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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부모님 탄생과 섭리적 준비시절 (1920~1959)
하나님께서 인간조상인 아담과 해와의 타락으로 예수님을 이 땅에 메시아로 보내 구원섭리를 전개 하셨지만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가 불신하여 책임을 다하지 못함으로써 다시금 한민족 가운데 인류의 구세주 재림주로서 참부모님을 보내셨다.
재림메시아 곧 제3차 아담으로 오신 문선명(文鮮明) 참아버님과 제3차 해와 곧 재림메시아의 성신실체 신부로 오신 한학자(韓鶴子) 참어머님을 보내신 것이다.
참부모님의 탄생으로 인해 하나님의 섭리는 최종 완성을 향해 나아가게 됐고, 1960년 성혼 이전까지 양위분은 하나님의 실체대상으로 서시기 위한 준비 노정을 걸으셨다.
1. 참아버님 성탄
참아버님께서는 1920년 음력 1월 6일 평안북도 정주군 덕언면 상사리 2221번지에서 부친 문경유 충부(忠父)님과 모친 김경계 충모(忠母)님 사이에서 6남7녀 중 둘째 아드님으로 탄생하셨다.
참아버님께서는 유소년시절을 전형적인 농촌 환경 가운데서 보내셨다. 자연에 대한 호기심과 탐구 열의가 남달랐으며, 어린 나이임에도 인근 사람들의 병고와 재난을 예견하는 등 특별한 영적 감별력으로 주위를 놀라게 하셨다.
참아버님께서는 7세부터 13세까지 몇 곳의 서당에서 한문 공부를 하셨다. 1933년 14세에 원봉학원에서 보통학교 편입시험 준비를 한 뒤 1934년 갈산면의 오산사립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하셨다. 그리고 1935년 4월 정주공립보통학교 4학년에 전학하셨다.
참아버님께서는 이 학교 졸업 후 상경하셔서 1938년 4월 12일 경성상공실무학교 전기과에 입학하시고 1941년 3월 8일 졸업하셨다.
참아버님께서는 1941년 4월 초 일본 와세다대학 부속 와세다고등공학교 전기공학과에 입학하셨다. 하지만 당시 전쟁 상황이 급변함에 따라 1943년 9월 30일 한 학기 조기졸업을 하시고 10월 중순 귀국길에 오르셨다.
2. 참어머님 성탄
참어머님께서는 1943년 음력 1월 6일 외가인 평안남도 안주군 안주읍 신의리 26번지에서 부친 한승운 대부(大父)님과 모친 홍순애 대모(大母)님 슬하 외동따님으로 탄생하셨다.
대부님과 대모님은 1934년 3월 5일 새예수교 이호빈 목사의 주례로 혼인하셨다. 그 후 대모님은 신령교단인 김성도씨의 성주교와 허호빈 씨의 복중교를 거치면서 9년간의 기다림 끝에 참어머님을 출산하셨다.
참어머님 외가는 7대 독자를 거쳐 조원모 할머니와 대모님과 참어머님께서 외동딸로서 3대 신부기반을 이뤄 나오셨다. 참어머님 4세경, 허호빈씨 모친이 참어머님께 “하늘의 신부가 되실 분”이라고 축복함으로써 모든 신령역사의 정성기반을 승계하셨다.
세 모녀 분은 1950년 3월 초 공산당국의 탄압정세 하에 남하하셨다. 그 후 참어머님께서는 1950년 4월 서울 효창초등학교에 입학하시고 제주도 서귀포 효돈초등학교 5학년에 전학하셨다가 1955년 2월 춘천 봉의초등학교로 전학해 이듬해 졸업하셨다.
1955년 12월 대모님께서는 성주교 정석천씨 안내로 청파동 전본부교회에서 참아버님을 뵙고 입교하셨다. 그 무렵 참어머님께서는 1956년 4월 서울 선정중학교에 입학하시고, 1959년 3월 졸업 후엔 성요셉간호학교에 입학하셨다.
3. 참아버님 소명과 수난
참아버님께서는 15세 무렵 가족들과 함께 장로교계 기독교 신앙에 입문하셨다. 그런데 입교 이전 영문 모를 집안 환란을 겪게 되고 신학문을 수학하시면서 현실과 장래 문제에 대한 심각한 의문들에 봉착하시게 된다.
