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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 다산유적지와 양평 소나기마을 답사기
사진/ 글 김경식
1) 다산 정약용 선생의 고향을 찾아서
팔당댐에서 양수리 방향으로 강변을 달리다 보면 오른편에 마을이 보인다. '능내리'이다. 아름다운 강마을 주변은 큰 도로가 나고 자동차들이 분망하게 드나든다. 정약용 묘소 안내판이 보이는 삼거리에서 약 1㎞ 내리막길을 따라 내려가면 능내리이다. 옛 지명은 마재(馬峴)이다.
이곳은 다산 정약용의 고향마을이며 생가와 묘소가 자리잡고 있다. 다산이 태어날 당시 이곳의 행정구역은 광주군 초부방 마현리였다. 현재는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산75의 1번지로 변경되었다.
이곳에서 강을 거슬러 올라갈수록 강마을들은 이국적인 풍경을 만들어 내고 있다.
펜션과 카페, 음식점들은 저마다 폼을 잡고 강변에 자리잡고 있다.
북한강과 운길산이 어우러진 모습을 보니 금방이라도 수종사의 종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수종사에 자주 오르지 않았던가. 운길산역에서 운길산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숲에 가려진
수종사가 보인다.
다산정약용 선생 생가 여유당 전경
다산 정약용 선생은 강진에서 18년 유배생활 마치고 돌아와 마재의 자택에서 노년을 보내고 있을 때 불현듯 수종사를 가고 싶어 했다. 그러나 수종사를 오르는 일은 쉽지 않았으리라. 결국 붓을 들어 한편의 시를 쓴다. 제목이 ‘수종사에 오르고 싶건마는’이다. 다산이 세상을 떠나기 5년 전인 1831년에 수종사를 그리워하며 썼던 시를 읽어본다.
운길산의 수종사는 옛날에는 내 집 정원 같았네.
마음먹으면 걸어서 절 문에 닿았었네.
이제는 홀연히 대나무럼 뻗어 올라 있어
푸른 하늘 높이 옥처럼 솟아 가기가 어렵구나
--다산 정약용 시 ‘수종사에 오르고 싶건마는’ 김경식 번역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곳을 '두물머리'라고 한다. 일명 '양수리'이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양수리(두물머리) 아랫마을이 정약용 선생이 태어난 '마재'다.
양수리는 번화한 동네가 되었다.시내버스 정류장도 있고 강마을의 다른 곳과 다르게 상가의 간판들이 현란하다.
이 동네의 아름다운 경치를 삭감시키는 것은 강렬한 삼원색의 커다란 간판들이다.
먹고살기 위한 강한 몸부림으로 이해하다가도 너무 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곳에서 다산유적지 까지는 약3km이다.
이곳도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는 강물이 넘실거리며 여유당을 중심으로 기념과 실학박물관으로 인해 분위기는 유적지답다. 다산의 생가인 여유당은 한옥의 품위를 유지하며 다산이 살았던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다. 다산은 이곳에서 태어나 바로 뒷산에 묻혔다. 다산 묘소는 합장묘다. 풍산 홍씨와 함께 조용히 누워 있다.
작은 비석과 큰 비석이 앞 뒤로 서 있다. 작은 것이 먼제 세워졌다. 묘비에는 세로 글씨로 <숙부인 풍산홍씨, 문도공다산정약용 지묘>라고 쓰여 있다. 합장묘란 뜻이다.
정약용 선생이 18년간 강진으로 유배를 떠나 볼 수 없었던 기간 그들은 서로를 얼마나 그리워 했겠는가.
이 묘소에서는 애틋한 부부지간의 사랑과 정을 느끼게 한다.
다산은 정약용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1762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태어났다.
4세부터 천자문을 시작하면서 10세부터 본격적인 공부가 시작된다. 주로 경전(經典)과 사서(史書) ,고문(古文)을 집중탐구한다. 특히 문학공부를 잘 했다. 한시를 잘 짓는다는 칭찬을 받는다.
그가 7세 때 지은 “산” 이라는 시에는 그의 천재적인 시심을 알 수 있다.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렸으니 멀고 가까움이 다르기 때문이네 (소산폐대산 원근지부동小山蔽大山 遠近地不同)”
15세 무렵에는 성호 이익의 저술을 탐구하기 시작한다. 이 무렵부터 넓고 깊은 학문의 세계로 진입한다.
다산은 23세 때 진사시험에 합격한다. 진사시험에 합격으로 그는 성균관에 입학한다.
이 무렵부터 여러 차례의 시험을 통해 뛰어난 재능과 학문으로 정조(正祖)의 총애를 받았다.
1784년 4월 큰 형수의 제사를 마치고 한양으로 가던 두미협의 배 위에서 그의 일생을 바꾸는 한 사람을 만나다. 광암 이벽(1754~1786)이다. 다산은 이벽에게서 처음 천주교 소식을 듣는다.
