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의 영성운동과 복음
밀레니엄의 새 천년기를 향하여 세계보편의 신앙과 영성이 대두되고 있다. 왜 세계는 지금 종교와 세계, 우주와 인간관의 변혁을 요구하고 있는가?
21세기의 영성(뉴에이지운동 정의 ; 역사, 사상)
새로운 밀레니엄의 시대에 온 세계의 신앙과 영성을 통합할 영성의 기원과 사상은 무엇인가?
신성의 씨 '쿤달리니'(Devine Seed) : 육체안에 내재된 신성
뉴에이지 운동의 요체인 인도 요가 철학에서는 모든 인간 안에는 본래적인 신성이 있다고 주장된다. 그것은 존재론적인 실체이며, 수행자들에 의해서 경험적으로 알려져 왔다. "쿤달리니"로 불려지는 내재된 신성은 인체 내부에 존재하는 7과정의 챠크라의 가장 심오한 기저에 자리잡고 있다.
쿤달리니각성 : 신성 브라마를 향한 운동
쿤달리니는 극동에서 "단"이나 "금강다리"로 간주되며, 인간의 중추(챠크라)를 관통하여 정각의 고지를 향하여 상승한다. 고대동양 신비주의에 있어서 쿤달리니의 완전한 각성은 신성 "브라마"와의 합일에 도달한 "우주인간"의 과업이 성취된 것을 의미한다.
쿤달리니영성 : 뉴에이지영성의 실재성
쿤달리니의 각성은 수행자에게 있어서 존재론적인 실재로서 경험적이다. 곧 그것은 종교적 관념이나 도그마적 사변에 의해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믿고 순종하여 성령의 참여하지 않는 모든 종교와 인간의 총괄적인 국면을 흡수하는 보편적인 경향이다.
기독교 신비주의 이단 : 말씀과 로고스/ 신비주의자 에크하르트, 요한 타우렐 등
기독교 신비주의의 이단적 전통의 기저는 동양 신비주의 전통과 동일한 기반을 공유한다. 그렇다면, 서구에 있어서 "신성과의 합일"을 모색해온 신비주의의 전통의 본질은 무엇인가?
성경적통찰 : 성경을 통해 바라보는 뉴에이지 영성의 본질
뉴에이지운동이 지향하는 "보편적인 영성"의 요체로서 "쿤달리니"의 각성은 철저하게 반성경적, 반복음적 방향성을 산출한다. 성경은 "잠자는 뱀"으로 상징되는 "쿤달리니" 영성의 기원을 계시한다.
쿤달리니영성비판 : 반기독교적 영성운동의 동력원, 건널 수 없는 영혼의 강
세계의 역사 속에서 "신성"은 언제나 "빛"과 관련된다. 이 "빛"은 때때로 성경의 하나님의 "빛"으로 혼동되기도 하였는데, "루시퍼"의 이름은 "빛을 발하는 자"라는 어원적 의미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계시된 영원한 진리의 빛과는 영원히 그 근원을 달리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참 빛과 생명과 진리와 구원과 부활의 길을 인류에게 보여주셨다.
● 21세기 영성운동과 복음
오늘날 역사적 변혁과 문명전환에 대한 일치된 견해가 집약되고 있다. 변혁에 대한 예감은 인종과 종교 및 제반 분야를 망라하여 포괄적이고 동시적으로 표현된다. 앨빈 토플러에 의하면 "지금 우리의 생활 속에 지금까지는 없었던 문명이 출현하려 하고 있다." 일리야 프리고진에 따르면 금세기는 "역사상 매우 극적인 순간이며, 어쩌면 전환기가 될 시점"이다. 이와 같은 새로운 전환은 미래학적으로 신세계주의(New Glovalism), 신세계, 신세계 질서(New World Order), 제3의 물결, 물병좌시대, 그리고 종교적, 정신적으로는 새 정신(New Mind), 새로운 의식(New Consciousness), 신초월주의, 인간잠재력 개발, 새로운 여성, 신동방주의(New Orientalism)로 묘사된다. 마릴린 퍼거슨은 토마스 쿤이 제안한 개념을 빌어 이와 같은 발견들은 모두 "패러다임의 전환(Paradigm Shift)"이라 하였다. 토마스 쿤에 따르면 패러다임은 사고의 틀이며, 실재의 일면들을 이해하고 해명하는 체계이다. 패러다임의 전환은 오래된 문제에 대한 새로운 사고방식인 것이다.
한편, 패러다임의 전환을 물리학적 개념으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있어왔다. 뉴턴의 물리학을 대체하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대두된 이후 양자역학은 물질계에 대한 새로운 발견과 신개념 창출에 일조하고 있다. 개체적이고 독립적인 단위의 원자조각들에 의한 기계적 연합에 의한 세계의 구성이라는 종래의 관념은 파동과 입자, 물질과 동시에 에너지 양상을 갖는 미립자현상이 관찰된 이후 종말을 고했다. 하이젠베르크는 실재 자체가 분명히 확정할 수 없는 비결정적 성격을 지닌다는 양자 현상으로부터 "불확정성의 원리(principle of uncertainty)"라는 개념을 창안하였다. 이와 같은 양자현상적 이해는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이 표방하는 인간의 이성, 과학성, 진리의 객관성과 보편성 그리고 합리성에 대한 비판과 해체 명분에 대한 이론적 지지를 강화한다
포스트모던의 세계는 기존의 질서와 체계들이 해체됨과 동시에 새로운 질서와 개념들이 급속하게 자리를 잡아간다.
김영한은 포스트모던의 변화를 주도하는 6대 특성을 개괄하면서 다원주의의 확장과 성경언어의 일식 그리고 뉴-에이지 운동의 확산을 지적하고 있다. 서구사상에 동양적 비교주의 사상을 혼합시키고 점성학까지 동원하는 신비적 혼합주의인 뉴에이지운동은 아놀드 토인비적 관점을 빌린다면 20세기 최대의 사건을 형성하는 범주에 놓인다.
일반적으로 양차대전은 급진적인 문명의 발전과 계몽주의 이래로 서구의식의 틀을 확정하였던 미래에 대한 낙관적 합리주의의에 대하여 근본적 회의를 몰고 왔으며, 물질문명의 세례 속에서 기독교교회의 세속화는 서구의 영적 진공화를 가속시킨 것으로 분석된다. 린드백은 20세기 초까지 서구 기독교 국가의 대다수 국민들은 성경의 언어 세계와 성경의 상상력 속에 살았던 서구사회는 이제 성경의 급속한 퇴조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성경 언어의 퇴조는 급격하고 광범위하여 서양에서는 언어, 문화, 그리고 상상력이 놀라울 정도로 비성경화 되었다."는 것이다. 홍치모는 미국의 옛날 역사교과서에서 20페이지에 달하는 청교도들의 신앙과 활동에 대한 언급이 이제는 불과 3페이지 분량으로 기록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미국의 전통적인 패러다임이 사라져 버렸다."고 기술한다. 이와 같은 전통적 기독교의 쇠퇴, 성서적 언어의 일식, 종교적 다원주의의 물결은 뉴에이지운동의 확산을 위한 비옥한 토양을 제공하였다.
Texe Mars에 따르면 뉴에이지 운동은 눈깜짝할 사이에 미국과 전세계를 휩쓸면서 지구상에서 가장 급성장하는 종교운동이라고 한다. 총신대학원의 권성수교수는 뉴에이지 운동의 영성을 공기와 같이 밀접하게 파고드는 '사탄의 영기'로 묘사하고 있다.
이미 기독교 복음주의 진영에서 진행되어온 다각적인 관찰과 연구는 뉴에이지운동을 반기독교적이요, 사탄적이며, 종말론적 현상으로 규정하고 있다. 즉, 뉴에지운동은 하나님으로부터 인류를 분리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배후에 깔은 사탄의 교묘하고 사악한 전략이라는 것이다.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관찰된대로 뉴에이지운동의 범신론적 세계관과 신관, 인간관은 계시된 성경적 진리와 피할 수 없는 충돌을 야기시키고 있다. 뉴에이지운동은 인간성을 신성의 일부분과 같은 것으로 보고 있다. 뉴에이지운동의 가장 중요한 원리는 인간이 영적각성을 통해 신이 될 수 있다는 원리이다. 인간신화를 위한 대표적인 수행체계는 요가와 명상이며, 심령술과 자동기록(automatic wiriting), 초능력, 마인드 콘트롤(mind control), 바이오 피드백(bio-feedback) 등의 비술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림] 요가를 통해서 인간과 연합되는 신성의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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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間神化의 가능성은 인간의 육체안에 잠들어 있는 신성의 씨앗(God seed)으로부터 비롯된다. 신성의 씨앗은 산크리스트어로 '쿤달리니(Kundalini)'로 불리워진다. 힌두경전과 신비문헌과 동양신비가들의 저서에 따르면 쿤달리니는 인간안에 내재된 실존하는 우주적 에너지이다. 그러므로 고피 크리슈나는 "쿤달리니의 각성이야 말로 인류 앞에 놓인 최대의 과업이다."라고 주장한다. 쿤달리니의 각성을 통한 우주 최고의 신 브라마와의 연합은 뉴에이지운동이 추구하는 심원한 목표이며, 도래할 새시대의 이상적 인간이다. 그러므로 고피 크리슈나는, 쿤달리니를 각성시킬 가장 안전한 방법이 개발되어 심신 양면으로 그에 적합한 고상한 사람들이, 자기 육체로 이를 실험하고 응용하게 된다면, 인류는 많은 심령적, 정신적 거인들을 배출하는 시대를 맞이할 것이다라고 예언하고 있다.
보다 강력하게 김지하는 21세기를 '영의 시대'로 규정하면서 '영적인 인간의 출현이 없이 21세기는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서구 자연주의의 잔존물인 진화론에 많은 희망을 걸고 있는 다수의 선구적인 사상가들은 새 인간과 새 시대, 즉 뉴맨(New Man)과 뉴에이지(New Age)의 도래를 예견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인간관과 도래할 영성의 대두는 성경적 견지에서 피할 수 없는 충돌을 예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성경은 만물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창1:1, 요1:1-3),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할 죄인이다(롬3:23). 또한 인간은 스스로 자기안에 죄의 원인을 가지고 있으며(마15:19, 막7:21), 죄의 영향으로부터 스스로 해방되지 못한다(롬7:13-24)고 천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논의의 폭을 인간의 본성으로 한정한다면 New Age는 인간의 신성함을 선언하지만 성경은 인간의 죄성을 폭로한다. 뉴에이지운동과 성경은 인간에 대한 관점과 해석에 있어서 전혀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인간의 죄성을 폭로하고 중보자 예수그리스도를 향하게 하는 성경의 가르침과 인간 내부의 잠재된 신성의 씨 쿤달리니를 각성시켜 인간 스스로 영원불사의 구원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하는 뉴에이지사상은 서로 피할 수 없는 충돌의 지점을 응시하고 있다.
뉴에이지운동에서 인간신화의 가능성과 전망은 모든 인간안에 내재하고 있다는 "쿤달리니"에 근거한다. 그렇다면 과연 신성의 씨(Divine seed), 내면의 빛(the inner light), 내재된 신성 등으로 알려진 "쿤달리니"란 무엇인가? "쿤달리니"는 성경적 관점에서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는가? 이러한 의문은 New Age를 직면하면서 인간에 관한 성경의 증거에 의하여 자연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 21세기의 영성(뉴에이지운동 정의 ; 역사, 사상)
뉴에이지운동의 정의
뉴에이지운동은 간단하게 정의내리기 어려운 복합적이고 다양한 개념군(郡)을 형성한다. 뉴에이지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동방 신비주의, 고대의 밀교적인 전통, 힌두교와 불교 등의 동양 종교, 진화론적 낙관주의, 사라져버린 과거의 문명들, 외계문명, 점성학 등의 용어들이 언급된다. 김영한에 따르면 뉴에이지운동은 서구 사상에 동양적 비교주의 사상을 혼합시키고, 이에 점성학까지 동원하는 신비적 혼합주의이다. 또한 뉴에이지운동은 동양과 서양의 다양한 신비사상을 혼합하여 '과학'이라는 옷을 입힌 "현대판 신화운동"이라고도 한다. 뉴에이지운동에 대한 다양한 설명들 속에 내포된 공통적인 개념은 뉴에이지운동이 서구문명과 동양신비종교와의 만남으로부터 접촉점을 갖는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뉴에이지운동은 월터(Walter Martin)의 견해와 같이 "동양의 비술적 신비주의가 서양문명으로의 급증하는 침투를 묘사하는 데 가장 흔히 사용되는 명칭"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힌두교의 브라마(Brahman)와 아트만(Atman) 사상을 차용하는 뉴에이지운동은 요가와 명상 등의 수행을 통해 윤회와 환생으로 거듭되는 카르마(Karma)의 공작을 차단하고, 범아일여(梵兒一如)의 해탈 경지를 모든 인간이 도달해야 할 최고의 목표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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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불교의 창시자 고오타마 붓다는 "열반"을 통하여 구원의 과업을 이룬자의 완전한 모범으로 간주된다.
주목해야할 것은 비록 뉴에이지운동이 서구인들의 주도하에 다양한 양태로 나타나지만 기본 사상은 인도종교철학과 고대의 이교적 신비주의 전승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문화사적 측면에서 볼 때 뉴에이지운동은 그 뿌리를 동양에 두고 있으면서 꽃과 열매는 서구사회의 장을 통해 나타난 일종의 종교와 문화의 통합적인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월터마틴(Walter Martine)은 "우리는 여기 뉴에이지에서 영성과 미신, 열광과 흉내의 결합을 본다. 여기에서 유일하게 확실한 것은 그것이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뉴에이지운동의 역사
뉴에이지운동에 관한 역사적 발전과정에 대한 학자들간의 관점은 다양하게 표현된다. 홍치모에 따르면 새시대운동이 지니고 있는 정신과 사상 그 자체가 혼합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문화사적 견지에서 뉴에이지운동은 1960년대의 미국의 히피족들의 반문화운동(反文化運動-Counter Culture Movement)과 1970년대의 자기성취문화(The Culture of Narcissism)운동을 거쳐 1980년대의 들어서자 그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새시대운동(New Age Movememt)은 그 기원에 있어서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뉴에이지 운동은 먼저 세계종교의 사상을 흡수하고 있으며 힌두교와 불교의 환생과 윤회 사상, 선불교(仙佛敎)의 절대무(絶對無), 동양의 이원론인 태극사상(太極思想)을 받아 들이고 있으며, 초대교회 안에서 유행하였던 영지주의사상도 흡입되어 있다는 것이다. 또한 초월사상과 초월운동(Trancendentalism or Trancendental movement)사상적 발전 역시 뉴에이지운동 역사와 병행하고 있다. 특히, 프랜즈 안톤 메스머(Franz Anton Mesmer)의 영성주의와 메스머의 최면술은 이후에 시작된 신지학회운동과 연계되고 흡수되었다. 손종태에 따르면 초자연주의(Trasncendentalism)와 심령술(Spiritism), 신사고(New Thought), 신지학(Theosephy) 등은 뉴에이지 운동이 전격적으로 출현할 수 있는 철학적인 기반을 마련한 몇가지 중요한 사상들이라고 한다.
한편, 이양림은 사상적 관점에서 "뉴에이운동의 뿌리는 인본주의"라고 한다. 인본주의는 과학주의, 진화론, 유물론적인 생활철학과 무신론을 골간으로 하는 인본주의자 선언문 Ⅰ(Humanist Manifesto Ⅰ)에 의해서 세상에 공개적으로 표출되었으며, 제2의 인본주의 선언에 이르러 "무신론적 태도가 보다 강경해"졌다고 하였다. 이것은 기독교에 대한 혐오를 가중시켰고 물질문명에서 오는 모순과 부조리에 지친 서양인들의 관심을 끌기에 적합했다. 이와 같은 서구인의 영적 공백은 1960대 대거 미국으로 이주한 힌두교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동양종교의 요가와 명상과 심령술의 유입을 촉발하였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뉴에이지운동의 기원과 관련된 다각적인 관점에도 불구하고 1875년에 러시아 여인 마담 헬레나 브라밭스키(Madame Helena Petrovna Blabatsky, 1831-1891)에 의해 창립된 "신지학회"가 뉴에이지운동의 기반을 마련했다고 보는 것이 학자들의 일반적인 통념이다. 브라밭스키 이후 신지학회는 제2대회장인 애니 빈산트(Annie Besant, 1847-1933)에 의해 번성해 나갔고, 제3대 회장 앨리스 베일리(Alice Bailey, 1880-1949)에 의해 뉴에이지운동의 기초가 다져지게 되었다.
또한 학자들은 마릴린 퍼거슨(Marilyn Ferguson)이 뉴에이지운동을 대중적 개념으로 자리잡게 하는데 기여하였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그녀는 1980년에 출판한 '물병자리의 공모(The Aquarian Conspiracy)'란 책을 통해 비로서 전세계가 새로운 시대를 맞고 있으며 인간이 스스로 주인이 되어 새 시대를 만들어야 된다는 뉴에이지운동에 대한 공식적인 선언을 하였다.
한편, 뉴에이지운동의 기원과 관련하여 주목할 것은 이 운동이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들과 긴밀하고 근본적인 관련을 맺고 있다는 공공연한 사실에 관한 것이다. 신지학회 창설자 바브라스키는 자신의 수호영 '마하-도마 M'의 수호를 받아서 넓고 깊은 지식을 쌓았다고 고백하였다. 크리슈나무르티의 전기를 저술한 메리 루틴스에 따르면 신지학회 제2대 회장 애니 벤산트(Anne Bensant) 역시 중요한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비술을 통해 히말라야의 영적 존재들과 접촉한 사실들을 상세하게 진술하고 있다. 또한 영국에서 티벳의 라마승들의 수행과 삶에 관련된 자서전적 저술로 초미의 관심을 모았던 롭상 람파 역시 세계밖에 존재들로부터 사명에 대한 지시를 받은 사실들을 기록하고 있다. 이외에도, 리드비터와 크리슈나무르티(Krish Namurti), 스폴딩(Baird T. Spalding), 요가난다(Yogananda), 맥도널드 베인(Mcdonald Vein) 등 뉴에이지운동과 관련된 주도적 인물들이 거의 예외없이 영적 존재들과의 접촉에 관한 사실들을 저서를 통하여 진술하고 있다. 이들이 접촉한 존재들은 초인간적인 존재들이며 그 사상과 의도에 있어서 반기독교적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견지에서 메리 루틴스가 저술한 크리슈나무르티의 전기에서 애니 벤산트와 리드비터가 접촉했던 히말라야의 영적인 존재들을 '루시퍼를 중심으로 영적 위계를 구성하는 존재'들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만한 사실이라고 볼 수 있다.