참아버님께서는 그 해결점을 찾고자 생가 뒤편 야산이나 인근 묘두산 자락에 들어가 기도하셨다. 그러던 중 16세 되시던 해인 1935년 4월 17일 새벽 영적인 세계가 눈앞에 펼쳐지고 홀연히 예수님께서 현현하셨다.
예수께서는 심오하고 놀라운 사실들을 많이 말씀하셨다. 인류를 죄악과 고통과 불행으로부터 건져 내어 한많은 하나님을 해방시켜 드리는 일을 대신 맡아 달라고 당부하신 것이다. 참아버님께서는 그로부터 10여 년의 세월을 한결같이 하나님의 실존과 근본진리 탐구에 진력하셨다.
일본에서 귀국하신 참아버님께서는 장래 섭리적 사명자로서의 준비에 몰두하시게 된다. 그러던 중 일본 지하운동 관련 혐의로 1944년 10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경기도경찰부에 연행돼 혹독한 문초를 받으셔야 했다.
참아버님께서는 ‘삼팔선을 넘어라’는 하늘의 명령을 받고 1946년 6월 6일 평양에 당도하셨다. 그러나 이승만 첩자 혐의로 1946년 8월 11일부터 11월 21일까지 평양 대동보안서에 수감돼 빈사지경에 이르도록 문초를 받아야 했다.
이어서 사회질서 문란 죄목의 5년 형을 언도받고 1948년 2월 22일 이후 평양에서 3개월, 5월 20일 이후 흥남에서 2년5개월의 참혹한 수형생활을 감내하셔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참아버님께서는 1947년에 영계 43일 노정 승리후 원리말씀과 참아버님 사명에 대한 하나님의 어인(御印)을 받으셨다.
참아버님께서는 유엔군의 흥남 탈환에 의해 1950년 10월 14일 출감하시게 된다. 평양 체류 40일간 식구들을 수습하시고 12월 4일 평양을 떠나 1951년 1월 27일 부산에 도착하셨다. 이후 그해 5월 11일부터 《원리원본》 집필을 시작해 1년만에 완료하시게 된다.
4.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 창립과 새 출발
참아버님께서는 1953년 9월 17일 상경하시고 이듬해 5월 1일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를 창립하셨다. 새 출발과 더불어 이화여자대학교와 연세대학교 등 기독교계 교육기관을 중심한 원리운동이 전개됐다.
뜻있는 교수와 학생들이 통일교회로 밀려들자 학교 당국의 경계와 기성기독교의 반대역사가 시작됐다. 결국 학교당국은 1955년 3월부터 7월 사이 통일교회 관련 교수 퇴직과 학생 퇴학이라는 극단적 조치를 결행했다. 그 여파로 1955년 7월 4일 참아버님께서 연행 구속되셨다. 그러나 서울 지방법원은 무죄 판정을 내려 1955년 10월 4일 출감하셨다.
참아버님께서는 1955년 10월 7일 본부교회를 용산구 청파동으로 옮기셨다. 이어 1957년 7월 20일 전국 70여 개 주요도시에 40일 개척전도사를 파견하셨다. 이때 8월 15일자로 《원리해설》 초판이 발간돼 전도현장에 보급됐다.
참아버님께서는 1958년 7월 최봉춘 선교사를 일본에 파송해 섭리적 해와국가 기반을 개척하셨다. 이듬해 1월 김영운 선교사를, 9월 김상철 선교사를 미국 개척선교사로 파송해 섭리적 아벨국가를 찾아 세우는 역사를 시작하셨다.
[2] 참부모님 성혼과 제1차 7년노정(1960~1967)
1960년은 하나님 섭리역사의 새로운 출발기점이자 전환기이다. 최초로 참부모님이 현현하시고 모든 섭리사의 주춧돌을 놓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시작된 제1차 7년노정은 해마다 발표된 연두표어를 중심으로 민족복귀의 기대를 닦기 위해 전식구가 총진군한 기간이었다.
