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HDTV를 혼수용으로 추천하던데, 사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여져요.’
TV는 결혼하는 예비 부부에게 혼수의 필수 재료다. TV는 또 결혼을 준비하는 남성들이 로망을 투영하는 몇 안되는 금과옥조 같은 존재다. 심지어 어떤 TV를 선택하느냐는 예비 부부들의 사소한 시비거리가 되기도 한다. 드라마를 무난하게 시청할 수 있는 수준의 평범한 TV 모델을 선호하는 예비 신부, 해상도부터 각종 외부 장치와의 연결성을 고려하는 예비 신랑. 이들 사이의 간극은 결혼할 때까지 좀체 좁혀지지 않는다. 최근 들어선 리모콘 전쟁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TV를 2대 구입하는 새 풍속도가 나타나고 있다. TV가 거실에서 지닌 위상을 단적으로 드러내주는 풍경이다.
예비 신혼부부에게 또 하나의 고민거리가 던져졌다. 풀HDTV를 구매할 것이냐, UHDTV를 구매할 것이냐. UHDTV의 가격이 200~300만원대로 하락하지 않았다면 고려 대상에 끼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LG, 삼성 등 국내 가전사를 중심으로 구매 가능 수준의 UHDTV 모델이 출시되면서 고민의 폭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UHDTV는 ‘Ultra High Definition TV’를 줄인 말이다. 말 그대로 ‘초고화질TV’를 의미한다. UHDTV는 HDTV의 뒤를 잇는 새로운 방송 영상 기술이다. HDTV와 비교할 수 없는 화질, 음향, 시야각 등을 제공하는 것이 특징이다. 말하자면 디지털 영화관의 안방 버전이라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선 기존 HDTV과 비교할 때 화소수가 4~16배 더 정밀하다. 풀HDTV가 1920×1080 수준이라면 4K UHDTV는 3840×2160, 8K UHDTV는 7680×4320의 초고해상도 화질을 제공한다. TV 출연자의 땀구멍까지 볼 수 있다는 HDTV라지만, UHDTV의 세계로 들어오면 땀 구멍 속 이물질까지도 스크린을 통해 확인할 수 있게 된다. 물론 그렇게까지 가까이서 TV를 시청할 사람은 없겠지만….
화질만 바뀌는 것이 아니다. 오디오로 표현할 수 있는 역량은 상상 그 이상이다. HDTV가 5.1채널로 음향을 구성해낼 수 있었다면, UHDTV는 10.1채널에서 최대 22.2채널까지 구현이 가능하다. 22대의 스피커를 장착해 좌우 앞뒤뿐 아니라 상하 수직의 입체적이고 실감나는 음향을 청취할 수 있다는 뜻이다. 예컨대 전쟁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헬리콥터 착륙 장면은 HDTV보다 더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시청자가 볼 수 있는 시야각도 훨씬 넓어진다. 사람의 눈은 최대 180도까지 움직임을 포착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여러 조건들로 인해 HDTV는 최대 30도까지만 지원이 가능했다. UHDTV는 웬만큼 시청거리(화면 높이의 0.75배)가 짧아지더라도 100도까지(8K UHDTV 기준) 움직임을 포착해낼 수 있을 만큼 고화질의 선명한 화면을 제공한다.
