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종려)주일 설교 모음
◆① 제목: 십자가의 길 예수님의 고난이 오늘 오후부터 시작해서 금요일까지 계속됩니다. 그래서 이번 주간을 고난 주간이라고 합니다. 기독교 입장에서 보면 일 년 중에서 이번 주간이 가장 경건하고 엄숙하며 장엄하고 뜻이 있는 주간에 해당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아픈 마음으로 십자가의 길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고난 주간 첫 날인 오늘은 종려주일 혹은 고난 주일이라고 합니다. 2천 년 전 오늘 예수님은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을 하십니다. 그때 군중들은 옷을 벗어서 길에 깔고, 종려 나뭇가지를 꺾어 들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왕으로, 메시야로, 열렬히 환영하며 환호했습니다. 후대에 와서 사람들은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종려주일’이라고 불렀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교회들이 이 날이 되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시가행진을 했다고 합니다. 둘째 날인 내일 월요일은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신 날입니다. 거룩해야 할 성전에서 불결하고 속된 시장 바닥과 같은 문란해진 성전의 모습을 보시고 주님은 분노하시며 장사꾼들을 모두 내보내시고 성전을 척결하십니다. 그리고 그 분노를 길을 가시다가 죄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는 것으로 나타내십니다. 타락할 대로 타락해 버린 예루살렘의 도성, 그리고 그보다 더 타락한 제사장들의 모습을 보시고는 그들에게 쏟을 저주의 진노를 나무에게 대신 쏟아 부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둘째 날에 있었던 일입니다. 셋째 날인 모레 화요일은 예루살렘 성을 내려다보시며 눈물을 흘리신 날입니다. 앞으로 40년만 있으면 망해버리고 말 이 도성의 앞날을 주님은 일찍부터 알고 계십니다. 그 날, 이 도성이 처참하게 무너져 내릴 그 때를 보시면서 그것도 모르고 오늘 흥청망청 살아가고 있는 저 우매한 백성들을 바라보시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결국 이 도성은 기원 70년에 로마의 디도 장군이 이끈 군대에 의해서 처참하게 무너져 내려 110만 명이 불에 타 숨지고 도성은 산산이 조각나는 수난을 겪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십자가의 행렬을 따르면서 눈물 짓던 여인들을 향해서 나를 위해서 울지 말고 너와 너희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고 타이르셨던 것입니다. 넷째 날인 수요일은 십자가를 지기 전에 모처럼 제자들과 함께 하루를 휴식하신 날입니다. 그런데 그 날도 가롯 유다는 열심히 돌아다니면서 예수를 팔기 위해 흥정을 하고 다녔습니다. 다섯째 날인 목요일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날입니다. 그래서 이 날을 세족 목요일이라고 부릅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아시고는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마음껏 사랑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고는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나누신 후에 주님은 제자들을 이끌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기도하기 위해서 올라가십니다. 이것이 다섯째 날에 있었던 일입니다. 여섯째 날인 금요일은 고난 주간의 절정입니다. 이 날이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신 날입니다. 이 날 예수님은 체포되어 가야바 법정에서 심문을 받으시고, 빌라도 법정에서 심문을 받으시고, 마침내는 군중들에게 맡겨져서 가시관을 쓰시고, 붉은 죄수복을 입으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이 날이 A.D.29년, 니산월, 15일 금요일 오전 9시에 못 박혀서 여섯 시간 동안 고생을 하시다가 오후 3시에 운명을 하심으로 예수님은 그 한 많은 인생을 마치셨습니다. 그래서 이 날을 ‘성 금요일’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토요일은 안식일입니다. 모든 유대인들은 이 날은 쉬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금요일 저녁에 매장되어 토요일을 무덤에서 지내시고 제 3일 안식 후 첫 날인 일요일 새벽에 부활하십니다. 모든 악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모든 부정적인 것들을 극복하시고, 모든 부조리를 일소하시고, 보란 듯이 살아나셔서 우리들에게 부활의 소망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다음 주일 새벽이 부활의 아침입니다. 그 후 이 세상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날을 주님의 날로 선포하고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그래서 오늘 주일이 주님의 날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기독교를 말할 때 십자가를 빼 놓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 십자가는 그렇게 아름답거나 유쾌한 것도 아니고 뜻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십자가는 통나무 두 개를 서로 엮어 3m 높이로 세워 놓고 그곳에 흉악한 죄수들을 잡아다가 매달아 놓고는 진을 빼서 죽이는 곳, 그곳이 십자가입니다. 이를 테면 사형틀입니다. 바로 이 같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신 것입니다. 그것도 창조자가 피조물들에게 처참하게 죽으신 자리입니다. 그래서 오늘 십자가가 기독교의 상징이 된 것입니다.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이고 10년 후에 화폐에다 이 십자가 모형을 새겨 넣었습니다. 