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화 시인과 안성
글/사진 - 김경식
경기도 안성의 작은 마을 난실리에 꿈 많은 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낮에는 들과 산, 개울을 마음껏 떠돌며 놀았다. 밤에는 반딧불을 쫓아다니며 아득한 하늘에 떠있는 별을 헤어보기도 했다. 타원형을 그리며 떨어지는 별똥을 찾아 달려가기도 했다.
자신이 태어난 곳은 가난한 농촌마을이며, 자신의 삶도 한계가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은 약간 철이 들어서다. 그러나 소년은 어차피 태어난 인생이니 긍정적이고 열심히 세상을 살아야 한다는 의지를 가지게 된다. 짧은 인생길에 보다 많은 경험을 통하여 풍성한 삶을 사는 방법은 여행을 많이 하는 것이란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여행은 노력 없이 안 되는 것을 알기에 대처로 떠나 공부를 하게 되고 유학길에 오른다.
이 소년이 자라서 조병화(1921~2003)시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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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 시인의 편운재
소년 조병화는 보이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장소로 이동하였다. 보이는 세상은 눈으로, 보이지 않는 나라의 어느 장소들은 상상과 책으로 지식을 쌓았다. 여행과 독서로 밤마다 설레는 꿈을 꾸며 아침이 되면 지도를 보았다. 별을 보면서 무한한 꿈과 상상력을 키웠다. 특히 카시오페이아 별자리를 좋아했다.
하늘의 별을 그림으로 그리기도 했다. 유년시절은 즐거움보다 슬픔이 많았다. 생각이 많아지니 계속 하늘을 보았다. 이런 나약함을 잊으려고 운동을 하기도 했다. 럭비공은 어디로 튈지를 모르는 공을 잡고 달리는 운동이다. 여기에 매력을 느껴 달려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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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시인문학관
청년이 된 그 조병화는 유년의 설레던 꿈을 잡기 위해 바다를 건넌다. 일본에서의 생활은 곤고했다. 패망한 일본을 뒤로 하고 돌아온 조국은 비장한 이데올로기의 싸움판이 되어 있었다. 부박한 삶을 지탱할 수 힘만 있다면 외로운 시인이 되기로 생각했다. 해방직후 꿈의 좌절로 방황하던 그는 시 ‘소라’를 자신의 처지로 만들어 읽으면서 위안을 찾으려 했다.
바다엔 소라 저만이 외롭답니다.
허무한 희망에 몹시도 쓸쓸해지면 소라는 슬며시 물 속이 그립답니다.
해와 달이 지나갈수록 소라의 꿈도 바닷물에 굳어간답니다. 큰 바다 기슭엔 온종일 소라 저만이 외롭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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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 시인의 흉상
당시 월미도를 기행하면서 바닷가에서 발견한 소라를 보고 자신의 처지와 닮아 있다고 생각하여 자화상처럼 표현한 시다. 조병화는 이렇게 시인이 된다.
그는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난실리에서 태어났다. 안성의 역사는 유구하다. 삼국시대 때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각축장이었다. 4세기 이전에는 백제 지역이었으나 5세기에는 고구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남하정책으로 고구려의 영토가 되기도 한다.
고려초에 안성현이 되었으니 안성이란 지명을 얻은 지 이미 1000년이다. 난실리는 한양조씨의 집성촌이다. 조선의 개혁주의자 조광조가 사화로 죽음을 당하자, 한양조씨들은 전국의 각 고을로 숨어들었다. 이 마을도 그런 마을의 한 곳이다. 난실리의 조병화 생가, 편운재는 시인의 보물창고다.
이 공간의 곳곳에 자주 의자들과 마주친다. 필자의 고교시절 '전통'이나 '역사'로 상징한 '의자'라는 시를 암송하던 날이 아련하다. 편운재는 1962년 시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그 이듬해 어머니 묘소 앞에 세운 묘막으로 "살은 죽으면 썩는다"는 모친의 말씀을 자필로 벽에 새겨놓았다. 혜화동에 있던 시인의 서재를 그대로 옮겨와 보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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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운재
편운재는 아무에게나 공개하지 않는 공간이다. '조병화문학관'을 들어서는 순간 방문자는 시인의 생이 그대로 다가와 있음을 알게 된다. 평생 모은 문학적 자료들이 그득하다.
하늘은 맑고 바람이 삽상하다. 문학관 뜰을 살포시 걸어 그의 묘소로 가는 길은 아름답다. 묘소에도 참배를 하고 싶어진다. 작고 초라한 묘소 앞에 있는 비명을 읽는다.
