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2장 처음부터 예수님과 그 공동체는 중풍병자의 절망적인 모습을 보고 그를 회복시켜 고쳐 주었다는 야기입니다. 예수님은 귀신들린 사람 ,열병, 각색 병든 사람, 문둥이 ,중풍병자 이 다섯 가지 사건이 예수 의 처음 이야기에 나오고 있습니다. 예수와 예수공동체는 이러한 사람들에게 관심과 배려를 아끼지 않으 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병들고 소외당할때 인생이 가장 외롭고 슬프고 고독한 것을 느끼게 되는 때이며 음에 대한 공포에 사로 잡히게 됩니다. 건강해서 마음껏 다닐 수 있다면 하는 소망에 사로 잡혀 있고, 마 이 가장 가난해진 대이며 불치의 병은 절망을 가져오는데, 예수님은 이러한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겨주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은 지금 로마의 식민지와 헤롯의 폭정 밑에서 시달리고, 그나마 자신의 몸마저 질병사단에 얽매여 살아야하는 슬픈 인생들,이들 다섯 종류의 모습이 때가 찼다고 외치는 선지자들이 진단한 이스라엘과 비 했고 자기백성들의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지금 21세기 한국민족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이러한 상태인 세상에 예수님이 오시면 새로운 희망이 솟고 인간성을 되찼고 하나님 앞에 사람들 앞에 다시 서게 됩니다 예수가 오시면 소외된 계층이 극복되고 하나님 앞에 용서 받은 죄인이 되어 건강하게 살게 됩니다. 예수 은 수시로 제자를 불러 새로운 전위대를 창설하셨습니다. 특히 레위인 마태가 예수공동체 일원이 될때의 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는 당시 사람들이 부러워하면서도 욕하는 세관에서 일하는 세리였습니다. 마 는 이미 예수의 명성이 온 갈릴리 지방에 퍼졌고(1:28)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찾고 따르고 있었음을 알고 었습니다(1:37). 왜냐하면 예수님은 가시는 곳마다 가르치시고 교훈하시고 권세로 귀신을 좇아내 주시고 색 병든 자들을 고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능력이 있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서 다시는 동네에 드 나게 들어가시지 못할 정도가 되어 바깥 한적한 곳에 계실때도 많아졌으나 사람들이 어떻게 알고 사방에서 그에게 나왔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소개하는 사람이 있으니 바로 당시 가장 경건공동체의 수장인 세례 한 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는 예수와 공동체의 삶은 점잖을 떠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과 같지 않고 소외된 계 과 더불어 생활하시고 그분은 시원스럽게 닥쳐올 세상에 대하여 민중들의 희망찬 미래를 “때가 찼고 하 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말씀함을 들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공동체의 행 과 삶에 대 하여 심각한 갈등에 사로잡힌 집단은 세상 권력자와 그릇된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회만 있으면 예수와 그 공동체를 죽이고 없애려는 모의를 했고, 예수는 위험스러운 존재이며 가 한 민중들의 선동가라고 몰아 붙였습니다. 예수와 예수공동체의 삶의 모습이나 함께하는 사람들을 보면 들은 민중공동체와 일체이며 민중예수로서 민중의 행복과 번영을 위해서 민중의 풍요로운 삶을 위한 삶 체였으며, 민중들을 하나님나라의 주인이며 백성으로 모시는 일을 했던 것입니다. 특히 바리새인들과 서기 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자신들에게 칭찬과 상급으로 가득하리라 생각하며 자신들이 제일 큰 자라고 생각했고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서기관이 없이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겠는가? 하고 대단한 자부심과 지를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이 이스라엘의 역사와 전통을 갖고 있으며 민족의 선생이요 어린아이의 훈도요 소경의 인도자라고 스스로 믿고 있었기 때문에입니다. 