30년 후에 가서는 죽은 사람의 관 위에다 고난의 표시로 이 십자가 모형을 새겨 놓았습니다. 그리고 4세기 후에는 교회달마다 십자가를 만들어서 종탑 위에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것이 오늘 날에 와서는 교회들마나 십자가를 높이 지붕 위에 달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 그 뒤부터 사람들은 고난을 표시할 때 으레 십자가라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의 몸에 지닌 질병을 가시라고 표현했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뜻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어려운 일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는 십자가가 주어졌다고 말입니다. 근심거리가 생겼을 때도 사람들은 십자가가 생겼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집집마다 가보면 십자가 없는 집이 없습니다. 겉에서 보면 행복하게 보이는 집에도 좀 깊이 들여다보면 나름대로 다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네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면 다 십자가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내게 주어진 십자가는 남이 대신 져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남에게 전가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 십자가는 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십자가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늘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내 십자가는 너무 무거워, 내게 주신 십자가는 너무나 커, 하나님은 왜 나에게만 이렇게 큰 십자가를 주셨는지 몰라”하고 푸념하며 불만스럽게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다 어느 날 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습니다. 꿈 속에서 십자가를 지고 언덕 길을 올라가고 있는데 그곳에 십자가가 많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때 어디선가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가벼운 것으로 바꾸어 지고 가거라”. 이 사람은 너무나 반가워서 지고 있던 십자가를 집어 던지고는 가장 작은 것으로 골라 졌습니다. 빛이 나고 보석으로 장식한 가볍게 생긴 것으로 져 보니까 묵직했습니다. 그래서 속을 들여다보니까 그곳에는 아픔과 고뇌가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다른 것으로 골랐습니다. 이번에는 장미꽃으로 장식해 놓은 십자가를 골랐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를 지자마자 찔러대기 시작하는데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곳에는 각종 한숨과 질고가 가득하게 들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다시 고른 것이 지금까지 자기가 지고 있다가 무겁다고 집어 던진 그 옛날의 십자가였습니다. 그 때 어디선가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아니, 그 것은 네가 무겁다고 던져 버린 그 십자가 아니냐!”, “네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이것이 가장 가벼운 것 같습니다.” 그런 후 이 사람이 그 십자가를 지니까 그렇게 가벼웠다고 합니다. 얼핏 보면 남들은 모두 십자가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있어도 모두 가볍게 보입니다. 내게만 제일 무거운 십자가가 주어진 것처럼 생각되어 불평을 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 십자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오죽하면 그 고난들을 십자가라고 했겠습니까? 오늘 본문 속의 예수님의 모습을 보십시오. 지금 겟세마네 동산 위에 올라와 있습니다. 오늘 밤이 지나고 날이 밝으면 제자의 배신으로 체포됩니다. 지금 산 아래에는 군인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이제 날이 밝으면 금요일,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이 십자가는 누가 대신 져 줄 수가 없습니다. 져 줄 일도 아닙니다. 어떻게 면할 도리가 없습니다. 이 절박한 시간, 노무 괴로워서 몸부림을 치며 기도를 합니다. 혼자서는 너무나 고독해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얼마나 외로운 시간입니까? 그런데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심정을 모릅니다. 그래서 잠만 잡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얼마나 처절하고, 외롭고, 고독한 자리입니까? 그래서 견디다 못해서 절규합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 소리가 그냥 나올 수 있는 소리입니까? 피와 땀과 눈물이 범벅이 되어서 인류의 모든 고통과 질고와 죄와 형벌과 죽음의 전부를 한 몸에 걸머지고 가장 어둡고 부정적인 자리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하고 하나님을 불러 가며 고뇌 속에서 절규하는 이 예수의 처절한 모습, 이 모습을 우리가 어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곳이 누구를 위한 고난이고, 누구를 위해서 흘리는 피요, 아픔입니까? 여러분 어떠하십니까? 오늘 고난 주일 아침에 우리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리며 기도하시는 주님의 안타까운 모습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죽어가며 부르짖는 고뇌에 찬 저 절규의 소리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독생자의 저 절규하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끝내 세상 구원을 위해서 아들을 포기하신 하나님의 저 저미는 아픈 마음도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주님의 그 고난에 만분지 일이라도 동참하게 되고 또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때로 내 앞에 닥칠 심자가도 기쁘게 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 이정익, <교회력에 맞춘 절기설교>(상), 생명의말씀사, 1994, pp.99~106