정약용 선생의 영정이 있는 문도사는 1910년 7월에 정이품 정헌대부 규장각제학을 추증(追贈)한 이후에 세워졌다.추증(追贈)은 죽은 후에 나라에서 내리는 벼슬을 뜻한다. 조선은 사화가 많았기 때문에 억울한 죽음이 많았다.
당대에는 능지처참으로 죽었지만 죽은 후에 무죄가 되어 대체로 살아있을 때 보다 높은 벼슬을 내려준다.
후손들은 이때 묘소의 비석을 바꾸고 사당을 지어 선양한다.
정약용 선생에게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이다. 조선 조정은 다산에게 죽는 날까지 정치적인 해금을 주지 않았다.
나라가 망하기 불과 한 달전에 그에게 문도공이란 시호가 내려진 것이다. 다산이 박학다식하니 文이요, 마음이 뜻을 다스린 분이라 (心能制意) 度라 하여 문도공(文度公 이라는 시호를 얻었다. 억울한 유배생활 20여 년은 다산에게는 불행이었지만, 우리 민족에게는 오히려 엄청남 문화유산을 얻었다. 그러나 이는 슬픈 역설이 될 것이다.
여유당 현판
여유당(與猶堂)은 1800년 봄 다산이 고향으로 돌아와 집에 붙인 당호이다. 당호는 집이름을 뜻한다.
그러나 이 집은 1925년(을축년) 대홍수 때에 유실된다. 흔히 을축년 대홍수라고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60년이 지난 1986년에 복원되어 오늘에 이른다. 이 집은 다산이 벼슬생활과 유배기간을 제외하고 살았던 집이니
다산의 유적지로는 최적이다. 비록 건축물이 당시의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뒷산은 그대로 있지 않은가. 다만 팔당댐이 조성된 이후 여유당 앞은 호수가 넘실거리는 곳이 되었다.
다산의 조상들은 언제부터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았는가. 다산의 5대조 정시윤(1646-1713)때 부터다. 병조참의를 지냈던 정시윤은 자신의 서자를 포함하여 4명의 아들과 함께 이곳으로 이주하여 여생을 보냈다.
1800년 다산은 세상인심이 야박하게 변하는 것을 목격한다. 한양을 떠날 것을 결심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여유당에
머문다. 직접 여유당(與猶堂)이란 집 이름인 당호의 현판을 붙였다.
여유당이라는 집이름에는 당시 다산 정약용 선생의 불길한 심정이 그대로 담겨있다. 결코 여유가 있는 분위기의 집이 아니었다. 여(與)는 의심이 많은 동물명이다. 유(猶)는 겁이 많은 동물을 뜻한다. 결국 정약용은 스스로 세상과 사람들을 두려워 하고 조심하며, 살겠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그러나 이 집에서 조심스런 삶도 채 1년이 되지 않아 그의 집안은 풍비박산이 난다. 세째형 정약종은 사형을 당하고 둘째 약전과 자신은 겨우 죽음을 면하고 유배길에 올라야 했기 때문이다.
여유당이 사람들에게 회자 되기 시작한 것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 꼭 100주년이 되던 1936년 정인보, 안재홍 선생에 의해 '여유당전서'가 간행되어 널리알려진다. '여유당전서'는 154권 76책의 방대한 분량의 책이다.
유배생활 18년을 끝내고 돌아온 다산 정약용은 여유당에서 그냥 머물러 있지 않았다. 강진에서 마무리 못한 저술작업을 계속했다.
다산은 나주정씨(羅州丁氏)이다. 나주 정씨는 처음 본관은 '압해'였다. 압해는 전남 신안군의 섬이다. 그들은 영조 때 나주로 본관을 바꾼다. 나주정씨의 시조는 고려 검교대장군 정윤종(丁允宗)이다. 6세 공일(公逸)까지 압해도에 거주한다. 그러나 7세 원보(元甫)가 황해도 덕수로 이주한다. 덕수는 개성 근방이다.
다산은 1822년 회갑을 맞는다. 이때 그는 스스로 자신의 묘지명(자찬묘지명)을 지었다.
8대를 연이어 문과에 급제한 다산의 선조들은 대부분 옥당(玉堂)에 든다.
옥당은 궁중의 서적과 문서를 관리하며 임금의 자문에 응하던 홍문관의 다른 이름이다. 주로 당대에 문학성이 높은 선비들이 임명되었다.
'국조문과방목'이란 책은 조선의 역대 문과급제자들의 명부이다. 이 명부에도 옥당에 임명된 급제자들의 이름은 별도로 기재할 정도였다. 옥당(홍문관)에 근무하는 것은 가문의 영광이었다. 이런 다산의 조상들의 옥당 벼슬은 자신의 5대조 부터 단절된다. 병조참의를 역임했던 다산의 5대조 정시윤(1646-1713)이 만년에 마현(馬峴)으로 이주한 이후 과거 급제자는 나오지 않았다. 다산의 고조 , 증조 , 조부는 아예 벼슬길에 오르지 못했다.
