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누가복음 제32강
말씀 / 누가복음 18:31-19:10
요절 / 누가복음 19:10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지난 시간 예수님은 영생을 구하는 부자청년에게 가진 것을 다 팔라고 도전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리 분명하게 도전할 수 있었던 것은 재산 정도가 아닌 생명까지 내놓고 그리스도의 길을 가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영광의 길이 아닌 고난의 길을 가겠다고 말씀하십니다.(31) 32,33절을 보십시오.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력을 당하고 침뱉음을 당하겠으며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32,33), 예수님이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신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누가복음에 기록된 것만 해도 6번째입니다.(9:22; 44,45; 12:50; 13:32,33; 17:25) 반복하여 말씀하는 이유는 핵심 진리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울러 받아들이기 어려운 진리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34절을 보면, 그 말씀이 감취었다고 했습니다. 마치 핸폰을 옆에 두고 있으면서도, 심지어 손에 들고 있으면서도 ‘핸폰 어디있지?’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제자들의 눈을 가려버린 것입니까! 고난을 끔찍이 싫어하는 본성, 죽음은 끝이라는 상식이 가려버릴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경험이나 이성에 갇혀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만들어낸 장밋빛 미래에 대한 기대가 제자들의 눈을 가릴 수 있습니다.
‘죽어야 산다’, 이는 구약시대부터 지금까지 내려온 하나님 나라의 비밀입니다. 이는 자연의 이치를 들여다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한 알의 밀알을 들어 십자가와 부활의 원리를 설명했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생명의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그러므로 비상식적인 말씀, 현실을 모르는 무대뽀 말씀으로 치부하며 거부할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경험이나 계산에 맞지 않는다고 고개를 흔들며 나름대로 결론지을 것이 아닙니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일수록 성령의 감동이 임하기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상처와 자기 생각으로 분별력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다음에 나오는 맹인의 모습은 제자들에게 좋은 본이 됩니다. 예수님 일행이 여리고에 가까이 오실 때, 한 맹인이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었습니다.(35) 많은 무리들이 지나가는 소리가 나자, 그는 ‘무슨 일인가?’ 물었습니다.(36) 그러자 사람들이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고 계신다’, 알려주었습니다.(37) 그러자 맹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큰소리로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38) 사람들은 나사렛 예수라고 말했는데, 맹인은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쳤습니다. 사람들은 나사렛 출신 선지자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맹인은 그리스도로 믿고 간구한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맹인을 꾸짖습니다.(39) “시끄럽다 조용히 해, 너 따위가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야!”, 하지만 그는 더욱 큰소리로 간구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매달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발걸음을 멈추고 그를 데려오라 명했습니다.(40) 그리고 그에게 물으십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41) 맹인은 보기를 원한다고 대답했습니다. 맹인의 간청을 당연한 것처럼 생각할 수 있지만, 이는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맹인은 보기를 원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리스도라면 사람들의 계산을 뛰어넘어 새 일을 하실 수 있음을 믿은 것입니다. 4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만약 부자 관원이 맹인의 믿음을 가졌더라면 절대로 근심하며 돌아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물질 욕심에 매인 내 마음을 풀어주사 주와 복음을 위해 살게 하소서!’ 간구했을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결단을 드리고 예수님을 좇게 되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맹인의 믿음을 가졌더라면, 당장 이해되지 않는다고 감히 배척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영적으로 눈먼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의 눈을 열어 밝히 깨닫게 하소서!” 기도했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세상에 짓눌려 상식과 경험으로 가려져 영적 분별력을 잃어버리지 않았는지, 기도해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극심한 고난가운데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시119:18) 지금 고난이 선한 역사의 시작임을 보게 하여 주옵소서! 지금은 실패처럼 보이나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당신의 섭리를 보게 하여주옵소서!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감추어지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눈을 밝히 열어주사 은혜와 섭리의 손길을 보게 하시길 기도합니다.
