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학자 김성훈박사

[해바라기]

농학자로, 친환경 유기농 운동의 대부로, 농림부 장관으로 평생 농민과 함께해온 김성훈 박사. 학자, 시민운동가, 관료로서 여러 자리를 두루 거친 김성훈 박사는 환경과 생명의 가치를 무시하고 개발만을 부르짖는 우리 사회를 걱정하며 농촌과 농업 살리기에 앞장서고 있다. 시민운동가로 살아온 김성훈 박사는 농업의 가치를 어떻게 생각할까? 행동하는 학자 김성훈 박사의 삶을 만나보자.

김성훈 박사 인터뷰 영상

1958~1962년 서울대 농대 재학 시절 ‘한얼’이라는 모임에서 활동을 했습니다. ‘큰 뜻의 한국인’이 되자는 모임이었는데, 사실은 1956년 목포고등학교에서 시작된 것이었어요. 방과 후에 늦게까지 남아 야간학교 지도를 자원했고, 아침엔 일찍 나와 공부하고 독서를 했죠. 모이면 주로 교양과 인격 수련 농업과 국가 민족의 장래를 토론했는데, 당시 모임에서 자주 암송하던 경구(警句)는 ‘사람이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이 사람다워야 사람이 사람이지.’ 였어요.

그 모임의 한 선배가 저에게 ‘농촌에 향기를 풍기는 사람’이 되라고 ‘농훈(農薰)’이라고 지어주셨습니다. 그때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호를 하나씩 갖고 있었거든요. 그때 지어준 걸 지금까지 불러주고 있어요.

세 살 되던 해, 어머니의 품에 안겨 찍은 가족 사진. 태어나자마자 만주로 건너가 일곱 살 때까지 그곳에서 살다가 해방 이후 귀국한 김성훈 박사는 38선을 넘어 가까스로 고향 땅에 정착할 수 있었다.

제 고향은 전라남도 무안군 이로면 산정리입니다. 지금은 행정구역상 목포에 속해 있죠. 바닷가 갯벌을 두고 있는 농업지대예요. 저희 할아버지께서는 농지를 대단히 많이 가진 지주셨어요. 그런데 저희 아버지는 지주의 아들이시면서도 소작농들의 삶을 걱정하며 산 분이세요. 그래서 협동조합 운동을 하셨고, 해방 후엔 협동조합장까지 지낸 농부셨어요.

그런데 일제강점기였던 당시에는 그러한 행동이 독립사상을 고취시키고 공산주의 운동을 하는 것으로 간주되었어요. 결국 아버지께서는 소농 협동조합 운동을 하다 체포돼 광주형무소에서 미결수(未決囚)로 만 4년을 살게 되셨고, 후에는 만주로 떠나셨어요. 아버지께서는 만주로 먼저 떠나셨고, 그곳에서 가족이 오기를 계속 기다리셨다고 해요. 그래서 제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는 핏덩이나 다름없던 저를 안고 목포에서 서울, 평양, 신의주를 거쳐 만주로 향하셨어요. 제가 태어나기만을 기다리셨던 거죠.

어머니는 갓난아기였던 저를 강보에 싸고, 두 누나와 형을 이끌고 만주로 가셨어요. 태어나자마자 가서 일곱 살 때까지 살았으니, 말하자면 저는 만주에서 태어난 것이나 마찬가지인 거죠. 봉천(奉天) 서탑의 조선인 교회 유치원을 거쳐 소학교에 막 들어갔을 때 해방이 되었는데, 그때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우리 가족 모두를 데리고 귀국길에 오르셨어요. 그래서 우리는 압록강과38선을 가까스로 넘어 고향 땅에 돌아올 수 있었죠. 아직도 그때의 기억이 생생합니다. 제 밑으로 만주에서 태어난 동생(萬雄)이 있었는데, 38선을 넘어오는 동안 동생이 울기라도 하면 월경이 탄로날까 봐 동생을 껴안고 울면 입을 틀어막길 반복했어요. 그렇게 밤중에 노심초사하며 내려오지 못했으면 지금 조선족으로 살았을지도 모르지요.