복음주의자들에 따르면 창세기 3장의 '타락사건'에서 뉴에이지운동의 기원에 관한 모티브를 발견한다. 곧, 뉴에이지운동의 기원은 '여자를 유혹한 뱀'으로서 '우주에서 발생한 최초의 범죄자 사탄에 뿌리를 둔다.'는 것이다.
뉴에이지운동의 사상
1. 신관(神觀)과 우주관(宇宙觀)
새시대운동의 우주관을 가장 잘 나타내 주고 있는 표어는 "All is one, One is all."이다. 이 말은 곧 범신론적인 신관과 자아관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즉, "우주는 원래 하나의 존재이며 각 인간은 모두 다 개체로서의 우주임과 동시에 개체적 인간들의 모임이 바로 우주라는 것"이다.
뉴에이저에게 있어서 만물의 근원으로서 신은 인격성으로서가 아니라 우주의 근본원리나 힘 등으로 묘사된다. 그러므로 제인 로버츠(Jane Roberts)에 따르면 신은 "하나의 개인이 아니라 에너지의 형태이며... 팽창하는 의식의 심령피라미드이다. 이 의식이 삼라만상과 개인들을 일제히 그리고 동시에 창조한다."고 표현된다.
한편, 힌두교의 경전과 요가철학을 수용하는 뉴에이지 운동은 우주만물의 창조적 동인으로서 하나의 통일된 힘을 직관한다. 이 우주적인 힘은 우주의 순수원리, 우주정신, 보편적정신, 우주의 영 혹은 우주대영(the universal spirit)으로도 불리는 브라마(Bramahn)를 의미한다.
뉴에이지적 사고에 있어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우주대영에 기원을 둔다. 따라서 우주와 우주대영 속에 있는 만물들은 그 기원이나 영원성에서 신의 본질이나 절대적 통일체와 일체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범신론적 뉴에이지 사상의 신관은 기독교의 삼위일체의 인격적인 절대자로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만물의 근본으로서 만물 속에 내재된 근본적인 원리이며 힘을 의미하고 있다.
2. 인간관(人間觀)
그러므로 뉴에이지사상은 인간의 본성을 말할 때 신성의 일부분과 같은 것으로 보고 있다. 모든 인간은 본성적으로 선하게 태어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인간관은 뉴에이지사상의 신관으로부터 비롯된다. 즉, 존재하는 유일한 것은 오직 '우주대영(Universal Spirit)'이며 따라서 존재하는 모든 인간은 우주대영의 개체적 존재이자 동시에 우주대영 그 자체이기도하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우주적 신성이 내재된다. 인간의 내면에는 우주대영과 본질적으로 같은 '신성의 불꽃(Divine Spark)'을 가지고 있으므로 인간의 영적 자아(Spiritual Self)는 실제적으로 전지(全知 : omniscience)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여우 셜리 맥클래인(Shirley MacLaine)이 공공연하게 무대위에서 "나는 신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신이다."라는 외침 속에 요약되고 있다.
이와 같이 범신론적 사상을 기반으로 한 뉴에이지 운동은 인간으로 하여금 우주대영과의 연합을 통한 신화(神化)를 표방한다. 곧 신과의 합일을 경험함으로써 구원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이는 힌두교의 범아동일론(凡兒同一論)의 "브라마(Brahman) 곧 신과 아트만(Atman) 곧 자아는 동일하다."는 가르침의 현대적 구현이다.
3. 구원관
뉴에이지 사고는 인간의 본성적인 죄(罪)를 부인한다. 죄란 우주의식의 일부이며 하나의 구조적 현상일 뿐이다. 뉴에이지사상의 원천이라 할 수 있는 힌두교와 불교적 사고에 있어서 죄와 이로부터 비롯되는 악은 '마야(Maya)'로서 영원불멸의 진리를 가리는 물질계의 환각이요 미망일 뿐이다. 마야의 세계는 우주를 규율하는 카르마의 공작에 의해서 인과응보에 법칙에 지배를 받는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전생에 행한 행위에 따라서 이생을 살게 된다." 그러므로, 뉴에이지사상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악은 진리에 반하는 적이 아니라, 인간 자신안에 내재된 신성을 자각하지 못하는 무지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이 신성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그 모르고 있는 것을 깨우치기만 하면 보다 높은 자아로 승화되는 것이다. 이것은 창조와 인간성이 신적 존재로 귀일되는 것이며 인격적 변혁을 의미한다."는 주장이 가능해 진다.
뉴에이지사상에 있어서, "구원이란 인간의 잠재력 즉 인간 속에 있는 신의 힘을 개발함으로써 인간이 신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 자신이 구원의 원인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한 구원자로서 예수그리스도는 거부된다.
● 신성의 씨 '쿤달리니'(Devine Seed) : 육체안에 내재된 신성
신성의 씨 쿤달리니
뉴에이지운동의 동인(動因)
뉴에이지운동에 관하여 논할 때 과연 무엇을 뉴에이지운동으로 볼 것인가에 대하여 분분한 논의가 일어나는 것을 접하게 된다. 예를 들어 영화 '사랑과 영혼'이 뉴에이지 영화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영화가 죽은 영혼이 살아있는 사람과 접촉하면서 이루어지는 사건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에 주안점을 둔다. 그러나 반론자들은 이 영화를 구성하는 가장 큰 테마는 모든 것을 초월하는 숭고한 사랑에 관한 것이지 망자의 영혼과 산자의 접촉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때로는 극단적으로 기독교적인 진리체계와 신앙의 원리에 반하여 대중문화를 통해 표현되는 모든 국면들이 반기독교적인 뉴에이지운동이며 사탄적인 것이라고 배수진을 치는 경우도 있다. 아니면, 어떤 영화나 서적, 노래의 가사 등의 특정한 부분에 대해서 그것이 반기독교적인 뉴에이지운동이냐 아니냐를 가리기 위해 논쟁이 야기되고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양한 대중 매체를 통해서 표현되는 무수한 문화적 양상들과 그안에 내포된 복합적인 의미들을 기독교적인가 아닌가의 준거를 가지고 비판한다는 것은 뉴에이지 운동의 본질에 대한 피상적인 관점에 대한 쟁론을 답습하고야 말 것이다. 오히려 이와 같은 열심은 진정으로 기독교적 관점에서 다루어야 할 뉴에이지운동의 의도와 그 본질을 근본적으로 왜곡시킬 우려가 있다. 즉, 대중매체를 통해서 표현되는 뉴에이지사상의 편린들을 주목하며 진리와 비진리를 가리기 위해 분분하는 것보다 진정으로 뉴에이지운동을 움직이는 요체가 무엇이며 그와 같은 동인이 대중문화를 통해서 어떻게 전달될 수 있는가를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기독교적 관점에서 뉴에이지운동의 혐의가 현저한 영화나 가수, 노래, 서적, 신비결사단체의 이름 몇가지 정도를 열거한다고 해서 뉴에이지운동을 이해하고 분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진정으로 뉴에이지운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파편적 지식에 관한 전달차원이 아니라 문화매체를 이용하여 파고드는 영성의 근원을 진지하게 조명해야할 필요가 있다.
'자유를 위한 변명'의 저자이며 전위무용가인 홍신자는 자신의 저서에서 자신이 무대위에서 전위적 표현을 통해 전달하려고 하는 것은 '신(神)'이라고 밝히고 있다.
나는 춤의 소리를 듣는다. 그것은 이 몸을 통하여 오는 신의 소리이다. 나는 사라지고 신의 소리가 흐르는 것이다. 나의 팔이 올라가고 있지만, 내가 그것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나의 움직임을 지배하지 않는다. 신이 그 움직임을 지배하도록 나는 다만 그 신을 불러들일 뿐이다. 신이 내속으로 들어온다. 마침내 나는 신이 되는 것이다. 신의 소리는 다시 멀리 퍼진다. 바람처럼 파도처럼 에너지로서 흔적도 없이 그렇게 사라진다. 춤추는 자는 사라지고 춤만이 남는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이순간, 바로 신의 순간이 아닌가.
그녀가 대중에게 전달하려고 하는 '신'은 티벳과 히말라야 인도 등지를 다니는 영적순례 속에서 만난 신이며, 그녀의 스승 구루 라즈니쉬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가르침의 근원이다. 이와 같은 그녀의 진술은 표상적으로 접하는 뉴에이지운동의 양상에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실재적인 영향력으로 나타나는 내부적 원인이 있음을 알게 한다.
즉, 뉴에이지운동에는 거시적으로 외부적 국면과 내부적 국면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신상언은 '가시적인 세계(visible-world)와 비가시적 세계(invisible world)'로 구분할 수 있는 두 개의 세계가 존재한다고 하였다.
또한 김성수는 보다 구체적인 의미에서 뉴에이운동을 네가지 수준으로 구분하여 기술하기도 하였다.
첫 번째 수준은, 피상적인 호칭의 수준으로서 일반적으로 상업적인 세계에서 볼 수 있다고 한다. 두 번째 수준은, 사람들이 뉴에이지 사상과 실제를 새로운 유행에 맞는 어떤 것으로 추구하는데 가장 대중적인 관심을 끄는 수준이다. 세 번째 수준은, 변화, 변형의 이미지(transform image), 패러다임의 전환(a paradime shift), 새로운 세계관(a new world view)이라고 부른다. 이 수준에서 사람들은 그들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법을 가장 근본적인 수준에서 변화시킨다. 마지막 네 번째 수준은 뉴에이지 전체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수준의 특징은 성자(the sacred)의 수육(incanation)이다. 이 수준에서 인간은 세계관의 변형을 넘어 인간의 영적 변형에로 나아가게 된다고 한다.
이상에서와 같이 뉴에이지운동은 외부적 국면에서 내부적 국면으로 혹은 피상적 수준에서 고차원의 내면적이고 영적인 수준으로부터 비롯되고 있다.
그러므로 뉴에이지운동은 가시적 세계에서 비가시적세계로, 혹은 인간의 의식의 단계적 변형을 위한 매개로서 다양한 실행방법을 사용한다. 동양종교의 비의적 신비술, 영지주의, 심령과학, 무속신앙, 명상(초월명상), 투시, 점치는 것, 최면술, 요가, 관상, 수상, UFO에 관한 것, 마녀숭배, 윤회설, 신과학운동, 인간 잠재력 개발운동, 초혼, 텔레파시와 정신동력, SF영화와 소설, 카드점, 강신술... 등을 열거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인간의식의 변형을 위한 매개적 방편들은 인간의 내적 자아와 우주의식과의 합일을 목표로 하는 것으로서, 카르마의 윤회와 환생의 순환 고리를 끊고 해탈에 도달하는 것이다.
한편, 뉴에이저들은 인간의식의 변형을 통한 신성과의 합일에 도달할 수 있는 실재론적 내적 근거가 바로 인간안에 놓여져 있다고 주장한다.
티벳의 라마승 롭상 람파에 따르면, "이 지구상의 우리라는 것은 단지 우리의 초월적 자아(overself)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것은 동양인이든 서구인이든 모든 인간의 척수 신경의 맨 가운데있는 척수로서, 다른 차원으로 이어지는 대롱관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롭상에 따르면 이것은 동양인들이 '뱀의 불꽃(Serpent Fire)'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쿤달리니(Kundalini)이다.
인간의 육체안에 실재하는 쿤달리니는 인도철학과 동양의 신비주의자, 뉴에이저들에 의한 저술 속에서 공통적으로 언급되고 있는 뉴에이지운동이 지향하는 영성의 모티브이며, 고피 크리슈나(Gopi Krishuna)와 아지트 무케르지(Ajit Mookerjee)에 의하면 역사와 종교, 인종을 초월하여 모든 인간안에 내재하는 보편적인 것이다.
쿤달리니의 정의
쿤달리니는 인간의 육체안에 내재된 신성 아트만(Atman)으로서 순수의식, 우주적 여성에너지 등으로 명명된다. 성(聲) 브라만(Sabdabrahman), 옴(OM), 산크리스트어로 쿤달리니라는 단어는 '감겨진'을 뜻한다. 바바 하리 다스는 "쿤달리니는 척추의 기저부에 비축된 에너지(프라나)의 덩어리로서 나선형으로 움직이는 힘으로서 스바얌부 링가의 둘레를 세 바퀴 반 감고 있는 뱀으로 묘사된다."고 한다.
[그림] 쿤달리니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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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무케르지 따르면, "쿤달리니는 인간 개체 안에 내재해 있는 초월적인 힘과 같은 것으로 나선형의 잠재적인 우주에너지이다." 그러므로 "각 개인은 이러한 에너지의 현현이고,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우주는 다양한 형태로 끊임없이 자신을 드러내 놓는 에너지와 동일한 의식의 결과물들"이라는 것이다. 같은 의미에서 탄트라 성전에서는 "모든 개개인은 이 에너지의 표현이고, 우리들 주변의 물체는 항상 같은 의식이 여러 가지 형태로 표현되는 이러한 의식에서 나왔던 것이다."라고 진술한다.
그러므로 쿤달리니는 인간안에 놓여진 근원적 신성이며, 진정한 자아이며, 신성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요기들의 목표이다.
게란다본집(Gherada Samhita, 제16권)은 이점을 명확하게 말해주고 있다.
물다라다(Muladhara)에는 쿤달리니가 또아리를 틀고 앉은 뱀처럼 쉬고 있다. 이 본래의 자아는 그곳에서 화염처럼 타오르고 있다. 이렇게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빛이 명징한 브라만(Brahman)과 동일한 것이라는 바를 체험하는 과정을 초월적인 명상이라 한다.
탄트라를 비롯한 요기들의 문헌에 따르면 인간신화의 실재적인 진전은 잠재된 쿤달리니의 각성으로부터 시작된다.
즉,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마치 뱀처럼 감겨져 있는 쿤달리니 에너지를 깨우는 사람만이 진정한 해방을 얻을 것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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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타요가-프라디피카, 제3장, 제108권.
[그림] 보존의 신 "비쉬누", 그는 우주불멸의 힘 "쿤달리니"와 완전합일된 신성이다. 그림은 신성 비쉬누의 근원과 일치하는 "쿤달리니" 곧 "뱀"과의 근원적인 일치성을 상징하고 있다. 비쉬누는 쿤달리니 각성을 통해 도달해야 할 요기들의 완전한 목표이며, 역사 속에서 화신(크리슈나)하여 요가의 비의를 전수한 자로 신앙된다.
쿤달리니의 실재
쿤달리니는 인도철학과 힌두경전, 요가수행과 그 사상체계의 근간을 이루는 요체이다. 그러므로 쿤달리니는 동양신비주의 영성의 태반이며 뉴에이지영성의 모티브인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과연 쿤달리니는 인간의 육체안에 실재하는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실재한다면 어떻게 쿤달리니의 실재성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가 대두된다.
쿤달리니는 신체적인 기관이 아니므로 일반적 감각에 의하여 식별되거나 감지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생리학적, 정신의학적, 또는 어떤 과학적 형태로도 설명되어질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쿤달리니는 동양의 신비가들과 뉴에이저들에게 있어서 확고한 영성의 토대로 확인되고 있다. 그리고 쿤달리니의 내재적 실존에 대한 뉴에이저들의 확신의 근거는 주로 요가의 비의를 다룬 힌두교의 베다와 우파니샤드, 탄트라 등 고대 경전과 유사문헌 그리고 쿤달리니 각성에 근거한 신비적 경험에 근거한다.
본고에서는 쿤달리니의 실재성에 대한 기초로서 고대경전 및 문헌과 신비주의자들의 경험적 전승에 관하여 고찰하기로 한다.
1. 고대경전 및 문헌
먼저, 쿤달리니 실재에 관한 지식과 비의적 수행방법은 힌두교의 고대 경전과 요가문헌 등에 나타난 기록에 의존한다. 이는 힌두교의 역사적 발전 과정과 불가분리의 관련성을 갖게 된다. 채근식에 따르면 힌두교 역사의 발전과정은 7기로 구분된다. 제 1기는 B.C. 2,000년경부터 1,000년까지 천연현상을 신격화한 시대로 대표적인 문헌으로서 [리그베다]가 있다. 제 2기는 B.C. 1,000~500년에 이르는 브라만교의 전성기로 우주에 대한 철학적 해석을 내린 [우파니샤드]가 저술된 시기이다. 제 3기는 인도철학의 발흥시대로 B.C.500~200년까지로 보수적 경향을 띤 여러 가지 [경서(經書-stura)]가 편찬되고 요가파를 비롯한 네가지 학파가 일어난 시기였다. 제 4기는 불교의 흥왕 시대로 B.C.250년 경부터 기원후 500년까지를 말하며, 제 5기는 A.D.500~1,000년까지 브라만교의 부흥시대였고, 제 6기는 A.D.1,000~1,500까지 힌두교의 재건시기로 여러 종파가 일어나 병립하였으며, 제 7기는 A.D.1,500년부터 현재까지의 시기이다.
아지트 무케르지는 8세경에 이르러 힌두교의 정통성을 계승한 밀교경전(密敎經典)인 탄트라(Tantra)가 대중화되었다고 한다. 탄트라는 진리의 천명이나 철학적 교리서라기보다는 깨달음을 향한 수행방식이고 세계에 대한 일종의 태도이다. 탄트라는 인도의 아리안계에 근원을 둔 고대 인도 전통의 중심일 뿐아니라, 인도철학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채근식에 의한 인도종교발전사적 구분에 따르면, 탄트라가 출현한 시기는 종교사적으로 힌두종교의 부흥기인 제 5기로 볼 수 있다. 탄트라의 가르침들은 브라만교의 성전인 베다문학과 밀접한 관계가 있고, 의례에 있어서 베다의 행법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 많이 발견된다. 한편 탄트라 형식의 발전과정 속에서 우파니샤드와 요가로부터 사상적 영향을 받았으며, 8세기에서 10세기에 이르러 완전하게 전개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아지트 무케르지는 탄트라 행법(行法)은 힌두교와 불교의 문헌인 성전(聖典)이 완성되기 이전부터 존재했으며, 방대한 수에 이르지만 저자가 없기 때문에 신이 썼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고 한다.