"어머님 심부름으로 이 세상에 나왔다가/ 이제 어머니 심부름 다 마치고/ 어머님께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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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 시인 묘소
그의 부친은 한학자를 하면서 작은 농사를 지어 생계를 이어간다. 3,1운동도 실패로 끝나고 우리민족은 좌절과 울분이 있었지만 침묵으로 나날의 생계를 걱정하던 때다. 개인적인 희망을 가지기란 거의 불가능할 때 그는 여행이란 희망을 가지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는 세상을 알고 싶었고 가보지 못한 곳을 가고 싶어 했다.
이를 위해 많은 독서를 한다. 책속에는 많은 세상이 있음을 발견하고 작은 세상에서 큰 세상으로의 기행을 시작한다. 비록 안성에서 송전공립초등학교 1학년 때까지 다녔지만 그는 고향 난실리를 잊지 않았다. 이후 경성사범학교와 일본동경고등사범학교를 다닐 때도 이곳 안성의 난실리는 늘 마음의 고향이었다. 한국문단의 고질적인 병폐일 수도 있는 등단을 거친 시인이 아닌 것도 특이하다. 시집으로 독자들에게 호평을 받으며 시인으로 등단을 한 것이니 가장 바람직한 모습이 될 런지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조병화 시인이 현실참여를 하지 않았다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 분은 해방전후사의 혼탁한 정치판에서 환멸을 느껴 다시는 어떤 정치노선에도 관여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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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운재 뜰
복이 많았던 시인은 1949년 제 1시집 버리고싶은 유산‘을 시작으로 52권의 시집을 포함하여 160권의 저서가 간행되었다.
인하대학교 대학원장, 한국시인협회장, 한국문인협회이사장, 세계시인대회장,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을 지냈으니 명예도 누렸던 분이다. 한편 상복도 많았다. 아시아자유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서울시문화상, 대한민국예술원상, 삼일문화상, 대한민국문학대상, 국민훈장 모란장,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 수상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런 화려한 상과 명예답지 않게 그에겐 슬픔도 많았다. 한때 그는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다. 해방정국에서 그가 좌절하면서 분노했던 것은 모두가 누구나 잘났다는 것과 자신은 그 어디에도 발붙일 곳 없다는 절망감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잊고 싶었을 때 그가 단박에 써내려간 시 추억을 읽으면서 그의 고향 안성의 난실리를 방문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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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 시인의 서재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보던 날이 하루 이틀 사흘 여름 가고 가을 가고 조개 줍는 해녀의 무리 사라진 겨울 이 바다에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가는 날이 하루 이틀 사흘
이 시에 곡을 붙인 노래를 듣다보면 슬픔이 머리를 타고 가슴으로 내려오는 감동이 되기도 한다. 특히 메조소프라노 백남옥의 음색은 당시 조병화 시인의 심정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는 듯 가련한 슬픔이다. 그러나 이 슬픔은 마음을 정화시키고 정결케 하는 마력을 가진다. 반복되는 '잊어버리자고'의 언어에는 형언할 수 없는 의지의 다짐이 가슴을 치는 듯 울렁거린다. 시가 노래가 되었을 때 이런 알싸하고 서정적 그리움이 일렁거린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며, 난실리의 편운재를 걷는다.
자신의 어머니를 그렇게나 그리워했던 그를 알기에 필자는 어느 때 부턴가 이 시인을 달리 평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필자 역시 조병화 시인을 현실참여 시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홀대한 적이 있다. 이것은 진정으로 시인을 몰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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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 시인 시비
사람들은 거의 모두 잘 알지도 못하며 상대를 비판하며 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를 알지 못하고, 문외한이 되고 무지한 상태에서 판단하게 된다. 결국 상대를 비판하면 역시 자기 자신도 부정적인 인간이 되어 가는 것이다. '조병화 시인과 안성'으로 제목을 정하고 문학기행을 떠나면서 나는 이 부분을 깊이 생각하며 반성했다.