1. 참부모님 성혼과 축복결혼식
하나님께서는 인류구원을 위해 독생자 재림주와 독생녀 하늘신부를 보내기 위해 오랫동안 준비하셨다. 그 터전 위에 참아버님과 참어머님의 성혼식이 거행됐다. 요한계시록에 예언된 어린양 혼인잔치가 양위분 성혼식으로 실현된 것이다. 참부모님 등장으로 인류는 드디어 원죄를 영육으로 완전히 청산하는 중생의 은사를 받을 수 있게 됐다.
참어머님께서는 13세 때인 1956년 3월 전본부교회에서 참아버님께 처음 인사를 올리셨다. 그리고 17세 때인 1960년 2월 인류의 참어머니 자리에 최종 확정되셨다. 한 달 후 3월 27일, 음력 3월 1일 새벽 4시 전본부교회에서 양위분 가약식이 거행됐다. 이어 4월 11일, 음력 3월 16일 오전 10시 참부모님 성혼식이 거행됐다.
참부모님께서는 성혼 이후 축복결혼식을 통해 인간 구원의 새 장을 여셨다. 1960년 4월 16일 3가정 축복결혼식에 이어 1961년 5월 15일 36가정 축복식이 거행됐다. 36가정은 1960년 축복결혼한 3쌍과 1961년 축복결혼한 33쌍을 합해 일컫는다. 이들은 지상과 영계의 조상가정으로 세워졌다.
1962년 6월 4일 72가정 축복식이 거행됐다. 조상형 36가정의 배수로 가인 아벨의 가정적 복귀형이며 이스라엘 종족대표형 가정이다. 1963년 7월 24일 124가정 축복식이 서울 시민회관에서 최초 공개행사로 진행됐다. 124가정은 예수님의 120문도 입장으로 120개 국가 대표 기대이다.
2. 제1차 7년노정 설정
참부모님께서는 1960년 성혼 이후 1967년까지 민족복귀 기대를 세우기 위해 제1차 7년노정을 설정하셨다. 7년노정은 참부모님의 노정이며, 축복가정들에게는 본보기 노정이었다. 1945년 광복 이후 참아버님께서 개인적 14년 노정을 승리하시고 성혼 이후 7년노정부터 식구들이 참부모님의 노정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1차 7년노정 기간에는 후일 모든 식구가 걸어야 할 전형노정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일들이 추진됐다. 1960년 7월 모든 식구의 계몽전도활동 시작과 함께 강연회와 부흥회, 무용단 활동, 대학가 원리운동, 초교파운동, 승공운동, 사업경영 등 사회, 교회활동이 총력체제로 전개됐다.
3. 연두표어 발표
참부모님께서는 1960년부터 연두표어를 발표하시고 식구들에게 섭리의 방향과 목표를 설정해 주셨다. 1960년 표어는 ‘생애 중 최대의 실적을 남기는 해가 되게 하자’였다. 1961년은 ‘아버님의 대신자가 되자’였다. 1962년에는 ‘보여주고 자랑할 수 있는 자가 되자’가 제시됐다. 그 해는 전국전도사수련회가 10회에서 14회까지 5회 실시돼 많은 공적자원이 배출됐다. 1963년부터 1967년까지는 ‘승리적 주관자가 되자’였다.
1964년 발전 양상 중 하나는 지방활동 강화였다. 2월 11일부터 17일까지 전국 공직자와 대표식구가 대구에 동원됐다. 대구를 중심으로 기성교회와 민족을 자연굴복시켜 제3이스라엘의 책임을 다하기 위한 출발이었다.
1966년에는 분기단위 협회원 4배가운동을 추진했다. 그해 5월 1일부로 《원리강론》 초판이 출간됐다. 7년노정 마감 해인 1967년의 활동목표는 심정의 내적기대 조성, 협회원 4단계 배가운동 완수, 경제기반 완성, 체계적 조직활동 강화였다.
4. 참부모님의 제1차 세계순회
참아버님께서는 1965년 1월 28일 제1차 세계순회 길에 오르셨다. 일본 미국 캐나다와 중남미 5개국, 유럽 17개국, 중동 6개국, 아시아 8개국 순으로 방문하셨다. 제1차 세계순회는 모세 때 가나안복귀를 위해 40일간 여리고성을 정탐한 것과 같이 세계적 가나안복귀를 위해 40개국을 연결해야 될 섭리적 의의가 있었다.