19장에 나오는 삭개오 또한 좋은 믿음의 본이 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여리고를 지나게 되었습니다.(1) 여리고는 아라비아에서 들어오는 각종 향료가 통과하는 교통의 요지였습니다. 따라서 여리고 세관은 가버나움 세관과 함께 소위 매출 탑을 찍는 곳이었습니다. 세리들은 어찌하든지 초과 징수하여 많이 남기고자 별별 수단을 동원했습니다. 삭개오는 그런 자들의 리더, 세리장이었고 부자였습니다.(2) 그런데 3절을 보십시오. 그는 여리고에 오신 예수님 소문을 듣게 된 것입니다. 아마 삭개오는 이전부터 예수님을 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3절의 보다는 동사가 미완료형태로 쓰여졌기 때문입니다. 가버나움 일타 세리 마태가 제자가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온 그때부터였는지도 모릅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다시 살아난 이야기나, 여리고 맹인 거지가 눈을 떴다는 소문을 듣고부터였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보고 싶은 열망이 있었는데, 바로 오늘 그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 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은 많고 삭개오의 키는 작았습니다.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고 싶었지만, 아무도 양보해주지 않았습니다. 간혹 비켜주려고 했던 사람도 세리장임을 알아보고 나서는 일부러 막아버렸습니다. 예수님 보려고 왔다가 존심만 상하는 모양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4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겠습니다.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돌무화과나무는 위로 자라기보다 옆으로 퍼져 자라는 나무입니다. 그래서 옛 번역에는 뽕나무라고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을 보기 위해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간 삭개오, 상상이 되십니까! 키 작고 배 나온 뚱뚱한 중년의 남자가 나무에 올라가 고개를 쏘옥 내밀고 있습니다. 이제 삭개오는 예수님을 볼 수 있게 되었지만, 사람들의 시선에 고스란히 노출되고 말았습니다. 아마 여기저기서 이런저런 소리가 튀어나왔을 것입니다. “아니, 세리장 아니야? 저 인간, 왜 저기에 있대? 관종인가?” 세관의 회전의자에 앉아있으면 세상 무서울 것 없는 사람이 왜 있는 폼 다 죽이며 그런 자리에 선 것입니까!
첫째로 부자의 삶이 참된 행복을 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부자가 되어야 행복하다는 생각으로 세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안면에 철판을 깔고 세리가 되었고, 죽기 살기로 노력하여 부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돈은 생활의 편리를 주었지만 그 이상을 주지 못했습니다. 부자가 되었는데도 허무와 무의미로 푯대 잃은 배처럼 되었습니다. ‘부는 바닷물과 같아서 마시면 마실수록 더욱 목마르게 한다’는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부가 주는 즐거움은 잠시뿐이었고, 또다른 탐욕이 삭개오를 끝없이 끌고 갔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뭔가 달라지겠지?’ 했는데, 시간이 해결해주는 것은 없었습니다. 부자가 되었는데도 행복하지 않다는 절망, 그것이 삭개오를 나무에 오르게 했을 것입니다. 나무에 올라간 삭개오는 세리장도 아니었고 부자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길을 잃고 구원을 갈망하는 한 영혼이었습니다. 이는 밤새도록 얍복강을 건너지 못하고 홀로 서 있던 야곱의 모습과 같습니다.
둘째로 사람들의 시선을 넘어서야 예수님을 볼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 인간적으로 체면 구겨지고 자존심 팽개치는 자리로 올라가야 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원하면서도 고상한 모습으로 만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새벽기도하고 있는데, 환상가운데 계시로 찾아오시는 그런 주님을 보기 원합니다. 그러면 예수님도 보고 나도 기도의 종으로 드러납니다. 강력한 말씀을 타고 성령의 감동으로 찾아오는 예수님 보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예수님도 보고 나는 말씀의 종으로 드러납니다. 아니면 꿈속에서 예수님을 보기 원합니다. 그러면 예수님도 부담 없고 나도 영적인 종으로 드러납니다. 그런데 만약 예수님을 보기 위해 조롱받는 자리나 정죄받는 자리에 서야 한다면, 여러분은 어찌하겠습니까! 삭개오는 사람들의 정죄받는 시선을 받는 자리에 서서 예수님을 보고자 했습니다. 삭개오는 사람 눈치 보지 않고 용기있게 올라갔습니다.
