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을 붙들라(마가복음 3장 13-19절) 주일설교
나는 젊었을 때 교회를 경멸하고 무시했었다. 그러나 내 조국이 어려워졌을 때 교회는 우리 유대민족의 유일한 희망이었고 소망이며 안식처였다. 내 나이 먹어 석양녘에 교회 외에 내 영혼의 위로를 경험할 수 있는 어떤 곳도 찾지 못했다. 나는 이제 그리스도와 교회로 돌아온다.” - 아인슈타인 -
여러분에게 교회는 어떤 존재입니까?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는 제리코(Gericaut Theodore)의 <메두사의 뗏목>이라는 작품이 있다. 프랑스 배 메두사 호는 1816년 세네갈 해상에서 파선을 해 뗏목에 사람들을 태워 필사의 구조 작전을 펼칩니다. 파도치는 바다를 표류하며 굶주림과 병마, 갈증과 악천후를 겪으며 살아남기 위해 죽은 동료의 인육까지 먹었다고 합니다. 결국 선원과 승객 149명중 마지막 15명이 살아남습니다.
이 작품은 이러한 실화를 소재로 그린 그림입니다. 그림을 보면, 흐린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끼어 있습니다. 돛을 단 배는 강풍과 높은 파도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속에서 배에탄 사람들의 모습이 극명하게 두 부류로 나뉘어 집니다. 터번을 쓰고 돛대를 붙들고 있는 사람을 중심으로 좌측 삼각형을 이루는 절망의 무리들과 우측 삼각형을 이루고 있는 마지막 희망을 놓지 않고 필사의 몸부림을 하는 무리로 나뉘어 집니다.
우선 좌측 절망의 사람들은 거센 파도를 봅니다. 모두들 누워버렸습니다. 결국 시체가 되어 여기저기 뒹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측 희망의 사람들은 저 멀리서 지나가는 배 한 척을 발견하고 물통에 올라가 자신의 옷을 벗어 흔들며 구원을 요청합니다. 마지막 남은 힘으로 일어서 손을 내밀어 흔들어 봅니다. 제리코는 뗏목에 탄 사람들이 표류 끝에 구조를 받게 되는 순간의 환희를 캔버스에 담고자 했던 것입니다.
50대 남성들에게 최고의 베스트셀러라는 <그리스인 조르바> 영국인 작가인 바실(나)(35세)은 책벌레 소리를 듣는 성격의 소유자. 그는 그리스의 크레타 섬 여행에서 자유로운 성격의 조르바(65세)를 만난다. ‘나’와는 정반대의 성격의 조르바는 당당하고 쾌활한 성격으로 바실에게 많은 영감을 준다.
이미 노인이 된 조르바는 청년인 ‘나’를 두목이라고 부르며 갈탄 사업을 함께 하게 된다. 두 사람이 묵게 되는 조그만 여인숙 주인인 프랑스 출신의 오르탕스 부인은 조르바의 애인이 된다. 사모하던 청년을 거절해 자살케 한 마을의 아름다운 과부는 주인공 ‘나’와 정을 나누지만, 자살한 마을 청년의 아버지와 마을 사람들에 의해 교회 앞에서 목이 잘려 끔찍하게 살해당한다. 뒤이은 오르탕스 부인의 죽음 때에도 마을 사람들은 그녀가 숨을 거두기 전부터 그녀의 가재도구를 도둑질한다. 수도원에서의 각종 퇴폐적인 모습을 보고 분노한 젊은 수도사 자하리아는 조르바의 부추김으로 수도원을 불지르고 도망치지만 바닷가에서 원인모를 죽음을 맞았다. 결국 갈탄 사업이 실패하고, 크레타섬을 떠나면서 ‘나’와 ‘조르바’는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는 내용.
혹자는 필자인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실존 인물인 기오르고스 조르바와 함께 탄광사업을 하고 그와 어울렸던 그 경험으로 조르바의 삶을 기행 하듯이 이 책을 서술하였다고도 말한다. 이 책이 50대 남성 베스트셀러인 이유는 무엇일까? 조르바는 ‘인간을 속박하지 않는 지상의 신’에 가까우며, ‘오늘을 즐겨라!(Carpe diem)’를 충실히 이행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은퇴와 새 출발을 앞둔 50·60대가 조르바가 건네는 자유와 해방의 목소리에 크게 반응한 것 같다”고 평가하기도. 실제로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교수는 딱 50세 되던 해 이 소설을 다시 읽고는 교수직을 버리고 그림 공부하러 일본으로 갔다고 한다.
흔히 50세 전후 중년기를 '사추기(思秋期)'라고 부른다. 인생의 봄에 해당하는 청소년기에 찾아오는 '사춘기(思春期)'에 빗댄 말로, 실제로 이때 사춘기처럼 신체적ㆍ정신적 변화를 겪는 사람들이 많다. 또한 이 시기는 신체의 노화 현상이 뚜렷해지는 변곡점으로 건강에 적신호가 켜지는 경우가 많다. 또한 중년을 맞는 사람들 중에는 사춘기를 맞는 자녀와의 갈등과 맞물려 가족건강시스템에 제동이 걸려 고충이 더욱 심화될 수 있으며, 이해와 수용이 필요한 중요한 시기에 서로의 상처 투사로 인해 부모와 자녀 관계가 악화되어 전혀 대화가 안 되는 가족이 있다.
“남편은 도대체 나한테 관심이 없어요. 정말 속상해요. 아이들을 위해서 힘들고 어려워도 업고 안아주며 키우느라 못 먹고 못 자고 최선을 다해 키웠는데, 이제는 저절로 큰 것 같이 외면하고, 엄마인 나를 무시하고 귀찮아해요. 도대체 내가 왜 사는지, 내가 뭔가 하는 생각에 우울해질 때가 많아요. 가슴이 휑하니 뚫린 것 같고 공중에 붕 떠있는 듯한 허전한 이 마음을 무엇으로 달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어느 중년 부인의 고백이다.
