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서울성곽길 여행>(5) - 경교장(京橋莊), 친일파 최창학, 이광수의 신분세탁 공간
자기 이름조차 불리지 못하며 외세에 의해 헐려져 없어진 슬픈 돈의문의 옛자리를 지나 드디어 도성 안으로 들어왔다. 이곳은 현재 ‘정동 사거리’로 불리는 곳. 이제부터 성곽의 흔적을 찾아 본격적인 도성순례를 하기로 해보자. 정동사거리에서 좌측으로 돌아 인왕산 방향의 성곽을 따라 걸을 계획이다. 그런데 왼쪽으로 돌자 마자 강북삼성병원이 보이고, 그곳 경비실에서 한양도성투어를 위한 지도를 나누어준다. 그것을 받아 들고 바로 떠나려 하였지만 나를 붙잡는 곳이 있다. 그것은 바로 백범 김구가 이끄는 상해임시정부가 해방을 맞아 고국에 돌아와 임시정부 청사 및 백범의 숙소로 사용한 <경교장(京橋莊)>이다.
이곳 경교장은 일제강점기 민영휘, 김성수와 더불어 3대 거부로 손꼽혔던 최창학이 1938년 건립한 그의 별장이었다. 그는 금광개발로 거부가 전형적인 친일파다. 하지만 일본이 패망하고 조선이 독립되자 친일파에 대한 응징의 조짐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이 때 최창학은 그 방패막으로 자신의 별장을 백범 김구에게 빌려준 것이다. 백범은 이를 임시정부 청사 및 자신의 숙소로 사용하였다.
이후 이곳에서 1945년 12월 반탁운동이 시작되었고, 또 1948년에는 이승만 단독정부가 미국의 힘을 얻고 강력하게 추진되자 이곳을 떠나 북으로 남북협상을 떠난 곳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그 후 평양에서 돌아 온 그가 이곳에서 1949년 6월 29일 안두희의 총탄에 암살된 곳도 바로 이곳이다. 그야 말로 우리 현대사의 격동을 충분히 느끼며 상상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런데 나는 궁금한 점이 있다. ‘왜 하필 김구는 친일파의 별장을 자신의 숙소 및 임시정부 청사로 사용했을까?’하는 점이다. 최창학은 최근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은 물론 임시정부가 스스로 작정한 친일파명단에도 들어 있던 사람일 만큼 철저한 친일파이다. 아무리 급했다고 한들 친일파의 재산을 합법적 몰수가 아닌 무상임대형식으로 빌려 쓴 것은 잘못이다.
멀리 이국 땅에서 모진 고난 속에서도 조국의 해방을 위해 버텨온 그들이 아니었던가. 좀 비좁고 불편한들 어떠랴. 해방된 조국에서 인민들과 함께 부대끼며 건국사업을 했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남게 하는 장소이다.
어쨌든 결국 백범 김구가 암살되자 최창학은 고액의 임대료를 요구하는 식으로 결국 경교장을 다시 회수해 갔다. 그 건물은 친일파 최창학의 안전을 위한 담보물이었기 때문이다. 백범 김구가 숨짐으로써 자신에 대한 안전담보 역할이 사라진 것이다. 이러한 최창학의 행동을 볼 때 설사 김구가 죽지 않고, 반민특위가 해체되지 않았다고 하여도 백범은 그에 대한 처벌에서 과연 공평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갖게 하는 곳이다.