안성은 박두진 시인의 고향이기도 하며, 난실리 근처에 김대건 신부의 묘소가 있는 천주교 성지 미리내가 있다. 38번 국도를 따라 30분을 달려가면 벽초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 전의 무대가 되기도 했던 '칠장사'도 있으니 종교를 초월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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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 내부
이제 평생을 여행과 아이같은 맑은 꿈을 꾸며 살다가 떠나간 조병화 시인, 그 집 '편운재'를 떠난다. 집 이름처럼 하늘에는 구름 한 조각이 흘러가고 있다. 그렇다 삶은 편운(片雲:한조각 구름) 같은 것이리라. 삶이 구름처럼 느껴질 때, 여기 조병화 시인의 삶과 꿈 죽음이 머물고 있는 안성의 난실리 편운재를 찾아보시라. 푸르른 꿈과 삶의 의미가 오롯이 당신의 가슴에 새겨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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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운재 정문
높고 먼 산에는 잔설이 남아있다. 초겨울 바람이 싸늘하다. 그러나 160년 전 목숨을 걸고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찾아 든 ‘미리내’ 산골을 찾아가는 길은 사뭇 경건하다. '미리내'란 지명이 가슴을 아리게 하는 슬픔의 아름다움이 숨어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성지에 접근할수록 가슴 저민다.
1801년 기해박해(1839년)때,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의 깊은 골짜기로 숨어 들어와 살기 시작하였다. 여기 저기 흩어져 화전밭을 일구면서 살아 갔는데 밤에는 달빛 아래 은하수처럼 보였다. 이것이 은하수의 순우리말의 '미리내'란 지명이 생긴 유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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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내성지 입구
미리내성지는 한국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신부의 묘소와 그를 기념하는 경당이 있는 곳이다. 경기도 일원에 살던 천주교인들이 숨어들어 살아 가던 이곳이 성지가 된 것은 이름없는 순교자들의 묘지와 김대건 신부의 묘소가 모셔졌기 때문이다.
김대건 신부는 1846년 9월16일 한강 새남터에서 참수 당하였다. 아무도 겁을 먹고 그 시신을 거두지 못하고 40일이 지났다. 시신이 묻힌 곳에서 며칠동안 망을 보면서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옮기려는 사람이
있었다. 미래내에 살던 청년 이민식 신도였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걸고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거두어 그해 10월30일 지금의 묘소에 김신부의 시신을 안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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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성인 103위 성전
김대건 신부의 묘소앞에서는 머리가 저절로 숙여진다. 그는 중국어와 불어를 유창하게 잘 했다고 전하며, 겸손과 순종으로 사람들을 감동시키던 분이었다.
천주교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인 페레올 주교가 유언으로 자신을 김대건 신부 옆에 묻어 달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가슴이 뜨거워진다.
김대건 신부의 발뼈 조각이 관 조각과 함께 보관되어 있는 ‘경당’안을 들여다 보니 경건한 마음이 들면서슬픔이 엄습한다. 이처럼 신앙의 자유는 존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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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신부 상
천주교순교자 '103위시성기념성전'은 우람하다. 특히 2층에는 신도를 박해하기 위한 고문도구들이 살벌한 분위기를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미리내 성지를 나서며 나는 신앙의 자유와 헌신을 위해 목숨을 걸고 살았던 사람들에게 현실적인 삶이 부끄러워 하늘을 올려다 본다. 푸르른 하늘에 몇 조각 구름이 흘러가고 있다. 삶의 무게를 저 구름에 싣고 날아가고 싶다.
'안성맞춤박물관'은 안성IC에서 안성시 방향으로 직진하고 약 10분쯤 달리면, 오른쪽 중앙대 안성캠퍼스 입구에 자리 잡고 있다. 주차장이 넓고 건축학적 미학이 예사롭지 않은 박물관은 안성이 유기의 고장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곳이다. 유기전시실에는 유기의 역사 제작 방법을 알면 우리 조상들의 지혜를 실감한다. 이 전시실에는 제기, 반상기, 불기등 옛날 분들이 주로 사용했던 유기를 전시하고 있다. 안성맞춤이란 말을 들으면서 자라면서 그 유래를 이제야 확실하게 알게된다. 무엇이 매우 잘 맞음을 비유하여 '안성맞춤'이란 말을 사용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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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만춤박물관
안성에서 제작한 유기그릇이 장인의 정성으로 품질과 디자인이 옛 사람들을 만족시켰기에 ‘안성맞춤’이란 말이 대명사로 되었다. 이제 안성과 인연을 맺었던 선교사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안성성당을 세운 프랑스 출신의 안토니오 공베르(1875~1950) 신부의 이야기는 가슴 저린다. 그의 고향은 프랑스 남부 캄블라제. 1900년 10월 동생 줄리앙 공베르(Julien Gombert)와 함께 선교사로 한국에 파견된다. 공베르 형제의 첫 부임지는 안성이었다. 이들 형제는 안성에 천주교 성당(현재 안성 구포동성당)을 건축한다.