중년을 건강하게 준비하기 위한 방안
1. 자신의 삶과 뜻과 방향을 확실히 정한다.2. 자기가 살아온 삶에 결코 실망하지 않는다.3. 실천할 수 있는 몇 가지 장기 계획을 세운다.4. 주위의 모든 사람을 사랑하려고 노력한다.5. 상대방이 비판해도 자신을 비하하지 않는다.6.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갖지 않는다.7. 신앙을 삶의 중심에 둔다.
중년의 때는, 우리의 사명 역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교회 봉사 오래하고, 직분도 받고, 연수가 오래 되면, 사명에 대해 흐려지는 경우가 많다.
기독교 사상가 달라스 윌라드(Dallas Willard)가 자신의 책 <마음의 혁신>(Renovation of the Heart, 복있는사람)에서 인간의 자아에 대하여 말하는데, 달라스 윌라드는 전통적으로 인간의 몸을 동그라미로 그려놓고 그 안에 영혼을 배치하는 그림과는 전혀 다른 그림을 제시한다. 그는 영혼을 육체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성경이 말하는 영혼이란 육신을 포함하여 의지와 마음인 심령, 사고와 감정인 생각, 그리고 사회적 관계 등을 포괄하는 전인격적 존재를 말한다.
19세기 영국 시인이자 사제였던 제라드 맨리 홉킨스는 이렇게 말한다. “두 손을 높이 들고 하는 기도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하지만 거름 쇠스랑을 손에 든 남자, 오물통을 든 여자도 그분께 영광을 돌린다. 그분은 너무나 크시기 때문에 당신이 진심으로 모든 것이 그분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생각하면 실제로 그렇게 된다.”
기독교 변증가 오스 기니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님은 우리가 일상적인 일, 보이지 않는 일, 보상이 없는 일 가운데 그분께 순종하길 요구하신다. 우리는 화려한 순간과 우리 말을 경청하는 청중에게서 우리의 자아상을 찾지만, 그분은 무대의 조명이 꺼진 상태에서 우리가 하는 평범한 일 가운데서 그것을 찾으신다.”
오스왈드 챔버스 “단조로운 일이야말로 우리의 성품을 평가하는 시금석”
결국 일상생활의 사명은 대단한 영적인 경험이나 프로그램을 통해서 얻는 것이 아니다. 단조롭고 평범한, 심지어 무의미한 허드렛일로 가득한 일상생활의 삶에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를 따라, 성령의 인도와 충만으로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일상생활의 사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달마야 놀자>에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노스님이 암자의 스님과 건달들에게 문제를 냅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가득 채우는 사람이 이기는 거야. 10분 안에 다 채워야 하는데, 깨진 부분에 손을 대거나 막으면 안 돼.”
스님과 건달들은 물을 부어보기도 하고, 몰래 발로 흙을 긁어서 깨진 부분을 막아보기도 하고, ‘물이 마음이고 마음이 물이며 몸과 마음이 다르지 않다’라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깨진 독 안에 들어가 앉아보기도 하지만, 노스님한테는 아무것도 통하지 않습니다. “난 물을 채우라고 말했지 사람을 채우라고는 안 했다. 답이 아니야.”
예정된 10분이 다 되어갈 즈음에 건달 재규가 부하들에게 “항아리 들고 따라와, 빨리!” 하면서 뛰어가고, 뛰어가는 재규를 따라 부하들도 밑 빠진 독을 들고 뛰기 시작합니다. 다음 장면에서 재규 일당은 시원하게 떨어지는 폭포수 아래 연못처럼 패인 웅덩이에 독을 던집니다. 재규 일당이 던진 밑 빠진 독이 잠기면서 조금씩 물이 차오르더니 마침내 밑 빠진 독에 물이 가득 채워집니다. 이것을 바라보던 노스님이 이렇게 말합니다.
“독에 가득 든 물이 찰찰 넘치는구나! 아주 좋다! 시원하다!”
이 장면은 신앙생활이 무엇인지, 충만한 삶이 무엇인지, 성령 충만이 무엇인지를 너무나 잘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우리는 신앙을 삼위 하나님과의 관계로 이해해야 합니다. 삼위 하나님의 실재 속으로 들어가 그 안에 잠겨 충만함을 누려야 한다. 삼위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누릴 때 신앙의 균형을 잡을 수 있고, 올바른 신앙이 되며, 이것이 제자의 삶으로 연결된다.
캐나다 리젠트 칼리지의 설교학 교수였던 데럴 존슨이 쓴 《삼위 하나님과의 사귐》(Experiencing the Trinity, IVP)은 짧지만 영향력이 큰 책으로, 이 ‘관계’와 ‘균형’을 잘 알려준다.
올바른 관계를 성경은 ‘의’(義)라고 말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의는 한 개인의 덕성이나 법적・추상적 덕목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관계가 올바를 때 그것을 의롭다고 말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인간 상호간의 올바른 관계, 자아와의 올바른 관계, 일과의 올바른 관계, 생태계와의 올바른 관계 같은 모든 관계를 통해 의를 추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일상생활 전반에서 올바른 관계를 추구하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충만’(성령 충만, 말씀 충만, 생명 충만 등)은 이렇게 ‘관계’ 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공간적으로 예배당 안에, 시간적으로 주일과 모임 시간 안에 신앙을 가두어두고, 성도들은 교회 안에서 공공연히 성과 속을 구분하는 이원론적 신앙 행태를 마치 경건함과 거룩함의 대명사인 것처럼 여기고, 일상의 자리인 일터와 가정, 이웃과 세상을 은근히 거북한 곳으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았는지?
우리는 세상을 향한 교회의 존재 이유와 사명을 확인하고, 일상을 보냄 받은 파송의 자리로 인식하고 경주해야.