참부모님께서는 1962년 10월 전 본부교회를 비롯해 서울 일원에 5개 성지를 택정한 뒤 그곳의 흙과 돌을 채취했으며 1965년 세계 40개국 순방 중 각국 성지를 택정하시고 그곳에 이 흙과 돌을 묻으셨다. 대한민국 성지를 세계적으로 접붙여 주고 정성과 승리 기반을 분배해 주기 위해서였다.
미국 방문중에는 6월 25일 게티즈버그에서 아이젠하워 전 대통령을 예방해 요담하셨다. 8월 31일 예루살렘 성지순례 때는 예수님이 골고다 산정까지 십자가를 지고 오르신 노정을 회상하면서 애달팠던 그 사정을 깊이 위로하셨다. 이어 9월 29일 일본에 도착하신 후 해와 국가인 일본의 사명에 대해 말씀하셨다. 참아버님께서는 출국 256일 만인 10월 10일 귀국하셨다.
5. 주요 명절 선포
참부모님께서는 1960년 4월 17일을 ‘심정부활의 날’, 1961년 4월 17일을 ‘실체부활의 날’로 선포하셨다.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심정권을 참부모님 성혼식 이후 실체로 부활시킴으로써 부모의 날을 통해 자녀와 만물을 찾아 세우기 위함이셨다.
1960년 거행된 참부모님 가약식은 사실상 참부모님이 이 땅에 등장하신 날이다. 그래서 이듬해인 1961년 음력 3월 1일 약혼 기념일을 부모의 날로 발표하셨다.
참부모님께서는 1960년 음력 10월 1일(양력 11월 19일) 추수감사절 예배를 주재하셨으며, 이듬해 이날을 자녀의 날로 공포하셨다. 이로 인해 아담과 해와가 뿌린 죄악의 씨를 뽑아 버리고 인류를 죄악으로부터 해방할 수 있는 기원이 만들어졌다.
참부모님께서는 1963년 음력 6월 6일(양력 7월 26일) 헌공식(獻貢式)을 개최하셨다. 하늘자녀의 이름으로 사탄권에 속해 있던 만물을 하나님의 것으로 찾아 드리는 의식이었다. 헌공식을 기해 1963년 음력 5월 1일(양력 6월 21일)을 만물의 날로 소급해 정하셨다.
참부모님께서는 1968년 1월 1일 하나님의 날을 선포하셨다. 부모의 날과 자녀의 날과 만물의 날을 찾아 세운 승리적 기반 위에서 하나님의 날이 선포된 것이다. 하나님의 날 선포를 계기로 사탄세계가 하늘나라 왕권, 부모 왕권, 자녀 왕권 지배하에 들어오게 됐다.
[3] 제2차 7년노정 출발과 미국 중심의 활동 (1968~1974)
참아버님 21년노정과 식구들의 제1차 7년노정이 마무리되고 1968년 1월 1일 제2차 7년노정이 시작되면서 섭리는 새로운 단계로 진입했다. 제1차 7년노정의 섭리목표가 해방 직후 상실한 가정 및 종족적 섭리기반을 찾는 데 있었다면 1974년까지의 제2차 7년노정은 민족 및 국가적 섭리기반을 조성하면서 세계적 노정을 출발하기 위한 준비에 주력한 기간으로 볼 수 있다.
1. 전면적 승공활동 전개와 국제적 규모의 축복결혼식
참부모님께서는 1968년과 1969년 연두표어를 ‘전면적인 진격을 하자’ 로 정해 총력적 활동을 독려하셨다. 평화를 선도하는 전면적인 공세를 취하자는 뜻에서 이같이 정했다고 하셨다.
1970년대에는 세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국가적 기반을 닦아야 한다면서 승공 및 초교파운동 등 대외적 활동에 집중하셨다. 그래서 1970년 표어가 ‘승리적 통일전선’, 1971년은 ‘통일기반 확보’였다. 통일기반은 개인으로부터 가정 종족 민족 국가 기준까지 확고히 세워져야 한다고 당부하셨다.