공베르 신부는 1914년 프랑스에 갔다가 4년 후 안성으로 돌아온다. 이때 와인과 성경책 등 500여권을 한국으로 가져왔다. 안성의 명문 안법고등학교도 설립한다. 안성 농민들을 위해 포도나무도 가져와 심어 오늘날 안성이 포도의 고장이 되었다.
그러나 두 형제는 한국전쟁 때 인민군에게 납북되어 가다가 중강진 근처에서 1950년 11월12일 추위와 배고픔으로 사망했다. 그의 고향 프랑스 캄블리제 마을 생가에서 그를 기다리던 가족들을 생각하면 가슴 저민다.
시간이 세월이 되어 이제는 이들의 붉은 피의 의미를 알기에 한국의 기독교는 다시 제3세계를 향한 선교 선진국이 되고 있다.
대표적인 청록파 시인의 한분인 박두진 시인의 고향마을을 향해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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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두진 시인 자료관
박두진 생가는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안성중학교 운동장이 그의 생가다. 다만 그가 2살 때 살았던 보개면 신양복리가 그의 고향마을이 되고 있다.
시립도서관 3층에 개설되어 있는 ‘혜산박두진시인자료관’을 찾아가면 그의 생애와 작품및 사진과 소장품을 체계적으로 전시하고 있다. 도서관 입구에 세워진 시비에서 박두진 시인의 시비를 읽으면 안성들의넓은 품이 다가와 청록파 시인이 태어난 고장임을 확인시켜 준다. 그러나 어쩐지 박두진 시인이 홀대받고 있다는 생각을 안성객사를 들여다보면서 생각한다.
안성객사는 장소를 바꾸면서 까지 훌륭하게 복원되었는데,한국이 낳은 위대한 시인의 생가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고 하더라도 문학관이 되지 못하고 고작 자료관이다. 그것도 도서관 3층에 더부살이를 하고 있다.
그의 시는 살아서 프랑스에서도 읽혀지고 있지 않은가.
프랑스 아비뇽에 로마유적지인 베종 라 로망(Vaison la Romaine)에 박두진 시인의 시 ‘해’의 시비가 세워졌고,첫 구절이 앞면은 한글로, 뒷면은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있다는 내용을 들은 기억이 있다.
이 시를 읽지 않고 박두진 시인을 논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넘어 산 넘어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넘어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앳된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이 시를 읽다보면 노랫말이 떠올라 흥이 난다. 하지만 시인이 조국광복을 기원하면서 썼다고 하는 것을 아는 이는 드물다. 자유를 갈망하는 이 시는 안성이 낳은 박두진 시인의 대표시다. 박두진 시인의 생가가 없어진 것이 못내 아쉬워하면서 그가 유년을 보냈던 고향마을의 길을 걷는다. 물론 옛 길은 흔적도 없다.
이곳을 찾기는 싶다. 경부고속도로 안성IC에서 38번 국도를 타고 시내를 휘돌아 중부고속도로 일죽IC 방향으로 달린다. 시내를 벗어나는가 싶다가 다시 번듯한 건물들이 보이는 시립도서관과 시설관리공단, 안성객사가 모여 있는 곳이다. 이곳이 시비가 세워진 보개면 신양복리다. 박두진 시인이 유년 시절을 보낸 곳이다. 시비에는 시인의 작품인 ‘고향’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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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객사
시비 뒷면에는 1916년에 태어나 1939년 등단한 이야기의 시작으로 그의 경력이 적혀있다. 1998년 시인이 세상을 떠나던 해에 건립되었다. 세로 행으로 쓰여진 시는 가까이 가서 읽어야 글씨를 제대로 알아 볼 수 있다. 읽어보면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의 아련한 기억을 더듬은 흔적이 역력하다.