당시 남인들이 벼슬을 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정약용 조상들은 남인 이었다. 정조(正祖)의 즉위로 겨우 남인계에 벼슬길이 열린다. 아버지 때에 와서야 음사로 진주목사까지 역임했다. 음사는 과거시험을 거치지 않고 선조의 공훈이나 특별한 배려로 임명되던 제도다.
다산의 약 7년간 벼슬살이는 대체적으로 순탄했다. 암행어사로 전국을 답사하면서 백성들의 처참한 모습도 목격한다.
그의 한시들은 대체적으로 이무렵 정서를 담고 있다. 1800년 정조가 죽자 그는 곧 유배를 떠나야 했다.
다산은 1801년 경상도 장기유배지에서 다시 강진땅으로 유배되어 강진 땅의 이곳 저곳으로 옮겼다. 강진의 한 주막집에서 4년간 유페되어 귀양을 살았는데, 이 집을 사의재(四宜齋)라고 하였다.이곳에서의 유배는 험난했다. 다행히 혜장선사를 만나 고성산에 있는 보은산방으로 옮겨 마음의 안정을 찾으며 학문에 전념할 수 있었다. 결국 만덕리 귤동의 다산초당으로 이주 후 본격적인 학문탐구가 이루어 진다.
다산 정약용 묘소
귀양살이 18년을 강진땅에서 보내게 된 다산은 이 기간동안 600여권에 달하는 저서를 완성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세계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진기록이다. 다산이 200년 전에 이 고장에서 유배생활 한 인연이 지금은 강진에 복을 주고 있는 것이다. 다산 유배의 원인을 알기 위해서는 약간이나마 조선후기 당쟁사를 이해해야 한다.
당시 조선의 파벌은 시파(時派)와 벽파(僻派)로 양분되었다. 시파는 정조의 부친 사도세자를 옹호한 파다. 반대로 벽파는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측이다. 전에 노론·소론·남인·북인 하는 자들도 막판에는 두 패로 갈라져 시파, 벽파 둘 중의 하나로 양분되었다. 영조는 만년에 아들인 사도세자를 죽인 것을 후회하였다.
그는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대를 이으면 피바다가 될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자주 손자인 정조를 불러 이를 달랬다. 이런 연유로 정조(1752∼1800) 때에는 벽파도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시파가 득세하는 것은 당연했다. 시파는 진보적이며 서학(西學:天主敎)도 받아들이자는 편이었고 벽파는 이를 반대했다.
당시 정조는 형식적으로는 중립을 견지했지만 내심 서학에 관대했다. 그러나 정조는 안타깝게도 1800년 49세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둘째아들 순조가 11세의 어린 나이로 왕이 되었다. 어린 왕을 대신해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가 대왕대비로 섭정을 하게 된다. 당시 벽파의 두령인 정순왕후의 친오빠 김귀주는 당연히 노론계통의 벽파천하를 만든다. 순조1년(1801) 1월 11일, 사학금령을 발령하고 서학인 천주교도 일제 검거가 시작한다.
서학의 탄압이라기보다 벽파집권을 위한 시파에 대한 보복이었다. 그해 2월 16일 이승훈, 최필공, 홍교만, 홍낙민, 최창현은 사형을 당하고 이가환,권철신은 옥사한다. 이승훈은 정약용의 매형이었다.정치적인 피의 보복은 살벌했다. 사도세자의 혈족과 그에 동정한 사람들까지 죽이거나 귀양을 보냈다. 사도세자의 서자 은언군과 부인 송씨, 며느리 신씨도 죽였다. 천주교를 믿고 학습했던 정약용 선생의 동기간들도 이때 풍비박산 된다.
다산 정약용 선생 사당< 문도사>
세째형인 정약종은 죽음을 당했고 둘째 약전과 함께 넷째였던 정약용은 투옥된 후 각기 유배지를 달리하며 이곳까지 흘러든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그의 유배는 민족으로서는 축복이다. 귀양살이가가 오히려 우리민족을 위해서는 기막힌 보물을 선사한 것이다. 아마 정약용 선생의 삶이 순탄했다면 이렇게 많은 저술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귀양살이 18년을 강진땅에서 보내게 된 다산은 이 기간 동안 600여권에 달하는 저서를 완성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세계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진기록이다. 이 저술이 대부분 다산초당에서 이루어 졌으니 다산초당은 그야말로 다산학의 본거지다. 이러니 강진사람들은 비록 다산이 200년 전에 자신의 마을에 유배 와서 살았던 것을 오히려 영광으로 생각한다. 10년전부터 강진이 문화유산답사처로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은 '다산초당'이 있기 때문이다.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6.16-1836)은 남양주시 능내리에서 정재원(진주목사)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28세때 문과에 급제하고 정조의 각별한 애정을 받고 정치에 입문하여 요직을 거친다.
그러나 정조가 사망하자 남인이었던 그는 1801년 신유사옥으로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되었다. 이후 '황사영백서사건'로 강진으로 유배를 떠난다.
