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한광석(55)씨를 골초쯤으로 생각한다. ‘시가’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윈스턴 처칠. 사진 속에서 굵은 시가를 멋지게 물고 느긋하게 미소짓는 처칠은 과연 골초였을까? 아니다. 연기를 입안에서만 굴리다 뿜어버리는 이른바 ‘뻐끔담배’의 대가였다 한다.
한씨는 아예 담배를 입에 대지도 않는다. 7만 달러 어치 이상의 고급시가에 묻혀 살지만 정작 본인은 담배 해악을 일찌감치 깨달아 젊은 시절 이후 금연 약속을 깨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그는 시가 전문가다. 늘 시가 관련 책을 읽고, 잡지를 뒤적이고, 어디서 전시회를 한다면 만사 제치고 달려간다. 시가학 박사 학위라도 있다면 그건 자신의 몫이라 자부한다.
시가매니아들은 아주 섬세한 미식가다. 값을 따지지 않는다. 오로지 품질만을 본다. 보관방법이 조금만 달라도 매니아들은 맛 차이를 귀신같이 알아챈다. 이렇게 까다로운 손님들 비위를 맞추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전혀 어렵지 않아요. 꾸준히 공부하고, 보관시설만 제대로 갖추면 이들처럼 다루기 쉬운 손님도 없어요.”
‘제이스 컨비니언스(Jay's Convenience)’는 배리 인근에서 시가전문점으로 이름이 높다. 여름철 관광성수기엔 주매출이 2만5천 달러에 이른다. 그 가운데 35% 이상 시가 단일품목이 차지한다. 환산하면 8천~9천 달러.
이러 결과가 거저 굴러온 건 아니다. 한씨가 이 가게를 인수한 것은 1995년 11월. 이민 오면 다들 몇 년 정도는 논다는데 한씨는 3개월 만에 일을 벌였다. 부인 이재숙(53)씨는 늘 그랬듯 배리까지 와서 편의점을 시작할 때도 말없이 따라 주었다.
“한국에서 건설회사에 다녔는데 여기서 경력을 써먹을 데가 없더군요. 그래서 남들 다하는 컨비니언스를 그냥 시작했지요.”
다들 그러려니 하면서 몇 년 동안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쳇바퀴 돌듯 가게를 운영했다. 언젠가 한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손님이 시가를 사러 왔다가 캐비닛에서 꺼내는 것을 보더니 고개를 저으며 돌아섰다. 한두 명이 아니었다.
가습기 등을 갖추고 나름대로 보관에 신경을 썼는데도 시가매니아들은 캐비닛에서 꺼내는 시가를 절대 인정하지 않았다. 이들은 절대 값을 따지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역발상. 까다로운 손님 비위만 맞춰주면 가장 충성스러운 고객이 된다. 남들이 하기 어려운 일이 나에게 가장 큰 기회를 가져다 준다. 승부욕이 솟아 올랐다.
초보자에게 지름길은 잘하는 사람 흉내내는 것. 점잖은 용어로 이를 벤치마킹이라 한다. 토론토 다운타운에서 가장 잘 된다는 시가전문점을 찾았다. 손님인 척 들어가 샅샅이 훑었다. 전문 서적도 한 보따리 사서 읽고 또 읽었다.
한씨는 2000년 1년을 학업에 매진했다. 시가전문점 핵심은 워킹휴미도어(Walking Humi-door) 시설과 고급 진열장, 인테리어. 2000년 가을 시가 전용 워킹쿨러 설치공사를 끝냈다. 장비·공사비 합계 1만5천 달러.
전문가들 입맛에 맞추려면 모든 종류의 시가를 다 갖춰야 한다. 재고 5만 달러. 담배와 달리 시가엔 딸려 다니는 액세서리가 많다. 이 재고만 1만~2만 달러는 족히 든다. 합계 8만 달러.
시설 좋다고 애호가들이 벌떼처럼 몰려드는 것도 아니다. 위킹쿨러 유지하고 재고를 적절히 관리하며 또한 오래된 시가들은 아깝지만 과감히 버리면서 끈기를 발휘했다. 소문나는 데 3년이 걸렸다.
소문만 나면 이처럼 확실한 비즈니스도 없다. 한 번 단골은 영원한 단골이다. 작년 여름에 무스코카 가는 길에 우연히 들렀다가 올해 다시 찾아와 시가를 사는 것이 전혀 특별한 일이 아아니다. 심지어 미국으로 돌아간 어떤 관광객은 배리에 사는 친구에게 “제이스 컨비니언스에서 시가를 사서 보내달라”는 연락을 해오기도 한다.
편의점에서 고급 이미지를 찾기는 불가능한 게 현실. 한씨는 그러나 시가전문점으로 명성과 함께 고급편의점 이미지도 덤으로 얻었다.
한씨는 시가 쪽으로 방향을 정했을 때 그로서리는 과감하게 포기했다. 주변 대형 수퍼마켓과 식품 경쟁을 하는 것은 자살행위라는 것. 대신 시가손님들이 좋아할 품목을 대거 전진배치했다. 비싼 스낵류, 음료수, 에너지드링크 등.
또 하나 시운이 맞아 떨어졌다. 몇 년전부터 불법담배 유통이 심해지면서 국세청 단속도 강화됐다. 이래저래 편의점 주인들이 고통을 겪고 있는데, 이상하게 담배 피우던 손님들이 어느 틈에 시가로 바꿔타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다. 한씨로서야 수익성 높은 시가 손님이 많아지니 이보다 고마울 데가 있으랴.
9년간 하다 보니 이젠 시가 재고관리에도 일가견이 붙었다. 사실 6만~7만 달러 재고를 안고 있으면 앞에서 남고 뒤에서 밑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모든 품목에 대한 정확한 자료를 바탕으로 재고를 조절하니 이익률도 높아졌지요.”
시가전문점 덕분에 비수기인 겨울에도 편의점 매출을 유지할 수 있다. 주 1만5천 달러 정도면 한겨울 장사 괜찮지 않느냐며 웃음짓는다.
한씨는 시가 전문점을 희망하는 교민들에게 조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첫째, 자본 회전이 느리다는 걸 염두에 둘 것. ◆둘째, 관광객 발길이 많은 곳이 유리하다. ◆셋째, 부지런히 시가 공부를 하라. ◆넷째, 전시회·세미나 등 발품 열심히 팔아라.
한씨에게도 쓰라린 경험이 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2003년 미국 관광객 많은 킹스턴에 시가전문점을 냈다가 손해만 보고 문닫고 말았다. 또 토론토 다운타운에도 가게를 냈다가 지난해 처분했다.
원인은 관리. 시가처럼 민감한 품목을 남에게 맡겨 관리하려 한 것이 잘못이었다. 한씨는 여기서 인생도 배웠다.
“다 안다고 생각했을 때가 가장 위험하다.”
한씨는 다시 비상을 꿈꾼다. 조금만 더 기다렸다가 수준을 높인 시가전문점을 다시 만들든, 지금 가게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는 결단을 내리려 한다. 역발상. “어려울 때 더 과감하게”라는 초심을 또 실천할 때라는 걸 한씨는 알고 있다.
첫댓글 어려울때 더 과감하게.. 역발상이 성공을 가져다주었군요
어떤사업가는 시중에 너무 많아서 포화상태인 물건을
사업가들이 투자를 꺼려했는데
이분은 오히려 연구실까지 만들면서 더 많은돈을 들여 투자하고
질을 높히는데 매진해서 월등히 좋은물건을 만들어가지고
구매객 대부분이 그물건을 사게되서 성공했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