참부모님께서는 1972년부터 1974년까지의 표어를 ‘통일전선 수호’로 제시하셨다. 특정 개인이나 지역이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데 전세계와 연결해서 사탄세계의 침범을 받지 않도록 보호 육성해서 전진할 수 있는 입장을 확보해야 된다고 강조하셨다.
1966년 11월 7일 기독교초교파운동본부를 창립하여 분열된 기독교를 하나 되게 하는 내적 섭리기반을 닦아나갔다. 1968년 1월 13일 국제승공연합 창립에 이어 2월 25일 ‘새 공산주의 비판’을 출간하고 4월 1일 국제승공연합 일본 지부를 창립하는 등 승공활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셨다.
국제승공연합 주최로 그해 5월 13일부터 18일까지 서울 시내 순회 반공강연회가 실시됐다. 12월 23일에는 한·일 승공대회가 서울 신문회관에서 개최됐다. 또한 1969년 10월 7일 일본 도쿄 오데마치 상케이홀 등에서 승공운동국민대회가 열렸다.
1970년대는 국제적 승공전선 구축과 교육에 주력했다. 참부모님께서는 1970년 1월 21일 서울 시민회관에서 제1회 아시아승공대회를 개최하심으로써 아시아에서 세계를 향해 하나님의 사랑의 봉화를 드셨다.
1970년 2월 10일 승공교육의 산실인 국제승공연합 중앙수련원을 개원했다. 2월 25일 국제승공연합 기관지 ‘국제승공보’가 창간됐다. 이어 9월 15일부터 20일까지 도쿄에서 세계반공연맹(WACL) 세계대회가 개최됐다. 한편 1970년 4월 15일 통일교회가 한국종교협의회 8대 종단에 가입했다.
1968년 2월 22일 430가정 축복결혼식이 서울 시민회관에서 열렸다. 430가정은 한국역사 4300년을 탕감복귀하는 형이다. 일본 1가정을 포함시켜 축복을 외국인에게 연결하는 조건을 세우셨다.
참부모님께서는 1969년 제2차 세계순회 노정 기간에 10개국 43가정 축복결혼식을 주재하셨다. 2월 28일 미국 워싱턴DC교회에서 13쌍, 3월 28일 독일 에센교회에서 8쌍, 5월 1일 일본 도쿄교회에서 22쌍이 축복을 받았다. 이 축복은 한국의 430가정과 연결되고 세계로 축복을 연결시키는 의미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777가정 축복결혼식이 1970년 10월 21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개최됐다. 이 축복식에는 한국 539쌍, 일본 235쌍, 구미 16쌍 등 10개국 790쌍이 참가했다. 777가정 축복식은 축복결혼식을 세계적으로 확대하는 의미가 있다.
앞서 첫 기성가정 축복결혼식이 1963년 2월 8일 26쌍이 참가한 가운데 전 본부교회에서 열렸다. 4월 7일 두 번째로 27쌍 축복식이 개최됐다. 참부모님께서는 이들 기성가정은 후배 가정들 앞에 본이 되고 울타리가 돼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첫 독신축복식이 1963년 3월 28일 전 본부교회에서 개최됐다. 이 축복식에는 입교 6년, 60세 이상 된 식구 41명이 참가했다. 이후 수차례에 걸쳐 독신자 축복식이 열렸다.
2. 참부모님 세계순회와 미국 중심 섭리활동
참부모님께서는 1969년 2월 2일부터 세계 21개국을 대상으로 제2차 세계순회를 하셨다. 2월 2일 일본 도쿄 본부에서 지구장회의를 주재하시고 4일 미국 순회에 오르셨다. 3월 16일부터는 포르투갈 스페인 영국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스위스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그리스 이집트 키프로스 이스라엘 이란 등지를 순회하셨다. 이어 이란 인도 태국 홍콩을 경유해 4월 18일 도쿄에 도착하시고 5월 2일 귀국하셨다.
참부모님께서는 1971년 12월 5일부터 1972년 5월 8일까지 15개국을 대상으로 제3차 세계순회를 하셨다. 특히 미국 영국 독일 3개국 주요 도시 강연회를 주재하셨다. 이후 네덜란드 프랑스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그리스 이스라엘 이란 인도 태국 대만 일본 등지를 거쳐 귀국길에 오르셨다. 제3차 세계순회를 통해 미국에서 선교활동이 체계화되고 해외선교의 기반이 다져졌다.