불운한 유배지인 열악한 삶의 현장에서 다산 정약용 선생을 구원한 분은 혜장선사다. 혜장선사를 만나 유교와 불교를 가지고 학문적인 만남이 이루어진다. 고성사 보은산방에 몇년 기거하다가 백련사가 가까운 귤동마을 위에 있는 다산초당으로 이주한다. 당시 귤동마을 주변은 야생 차나무가 많이 자생하고 있어 '다산'이라고 불러왔다. 이를 정약용 선생은 호로 삼았다.
실학박물관
다산유적지는 2009년 실학박물관이 건립되면서 그 규모가 매우 커졌다. 그가 태어난 생가와 기념관 묘소까지 함께 있으니 역사기행으로는 제격이다. 18년 강진 유배 장소인 다산초당이 그의 저술작업의 고향이라면 이곳은 그가 벼슬살이와 유배살이를 제외한 삶의 대부분을 보낸 장소다.
2) 소설가 황순원의 삶과 문학을 찾아서
--양평 소나기마을 답사기
양평은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쳐지는 지리적 여건을 가진 지역이다.
경기도 동쪽 끝에 위치하여 북한강과 남한강이 흘러간다.
서쪽으로는 북한강을 사이에 두고 남양주시에 접해 있으며, 남쪽으로는 남한강을 사이에
두고 여주군과 인접한다.
동쪽으로는 강원도 횡성군과 원주시와. 북쪽은 가평군, 강원도 홍천군과 접한다.
양평군의 중앙에는 용문산(1,157m)이 솟아 있다.
양평의 특징은 역시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양수리 두물머리가 위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동서로는 남한강이 남북으로 북한강이 두물머리에서 합류한다.
양평이란 지명은 양근군과 지평군의 두 지역이 합쳐진 이름이다.
양근군의 지명은 항양군(고구려), 빈양현(신라), 양근현(고려), 양근현(조선)으로 이어왔다.
지평군의 지명은 지현군(고구려), 지평군(신라). 이후에 줄곳 지평군이라 불려 오다가 1908년 양근군과 지평군을 합쳐 양평군이 되어 오늘까지 이어왔다.
우리의 옛 이름에는 저마다 고유의 향토적인 이름이 녹아 있다. 그러나 일제는 지명을 통폐합하면서 지명 이름에서 한자씩 따서 의미 없는 이름을 지었다.
오랜 세월동안 순수성을 담아 내려온 우리 민족의 고유한 지명들이 말살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무렵이다. 두 세 개 이상의 지명을 임의로 조작하여 합성어로 지명을 만들었다.
양평이란 지명이 그렇다.
북한강을 기슭을 따라 난 도로391번을 타고 가평 방향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문호리다.
이 동네에서 약4km산골짜기를 휘감아 들어가면 소나기 마을에 닿는다.
작은 개울의 다리를 건너 소나기마을 입구로 들어서면
자연석 화강암에 ‘소나기마을 ’이란 우람한 표지석이 반긴다.
주차장이 넓지만 텅 비어 있다.
주차장에서 소나기마을까지는 약 150m 거리다. 더 올라가면 소년 소녀가 소나기를 피했던 수숫단을 형상화한 원뿔 모양인 지붕의 황순원문학관이 오른쪽에서 앉아 있다.
황순원 선생 묘소
문학관에 들어서면 먼저 황순원 선생의 묘소에 참배하는 것이 예의이다.
황순원 선생의 묘소는 원래 충남 천안에 있었는데
2009년 6월13일 문학관 개관식에 맞추어 지금의 자리로 이장했다.
이날 95세인 부인 양정길 여사가 정정한 모습으로 참석하여 꽃을 바쳤다고 하던데
어찌된 영문인지 묘비에는 황순원, 양정길이 새겨져 있다. 양정길 여사가 세상을 떠나게 되면 부부의 합장을 위해 묘비에 두 분의 이름을 새긴 것이다.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기록되어 있다.
'20세기 격동기의 한국 문학에
순수와 절제의 극을 이룬 작가
황순원 선생(1915∼2000)
일생을 아름답게 내조한
부인 양정길 여사(1915∼)
여기 소나기마을에 함께 잠들다'
-- 황순원 선생 묘소의 비문
황순원 선생과 부인이 동갑이라는 것을 묘비명을 읽게 되면 알게 된다.
부인이 세상을 떠나지 않았는데 먼저 비문을 쓴 경우는 드문일이다.
비문의 글자 수는 황순원 선생과 양정길 여사가 거의 동등하다. 평등을 중시한 것이리라.
아마도 그의 아들 황동규 시인의 생각이었는지 모른다. 복받은 집안의 미담을 묘비명을 통해 알게 된다.
묘소를 서성거리다가 문학관으로 들어선다.