그들이 생각하기를 만약 예수가 진정한 메씨야라면 자신들의 인정을 받고 와서 일해야지 자기들을 죄인취급하는 사람이나 세리와 죄인들과 더불어 생활하며 먹고 마시는 이런 부류의 예수나 공동체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실 당시 기 권자들은 종교적 교리에 쌓여 하나님의 옳바른 뜻과 의의를 잊어 버렸고, 우수한 역사와 전통만을 고집하 서 자신의 기득권에 쌓인 굳어버린 관념으로는 이해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당시 메시야라고 말하는 예 공동체의 제자들 가운데 쓸만한 사람이 몇인가? 모두가 어부요 세리요 우뢰의 아들이요 열심당원이요 보통 사람들 그 자체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박사도 권력가도,부자도 ,종교가도, 제사장도, 학자도 없었습니다. 다만 예수님이 택하신 제자들은 한결 같이 세상에 대한 썩어질 밀알처럼 제자들은 소외계층의 사람들이었 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외치시기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셨으며, 당시 기득권세력들이 세리와 죄인이라고 소외시킨 그룹 속에서 회개하는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부 면서 그들과 더불어 사셨던 것입니다. 예수는 출생부터가 사생아 비슷해서 비난을 받을 정도로 동정녀로 터 잉태되었고, 아빠인 의인 요셉까지도 가만히 끊어 버리고 파혼하려고까지 했던, 소외 받고 슬픔 속에서 위로 받아야할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태어나시자 당시 왕이나 장군, 부자, 박사, 학자, 종교지도 들은 양심과 영적눈이 어우워져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왕의 정적으로서 헤롯의 날을 피해 도망가야만 했습니다. 예수와 그 가족은 애굽으로 도망치는 피난민이 되었었기 때문에 요셉의 활은 풍족치 못했습니다. 고향을 떠나 타국생활과 이민족의 빈곤은 눈으로 보듯 환합니다. 예수님과 그 가 공동체 일행은 대헤롯과 그 당, 그리고 종교지도자들의 감시를 피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삶속에서 예수님의 몸과 인격 속에는 가난과 가난한 사람들이 정다운 친구로 젖어 있었고 가난한 사람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 니다. 그래서 마태는 시험하는자가 경제적인 빵과 적당한 종교적인 지위와 권세를 갖고 약속하면서 예수를 유혹했다고 했습니다. 예수와 그 예수공동체는 당시의 부자,세리, 종교의 지도자들, 권세가들의 죄악을 낱 이 알고 고발하시는데 주저치 않으셨습니다. 예수공동체에 소속한 제자들 역시 스승의 뜻을 따라 안식일에 밀을 끊어 먹기도하고 안식일에 병든자도 돌봐주는 등 자유롭게 생활했습니다. 아마 그 당시 많은 사람들과 제자들 사이에 논쟁의 초점중 하나가 경건의 표시인 금식문제 였습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 들이 찾아와 "우리는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니이까?"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 중 누구나 인정하는 경건한 사람들의 전통이었으며 종교적인 경건성의 상식이요 많은 사람에게 공감대를 러 일으키는 반론이기도 했습니다. 금식은 전통이나 습관이 아니며 이것을 하고 안하고를 따라서 인간을 가해서는 안되는데 당시 경건의 표준이 된듯합니다. 물론 세례요한의 제자공동체와 바리새인공동체들에게 있어서 금식생활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금식의 중요성을 부인하지 으시면서 행할 것들을 말하셨습니다. “금식할 때가 있다.”“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너희가 금식할 것이라고”하셨다. 지금은 금식할 때가 아니고 다음에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그때는 금식하여야 한 는 것입니다. 주님은 민족전통에 얽매여 스스로 경건한 채하려는 형식적인 금식전통의 문화변혁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삶의 방식과 당시 사회문화변혁갖가지로 민중들의 생업을 방해하며 자신들의 득권을 유지하려는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일침이기도 합니다. 