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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 며칠 동안 보충수업 문제로 갈 수가 없었다. 여대생 혼자서 고생할 것 같아 조금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 다음 주가 되어서야 병원에 갈 수 있었다.
오랜만에 가니 벌써 정이 들었는지, 빡빡머리 미주, 카트라이더 잘하는 재형이, 동화책 많이 읽는 준영이, 그리고 몇몇 아이들이 반갑게 맞았다. 제일 살갑게 구는 미주의 까슬까슬한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 주자 재미있다는 듯 까르르 웃었다.
“지섭 오빠. 어디 갔다 왔어? “
“응. 미주처럼 단 거 대따 많이 먹었더니, 배탈 나서 주사 꿍 맞았어.”
“정말? 아팠겠다. 미주도 대따 아픈 주사 맞아. 주사 무서워.”
아차 싶었다. 성인도 견디기 어려운 골수 주사를 미주는 정기적으로 맞는 것이었다.
“미주는 잘 지냈어?”
“응. 그림도 그리고, 동화책 한 개, 두 개, 세 개, 네 개, 다섯 개! 다섯 개나 읽었어.”
미주는 자랑스럽다는 듯이 손가락 다섯 개를 활짝 펼쳐보였다.
“기특하네, 미주?”
칭찬받는 맛에 신나는 미주는 나 없는 사이에 병원 학교에서 일어났던 일을 모두 얘기했다. 지루하지만, 아이들이 원래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일부러 과장되다 싶을 정도로 맞장구를 쳐주었다. 대학생이 나를 보더니 ‘큭’하고 웃었다.
“그 언니가 계속 기다리던데?”
미주의 일장연설을 나는 대충 듣고 맞장구치고 넘겨버렸다.
* * *
“김 군아, 느 밥 안묵었지? 먹고 온나.”
마침 영어 시간이 되어 할 일이 없어졌다. 영어는 외부 강사가 학교 커리큘럼을 제대로 이수하지 못하는 병원 학교 아이들에게 매주 1번씩 가르치는 것이었다.
식사할 곳이 마땅치 않아 나는 도넛 두 개와 병에 들어있는 차가운 커피를 사서 밖으로 나갔다. 7월의 날씨는 무더웠고 매미울음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병원 뜰에 있는 분수대에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나는 밀집된 곳과 조금 떨어진 햇볕을 피할 수 있는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분수에 빛이 반사되어 은빛으로 일렁거리는 것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분수 반대편에 붐비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벤치에 또 다른 내가 앉아 있었다.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 사이엔 은색의 철책이 가로놓여 있다. 나와 나는 나를 조용히 응시했다.
요즘 같아서는, 내가 나 자신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일상의 크고 작은 트러블과 그것에 놓인 내모습의 경계가 불투명해지고, 결국은 그것을 느끼기도 전에 시간이 앞서가는 것이었다. 나의 삶이 내 삶이 아닌 것이다. 무엇인가 가치 있는 생각을 의식적으로라도 하지 않는다.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살아내는 일은 시간을 따라잡기에도 버거운 것이었다.
분수대 주변을 누군가 배회한다 싶더니, 어느새 내 곁에 와 조용히 앉는다. 그게 며칠 전 내가 책을 빌려 주었던 영은이라는 것을 현실로 받아들이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흠흠’ 하는 소리가 나를 현실로 불러내었다.
“기다렸다구요, 오랫동안.”
내가 “왜?”하는 표정을 짓자, 그녀는 조금 너덜너덜해진 댄 브라운의 추리 소설 책을 보여 주었다.
“내일 준 댔는데, 왜 안 왔어요? 덕분에 줄거리를 달달 외울 정도로 많이 읽었어요. 이 자리에서.”
“미안.”
“할 말이 그것 밖에 없어요?”
그녀는 짜증난다는 표정을 하고 마스크를 벗고 모자를 벗어 손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나보다 조금 긴 수준인 쇼트 컷을 하고 있었다. 처음 보았을 때는 어린아이들 틈에 마스크까지 하고 있어서 어린아이로 보였는데, 이제 보니 또래아이들과 비슷한 키에 비슷한 체형이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풍기는 분위기는 그 훨씬 이상이었다.
“담당 의사나, 엄마가 보면 난리 나겠지만, 숨은 쉬어야죠.”
그녀는 마스크를 벗어서 자기 옆에 가지런히 놓고 환자복 상의의 단추를 한 개 푼다. 꼭 의도한건 아니지만 하얗다 못해 서늘한 그녀의 피부가 보였다.
아마도 백혈병과 같은 병에 걸려서 면역문제 때문에 마스크를 하고 있는 것이리라.
“식사는 했어?”
그녀는 힘없이 고개를 젓는다. 예의상이라도 도넛을 권하는 게 옳을 듯 했다. 내 몫으로 플레인 베이글을 하나 남겨놓고 그녀에겐 시나몬 베이글을 권했다.
“잘 먹을게요.”
예의 헛기침 소리에 ‘난리 나겠지만.’이라고 조용히 덧붙였다.
영은은 사양하지는 않았지만 처음 두 입정도 먹는 시늉만 하고 가벼운 구토기가 이는지 그것을 노려보고만 있었다.
“못 먹겠으면 버려. 환자는 멸균식을 먹어야지.”
그녀는 미간을 살풋 찡그리더니 시나몬 베이글을 바로 옆의 땅에 버렸다. 그리고는 내가 마시던 스타벅스 병 커피를 꿀꺽꿀꺽 소리를 내며 마셨다.
우리는 지난주에 처음 만났을 때처럼 한동안 말없이 있었다. 나는 다시 은 장막 너머의 세계를 보고 있었고 그녀는 어느새 도넛 주위에 모여든 개미를 열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개미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영은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시험을 볼 때마다 늘 1등을 했어요. 어른들의 사랑도 많이 받았죠.”
그녀는 잠시 간격을 두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친구들에게 인기도 많았구요, 책도 많이 읽었어요.”
한 개, 두 개, 세 개, 네 개, 다섯 개! 미주의 다섯 손가락.
“그런데 지금 보니까, 그것들은 아무것도 아녜요. 정말이지…….”
그녀는 나와 눈을 마주치자 얼굴을 조금 붉혔다.
“그냥 그렇다구요. 흠흠.”
그녀가 돌아가고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책을 펼쳐서 보았다. 아무 의미도 없는 글씨의 조합과 배열을 눈에 무작정 넣고 있었다. 정말이지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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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놓았던 것이라 보조 안맞추겠습니다.
시간을 할애하셔서 편하게 읽어주시면 좋구요.
역시나 편하게(-ㅅ-!) 평을 올려주시면 감사하겠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