천우신조로 아버지의 고향인 목포에 정착해 조부모님과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저는 선비 농부이신 아버지 밑에서 가축도 기르고 채소도 재배하면서 농업 농촌 농민의 미래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어요. 아마 자연스럽게 스며든 것 같아요.

6ㆍ25전쟁이 터지기 전인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는 연 300석을 수확할 정도의 소지주 집안으로 제법 잘 살았어요. 그때 저희 집에 축음기와 라디오, 풍금까지 있었으니까 당시로는 상당히 부자였던 셈이지요. 그러나 6ㆍ25를 겪으면서 급전직하로 가세가 기울었어요.

알고 보니 1950년 농지개혁 때 아버지께서는 3㏊ 이상의 전답을 법 규정대로 정부에 신고했고, 소작농들에게 농지를 모두 나눠주셨다고 해요. 그리고 그 대가로 유가증권을 받았는데, 6ㆍ25 전쟁 동안 인플레이션이 1,000배 이상 뛰는 바람에 증권은 휴지조각이 됐고 가세가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거죠. 아버지께서는 그래도 그동안 고생하던 소작인들이 정부로부터 당신의 땅을 좋은 조건으로 분배 받았으니 농민들을 도운 것이라며 불평 한 마디 않으셨어요. 그렇지만 저희 가족은 가진 게 없었지요.

6·25 전쟁이 끝난 후 끼니를 때우기도 힘들 정도로 김성훈 박사의 가계는 엉망이 되었다. 아침 저녁은 집 근처 양조장에서 버리는 술지게미(술을 내리고 남은 누룩과 곡물이 섞인 찌꺼기)를 퍼다가 사카린을 타 먹는 것으로 해결했다. 목포 산정초등학교 졸업 기념 사진으로, 이홍복 선생님 왼편에 서 있는 이가 김성훈 박사다.

전쟁이 끝나고 5학년으로 복학했는데 그때도 집안 형편은 여전히 어려웠어요. 어머니께서 주로 새끼를 꼬거나 남의 옷을 만들어 줘서 하루 끼니를 유지하다시피 했죠. 그때 처음으로 배고픔의 설움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쩌다가 보리쌀을 조금 넣고 끓인 시금치죽이 나오는 날에는 식구들이 굉장히 반가워했으니까요. 하지만 시금치죽을 한두 그릇 마시고 돌아서면 배가 폭 꺼져버렸죠. 신발도 검정 고무신이었는데, 어찌 그리 잘 닳고 구멍이 잘 나는지, 하는 수 없이 신발을 들고 맨발로 학교에 다닌 적이 많았어요. 옷은 물론 말할 것도 없이 참 남루한 차림이었지요.

게다가 저희 작은 아버지께서 일찍 세상을 떠나셔서 사촌 형제들이 갈 곳이 없으니 저희 집에 와서 함께 살게 되었어요. 저희 7남매에 사촌 4명까지 한동안은 아이들만 11명이 된 거에요. 고구마를 한 솥 삶아내도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워버렸고, 아버지께서 복숭아이라도 얻어 오시면 하나라도 더 먹으려고 덤벼들었지요. 정말 정신없이 먹었던 기억이 나요.

물론 그때 당시에 가난하다는 것은 보편적인 일이었습니다. 아주 특별한 집을 제외하고는 전부 가난한 생활을 했으니까요. 그때 어머니께서 저희에게 당부하시던 말씀이 있었어요. “얘들아, 더 먹고 싶을 때 그만두거라.”

어머니의 이 말씀이 지금껏 제 인생에 큰 교훈이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말씀은 먹는 것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더라고요. 더 갖고 싶은 욕심이 들 때 그만 두는 것. 그것이 최소한으로 저를 채찍질하고 자제하는 데 힘이 되었죠.

늙으면 더 욕심이 생긴다는 걸 의미하는 ‘노욕(老慾)’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욕심은 나이가 들어도 마찬가지예요. 먹는 것에 대한 욕심, 물질에 대한 욕심, 자리에 대한 욕심 모두 마찬가지죠.

그러니까 스스로 자제해야 해요. 그리고 자제하려면 항상 자기 삶의 중심 철학이 있어야 하죠. 저 같은 경우는 ‘더 먹고 싶을 때 그만 두거라’는 어머니의 말씀이 절제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습니다..