UHDTV는 일본 NHK가 1995년부터 ‘SUPER HI-VISION’이라는 이름으로 연구를 시작했다. (출처 : NHK SUPER HI-VISION 사이트 화면 캡처, http://www.nhk.or.jp/8k/index_e.html)
UHDTV는 HDTV 이후의 시장을 대비하기 위해 20여년 전부터 연구가 시작된 방송 영상 기술이다. 일본은 NHK가 중심이 돼 1995년부터 민관 합동으로 UHD 방송(Super Hi-Vision)의 관련 기술이나 전송 기술 등에 대한 연구를 진행해 왔다. 그 덕분에 UHDTV 분야에선 일본이 가장 앞서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일본 공영 방송사인 NHK와 소니가 전 세계적으로도 UHDTV 기술을 주도하고 있다. 일본은 지상파 방송은 아니지만 위성을 통해 올해부터 UHDTV를 개시하겠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이에 뒤질세라 선택을 머뭇거리던 미국도 속도를 내고 있다. 올해 2월 미국 연방통신위원회는 볼티모어 WNUV-TV에 6개월 간의 DVB-T2를 이용한 UHDTV 시험 방송을 허가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TV의 고해상도 경쟁은 무의미하다는 입장을 취해 왔던 미국이다. 그러다 최근 들어 태도가 바뀌었다. 3D TV와 달리 UHDTV는 대세화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포착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도 재빠르게 움직이는 중이다. 지상파 방송 4사는 4K UHDTV 제1차 시험 방송을 지난 2012년 10월9일부터 시작해 12월31일에 종료했다. 일본이 위성을 통해 서비스를 개시했다면 한국은 지상파를 중심으로 빠르게 대응하고 있다. 지난 4월21일에는 지상파 방송 4사 기술본부장이 모여 UHDTV의 성공적인 시험 방송을 위한 협약서에 서명하기도 했다.
지상파에선 특히 KBS의 움직임이 눈에 띈다. KBS는 지난 4월5일 프로농구 경기를 지상파를 이용해 UHD 방식으로 생중계한 데 이어 오는 6월에는 UHD로 제작된 브라질월드컵 경기를, 9월에는 인천아시안게임을 시험 방송에 활용할 계획이다.
국내 케이블TV 업계도 속도를 내고 있다. 지난 4월 10일 UHD 전용 채널 유맥스(UMAX, http://www.u-max.kr)가 개국, UHD 전용 콘텐츠를 VOD 형태로 제공하기 시작했다. CJ 헬로비전, 씨앤엠, 티브로드, 현대HCN 등이 주요 주주로 참여하고 있다.
게임업계도 UHDTV를 지원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있는 범위가 확장된다는 것은 개별 영상 당 파일의 물리적 크기가 그에 비례해 커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1시간 영화를 기준으로 HDTV용 파일의 용량이 평균 760GB였다면, UHDTV용 영화 파일은 2.7TB에 육박한다. UHDTV용 영화 파일 10개를 저장하려면 27TB 이상의 하드디스크가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시중에 판매되는 PC로는 UHDTV용 영화 파일 1개도 저장하기 쉽지 않다.
이는 영화 다운로드 시장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될 것으로 보인다. UHD 수준의 영화 제작이 보편화되면 막대한 네트워크 비용으로 인해 영화 다운로드 행위는 위축될 가능성이 높다. 저장공간의 발전 속도가 매우 빠른 편이긴 하지만, 개인이 영화 시청을 위해 막대한 저장 및 전송 비용을 감당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만큼 클라우드 기반의 스트리밍 비디오 시장이 대세를 이룰 가능성이 높다. 조영신 SK경영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기본적으로 블루레이 시장은 사라지고, 결국 온라인 VOD 시장이 본격화 돼 적어도 미국 시장에서 VOD 시장이 재발견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라고 전망했다.
게임 시장도 변화가 감지된다. 4K UHDTV를 지원하는 기능이 속속 탑재되고는 있지만, 문제는 블루레이와 HDMI이다. 블루레이의 경우 H.265 압축 코덱을 적용한다고 하더라도 UHD 수준의 게임을 광학디스크에 저장할 수 있을지 아직 반신반의하는 분위기다. 게다가 초당 60프레임을 지원하는 HDMI 2.0도 필수 요소다. 이 때문에 영화 시장과 같이 게임도 자연스럽게 클라우드 모델로 옮겨가지 않겠느냐는 전망이 제기된다.