이 세 절의 말씀은 수난절의 설교에 매우 알맞습니다. 이 말씀은 물론 그 이전의 말씀들과 떼어 놓을 수 없을 만큼 연결되어 있습니다. 1. 30절의 말씀은 인자가 겪으신 수난의 마지막이고 궁극적인 국면을 두드러지게 말해 줍니다. 그 밤 그 순간에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는 일은 완성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가 그 부끄러움을 당하심으로써 마지막이고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을 하나님께 드리고 계셨던 것입니다(31절). 그렇게 하시면서 예수님 자신 또한 영광을 받고 계셨습니다. 높아지실 날이 가까워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혹심한 고난을 향하여 나아가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이 발걸음은 예수님의 몸의 변화, 즉 예수님이 영광으로 들어가실 것을 이미 널리 말해 주고 있었습니다. 2. 33절에는 한 새로운 내용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소자들아, 내가…너희에게…이르노라” 예수님은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그 몇 명의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이 말씀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이 제자들은 믿음의 세계 전체를 이미 대표하고 있었습니다. 믿는 이들의 공동체 전체는 이 몇 명의 제자들 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갖고 계시는 그 마지막 생각을 그들과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계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이 그리스도께서 가시는 이 길을 따라갈 수 없음을 알아야 했고, 또 이해해야 했습니다. 세상이나 교회나 그리스도만이 하시도록 그에게만 주어진 것을 해 보려고 흉내 낼 수는 없었습니다. 예수님만이 아버지께서 예정해 놓으신 그 길을 밟아 가실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세상을 위하여 그 길을 걸어 가셔야 했습니다. 3. 그러나 34절에는 놀랍게도 한 새 계명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명령은 서로의 사랑을 요구하고 있다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그대로 반복할 것을 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서로 사랑하라”는 이 직접 명령에 반응을 보입니다. 사랑은 예수님을 본 사람들의 한 새 본성이 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교회와 교회에 속한 사람들을 통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세상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도록 하려면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이라는 조건이 먼저 실행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이 예수님의 이 말씀에 의해서 예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고는 말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보여주는 행위가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보여 주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바로 이 행위가 세상에서 교회가 가진 특징 있는 표적입니다. ③ 제목: 성찬의 의미(성찬 예배를 위한 설교 자료) 떡과 잔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들 소박하면서도 감동적인 요소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향하여 무엇을 말해 주고 있습니까? 1. 첫째로 이 떡과 잔은 우리를 향하여 “기억하고 희망을 가질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여러 번 들어왔습니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그러면 우리는 왜 그리스도를 기억해야 합니까? 전에 있었던 그 어떤 일을 돌이켜 보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전에 있었던 일을 돌이켜 봄으로써 얻어지는 새로운 이해력으로 앞을 내어다 보기 위해서입니다. 누군가가 말했듯이 우리는 과거를 거기에 붙들어 매는 말뚝으로서가 아니라 미래를 안내해 주는 안내판으로서 봅니다. 우리는 “내 눈이 재림하시는 주님의 영광을 보았네”라는 찬양 그대로 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일단 우리가 그 사실을 알아보게 되면 우리는 새로운 희망과 새로운 확신으로 앞을 내어다 보게 됩니다. 기억하고 희망을 가집시다. 2. 주님의 만찬석에서 우리에게 두 번째로 들려지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 그 말씀이 있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받아먹으라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때 주님은 우리가 바치라고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단지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우리가 무엇을 받기 위하여 믿음을 가지라는 요청은 현대 세계 속에서 가장 어려운 요청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것을 하라, 혹은 저것을 하라는 요청 또는 강요를 받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거의 본능적으로 “그러면 무엇을 얻게 되는가?”