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박씨의 시작과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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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박씨들은 작들의 문중을 위해서 이렇게 노력들을 하고 있는데
우리 대종회는 손에다가 쥐어주어도 모르로 속함대군으로 놀아 난다.
함양박씨(咸陽朴氏)의 뿌리
咸陽朴氏의 시조(始祖)는 박선(朴善) 이시다
신라(新羅) 시조왕(始祖王) 박혁거세(朴赫居世)의 後孫으로 고려조(高麗朝) 인종(仁宗1123)~의종(毅宗1171)때 문과(文科)조청대부(朝請大夫)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내고 증(贈)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와 <함양군(咸陽郡)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함양군(咸陽君)에 봉작(封爵)이 되었으니 박선(朴善)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본관(本貫)을 함양(咸陽)으로 해서 세계(世系)가 시작(始作) 되었다.
5世 신유(臣蕤)는 고려 고종조(高麗 高宗朝)1237년 약관(弱冠)25歲에 김경손(金慶孫)과 함께 호남에서 일어난 이연년(李延年)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응천군(凝川君)에 봉해졌고 贈金紫光祿大夫 上柱國判三司事 시호(諡號)는 충질(忠質)이다.
여섯 아들을 두어서 6之派로 갈라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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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명재의 후등에는 1979년에 대종회장 남순과 부회장 시언이 속함대군의 설단과 단비를 세워서 함양박씨의 시조처럼 시제를 올리니 대전의 성종회장이 여기에 5대를 추가하니 대종회는 말없이 시조를 중시조로 미러내니 4파에서는 때가 왔구나 하고 1985년에 만들어놓은 함양박씨 소원록을 4파홈페이지에 올렸다.
여기에 분통이 치밀어서 시조의 수정을 추궁하면서 소원록의 실체를 찾으니 신라소원록이 나오고 1760년에 밀양박세욱이 발표한 기록을 찾아서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추궁을 했더니 신라소원록의 해제문을 알려주면서 이보다 먼저만들어진 문헌이 있을것이라고 했었다.
이렇게 해서 노력끝에 찾은 속함대군의 뿌리를 찾는 과정을 소개하면서 나의 임무는 끝을 맺으면서 모든 해결책은 대종회로 돌립니다.
이것이 1파 군기소감공파의 동정공파 파보이다.
이것이 함양박씨가 대대로 전해오는 족보라고 자랑을 하고 있다.
대종회에는 이런 기록이 없고 동정공파가 함양박씨대종회의 머리 위에 올라 앉자서 속함대군의 춤을 추고 있다.
신라8대군의 봉군사실이 역사기록에는 전거가 없다?.
경명왕의 8대군 분봉사실을 근거도 전거도없이 조작된 신라소원록(新羅遡源錄)의 8대군 분봉사실의 여파로 확고헀던 함양박씨의 시조 1世 상서공 휘 선(善)을 中祖로 밀어낸 함양박씨 派譜의 실체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받고있는 속함대군의 피혜의 실례이다.
소원록의 8대군 봉군한 기록사실이 경명왕재임시 기록한 사실과 일치하기때문 에 소원록의 내용을 발표를 했다면 그 전거를 알려 주시고 전거도 없이 발표를 했다면 임의로 조작된 소원록의 발표는 잘못이라고 할수 있으니 소원록의 근거를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경명왕의 8대군의 조작봉군한 사실때문에 모든박씨들은 시조를 바꾸어 놓았는데 지금에 와서 이사실이 날조된것이라 한다면 그 엄청난 피해를 누가 보상하겠습니까?. 신중한 판단을 기다리겠습니다
박세욱이 1760년에 발표한 소원록을 근거로 밀양박씨(密陽朴氏) 壬寅譜 國譯文 을 만든것이고 소원록에 上書名帖」에 등재된 이름을 보며는 동조자들이 있었다는 것이고 조작해서 음성적으로 각 문중에 유포가 되어 사실로 인정을 받아 오던것을 밀양박씨 문중에서 1931년에 박씨선원보(朴氏璿源譜)에 8大君의 5代까지를 만들어 넣어서 시조를 36世로 해서 55世까지의 世譜를 만들었다.
2005년에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배미정(裵美貞)의 신라소원록의해제문이 나돌면서 함양박씨 부사공파 홈페이지에 <소원록에 속함대군은 함양박씨의 시조이고 8대군의 한분이다>
했기에 경명왕의 분봉사실의 끈거를찾고 있던 나에게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
하로 종일검색끝에 한빛신문에서 확인을 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소장된것을 알아내어 위와 같은 의견을 교환했고 <박세욱이 1760년에 발표한 소원록>을 제일 처음으로 내가 찾아내었기에 여러 박씨들 문중에게 알려 드린 것이다.