2012년 12월 LG경제연구원이 발행한 ‘고해상도 경쟁, 어디까지 갈까 보고서.(출처 : 보고서 화면 캡처, http://www.lgeri.com/uploadFiles/ko/pdf/ind/LGBI1229-31_20121224092503.pdf)
TV 해상도가 높다고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다. 인간의 망막이 인식할 수 있는 해상도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 새 TV나 모바일 기기의 고해상도 경쟁이 가열되면서 인간이 인지할 수 있는 해상도 한계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지기도 했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는 살아 생전 300ppi가 모바일 기기의 최대 인지 해상도 수준이라고 주장했다. ‘아이폰4’ 레티나 디스플레이는 이러한 과학적 근거를 기반으로 탄생했다. 국내 업체들은 400ppi까지는 식별이 가능하다며 400ppi 이상급 디스플레이를 장착한 스마트폰을 출시하기도 했다.
ppi는 ‘pixel per inch’의 약자로 인치당 픽셀수를 의미한다. 화소 집적도 혹은 화소 밀도로 표기하기도 한다. 인쇄에서는 dpi(dot per inch)라는 지표로 해상도를 표기하고 디스플레이 분야에선 ppi로 화소의 밀집도를 가늠한다. ppi가 높을수록 고해상도라고 할 수 있다.
이 논쟁은 TV 시장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LG 경제연구원이 2012년 12월 발행한 보고서를 보면, 스마트폰은 440ppi, 태블릿PC는 291ppi, TV는 약 55ppi가 사람이 식별 가능한 최대 해상도라고 한다. 각 기기별로 인지 가능한 해상도에 차이가 나는 것은 기기 이용자가 일상적으로 화면을 보게 되는 시청거리가 다르기 때문이다. LG경제연구원은 TV의 경우 1.6~3m 떨어져 시청하는 사례를 기준으로 계산했다고 설명했다. 단, TV에서 멀리 떨어질수록 식별 가능한 최대 해상도는 낮아진다. 3m 거리에서 시청할 경우 최대 분별 가능한 해상도는 29ppi로 떨어지게 된다.
이 수치를 UHDTV에 대입해보자. UHDTV는 84인치 화면일 경우 53ppi, 40인치일 경우 110ppi의 해상도가 구현된다.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 UHDTV 84인치나 40인치나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는 얘기다. 물론 1m 이하로 TV를 시청하는 습관을 갖고 있다면 문제는 달라질 수 있다.
풀HDTV는 40인치에서 54ppi 해상도로 시청이 가능하지만 화면 크기가 이 수준을 넘어서게 되면 서서히 화질에 차이가 발생한다. 물론 TV를 1.6m 거리에서 시청한다고 가정할 경우 눈으로 구분이 가능할 정도의 변화다. 47인치는 47ppi, 55인치는 40ppi로 해상도가 떨어진다. 50인치 이상에서 Full HDTV는 일반인이 식별 가능한 선에서 화질이 낮아지는 걸 실감할 수 있게 된다.
처음의 고민으로 다시 돌아가자. 기존 풀HDTV와 UHDTV 가운데 어떤 모델을 구매해야 할까. 결국 시청 습관과 선호 콘텐츠 유형을 고려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2012년 이후 신규 구매 TV의 평균 화면 크기는 46인치이다. 10년 전과 비교해 10인치 이상 커지고 있다. 올해와 내년 어떻게 변화할지는 예상할 수 없겠지만 TV의 대형화는 자연스러운 추세로 간주되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TV 스크린이 커지면 커질수록 화질은 낮아질 수밖에 없는데, 만약 50~60인치대 TV를 구매할 계획이라면 UHDTV를 고려해볼 만하다. 여기에도 조건은 있다. 평소 1.6m 내외에서 스포츠 등 역동적인 TV 프로그램을 실감나게 보거나 보고 싶어한다는 전제다. 그렇지 않고 40인치 중반 이하의 화면 크기를 생각하고 있다면, 또는 3m 가량 떨어져서 TV를 시청하는데 익숙하다면 풀HDTV나 UHDTV나 큰 차이를 경험하지 못할 듯하다.
이성규 | 블로터닷넷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