라고 묻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잠시 이 현대적 의심의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의심의 마음은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선물을 받지 못하도록 문을 닫아버리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주심은 부모가 자녀들에게 무엇을 주시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는 어떤 이기적인 동기로부터 자녀에게 선물을 주지 않습니다. 주면서 얻는 기쁨 때문에 선물을 줍니다. 이 사실은 복음에 관한 주목할 만한 소식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의 가장 좋은 인사들을 우리들의 생명 속에 넣어 주시도록 하나님을 조를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우리는 우리가 받기 위하여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실 것을 하나님께 구하면 됩니다. 3. 마지막으로, 주님의 초대가 있습니다. “와서 하나가 되라”. 왜냐하면 우리는 이 성찬을 들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한 백성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서로 화목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때로 사람들은 이 화목에 관하여 말합니다. 지금 우리가 이 성찬의 자리에서 말하고 있는 이 요청에 대해서는 스스로 거리껴하고 있으면서 말입니다. 헌터(John Hunter)는 말했습니다. “자기의 죄를 참으로 진지하게 회개하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좋은 일은 한다” 이 말을 듣고 어떤 사람들은 미음에 거리낌을 갖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들이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좋은 일을 하려고 해봤지만 그렇게 하기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 사실을 깊이 믿습니다. 즉 자기의 힘 모두를 기울여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좋은 일을 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지금 이 성찬의 식탁으로 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고 바울이 말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이웃과 좋은 관계를 다시 갖기 위해서 우리는 이 식탁으로 다가와야 하겠습니다. 성찬의 가장 깊은 의미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교육부, <1984 목회자료>, 총회교육부, 1983, pp.27~29
칠레의 산디아고(Santiago)에서 비스듬히 누워있는 십자가의 모양을 본 일이 있습니다. 안내하는 분의 설명이 이러했습니다. “저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메고 가시는 모양의 십자가입니다.” 그렇게 설명을 듣고 보니 정말 예수께서 메고 가시는 십자가의 모습 같이 보였습니다. 그러니 주님을 사랑하고 따르는 백성들은 주님께서 어려운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가신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그러면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삶을 말하는 것입니까?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요구에 응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1. 자기를 부인하라. 첫째,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사람 앞에서도 그리고 자기 앞에서도 교만은 버려야 합니다. “네가 만일 지혜로우면 그 지혜가 네게 유익할 것이나 네가 만일 거만하면 너 홀로 해를 당하리라”(잠 9:12)고 했습니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잠 27:1)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약 4:12)하고 묻고 계십니다. 지가를 부인하지 못하는 사람은 교만한 마음을 버리지 못하며 이것은 결국 이웃을 함부로 판단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내가 용납지 아니하리로다”(시 101:5)고 말씀하십니다. 어거스틴은 “교만한 천사보다 눈물 흘리는 죄인이 더 좋다”라고 했습니다. 교만한 천사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쫓겨 내려와 사단과 그 따르는 귀신의 무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삽시다. 그것은 교만한 마음을 버리는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 앞에서 교만은 금물입니다. 둘째, 겸손해져야 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어리석은 자를 보존하시나니 내가 낮게 될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시 116:6)고 했습니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 4:10)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5:6)고 했습니다. 위대한 사람일수록 겸손의 덕은 더 합니다. 