이렇게 용기있는 사람, 이렇게 믿음있는 사람, 예수님이 당연히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삭개오를 못 본 척 하지 않았습니다. 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예수님은 ‘세리장이여, 속히 내려오라’, 그렇게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아마 세리장을 아는 사람들은 절대 삭개오 이름을 부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세리장, 이 새끼, 저 새끼’하며 불렀을 것입니다. 아무리 잘 쳐주어도 ‘삭세리’라고 불렀을 것입니다. 삭개오라는 이름과 세리장은 전혀 어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삭개오라는 이름은 ‘의로운, 순결한’이란 뜻입니다. 아마 삭개오는 경건하고 믿음 좋은 엄마 아빠를 두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세리장이 되었으니, 욕을 먹어도 갑절로 먹어야 할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삭개오야!’ 부르십니다. 우리식으로 번역하면, ‘순수야, 의인아’, 그렇게 부르신 것입니다. 이름만 불러주신 것이 아닙니다.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하십니다. 유대사회에서 누군가의 집에 들어가는 것은 그를 가족처럼 가까운 관계로 생각하는 표시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삭개오에게 소망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어제까지 세리장으로 살았을지라도 오늘부터는 본래 이름처럼 삭개오로 살 수 있다는 소망입니다. 사람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 말이 진리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어떠한 사람이든지 새 인생을 살게 할 수 있는 구원자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후5:17절에서 외쳤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예수님안에서 강도같이 사나운 자가 목자가 될 수 있고 탕자처럼 정욕의 죄인이 희생적인 성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각 사람의 인생이 이를 증거합니다. 예수님의 소망은 죽은 영혼을 깨우고 새 인생을 살게 합니다. 예수님의 소망이 삭개오에게 전달되자, 그는 즐거움으로 나무에서 내려옵니다.(6)
하지만 뭇 사람들은 정반대의 메시지로 받아들입니다. 사람들마다 예수님을 향해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7) ‘아니,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간대!, 어머나, 세리에게 한상 잘 대접받고 싶었나봐! 선지자인줄 알았는데, 세리인 것조차 모르는 눈 먼 선지자 아냐?’, 그들은 예수님의 의도를 의심했습니다. 그들이 놓쳐버린 것이 무엇입니까!
8절을 보십시오. 삭개오가 서서 예수님을 향해 결단을 드립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지금까지 삭개오 인생의 중심은 돈이었습니다. 돈을 위해 신앙양심도 버리고 체면도 버리고 달렸습니다. 그랬던 그가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다고 결단했습니다. 바리새인도 그리 결단하기가 어려운데..., 돈벌레 삭개오가 그런 결단을 드렸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남의 것을 부당하게 빼앗는다면 4배로 갚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구약 율법에서는 토색하면 1/5을 더해서, 즉 120%로 배상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120%가 아닌 400% 배상을 약속했습니다. 율법보다 훨씬 높은 기준으로 결단을 드렸습니다.