탄트라 성전에 의하면 모든 개개인은 잠자고 있는 우주에너지인 "쿤달리니"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탄트라 행자가 자아의 각성과정에서의 최종목적은 육체 속에 쿤달리니의 에너지를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몸을 사리고 잠자고 있는 쿤달리니 삭티라는 우주력은 인간의 육체안에 깃들어 있는 최고의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2. 신비주의자들의 경험적 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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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고대종교의 경전과 탄트라 문헌에서 뿐만아니라, 힌두교의 구루들과 뉴에이지운동의 전형적인 신비가들은 그들의 생애가운데 일어난 쿤달리니각성에 관한 경험적 진술들을 저서를 통하여 기록으로 남겨왔다. 고피 크리슈나에 따르면 쿤달리니 각성은 모든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잠재된 사건이며, 다가오는 세기의 불확실성을 극복할 수 있는 인류의 보편적 희망이다. 본고에서는 뉴에이저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신비가들의 저서를 인물별로 다루기로 한다.
가. 크리슈나무르티(1895- ?)
지두 크리슈 나무르티는 1895년 인도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영혼의 스승, 이 시대의 대표적인 지성, 깨달은 자, 혹은 그를 추종했던 무리들에게는 세상을 구원할 메시야로 불려지기도 하였다.
그는 어린시절부터 1875년 헬레나 페트로바 블라바츠키에 의해 창립된 신지학회의 2대회장인 애니벤산트와 동역자 리드비터에 의해 세계의 스승인 마이트레야가 들어와서 살게될 대리육체로 선택되어 각별한 보호와 영적 수련을 거치게 된다. 28살 되던 해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 신비한 체험 이후 쿤달리니의 각성에 의한 이상한 과정에 돌입하게 된다. 그 이후 그는 수년에 걸쳐서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설명할 수 없는 이상증세와 고통에 시달리게 되는데, 그의 전기를 집필한 메리 루틴스에 따르면 그의 고통은 쿤달리니 각성에 의한 것으로서 주로 척추에 집중된 것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나. 고피 크리슈나(Gopi Krishu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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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인도의 공무원으로서 평범한 삶을 살아가면서 오랜동안 지속적인 명상 수행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의 생애를 뒤바꾸어버린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것은 명상수행중 척추 끝부분에 기분 좋은 기묘한 감각이 시작됨으로서 비롯되었다. 그 감각은 척추를 타고 차츰 상승하다가 "갑자기 폭포가 쏟아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한다발의 빛줄기가 척수를 통하여 뇌천으로 흘러드는 것이었다."고 쿤달리니 각성의 순간을 회고하고 있다. 그런 후 불안과 고통이 뒤따랐는데 수년동안 고피 크리슈나는 빛의 환영과 심신의 고통을 늘 함께 체험하게 되었다. 그의 경우에 있어서 주목할 만한 것은 아무런 정신적인 준비나 스승의 지도도 없이 쿤달리니가 저절로 상승하였던 경험을 기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 라마 크리슈나(Rama Krishna)
라마 크리슈나는 평생을 신의식의 희열 속에서 살다간, 인도가 낳은 세계적인 대성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여성 구루, 브라흐마니(Brahmani)의 지도를 받아 쿤달리니 요가의 수행법을 따랐는데, 각각의 의례를 올리면서 약속 받았던 성과를 3일내에 성취하였다고 한다. 그는 그의 경험을 깡충깡충 뛰었다 밀어 올려졌다 지그재그로 움직였다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는 쿤달리니의 상승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는데, 훗날 제자들에게 쿤달리니의 다양한 움직임을 물고기 같은, 새 같은, 원숭이 같은 등등으로 설명하였다.
● 쿤달리니각성 : 신성 브라마를 향한 운동
쿤달리니 각성
전항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쿤달리니의 실재성은 고대문헌과 신비주의자들의 경험적 전승에 의해 확인되고 지지되고 있다. 본 단락에서는 쿤달리니 각성에 관한 일련의 원리들을 고찰하기로 한다.
영적신체(Spiritual body)
바바하리다스는 "모든 인간은 자신의 육체 속에 불가시적인 질료와 에너지(쿤달리니, 나디, 챠크라)로 이루어진 또하나의 몸-정묘한 신체-을 갖고 있다고 한다. 브라이트 클레인(Bright Klein)에 따르면, '물리적인 육체 이면에 영적인 신체가 있는데, 영적실체는 "빛의 진동(vibrations of light)에 의해 구성되고 7단계의 서로 다른 구심점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림] 미세신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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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인간의 육체라는 구조에 간직된 우주의 미세한 일면으로서 "미세신(微細身)"이라고도 한다. 미세신 안에는 수많은 에테르 회로가 있는데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아주 고도의 수법으로 구성된 해류도(海流圖)와 같은 모습이라고 한다. 이 회로는 중심의 스쉼나 회로를 중심으로 하여 좌측에 "이다"와 우측에 "핑갈라" 회로가 놓여져 있다. 스쉼나 회로는 에너지 쿤달리니가 눈뜨지 않는 한 하부가 닫혀진 상태이다. 그러므로 요가 수행자는 쿤달리니의 잠자고 있는 힘을 일깨워 그것을 차차 보다 높은 영혼의 중추로 이끌어 냄으로써 방사되는 에너지는 변화하고 승화된다. 그리고 이어서 <사하스라라 챠크라>의 자리인 최고의 정점 브라흐마란다라에서 순수한 의식인 <시바>와 맺어진다. 이것이 <쿤달리니 요가>가 지향하는 바이고 목적이다.
챠크라(Chakra)
"챠크라"는 인간이 영적 진화를 하는데 있어서 꼭 필요한 존재이다. 챠크라는 산스크리트어로 '바퀴(輪)' 또는 '원형'을 뜻하는데, 그것에 관한 묘사는 <우파니샤드>외 많은 고대문헌에 등장한다.
요가난다에 따르면 챠크라는 뇌척수의 비밀스런 중심으로서 신비한 핵의 중심이며, 챠크라의 각성은 요기에게 성스러운 목표이다.
탄트라의 기술(記述)에 의하면 성전에 따라 수에 다소 차이를 보이지만 영혼 중추에는 여섯 개의 주요한 영혼 센터가 있다고 한다.
챠크라는 잠자는 우주에너지 쿤달리니의 상승경로이다.
그러므로 인간안에 내재된 신성 쿤달리니가 각성되면, 인간의 영적신체(spiritual body)에 각인된 7단계의 채널 곧 챠크라를 경유하여 최고의 단계로 상승하게 된다. 각성된 쿤달리니 각성의 유일한 목적은 "인간 속에 내재하는 정신원리인 시바와의 완전한 합일"이다. 이와 같은 합일은 필연적으로 반복되어야 할 윤회와 환생의 수레바퀴를 굴리는 카르마(Karma)의 종속으로부터 해방됨을 의미한다. 마침내, 수행자가 목표에 도달하였을 때 형언할 수 없는 지고의 기쁨 속에서 자아는 숭고한 우주의식과 합체된다고 한다. 이러한 상태는 해탈, 열반, 니르바나, 사마디 등으로 알려져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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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체 내의 챠크라는 7단계의 채널을 형성하고 있다. 즉, 물다라다 챠크라(Muladhara Chakra), 스바디스나타 챠크라(Svadhishtahana Chakra), 마니푸라 챠크라(Manipura), 아나하타 챠크라(Anahata Chakra), 비슈다 챠크라(Vishuddha Chakra), 아즈나 챠크라(Ajna Chakra), 사하스라라 챠크라(Sahasrara Chakra) 등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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챠크라는 정신의 원리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것은 마치 챠크라를 통해서 정신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4차원의 관점에서 이해하도록 하는 것이다. 챠크라에는 많은 경우에 있어서 정신에 대한 직관이 담겨져 있으며, 우주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정신을 상징하고 있다. 그러므로 쿤달리니가 각 단계의 챠크라를 경유하는 동안 하위 센터의 의식은 보다 상위 센터 의식을 위하여 준비되고 변증법적으로 변형되어 최고의 챠크라에 도달한다. 민희식에 따르면 고오타마 붓타의 가르침 속에는 챠크라를 경유하는 쿤달리니 각성으로 인한 깨달음이 내포되어 있다고 한다. 즉, 각 챠크라의 정신원리에 상응하는 가르침을 펼쳤다는 것이다.
또한 각각의 챠크라는 단계적으로 우주의 근본 질료인 지(地), 수(水), 화(火), 풍(風), 공(空)에 상응될 뿐 아니라, 음․색․형․의의(意義)․기능 등의 상징적인 내부관계를 내포하고 있다.
[그림] 수직적 관점에서 조망한 챠크라 이미지. 최하부의 챠크라로부터 마지막 7단계인 정수리까지의 챠크라를 상징한다.
요가(Yoga)
쿤달리니의 각성을 통한 해탈에 도달하기 위해서 고안된 가장 보편적이고 안정적인 기술은 요가(yoga)이다. 하리쉬 요하리(Harihs Johari)는 "인류역사상 변화와 화합을 통한 체계 중 가장 성공적인 결과를 본 것이 바로 '요가(yoga)'이다."라고 기술한다. 즉, 요가는 정신과 의식의 결합상태를 만들어 주는 실제적 방법이요 체계이다. '요가'라는 말은 '유즈(yuj)'라고 하는 산스크리트에서 나온 말로서 '합치기', '보태기', '결합'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총체적 육체의 차원에서 볼 때 이는 개인의식과 우주의식간에 결합을 의미한다.
엘리야데(Mircea Eliade)의 연구에 따르면 "구제(救濟)의 경의로운 방법으로 간주되는 요가의 점차적인 확산은 법률-신학적인 문헌과 <마하바라타 Mahabharata>의 설교품과 종교품에서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인도정신성의 핵심으로서 요가의 득세와 일반대중의 신비로운 신애 사상의 창궐이 동시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주목한다. 즉, "제의적이고 형식화된 브라만 계급의 정통사상에 대한 반동으로 국민의 대다수가 보다 구체적인 종교체험을, 보다 쉽게 가까이 할 수 있고, 보다 친숙하고, 보다 개인적이고 신비적인 신앙을 원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요가 체계의 발전과 대중적 보급은 필연적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요가의 의례들은 제식과 신학을 경멸하면서 인간의 생리적인 토대와 거의 분리되지 않는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자료에 전적으로 입각해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기술한다.
엘리야데에 따르면 "인도가 발견한 가장 위대한 것중에 하나는, 목격자로서의 의식의 발견, 의식의 정신생리학적 구조들과 그러한 구조가 갖는 시제적(時制的)인 조건으로부터 자유로운 의식, 즉, [해탈]한 자의 의식, 자신을 시간성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데 성공하고, 그렇게 해서 불가사의한 자유를 아는 그러한 자의식의 발견이다. 이와 같은 절대적인 자유, 완벽한 자발성의 정복은 모든 인도철학과 신기한 기법들의 목표"라고 기술하면서, "그러나 이 목표는 무엇보다도 요가를 통해서 달성된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요가는 쿤달리니가 경유하는 7개의 챠크라의 문을 여는 최고의 비의적 기술이기 때문이다.
뉴에이지운동에서 명상 및 요가를 강조하는 것은 결국 인간 속에 내재한 무한한 영적인 힘을 강조하고, 그것을 발전시켜 모든 인간이 스스로 신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힌두식 요가법과 현대의 뉴에이지운동에서 다루는 명상 및 요가는 다르다. 힌두교의 요가가 개인적이고 정적이며 고행을 요구하는 반면 뉴에이지 운동에서는 좀더 대중적이고 현대화된 형식의 명상이나 요가를 전하고 있으며, 그것의 과학적인 타당성에 대해서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요가는 인간의 여러 기질에 따라서 수행할 수 있는 다양한 형태가 존재한다. 즉, 명상요가라고도 하는 '라자요가(Raja Yoga)', 실재와 비실제간의 지속적인 분별을 통하여 진정한 지식의 화합을 추구하는 '주나나 요가(Junana Yoga)', 이타적 행위를 통해 해탈을 추구하는 '카르마 요가(Karma Yoga)', 헌신․사랑․복종을 통한 '박티요가(Bhakti Yoga)', 육체적 수련에 의한 '하타요가(Hatha Yoga)'가 있다. 이외에도 하리쉬요하리에 따르면, '탄트라 요가(Tantra Yoga)'는 몸과 마음을 하나로 간주하며 몸을 마음의 원동력으로 여기는 가장 대표적 요가이다. 탄트라요가는 인도철학의 정통을 계승하고 종합하여 대중적으로 발전되어 전개된 것으로서, "인생의 체험임과 동시에 인간이 가지고 태어난 정신적인 힘을 표출해내는 방법이며 체계"인 것이다.
한편, 요가난다는 그의 스승으로부터 전수된 고대요가의 전통적 방법과 체계를 통하여 가장 빠른시간 안에 요가의 목적을 성취할 수 있다고 하는 "크리야요가"를 서구에 소개함으로써 서구인들을 향한 요가의 대중화를 촉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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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파라마한사 요가난다가 취한 크리야 요가의 자세
요가를 통해서 수행자들은 각성된 쿤달리니의 에너지가 신체안에 일곱 개의 에너지센타인 챠크라를 관통하여 최고의 우주의식 브라만과의 합일에 도달하게 된다. 즉, 아트만과 브라마, 개인의식과 우주의식간의 결합이야말로 '요가'라고 규정지어진 체계를 몸소 실천하는 수행자들이 추구하는 목표인 것이다.
그러므로 고피 크리슈나는 요가의 목적에 대해서 말하기를...
사실, 힌두교와 요가의 근본이 되는 신앙은 인간이 살아 있는 동안 열심히 노력하여 초인으로 변신하거나, 진화의 주기를 속히 달성하고 윤회의 바퀴에서 벗어나서 현상세계 저편에 있는 무한 실재의 세계에 안주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고 하였다.
● 쿤달리니영성 : 뉴에이지영성의 실재성
쿤달리니영성
인간안에 내재된 신성 곧 아트만에 대한 믿음과 사상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는 역사적 보편성을 갖는데, 엘리야데에 견해에 따르면 인도의 종교철학과 그 수행체계 속에서 가장 체계화된 모습으로 발견된다. 아지트무케르지는 인도의 브라만의 정통과 종교철학의 요체를 계승한 탄트라(Tantra)가 8세기 경부터 만개하고 급속하게 대중화되었음을 주목하는 동시에 전세계적인 파급이 있었음을 기술하고 있다.
그는 "탄트라의 영향이 인도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문헌에서 보면 탄트라의 가르침은 세계 각지 특히 네팔․티벳․중국․일본․동남아시아 등지에 넓게 퍼진 것을 알 수 있으며 그 영향은 점차 지중해까지도 미쳤던 것 같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수행 방법의 다양한 형태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기공(氣功)'이나 한국의 '선도(仙道)' 또한 그 본질에 있어서 인도의 요가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채근식에 따르면 인간안에 내재된 신성 아트만에 대한 철학적 정의는 종교발달사적으로 제 2기에 해당하는 B.C.1000-500년에 확정된다. 이 시기에 저술된 우파니샤드에는 신(Brama)과 자아(Atman)는 동일하다는 이른바 범아동일론(梵我同一論)을 천명하고 있다. 이후에 나타난 고대인도철학과 수행체계의 정통성을 계승 발전한 "탄트라 요가(Tantra Yoga)는 몸과 마음을 하나로 간주하며 몸을 마음의 원동력으로 여기는" 가장 전형적인 요가체계로 정착되고 대중화되어 세계적으로 파급되게 된다.
쿤달리니영성의 근원은 바로 인간존재 자체로부터 비롯되고 있다.
본고에서는 쿤달리니영성이 보여주는 두가지 주요한 특성을 일별하고자 한다. 쿤달리니의 각성과 실현은 성경적 관점에서 최소한 다음과 같은 영성의 특질을 발견하게 한다. 보편성과 배도성(背道性)이 그것이다.
보편적 영성
요가문헌과 신비가들의 저술에 의하면 쿤달리니는 모든 인간안에 내재하고 있는 실체이다. 쿤달리니의 각성을 통하여 해탈의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요가이지만, 때때로 쿤달리니는 이타적인 헌신과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음악과 같은 순수한 예술적 경험을 통해서 흥기되기도 한다. 이외에도 초월적 환시, 법열상태로의 함몰, 영능자나 영매를 위시하여 천리안, 독심술, 예지력 등의 초능력도 쿤달리니의 각성과 관계가 깊다고 한다. 또한 고피 크리슈나는 쿤달리니는 역사속에 거족을 남겼던 천재들의 천재성이 발휘된 문학, 예술적 측면을 주관하는 부위에서 활성화되기도 한다고 기술한다. 그에 따르면, 쿤달리니는 존재의 수수께끼를 해명하고 초감각적인 것들을 체험하며, 자연계의 숨겨진 힘과 교류하여 초능력을 획득하고자 하는 일련의 소망의 배후에서 작용한다. 즉, 쿤달리니는 이러한 소망의 배후에 잠들어 있으면서 아직 자세히 밝혀지지 않은, 그리고 인간 존재의 심층부에서 자주 그 편린을 보여주며, 인격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는 그러한 힘이다. 더 나아가서 쿤달리니는 세계의 큰 종교들의 창성의 모티브이다. 모든 종교의식이나 예배법, 정신수양법, 밀교의 체계들은 모두가 신성한 것, 초월적인 것과의 통신회로(Communication)를 설정하여 존재의 비밀에 이르는 탐험로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피 크리슈나는 "이들은 모두 같은 근원에서 발생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고대 인도의 철인에 의하면, 이들은 모두 인간 속에 존재하는 특수 장치인 쿤달리니라는 아주 복잡한 기관에서 유래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쿤달리니는 모든 인간안에 내재된 영성의 기반이며, 보편종교의 토양인 것이다. 그러므로 쿤달리니에는 세계종교의 단일성의 전제를 확인하려는 에큐메니칼적인 원리가 함의되어 있다. 이러한 관점은 많은 요기들의 문헌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이단적인 신비주의자들의 기록들 가운데에서 흔하게 발견할 수 있다.