참부모님께서는 제4차 세계순회라는 이름으로 1972년 11월 21일 한국을 떠나 일본을 거쳐 23일 미국에 도착하셨다. 이때 세계통일십자군(국제기동전도대) 기구 확대와 재교육에 주력하시고 8개월 만인 1973년 7월 22일 귀국하셨다.
참어머님께서는 1973년 2월 26일, 참아버님께서는 4월 30일 미국 영주권을 취득해 미국 중심의 세계선교 기틀을 마련하셨다. 참아버님께서는 그해 8월 7일 도미(渡美)차 출국하셨다.
참부모님께서는 1973년 10월 1일부터 1974년 1월 29일까지 ‘기독교의 위기와 새로운 소망’을 주제로 미국 21개 도시에서 ‘희망의 날’ 대강연회를 주재하셨다. 이 대회 승리 후 2월 1일 백악관에서 닉슨 대통령과의 요담으로 영적인 세계적 승리조건을 세우셨다.
32개 대도시 강연회가 1974년 2월 16일부터 4월 20일까지 ‘기독교의 새로운 장래’를 주제로 21개 도시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 열렸다. 이어 1974년 9월 17일부터 12월 23일까지 8대 도시에서 ‘희망의 날’ 대강연회가 개최됐다.
앞서 진행된 32개 도시와 합해 미국 40개 도시 대강연회 마지막 일정이었다. 특히 9월 18일 뉴욕 매디슨스퀘어가든에서 열린 ‘희망의 날’ 대강연회는 2만5천여명이 참석해 당시 미국 종교집회로는 새로운 기록을 수립했다. 10월 8일에는 미국 의회 초청으로 국회의사당에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는 미국’을 주제로 강연하셨다.
한편 1972년 8월 20일 통일사상연구원, 1973년 5월 6일 세계평화교수협의회가 창립되고 1972년 11월 23일 제1차 국제과학통일회의가 열리는 등 세계 석학 중심의 사상·학술·교육활동이 전개됐다.
[4] 세계복귀의 기반을 다진 제3차 7년노정 설정 (1975~1981)
참부모님께서는 1975년부터 1981년까지 제3차 7년노정을 설정하시고 세계복귀 기반조성에 주력하셨다. 이 기간에 참부모님께서 내적으로 승리한 기준을 중심하고 실체적으로 외적 승리를 거둬야 된다고 당부하셨다. 특히 민주세계를 넘고 공산권을 넘어서야 하늘의 승리권을 세울 수 있다고 보시고 미국을 중심으로 국제적인 승공운동을 적극 전개하셨다.
1. 가정교회 운동과 세계 선교사 파송
참부모님께서는 제3차 7년노정 기간에 천국실현과 관련된 연두표어를 잇따라 세우시고 구체적 방안으로 가정교회 활동을 제시하셨다. 1975년 표어는 ‘천국실현’이었다. 천국기준은 하나님의 창조원칙을 중심삼고 설정되는 것이며 창조목적이 실현돼야 천국이 이뤄진다고 하셨다.
1976년 표어는 ‘자녀로 인한 천국실현’이었다. 천국은 하나님이 아니라 아들딸로 말미암아 이뤄진다는 것이다. 1977년 표어는 ‘이상가정으로 인한 천국실현’이었다. 사탄의 참소를 받지 않고 하나님과 하나될 수 있는 가정의 기원을 성취하자고 강조하셨다.
제3차 7년노정 후반 4년인 1978년부터 1981년까지는 본격적인 가정교회 활동 기간이었다. 1978년 표어는 ‘공식노정을 통한 천국실현’, 1979년은 ‘가정교회를 통한 천국완성’이었다. 1980년은 ‘가정교회는 천국기지’, 1981년은 ‘가정교회는 나의 천국’이었다.
해외선교가 본격화한 것은 1965년 참부모님의 제1차 세계순회 이후였다. 이 세계순회를 계기로 영국 이탈리아 독일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요르단 브라질 등지에 선교사가 파송됐다. 특히 참부모님께서는 1975년 2월 12일 일본 협회본부에서 열린 세계선교사회의에서 95개국 선교사 파송을 결정하셨다.