양평군과 경희대는 소설 <소나기>에 “어른들 말이, 내일 소녀네가 양평읍으로 이사 간다는 것이었다”는 구절을 근거로 소나기마을 조성사업을 시작했다. 2003년부터 소나기마을 조성을 추진하여 6년 만인 2009년 6월13일에 개관했다
소나기마을은 1만평이 넘는 넓이의 부지 위에 조성돼 있고 건축면적 700평 규모의 3층짜리 문학관도 건축되었다. 124억원을 들여 거대한 문학마을로 만들었다. 우리나라 문학관 부지중에 가장 그 규모가 크다.
황순원 선생 서재
문학관은 3개의 전시실로 되어 있다.
황순원 선생의 육필원고를 비롯해 평소에 쓰던 서재를 그대로 재현한 곳에 서면 그의 문학적인 분위기가 살아온다.
졸업앨범, 책장, 서류가방, 안경, 시계, 각종상패, 선생의 원고와 교정본 등 유품, 유물 90여 점에는 그의 소박하고 정갈했던 삶의 모습이 오롯하다.
제1전시실은 '작가와의 만남'이란 주제로 구성되었다.
황순원의 성장환경, 가족관계 등을 통해 문학성 있는 작품의 탄생 배경을 시대별로 표현하였다.
'황순원의 생애'와 집필공간, 활동한 문인들의 사진을 보면 문학기행의 의미가 살아온다.
제2전시실은 '작품속으로'란 테마공간의 장소다.
연대별로 대표작 소개와 그의 초창기 작품인 '시' 를 액자에 담아 전시적인 효과를 극대화 했다.
'목넘이 마을의 개', '독짓는 늙은이', '학' 등 대표 단편소설과 '카인의 후예', '움직이는 성', '일월' 등 장편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요 장면들을 영상으로 연출하고 있다. 특히 ‘디오라마’라는 영상화법으로 잘 되어 있다. ‘디오라마’ 란 작은 공간 안에 어떤 대상을 설치해 놓고 틈을 통해 볼 수 있게 한 입체전시를 말한다.
특히 ‘남폿불 영상실’은 소나기 애니메이션을 상영하고 있다. 나무 책상과 의자가 놓여 있는 옛교실 분위기는 인상적이다.
영화 상영중에 소나기를 만난 소년, 소녀가 수숫단 안으로 피하는 장면에서는 천장에서 물방울이 떨어진다.
소나기 내리는 장면에서 실제 비를 맞는 공감각적 체험을 하게 된다.
실내소나기는 몇 방울에 불과하지만 문학관의 배려와 관심은 감동적이다.
문학관 마당의 소나기광장에는 노즐을 통해 인공적으로 소나기를 만들어 뿌린다.
하루 3회 소나기가 내리면 소년, 소녀가 비를 피해 수숫단 속으로 몸을 피하는 장면을
연상할 수 있다.
소나기광장을 둘러싼 야산 능선을 따라 산책로가 조성돼 있다.
목넘이고개, 학의 숲(학), 해와 달의 숲(일월), 별빛 마당(별) 같은 테마로 조성된 산책로를
걸어보라.
걷거나 앉아서 그의 삶과 문학을 정리할 수 있다면, 그가 얼마나 훌륭한 작가였는지 알게 된다.
황순원은 1915년 평남 대동군 재경면 빙장리에서 태어났다.
부친 황찬영은 3.1운동 때 평양 숭덕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여
1년 6개월동안 감옥살이를 한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6세 때 평양으로 이사하여 8세에 숭덕소학교에 입학한다.
정주에 있던 오산중학교에 1929년도에 입학하였는데 당시 교장이 남강 이승훈 선생이다.
그는 먼 발치에서 이승훈 선생님을 보면서 "남자란 저렇게 늙을수록 아름다워질 수 있는 것이로구나" 하고 느꼈다고 한다. 오산중학교에서는 한 학기를 마쳤을 뿐인데 당시 이승훈 교장을 멋있던 사람으로 평생을 기억하며 살았다. 그는 다시 평양의 숭실중학교로 전학한다.
그가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숭실중학교 2학년 때였다.
1931년 7월 동광지에 ‘나의 꿈’ 게재되어 등단작이 되었다.
중학교 시절 계속해서 시를 쓴다.
1934년 숭실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동경에 있는 와세다 제2고등원에 입학한다.
이 무렵 이해랑, 김동원 등과 함께 극예술 연구단체를 창립한다. 이때 첫 시집 방가(放歌)를
간행한다.
동경에서 시집을 발간한 것이 조선총독부의 사전 검열을 피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여 평양경찰서에서 29일간 구류를 살아야 했다.
황순원 선생의 묘소
1935년 양정길과 결혼한다. 양정길은 평양 숭의여고 문예반장 출신으로
일본 나고야 금성여자전문 재학중이었다.
1936년 와세다 제2고등학원을 졸업한 황순원은 와세다 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한다.
이해 5월에 두 번째 시집 골동품(骨董品)을 출간한다.