굉장한 개구쟁이였죠. 우리 형제에 사촌까지 함께 살게 되니 아이들만 11명인 집이었잖아요. 그렇게 아이들이 많으면 누가 와서 밥을 먹었는지, 누가 학교를 안 갔는지 모두에게 관심을 가질 수가 없어요. 게다가 어머니께서는 집안일 하랴, 논밭일을 하랴 정신이 없으셨어요. 관심을 받으려면 튀는 행동을 해야 했으니까요. 한마디로 '부잡'했죠.

저는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면 가방을 집에 던져놓고는 하루 종일 밖에서 놀았어요. 마을 당근밭에 가서 당근 서리를 하고, 언덕 너머 밀밭과 보리밭에 가서 손으로 밀과 보리를 비벼 먹기도 했지요. 갯벌에 가서 망둥어, 낙지, 게, 고동 등을 잡아서 먹기도 했고요. 어떻게 보면 어려서부터 자급자족하는 법을 익혔던 것 같아요.

고교 시절, ‘내적 충실과 선행’을 신조로 사회가 필요로 하는 참다운 사람이 되자는 생각으로 김성훈 박사와 친구 10명이 모여 ‘한얼’이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이는 곧 공부 잘하는 학생들의 모임으로 소문이 번져 친구들 사이에서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목포고 재학 당시 회원들과 함께 학교 뒷동산에 오른 김성훈 박사. 맨 뒷줄 왼쪽에서 5번째 안경 쓴 학생이 김성훈 박사다.

그렇지 않았어요. 선생님께서 한 번 가르쳐 주신 것은 절대 잊지 않았으니까요. 제가 중학에 진학할 때는 전국적으로 일제히 실시된 학력고사로 입학시험을 대신할 때였어요. 목포 산정초등학교 출신이었던 저는 500점 만점에 444점을 받았는데, 당시 전국 1등이 446점이었습니다. 제가 2등이었죠.

그 시절 가장 힘들었던 것은 가난이었어요. 중학교 3년 동안 참고서는커녕 교과서도 사지 못한 채 남의 책을 빌리거나 헌책으로 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공책도 제대로 사지 못해 벽지를 바르다 남은 종이를 묶어 깨알같이 필기를 하며 종이를 아껴 썼죠. 점심은 아예 걸렀습니다. 어쩌다 반 친구들이 너 왜 도시락을 안 가지고 왔냐고 물으면 ‘나는 아침과 저녁만 먹는 1일 2식 주의자’라고 대답하곤 했어요. 그러니 키가 자라지 못한 것은 당연하죠. 한창 나이에 굶기를 밥 먹듯 했으니까요. 중학교 3년 동안 키 순서대로 번호를 매겨 책상을 배정하는데, 저는 항상 반에서 5번 이상을 넘어보지 못했어요.

그런데 제가 교수 생활을 40년 넘게 하면서 터득한 진리는 ‘잘 노는 놈이 공부도 잘 한다’에요. 잘 놀지도 못하는 아이들은 공부도 제대로 못할 뿐 아니라 공부를 해도 죽은 공부가 돼요. 그래서 저는 제 후진들에게 항상 아이들을 자연 속에서 많이 뛰어놀게 하라고 강조합니다. 저는 대학교수 시절에도 학생들을 그렇게 가르쳤어요. 야외 수업도 자주 하고 학생들 데리고 생태 관광, 역사 탐방도 많이 다녔어요. 학생들을 성적으로 분류하고 점수로 판단하는 건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무한한 개성과 능력, 감성의 성장을 저하시킵니다. 에디슨 같은 사람이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아마 왕따가 되었겠죠. 아이들이 자연 속에서 놀도록 만드는 게 창조 교육이라고 생각해요. 그게 제가 실제로 경험해서 터득한 방법이기도 하고요.