故鄕 이란다. 내가 낫고 자라난 故鄕 이란다. 그 먼, 눈 날려 휩쓸고, 별도 얼어 떨던 밤에 어딘지도 모르며 내가 태여 나던 곳, 짚자리에 떨어져 첫소리 치던 여기가 내가 살던 故鄕 이란다. 靑龍山 옛날같이 둘리워 있고 우러르던 예 하늘 푸르렀어라. 구름 피어오르고, 송아지 울음 울고 마을에는 제비 떼들 지줄 대건만 막쇠랑, 북술이랑, 옛날에 놀던 동무 다 어디가고 둘 이만 나룻 터럭 거칠어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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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두진 시인 시비
안성에는 현역의 예술가들이 여럿이 터를 잡고 살고 있지만, 시인 고은과 무용가 홍신자가 유명하다. 고은 시인은 벌써 20년 전부터 살고 있으며, 홍신자는 1993년부터 이곳에 정착하여 ‘죽산국제예술제’를 기획 공연하면서 살고 있다. 안성 남사당 바우덕이 축제는 볼만하다.
우리나라 남사당의 유일무이한 우두머리였던 이 고장 출신의 '바우덕이'를 기리는 이 축제는 안성이 남사당의 고장임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남사당놀이 상설공연이 있을 정도이며 남사당 전수관이 개설되어 강습을 담당하고 있으니 앞으로도 안성은 남사당을 보존 발전시키는 지역이 될 것이다.
박두진이 어린 시절에 살았던 보개면 신양복리를 떠나 다시 38번 국도를 따라 죽산방향으로 차를 달리다가 진천방향의 17번 국도로 진입하면, 이내 칠장사에 닿는다. 주차장 뒤에 보이는 일주문을 통과하여 언덕길을 오르면 바로 칠장사다.
칠장사는 636년 자장율사가 창건했다고 전하지만 확실치 않다. 칠장사는 서민적인 사찰이다. 칠장사 대웅전은 사찰의 경건함이 그대로 묻어나는 곳이다. 그 내부에는 오불회괘불탱이 보관되어 있다고 하는데,볼 수는 없다. 국보296호로 정해질 만큼 미학과 사료적인 가치가 높다는 괘불이다. 1628년 법경(法烱)이 그렸다. 괘불이란 사찰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불공할 때 사용하는 대형 불교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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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장사
칠장사의 이 그림은 길이 6.56m, 폭 4.04m 라고 하니,그 크기가 대단하다. 혜소국사비의 비문을 읽다보면 칠장사가 역사적인 의미가 깊고 넓은 곳임을 알게 된다.
이 비는 혜소국사의 불덕을 위하여 세운 비다. 그는 고려 광종 23년(972)에 안성에서 출생하였으며,10세에 출가한다. 혜소국사는 속성은 이씨이며, 이름은 정현인데 28세에 왕명에 의하여 대사가 된다. 그는 노년을 칠장사에서 보내며 이 고장사람들에게 큰 덕을 베푼다.
이 비는 귀부(龜趺), 비몸돌, 머릿돌이 각각 따로 놓여있다. 사찰명은 혜소국사가 일곱 명의 악인을 교화하여 현인이 되게 하였다는데서 유래한다. 절의 주산은 칠장산이다. 등산로 입구의 무성한 갈대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겨울을 걱정하고 있는 듯 마구 흔들리고 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칠장사가 많은 사람들에 알려지게 된 것은 이곳이 벽초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에서 조광조가 병해대사(갓바치)를 찾아가 당시 시국에 관한 토론을 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안성은 동으로 이천시, 서로는 평택시, 북쪽은 용인시와 접한다. 남동쪽으로는 차령산맥(車嶺山脈)을 경계로 충청북도의 음성군, 진천군에과 인접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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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장사
충북과 충남의 3도의 도계(道界)를 인접한 곳이 안성이다. 충북과 경계인 차령산맥에는 서운산(瑞雲山:547m)을 최고봉으로 500m 급 안팎의 산지가 솟아 있다.
칠장산(七長山:492m) 아랫도리에 자리잡고 있는 칠장사를 내려오면서 조병화 시인과 박두진 시인의 고향 안성의 또 다른 이런 모습을 확인한다. 제법 높은 산지의 능선을 따라 평야지대와 안성시는 동서 2개의 지형구로 나누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산과 들이 적당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안성은 한국시단의 거목인 조병화 시인과 박두진 시인을 낳았다. 특히 조병화 시인의 고향 마을 난실리는 어머님이 그리운 사람들이 찾아와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그의 시를 읽게 될 것이다.
방문객들은 편운재’ 벽에 새긴 조병화 시인의 어머님의 말씀인 "살은 죽으면 썩는다."를 읽으면서, 각자 자신의 어머니의 옛 언어들도 기억하게 될 것이다. 가슴으로 다가서는 어머니의 사랑을 떠올리며 안성을 떠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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