롭상 람파는 탄트라요가의 중요한 의식으로 여겨지는 교합요가에 내포된 신비적 원리가 라마불교 뿐 아니라 타종교권에서도 이미 알려져 있었다고 주장한다. 즉, 쿤달리니는 섹스와 더불어 완전해지는데 기독교의 더 수상한 많은 종파들에 의해 옹호되었을 뿐 아니라, 카톨릭 교회에서 남편가 아내가 성적인 결합을 가져야 한다고 충고할 때는 비교적 진실에 가깝게 말한 것이라고 한다. 반면에 성관계를 가져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종교들은 개개인의 진화와 종족의 진화를 억누르려 노력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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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교합요가는 남성과 여성의 우주적 에너지 곧 시바와 샥티의 연합을 통한 해탈을 모색한다.
요가난다와 카톨릭 수녀 테레제 노이만(Therese Neumann)과의 대화에서 양대종교의 신비가들의 공통분모를 확인하고 있다. 그들은 "서로가 신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들이며, 신(神)은 우주의 생명력(Aum)으로서, 이 보이지 않는 힘은 "장방형 척수의 문을 통해서 인간의 육체 속으로 흘러들어 간다."는 것이다.
요가의 문헌에서 확인된 바와 같이 인간의 육체안에는 우주적 생명력을 수납하는 기관에 대한 인식은 동․서양의 신비가들에게 있어서 공통적이다. 중세 신비가중에서 후대 신비주의자들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던 임마누엘 스위든 볽(Emanuel Swedenborg)은 저서 [천국과 지옥]에서, "인간에게는 동물들이 갖지 못한 극내분(極內分:immost)이라는 것이 있어 극내분에 신성이 흘러 들어와 인간을 신격에까지 앙양시키고 신격과 화합시키는 것이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는, "신성은 가장 직접으로 먼저 여기 유입"한다라고 하였다. 이외에도 초대교회 영지주의자들의 사상과 중세신비가들에 의해 기록된 문헌들 속에서 인간안에 내재된 신성 수납기관에 대한 진술들이 발견되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쿤달리니의 실재와 영성이 시대와 종교, 문화적 양식의 상이성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양태로 알려져온 보편적 특성들을 확인할 수가 있다.
한편, 쿤달리니의 영성은 다원주의적인 현대신학과의 상관성 속에서도 고찰할 수 있을 것이다. 알란 코테스 부퀫(Alan Coates Boquet)은 "그리스도가 오기 전에 말씀을 따라서 살았던 그리스도인들에 관한 Justin Martyr의 사상을 주의깊게 살펴볼 가치가 있다."고 하면서, Justine이 "타종교 안에서 말씀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였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Karl Rahner는, "구원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얻어질 수 있지만 구원은 타종교를 통해서도 도달될 수 있다."고 하여 "익명의 그리스도(Anonymous Chirist)"란 용어를 등장시켰다. John Hick는 "신앙의 우주적 중심이 하나님께 있는 것이지 기독교와 다른 어떤 종교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만 한다."고 역설하면서, "우리는 종교의 실재를 하나님, 알라(Allar), 니르바나(Nirvana) 등으로 부른다... 실재의 진상은 가장 위대한 전통의 심령렌즈를 통하여 지작되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계 종교적 전통안에서 하나님의 다양한 성격은 모두가 올바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라고 주장한다.
이외에도, Raimundo Panikkar, Paul F. Knitter, Hans King 등의 현대신학자들은 다원주의에 관한 신학적 견해를 개진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쿤달리니는 역사속에 나타난 동서양의 신비가들이 추구한 영성의 근원으로서 종교적신학적으로 보편적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배도성(背道性)
살펴본 바와 같이 광범위한 보편성과 다원주의적 견해에도 불구하고, 내재된 신성 쿤달리니의 기반위에서 비롯되는 요가철학과 수행체계는 기독교의 진리체계와 관련하여 피할 수 없는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다. 가장 양자간에 관계에서 주목되는 문제의 요지는 신과 인간에 관한 상실된 접촉점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포스트모던의 세계가 요구하는 다원주의적 종교 이념을 구성하기 위한 동서양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간격의 필연성을 내포하고 있다.
요가철학에 있어서 신은 비인격적 원리이며, 우주의 영이요, 만물의 기반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개체화된 신성의 현현일 뿐아니라 궁극적으로 '인간은 곧 신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신관과 인간관은 성경적 견해에 대한 전면적인 도전이며 전복이다. 성경은 이와 같은 신과 인간개념에 대한 고정된 입장을 견지해 오고 있는데 사도바울은 '배도(背道)'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먼저, 본 단락에서는 배도의 개념을 일별하고 쿤달리니영성에서 나타나는 배도적 특성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1. 배도의 개념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처음으로 '배도'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배도'의 본질과 양상을 간명하게 밝혀주고 있다. 먼저, 배도는 헬라어로 <아포스타시아>이다. 이 단어의 용법에는 종교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데, 그것은 '한때는 자기가 공언했던 입장을 고의적으로 포기하는 행동'으로서 '배반하다'는 의미와 함께 복음에서 떨어져 나와 하나님을 대항하는 악의 세력을 의미한다고 한다.
2. 쿤달리니영성의 배도적 성격
가. 자존적 영성
뉴에이지는 만물의 신성을 믿는 신앙으로부터 인간의 신성을 믿는 특유의 신앙을 이끌어 낸다. 이는 우파니샤드에 나타난 인도종교철학의 정수로서 "브라마(Brama)는 곧 아트만(Atman)이다."라는 범아일여 사상의 반복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김호는 "범신론은 뉴에이지운동의 핵심적인 신념이다."라고 하였다.
즉,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것, 즉 이 세상에 편만한 모든 것이 신이며 명상을 통하여 신과의 합일을 경험함으로써 구원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인간은 본성에 있어서 선하고 신성하게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은 뉴에이지의 기본 교의이다. 구원은 그가 내부에 영적 본성을 보고 자신이 신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데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뉴에이지사고에 따르면 인간은 구원을 위한 매개로서 구원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모든 것 안에 존재하기 때문에 우주 자체와 그 우주안에 있는 모든 것이 신이며, 우리는 신이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정된 인간신화(人間神化)의 귀착지점인 오메가포인트(Omega Point)를 향하여 진화의 도상에 있다고 주장하는 데이샤르댕의 낙관적 진화론에 접목된 뉴에이지 사고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여러종류의 영적인 명상 프로그램 등을 통하여 신과 하나가 됨으로써 완전하고 진정한 신이 되고, 또한 신이 되어가고 있는 과정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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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인도의 삼대신성 가운데 하나인 "비쉬누"의 이미지이다. 머리위에 "코브라"는 인간안에 내재된 잠자는 뱀 "쿤달리니"를 상징한다. 비쉬누에게 있어서 "쿤달리니"는 완전히 실현된 신성을 보여준다. 크리슈나로 화신된 비쉬누는 고대의 현인들에게 요가를 전수하였으며, 해탈을 향한 모든 요기들의 목표인 것이다.
한편, 뉴에이지사상에서 '죄'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단절을 가져오는 죽음과 멸망의 원인이 아니다. '죄'란 단지 우주구조의 일부분이며 자연적인 것이다. 또한 죄는 우주와 조화를 이루는 하나의 세력이다. 데이비드 스팽글러는 "악은 상대적인 것이며", "소위 악의 에너지들은 단지 시간이나 공간에 맞지 않게 사용된, 또는 진화의 욕구들에 어울리지 않게 사용된 에너지들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벤자민 크렘린에 의하면 "물론 악의 세력들도 하나님의 부분이다. 그 세력들은 하나님과 구별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또한, 뉴에이지사상에 있어서 인간과 하나님의 중보자로서 메시야를 요청하는 필연적인 요인인 '죄'는 우주의 내재적 속성일 뿐이며, "오직 하나의 무형적 진리"를 가리는 "마야(Maya)"이다. 요가난다에 따르면 상대성, 대립, 이원성, 역전, 반대의 원리는 구약의 예언자들에 의해 히브리어로 '적'을 뜻하는 사탄으로서 희랍의 경전에서는 디아볼러스(diabolos)로 불렸다. 결국 마야는 모든 인간들로 하여금 카르마의 법칙에 따라서 끊임 없이 굴러가는 환생과 윤회의 순환 속에 영원히 가두어 두는 "우주의 구조적 본성"인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마야의 미궁 속에서 카르마의 법칙에 따라 지속되는 윤회의 과정으로부터의 벗어나기 위한 요청이 대두된다. 뉴에이지사상에 있어서 구원의 시작은 인간이 자신안에 있는 신적본성을 자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신적본성을 일깨움으로서 마야의 미망을 초극하여 카르마의 연쇄고리를 제거할 수 있는 구원하는 모든 원인과 동력원은 오직 인간 자신 안에 있다.
탄트라의 가르침에 따르면, "인간의 육체는 전체로서 분명히 생물로서의 움직임과 심리적인 움직임을 가지고 있으면서 우주의 힘이 자유분방하게 나타나는 하나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우주에 있는 것은 모두가 개개의 육체 속에도 깃들어 있다."
그러므로 요가는 카르마의 구속에서 벗어나 인간본연의 신성이 발휘되어 해탈에 도달하기 위한 최고의 비술로서 인도의 종교철학 뿐만 아니라 뉴에이지사상의 실행에 있어서 중추적 거점을 확보하고 있다. 영생불사와 지고한 해탈에 이르기 위한 모든 잠재력을 육체안에 간직하고 있는 인간을 위한 중보와 구원하는 능력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자기가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면 아무도 인간을 구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즉, 뉴에이지사상에 있어서 "구원은 자기로 말미암는 것"이다. 그러므로 셜리 매클레인(Shirley Maclaine)은 "나는 신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신이다."라고 하였고, 스와미 묵타난다(Swami Muktananda)는 "너 자신에게 무릎을 꿇어라. 너 자신을 경배하고 예배하라. 신은 너 자신처럼 네 안에 거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요가난다는 인간이 도달해야 할 최고천(最高天, Empyean: 신들이 사는 세계)의 중심은 "바로 내 심장의 직관적 인식의 일점"이라 하였다. 결국 이러한 표현들은 인간성에 도달될 수 있는 '자존성'의 극치라고 볼 수 있다.
나. 적그리스도 모티브
인간의 본래적 신성을 주장하는 뉴에이지사상은 필연적으로 기독교의 중추적 교리와 충돌을 야기한다. 살펴본바와 같이 인간의 신성함에 대한 주장은, 인죄론(人罪論)과 충돌할 뿐 아니라 기독론(基督論)과의 근본적인 불일치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국면은 뉴에이지운동의 선구적 사상가들과 요기들의 문헌들 속에서 보편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기독교와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고 오히려 극단적인 대립의 양상을 띠고 있는 뉴에이지 운동의 지도자들이 그들의 사상을 설명할 때 성경을 많이 이용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매우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뉴에이지 사상가들은 초대교회 이단이었던 영지주의와 유사한 입장을 보이면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뉴에이지의 공격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독특한 주장에 집중"되는 것이다.
각별히 요가난다의 스승 유크테스와는 나사로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요한복음 11장의 기사를 인용하면서 다음 본문에 대한 주석적 견해를 기술하고 있다.
(요11:4)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함이라 하시더라
여기서 유크테스와는 예수가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르고 있다고 하면서, "물론 그가 하나님과의 진정한 합일을 이룬 것은 분명하지만, 여기서 그가 이러한 표현을 사용한 것은 매우 심오한 비인격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란, 인간 속에 실현된 그리스도 내지 신성 의식을 말한다."고 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을 정면으로 부인하고 있다. 한편, 베어드 T. 스폴딩(Baird T. Spalding)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지도원리에 의해 창조된 으뜸원리(Lord God)"이며 피조물이다. 또한 하나님은 "존재하는 모든 만물 배후에 있는 비인격적 원리"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있어서 외적인 존재가 아니며 오히려 인간의 상념 작용에 의해서 활동하기 시작하는 힘으로서, 인간의 "내면에서 발출되는 힘" 이외에 다른 무엇이 아니라는 것이다.
뉴에이지 신봉자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며, 참 인간이 아니라 하나의 우주의식 또는 신적 원리이며, 영적으로 상당히 진화된 하나의 모범일 뿐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모든 인간과 같이 "인간이 거쳐야 할 특정한 단계들을 재현해야 했었던 인간"이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부처가 수립한 모범에 의존했다고까지 주장한다. 실제로 로이 아모르는 예수가 인도를 여행하면서 붓다의 가르침을 전수받았으며 예수의 모든 가르침들 속에는 법구경에 나타난 붓다의 가르침이 반복되고 있음을 문헌적 고찰을 통해서 증명하려 하였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모든 생명에 놓여진 하나의 자질, 에너지, 내적 원리"로 보고 있는 뉴에이지사상은 내재된 그리스도의 의식을 구현한 석가, 모하메트, 소크라테스 등과 예수를 인류 역사상 위대한 스승가운데 하나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뉴에이지의 다양한 저술들에 따르면, 예수는 그리스도의 의식을 실현함으로 신과의 합일을 이룬 인간으로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영적 진화를 돕기 위하여 다른 성인들과 같이 활동하고 있음을 공공연하게 언급하고 있다.
한편, 또한 복음주의 연구자들은 이와 같은 뉴에이지운동의 적그리스도적 영성의 모티브가 계시록적 관점에서 종말에 등장할 적그리스도의 출현과 근본적인 관련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신지학회를 중심으로 세계의 단일종교와 정치형태를 지향하면서 세계를 구원할 그리스도의 출현을 시도하는 움직임을 주목하고 있다. 실제로 신지학회는 1926년 미국에서 크리슈나무르티를 "세계의 스승이요 메시야"로서 선포하려고 하였고 , 1982년에는 벤자민 크램(Benjamin Creme)이 이끄는 타라센터에서 뉴욕을 비롯한 전세계 일간지에 "그리스도가 세상에 있다"란 제목으로 전면광고를 싣기도 하였다.
이상과 같은 고찰을 통해서 육체안에 내재된 신성인 '쿤달리니'의 각성과 진화에 의해 실현되는 뉴에이지영성과 사상은 기독론적인 관점에서 적그리스도적 영성의 이론적 구조와 더불어 기독교 종말론적 관점에서 적그리스도의 모티브를 함의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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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간의 육체안에 내재된 우주에너지요 신성의 근원으로서 "쿤달리니"는 적어도 어원적, 형상적 측면에서 뱀과의 근원적인 관련성을 갖고 있다.
먼저, 다양한 문헌은 쿤달리니가 어원적으로 뱀과 관련되어 있음을 밝혀주고 있다.
'쿤달리니(kundalini)'라는 말은 산크리스트어로 '쿤달(kundal)', 즉, '감겨있는'이라는 뜻이다. 감겨진 쿤달리니는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존재하는 여성에너지로 인간에게 뿐만 아니라 우주의 모든 원자에게도 있다고 한다. 탄트라의 문헌에 따르면, 쿤달리니는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마치 뱀처럼 감겨 있다. 누구나 이 샥티를 움직이게 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해방을 얻을 것이다.(하타요가-프라디피카Hathayoga-Pradipika, 제3장, 제108권.)라고 한다.
또한 <요가 쿤달리니 우파니샤드 Yoga Kundalinni Upanishad>(1.82)에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성스러운 힘,
쿤달리니가
갓 피어난 연꽃의 줄기처럼,
빛나고 있네.
뱀처럼 또아리를 틀고 앉아,
그녀의 꼬리를 입에 물고
신체의 중심에
정적이고 아직 활동을 하고 있지 않은 쿤달리니는 척추 기부에 있는 스바얌부 -링가Svayambhu-Linga, 또는 중심축을 둘레로 세 바퀴 반을 나선형으로 감아 꼬리를 입에 물고 있는 뱀으로 상징된다. 쿤달리니 샥티(의식의 힘)가 쭉 뻗어나면, 그녀는 정수리 위까지 상승하여 시바(순수의식)와 결합하는데 척추의 중심을 따라 의식의 잠재력이 자리하고 있는 챠크라, 즉 정신의 중심들을 통과하여 그녀의 본질인 에너지로 현현된다.
동일한 맥락에서 고피 크리슈나는 "쿤달리니란 인체의 회음부에 응축된 우주의 생명 에너지로서 뱀과 같이 똬리를 틀고 잠들어 있는데, 그 뱀의 입에 해당하는 부분이 스쉼나 기도(氣道, 미저골에서 척수를 따라 머리 꼭대기의 의식중추까지 뻗어 있는 모발 형태의 도관(道管))의 입구를 막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롭상 람파에 따르면, 쿤달리니는 동양인들이 "뱀의 불꽃(Serpent Fire)"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바로 "생명 그 자체의 자리"라고 한다. 이것은 "척추 끝에 감겨있는 무한한 힘을 가진 뱀과 같은 것인데, 여러 가지 이유로 얼마동안은 갇힌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뱀의 힘이 깨어나 완전히 조절되기만 하면, 그 사람은 원하는 모든 것을 성취할 수 있는 초인이 된다고 한다.
아지트 무케르지에 따르면, "인도의 힘있는 신들은 종종 동물 형상으로 표현"된다고 한다. 이와 같이 어원적으로 뱀(蛇)을 의미하는 쿤달리니는 실제로 힌두교의 사원과 티벳의 밀교경전과 만다라 像에서 신비철학과 관련하여 뱀의 그림으로 전승되어 왔다. 라자스탄, 데칸, 카슈미르, 네팔, 우타 프레데쉬 등 인도와 주변국에서 발견된 "쿤달리니" 만다라는 물라다라 챠크라 중앙에 감겨진 뱀의 형상으로, 혹은 우주적 힘으로서 뱀을 그렸다. 18세기 파하리 학파의 작품은 우주 에너지인 쿤달리니가 한 몸통에 15개의 머리를 갖고 있는 거대한 뱀의 형상으로 그려졌다. 이 그림에서 거대한 뱀의 품안에서 창조의 의식인 시바가 쉬고 있다.
한편, 뱀은 인도종교미술에서 뿐 아니라, 중국과 극동지역의 불교미술에서도 등장하고 있다. 뱀은 용으로 표현되기도 하는데, 보편적 의미에서 세계의 무의식을 지배하는 우주적인 힘으로서 권력과 영화를 상징하기도 한다.
