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 이상한 아이
만 열일곱 살, 호적상으로는 열 두 살의 내가 한일합섬에 입사를 하면서 부설 한일여자실업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실제 나이와 호적 나이의 차가 컸던 것은 부모님이 출생신고를 초등학교 입학 전에야 했기 때문이다. 학교에 호적등본을 제출해야 했으므로 출생신고를 해야 했는데 벌금을 내지 않기 위해 다섯 살이나 적게 신고를 한 것이다. 생년월일도 임인년 섣달 스무날이라고만 음력 생일이 그대로 호적에 올랐다. 태어난 지 열흘 만에 두 살이 되었으니 두 살 나이를 조숙하게 그저 먹은 셈이다. 그럼에도 서류상으로는 최연소 입사자가 되었다.
방은 다르지만 문경여중에서 같이 간 전순봉이랑 다른 친구 두 명이 모두 같은 기숙사에 입소를 했다. 낯 선 곳에서의 낯선 사람들과의 첫 생활이지만 기대감에 설렜다. 더러는 집 생각에 우는 아이도 있었지만 나는 집을 드디어 벗어났다는 해방감에 오히려 행복했다. 가끔 두 분이 걱정이 되긴 했지만 그리울 정도는 아니었다. 한일합섬은 방적공장이라 처음에는 소음과 먼지 때문에 귀가 멍멍하고 현기증이 일어서 더럭 겁이 났었다. 내 체력에는 일도 힘들었지만 학교생활이 견디기 더 힘들었다.
방적공장은 솜 형태의 섬유질로 천을 짜기 위한 실을 뽑는 공장이고, 방직공장을 옷감이 되는 천을 짜는 곳이다. 검단동 한일합섬은 방적공장이다. 근로는 하루 8시간씩 3교대 근무를 하기 때문에 매주 등교 시간도 달라진다. 야간 근무를 할 때면 오전에 학교를 가는데 첫째 시간은 눈을 억지로라도 뜨고 버티어 보는데 둘째 시간부터는 거의가 다 책상에 머리를 대고 잠을 잔다. 배움에 대한 열망도 졸음을 이기지 못했다. 수업 시간마다 잠을 잔다는 게 너무 큰 고통이었다. 공부는 해야 하는데 잠에 번번이 지는 현실에 절망했다. 잠이 들어 선생님의 말씀을 몽땅 놓치는 것이 속상해 울고 싶은 날이 거듭되면서 이렇게는 공부를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같이 왔던 네 명의 문경여중 졸업자 중 두 명은 벌써 집으로 돌아갔다.
순봉이는 나와 다른 반에서 반장도 하고 중학교 때와는 다르게 활기차게 적응을 잘 해나갔다. 나는 순봉이는 잘하고 있는데 누구보다 뛰어났던 내가 적응을 못하고 허우적거리는 것에 자존심이 상했다. 입학 성적이 뛰어났음에도 특별함이 없는 학생으로 졸음도 이기지 못한다는 게 수치스러웠다. 무엇보다 이전에 문예 활동을 한 적이 없는 순봉이가 나의 글을 흉내 내는 게 나를 더욱 초라한 감정으로 내몰았다. 그녀는 모든 것에서 나를 뛰어넘으려 노력했고, 나는 그녀가 건강하게 정진하면 할수록 더욱 움츠러들었다. 그녀의 체력이 부러웠다.
웃으며 그녀를 격려해주면서도 마음은 깊은 어둠의 나락으로 추락하는 느낌이었다. 일학년 일 학기를 마쳤지만 잠만 자고 배운 게 없는 것 같았다. 2학기에 접어들어 수업 시간의 모습은 더 절망적이었다. 마지막으로 나까지 잠들면 결국 교실 안 학생 모두가 다 자는 의미 없는 수업시간, 학교에 흥미를 잃었다. 서서히 학교에서 멀어지는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결국 자퇴서를 냈다. ‘어떤 고난도 능히 극복할 수 없는 자는 이 교문을 들어설 수 없다’는 교훈을 나는 부끄럽게 뒤로하며 학교와 그렇게 작별했다. 학교를 그만 두니 회사 생활은 힘들었지만 몸은 덜 피곤하고 재미도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나는 사내에서 이상한 아이로 소문이 나 있었다. 나만 보면 웃는 사람이 늘어났다. 순봉이는 그런 내가 불만이었지만 나는 조금도 싫지 않았다.
가만히 있어도 누군가에게 웃음을 준다는 것은 좋은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른 사람이 어떤 식으로든지 나를 기억해 주는 것을 즐겼던 것 같다. 사람들은 순수하거나 약간 4차원적인,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리며 또라이라는 모션을 보이기도 했다. 그들이 어떻게 보든 나는 내 마음 가는 대로 하고 있었다. 집에서와 다르게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내 의사를 표현했을 뿐이다. 어쩜 학교에서의 상실감을 학교 밖 일터나 기숙사에서 채우고자 한 것인지도 모른다. 끝도 없이 나를 괴롭히는 허전함 그것을 다른 사람의 관심으로라도 채워야했는지도 모른다.
대구 북구 검단동에는 한일합섬 외에도 공장이 많았다. 쉬는 날이면 우리는 외출증을 끊어 칠성시장이나 산격동 경대 근처로 외출을 나갔다. 휴일 낮 몇 시간은 외출이 허용되어 바깥 바람은 쐴 수 있었다. 딴에는 멋을 한껏 부리고 외출을 하는 데도 사람들은 우리들을 ‘공순이’라고 불렀다. 면전에서 그렇게 부르지는 않았지만 한일합섬에 다니는 모두는 ‘공순이’라는 말을 듣기 싫어했다. 공장에 다니는 여자라는 말이지만 업신여기는 비하의 말로 들었던 것 같다. 나는 ‘공장에 다니는 순수하고 이쁜 사람’이란 뜻의 ‘공순이’가 되면 되지 했다. 꼭 학교를 가지 않아도 공부하는 방법을 찾아서 보란 듯이 이 세상에 이로운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우선은 3교대 근무라도 잘 견디는 건강한 내가 되고 그 다음은 어떻게 다시 공부를 할지 계획을 세워보기로 했다. 집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추호고 없었다. 힘들어도 집에 비하면 회사 기숙사는 천국이었다. 학교를 그만 두고 난 후 필사적으로 명랑하게 당당한 척 했다. 나를 지탱시키는 그 무엇이 필요했고, 때 마침 사람들은 내게 눈길을 주기 시작했다. 특별한 활동을 한 것도 아니고 지극히 나답게 마음 가는 대로 한 것뿐이다. 누구에게 피해를 준 것도 아니고 나쁜 언행을 한 것도 아니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한일합섬에서 나는 ‘이상한 아이’가 되었다.
첫댓글 유아기에 이어 청소년기에도 어려움이 많았네요.진솔한 고백이 감동을 불러옵니다. 여울 아우님, 언제 시간 좀 납니까? 커피나 차 한 잔 나누고 싶습니다. 강의 다니시랴. 자격증 공부하시랴 늘 바쁘시죠? 하기야 저도 늘 바쁩니다만...^^
그러게요, 늘 바쁘기는 한데
남는 건 없는 것 같아요.^^
선생님~ 진솔한 이야기 잘 보았습니다. 글 표현이 섬세해서 그 장면들이 그려지네요~ 재미있어요^^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