스가랴 14장에는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란 표현이 나온다. 구약 시대에는 ‘여호와께 성결’이란 어구를 아무데나 쓸 수 없었다. 그만큼 엄격한 거룩이 요구되었다. 그런데 스가랴의 예언에서 매우 파격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것을 파격적이라고 느끼는 것은, 그동안 하나님의 백성이 거룩을 배우기를 바라신 하나님 뜻에서 멀어져서 거룩을 종교적인 상황, 성막과 성전 안에만 가두어두었기 때문이다. 원래 하나님의 의도는 이런 예배 행위, 제사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당신의 거룩하심을 알고 배워서 그 거룩을 모든 일상생활의 삶에서 드러내는 것이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제사에 관해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는 레위기에서 볼 수 있다. 레위기에 기록된 자세한 제사 규정을 통해 배운 거룩은 레위기 19장에서 다양한 일상생활에서의 거룩으로 이어진다. 이것이 원래 하나님의 의도였다.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대목을 보면, 성경이 이렇게나 현대의 삶 안으로 훅 치고 들어올 수 있는가 싶다. ‘말’은 고대의 운송 수단이었으니 ‘말 방울’은 요즘으로 치면 차량의 경적과 같을 것. 따라서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칭하는 현대인들이 운전석에서는 거룩을 드러내기는커녕 오히려 쉽게 그리고 자주 화를 내곤 한다는 사실을 말 방울과 연결하여 보면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말이 제법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마가복음의 선택과 사명-김경진(기독신학교 교수)
마가복음 3장은 열두 제자를 부르신 대목. 마가는 예수님께서 열두제자를 부르신 목적을 기록했다. 막 3:14에 의하면 첫째, 자기와 함께 있게 하기 위하여, 둘째, 보내사 전도(케리쏘, 선포)하도록, 셋째,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를 갖도록 하기 위해서 부르셨다.
공관복음의 병행구절들과는 차이점이 있다. 마 10:1에는 “예수께서 그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몰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눅 6:13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른 두 복음서와의 비교할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세 가지 목적 중 첫째 항목은 마가복음에만 나오는 독특한 내용임을 알 수 있다(마 10:1,2-4; 눅 6:12-16,9:1-2; 막6:7). 즉 마태복음에는 열두 제자들 택했다는 언급이 아예 없고(프로스칼레오, 부르다), 누가복음은 제자들을 택했다고 말씀하지만(에클레고마이, 선택하다) 택한 목적에 대하여는 함구(緘口)하고 있다. 열두 제자를 ‘부르신 목적’을 구태여 밝히고 있는 것은 마가복음 뿐.
왜 마가는 다른 복음서에 없는 열두 제자를 부르신 목적을 구태여 못 박아 기록했을까? 마가복음 기록 당시의 상황이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이 필요했던 상황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즉 마가가 속하였던 신앙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제자로서의 이런 특징이 결여(缺加)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지리적으로 볼 때 로마에 위치했던 마가공동체는 로마정부와 유대인들로부터 박해와 핍박을 받는 상황에 직면하여 있었다(참고. 막 10:30에서 ‘핍박을 겸하여 받고’는 마가복음에만 발견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가교회교인들은 두 종류의 반응을 보였다. 일부는 핍박과 환난 가운데서도 순교를 각오하며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었던 반면, 또 다른 일부는 무서운 핍박의 공포에 눌려 그만 믿음을 포기하고 배교하는 자들도 생겨났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막 10:31) 구절은 마가교회의 이런 상황을 잘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된 자”는 신앙의 경륜이 오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핍박 앞에서 변절(變節)한 신자를 가리키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는 신앙의 경륜이 일천(日淺)함에도 불구하고 핍박에 굴하지 아니하고 순교를 기꺼이 각오한 신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둘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 중 첫째가 ‘자기와 함께 있게 하기 위함’ 이라는 사실은 마가교회에 있어 대단히 의미 있는 대목이었을 것입니다. 마가는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친히 부르신 장면에서 부르신 목적을 구태여 분명하게 밝힘으로 마가공동체 교인들에게 제자도(第子道)의 한 특징, 즉 어떤 상황, 형편, 처지, 조건 가운데서도 항상 주님께서 함께 하시며 동행할 것을 새로이 상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스타벅스를 시작한 하워드 슐츠가 모두가 부러워하는 성공 가운데 물었던 질문입니다.
[Onward] 173~174페이지에 나오는 글입니다.
“내가 입을 열었다. 비틀스 해체가 언제 시작되었느냐는 질문에 대해 폴 매카트니가 답한 내용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 다음 나는 해당 내용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1965년 여름, 비틀스는 처음으로 뉴욕의 시스타디움에서 공연을 했다. 5만 5,000명의 팬들이 열광하고 있었는데, 이는 비틀스 라이브 공연 사상 최대 규모의 관중이었다. 그러나 비틀스는 팬들의 아우성과 혼돈 때문에 자신들이 연주하는 곡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들의 예술이 그들의 인기에 묻혀버린 것이다. …
우리가 더는 우리의 음악을 못 듣게 된 게 언제부터입니까? 매장 수가 4,000개를 돌파하면서부터였을까? 우리가 커피에 대한 사랑 및 열정 그리고 고객을 향한다는 사실을 언제부터 잊은 것일까? 관료주의와 분기별 동일매장 비교매출 증가에 연연하면서부터였을까? 그리고 왜 우리는 사업 운영에 있어 커피를 만들 때처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지 않는 것일까? 정답은 없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모두 스타벅스가 방황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사실이었다. …
스타벅스가 행동을 극적으로 변화시키는 일에 새로이 전면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증거로, 나는 일주일 전에 미국 내 7,100개 매장의 문을 일제히 닫고 에스프레소 엑설런스 트레이닝을 실시한 사실을 언급했다.“
각주구검(刻舟求劍)이라는 고사성어. 춘추전국시대에 초(楚)나라의 한 젊은이가 양자강을 건너기 위해 배를 탔다. 배가 강 한복판에 이르렀을 때,실수로 들고 있던 칼을 강물에 떨어뜨렸다. 난감해진 젊은이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단검으로 칼을 떨어뜨린 그 뱃전에다 표시했다. 이윽고 배가 나루터에 닿자 젊은이는 떨어뜨린 칼을 찾기 위해 조금 전 뱃전에 표시해 놓은 그 자리에서 강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칼이 그 밑에 있을 리 만무. 이미 칼을 떨어뜨린 곳으로부터 한참 떠내려왔는데, 엉뚱한 곳에서 칼을 찾는 것. 사명자도 마찬가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람비 박사의 일화 아프리카 정글(jungle)같은 곳에서, 다리가 없는 물살이 빠른 시내를 건넌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자칫 잘못하면 물살에 휩쓸려서, 깊은 폭포 밑으로 떨어지거나 물속에 있는 바위에 부딪혀 끔찍한 최후를 맞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내를 안전하게 건널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큰 돌을 마치 밸러스트(ballest :배의 전복을 막기 위해 배 밑바닥에 쌓는 석판, 돌, 쇠 따위)처럼, 어깨에 짊어지고 건너가는 방법이다. 그렇게 하면 돌의 무게가 사람의 발을 물밑에 든든히 서도록 힘을 주기 때문에, 빠른 물살에 휩쓸려 가지 않게 된다.에디오피아의 의료 선교사로 사역하던 람비(Lambi)박사는,아프리카를 두루 다니면서 여행하는 동안 그곳의 원주민들로부터 배워서 경험한 것을 우리 인생의 문제에 다음과 같이 적용시켰다.