즉 당시 의식주에 시달리는 민중들은 가난하여 배고픈 삶을 살 뿐아니라, 각종 종교적인 예식으로 얽매려는 것을 싫어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시 지배계층과 권력계층은 위험스러운 존재로 인식하였던 것입니다. 어느 곳에서나 한 나라의 문화와 삶 란 정치적이기 때문에 법적인 통제를 필요로 하며 그 가운데 질서가 있고 민족 공동체가 건재해 가는것입 다. 그런데 이 문화와 삶을 새로게 변혁시키려는 예수님의 변혁운동은 당시 종교와 율법의 지도자이며 재 관들이나 정치적인 힘을 갖은 무리들이 볼때는 제일 무서운 선동가였던 것입니다. 그들이 생각하기는 사 의 경제질서와 소비문화, 생산문화, 유지문화등이 일률적으로 이루어져야 혼란이 없는 것이라고 믿었던 것 니다. 특히 문화,전통의 새로운 수용은 수많은 변화를 초래하고 혼란을 갖어 오는 것인데 예수님의 말씀은 당시 민중들이 해방되기는 좋지만 구체적인 조직과 구조가 갖추어지지 않았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특히 종교적인 삶을 기반으로 생활하는 이스라엘 민중들의 변화는 상층부의 삶이 위치를 흔드는 대 지진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지배계층이 생각하기는 예수와 그 추종 공동체의 방자한 태도와 삶이 안식일을 어기는 것으로 드러 자 그들은 즉시 예수죽일 음모에 착수합니다. 이 안식일에 대한 예수공동체의 태도와 삶의 방식은 엄청난 폭풍을 몰고올 전조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전통과 울법에 의해서 안식일은 하나님이 축복하신 날입 다. 예수께서 안식일을 어쩌다 어긴것이 문제가 아니라 안식일의 규례를 근본적으로 바꾸신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당시의 안식일은 율법대로 엿새동안 힘써 일하고 이래째 되는 날은 어떤 이유를 불문하고 쉬면서 예배와 양으로 보내야 하는 민족의 규례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됨의 표시이기도 합니다. 이법을 어기면 돌로 맞아 죽은 역사를 갖고있는 민족이 바로 이들입니다. 이날에 대한 성결성은 4번째 계명으로 못박아 논것을 보 도 알수있습니다. 수많은 서기관, 바리새인, 율법사, 사두개인들이 있어서 그 안식일을 지켜온 민족입니다. 그런데 이 안식일을 뜯어 고치시려는 대대적인 수술을 감행하신 것입니다.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거 하게 모시며 참되고 신령한 예배를 드리고 땅의 모든 사업을 쉬며, 성회로 함께 모여야 하는 날입니다. 이 안식일로 권세를 누리는 수많은 제사장과 종교지도자 그리고 정치지도자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율 에는 길가에 이삭을 잘라 먹는 것을 허락했으나(신23:25)유전집 미쉬나에는 안식일에 대한 39종의 규례를 정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안식일에 이삭을 자르는 것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수천년을 지켜온 안식일은이 라엘 백성의 거룩한 성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의 거룩한 삶은 안식일을 중심으로 하며 이 날에 십일조와 박하와 근채와 십일조를 바치는 것입니다.(마23:23)제사장 무리들과 성전 일을 맡은 사람들, 그리고 서기관, 바리새인,제사장 무리들과 성전 일을 맡은 사람들, 그리고 서기관, 바리새인, 사두개인, 특히 헤롯은 이 소득에 의해서 많은 이득을 보게 됩니다. 그 밑에서 봉급을 받는 헤롯당 역시 그 법을 지킴으 써 돌아올 이득이 많습니다. 뿐만 아니라 막대한 기금이 적립되는 성전에서 돈바꾸며 장사하는 무리들의 요한 소득의 원천이 안식일입니다. 그리고 안식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중심일로서 만약 누군가가 식을 을 범하거나 변경한다면 무서운 화와 죽음을 먼치 못할 것임을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특히 경건한 삶으로 자신의 명예나 이득의 기득권을 누리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가장 위협적인 도전이 아닐 수 없습 다. 그러나 안식일의 39종의 미쉬나에 의해서 경건보다 먼적 생사를 가름하거나 빵이 없어 굶주리는 사람 에게는 무서운 날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절대적인 보안법 같은 법률은 당시에 안식일이 사람을 해서 있는 하루가 아니고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굴레의 날이 되버린 것입니다.