이상과 같이 어원적, 형상적 측면에서 쿤달리니는 뱀의 모티브와 근원적인 관련성을 확인할 수 있다.
● 기독교 신비주의 이단 : 말씀과 로고스/ 신비주의자 에크하르트, 요한 타우렐 등
기독교 신비주의이단
이제까지 뉴에이저들이 인간안에 내재된 신성의 원천이라고 주장하는 쿤달리니영성을 고찰하였다. 그런데 기독교 역사에서 이단적 영성과 신비사상을 추구했던 인물들의 진술 속에서도 양자간의 동일한 영성의 기반을 추적할 만한 단서들이 발견되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일이다. 즉, 문헌을 통한 고찰은 인간안에 내재된 신성의 근원에 관한 동서양을 포괄하는 유사 진술들을 포착하게 할 뿐 아니라, 하나의 근원에 대한 통일적인 관념을 목격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고피 크리슈나는 "모든 종교의식이나 예배법, 정신 수양법, 밀교의 체계들은 모두가 신성한 것, 초월적인 것과의 통신회로를 설정하여 존재의 비밀에 이르는 탐험로를 제공"하고 있으며, "같은 근원에서 발생"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고대 인도 철인에 의하면, 이들은 모두 인간 속에 존재하는 특수 장치인 쿤달리니라는 아주 복잡한 기관에서 유래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미, 인도종교철학과 요가체계의 견지에서 인간안에 내재된 신성에 관하여 상당한 언급을 하였음으로 본항에서는 기독교 문헌과 신비주의자들의 저서들에 나타난 유사 관념에 관하여 고찰할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 역사 속에서 알려진 문헌들의 연원은 초대교회 역사까지 소급되고 있다. 즉, 사도적 신앙고백과 정통성을 계승하는 초대교회와 경쟁하며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위에 세워진 교회의 기초를 공략하였던, 영지주의자들과 다양한 이단의 사상들 속에서 동방의 종교철학이 침투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초대교회에 있어서 대표적인 이단은 그노시스였다. 그노시스는 "지식"이란 헬라어 Gnosis에서 유래하였으며, 지식을 통하여 물질의 속박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또한 그들의 사상은 헬라철학과 동양의 세계관과 기독교의 교리를 절충하여 하나의 혼합적 종교철학을 세우려고 시도한 것이었다. 그들이 중요시 하였던 문제들은 주로 우주의 기원 및 죄악의 기원에 관한 철학적 문제들이었다. 그러므로 인간의 내재된 신성에 대한 체계적 사상들은 명료한 형태로 나타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중세에 이르러 구원의 문제와 관련하여 인간의 내면을 지향하는 신비주의 전통 속에서 근원적 신성에 대한 체계적 언급이 보다 발전적이고 명료하게 나타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본장에서는 중근세 신비주의자들의 사상 가운데 나타난 진술들을 쿤달리니영성과의 상관적 측면에서 조명하고자 한다.
신성의 씨(Divine seed)
역사와 종교를 초월하여 인간안에 내재된 신성의 모티브에 대한 언급은 기독교에 있어서 오랜 역사성을 갖고 있다.
박용규에 따르면 '초대교회의 핵심주제'였을 뿐아니라, 헬라철학과 2세기 이단을 이해하는 열쇠는 '로고스(logos)'이다. 저스틴과 타티안은 물론 아테나고라서, 아리스티데스, 데오필루수 등 거의 모든 변증가들은 "헬라철학과 유대주의를 대립적인 관계로 보지 않고, 오히려 로고스를 통해 둘을 조화시킬 수 있는 것"으로 보았을 뿐 아니라, "기독교와 헬라철학을 연계시켰고 모세와 플라톤을 꿰뚫었으며 예루살렘과 아테네를 연결"하였다.
그러나 로고스에 대한 이해는 변증가들과 속사들 사이에서 신학적 분열과 갈등의 원인이기도 하였다. 즉, 저스틴과 오리겐, 클레멘트는 헬라철학과 기독교진리를 연계시켜 기독교의 진리를 철학화하려는 시도를 보여주었던 반면에, 터튤리안은 "헬라철학이야 말로 이단의 원천"이라고 못 박았다.
거기에는 양자간에 '로고스'에 대한 상이한 입장과 해석의 차이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방신학의 기초를 마련한 터튤리안은 당대의 철학에 대하여 부정적이었다. 특별히 그가 당대의 철학 학파와 플라톤 주의를 강하게 거부하였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반기독교적'이고 "철학과 이단의 연계의혹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는 철학을 가르켜 '사탄의 시녀'로 간주하였다.
반면에, 헬라철학과 유대인의 율법의 원천이 모두 로고스이기 때문에 둘의 조화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믿었던 저스틴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로고스의 씨앗이 모든 인간의 마음 속에 뿌려짐으로써 인간은 진리에 대한 반응력을 소유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에 근거해서 저스틴은, "이 로고를 따라 산 사람들은 비록 저들이 하나님 없는 자들이라고 불리웠을지라도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다. 헬라인들 중에 소크라테스, 헤라클라투스 등이 그러하였고, 야만인들 사이에 아브라함이나 아나니아, 아지리아나 미사엘, 엘리야 및 이제 그 이름들을 다 열거할 자리가 없을 정도의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였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저스틴의 견해 속에서 오늘날 다원주의 신학의 모티브를 발견할 수 있으며, 칼 라너(Karl Rahner)가 주장한 '익명의 그리스도'의 원형을 찾아볼 수 있다. 한편, 로마카톨릭은 제2차 바티칸 공회를 통해, "타종교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이나 기독교를 알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을 진실하게 추구하고 그 은혜에 감동되고 양심을 통해 자신들에게 알려진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서 영원한 구원에 도달할 수 있다."고 선언함으로써,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하는 교리를 포기하였다."
저스틴 계열의 변증가들과 현대의 다원주의자들 그리고 카톨릭의 신학적 경향은 로고스를 기독교와 헬라철학을 포함한 타종교 간의 신학적 연속성과 영성의 기반으로 간주하려는 것이다. 이는 뉴에이지사상에서 범신론적 견지에서 모든 인간안에 내재된 신성에 대한 주장과 동일한 맥락을 반영하고 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인간의 마음 속에는 "종교의 씨앗"을 심어 주셨을 뿐 아니라 자기를 계시하셨다고 하였다. 그러나 J. H. 바빙크에 따르면,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비를 보이신 참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데서 야기된 공백을 채우려고 하는 모호한 존재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하신 신지식은 죄로 인해 부패하고 본래적 기능을 상실한 이성과 자유의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존재를 도저히 깨달아 알 수가 없는" 상태로 부패하였기 때문이다.
고찰한 바와 같이 초대교회의 최대의 주제였던 '로고스'와 칼빈이 언급한 '신성의 씨앗'에 대한 다각적인 견해들은 만물의 근본으로서, 그리고 인간안에 내재된 신성으로부터 비롯되고 있다.
그리고 스토이즘으로 대표되는 헬라철학과 초대교회의 교부들과 속사도, 변증가들 뿐 아니라 기독교 이단들에게까지 모든 논쟁의 핵심이었던 '로고스'는 중세에 들어와서 신비주의자들을 통하여 실제적이고 경험적인 영성의 근원으로 표현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중세에 등장하여 기독교 권역에서 유행했던 신비주의자들의 사상과 영성을 뉴에이지영성과의 비교적 관점에서 다루기로 한다.
1. 신비주의 정의
일상적인 용법에 있어서 신비주의라는 말은 그 함축적인 의미가 매우 불명료한 단어이다. "뮈스테리온(misterion)"이란 용어는 그것이 최초로 사용되면서부터 순수하게 종교적인 희랍어 어휘였던 것으로 신비한 의식들 또는 기구들을 의미하거나 그것들과 연관된 가르침을 의미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 용어는 시간이 흐르면서 사용의 범위가 광범위해지고 일반화되어 반드시 종교적인 것이 아닐지라도 모든 종류의 비밀을 의미하게 되었다. 최근 이 단어는 그 성격상 서로 다른 의미를 갖는 두개의 서로 다른 독일어 단어들의 동의어로 사용되게 되었다. 즉 'Mustizosmas'는 초자연 숭배나 신지학적 추구나 또는 심령 연구의 강신술적 적용 등을 의미한다. 또한 "Mystik"는 신과 인간 사이의 직접적인 접촉이나 관계를 직접 경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서 '신비주의'라는 단어는 첫째, 일반적으로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직접 경험하는 것과 둘째, 절대적인 실체(Absolute Reality), 즉 하나님과 영혼의 가능한 연합에 대한 신학적-형이상학적 이론을 모두 포괄하는 것으로 사용되어 왔다.
한편, 신비주의자는 주장하기를 사람의 심령은 하나님과 교통할 수가 있는데 그와 같은 교통에 있어서 하나님은 객관적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주관적인 경험의 내용이 된다고 한다.
신비주의자가 이와 같은 주장을 함에 있어서 몇가지 내용적으로 뒷받침을 해주는 주장들을 하고 있다.
첫째로, 신비주의는 주장하기를 심령은 최고의 실재에 대하여 이지적으로 이해 못하는 것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가 있으며 인간의 이성으로부터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계시적이며 은밀한 지식들을 수납하며 터득할 수 있다고 한다.
둘째, "신비주의는 심령은 하나님을 알기 위하여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함에 있어야 한다고 한다. 인간의 심령에는 '신적인 불꽃'이 있어서 '영원한 불길'인 하나님과의 재결합을 모색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마음의 꼭대기에는 신령한 불꽃이 있다."는 것이다.
셋째로, 신비주의는 심령은 자기 정화를 통해서만 하나님에 대하여 직접적인 지식을 소유할 수 있다고 말한다.
끝으로 신비주의는 심령이 하나님을 찾아 가는 순례길에 있어서 그 안내자는 사랑이라고 역설한다.
신비주의자는 본성적으로 영지주의자로서 현세적이고 지상적인 지식을 초월하여 지식의 극치로서의 하나님의 지식을 소유하며 그와 같은 지식을 묵상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신비주의는 종교의 핵심은 외면적인 세계에서 인간의 영성을 개발하는 일이며 그와 같은 일은 내면적인 세계에 대하여 무관심하거나 그것을 부정하는 길을 택해야만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신비주의 사상 중에서 또 다른 중요한 한 가지를 거론한다면 그것은 궁극적인 실재와 연합의 모색이라고 할 수 있다.
2. 신비주의 이단
궁극적인 실재와의 연합에 있어서 특히 전통적인 기독교 신비주의는 다른 종교들에서 볼 수 있는 신비주의와는 달리 궁극적인 실재를 인간과 우주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하며, 그 연합은 사랑과 의지력이 연합되어 사람이 궁극적인 실재 안에 흡수되지 않고 오히려 조물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이루어지는 연합으로 사료한다.
그러나 중세로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신비주의자들 가운데에서는 인간안에 내재하는 '내면의 빛', '영혼의 불꽃'이라 불리는 근원적 신성과의 합일을 지향하던 인물들이 발견된다. 그들의 사상과 영성은 당대 뿐 아니라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추종하는 사람들에게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art. 1260-1327)
헤겔에 의해서 '독일 철학의 아버지'로, 중세학자 크루엘에 의해서는 '독일 강단 역사상 가장 심오한 사상을 담은 설교가'로서 격찬되었던 에크르트는 이단성의 문제로 교황 22세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된 인물이었다.
이단에 대한 혐의는 하나님과의 연합의 추구가 범신론적 경향으로 탈선되었기 때문이다. 박아론은 그가 "인격적인 형태로 나타난 하나님과 그 배후에 있어서 그 기초가 된 신성과를 구별한다."고 한다. 즉 "후자는 우리의 지식을 초월하여 무명의 허무한 영원한 지금이라"는 것이다. 에크하르트는 "하나님은 모든 것이며, 모든 것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 자신(Gottheit)"과 연합되기를 원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하나님 본성'에 대하여 집착하면서 스스로를 '신도취자'라고 불렀다.
에크하르트에 따르면,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매개적인 무엇이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불꽃(Seelen Funkelein)으로서, 이 영혼의 불꽃은 하나님의 본성 그 자체에 참여할 수 없고 또 하나님은 이 영혼의 불꽃 안으로 들어오셔서 그의 모든 영광으로서 광채와 열기를 발휘하신다."고 하였다.
나. 요한타우렐(Johann Tauler, 1300-1361)
중세 독일 신비주의자 타우렐은 소위 "하나님의 벗들"(Gottes freunde)이라는 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이었고, 에크하르트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그는 성령의 역사를 강조할 뿐 아니라, '단순한 신앙(einfaltiger Glaube)'신앙을 강조하였다.
한편, 타우렐은 사람 내부에는 "내적 광명"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벗들"을 조명하여 하나님과의 신령한 연합을 경험하며 성취하게 한다고 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께로 가는 길은 자기 부정의 길이었다.
다. 죠지폭스(George Fox ; 1624-1690)
죠지폭스는 초기 경건주의 지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퀘이커파(The Quakers)를 창시한 인물이다. 그는 당시 형식적인 종교성과 멋대로 풀어진 방종과 맞서 그의 투쟁을 시작하였다. 즉 그는 찬송, 예배 순서, 설교, 성례, 신앙고백, 목회자 등은 모두 성령의 자유를 훼방하는 인간들의 발명품에 불과하였다고 보았다. 죠지 폭스가 이러한 생명력과 진정성이 결여된 기성종교를 대항하여 주장한 것은 '내면의 빛(inner light)'이었다. 이는 모든 인간들 가운데 존재하는 씨앗이며, 우리가 하나님을 발견하기 위해서 반드시 따라야 하는 진정한 길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인간의 전적 타락을 주장하는 칼빈주의자들을 견해를 거부하였다. 즉, "청교도들은 죄를 마음 속에서 찾으려고 하였으나 그들은 죄 대신 하나님을 직접 찾는다고" 하였다. 나아가서 죠지폭스는, "아무리 희미할지라도 모든 인간들 속에는 내면의 빛이 존재하며, 이러한 빛의 덕분으로 기독교 신자들 뿐만 아니라 이교도들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였다.
죠지폭스는 말하기를, "나는 사람들을 그 내부의 빛, 영, 은혜로 인도할 수 있어서 기뻤다. 이들을 통해 사람들은 그들의 구원과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들을 모든 진리로 인도하실 그 성스러운 영께서는 내가 분명히 알거니와 아무도 속이지 않으신다."고 하였다.
라. 임마누엘 스위든 볽
(Emmanuel Swedenborg ; 1688-1772)
스위든 볽은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철학자요, 과학을 섭렵한 위대한 신비주의자로 알려졌다. 후대에 영향을 미친 그의 가르침들은 55세때 영계를 체험하고 난 이후부터 시작된다. 영계체험 이후 영계에 관한 저서들을 남겼는데, 가장 잘 알려진 저서로는 '영육간의 교제(The Intercourse between the Soul and the Body)'와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이 있다.
그는 인간의 '원죄(전적타락)를 부인'하고 신성이 유입되는 '극내분(極內分 : immost)'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폭스의 가르침'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스위든 볽은 "인간에게는 동물이 갖지 못한 극내분이라는 것이 있어 이 극내분에 신성이 흘러 들어와 인간을 신격에까지 앙양시키고 신격과 화합시키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인간이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 유입된 신성의 원리에 따라 살아갈 때 구원에 이른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스위든 볽에 따르면 믿음을 간직한 기독교인일지라도 신적원리에 따라 살지 않았다면 천국의 문에 들어갈 수 없고, 반면에 예수를 믿지 않는 이교도일지라도 신적원리에 따라 살아간 자는 천국에서 받아들여진다고 진술하고 있다.
● 성경적 통찰 : 성경을 통해 바라보는 뉴에이지 영성의 본질
성경적 통찰과 비판
'쿤달리니'는 인도종교철학사상과 동양의 신비가들의 영성의 기초이다. 또한 '쿤달리니'는 동서양의 종교와 신비가들을 이어주는 보편적 영성의 기반으로서, 기독교역사 속에 나타났던 이단적 영성과 근원적인 관련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일별하였다. 그러나 '쿤달리니'의 각성으로 비롯되는 영성과 사상은 신관과 세계관, 인간관과 구원관 등에 있어서 기독교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이질적이며 반기독교적이다.
기독교는 각별히 금세기에 이르러 범세계적으로 21세기의 '영성'의 모티브인 쿤달리니영성을 광범위하게 직면하고 있다. 뉴에이지운동이 표방하는 모든 차원의 활동과 전개의 배후에 보이지 않는 영성의 토대로서 '쿤달리니'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인간안에 내재된 신성으로 간주되는 쿤달리니영성은 인죄론과 기독론적 관점에서 기독교의 진리체계와 영원한 불일치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쿤달리니영성에 대한 기독교의 입장을 개진하는 것은 시대적인 요청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개혁적 복음주의 입장에서 성경적으로 쿤달리니영성을 어떻게 접근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살펴보고, 특히 기독교 종말론적 관점에서 쿤달리니영성의 배도적 성격을 분석 비판하기로 한다.
성경적 접근의 기초
내재된 신성으로서 반기독교적 인간관을 구성하는 '쿤달리니'의 실재성에 대한 성경적 접근을 위해서는 '죄'와 '적그리스도'에 대한 성경적 개념의 정리가 요구된다. 이는 뉴에이지사상이 중추적으로 기독교의 기독론과 인죄론을 파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1. 죄(罪)
가. 인죄론(人罪論)
뉴에이지사상은 인간안에 근원적 신성을 주장하기 때문에,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선한 본성을 갖는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죄'에 대한 성경적 개념을 부인할 뿐 아니라 전혀 다른 개념을 갖고 있다. 즉, '죄'란 인간을 멸망과 죽음 앞에 직면하게 하는 원인이 아니다. 뉴에이지사고에 있어서 '죄'란 우주의 원시적 본성으로서 우주구조의 일부분이며 벤자민 크레임에 따르면 '하느님의 한 부분'이다. 또한 세계와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고통과 악의 문제는 비실재적인 물질세계에 적용되는 업(業)의 원리(Karma)로부터 야기된다. 그러므로 이생에서의 삶은 전생의 삶에 대한 보상적 삶이며 보다 나은 환생을 위한 준비의 기간이다.
