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헌부장령 오공 상유(저암공, 19세, 오시수의 장남) 연보
공의 성은 오요 휘는 상유니 자는 경언이요 호는 저암이니 동복인이라.
효묘9년 무술 1658년 2월 23일에 공이 훈도방주자동에 탄생하시니 즉 공의 외증조 길성위 권공의 집이라.
현묘2년 신축 1661년에 공이 4세가 되었으므로 권 부인께서 공에게 새 옷을 주었더니 공이 여러 날을 입지 않으시니 권부인께서 날이 찬데 왜 옷을 입지 않느냐? 하니 공이 답하며 계부(전주공 오시형)께서 아직 옷을 입지 않았으니 한 집안에 있으면서 어찌 먼저 입을 수 있습니까? 하시니 공의 조고 관찰공이 들으시고 말하시되 4세아가 인후한 마음이 이 같음은 일찍이 듣지 못했다 하시고 칭찬해마지 않으시더라
공이 6세에 독서하실 줄 알았고 열 살에 능히 글을 지으셨다. '천만의 산을 깍아내면 천지가 한 눈에 트이겠다.'하였고 또한 1구는 '문이 동해 바다에 닿았으면 붉은 해가 먼저 비치리다.'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칭송하여 일시에 회자되었다.
현종 15년 갑인 1674년 공이 17세에 상해(초시합격)하다.
을묘 1675년 18세에 사마에 중하다.(성균진사)
무오 1678년 공 21세 3월에 문과 증광시 병과에 뽑히니 의정공(수촌공)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25세에 등과하였는데 선고께서 너무 이르다고 경계하시던 말씀이 아직도 귀에 남았거늘 금일 너는 나보다 4년이나 앞서 등과하였으니 내가 너무 과분한 것을 근심하노니 다시 글을 읽고 10년후쯤 출사해도 늦지 않으리라 하시니 대개 공이 문과에 급제한지 3년에도 승문원 정자에서 옮기지 못했더니 4월에 가주서에 제배되어 사정에 부하였고 6월에 승문원에 권지하다
기미 1679년 겨울에 승문원 부정자에 승서되다.
경신 1680년 2월 승문원 정자에 승서되었고 5월에 의정공을 배행하여 삼수군 배소에 가시고 윤8월에 의정공 배소에서 모부인 상을 맞아 건천동 보제로 성야에 분상하다.
신축 1681년 6월에 의정공의 상고를 맞으시고 3년을 불견천일하고 무시로 곡읍하여 거의 루수가 말라서 성혈이 되고 양안이 실명할 지경에 이르렀다.
을축 1685년 7월에 왕부인(조모) 윤씨의 상사를 맞으시다.
기사(1689년 3월에 대신이 진달하여 6품관에 승서되어 바로 성균관 전적에 배하고 4월에 병조좌랑 겸 춘추에 제배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경오 1690년 정월에 예문관 검열에 천선되었다. 바로 예조정랑 묘도감랑청에 제배하고 정원이 계청하여 해운판관에 이배되다.
임신 1692년 정월에 사간원 정언 겸 춘추관 기사관에 옮겨 제배되어 재차 사직소를 내고 체임되었다가 8월에 또 정언에 제하고 9월에 서천군수에 제배되었다.
계유 1693년 8월에 감사 홍만조(공의 이모부)로 상피되어 체임되었다.
갑술 1694년 봄에 사헌부 장령 겸 춘추관 편수관에 제배되어 말미를 받아 공주에 내려갔더니 경연에서 계청하여 체임되었다.
을미 1715년 공이 58세로 5월 22일 천수를 다하여 공주 선영하에 마치시다.
기사 경화된 후에 비록 공이 국은을 입었고 의정공의 복관신설됨을 감격히 여겨 마지못해서 관도에 올랐으나 청현요직에 오르지 않으려 한 것은 공의 뜻이었으며 당시 하계 권공 유가 문형을 잡았으므로 항상 공을 내직이나 한각에 천하려 한즉 공이 청현한 자리라 사양하시고 눈물로 간청하니 요직에 천임하자는 의론이 수그러졌다 하고 전형하는 이가 해운판관 자리를 공에게 돌리니 공이 말하기를 역시 중요한 직위이니 내가 어찌 감이 당하리요 하니 전장(이판) 유공 명현이 듣고 또한 추연히 말하되 해운판관이 청요하다하면 조정에 있을 벼슬이 없겠다 하고 끝내 시직을 제수하였다.
갑술년에 이르러서는 공이 더욱 세사에 무의하여 향리에 은퇴하여 선영하에 거택을 정하고 두무사객하고 시구와 영탄으로 소견하시고 만년에는 경전을 정구하시어 격어와 요훈을 초출하여 누간책권을 서적에 두시다.
전기와 격어 요훈책자는 소재를 알지 못하여 병탄할 일이니 후인의 수탐완벽하기를 기다리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