1662년(현종 3) 박승건(朴承健)이 간행한 밀양박씨의 족보. 분량은 1책이며, 호남에서 목판으로 간행되었다. 표제는
“밀양박씨족보”, 판심제는 “밀양세보(密陽世譜)”이다. 크기는 반곽 가로 19.5cm, 세로 24cm이며, 유계(有界), 주쌍행(註雙行), 선장(線裝), 저지(楮紙)이다.
박승건의 발문에 따르면, 밀양박씨는 구보가 있었으나 임란을 거치면서 전해지지 않자 박승건의 아버지 박안성(朴安性)이 동종의 합의와 충청감사 박계현(朴啓賢)의 도움을 바탕으로 1621년(광해군 13) 에 족보를 간행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신유보(辛酉譜)이다. 그러나 이 신유보는 상당수의 후손들이 누락되는 등 미비점이 많아 박안성은 보유 작업에 착수하여 원고를 정리하였으나 간행하지는 못했다.
이에 그 아들인 박승건이 전라도 판관으로 부임하여 밀양박씨 외손이던 감사 이태연(李泰淵)의 전적인 협조를 받아 간행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 족보는 사실상 신유보의 개간본이며, 편찬자는 박안성이다.
체제는 표지(表紙), 신라팔대군형제분봉연혁(新羅八大君分封沿革), 보도(譜圖) 상·중·하, 발문(跋文)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표지의 우측에는 묵서(墨書)로 “강희 원년 임인에 간행했다(康熙元年壬寅刊)”라는 간기가 표기되어 있다.
신라팔대군 형제분봉연혁은 신라 경명왕의 8대군의 분봉 사실과 이를 바탕으로 제 박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설을 약기한 것이다.
장자 밀성군(密城君)은 밀양박씨의 시조, 2자 사벌군(沙伐君)은
상주박씨의 시조, 3자 완산군(完山君)은 전주박씨의 시조, 4자 죽성군(竹城君)은 죽산박씨의 시조, 5자 속함군(速咸君)은 함양박씨의 시조, 6자 강남군(江南君)은 순천박씨의 시조, 7자 고양군(高陽君)은 고령박씨의 시조, 8자 월성군(月城君)은 경주박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견해인 바 박씨의 분파연혁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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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1파 군기소감공파의 동정공파 파보이다. 검은색 족보
이것이 함양박씨가 대대로 전해오는 족보라고 자랑을 하고 있다.
대종회에는 이런 기록이 없고 동정공파가 함양박씨대종회의 머리 위에 올라 앉자서 속함대군의 춤을 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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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한 선원세보는 1955년도에 밀양박씨들이 여러 박씨들의 세계표를 작성해서 우리의 시조를 36世로 해 놓았다.
영명재지 3간을 수정발행을 하면서 속함대군을 받아 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전화도 받지않으며 한번은 여자가 받으면서 전화를 잘못걸었다고 끊어 버린다. 이것이 종사연구위원장의
현재의 실정이다. 밀양박씨들은 경명왕자의 팔대군 분봉사실을 정당화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대 왜?. 함양박씨의 선조들은 400년을 모셔왔는데 버릴수가 없으며 종사연구위원들은 1명도 반대하는 사람은 없다고 한다. 그렇다며는 현상태를 그대로 유지하자는 것인데 1파의 동정공파의 파보대로 유지한다는 것이 아닌가?.
첨부한 파일은 밀양박씨들이 1955년도에 작성해서 세상에 유포된 글은 복사본으로 보관중인 것을 정성을 다해서 첨부하오니 세상은 이렇게 시시각각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주기를 바랄뿐이다. 1662년도의 임인보를 시작으로 경명왕자 8대군의 분봉이 여러박씨들의 시조가 될 것이다.를 시작을 해서 100년후에1760년 박세욱의 신리소원록의 발표를 하면서 신라가 멸망을 하고 고려를 거처서 800년을 말없이 지나왔는데 이조의 영조대왕의
36년에 박세욱의 신라소원록을 시작으로 밀양박씨들의 주손역활을 시작으로 세상은 하로가 다르게 발전을 거듭하고 있어도 누가 감히 앞장을서서 재동을 걸고 나서려고 할 사람이 있겠는가?....
내가 할말은 이것으로 끝을 맺으면서 함양박씨의 무궁한 발전을
기대하면서 85세의 세상을 살아오면서 내 나름대로 정성을 들여 왔으나 이제는 더 버티어 나갈수가 없어 여기에서 끝을 맷는다.
2017년 1월 13일
2파 31世 晩悟 朴魯龍 謹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