한편, 뉴에이지사상에 있어서 인간의 구원은 누구든지 인간안에 내재된 신성한 본성 '아트만(Atman)'을 자각함으로써 카르마의 수레바퀴를 멈추고 비실재의 허상인 '마야(Maya)'의 세계를 초극함로서 실현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뉴에이지사상에는 근원적으로 인간의 죄로 인해 요청되는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으며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을 요청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의 단절을 가져온 인간의 원죄를 계시할 뿐 아니라 심판과 사망으로 정죄한다. 사도 바울에 따르면 '죄'는 보편적인 것이며 아무도 예외를 갖지 못한다(롬3:23).
루이스 벌콕은 '최초의 죄(Original Sin)'는 하나님의 금령에 대한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비롯되었다고 하였다. 최초의 죄에는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전인격적(知精意) 거역이 내포되어 있다.
또한 선과 악 사이에는 중립상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죄는 절대적 특질을 갖는다는 것이 성서의 명백한 교훈이다.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든지 원죄가 있는데, 이것은 "인간 생명을 더럽히는 모든 본죄의 내적근원"이 될 뿐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된 선이 조금도 없는 전적부패(Total depravity)와 전적무능력(Total inability)을 조장한다.
소요리문답은 이와 같은 진리를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다.
"사람이 타락한 지위에서 죄되는 것은 아담의 최초의 범죄에 대한 죄책과 원시의가 없는 것과 온 성품이 부패한 것인데, 이것은 보통 원죄라 하는 것이요, 아울러 이 죄로 말미암아 나오는 모든 죄이다."
죄로부터의 개인적 구속 또는 구원교리는 가장 오래된 일신론 종교들인 유대교와 기독교의 핵심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죄는 보편적인 것이며, "모든 인간은 정죄하에 있으며, 그러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속죄를 필요로 한다."고 선언한다.
나. 죄의 실재성
성경은 인간의 마음 속에 실재하는 죄의 본질을 계시하고 있다. 즉, "죄는 외부적 행위로만 되어있지 않다는 것이다." 벌콕은 "죄는 영혼의 한 기능 속에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에 머문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죄란 외부적 행위일 뿐 아니라 역시 죄적 습관과 마음의 죄적 상태 속에서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강조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였다.
한편, 죄의 전가에 대한 주제는 기독교 역사상 수많은 논쟁을 야기시켜 왔다. 그것은 그레샴 메이첸에 표현에 의하면, "모든 인간이 아담의 죄에 연루된 정확한 방식"에 관한 것이다. 즉, 아담의 죄와 그 후손의 죄와의 관계에 관한 설명이라고 볼 수 있다.
존 머레이에 따르면 이 역사적 논쟁은 인간본성이 아담안에서 산술적으로도, 종족적으로도 하나였다고 주장하는 실재론과, 아담은 하나님이 지정하여 언약하신 전인류의 원조이며 대표자라는 견해로 양립된다. 실재론자들은 대표론의 옹호자들이 하나님과 인류의 대표자인 아담 사이에 언약적 관계라는 견지에서, "아담의 혈통적 원조성과 종족적 대표성을 거부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재론과 대표론 모두 "인간 본성이 아담 안에서 더럽혀지고 유전적으로 후손들에게 상속된다."는 관념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표론적 견지에서 죄의 전가가 "영적 영대성에 의해 아담의 범죄가 자연적으로 생식된 모든 후손들에게 넘겨지는 것과 같은 속성의 것"이라는 것이라는 사실은 본 논문의 논지와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즉, 죄는 인간 안에 실재하는 본성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안에 내재된 죄의 본성은 신구약을 관통하는 하나의 주요한 테마이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렘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하였고, 사도 바울에 의하면 (롬3:23) 모든 인간이 죄를 범하였으며, 또한 죄는 마음 속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법을 거역하는 본성이다(롬7:23).
또한 예수는 죄로 인하여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악의 표징들을 폭로하였다.
즉, (마15:18-19)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와 같이 인간의 죄에 대한 성경의 증언과 기독교의 전통적 입장은 명백한 것이다. 그러므로 '죄'를 부인한다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기독교의 전통에 대하여 숙명적인 위치에 서게 된다는 것이다.
이점에 있어서 사도 요한은 명백하게 기록하였다.
(요일1:9-10)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2. 불법의 사람
가. 불법의 비밀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일어날 시대적 표지로서 '배도'를 지목하고 있다.
즉, 주의 날은 '배도하는 일이' 있기까지는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시간적으로 배도가 시작된 이후에 "멸망의 아들"이라고도 불리는 '불법의 사람'이 출현하는데, 여기서 '불법의 사람'은 어떤 사본에서는 '불법'이 '죄'로 바뀌어서 '죄의 사람'으로 묘사되기도 하였다.
이 인물은 "하나님에게 대적하는 죄의 세력을 지도하는 자로서 마지막 때에 등장하리라고 예언된 '적그리스도'와 동일한 인물을 가리킨다(요일2:18)". 그의 인격적 특성은 '자존'하여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칭할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불법의 사람'은 살후2:7절에서 언급되는 '불법의 비밀'과 인과적 상관관계에 놓여져 있다. '불법의 사람'의 출현은 드러나지 않지만 은밀하게 진행되어온 '불법의 비밀'이 공개적으로 표출되는 사건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주장하는 바는, "'불법'의 비밀은 배도가 일어나고 불법의 사람이 나타날 때 비로서 그 정체를 드러내고 활동하게 될 것이며, 그것은 '막는 자'의 능력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법의 비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에 대하여 주석가들 사이에 다양한 논의가 개진되어 왔다. 즉, 여기서 비밀은 '가둔다', '닫는다'는 뜻의 동사 '뮈오'에서 유래되었는데 이 말은 원래 동방의 신비적 종교의 입문식에 사용되어 신비한 능력의 전수행위나 종교적 교리를 지칭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미혹하는 거짓교사들을 내포하고 있으며, "적그리스도의 정신"이며, "그리스도께서 위하는 모든 자들을 대적하는 악의 특별한 형태"이다.
한편, 보스(G. Vos)따르면 바울은 '불법의 사람(죄악의 사람=적그리스도)'을 묘사할 때에 배도와 관련된 바울의 술어들이 다니엘서의 술어들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보수주의 학파에 견해에 따르면 다니엘은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나타날 '적그리스도'의 출현을 예언하고 있다. 다니엘은 종말에 출현할 '적그리스도'가 '말로 지극히 높으신 자를 대적하고',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때와 법을 변개코자' 할 것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적그리스도'가 '때와 법을' 변개할 것이라는 사실은 논지와 관련하여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그렇다면 그가 바꾸려고 하는 '때와 법'은 어떤 것인가?
해톤(Heaton)은 에피파네스가 변개 혹은 폐지시키고자 했던 유대의 종교적 절기와 모세의 율법이라고 하였다. 반면에 칼빈(Calvin), 케일(Keil), 류폴드(Leupold), 영(Young)에 따르면 이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진행되는 역사의 흐름 및 자연적으로 순환하는 계절, 그리고 우주의 운행 질서 및 마음에 심어 놓은 양심의 법을 가리킨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주석가들은 후자의 견해를 취하고 있다.
즉, 델리취는 "때는 원어상 정한 기한이란 뜻으로 하나님께서 창조당시에 정하신 순리적인 시간의 흐름을 의미하며, '법'은 '명령'이나 '규례', '포고령' 등의 문자적 의미로서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모든 피조물의 생명과 활동의 근간이 되는 원리와 법칙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또한 '때와 법'의 변경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영역에 속한 것인 바, 이것을 변경시키고자 하는 것은 곧 하나님과 자신을 동등한 위치에 놓으려는 적그리스도의 극악한 교만을 드러내는 것이다.
한편, 뉴에이지사상의 모티브인 쿤달리니영성의 고찰해 볼 때 '때와 법'의 변개는 보다 확고한 의미가 부연될 수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즉, 기독교 종말론적 관점에서 '법'이란 모든 인류를 죄로부터 돌이키게 하시고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을 얻도록 제정하신 복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쿤달리니 모티브에 점착된 뉴에이지 사상은 인간의 본래적 신성을 주장하고 인간신화를 표방함으로서 복음을 거부하고 하나님 구원의 섭리를 반역하고 있다.
또한 '때'란 죄로 말미암아 개개의 인간 뿐아니라 지으신 모든 만물에 대한 심판의 시기로서, 기독교 종말론은 성경의 시종을 관통하는 중추적인 주제이다. 종말의 모티브는 다니엘, 이사야, 에스겔, 요엘, 말라기 등 구약의 정경들에서 뿐만 아니라 베드로, 바울, 요한 등을 비롯한 신약의 사도들의 서신들 속에서 광범위하게 발견되고 있으며, 예수그리스도 역시 종말의 도래를 명백하게 가르쳤다.
그러나 뉴에이지사상은 데이야르 샤르댕과 마릴린 퍼거슨이 주장하는 낙관적인 진화론의 견지에서 세계의 종말과 심판을 부정하고 진화된 인간들에 의한 새시대의 도래를 주장하고 있다.
나. 뱀의 영성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뱀처럼 몸안에 감겨져 있는 쿤달리니의 영성은 어원적, 형상적 견지에서 '뱀의 모티브'를 간직하고 있다.
인도종교에 있어서 뱀은 근원적인 영성의 상징으로 표현된다. 인도미술 만다라와 신비종교 미술에서 쿤달리니는 신성한 우주적 힘을 상징하는 동물로 여겨진다. 또한 뱀과 용은 티벳과 중국, 일본, 한국 등 아시아 종교미술의 중요한 테마이며, 각 민족의 근원설화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존재이다.
쿤달리니에 근거한 요가체계에 따르면, 쿤달리니가 각성되면 인체내의 일곱 개의 에너지 센터인 챠크라를 관통하여 정수리 부분에 위치한 최고의 챠크라 곧 시바가 머무는 곳까지 상승하여 합일을 이룬다고 한다. 쿤달리니 샥티와 시바의 합일은 아트만이 브라만에 귀의하는 것으로서 해탈을 의미한다. 그것은 모든 요기들이 지향하는 유일한 목적이며 구원의 정점이다.
[그림] 쿤달리니는 "뱀"의 형상이며 "불타는 뱀-serpent fire"로 불리워지며 "코브라"로 상징된다. 비쉬누의 이미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신성의 구현은 완전하게 만개된 뱀의 영상과 일치한다. 피조물이 신이 된다고 하는 신비영성의 중심에 놓여진 "뱀"의 정체에 관한 계시는 성경에 있어서 "죄"의 기원을 의미한다.
그러나 성경은 뱀에 관하여 전혀 다른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
뱀은 히브리어로 '나하쉬'란 뜻에서 파생된 단어로 속삭이듯 낼름거리는 혀, 그리고 지나갈 때 쉿쉿 소리를 내는 뱀의 특성이 반영된 말이다(Gesenius, Furst, Bush). 성경에 따르면 뱀은 신성의 근원으로서 해탈과 불사에 이르게 하는 모티브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으로 하여금 사망에 이르도록 하는 죄의 조장자이다.
성경에 따르면 죄는 첫사람 아담이 범죄하기 이전부터 그 기원을 갖고 있었으며, 뱀은 죄의 기원을 담지하고 있는 상징성과 동시에 실존적 의미를 갖는다.
즉, 성경은 인간을 최초의 범죄로 유도한 존재가 있음을 계시한다(창3:1-3). 벌콕은 직접적인 표현으로 "인간의 타락은 사람의 마음 속에 불신임과 불신앙의 씨를 심은 뱀의 유혹으로 말미암아 되어졌다."고 하였다. 뱀(serpent)은 원죄의 모티브를 담고 있다.
여자의 후손과 원수(창3:15)가 되고 영원한 멸망의 불못에 던져질 심판(계20:10)으로 정죄된 뱀은 창세로부터 우주와 인류 전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인류를 충동하여 배도와 멸망으로 이끄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사도요한에 따르면 뱀은, 용(龍)이며 옛뱀이며 마귀이며 사단이다(계20:2).
뉴에이지사상은 예수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부인하면서 인격적인 그리스도를 배격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만유안에 내재할 뿐 아니라 인간의 내재된 신성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재된 그리스도 곧 신성한 힘이 바로 쿤달리니이다. 그러므로 뉴에이지영성은 내면의 잠자는 뱀의 영성 쿤달리니의 현현이다.
그러나 사도요한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요한일4:2-3])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그러므로 성경적 관점에서 뱀은 죄의 동인을 담지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진리와 그리스도의 복음과 성도의 길을 대적하는 역사적 실존으로서 용마귀사탄으로 불리우는 악의 실체와 동격적인 존재로 규정되고 있다.
다. 적그리스도
적그리스도(Antichrist)의 의미는 예수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 '거짓 그리스도', 등인데 재림하실 그리스도에게 마침내 영원히 정복당할 그리스도의 적대자이다.
박형룡에 따르면 적그리스도의 출현은 그리스도의 재림전에 나타날 5대 표지중에 하나이다. 교회에 반항하여 발전하는 악의 세력은 마침내 말세에 배도와 대환란을 일으키는 적그리스도로 인격화하여 나타날 것이다.
적그리스도에 대한 특별한 언급은 요한 서신서에서 나타나는데, 요한은 적그리스도에 대한 일정한 교리적 표준을 제시하고 있다.
요한에 따르면 적그리스도의 출현은 임박한 종말의 표지이다(요일2:18). 또한 '적그리스도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한 자는 '아버지와 아들'도 부인하며,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 할 것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다.
요한의 정의에 따르면, '적그리스도는 우선 하나의 신학적 개념이자 또한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것과 관련되어있으며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이단적인 견해와도 관계가 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또한 요한이 비록 적그리스도란 명칭을 최초로 사용하였을지라도 그 명칭이 지시하는 세력 혹 정신은 분명히 구신약 성경의 여러 책에서 언급되었다. 성경에서 적그리스도의 묘사들은 여러 가지로 되었으나 하나님의 계시가 진보함에 따라 그 명확성은 증가한다.
박형룡은 구약의 "시편 2편의 여호와의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는 열방의 헛된 음모는 적그리스도 관념"의 예시일 수 있다고 한다. 또한 다수의 주석가들은 다니엘서 7장에 등장하는 '네번째 짐승'으로부터 나온 '열한 번째 뿔'에서 적그리스도에 대한 초상화를 발견하고 있다. 그리고 11장에 등장하는 하나의 왕은 7장의 '작은 뿔'과 동일시되는 인물로서 하나의 절대적인 통치자로 묘사된다.
신약에 있어서 바울은 적그리스도가 그리스도의 재림전에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에서 바울은 적그리스도를 '멸망의 아들', '불법의 사람'으로 언급하였다. 계시록 13장에서 적그리스도는 종말론적 사건의 중앙에 서게 될 '두 짐승'으로 등장한다.
또한 적그리스도에 인격성에 관하여 주석가들의 일반적인 의견은, '모든 악의 화신으로서 세계에 항상 임재한 적그리스도적 세력을 대표할 뿐 아니라, 역사상에 몇몇 선구자 혹 예표를 가진 하나의 말세적 인물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류폴드는 적그리스도의 성격을 종말론적 견지에서 다음과 같이 피력하고 있다.
그는 사람이다... 그는 불신앙과 불법의 일반적 발전을 이용할 것이다. 그는 큰 주권을 얻을 시간을 갖게 될 것이다. 죄악으로 그의 전 존재에 가득차 있다. 말하자면 죄가 그의 속에서 구현될 것이다. 죄가 그의 전 인격을 지배할 것이다. 그는 '멸망의 아들'이다. 그는 가롯 유다와 같이 영원한 죽음을 죽게 될 것이다. 그를 따르는 사람은 모두 영원한 죽음을 죽게 될 것이다. 그는 원수이다. 그는 인간 사탄(human-satan)이다. 그는 무서운 힘과 악으로 가득차 있다. 그는 적그리스도이다.
결론적으로 적그리스도라는 존재가 장차 그리스도의 재림시 문자 그대로 실존적인 한 사람의 적그리스도가 될 것이며 또 그는 그리스도에 의하여 멸망당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 쿤달리니영성 비판 : 반기독교적 영성운동의 동력원, 건널 수 없는 영혼의 강
쿤달리니영성의 본질
다수의 학자들에 의해 검증된 대로 뉴에이지운동을 지원하는 중추적 사상들은 기독교의 진리체계와 명백한 불연속성을 보여주고 있다. 김호는 각별히 신관과 인간론, 내세론과 윤리 그리고 역사관을 일별하면서 뉴에이지운동의 반기독교적 사상구조를 비판하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김성호는 뉴에이지운동의 혼합주의와 범신론적 성격, 무윤리성 그리고 인신주의적 성격을 비판하였다. 워커 마틴은 신론, 인죄론, 내세론, 기독론 그리고 악의 문제와 재림론의 관점에서 뉴에이지운동의 반기독교성을 비판하고 있다.
본 논문에서는 뉴에이지사상과 영성의 요체로서 인간의 육체안에 내재된 근원적 신성이라고 간주된 '쿤달리니'를 살펴보았다.
본 연구에 따르면 쿤달리니의 각성으로 말미암아 구현되는 영성은 두가지 주요한 특성을 보여준다.
첫째로 인간안에 내재된 근원적 신성 혹은 '신성의 씨앗'이라는 관점에서 '쿤달리니'가 역사와 종교, 인종과 사회문화적 경험의 다양한 국면을 초월하여 공통적인 영성의 기반으로 간주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뉴에이지사상에서 "인간은 본성에 있어서 선하고 신성하게 이 세상에 태어난다."고 말할 때 인간의 '신성'에 대한 정확한 의미는 모든 인간안에 내재된 '쿤달리니'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쿤달리니'는 기독교의 진리체계를 근원적으로 거부하는 반기독교적 진리체계의 동인으로서 바울에 의해 명확한 의미에서 사용된 '배도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쿤달리니'를 내재된 신성, 곧 그리스도의 의식으로 간주하는 뉴에이지사상은 적그리스도의 정신을 확장시킬 뿐 아니라, 종말론적 관점에서 범세계적인 배도와 동시에 '적그리스도의 출현'의 길을 완전하게 개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장에서는 인죄론적 측면에서 쿤달리니영성을 비판함과 동시에 기독교 종말론적 관점에서 명백한 배도성을 비판하려고 한다.