사도 바울 같은 훌륭한 신앙의 인물은 자기 자신을 가리켜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엡 3:8)이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에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돌아보지 아니하십니다(욥37:24).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살기 원하십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참된 겸손인지 그것을 생각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겸손의 참된 길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말씀 속에서 발견할 수 있게 해주실 것입니다. 2. 자기 십자가를 지라. 어떤 성도 한 분이 항상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에 대해 불만이 많았습니다. 한 번은 꿈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 뵙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곧 예수님께 불평을 털어놓았습니다. 자기의 십자가가 자신에게는 너무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으신 채 주변에 널려 있는 그 많은 크고 작은 십자가를 바라보시더니, 그 사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냥 자신에게 맞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십자가를 골라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기뻤습니다. 드디어 그 자신에게 꼭 알맞은 십자가를 자기 자신이 직접 고를 수 있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는 그 많은 십자가 중에서 자기에게 꼭 알맞은 십자가를 고르느라고 땀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어떤 것은 크기는 알맞은데 거칠었습니다. 어떤 것은 대패질이 잘 되었는데 너무 무거웠습니다. 온종일 찾아보아도 자신에게 맞는 십자가는 쉽게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해가 질 때쯤 되어 드디어 자신에게 꼭 맞는 십자가를 하나 찾아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는 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고 “예수님 찾았습니다. 제게 꼭 맞는 십자가를 드디어 찾았습니다.”하고 외쳤습니다.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고 계시던 주님께서 한 마디 하셨습니다. “그게 너한테 꼭 맞느냐? 그 봐라. 내가 처음부터 잘 골라주지 않았느냐? 지금 네가 꼭 맞는 것이라고 기뻐하며 가지고 온 그 십자가가 바로 조금 전까지 네가 지고 있다가 오늘 여기 도로 가져다 놓은 바로 그 십자가이다.” 그가 다시 가만히 살펴보니, 지금 자신이 골라 온 그 십자가가 바로 자신이 메고 온 그 십자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리고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적절한 십자가를 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지고 가는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달게 지고 주님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를 진다고 하는 말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무조건 고생만 하면 이것이 십자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당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고난을 당하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내가 내 십자가를 잘 지고 가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됩니다. 3. 십자가를 지고 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좇으라. 예수님께서 본을 끼쳐 따라오게 하셨습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하였습니다. 나폴레옹이 헤레나 섬에 유배되어 그 인생의 말년을 보내고 있을 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나는 칼로 세계를 정복하려 했으나 실패해 버렸다. …그러나 예수라는 이는 십자가로 세계를 정복하려 했고 그는 성공하였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양 옆에 함께 달린 강도들은 자기들의 죄 값으로 십자가를 졌습니다. 그에 앞서 구레네에서 온 시몬은 지기도 싫은 십자가를 억지로 졌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인생을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자원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주님의 은혜는 말할 수 없이 크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연약하고 죄 가운데 빠지기 쉬운 인생들은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를 통한 그 사랑을 생각하며 기쁜 마음으로 우리에게 맡기시는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할 때 우리의 모습을 보시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될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을 깊이 생각해 봅시다. 걸어가야 할 바른 길이 보일 것입니다. ※ 나겸일 외, <목회와 설교자료>, 한국장로교출판사, 2001, pp.9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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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하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