(2:27)이것을 끝까지 고집하는 집단이 바리새인, 서기관, 헤롯권세 였음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즉 이들은 안식일의 기생충으로서 사람으로 하여금 안식일의 노예가 되도록 얽어매 놓았던 사람들입니다.이 사건은(마12:1-8,막2:23-28, 6:1-53) 공관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데, 마태와 누가는 밀이삭을 먹었다고 기록했습니다. 마가는 밀이삭을 자르며 길을 내고 있었음을 알림니다.이러한 일은 당시의 법에 의하면 분명히 불법이며 실정법을 위반한 건으로 규정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래서 말씀대로 지킨다고 자부하는 바리새인이 이 사건을 보고 예수님을 고발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에서 가장 소중한 다윗왕의 예를 들어 일축해 버리시고 안식일은 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율법의 근본정신, 바른 해석을 하셨 니다. 안식일의 근본적인 원칙을 들어 설명해 주시고 따라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고 선 하시며 인본의 중요성을 확인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행위의 정당성을 많은 민중들에게 확인시키 며 죄가 아니라고 말해주시는 삶을 사신 사셨던 것입니다. 이 안식일 사건은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었습 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로 당시의 기득권자들은 받아 들인 것입니다. 이것은 성일 모독이며 법질서를 송두리째 뒤 흔든 사건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12:1-8을 보면 제자들의 그러한 행동은 윗이 행한 일과 같으며 제사장이 안식일에 안식을 범하는 것과 같으며 그래서 죄가 안되는 것이기에 무 라고 주장하신 것이다. 쪼한 마12:6,7에 예수님이 성전보다 더 큰 이이며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 다는 하나님의 심정을 전달하는 기회로 삼고 있습니다. 이 말씀으로 그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많은 민 들에게 말씀한 것입니다. 예수와 예수공동체의 모든 행동과 말씀은 당시 사회구성체인 민중들을 중심으로 삼고하신 말씀이며 그들의 해방된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러한 정확한 안식일의 칙이 전파된다면 이것은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심각한 사회질서 문란과 기존의 기득권세력들의 과 위치를 흔드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전례와 전통과 율법에 대한 도전이며 사회지도층에 대한 노골적인 반항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즉 사회를 파괴하는 이단으로 규정할 만한 사건입니다. 당시의 사회법 요 하나님의 법으로 해석한 미쉬나를 깡그리 뒤엎은 위험 천만한 해석이며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나님의 말씀과 경건으로 기득권의 근저를 이루는 사람에게 있어서 심각한 위협이며 당시 이스라엘 사회를 근분적으로 뒤 흔드는 발언으로 평가되었고 즉시 어떤 대처 방안이 마련되어야 했습니다. 우선 확실한 증거 확보를 위하여 안식일 하루를 택하고 다음에 고쳐도 무난한 손마른 사람을 고치는가 엿보는것이 었습니 .(막3:2) 이들은 예수를 송사할 빙거를 만들려는 함정을 팠던 것입니다. 만약 이것을 바로 정리하지 않는 면 자신들이 유지하는 사회전반에 무서운 변화가 올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께 물었던 것은 “안 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했으나, 예수님은 손마른 사람을 보고 먼저 종교적인 규칙이나 전통, 례에 앞서 그 인간성,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에 관심을 갖고 불쌍함이 더 중요한 일이라고 느끼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