'죄(罪)'의 모티브 쿤달리니
인도철학과 요가문헌을 비롯한 신비주의자들의 진술에 의하면 '쿤달리니'는 인간의 몸안에 뱀처럼 감겨져 있는 실존체로 언급된다(Robsang Rampa, Khrish Namurti, Ajit Mookerjee, Gopi Khrishna, Baba Hari Das, Tantra 經典). 그리고 문헌과 신비주의자들의 경험적 진술에 따르면 쿤달리니는 내재된 신성한 '우주적 힘'으로서 쿤달리니의 각성은 마침내 인간이 우주의식의 근본인 브라마와 합일되어 해탈에 이르기까지 의식진화의 동력원이다. 쿤달리니의 완전한 각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카르마의 원리가 지배하는 비실재성의 마야세계에서 거듭되는 윤회의 순환고리를 끊어버리고 해탈에 도달하도록 한다. 해탈한 자는 인과응보의 상대성을 벗어나 절대적 신성을 구현한 초인이며, 영원불사의 구원을 소유하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구원하는 원인이다.
그러므로 셜리 맥클레인은 "천국은 당신안에 있다. 자신을 알라 그러면 자유로워 질 것이다. 당신 자신에게 진실되라. 자기자신을 안다는 것은 모두를 안다는 것이다. 당신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라 또한 당신이 우주라는 것도 알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맥클레인이 말하는 '자신'은 인도의 종교철학적 견지에서 '신성한 근원(Divine Source)'으로서의 아트만이며 '쿤달리니'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쿤달리니의 영성과 사상구조는 인간의 '원죄'를 부정할 뿐 아니라, 나아가서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의 의로 말미암은 구원을 철저하게 배격한다.
즉, 쿤달리니의 실재에 기초한 영성의 추구는 성경을 통해서 명백하게 계시되는 기독교 인간관과 피할 수 없는 충돌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뉴에이지 사상에서는 인간의 본래적 신성함을 주장하지만 기독교 인간관은 '모든 인간의 죄인'됨을 선언하기 때문이다.
인죄론에 대한 성경의 관점은 일관된 통일성을 갖는다. 인류의 언약적 대표자로서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함으로 그의 모든 후손들이 범죄하였음을 천명하고 있다(롬5:10-19). 예레미야에 따르면 인간의 마음은 본래적으로 '거짓되고 부패한 상태(렘17:9)'에 있으며, 바울에 의하면 인간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성령의 역사(롬8:1)가 아니면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죄의 본성'(롬7)에 사로잡혀 있을 뿐 아니라, 인간의 범죄로 인하여 모든 피조물들이 '허무한데 굴복하여 썩어질 것에 종노릇 함으로써', 인간과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당하고 있다(롬8:19-22). 예수그리스도는 본래적으로 부패한 마음으로 나오는 인간의 죄의 표징들을 낱낱이 열거하였으며(마태15:19, 마가7:22), 메시야로서의 사역을 대적하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눅23:33)'라고 저주하였다.
이와 같이 성경에 따르면 인간은 본래적인 죄인이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모든 인간은 "본래적인 죄속에서 태어난다."고 하였으며, 칼빈은 "이것은 물려받은 부패이며, 이것을 교부들은 '원죄'라고 불렀다."고 하였다.
칼빈은 다음과 같은 두가지 사실을 분명히 살펴보아야 한다고 한다.
첫째로, 우리의 본성은 철저하게 타락하고 부패하였으며, 이 때문에 우리는 의와 결백과 순결 외에는 아무것도 용납하시지 않는 하나님께 당연한 정죄를 받고 있다.
둘째로, 이 부패는 우리 안에서 없어지지 않고 계속적으로 새로운 열매를 맺는데, 이는 마치 뜨거운 용광로에서 불꽃과 불똥이 튀어나오며 샘에서 끊임없이 물이 솟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인간이 스스로 거역할 수 없는 본성에 뿌리박힌 '죄'는 사망과 원인이며(약1:15), 바울은 분명한 의미에서 '죄의 삯은 사망'(롬6:23)이라고 기록하였다. 또한 '죄'는 세계 속에 '하나님의 율법'이 주어진 원인이며 예수그리스도의 성육신의 동인이다.
한편, 인간의 죄의 본질과 그로부터 나타나는 근본적인 특성은 무엇인가?
칼빈은 이에 대하여 어거스틴의 견해를 빌어 "참으로 교만이 모든 악의 처음이었다는 어거스틴의 단정은 옳다."고 하였다. 즉, 죄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과 불신앙의 근원이며 인간으로 하여금 자존의 교만의 터위에 자리잡게 한다.
왜냐하면, "아담이 의의 원천을 버린 후에 죄가 영혼의 모든 부분을 점령했다고 나는 말한다. 저급한 욕망이 그를 유혹했으며 뿐만 아니라 말할 수 없는 불신앙이 바른 지성의 보류를 점령했고 교만이 심정의 밑바닥에까지 침투"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상과 같은 성경의 인죄론적 관점에서 '쿤달리니'의 실재와 영성의 특성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비판이 제기된다.
뉴에이지사상에서 말하는 인간의 본래적 신성의 실재로서 '쿤달리니'는 성경의 인죄론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실재론적 개념이다. 즉, 뉴에이지 사상은 인간의 '본래적 신성'을 말하지만 성경은 '인간의 본래적 타락과 원죄'를 선언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신성함의 원천으로 간주되는 '쿤달리니' 개념과 영성의 특성들은 성경의 인죄론과 근본적으로 대립된 인간론을 생산하는 원천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인간안에 내재된 신성의 실재라고 간주되는 '쿤달리니'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고찰한 바에 따르면 먼저, 쿤달리니는 인죄론과 정면으로 대립하는 실재론적 관념이라는 견지에서 오히려 성경에서 선언하고 있는 인간안에 내재된 '죄의 본성' 그 자체이거나 혹은 그것과 근원적으로 밀접한 관련성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쿤달리니'를 '죄의 본성 그 자체'로서 간주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에는 미묘한 과제가 남아 있다.
왜냐하면 쿤달리니의 각성은 우주적 원리와 인본주의적 도덕적 가치 즉 사랑, 진선미의 구현과 병행하기 때문이다. 종교사학자 민희식에 따르면 고오타마 붓다의 가르침은 쿤달리니의 각성으로 비롯된 각 단계의 깨달음으로부터 비롯된다. 고피 크리슈나에 따르면 '쿤달리니'는 심지어 세계의 모든 종교의 발화점이기도 하다. 또한 성경에서 바울은 '마음에 새겨진 율법'으로서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에게 부여된 '양심의 법'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쿤달리니'를 '죄의 원질' 그 자체로 규정하는 데에는 미묘한 문제가 따른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벌콕은 '죄'는 절대적 특질로서 중립상태가 존재하지 않을 뿐 아니라, 코넬리우스 반틸은 자연이성에 의한 다원주의적 사고와 개혁적 복음주의 사상의 불연속성을 명백하게 주장하였다. 이러한 문제는 J. H. Bavink의 표현에 따르면 '이교와 기독교를 분리하는 깊은 구렁'에 관한 것이다. 즉 "바울은 아레오바고 연설에서 헬라철학을 아주 공손하게 높이 평가하는 듯이 보였지만 그의 설교 끝에 가서 그는 '회개'와 '심판'에 대해 언급하며 이 두말을 새 빛 가운데 놓게 된다."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바울은 여기서 교만하고 현명한 자들에게 회개(metanomia)하라고 촉구한다. 그들이 그렇게 떠 받들고 있는 신에 대한 깊은 인식을 정죄해버리고 그들의 도를 깨뜨려 버린다."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이 떠받들고 있는 신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비를 보이는 참 하나님이 아니라, 칼빈이 언급한 것으로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데서 야기된 공백을 채우려고 하는 모호한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J. H. Barvink의 관점을 빌린다면 궁극적인 선과 악을 가르고 이교와 기독교를 분리하는 기준은 예수그리스도의 '회개의 복음'이라고 할 수 있다. 복음은 의인과 죄인을 가르는 '시금석'인 것이다. 복음은 세계에 들어올 때 모든 인간을 향하여 먼저 '회개(matanomia)'를 촉구한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선언은 세례요한(마3:2)과 예수그리스도(마4:17, 막1:18) 그리고 사도들(행2:38, 3:19, 5:31)에 의한 복음선포의 메카니즘(mecanism)이다. 바울에 의하면 이교도들에게 뿐만 아니라 유대인에게 있어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또한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 나무의 열매로 그 과실을 안다'(마7:16-20)고 하였다. 이는 "(눅6:45)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성령의 열매를 맺고, 죄인은 죄와 사망의 열매를 맺는다.
이상과 같이 "성경적 관점과 개혁적 복음주의의 관점에서 살펴볼 때, 인간의 신성을 주장함으로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의 명령을 거역하는 '쿤달리니'는 원죄론적 의미에서 '죄의 본성' 혹은 '죄의 원질'로 간주할 수 있는 개연성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죄의 본질'로서 '쿤달리니'에 관한 조명은 다음 단락에서 다루어질 '쿤달리니의 배도적 영성'에서 보다 분명한 지지를 얻게될 것이다.
'배도의 동인'으로서 쿤달리니
쿤달리니영성의 중요한 성격은 반기독교적이라는 것이다.
먼저, 반기독교적 성격은 쿤달리니를 모토로한 '자존적 영성'이라고 할 수 있다. 뉴에이지사상은 모든 인간안에 그리스도의 의식이 내재하고 있으므로 누구든지 영적 각성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의식을 구현하는 인간성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외부로부터의 구원의 중보자없이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스와미 묵타난다는 "너 자신에게 무릎을 꿇어라. 너 자신을 경배하고 예배하라. 신은 너자신처럼 네안에 거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쿤달리니영성은 인격적인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겸비와 경배의 태도가 아니라 근원적인 교만과 자존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와 같은 영성의 특성은 성경적 관점에서 하나님을 향한 교만과 불신앙 그리고 반역적 본성이다. 성경은 이러한 영성의 기원에 대한 계시를 내포하고 있다.
성경에 따르면 교만한 자존적 영성은 '죄의 기원'과 함께 시작되고 있다. 그리고 첫 사람 아담을 타락과 멸망으로 몰고간 '죄'는 심오한 기원을 갖는다.
반하우스(Donald G. Barnhouse)와 일단의 주석가들에 의하면 죄의 기원은 인간 창조 이전에 일어났던 사탄의 반역으로부터 비롯된다고 한다. 이사야 14장1-20과 에스겔 28장은 이와 같은 영계의 사건을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반하우스는 겔28:15절은, "우리에게 이 우주안에 존재하는 악의 기원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고 한다. 그는,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불의가 드러났도다."에서 간과할 수 없는 흥미로운 암시를 발견하고 있는데 그것은 곧, "그렇게 위엄있는 권세와 아름다움을 그 속에 함께 갖추고 있었고 엄청난 권위와 특전을 부여받았던 이 존재의 마음속에 불의가 저절로 생겼났다는 것이다."라는 것이다.
그는 이 비상한 진술에 대하여, "죄의 근원이 여기에 있다. 불의는 루시퍼의 마음속에서 나타났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 죄의 근원을 명확하게 바로 지적해 주는 성경 구절은 바로 이 한 구절 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겔28장은 루시퍼의 마음속에서 "죄의 근원"으로서, "불의"가 싹트기 까지의 중요한 정황들을 묘사하고 있는데, Barnhouse는 "네 무역(貿易)이 풍성하므로 네 가운데 강포가 가득하여 네가 범죄하였도다"(겔28:16)에서 "무역(貿易)"이 의미하는 바를 주목하고 있다. 곧 루시퍼는, "하나님께만 드려야 할 예배를 도적질하여 자신을 위한 예배로" 취하였던 것이다.
또한 이사야14장은 그의 마음속에서 발화된 이와 같은 생각들이 마침내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행동으로 표출되는 극명한 순간들을 보여주고 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Barnhouse는 이 구절과 에스겔28장을 비교하면서, "사탄의 교만 속에 있던 죄의 근원이 그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여 공개적으로 반역을 표시함으로 겉으로 드러나게 되었다."고 진술한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의 유일한 의지에 반하는 "두번째 의지"가 우주안에 들어온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Barnhouse는 사14:13-14절에 나타난 사탄의 의미심장한 선언에 대하여, "그것은 더욱 더 많은 권세를 요구하는 다섯 가지 외침이다."라고 한다.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는 사탄의 결의에 이르러서 사탄의 교만은 극을 넘어서고 있는데, Barnhouse는, "여기서 사탄의 교만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열쇠가 있다."고 말한다. 즉, "하나님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엘 엘욘으로 계시되며 이런 특성을 지니신 하나님은 '천지의 주재'시다. 루시퍼가 되고자 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의 반역은 좀더 높이 올라가서 하나님의 보좌를 공유하겠다는 요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공격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을 몰아내고 사탄이 천지의 주재로서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시도였던 것"이라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성경적 고찰에 따르면 쿤달리니영성 속에 내포된 하나님과 구원에 섭리에 배치되는 '교만한 자존성'은 죄의 기원과 사탄의 반역에 기초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한편, '쿤달리니'를 기반으로 하는 '자존적 영성'은 기독교 종말론적 관점에서 '적그리스도'의 영성으로 간주된다. 요가철학에 따르면 '쿤달리니'는 참 하나님을 부인하고 인간 스스로 '자존하는 신성'의 목표를 추구하게 하는 실재하는 가능성이다. 언급한 바와 같이 예수그리스도를 경유하지 않는 자존적 영성의 구현은 그 자체로서 배도성을 간직하고 있다. 뉴에이지운동은 바로 이와 같은 자존적 영성 곧, '적그리스도의 정신'을 세계적 범주로 보편화시키기 위해 매진하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적그리스도 정신'의 세계적 범람은 다니엘이 언급하고 있는 '네 나라 마지막 때에 패역자들이 가득할 즈음에' 일어날 '한 왕'(단8:23)이 출현할 시기를 조성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주석가들은 '한 왕'을 '적그리스도'의 출현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사도바울에 따르면 '패역한 자들이 가득할 즈음'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로 묘사되는 적그리스도의 출현 직전에 있게 될 '먼저 배도하는 일'을 의미한다. 즉, '패역한 자들'이란 '반역자' 혹은 '변절자'로서 유대교로부터 변절한 자들(호크마, 그랜드종합주석)을 의미함과 동시에 바울의 종말론적 관점에서 '배도자'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바울은 '불법의 사람', '멸망의 아들'로서 지칭되는 적그리스도에 대하여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살후2:14)라고 기록하였다.
바울에 따르면 적그리스도의 출현은 '불법의 비밀'의 활동에 기초하고 있다. 다니엘은 마지막 때에 일어날 '한 왕'에 대하여 "그가 장차 말로 지극히 높으신 자를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때와 법을 변개코자 할 것이며 성도는 그의 손에 붙인 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단7:25)"하였고, "그 권세가 강할 것이나 자기의 힘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며 그가 장차 비상하게 피괴를 행하고 자의로 행하여 형통하며 강한 자들과 거룩한 백성을 멸하리라(단8:24)"고 예언하였다.
여기에서 바울이 말하는 '불법의 비밀'과 다니엘이 언급하고 있는 '때와 법을 변개'하는 종말론적 사건은 뉴에이지운동과 관련하여 죄인으로 하여금 회개하여 구원 얻게 하는 복음의 명령과 죄인과 타락한 세계를 향한 하나님이 작정한 심판의 시기를 부정하고 인간신화를 구현한 영적 인간들에 의해 낙관적인 새시대의 도래를 주장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새시대에는 크리스챤들이 적합하지 않다고 못박으면서 맥터워스는, "우리는 이제 개인적인 구원이 더 이상 필요 없는 시대로 들어가고 있다. 우리의 인도자들은 집단적인 변형을 요구한다."고 하였다. 또한 존 프라이스는 사람의 신성에 대한 믿음과 새시대운동을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를 나타내고 있다. 그는 "아직도 이 지상에는 인간이 비참한 죄인이며, 먼지와 같은 존재라는 어리석은 생각을 가진 자들이 있다."고 하였다. 롯 몽고메리에 따르면 다가올 제 3차 대전과 대자연의 변동은 단지 '어머니 지구'를 깨끗하게 정화하는 과정일 뿐이며, "분명히 성경을 믿는 크리스챤들은 이 정화과정에서 살아 남지 못하고 새시대의 단일 세계 철학과 조화를 이루는 사람들 만이 살아남는다." 고 하면서, "금세기를 혼돈에 빠뜨리는 데 일익을 담당했던 사람들은 그들의 태도를 바꿀 수 있는 영으로 변할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뉴에이지사상은 묵시록적 종말론에 입각한 세계의 재앙과 참사를 뉴에이지운동을 통하여 구현하려는 새시대를 준비하기 위한 필연적인 '정화'의 과정이라는 논지를 갖고 있다.
이상과 같이 쿤달리니영성의 특질인 '자존성'에 관한 일련의 고찰들을 통해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첫째, 쿤달리니영성은 죄의 기원과 관련하여 하나님을 반역한 사탄의 교만한 반역이 각인되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근원적인 신성의 모티브라고 하는 '쿤달리니'에 의해 구현되는 영성 속에서 참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경배의 동기가 전혀 배제되고 배척된다는 명확한 사실은 이와 같은 쿤달리니의 영성의 기원으로서 '사탄'이외에 다른 기원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둘째, '쿤달리니'가 기독교 종말론적 관점에서 '범람하는 적그리스도의 정신'의 확산을 조장하고 '적그리스도'가 '자기의 때'에 나타날 수 있는 배도적 정황을 구성할 뿐 아니라, 다니엘과 바울에 의해 예언된 바와 같이 '복음의 명령과 심판의 시기'를 변개하려는 뉴에이지운동과 사상의 모티브란 측면에서 볼 때 명확한 의미의 배도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간주할 수 있다. 즉 쿤달리니영성의 구현의 절정인 배도와 적그리스도의 출현은 창세로부터 하나님의 보좌를 찬탈하려던 사탄의 반역적 역사의 '알파와 오메가'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류폴드가 표현한데로 최후에 출현할 '적그리스도'는 이전에 모든 적그리스도의 예표적 화신들을 능가하는 '악마의 화신'으로서 '사탄인간(Satan Man)'이라고 할 수 있다.