첫 시집 방가(放歌)는 청소년기의 낭만적 열정이 넘실거리는 작품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시집 ‘골동품’은 사물을 예리한 통찰력으로 직시하고 관찰한 결과로 얻어진
짧은 시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소설을 쓰지 않고 시를 썼다면 시인으로서도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본다.
이후 황순원은 자신의 시적인 이력들을 점차로 소설로 옮겨간다.
그 첫 작품은 1937년 7월 창작(創作) 제3집에 발표한 ‘거리의 부사(副詞)’이다.
원고지 30장 정도의 짧은 단편소설로 내용은 동경에서 가난으로 부초처럼 살아가는 조선인 유학생의 궁핍한 일상을 세밀하게 묘사한다.
그의 단편들은 장시처럼 난해하고 때로 섬뜩한 현실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문학평론가 김현은 황순원의 단편을 두고 "황순원이 단편까지를 시의 연장으로 본 것이 아닐까"라는 평을 하기도 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을 읽어보면 확연하다.
오후에는 종내 비가 온다. 빗줄기가 누워 내린다.
유리창 너머로 우산이 빗줄처럼 누워 떠다닌다.
비안개가 지붕보다 높다.
-- 황순원의 소설 ‘거리의 부사(副詞)’ 중에서
검은 바다에서 밀려오는 물결의 흰 혀끝이 모래톱을 핥는다.
꽥꽥 갈매기가 모래톱으로 밀리는 물결을 거슬러 난다.
앉아만 있는 섬은 어둠 속에 아주 멀리 물러나 앉는다.
-- 황순원의 소설 ‘소라’ 중에서
이런 표현들은 결국 황순원 소설을 '시적인 소설'로 평가받게 만드는 요인이다.
작가 지망생들에게 그의 이런 시적 표현들은 소설 문장을 배우는 모델이 되었으리라.
이때부터 황순원의 소설 문체는 한층 격조있는 문장으로 알려지기 시작한다.
시를 먼저 쓰고 소설을 나중에 쓰는 것이 유리한 글쓰기가 되어 주었다.
일제 말에 황순원은 발표할 수 없는 소설을 썼다.
이 소설들은 1951년에 소설집 ‘기러기’로 출간한다.
‘별’과 ‘그늘’ 을 제외한 작품들은 모두 일제 말기에 몰래 쓴 소설이다.
이런 황순원을 두고 이광수는 앞으로는 일본말로 소설을 쓰라고 권고했지만 이를
거절했다.
1943년부터 고향 빙장리에서 칩거하던 그는 해방후인 9월에야 평양으로 돌아갔지만
지주계급으로 몰려 신변의 위협을 받는다.
결국 1946년 가족들과 월남한 후 서울고등학교 국어교사로 근무한다.
1948년에 단편집 ‘목넘이마을의 개’를 출간한다. '목넘이마을'의 배경지는 황순원의
외가 마을이다.
평남 대동군 재경면 천서리다.
아무래도 황순원을 명성있는 작가로 만든 것은 ‘카인의 후예’ 다.
소설은 시대를 증언하고 예술 형상화의 역할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카인의 후예"는 당시 북한을 증언한다.
소설속에는 해방 직후에 북한에서 벌어지던 사회의 모습들이 선연하다.
북한의 사회상을 거울에 비치듯 보여주고 있지만, 냉철하게 객관화하지 못하고 어느 정도의 주관성을 삽입했다.
해방 직후 북한의 공산당 지도부는 혁명처럼 급격한 변화를 일으킨다.
무상몰수 무상분배라는 토지개혁이 그것이다.
과거의 지주 계급을 적대시 하면서 소작인들을 부각시킨다. 우리민족이 옛날부터 지녀온 온 풍속과 관행도 인정하지 않는다.
친밀하고 친숙하던 인간관계는 적대 관계로 대립한다. 폭력과 살육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자행되었다.
따라서 양식과 지성을 갖춘 작가로서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카인의 후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뚜렷한 개성을 지녔다.
주인공 박훈은 아마도 황순원 자신일 것이다.
오작녀와 그의 아버지 도섭영감의 배신의 모습속에 인간의 악마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카인의 후예"라는 제목에서 풍기는 사뭇 이국적인 이름의 근원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소설의 제목은 많은 역할을 한다. 사람의 이름처럼 다른 소설들과 구별하는 역할을 한다.
"카인의 후예"는 소설의 제목이 이미 비극적인 소설임을 암시한다.
성경 구약에 나오는 인물인 카인은 아담과 이브의 두 아들 중 맏이다. 카인은 세계최초로 살인을 저지른 인물이다.
자신의 동생 아벨을 죽였기 때문이다. 결국 그가 "카인의 후예"라는 제목으로 정한 것은 형제를 증오하고 죽인 카인의 피를 받은 후손이라는 뜻이리라. 사랑이 존재하지 않고 이념의 칼날이 증오의 날을 세울 때 살아 남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존재할까. 황순원은 붉은 이념의 칼날에 희생당하던 당시 북한의 실체를 ‘카인의 후예’에 담았다. 그때부터 60년이 지난 북한의 모습은 아직도 여전해 보인다.