고1 때였어요. 중간고사 독일어 답안지를 한참 써내려 가는데 교무주임 선생님께서 불쑥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오셨어요. 험상궂은 얼굴로 제 이름을 부르더니 의무금(등록금)을 석 달째 내지 않았으니 시험을 볼 자격이 없다며 제 시험지를 빼앗아 찢어버린 후 저를 밖으로 내쫓았어요. 저는 망연자실해서 교실 밖에 한참을 울며 서 있었습니다. 100점 맞을 수 있었는데 설움이 북받쳤어요.

그때 시험 감독을 맡으셨던 오종근 한문선생님께서 제 곁으로 다가오시더니 쪽지를 건네시며 학교 근처에 사시는 선생님 댁 사모님께 좀 전해주고 오라고 하시더라고요. 친구 오형철의 아버님이셨던 선생님의 말씀에 저는 눈물을 훔치며 곧장 선생님 댁으로 달려갔어요. 사모님께서는 쪽지를 읽어보시더니 누런 봉투에 돈을 담아 저에게 주시며 빨리 서무과에 가서 의무금을 내라고 하셨어요. 그때 저는 혼자 속으로 훗날 꼭 성공해서 이 은혜를 갚고, 나같이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돕겠노라고 다짐했습니다.

제가 대학교수가 되었을 때 선생님께서 암 투병 중이시라는 소식을 들었어요. 한걸음에 병원으로 달려가 문병하고, 얼마간의 돈을 약값에 보태시라고 드렸더니 선생님의 눈에 눈물이 맺히더라고요. 어려운 사람을 만나면 주저 말고 베푸는 인생을 살라고 행동으로 가르치신 오종근 선생님이 아마 제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주신 분이라 생각해요.

김성훈 박사는 중학교 3학년 시절, 농촌 청소년 계몽단체인 4-H 클럽을 조직해 활동했다. 이후 대학 시절까지4H 클럽에서 활발한 활동을 한 덕에 1964년 YFEP(젊은 농부 교환 계획)의 ‘풀뿌리 대사(Grass-root Ambassador, 草根大使)’로 뽑혀 타이완의 농촌에서 4개월간 실습하며 생활했다.

중학교 3학년 때였을 거예요. 가축도 기르고 채소도 재배하면서 농민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죠. 농민은 왜 이렇게 가난할까, 왜 이렇게 핍박을 받을까. 제가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아버지의 영향도 적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닭, 오리, 돼지 같은 가축들을 스스로 기르고 가축의 변을 퇴비와 섞어 발효시켜서 논밭에 주는 일이 제 일과였어요. 그런데 당시 뉴캐슬병이 돌아서 제가 기르던 닭과 오리들이 모두 죽어버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또, 돼지들은 폐사충에 감염돼서 죽어버렸어요. 우리 마을 농민들이 다 그렇게 당했어요. 이를 돕는 정부나 관련기관이 하나도 없었어요. 그리고 공출만 해 갔어요.

농민들이 겪는 일들을 겪으면서 그들을 구제해야겠다고 다짐하곤 했어요. 아버님의 권유로 중학교 3학년 때 미국에서 시작한 ‘4-H 클럽(지성(head)ㆍ덕성(heart)ㆍ근로(hand)ㆍ건강(health))이라는 농촌 청소년 조직 활동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는 4-H 회원들과 리트머스 시험지로 동네 토양을 검사해서 밭 생산력을 높이는 일에 앞장서기도 했어요. 당시 마을 농민들이 주로 밭농사를 지었는데, 해마다 생산력이 떨어지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제가 4-H 회원들을 불러 모아, 토지별로 번호를 매기고 산성도를 조사했죠. 그리고 동네 어른들을 일일이 찾아 다니며 석회석을 적절히 뿌려야 밭 작물의 생산력을 높일 수 있다고 말했어요. 결과는 대성공이었죠. 수확이 눈에 띄게 증가한 거예요.

사실 저는 원래 법대에 진학해서 농민을 변호하는 변호사가 되려는 꿈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 3학년 때, 교장의 부정한 학교 운영 비리에 반기를 든 학생들과 함께 시위를 하다가 무기정학을 당하고 말았죠. 그 기간에 생각이 바뀌었어요.