'뱀의 영성'으로서의 쿤달리니
쿤달리니영성은 '어원적, 형상적'으로 뱀의 모티브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배도성을 갖는다. 동양신비주의 문헌과 경전에 따르면 '쿤달리니'는 감겨진 뱀의 형태로 인간의 몸속에 존재하는 '우주적 에너지'이며, 신성 '아트만'이다. 뱀은 인도 종교에 있어서 '신성의 상징' 혹은 '지혜의 상징'으로서 만트라와 사원예술의 중요한 모티브이다.
스팽글러에 따르면 '무한한 사랑과 진리'로 알려진 영은 '새시대의 데바(Deva of the New Age)'이며, 힌두교의 신으로서 적그리스도와 동일한 인물이다. 신지학회를 창립한 블라밧스키에 따르면 '적그리스도' 곧, "새시대 세계통치자는 다름이 아닌 '뱀', 즉 '용'"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녀는, "모든 고대종교 단체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이 다 그렇듯, 그(사탄)는 '지혜의 용(Dragon of Wisdom)'이라 불리며, 뱀으로 표현된다. 고대 이집트에서 나브쿤(Nahbkoon)신은... 인간의 다리 위에 있는 한 마리의 뱀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그 뱀은 성당기사단(1118년경 성묘 및 순례자를 보호하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조직됨)과 함께 있는 그리스도의 표상이기도 하다."라고 기술하였다.
이와 같이, 내재된 신성으로 간주되는 '쿤달리니'의 형상적, 어원적 뱀의 모티브는 '사탄'과 불가분리적 관련성을 갖는 배도의 동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뱀은 성경 전체를 통해 죄의 기원과 관련하여 인간을 타락시킨 장본인이며 메시야 예수그리스도와 그의 위하시는 백성들을 대적하는 상징적이고 실재론적인 존재이다. 뱀은 신약과 구약을 통해서 다양한 이름으로 묘사된다. 구약에 있어서 뱀은 리워야단과 라합으로 신약에서는 용, 옛뱀 혹은 마귀사탄과 동일한 존재로 지칭된다. 사도요한에게 있어서 뱀의 영상(Image)은 이 세상을 주관하는 '악한 자'(요일5:21)이며, '이 세상 임금'(요한12:31, 14:30, 16:11)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성경은 '뱀'은 인류에게 죄를 가져다준 존재로서 '여자의 후손(창3:15)' 예수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그의 증거를 가진 자들'(계12:17)의 원수로서 영원히 멸망당할 불못에 던져질 확정된 운명에 처해있는 존재이다.(계20:14)
● 글마무리
마치면서
고찰한 바와 같이 뉴에이지운동은 인간의식의 각성과 변형을 통한 우주적 차원으로의 진화를 역설하고 있다. 뉴에이지사상을 지원하는 인도종교철학 및 요가 철학에 있어서 '우주대영(Universal Spirit)과의 합일' 곧 '브라마와의 연합'을 통한 인간신화(人間神化)의 실존적 가능성은 인간안에 내재된 우주적 에너지인 '쿤달리니'이다. 쿤달리니는 뉴에이지사상의 요체로서 '신성의 씨', '신성의 불꽃', '불타는 뱀' 등으로 묘사된다. 요가는 쿤달리니의 각성과 해탈을 위하여 인류가 고안한 가장 안정적인 기술로 간주된다. 요가문헌에 따르면 체계적인 요가의 수행은 인간안에 내재된 '쿤달리니'를 각성시키며 각성되어 깨어난 쿤달리니는 인간의 영적신체(微細身)에 각인된 일곱단계의 에너지 중추인 챠크라를 경유하여 최고의 챠크라까지 상승하여 우주의식인 '브라마'와 합일을 이룬다. 이것은 모든 요가수행자들이 목표로 하는 최고의 상태로서 해탈열반니르바나사마디 등으로 불리운다.
또한 고대 힌두교 경전과 요가 경전 및 구루들과 신비가들의 문헌적 고찰에 따르면 인간안에 내재된 '신성의 씨'로서 '쿤달리니'는 모든 인종과 종교, 역사를 초월하는 보편적 실재로 언급된다. 즉, 모든 인간안에 '쿤달리니'가 내재한다는 것이다. 고피 크리슈나에 따르면 '쿤달리니'야 말로 모든 세계종교의 수행체계와 예배의식의 모티브일 뿐 아니라, 역사에 나타난 천재성과 영능자들의 배후에서 활동하였던 힘이다. 그러므로 '쿤달리니'는 민족과 문화적, 종교적 환경과 양상에 따라 다양하게 묘사되어 왔을 뿐이라는 것이다. 한편, '인간안에 내재된 신성'에 대한 논쟁과 이단적 신비주의의 역사는 기독교의 이단적 신비주의 역사 속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중근세 신비가들 중 요한 에크하르트와 임마누엘 스위든 볽은 명백한 의미에서 인간안에 '영혼의 불꽃'과 신성이 유입되는 '극내분(immost)'의 실재를 주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쿤달리니'적 영성체계는 오늘날 전개되고 있는 에큐메니칼 원리와 다원주의 신학의 모티브와도 신학적 의미에서 뿌리깊은 연관성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쿤달리니'의 실재성으로부터 발휘되는 영성에 부착된 뉴에이지사상은, 첫째로, 기독교의 인죄론과 근본적인 충돌을 야기시키고 있다. 즉, 뉴에이지사상은 '쿤달리니'를 기반으로 인간의 본래적 신성함을 주장하지만, 성경은 아담의 타락과 원죄로 말미암은 모든 인간의 '본래적 타락'을 선언하고 '죄인'으로 정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쿤달리니영성은 기독교의 인죄론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요일1:9) 근본적인 반역이다.
둘째로, 뉴에이지사상은 본래적 신성에 의해 모든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요가와 명상 수행을 통해 '쿤달리니'가 각성되어 일곱단계의 에너지 중추를 관통해서 최고의 챠크라에 도달하면 '아트만과 브라마'의 합일이 이루어지고 영원불사의 '우주적 인간'으로 변형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뉴에이지사상의 구원관이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인간이 죄를 범하였고' 아무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할 것이며, "(행4:12) 오직 예수그리스도 만이 '길과 진리와 생명'으로서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임을 선포하고 있다.
(행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그러나 쿤달리니영성은 기독교 구원론의 주제인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과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함으로써 명백하게 기독론을 파기하며 부정하고 있다.
셋째로, 뉴에이지사상은 인간의 자존성을 극대화시키고 있다. 즉,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겸비, 찬양의 태도는 제거되고 오히려 인간안에 내재된 신성에 대한 경외를 넘어서 '인간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인간 자신에게 경배하라'는 극단적인 자존성을 지향하도록 유도한다. 그러나 성경은 이와 같은 '자존적 영성'의 근원이 사탄으로부터 기원되고 있음을 계시하고 있으며 창세이후 하나님의 진리역사를 거스려 진행되어온 '불법의 비밀'로서 종말에 나타날 '적그리스도'의 영성임을 밝혀주고 있다.
넷째로, 산크리스트어로 '감겨져 있는 뱀'이란 의미의 '쿤달리니'는 어원적, 형상적으로 '뱀의 모티브'를 함의하고 있다. 뱀은 인도종교예술과 불교 만다라와 동양밀의종교 및 이단적 신비주의 역사에 있어서 근원적 신성을 상징하는 신성한 동물로 간주된다. 그러나 성경은 '뱀'은 인간에게 '죄'를 소개하였을 뿐 아니라 인간을 멸망시키며 인류의 전역사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그의 위하시는 백성을 대적하는 존재임을 폭로한다. 그러므로 사도요한은 '뱀'을 일컬어 '옛뱀용마귀사단'이라고 하였다. 결국 '뱀'은 그리스도의 재림시 결박되고 '영원한 불못'의 심판으로 던져질 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뱀의 모티브'를 함의한 쿤달리니영성은 본질적으로 사단적 본성과 관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쿤달리니영성은 기독교 종말론적 관점에서 배도의 시기에 일어날 '불법의 비밀' 혹은 '때와 법'을 변개하는 사건의 동인이다. 즉, 마지막 때에 나타날 '한 왕', 곧 '불법의 사람'은 '때와 법'을 변개하는 '불법'을 자행할 것인데, '불법'이란 먼저,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 구원을 허락하시는 '복음'의 구원명령에 불복하여, 인간신화를 따르는 것이다. 또한, 죄로 인하여 타락한 인류의 범죄와 오염된 우주를 심판하고 정화하기 위해 정하신 '인간과 만물에 대한 심판'의 시기를 부정하고 '쿤달리니'가 각성변형되어 우주적 영성을 구현하는 '우주적 인간'들에 의한 신천신지의 세계를 이루려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쿤달리니영성의 배도적 모티브가 명백하게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쿤달리니영성에 관한 고찰을 통해서 확인되는 기독교의 인죄론과 구원론, 기독론 등과 같은 중추적인 신념체계와의 불연속성과 성경에 엄히 명시된 기독교 종말론의 관점을 근본적으로 전복시키고 천상천하에 구원에 이를 오직 하나의 길로 천명된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의 명령을 영원히 거역하는 반역이라는 점에서, 쿤달리니영성은 '사탄'의 기원에 점착되어 있는 '배도적 영성'이라고 결론 지을 수 있다.
그러므로 만일, 뉴에이지사상에서 인간의 본래적 신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실재적 근거가 '쿤달리니'라고 한다면, 성경적 관점에서 선언되는 인간의 본래적 죄성의 본질이 바로 '그것(itself)'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쿤달리니'를 기반으로 구축된 인도종교철학과 요가체계의 서구화를 통한 인간신화의 가능성을 역설하는 뉴에이지사상이 강화되면 될수록 오히려 성경에서 선언하고 있는 '인간의 죄'의 본질과 그 양상의 현현을 강력하게 반증하는 시대적 표적이 되기에 충분할 것이다.
이러한 점은 '쿤달리니'를 요체로 하는 영성의 추구는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기독교 영성과 정반대의 방향을 향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분명하다. 요가의 수행자는 잠자는 내재된 신적 본성인 '쿤달리니'를 깨우기 위해 자신의 내면을 향해 부단히 집중하지만, 성경적 영성의 방향은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 예수를 바라보라는 것이다.(히12:2)" 즉, 진정한 영성의 원천은 하나님이시요 구원자이신 예수그리스도로부터 임하는 것이지 죄로 인해 부패한 피조물인 인간성의 본질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같은 의미에서 탄트라 요가철학은 '몸을 마음의 원동력'으로 간주하지만 성경은 인간의 몸안에 영원불사의 신성을 창출할 동력원이 있다고 결코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은 모든 인간은 죄인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안에 있는 성령의 법'이 아니면 결코 해방될 수 없는 '죄와 사망의 법'에 매여 있다고 기록한다(롬8:1). 그러므로 인간이 오직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아무도 영원한 나라에 이르지 못할 것임을 천명하고 있다.
사도요한은 세계에 '패역한 자들이 가득할 즈음'에 광대한 세계의 바다 중앙에서 일어나는 '큰음녀'의 영상(Image)을 보았다.
'땅의 음녀들과 가증된 것들의 어미'로 지칭되는 '음녀'는 온 세계인류를 통어하고 있으며, 땅의 임금과 백성들을 음행으로 취하게 하고, 참람된 이름과 거짓된 영광으로 치장하고 예수그리스도의 증인들을 살육한다(계17:1-6).
한편, 많은 학자들이 지적한 것처럼, 쿤달리니영성을 구현하는 뉴에이지운동은 종말론적인 국면을 형성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반기독교적 영성의 모토인 쿤달리니영성의 보편적인 확산과 다원주의 신학, 에큐메니칼 원리, 종교통일에 대한 세계전망의 일치 속에서 철저하게 불용되는 '복음의 진리'를 목격하며 도래하는 21세기 영성 속에 잠복된 '사단의 의지'를 확인하게 된다.
기독교적 대응
첫째, 인간의 본래적 신성에 대한 실재론적 기반으로 간주되는 쿤달리니영성을 직면할 때 가장 먼저 요청되는 것은 '복음'의 정체성에 기초한 확고한 응전이다. '복음'은 '죄인'인 인간을 위하여 주어지고 다가온다. 그러므로 '복음'은 세상에 들어올 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3:2)'고 선언함으로써 '회개를 촉구한다'. 회개의 촉구는 신구약을 관통하여 죄악된 민족과 개인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불변하는 의지이다. 회개없이는 구원의 소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양의 종교사상과 실존주의적 현대철학과 프로이드나 융에 의해 제시된 인본주의적인 현대심리학은 기독교 인간관의 본질을 부정하고 죄의 개념을 교묘하게 왜곡시켰다. 그러므로 죄의 문제의 근본으로 들어가면 인간들을 자기안에 있는 죄의 원인으로부터 소외시켜 버리는 개념들이 번영을 누리고 있으며, 심지어는 교회안에서도 약화되고 변형된 죄의 개념들이 자리잡고 있다. 로렌스 크렙은 "지난 두세기 동안 교회 안에서 죄에 대한 이해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유사한 퇴보를 보여왔다."고 하면서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가 범하고 있는 가장 커다란 오류는... 죄에 대한 이해가 불충분하고 피상적"이라는 데 있다고 지적한다. 로렌스 크렙은 인간에게 있어서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은 "회개와 믿음 그리고 순종"으로부터 시작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 앞에 실존적인 죄에 대한 자각과 회개가 없이는 진정한 치유와 회복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구원의 소망도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확고한 인죄론 측면에서 뉴에이지적 인간관 뿐 아니라 인본주의적 인간관에 대한 불연속성을 강조하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구약의 선지자들과 세례요한, 사도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께서 친히 선포하신 '회개의 복음'을 계승 선포해야 할 것이다. 코넬리우스 반틸의 논지와 같이 복음은 설득으로써가 아니라 선포함으로써 전달되기 때문이다.
둘째로, 기독교의 정통적 영성을 계승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양차대전은 과학주의, 합리성에 의한 서구문명에 대한 낙관적인 유토피아적 미래상에 대한 회의를 가져다 주었고, 물질문명의 세례 속에서 가속된 서구 기독교의 세속화는 서구에 영적 진공화를 초래하는 중대한 요소였다고 한다. 그리고 매체의 변화를 통해 문명의 변화를 얘기하는 맥루한(M. McLuhan)은 "인쇄매체 시대가 인간의 다섯 감각중 시각을 비대화시켜, 직선적 사고와 합리주의, 자본주의를 낳았다고 한다." 이에 근거하여 김용호는 오늘날 많은 젊은이들은 '보는 신'에서 '만지는 신'을 갈망하고 있으며, "이러한 경향의 절정은 '내가 신을, 혹은 초월세계를 직접 체험해 보아야겠다'는 움직임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경험될 수 있는 영성으로 파고 드는 뉴에이지사상과 요가 및 명상에 대하여 능동적 개방성을 갖게 된다. 즉, "그들은 이성과 정신으로서 만이 아니라 감성과 육체와 혼을 총동원한 능력으로 하나님을 '접촉'하고, 궁극적으로는 자신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려는 것이다."
인도종교철학자 아지트무케르지는 "현대 인류의 상황은 탄트라에서 쿤달리니 샥티로 알려져 있는 잠재의식을 우리들 전체 속에서 물질적정신적으로 생동감있는 생활속으로 이끌어 낼 필요가 점차 증대되어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현대는 과도기이고 위기의 시대'이며, 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 세대는 물질적정신적 인생의 모든 면에서 당혹해하며 방황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기독교 저술가 하워드(Howard L. Rice)도 기독교 인구의 감소와 관련하여 이러한 측면을 깊이 고려해야 할 것을 지적하고 있다. 하워드에 따르면 현대인들이 종교적 갈망을 갈망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현대인들의 삶이 무미건조해지고, 그들이 정열도, 목적의식도 잃어버렸기" 때문이며, "최근에 기독교가 하나님의 임재나 인도에 대한 느낌에 대한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의식이나 의무처럼 다소 지루한 것들로 전락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와 같은 영적 응답부재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야 할 '개혁주의 영성'의 전통적 광맥이 '개혁주의 교회에 의해 거의 유실되고 등한시되어 왔으며, 이 전통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영적인 삶에 관심이 많은 저자들에 의해 철저히 무시되고 간과'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워드는 존 칼빈(John Calvine)과 존 번연(John Bunyan),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 등을 통해 이어지는 개혁주의 영성의 발견과 계승을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개혁주의를 관통하는 영성은 사도적 영성과 구약의 종들과 선지자들의 영성에서와 같이 성령의 임재(臨在)와 인도(引導), 증거(證據)의 역동적 성격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를 경유하여 창조주 하나님과 인격적 연합을 지향하며 현세적 삶에서 사랑의 결실로서 나타나는 기독교의 영성을 발견하고 계승하여야 할 것이다.
셋째로, 기독교 종말론을 정립할 뿐 아니라 종말론적 관점에서 성도들을 교육하고 양육시켜야 할 것이다.
이는 바울이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반드시 일어나리라고 경고한 '배도하는 일과 불법의 사람이 나타나는' 조짐으로서 그리고 박형룡이 언급한 대로 말세의 5대 표지중 하나로서 적그리스도의 영성이 세계적 범주에서 광범위하게 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먼저, 영적 혼란과 무질서 속에서 난무하는 시류적 사이비 종말론의 돌발적인 횡포와 이로 인한 기독교와 성도들이 감당해야 할 심대한 피해를 막기 위해서 기독교 종말론이 정립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또한 권성수 교수는 "사이비 종말론이 어떤 형태로 나타나건 그것을 바로 비판하고 성경적 종말론에 입각한 바른 사역과 바른 신앙 생활을 하기 위해서" 기독교 종말론의 올바른 정립이 요청된다고 피력하고 있다.
● 뉴에이지운동에 관한 성경적 고찰 목록(참조)
글마무리
밀레니엄의 지평위에 떠오르는 인류의 "빛"을 표방하는 영성 운동은 거대한 해일처럼 복음을 통하여 열려진 구원과 신앙, 영성의 유일한 길을 덮어오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에 믿음으로 순종하는 이 시대의 영혼들을 구속하고 붙들어 견고하게 세우는 말씀과 성령의 역사는 더욱 맹렬하게 타오를 것이다.
출처 http://gospelage.p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