황순원문학관
6,25 전쟁은 작가 황순원에게 깊은 상흔을 남긴다. 청소년기에 내가 감명 깊게 읽은 소설은
‘학’이었다. 이 소설은 내 유년시절 아버지나 삼촌들이 했던 이야기였기 때문에 실감나게 읽었던 기억이 선명하다.
황순원문학관에는 이 작품을 이해할 수 있도록 작품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주인공인 성삼이와 덕재는 마을에서 단짝동무로 지냈지만 6·25전쟁이 일어나자 적대 관계로 만난다.
덕재가 치안대원에 체포되고 성삼이는 호송 책임자가 된다.
호송 도중에 성삼이는 덕재와 유년시절에 보냈던 추억을 회상하며 갈등이 일어난다.
성삼은 덕재가 농민동맹 부위원장까지 맡았던 것에 적대감을 품기도 했다.
그러나 호송 도중 대화속에서 덕재에게 이념이 없음을 알게 된다.
빈농(貧農)이라는 이유와 아버지가 병환중이라 피난을 가지 않고 마을에 남게 된 사실을 이야기 한다.
성삼 아버지 역시 농사의 애착으로 피난을 거부하던 것을 기억한다. 점차 덕재에게 품었던 증오심은 우정으로 바뀐다.
성삼은 고갯길을 내려오면서 학 때를 발견한다. 그런대 학들은 그대로 그곳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유년시절 잡았던 학을 풀어준 적이 있다. 사냥꾼이 학을 잡으로 왔다는 소식을 듣고 풀어주었다.
학은 처음에 잘 날지 못하다가 푸른 하늘로 날아갔던 일에 대한 유년의 추억을 공유한다.
성삼은 덕재의 포승줄을 풀어 준다.
이런 성삼의 행위에 덕재는 자기를 쏘아 죽이려나 의심을 하기도 한다. 덕재는 풀섶으로 몸을 숨기며 달아난다.
황순원은 한국 문단에서 서정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다. 교과서에 게재된 그의 소설 <소나기>를 읽고 느낀 감성적 감동은 아직도 많은 우리의 가슴속에 살아 있다.
황순원은 ‘작가’로만 남기 위해 세속적인 명예와 감투를 거절했다. 관직과 박사라는 칭호도, 훈장도 모두 사양하고 오직 예술원 회원과 교수라는 직함을 가졌을 뿐이었다.
‘작가는 문학작품으로 말한다’는 신념을 가졌기에 시와 소설 이외에 다른 글은 쓰지 않았다.
문학평론가 김병익은 “황순원은 1930년대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래 단아하고 정갈한 문체로 인간의 심오한 내면을 드러냈으며, 이를 통해 소설 작법의 가장 중요한 본보기를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장남 황동규 시인이 어렸을 때 "왜 우리집은 일본어를 가르쳐 주지 않느냐"고 아버지 황순원에게 이야기 했다고 한다. 이에 황순원은 "내가 자식을 잘못 가르쳤다"며 통곡했다고 전한다.
소설가 고원정씨는 80년대 모 신문 신춘문예의 마지막 심사에 올랐으나, 심사위원이었던 황순원 선생이 "내 제자니까 떨어뜨린다"며 그를 탈락시킨 일도 있다. 그는 "작가는 작품으로 말할 뿐"이라며 잡문이나 사회활동을 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정갈하며, 간결한 문체처럼 황순원은 자신의 삶을 결벽에 가까운 생활태도로 일관했다.
시와 소설 외에 다른 장르에는 범접을 하지 않았으며 제자들의 작품에 서문이나 발문을 쓰는 것도 거부했다.
자신의 작품 이외의 일로 언론에 보도되는 것도 피했다.
사진을 촬영하지 않은 것도 유명하다.
경희대 교수 시절 대학측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제안한다. 그러나 “소설가로 충분하다”며 거절했다. 애주가였지만 결코 술로 인해 실수를 하지 않았다.
유년의 그리움이 가슴에 일렁이면 한편의 소설이 실화처럼 살아온다.황순원의 단편소설 ‘소나기’이다.
이 소설은 경기도 양평의 한 시골 마을이 배경이다.
서울에서 내려온 소녀와 시골 동네 소년과의 슬프고 아픈 사랑을 그린 ‘소나기’는 어른들에게는 첫사랑의
자화상이리라.
중학교 국어 교과서를 통해 소나기를 읽고 난 후 황순원의 소설에 푹 빠졌었던 나는 이제야
그의 삶과 문학을 찾아 길을 나선다.
황순원의 문학적인 성격에 관해서는 독자들에 따라 견해가 다를 것이다.
그러나 일제의 식민지시대와 해방정국, 6,25전쟁 후의 가난과 혼란 속에도 그가 ‘학처럼 살았다’는 것에는 대체로 동의한다.