네, 말하자면 그런 셈이지요. 무기정학을 당했으니 학교를 나갈 수가 없게 되었어요. 그때가 11월 말 경이었는데 대학 입학 시험이 2월에 있었거든요. 법대에 입학 지원서를 낼 수 없겠다고 생각한 저는 무작정 무전여행을 떠났습니다. 무등산 뒤 광주 충장동 일대와 조선 시대 가사 문학의 발생지인 담양 일대 등을 쭉 돌아다녔는데, 그때 들판에서 일하고 있던 농민들을 많이 만났어요. 그분들께서는 배고파 보이는 학생이 지나가니까 밥 한 끼 먹고 가라며 저를 붙들곤 하셨죠. 그렇게 여행을 하며 농민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그들과 함께 세상을 바꿔 나가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어요.

아버지의 영향 때문인지 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내 생각과 행동은 언제나 응달진 곳의 사람들에게 달려가야 하고 그들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이 본능처럼 박혀 있었습니다. 여유가 있을 때 약자를 돕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할 때도 자기보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죠. 어른이 되어서도 산업화, 국제화, 개방화의 그늘 속에 신음하는 농업인들을 사람답게 살게 하는 연구가 농업경제학도로서 진리를 탐구하는 길이라고 굳게 믿게 되었어요. 사람을 놓친 경제 정책이라든지, 또는 농업 주체인 농업인이 그 대상에서 빠져버린 농업 정책은 그것이 아무리 효율성과 경쟁력을 키우는 대책이라 할지라도 반쪽짜리 정책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변호사가 되는 것만이 농민들을 위한 길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들과 함께 호흡하면서 농민들의 삶이 더 나아지도록 돕는 것도 농민을 위한 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셈이죠.

그날부터 농대에 들어가기 위한 공부를 밤새워 하기 시작했어요. 입시를 두 달 앞둔 때였는데, 우선 법대에 지원하기 위해 공부해 오던 ‘인문반’ 과목에서 농대 지원을 위한 ‘자연과학반’ 과목들로 새로 공부했습니다. 학기도 끝난 상태라 독학밖에는 방법이 없었죠. 내용도 모른 채 달달 외우기를 두 달, 짧은 기간이었지만 결국 서울대 농대 3등, 농업경제학과 수석으로 입학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서울대 농대 재학시절 김성훈 박사는 방학 때마다 농촌 봉사를 자원하였다. 김 박사는 농민들과의 만남을 통해 그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서울대 농대 재학 시절 전라남도 진도군으로 농촌 봉사 활동을 갔을 당시의 사진으로, 왼쪽에 지게를 짊어지고 안경을 쓴 청년이 김성훈 박사다.

제가 서울대에 다닐 때 당시 학과장이셨던 분이 우리나라 경제학계의 태두(泰斗)이신 김준보(金俊輔) 교수님이셨어요. 참으로 훌륭한 농업경제학자이셨지요. 그런데 그분께서 전남대 총장으로 가시게 되어 저도 선생님을 따라 무작정 전남대 대학원으로 진학했습니다. 훌륭한 스승을 쫓아다닌 셈이죠.

기회가 닿는 한 열심히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이 분야에서 당시 최고로 치는 대학이 케네디가 만든 EWC(동서문화센터)였는데, 매월 400불에 해당하는 장학금을 주면서 자매학교인 하와이대학교에서 공부를 하게 했어요. 경쟁률이 500대 1에 달했죠. 1년 반 만에 석사 학위를 받고, 록펠러 장학금을 받아 바로 박사과정에 진학했습니다.

국내에서 공부할 때는 틈틈이 ‘한얼’과 ‘농사단’이라는 농민운동 단체에서 활동했고, 그 사람들과 농촌 봉사 활동도 종종 갔어요. 방학이 되면 전라남도 진도에 있는 용산마을에서 봉사했죠. 끊임없이 독서하고 토론하며 자기 수련도 거듭했습니다. 학창 시절의 생각과 활동들이 제 인생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해요.