우리는 인생이라는,거대한 물을 건너고 있다. 그런데 사단은 언제든지,우리 영혼을 파멸로 몰아넣기 위하여 끊임없이 기회를 엿본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밸러스트가 필요하다. 사명이 우리가 짊어져야 할 밸러스트다.
“신앙을 잃어버리면 배교를 하지만, 사명을 잊어버리면 타락한다.”
유머 - 버스를 타고 가다 사고가 났는데, 정말 재수 없이 죽은 사람이 있답니다.
1. 졸다가 내려야 할 곳을 놓치고 가다가 사고를 당한 사람.
2. 놓친 버스를 뛰어가 굳이 잡아서 타고 가다 사고를 당한 사람.
3. 69번 버스를 96번 버스로 착각하고 탔다가 사고를 당한 사람.
독일에서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 1337년 뮌헨에서 뒤츠 슈벤블라라는 이름의 사나이가 반란죄로 잡혔습니다.그리고 네명의 부하와 함께 사형을 선고 받고 참수형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슈벤블라는 자기의 부하들을 위해서 이렇게 애원을 했습니다. "제 목이 절단되는 순간에 제가 떨어진 머리를 들고 부하들이 있는 앞에까지 달려가 볼 테니 제발 저 불쌍한 부하들을 살려 주십시오." 재판관은 그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 하며 코웃음을 쳤지만 그의 애원이 하도 간절했던지라 짐짓 그렇게 약속했습니다. 이윽고 사형 집행관의 칼이 슈벤블라의 목을 쳐내린 순간, 그는 두 손으로 자기의 머리를 쳐들고 부하들이 떨고 있는 앞까지 있는 힘을 다해 달려갔습니다.결국 그의 부하 네명은 죽지 않고 살게 되었습니다. 뒤츠 슈벤블라의 행동은 훗날 ‘사명의 경주’라고 일컬어 지게 되었습니다.때로 사명을 따라가는 삶은 상식을 뛰어넘어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결과를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총알 3발 맞고도 자녀를 구한 초인적인 모성애 2015년 5월 6일 YTN 김원배 특파원
미국의 한 공원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했는데 한 어머니가 총알 3발을 맞고도 어린 자녀들을 구해내는 초인적인 모성애를 발휘했다.지난 3일 밤 에린 스토펠 가족이 미국 위스콘신 주의 한 공원의 다리 위를 평화롭게 걷고 있을 때 끔찍한 일이 발생했다. 약혼자로부터 결혼을 못 하겠다는 말을 들고 격분한 20대가 총을 난사한 것. 에린의 남편과 11살 된 큰 딸이 숨졌고 에린도 복부와 오른쪽 넓적다리 등 세 군데에 총을 맞았다.
이 위급한 순간에 에린은 필사적으로 아들과 딸을 다리 바깥으로 밀어내며 다른 사람의 도움을 요청하라고 외쳤다. “총알을 여러 발 맞았지만 자신과 두 아이들은 다리에서 내려올 수 있었고 어린 아들을 도움을 청하러 보냈습니다.”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재빠른 행동으로 자녀들을 구해낸 에린의 초인적인 모성애에 찬사가 쏟아졌다. 출동한 응급 차량에 실려 병원으로 옮겨진 에린은 다행히 수술을 받고 의식을 되찾았다. 인터넷에서는 에린의 가족을 돕기 위한 모금 운동이 펼쳐져 큰 호응을 얻었다. 세 군데나 총상을 입고도 어린 자녀들을 구해낸 한 어머니의 진한 모성애가 미국인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레너드 스윗 교수 <미래 크리스천>이라는 책에서 미래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 교회가 되도록 준비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한 예화.
어떤 사람이 시골 상점에 들어서다가 문에 붙어 있는 표시를 보았다. 위험! 개조심! 상점 안에는 전혀 무서워 보지 않는 늙은 사냥개 개가 깊🕔 잠들어 있었다. “조심해야 하는 개가 저건가요?” 라고 물었다. “물론입니다.” 상점 주인이 대답했다. “글쎄요, 내가 보기엔 전혀 위험해 보이지 않는데요. 저 경고문은 왜 붙었나요?” 라고 물었다. 그러자 상점 주인은 대답했다. “저 경고문을 붙히지 않으면, 사람들🕔 자꾸 개에 걸려 넘어지거든요.”
C. S. 루이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는 고참 악마 스크루테이프가 신참 악마 웜우드에게 보낸 31통의 편지로 이루어진 이 책은, 1942년에 책으로 나왔지만 여전히 신선하다. 악마가 인간 영혼을 타락시키고 하나님과 멀어지게 만드는 각종 지혜와 통찰을 적은 책.
