하늘부모님과 참부모님의 참으로 놀라운 은총의 역사에 감사 또 감사할 따름이다.
2019년 1월 11일 남북통일과 참가정을 위한 태안군 희망결의대회를 개최하였다. 태안 문화예술회관 대강당에 250명이 참석하였다. 축사에 성일종 국회의원이 직접 참석하였다. 주제 강연은 통일단체협의회 상임의장 설용수 박사가 맡았다. 노진용 평화대사회장의 적극적 협조와 식구들이 함께 많은 비용을 충당하면서 성황리 개최하였다..
나는 목회 정년 퇴임을 앞두고 2019년 2월 28일 충남교구장 및 성우회로부터 감사패 수상 하였다. 3월 17일 태안교회에서 정년 퇴임하였다. 나이 70세, 목회 경력 21년이었다. 내 인생을 승리로 인도해 주신 하늘부모님과 참부모님의 가호와 은총과 역사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19. 2019년 3월 18일 충북 청주시로 이사, 천보가정의 참다운 인격 완성자로
2019년 6월 3일 이기성 협회장으로부터 정년 퇴직 공로패를 수상하였다. 그 동안은 목회에 전념하다 보니 내 삶을 회고 할 여유가 없었는데, 정년 퇴임을 하고서 영계에 갈 준비를 하게 되었다. 그런 중에 성경 마태복음 18장 18절이 생각이 났다.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매고 푸는 것의 우선 순서가 땅이다. 지상천국에서 살아야 천상천국 생활이 가능하다. 지상에서 어떤 이와 관계가 나쁘면 그것이 영인체가 천상천국으로 가는 길목에서 걸림돌이 된다.
나는 살면서 나를 좋지 않게 여기거나 또는 껄끄럽게 생각한 사람이 있는지를 곰곰이 생각했다. 잘잘못의 많고 적음을 따지지 않고, 기억에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그래봐야 손가락 안에 들어오는 몇 명 안 되는 친족, 교회 식구 또는 지인들이다. 나는 일일이 전화로 또는 만나서 사과했다. 늦게나마 진심으로 사과 인사를 하였다. 때로는 약소하나마 금일봉도 전하였다. 이제는 정말 단 한사람도 조금이라도 맺히거나 서운해 할 사람이 없이 모두 풀게 되었다. 정말 남은 인생은 홀가분하게 되었다. 가깝게 알았던, 멀게 알았던 상관없이 마음의 무거운 짐에서 해방된 삶을 살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일련의 맺힌 것을 풀었다. 살아생전에 땅에서 모두 풀었다. 이제 여생동안 참된 인격 완성자로 향할 시간이다. 하늘 앞으로 오늘도 전진 또 전진 하고자 할 뿐이다. 지난 생애를 돌아보니, 모든 것이 참으로 하늘부모님과 참부모님의 역사와 은사가 아니고는 불가능했기에 더욱 감사하다.
2019년 11월 19-24일에 아내 최진희가 목회자 정년 은퇴를 기념하여 협회의 은사로 캄보디아를 갔다 왔다. 역시 감사한 일이었다. 2020년 9월 8일부터 12월 15일까지 청주교육대학교에서 수지침을 강의하였다. 9월 16일에 《평화의 어머니》 자서전 75권을 구입하여 4개월만에 배포 완료하였다. 2021년 10월 10월 천보가정 등재 KR02984를 하였다. 이것이야말로 축복 이후 일생일대 최고의 감격이었다. 참으로 하늘부모님과 참부모님의 놀라운 그리고 한없는 은사와 가호에 감사 또 감사 할 따름이다.
20. 향후 계획은 질병 처방법이 온 누리에 전파 되도록
2022년 3월부터는 본격적으로 마지막 주어진 건강 증진과 질병 처방법을 위한 대중 전파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일찍이 15개 이상의 분야에서 대체의학 관련 자격증을 획득하여 수십년 동안 질병에 따른 다양한 처방을 한 경험이 있고, 상담으로 봉사도 많이 하였다. 대체의학 중에서도 대표적인 수지침 처방법을 누구나 알기 쉽고 간단하게, 그리고 아주 짧은 2시간 정도에 배울 수 있도록 정리하였다. 지금까지 강의해 온 카톡 수백 커트를 압축요약했다. 100시간이 소요되는 처방법을 12커트로 압축하여 외울 필요도 없이 도표만 보고도 처방하도록 만들었다.
이는 하늘에서 내린 계시를 받고 만든 것이지 내 실력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처방법이다. 그래서 빨리 전국에 전파하고 싶다. 아니 전세계에 전파 및 보급할 방법이 무엇인지를 고심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까 또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시간은 참 빨리 멈추지 않고 흘러간다. “벽시계는 고장이 생기는 경우도 있어서 시간이 멈추기도 하는데, 세월은 일체의 고장도 없이조용히 지나간다.”는 유행가처럼, 시간이 스치고 지나가는 흔적을 느끼며 산다. 그럴수록 건강에 대한 처방 분야 보급에 큰 사명감을 느끼면서 노력하고 있다. 모든 이들이 쉽고 저렴한 방법으로 건강을 갖도록 돕고서 한바탕 하늘을 향해 너털웃음을 웃고 싶다.
첫댓글 정혁순님 댓글
황박연, 최진희 가정의 자서전 잘 보았습니다. 하늘이 사랑하는 6천 형제라는것을 온 세상에 자랑하고 싶네요. 지상에서의 삶의 내용이 영계에서 더욱 빛날것입니다. 수고믾으셨습니다.
김경옥님 댓글
황박연,최진희가정의은혜로운 자서전 잘 읽었습니다. 훌륭하십니다.짱짱짱
이옥주님 댓글
언제나 변함없는 심정으로 열심히 전도에 전력하시던
황박연 청년회장을 기억합니다
라면한개를 가방에 넣고 다니면서 전도하고 식사때가 되면 방문한 집에 부탁하여 라면 끓여 먹으면서 전도 다닌 울산에서의 모습 기억이 나서 감회가 새롭습니다
이홍규님 댓글
황박연,최진희 가정 자서전 잘 봤습니다.통일가의 산 증인 이십니다.
남은 생애도 변함없는 신앙으로
가정에서도 크신일 계속 해 나가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