1998년 3월, 김대중 대통령 정부의 첫 국무회의에서 제가 제안했어요. 저는 “세계 중진국 중에 농민들의 생산자 협동조합만 있고 소비자들의 생협이 없는 나라는 없다. 기존 상인 단체의 반대 로비 때문에 20년째 생협 법안이 경제기획 당국 서랍에 묵혀 있다”고 대통령 앞에서 작심하고 발언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법이 제정돼 1999년부터 시행되었어요. 그로 인해 생협들이 자리를 잡을 수 있게 됐고, 그해 11월11일에는 친환경 유기농 원년을 선포했지요. 친환경 유기농민들의 숨통을 튼 셈이죠.

유기농 식품은 우리의 건강과 생명을 지탱하는 원천이에요. 1900년대 초 미국의 한 고위 농업관료가 한국과 중국, 일본을 여행하며 쓴 수기를 최근 읽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당시의 한국, 중국, 일본의 유기농업을 극찬하는 내용이었죠. 땅을 살리고, 모든 자연 자원을 순환해서 다시 흙으로 돌려보내는 유기농업의 과정이야말로 서구 농업이 배워야 할 점이라고 기록했더군요.

유기농업의 비결은 땅, 바로 흙을 살리는 일부터 시작합니다. ‘유기농’ 하면 안전한 식품을 먼저 떠올리지만, 그 이상으로 중요한 가치는 흙을 살려서 환경과 생태계를 살려나간다는 것이에요. 선진국에서 유기농 하는 사람들을 만나봤는데, 그들은 모두 생명의 뿌리인 흙과 생태계를 살려 세상을 구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강했어요. 그 점이 인상적이었어요. 그런 가치의 성숙이 유기농 하는 사람의 기본 전제예요. 소비자들도 유기농을 믿고 그 가치에 감동하기 때문에 기꺼이 지갑을 여는 것이죠. 소비자들이 유기농가를 전적으로 믿을 수 있도록 정책환경을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소비자도, 농가도, 지구도 살리는 길이니까요.

농림부 장관 재임시절(1998.3.3.~2000.8.7.) 유치원생들과 함께 도시 근교 텃밭에 나가 “벌레 먹고 못생겨도 더 맛있고 안전해요”라고 제창하는 모습. 김 박사는 많은 보직을 거치면서도 농촌 현장에 대한 관심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것이 인간의 ‘먹을거리’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식량 문제가 생각보다 심각해요. 현재 우리나라의 식량 자급률은 23%도 안 돼요. 쌀을 제외하면 5%도 채 안 되는 수준입니다. 농산물 가격이 갑자기 오르면 국가 경제 전체가 무너질 수도 있어요.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돈이 있어도 식량을 못 구하는 시대가 올지 모릅니다.

어떤 면에서는 식량 자급률이 70%대에 달하는 북한보다도 못한 실정이에요. 그래서 저는 식량을 보완관계로 한 남북 교류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외국에서 들여오는 의무수입 쌀을 북한에 지원하고, 그 대신 북한에서 많이 나는 광산물과 밭 작물을 받아오는 것도 방법이죠. 연간 18조 원에 이르는 음식물 쓰레기를 국제 수준의 퇴비로 만들어서 북한에 지원해 생산성을 높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고요. 먹고 사는 문제로 접근하면 남북 관계가 훨씬 수월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먼저 인도주의적 지원으로 상호 신뢰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농촌에 살면 자녀 양육과 교육, 의료, 복지, 사회적 지위 등에 있어 차별 받고 있는 우리 농촌의 현실을 누구보다도 안타까워하며 그에 대한 개선책을 촉구하는 김성훈 박사. 그에게서 오랜 시간 농촌 현장을 지켜온 전문가의 진심이 느껴졌다.

땅이 투기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에요. 농민이든 외지 사람이든 땅을 투기의 대상으로 본다는 것이 우리 농촌을 망치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결과 농지가 사라지고 있어요. 1년에 여의도 면적의 150배 이상의 농지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만큼 식량 농업기지가 축소되고 있고, 농업이 설 자리가 없어진다는 것이죠. 이게 제일 안타까운 일입니다.