그의 결단이 놀랍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재물의 ‘재’자도 꺼내며 압박한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이를 보면, 삭개오는 아무 생각 없이 돈만 보며 살고 있는 그런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삶에 대해 깊은 문제의식을 안고 살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삭개오도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아는 데로 행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며, 돌이켜야 하는 줄 알면서도 돌이키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너무 와버렸다는 생각, 이제는 돌아가도 받아줄 세상이 없다는 절망에 눌려 체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 남모르는 번민으로 잠 못 이루는 그런 날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누군가 찾아와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도와주었다면, 그는 언제든지 결단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 점에서 지난 주 메시지에 나왔던 부자 청년과 대조됩니다. 부자 청년은 어릴 때부터 계명을 지키며 영적으로 완벽히 준비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말씀을 듣고 부담스러워하며 돌아갔습니다. 그 때문에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말씀이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지금 삭개오는 바늘귀를 통과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예수님은 ‘오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의 반대말은 ‘하는 것 봐서’입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구원을 주는 것을 조금의 망설이지 않습니다. 이는 삭개오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은 아브라함의 혈통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처럼 믿음을 준비했다’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무 결점 없이 퍼펙트하게 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결점투성이였습니다. 기근을 만났을 때 약속의 땅을 떠나 애굽으로 내려갔고, 두려움으로 아내를 누이라 속였습니다. 여종 하갈을 첩으로 들이기도 했고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한다’는 치명적인 말을 내뱉기도 했습니다. 다만 부끄럽고 연약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때마다 회개하고 믿음으로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지금 삭개오의 믿음이 그러합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한번 세리는 영원한 세리였습니다. 한번 죄인은 영원한 죄인, 한번 실패자는 영원한 실패자..., 많은 이들이 그런 고정관념에붙잡혀 새로운 출발을 하지 않습니다. 상처받은 과거, 부끄러운 과거, 떳떳하지 못한 과거에 붙잡혀 오늘 희망을 놓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운명주의와 트라우마에 갇혀 사는 것이 고통스러운데도, 다시 일어서고자 하지 않습니다. 엄두가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고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실제적이면서도 구체적인 믿음의 결단을 드렸습니다. 그는 과거의 무게와 압박을 이기고 오늘 새롭게 출발한 믿음의 용사입니다. 그러므로 정죄받아 마땅한 세리장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소중한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1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잃어버렸다’는 말씀은 원래 소유가 하나님이었음을 전제로 합니다. 인간을 깊숙이 파고 들어가보면 진화의 흔적이 아닌 하나님 형상의 흔적을 찾습니다. 인간은 본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갖고 별빛처럼 순수와 꿈을 가진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죄 아래 팔려갔습니다. 세상에 흔들리고 유혹에 끌려가고 두려움에 떠밀려 좌표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떠나면 끝없이 추락합니다. 어떤 이는 ‘저것도 인간이야?’라는 말이 튀어나오게 할만큼 화인 맞은 영혼으로까지 추락합니다. 죄의식도 없고 양심의 가책도 없는 그런 인간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삭개오를 그런 인간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들에게 삭개오는 잃어버린 자가 아니라 세상을 망치는 암적 존재였습니다. 원래부터 하자로 태어난 인간, 조금도 희망 둘 수 없는 어둠만 있는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죄하고 격리하고 짤라내는 것만으로 죄를 막을 수 없습니다. 이는 근본적으로 사탄과의 영적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언제 어디서나, 애굽에서나 광야에서나 가나안에서나 끊임없이 공격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빼앗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신 이유입니다. 예수님이 그 많은 능력의 소유자임에도 불구하고 고난받고 죽임당하고 다시 살아나야 하는 길을 가야 하는 이유입니다. 삭개오의 집에 들어간 이유이며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는 이유입니다. 생명을 살리려면 생명을 내놓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들을 찾기 위해 대속제물이 되십니다. 제자들은 반복된 예수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이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뭇사람은 예수님을 오해하고 수군거렸습니다. 이들의 눈이 가려진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잃어버린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몰랐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잃은 자를 찾도록 찾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하려면 제일 먼저 나같은 찾아 구원하신 예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또한 잃어버린 자들이었다가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누군가 열심히 나에게 관심 주고 기도해주고 말씀을 주고 부지런히 찾고 찾았기 때문에 오늘 믿음의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만약 나를 죄인이라고 짤라 버리고 포기했다면, 나는 여전히 잃어버린 인생을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세상에는 삭개오같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겉보기에는 찔러도 피한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으나 속으로는 무화과나무에라도 오르지 않으면 견디기 힘든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만 내가 소망이 없다고 짤라버리고 더 이상 관심두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갈수록 메말라가는 세상만을 탓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잃어버리고 영적으로 눈이 어두워지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보내시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말고 힘써 도와야 합니다. 그것은 분명 고난스러운 일이며, 때로는 자아가 죽는 아픔을 각오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힘쓰고 수고하는 자리로 올라갈 때, 잃은 자를 찾으러 오신 예수님이 보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몇몇 삭개오같은 사람들이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된 역사가 끊이지 않고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