스크루테이프는 인간이 ‘양서류’라는 점을 부단히 강조한다. 영으로만 된 악마와 달리 몸과 영으로 이루어진 존재라는 사실에는 수많은 결과가 따라온다. 악마와 달리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볼 수 없는 것도, 몸의 자세와 상태가 영혼에 그대로 영향을 미치는 것도 그 결과 중 하나다. 인간이 늘 변화하고 자신이 먹은 음식, 소화 상태에도 지극히 큰 영향을 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하면 거짓 영성에 빠지게 된다. 이웃의 구체적인 아픔과 어려움을 외면하는 대신 자신을 위한 ‘영적인 기도’에 집중하게 하라는 교훈은 얼마나 섬뜩한가?(3번 편지)
신앙의 플라시보(위약) 효과 – 성주진 교수(합동신학대학원 교수)
가짜 약도 환자가 믿고 복용하면 효과를 보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보통 ‘플라시보(위약) 효과’라고 불리는 이 현상을 긍정적으로 해석하자면, 약의 의학적 성분이나 객관적으로 입증된 효능 외에 환자의 심리적인 상태가 질병의 치료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부정적인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이 의학개념이 기독교 신앙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이 믿는 내용이 성경이 계시하는 진리가 아닐지라도 진지하게 믿기만 하면 나름대로 ‘효과’를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믿음의 역사는 우리가 믿는 진리의 내용보다는 우리가 믿는 믿음의 크기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닐까요? 만일 그렇다면 기독교 신앙에도 일종의 플라시보 효과가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종교의 주관성을 강조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어떤 사람의 믿는 바가 진리가 아니라 할지라도 진정으로 믿기만 하면 ‘효험’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크기입니다. 어떤 대상을 믿든 그 대상을 지성으로 섬기기만 하면 된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돌이나 나무 앞에서 복을 빌더라도 전심으로 믿기만 하면 효과를 본다는 주장을 펴기도 합니다. 가히 무속신앙의 수준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오해할 수 있는 일화가 야곱의 이야기 가운데 두 번 나타납니다. 한 번은 합환채의 경우입니다. 야곱의 아내 레아가 아들을 잉태하게 된 것을 합환채의 효험 때문이라고, 혹은 합환채 자체는 효험이 없을지라도 레아가 그 효험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야곱이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선풍나무를 사용하여 자기가 원하는 무늬의 새끼를 낳게 된 것도 유감주술적인 효과 또는 이에 대한 야곱의 믿음 때문이라고 잘못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두 사람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것이지 그들의 잘못 때문에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믿음과 신념의 차이입니다. 신념은 자기 주관을 자기 방식으로 밀고 나가는 것인 반면, 믿음은 계시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이 아무리 진지하다고 하더라도 그 믿는 대상이 잘못되었으면 그것은 잘못된 신념일 뿐입니다. 신앙의 대상이 잘못되었다면 그 믿음은 진지한 만큼 잘못된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인식의 주관성과 한계를 겸손하게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얼마 전 영국 스코틀란드에 위치한 네스호에는 네시가 없다는 것이 거듭 확인되었습니다. 그동안 이 호수에 산다는 괴물에 대한 목격담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관광홍보차원에서 지어낸 것들도 있었지만, 경건한 사람들의 목격담도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는 인간이 아무리 진실하다 하더라도 믿고자 하는 것을 믿으며, 보고자 하는 것을 보려는 경향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거나 성경을 읽을 때에도 내가 믿고자 하는 것을믿으며 내가 보고자 하는 것을 보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성경이 계시하신 것을 볼 수 있도록 겸손히 성령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예레미야 시대에 활약했던 거짓선지자들도 나름대로 확신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전하는 평안의 메시지가 실제로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이 거짓 영에 미혹되었다고 밝힘으로써 그들 나름대로의 신념이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의 진실성을 보장하지 못함을 보여줍니다. 그들의 주관적인 진지함은 마침내 스스로를 망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이 회개할 기회를 빼앗았습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버리고 가짜 진리를 믿는 것은 멸망의 지름길입니다.
대기오염에 후각 상실, 2m 앞 꽃도 못 찾는 나방 곽윤섭 기자 한겨레 2024.2.12
어떤 식물은 야간에만 꽃이 피고 나방과 같은 야행성 수분 매개자에게 의존하여 번성한다. 8일(현지시각) 국제학술지 사이언스에 발표된 새로운 연구는 밤에 훨씬 더 널리 퍼져 있는 대기 오염 물질(질산염 라디칼은 태양광에 의해 급속히 광분해된다)이 나방 같은 생물들이 꽃향기를 추적하는 능력을 크게 감소시킨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논문의 수석연구자이자 워싱턴대 생물학 교수인 제프 리펠은 “24만종의 식물 중 4분의 3이 수분 매개자 생물에 의존한다. (곤충 같은) 수분 매개자는 생태학에서 큰 역할을 하며 식물의 건강 유지에 매우 중요하다. 여기에 영향을 미치면 생태계 전체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수분 매개자는 인류의 식량 시스템과 식량 안보에도 매우 중요하다. 곤충을 잘못 건드리면 결국 인류가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며 “인류의 활동으로 대기가 오염되어 수분 매개자들이 냄새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라고 말했다.
직접적이지 않은 감각적 공해는 놀랍도록 다양한 방식으로 동물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 이동하는 새들을 건물 창문과 충돌하게 만드는 도시의 불빛이나 오징어의 귀를 먹게 하는 시끄러운 뱃소리 등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동물의 후각 환경을 바꾸는 방식도 동물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것이다. 연구진은 전 세계 많은 지역에서 자동차 배기가스나 화석 연료 사용의 부산물인 오존과 질산염 라디칼 오염이 수분 매개자가 숙주 식물을 감지하는 능력을 방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대부분의 북반구에서 이러한 오염 물질은 곤충이 꽃을 찾을 수 있는 거리를 산업화 이전에는 5km 이상에서 현재는 400m 미만으로 75% 이상 감소시킬 수 있음을 밝혀냈다.