또 이곳 <경교장>에서 일어 난 일 가운데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또 있다. 일제시대 최고의 친일파가운데 한 명이 김구를 찾아 이곳에 왔다는 사실이다. 그는 바로 조선의 천재로 불리던 소설가 이광수이다. 그는 김구가 독립운동과정에서 정리해둔 일지(日誌)를 자신이 편집하여 책으로 내게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이렇게 이광수에게 넘어간 김구의 초고가 1947년 책으로 완성되었고,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너무도 잘 알려진 《백범일지(白凡逸志)》이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 ‘나의 소원’은 한때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렸을 정도이다. ‘나의 소원은 A4용지 4~5장 분량의 짧은 글이지만 그야 말로 주옥 같은 글로 우리들에게 민족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며 얼마나 감동시켰던 글인가? 이 책은 ‘저자의 말’, ‘상권(중국편)’, ‘하권(조선편)’, ‘나의 소원’ 등 총 4부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저자의 말’과 ‘나의 소원’이 이광수에 의해 창작되었다는 것이 최근 밝혀져 우리를 놀라게 한다. 이에 대하여 김구의 아들 김신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춘원(주:이광수)은 자신이 그 일을 하겠다고 했답니다. 아버님은 그의 행실 때문에 망설였는데, 누군가가 글 솜씨도 있는 사람이고, 속죄하는 기분으로 맡겠다니 시켜보라고 했대요. 그가 윤문(潤文)을 한 것은 사실이나, 아버님이 그걸 알고 맡기셨는지 의문입니다.”
나는 김구가 자기 자서전의 제목을 왜 일기(日記)나 일지(日誌)가 아닌 일지(逸志)로 쓴 것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것은 ‘난중일기’나 ‘윤치호일기’처럼 대부분 ‘일기(日記)’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일지(逸志)의 사전적 의미는 보통 뛰어난 물건을 일품(逸品)이라고 하듯이 ‘뛰어난 뜻’ 즉, ‘훌륭하고 높은 지조’를 뜻하는 말이다. 따라서 《백범일지(白凡逸志)》는 그 한자 뜻 그대로 해석하면 ‘백범 자신의 훌륭하고 높은 지조를 쓴 기록물’이란 뜻이 된다. 그야말로 자기 얼굴에 스스로 금칠을 하는 꼴이다. 그리고 왜 김구는 이렇게 이광수에 의해 윤색된 자신의 글을 그대로 출판하게 하였을까? 우리를 무척 곤혹스럽게 하는 부분이다.
이런 사태에 대하여 이미 1957년 당시 심산 김창숙은 "왜놈 앞잡이 이광수가 백범 집에 가서 백범이 적어둔 일기를 가지고 자기 집으로 가서, 백범일기를 없애버렸다. 광수가 광복사료를 없애버린 것”이며. "이광수가 나라 겨레를 어둡게 만들려고 그런 짓을 했다"고 하는데 왜 우리는 여태까지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었던 것일까? 이곳 경교장에 서서 백범 김구에 대한 여러 생각이 교차하는 순간이다.
참고로 이곳 경교장의 본래 이름은 ‘죽첨장(竹添莊)’이었다. 최창학이 1938년 지은 건물로 일제시대 지금의 종로구 평동 일대의 지명을 일본식으로 죽첨정(竹添町)이라 명명한 것에서 따온 것이다. 하지만 백범이 사용하면서 일본식 이름인 죽첨장을 근처 다리이름 경교(京橋)를 따서 ‘경교장’이라고 바꿔 부른 것이다. 경교는 현 서울적십자병원 정문 쪽에 있던 다리로 당시 경기도(京畿道)로 들어가는 곳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한편 최창학에게 환원된 뒤 이곳은 한국전쟁 중에는 미군 의무부대의 주둔지였고, 1956년부터 베트남 대사관저로 사용되다가 1968년 삼성이 인수한 뒤 강북삼성병원 부지로 편입돼 병원 시설로 쓰였다. 이후 여러 곡절을 겪은 뒤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돼 현재의 모습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내부를 원형대로 복원해 놓았으며, 2층 집무실에는 당시 이곳을 침입한 안두희의 발자국과 창문을 뚫고 나간 총탄자국을 재현해 놓았다. 또 당시 백범이 피살될 때 입고 있었던 옷에 그의 핏자국이 남은 채 전시되어 있어 당시 처참했던 순간을 상상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사진설명>
▲(사진 1)강북삼성병원 안에 위치한 <경교장>. 백범 김구가 해방 뒤 머물렀으며 안두희에 의해 암살당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