일제 말기 친일을 피하기 어려웠던 시절에 그는 숨어 지내며 발표할 수 없는 소설들을 써야 했다. 일제에게 총과 칼을 가지고 싸우지는 않았지만 결코 부역하지는 않았다.
양평 두물머리
해방 이후의 정권에게도 아부하지 않았으며,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자신의 삶을 문학적으로 몰입했다. 황순원은 단편과 장편에 능한 작가이다. 그러나 소설이전에 시를 먼저 썼던 시인이다.
그의 소설이 간결하고 시적인 문체를 가진 이유다.
소설은 대부분 서정적인 시적 미학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의 삶을 소박하면서도 휴머니즘으로 인도한다.
그가 우리의 민족 정서와 전통적인 삶에 애정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아름다움을 지닌 서정적인 소설들은 결코 우리의 역사와 현실을 등한시 하지 않았다.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다 보면 역사와 사실적인 관심의 결여라는 문제점이 발생한다.
그러나 황순원의 문학은 이러한 숙제들을 잘 해결하였다.
그의 소설 속에는 우리 국토와 그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들을 서정적으로 살려 놓았다.
황순원의 고향은 평남 대동군이다. 숭실중학교 재학 중이던 1931년 <동광>지에 시 ‘나의 꿈’을 발표하여 시인으로
등단한다.
그의 고향 평남 대동은 갈 수 없는 땅, 오히려 그의 삶과 문학을 자세하게 알기 위해서는 이제 경기도 양평을 가야 한다.
작년에 그의 문학관과 묘소가 있는 ‘소나기마을’이 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양평은 서울에서 가깝다.
강변과 경치 좋은 산속에 별장과 펜션을 짓고 모텔과 카페가 들어설 때 양평은 실망스런 지역이었다. 그러나 소나기마을이 개관되면서 동심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문학의 마을로 거듭나고 있다.
우리들의 삶을 아름답고 풍성하게 만드는 일은 결코 경제가 다 해결할 수는 없으리라.
작가들의 삶과 문학을 찾아 국토를 기행하다 보면 나를 찾게 되고 이웃에게 가슴을 열 수 있게 만든다. 누군가에게 가슴을 열고 대화할 수 있다면, 풍성한 삶은 쉽게 행복의 길로 안내할 것이다.
우리의 비정한 가슴을 촉촉이 적시는 소설을 많이 쓰고 세상을 떠난 작가 황순원을 모르는
이는 드물다. 그의 문학성의 홍보를 위해 소나기마을을 조성하였다. 양평은 문학의정서가 넘실거리는 지역으로 거듭나리라.
양평으로 떠나기 전에 소설 ‘소나기’를 읽다가 마지막 몇 줄이 처연하게 가슴을 울렁거리게 하였다. 다시 읽어보면 아직도 감동이 일렁인다.
개울물은 날로 여물어 갔다.
소년은 갈림길에서 아래쪽으로 가 보았다.
갈밭머리에서 바라보는 서당골 마을은 쪽빛 하늘 아래 한결 가까워 보였다.
어른들의 말이, 내일 소녀네가 양평읍으로 이사 간다는 것이었다.
거기 가서는 조그마한 가겟방을 보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소년은 저도 모르게 주머니 속 호두알을 만지작 거리며,
한 손으로는 수없이 갈꽃을 휘어 꺾고 있었다.
그날밤, 소년은 자리에 누워서도 같은 생각뿐이었다.
내일 소녀네가 이사하는 걸 가보나 어쩌나. 가면 소녀를 보게 될까 어떨까.
--중략
"글쎄 말이지. 이번앤 꽤 여러날 앓는걸 약도 변변히 못 써 봤다더군.
지금 같아서 윤 초 시네도 대가 끊긴 셈이지.……
그런데 참, 이번 계집앤 어린 것이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아.
글쎄, 죽기 전에 이런 말을 했다지 않아?
자기가 죽거든 자기 입던 옷을 꼭 그대로 입혀서 묻어 달라고……."
--황순원 소설 소나기 중에서
소나기를 읽고 난 후 수 십 년이 지난 후에도 이 대목은 선연하게 살아 온다.
소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소년의 슬픔과 번민은 소나기를 읽었던 이 땅 남성들의
가슴속에 아직까지 슬픔으로 남아 있으리라.
이 슬픔의 흔적들은 삶에 작은 파동을 일으키며 순결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고대한다.
한 편의 소설과 한 줄의 시들이 때로 누군가에게는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한 지역의 이미지를 바꿀 수 있는 곳이 있으니 그곳이 양평이다.
양평은 “어른들의 말이, 내일 소녀네가 양평읍으로 이사 간다는 것이었다. 거기 가서는 조그마한 가겟방을 보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라는 소설 소나기의 마지막 부분에 지명이 있어 ‘소나기마을’을 조성한다.
때로 문학은 큰 위력을 발휘한다. 허구적인 소설 한 편이 많은 민원과 청원보다도 더 많은 예산과 강력한 추진력을 동반하게 만든다. 양평에 소나기마을을 조성한 것은 바로 문학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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