연구진은 풍동 실험에서 가짜 꽃향기, 진짜 꽃향기, 질산염 라디칼과 오존이 섞인 앵초 향수를 도시 환경에서 예상할 수 있는 농도와 비슷한 농도로 노출하여 매나방이 다양한 향기원을 얼마나 잘 찾아내는지 테스트했다. 오염되지 않은 자연환경에서는 하룻밤에 80km를 날 수 있으며 수 km 떨어진 곳의 꽃까지 찾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질산염 라디칼이 존재할 경우 흰줄스핑크스나방은 불과 2m 떨어진 앵초 꽃을 전혀 찾지 못했고, 담배뿔나방은 목적지에 도착할 확률이 절반으로 떨어졌다.
마가복음 3장 13-14절의 문장구조를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주된 목적은 복음전파이고,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는 복음전파를 위해 보조적으로 주신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복음전파를 보다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권세와 능력을 베풀어주신다는 것.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또한 그 일을 하실 수 없는 권세와 능력도 주신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일은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하나님 자신이 행하신다. 인간은 단지 도구(道具)로서 그 일에 참여할 뿐이다. 따라서 인간인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 양 생각하는 것은 대단한 착각이다. 단지 하나님이 힘과 지혜와 능력을 주실 때에만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어떤 일을 위해 부르실 때 우리는 겸손히 응하여야 한다. 인간적인 판단으로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우선시하여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것을 거절하는 것은 대단한 교만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자신이 무엇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교만인 것.
현재 자신의 행복을 가장 중시하고 소비하는 태도를 뜻하고, ‘인생은 한 번 뿐이다’ 외치는 욜로(YOLO)이든, “현재를 즐기라”는 카르페 디엠이든 ‘오늘을 어떻게 살아가는가’, 그리고 ‘하루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하는 가치관이 하루를 결정하고 삶을 결정짓는다.
장영희 씨가 쓴 <문학의 숲을 거닐다>에 나오는 이야기. 어떤 사람이 새 자전거를 닦고 있는데 한 아이가 다가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구경을 했다.아이는 자전거 주인에게 슬며시 물었다. ‘아저씨,이 자전거 비싸요?’그러자 자전거 주인이 대답했다. ‘몰라, 이 자전거는 우리 형님이 주신 거야.’
그 말이 끝나자마자 아이는 부럽다는 듯‘나도…’라고 말을 꺼내는 것이었다. 자전거 주인은 당연히 아이가‘나도 그런 형이 있어서 이런 자전거를 받았으면 좋겠다.’라고 말할 줄 알았다.그런데 아이의 말은 뜻밖이었다. ‘나도 그런 형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내 동생은 심장병이 있는데,조금만 움직여도 숨을 헐떡여요. 나도 내 동생에게 이런 멋진 자전거를 주고 싶은데요.’
<소명>이라는 수작을 썼던 오스 기니스가 <오늘을 사는 이유>라는 책을 냈다.
저자는 ‘카르페 디엠’이란 라틴어 구호를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말한다. ‘현재를 잡아라’로 주로 번역되는 이 표현을 저자는 ‘오늘을 살라’는 보다 적극적인 표현으로 설명한다. 요컨대 오늘을 붙잡는 것, 인생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 삶의 의미를 깨닫는 것은 분리할 수 없다. 우리가 시간을 제대로 다루려면 시간의 창조자와 시간의 의미를 알아야 하고, 그 창조자가 그의 장대한 이야기 속에서 우리에게 준 역할을 알아야 한다. 그 이야기를 통해서만 시간과 역사 전체의 심오한 뜻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37-38쪽).
1. 순환적 시간(43-46쪽) 순환적 시간 관점에 따르면, 인생은 비록 짧지만 우리가 여기에 단 한 번 사는 게 아니다. 시간과 역사는 순환하는 것이므로 우리는 연속적인 환생을 경험하고, 모든 것은 시작한 장소로 돌아오며, 우리가 자유를 얻으려면 역사라는 난제와 실재라는 환상 모두에서 벗어나 유동적이고 변화하는 이 세상 너머 불변하는 영역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 관점의 매력은 우리 주변의 자연세계에서 유사한 현상을 볼 수 있다는 데 있다. 행성들은 하늘에서 공전하고 사계절은 오고 간다. 봄은 여름으로, 여름은 가을로, 가을은 겨울로 이어지고, 겨울은 다시 봄으로 바뀐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 인간도 자연의 과정에 종속되어 있으므로 이 순환 그림에 들어맞는 듯 보인다. 이렇게 보면 시간은 끝없이 움직이는 바퀴다. 인생은 이 바퀴에 매인 삶이며, 욕망은 갈망을 낳고 갈망은 집착을 낳고 집착은 죽음을 낳고 죽음은 환생을 낳는 식으로 이어진다. 그러면 윤리는 카르마(karma), 곧 우리 각자가 이전 생애에서 행한 일의 문제가 된다.
오늘날 순환적 관점은 주로 동양 종교들(대표적으로 불교, 힌두교)과 관련이 있다. 순환적 관점은 역사상 많은 시기에 거의 보편적 관점이었고, 이를 계승하거나 기울게 했던 관점들이 무너진다면 원래의 것이 강화된 모습으로 다시 출현할 가능성이 많다. 예컨대, 니체가 하나님을 배격하고 "영원한 회귀"로 선회한 것을 보라.
2. 언약적 시간(47-53, 72-73쪽) 히브리 성경과 기독교 성경에 따르면, 동양 종교들과 바빌론 및 이집트의 주변 문화들과는 아주 다르게 시간과 역사는 순환적일 뿐 아니라 직선적이고 언약적인 것으로 인식된다. 이 진리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주권적 자유가 있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들 역시 자유롭다는 사실이 놓여 있다. 그들이 지닌 자유는 땅 위의 생명체들 가운데 고귀하고 유일무이하며 측량할 수 없는 것이다. 창조된 자유라는 이 근본 개념에서 많은 함의가 흘러나오지만 그 핵심은 인생의 의미를 완전히 바꾸는 엄청난 진리와 중대한 메시지다. 즉, 시간과 역사에는 의미가 있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중요성이라는 한 쌍의 진리 아래, 시간과 역사는 어디론가 가고 있고, 우리 각자는 본질적으로 유일무이하고 중요한 존재일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삶과 세대, 나아가 전체 역사 안에서 담당할 독특하고 중요한 역할이 있다.