‘농촌이 잘 살아야 진짜 선진국’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렇게 따지면 우리나라는 후진국으로 가고 있어요. 미국뿐 아니라 유럽, 일본도 모두 선진국이에요. 농촌에서 산다고 교육, 의료, 복지 문제에 있어 차별 받거나 자녀 양육에 차별 받는 나라는 없잖아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농촌에 살면 모든 면에서 불리한 점이 굉장히 많아요. 실제로 사람이 살기에 불편한 점이 너무 많고요. 선진국의 경우는 오히려 반대예요. 교육, 의료, 교통, 복지 등 차별이 없습니다. 그게 선진국 농촌의 모습이에요.

우리나라에서는 농촌에서 농사를 짓는다고 하면 사회적으로 존경은커녕 멸시를 받기 십상이고, 선거 때가 되면 정치적으로 이용만 당하죠. 농산물 가격이 폭락하면 정부는 모른 척 하고, 가격이 오르면 소비자를 위하고 물가를 잡는다며 마구잡이로 무관세 수입하여 외국 농산물을 쏟아 붓습니다. 그러니까 젊은 사람들이 농촌을 견디다 못해 떠나는 거죠. 교육, 의료, 교통 등 생활 환경도 불편한데, 수입 농산물 때문에 그나마 우리 농업의 설 자리도 빼앗기니까요.

농업 문제야말로 환경 생태계의 문제이자 생명의 문제, 지역 공동체 문제, 국가와 국민의 안전ㆍ안보 문제라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단순히 농사를 가격과 이윤 비교의 대상, 화폐적 이익을 극대화하는 기업운영과 같은 방법으로 접근하면 농업은 당연히 별 볼일이 없어지죠. 그렇지만 식량과 농업의 자립이 없는 국가는 없습니다. 이 문제는 국가 전체가 나서서 환경 생태계의 보전과 문화 전통의 보존, 나아가 상부상조의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차원으로 접근해야 해요.

그리고 기후변화가 몰고 올 재앙에 대비해야 합니다. 많은 분들이 지금 쌀이 남는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나라의 쌀 자급률은 80%대로 현저히 떨어졌어요. 이대로 계속 가면 식량 파동은 물론 사회 혼란, 정치 파국으로 번져 나라의 기틀이 무너지게 될 겁니다. 이러한 부분을 간과하지 말고 식량 주권적 차원에서 접근해서 해결해야 하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선(善)한 행위는 선한 대로, 악(惡)한 행위는 악한 대로 그 사람에게 되돌아 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옛말에 “선행(善行)도 악행(惡行)도 3대까지 미친다”고 했지만, 요즘은 인터넷 세상이 돼서 그런지 모든 것이 빨라져 하늘도 당대에 반응을 보이는 것 같아요. 생전에 상을 주고 당대에 벌을 내리는 현상이 잦아지고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사람들이 ‘인생은 베푼 만큼 거둔다’고 말하는 것 같아요.

저 역시 날로 황폐화 되어가는 우리나라의 농업, 농촌, 농민의 삶과 환경 생태계를 지켜보면서, 이것을 평생의 화두로 삼고 살아온 제 인생이 혹시 헛된 것은 아니었나 회의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지난날 제가 살아온 길을 하나하나 점검해 보죠. 정말이지 75년이라는 긴 세월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더군요. 그때마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다시 “희망 찾기”를 노래하고 싶어져요. 어느 시인의 말마따나, 지금 알고 있는 것을 예전에 미리 알았더라면 어제보다 못한 오늘이 아니었을 것이고, 닥쳐올 날들을 미리 읽을 수만 있다면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노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인생이 더 행복해지고, 그렇지 못했다고 더 불행해지는 것은 반드시 아니겠지만, 그런 생각을 하게 돼요. 그러다 보면 인생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데 생의 묘미가 있고, 살아가는 신비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우리나라 친환경 유기농 운동의 대부로 청년들의 귀농 운동에도 적극적인 김성훈 박사. 농업에 국가와 국민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그는 더 많은 젊은이들이 농촌에 뛰어들었을 때 더 나은 농촌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농촌이 젊은이들을 끌어안을 수 있을 만큼 매력적인 환경과 시스템을 갖추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요즘 한 가지 희망적인 것은 귀농하는 젊은이들이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에요. 농촌으로 돌아가 환경 생태계를 살리는 유기농업을 하는 것이죠.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면서 보람을 만들고 있는 거예요. 농촌만 살리는 게 아니라 연 평균 1억 원 이상의 소득을 벌어들이니 젊은 사람들에게도 좋은 일이죠.

저는 이러한 움직임이 더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때의 붐으로 멈출 게 아니라, 환경을 사랑하고 생태를 사랑하는 젊은이들이라면 서슴지 말고 농촌에 뛰어들어가 살라고 말하고 싶어요. 농업의 의미가 무엇인지 잘 생각하고 농촌을 위하는 길에 앞장서는 사람들의 앞길에는 반드시 신의 축복이 있을 거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1984년 UN 세계식량기구(FAO) 아시아-태평양 경제 책임자 시절 중국을 통해 백두산에 처음 오른 김성훈 박사. 백두산의 조상신들과 함께 천지의 비경에 흠뻑 젖어 한시 한 수가 절로 튀어나왔다. 천문봉에 올라 그는 “천년(千年)의 구름이 백두산의 숨겨진 뜻을 휘어 감싸니, 만고의 눈들이 천지의 심장으로 녹아 흘러드는구나”라는 자작시를 남겼다.

이제는 제가 뭔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뭔가 이루어지도록 희망하고 봉사하고 싶습니다. 제 희망을 이야기하자면, 첫째로 환경 생태계가 살아났으면 좋겠고, 둘째로는 공동체 정신이 다시 살아났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셋째로 기후변화에 대비하고 싶어요. 우선 나무를 많이 심는 것부터 실천할 생각이에요.

그리고 평화를 지키고 싶어요. 평화라는 말은 음식을 서로 나누어 먹고 공평하게 잘 살자는 걸 의미해요. 한쪽에서는 남아도는 음식 때문에 18조 원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음식물 쓰레기를 만들어내고, 다른 한쪽에서는 어린 아이들이 영양실조로 죽어가고 있는 상황에서는 평화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평화는 나눔과 배려, 함께 더불어 사는 삶이에요. 인생에 있어 자기 혼자, 자기 가족만 잘 먹고 잘 살면 그게 무슨 웰빙이 되겠습니까? 더불어 잘 먹고 잘 사는 균형된 사회를 만드는 것. 그게 제가 바라는 삶이에요.

성실하고 정의롭게 살았다고 기억되고 싶어요. 자기보다 남을 더 생각하고, 개인보다 전체 사회와 인류를 걱정한 사람. 그리고 조금이나마 그것을 고쳐보려고 노력했던 사람으로 기억해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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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대 진학을 꿈꾸던 고교 시절

목포고등학교 3학년 학생회 간부 시절의 김성훈 박사. 성적이 우수해 법대 진학을 생각하였던 김 박사는 그러나 학내 시위를 주도했다가 대학 진학 시기를 코앞에 두고 징계를 받았다. 그 당시 무작정 떠난 무전여행에서 많은 농민들을 만났고, 그들을 돕는 길은 결국 농민과 함께 하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농과대학에 진학하기로 진로를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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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이 소개

김성훈

1939년 전라남도 목포에서 출생했다. 태어나자마자 만주로 건너가 해방 이후 고향으로 돌아왔고, 곧이어 한국전쟁을 겪으며 가세가 기울었으나 어려운 집안 형편 속에서도 근면하고 성실한 아버지 어머니 밑에서 학업을 계속했다. 특히 목포에서 농사를 지으며 협동조합장까지 지낸 아버지는 그에게 많은 정신적 자산을 남겨주셨는데, 고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를 본받아 농민과 평생을 함께하겠다는 각오로 서울대 농대에 진학했다. 서울대학교 농업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전남대학교 대학원, 미국 EWC 하와이대학교 대학원에서 석ㆍ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98년 제50대 농림부장관을 역임했고, 상지대학교 총장, 경실련 공동대표, 환경정의 이사장을 역임하며 어린 시절 꿈대로 시민운동가는 물론 친환경 유기농업 시민운동의 대부가 되었다. ‘농업이 없는 나라, 농촌이 없는 도시, 농민이 없는 국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신념 아래 지금도 우리 농업과 환경 생태계를 지켜야 한다는 일관된 소신을 갖고 농촌 살리기 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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