다시 말하지만, 서로 대조하면 무척 명료해진다. 시간과 역사는 힌두교와 불교가 생각하듯 하나의 환상이거나 ‘마야’가 아니다. 또한 무의미하거나, 셰익스피어의 맥베스가 말하는 것처럼 “소음과 격노로 가득 찼으나 아무런 의미도 없는, 바보가 들려준 이야기”도 아니다. 우리는 바람에 흩날리는 먼지가 아니다. 우리는 결국 무의미한 것으로 드러날 우주, 언젠가 무의미하게 사라질 우주 속에서 방향을 상실한 기이하고 우연적인 존재가 아니다.
시간, 역사, 인간의 자유에 대한 근본적으로 다른 성경의 관점은 하나님에 대한 완전히 다른 이해와 그것이 만들어 내는 근본적인 차이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성경에서 만나는 하나님은 다른 모든 신 개념과 완전히 다르다. 하나님이 성경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것을 보면, 그분은 기본적인 두 가지 면에서 전적으로 유일무이하시다. 한편으로, 하나님은 초월적이고 철저히 타자(Other)이시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세계를 위해 그 세계와 직접 열정적으로 교류하시고, 특히 자기의 형상과 모양대로 닮게 만드신 인간 피조물에 헌신하시며 관심을 기울이신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만들어진 예외적이고 책임 있으며 중요한 존재다. 우리는 자유로워서 진정한 선택을 내릴 수 있다. 우리가 비록 하나님처럼 주권적인 존재는 아닐지라도 중요하고 책임 있는 존재임은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분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으시고 ‘생명의 숨’을 주셨기에, 우리는 다른 동물과는 다른 예외적 존재다. 우리에게는 자신을 인식할 수 있는 자의식과, 시간의 범위를 인식하며 뒤로 물러서서 먼 과거와 당장의 현재와 아득한 미래를 포함하여 특정한 관점에서 시간을 조망할 수 있는 의식이 모두 있다.
시간의 인식에 관한 한, 이 인간의 자유는 결정적으로 세 가지 능력에 의지한다. 이 능력들이 있기에 우리는 바로 우리 눈앞에 있는 세계와 당장의 현재를 넘어설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간과 역사의 방대한 범위에 관여할 수 있고, 다른 피조물보다 시간에 대해 상당히 큰 지배력을 발휘할 수 있다. 겨울잠 자는 동물들이나 이동하는 철새들에게서 볼 수 있듯이 동물에게는 시간이 내장되어 있는데, 우리 인간은 훨씬 포괄적으로 시간을 통제한다.
1) 첫째로, 우리의 시간 인식은 과거에 대한 기억을 포함하며, 이는 방대한 과거를 우리의 의식으로 불러와서 과거를 현재 살아 있는 요소로 만든다.
2) 둘째로, 우리의 시간 인식은 상상력과 비전을 포함하며, 이는 우리의 의식에 미래를 펼쳐서 미래를 현재 살아 있는 요소로 가져온다.
3) 셋째로, 우리의 시간 인식은 의지를 포함하며, 이는 인간의 자유를 표현하고 과거와 미래에 대한 의식이 우리의 현재 선택에 영향을 미치게 한다.
언약적 시간 속의 인생은 언제나 ‘하나님 아래’와 그분의 섭리 아래 있다. 믿음으로 사는 인생은 궁극적으로 그 효과와 성공을 보장받지만, 결과의 성공여부는 믿는 자의 소관 밖이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는 히브리 선지자의 확신은 번영하는 평화로운 시대가 아니라 난폭하고 혼란한 시대, 즉 외부 환경이 그런 확신을 정당화할 수 없을 때,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시대에 울려 퍼졌다.
3. 연대기적 시간(79-81쪽) 세 번째 시간관은 세속주의 신념이 견지하는 연대기적 시간이다. 직선적이고 언약적인 시간이되 하나님, 초월성, 영원성,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믿음을 잘라낸 채 세속화된 시간이다. 연대기적 시간의 옹호자들은 영원 없는 시간을 조망한다.
헬라어 크로노스(chronos)는 시간을 의인화하여 표현한 단어다. 이는 시간을 선이나 악에 대한 잠재력과 의미로 충만한 의미심장한 순간으로 보는 카이로스(kairos)와는 대조적으로, 시간을 직선적 순간들의 연속으로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크로노스는 내재적 의미가 없는 직선적 순간들의 연속으로 끝없고 변함없이 단조롭게 똑딱똑딱 흘러가는 시간이다. 의미심장한 순간을 가리키는 카이로스와는 무척 다르다. 성경에 나오는 언약적 시간은 카이로스 순간들로 가득 차 있다. 하나님 아래서는 역사의 드라마가 가장 높고 가장 깊은 의미를 덧입기 때문이다.
언약적 시간과 연대기적 시간 사이의 중요한 차이점은 의미의 원천이 다르다는 데 기인한다. 언약적 시간관에서 나오는 의미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보고 그렇게 될 것을 아시는 것인 데 비해, 연대기적 시간에 속한 의미는 인간들이 보고 세우려 애쓰는 것이다.
카르페 디엠, 곧 “오늘을 붙잡아라” 또는 “시간을 구속하는 것”에 대한 성경적 개념은 대다수 사람이 그 이상을 해석하는 방향과는 확연히 다르다. 대부분은 이를 이기적이고 단기적이고 순전히 즉흥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카르페 디엠에 대한 견해들 중에 성경적 또는 언약적 시간관의 견해보다 더 확실한 토대, 더 강한 추진력, 더 높은 비전은 없다(128쪽).
한병철 교수의 책 <시간의 향기>에서 말하는 것처럼, 원자화된 시간을 사는 현대인들은 방향을 상실한 채로 살아간다. 또한 방향이 없기에 열심히 살아가지만 속도가 붙지 않는다. 방향이 없는 움직임은 속도로 나타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리저리 유리할 수밖에 없는, 단지 오늘을 위한 욜로와 카르페 디엠은 어떠한 속도도 갖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가속도 역시 갖지 못한다. 시간의 향기는 하루하루가 모여 의미가 부여될 때 퍼지는 것이다. 의미를 발견하게 될 때 자연스럽게 시간이 향기를 내뿜는다.
“오늘을 붙잡고 시간을 구속하고 인생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한 요건은 이 순간과 이 시간을 분별하는 일이다.”(134쪽)
유대교-기독교가 말하는 카르페 디엠, 곧 오늘을 붙잡는 것, 시간을 구속하는 것, 우리 인생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된다. 믿음의 사람들이 시대를 분별하고,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기분과 동역자로 섬기며, 세상이 애초의 창조 의도에 따라 회복되도록 돕는 것이다.
성경의 시간관에서 다른 많은 사항들도 도출할 수 있다. 우선, 인생은 선물이기에 시간은 항상 청지기직과 관련된다. 구약성경은 이를테면 시간에 대한 태도 면에서 선지자와 제사장의 역할을 명백히 구별한다. 선지자들이 대체로 현재 또는 “현재 속 미래, 시작에 이미 내포된 끝”에 관심을 갖는 반면 제사장들은 영원에 관심을 품고, 선지자들은 적실한 것과 자발적인 것에, 제사장들은 정규적인 것과 구조화된 것과 질서정연한 것에 관심이 있다. 오늘을 붙잡는 것은 그래서 그 핵심에 선지자적 성격이 있다. 예수님은 “일상”에 중요한 강조점을 두신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마 6:11), “한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마 6:34). 오늘을 붙잡는 것은 그러므로 이날의 직접성, 이 시간의 필요성, 우리 이웃의 필요성에 대한 책임감으로부터 나온다(140-141쪽).
옛 중국 속담 “물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물고기에게는 절대로 묻지 마라”
성경에서는 “끝”을 때때로 결말, 마침표, 종결, 최후라는 의미의 라틴어 finish로 보지만, 또한 목표, 목적, 최고점, 절정이라는 의미의 헬라어 telos로 보기도 한다. 결말로서의 “끝”과 절정으로서의 “끝” 둘 다 역사상 언제나 작동하고 있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그렇다(191쪽)
시간이 의미가 있는 이유는 죽음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죽음은 끝을 의미하고, 끝은 과정을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의 경험에서 알듯이, 죽음만이 진정한 끝이다. 인생 가운데 무언가의 끝은 다른 것의 시작점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과정 가운데 있는 끝(telos)와 인생이라는 끝(finis)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럴 때, 오늘을 끝(finis)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끝(finis)을 향한 끝(telos)의 카르페 디엠으로 오늘을 붙잡을 수 있다. 끝(telos)과 끝(finis) 사이에서 시간의 의미를 아는 카르페 디엠은 오늘날 적실하다.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 신 30:19
과거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TV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가 있다. 드라마 덕에 빵 소비가 늘었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였다. 이 드라마는 인간관계의 갈등과 포용, 미움과 사랑의 복합적인 관계를 그리고 있다. 무엇보다도 드라마의 인물을 통해 인간의 비열함과 순전함이 어떻게 교차되고 있는지를 흥미롭게 보여준다. 하지만 그 안에 담고 있는 중요한 메시지가 있는데, 그것은 빵을 만드는 데는 단지 기술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철학이 담겨 있어야 한다는 것.
이 드라마에서 나타나는 빵의 철학, 그것은 곧 삶의 철학이기도. 이 삶의 철학을 보여주기 위해 등장하는 인물이 팔봉선생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제자들을 경합시키면서 세 가지의 빵을 만들어 보라고 한다. 그 빵은 세상에서 가장 배부른 빵,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빵,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빵이었습니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는 금방 들어오지 않는다. 그런데 이 팔봉선생이 유언처럼 말하는 구절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배부른 빵은 남을 위하는 마음으로 만든 빵이고,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빵은 너 자신이 즐기는 마음으로 만든 빵이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빵은 네가 앞으로 살아가면서 만들어야 할 빵이라는 것.
팔봉선생과 동료였지만 치열한 경쟁관계에 있었던 김춘배라는 사람은 팔봉선생의 삶의 태도를 지켜보면서 이렇게 자조 섞인 말을 하였다. “팔봉형님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좀 더 몸에 이로운 빵을 만들려고 했다네. 난 그런 팔봉형님이 언제나 답답하고 못마땅했어. 결국 느리게 걸어온 팔봉형님은 모든 걸 이루었고, 빨리 성공하려고 달려온 나는 이리도 인생을 돌아오고 말았군 그래. 모든 욕심이 이리도 헛된 것임을...”
여러분을 이끌고 있는 삶의 철학은 무엇인가? 직장생활하면서, 공부하면서, 세상에 나아가 살면서 나를 나 되게 하는 삶의 철학이 무엇인가? 내가 거기에 시간과 정성과 열정을 쏟아 부어야 할 그 이유가 무엇인가? 빵을 만드는데도 빵에 대한 철학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몸에 이로울까, 어떻게 하면 그 맛과 향을 더할까를 고민하는데, 우리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떤 것이 나로 하여금 이 모든 일들을 하게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유명한 화가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이 화가에게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그림을 그릴 때 제일 어려웠던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화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무엇을 그리지 않을까 결정하는 것일세.” 화가의 눈에는 모든 것이 아름답게 들어옵니다. 모두 그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려야 할 것만 그리고 다른 것을 잘라 버려야 그 그림이 살아 움직이는 그림이 되는 것입니다.
선택에는 기본 원칙이 있다. 하나를 택하면 다른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 결혼도 마찬가지. 한 여자, 한 남자를 택했으면 수많은 다른 이성은 포기해야. 어떤 사람은 결혼하고 나서도 이 남자, 저 남자, 이 여자, 저 여자에게 두리번두리번 거리는 것을 자유라고 말한다. 그러나 진정한 자유는 포기할 때 생기는 것.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자유는 포기해야 할 것을 포기 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질 때 참 자유가 된다.” 우리 삶에 포기하지 못하고 선택해서 생기는 문제가 얼마나 많이 있는가?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멘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