이에 따라 5월 5일부로 본격적으로 선교사가 파송돼 127개 선교국이 확정됐다. 참부모님께서는 1994년 2월 1일 131개국에 한국 남자 선교사를 파견하셨다. 일본은 1999년 여성 선교사 1만2천명을 150개국에 파송했다. 앞서 1975년 9월 20일 뉴욕 통일신학대학원(UTS)이 문을 열고, 1977년 7월 5일 뉴욕에 세계선교본부가 설립됐다.
2. 구국세계대회와 미국 건국 200주년 기념대회
미국 주요 도시 ‘희망의 날’ 대강연회에 이어 1975년 1월 16일 ‘희망의 날’ 한국 만찬회가 저명인사 7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 조선호텔에서 개최됐다. 지도층 인사들이 모인 한국의 공식 석상에 처음으로 등장하신 참아버님께서는 ‘위해서 존재하라’를 주제로 강연하셨다.
이어 4월 1일부터 5월 16일까지 전국 9대 도시 ‘희망의 날’ 대향연을 주재하셨다. 참아버님께서는 ‘인류의 새로운 장래’를 주제로 강연하셨다. 이 행사는 국제기동전도대원들이 앞장서서 활동했으며 기독교의 반대에도 성공적으로 치러졌다.
전대미문의 대규모 승공대회인 구국세계대회가 1975년 6월 7일 60개국 1천여명의 대표를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120만명이 서울 여의도광장에 운집한 가운데 개최됐다. 참아버님께서는 ‘세계 속의 한국’을 주제로 말씀하셨다. 세계 각국 대표들은 신앙의 조국인 한반도를 보호하기 위해 유사시 국제의용군단으로 참전할 것을 선언하는 등 열기가 충천했다.
앞서 1800가정 축복결혼식이 1975년 2월 8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거행됐다. 축복식에는 한국 892쌍(재일동포 18쌍 포함), 일본 811쌍, 구미 111쌍, 대만 2쌍 등 1천816쌍이 참가했다. 1976년 12월 21일 홍순애 대모님 독신 축복식이 미국 이스트가든에서 거행됐다.
참부모님께서는 미국 건국 200주년 기념행사를 두 차례 개최하셨다. 1976년 6월 1일 뉴욕 양키스타디움 대회가 5만명이 참석한 가운데 악천후와 반대세력의 준동 속에 열렸다.
참아버님께서는 ‘미국은 하나님의 소망’ 제하의 연설에서 ‘본인은 병들어 가는 미국에 의사요 소방수로 왔다’고 역설하셨다. 완성노정인 제3차 7년노정 판가리 싸움을 세계의 중심지에서 치름으로써 세계사적 선악의 분기점에서 총탕감적 기준을 세우셨다.
두 번째 기념행사인 워싱턴 모뉴먼트 대회가 1976년 9월 18일 30만명이 운집한 가운데 열렸다. 참아버님께서는 ‘하나님의 뜻과 미국’을 주제로 ‘하나님은 이 나라에 새로운 계시를 전하기 위해, 특별히 퇴폐적인 미국 청년들을 구해 주고 미래의 지도자가 될 젊은이들을 인도하라고 나를 보내셨다’고 선포하셨다.
참아버님께서는 워싱턴 모뉴먼트 대회 다음날 공산세계 해방을 위해 다음 대회는 소련 모스크바에서 개최될 것이라고 공표하셨다. 공산세계의 총본산인 크렘린을 뚫고 나가야 하나님과 인류의 해방이 벌어진다고 말씀하셨다.
참부모님께서는 1976년 10월 4일 워싱턴 모뉴먼트 대회 승리 기념집회를 갖고 이날을 천승일(天勝日)로 선포하셨다. 워싱턴 대회를 통해 영육 중심한 세계사적 승리 기반이 마련됐음을 밝히신 것이다.
또한 1977년 2월 23일 참부모님 탄신일에 지승일(地勝日)을 선포하시고, 성혼 17주년 기념일인 5월 3일(음3.16) 양위분의 세계적 해방과 새 시대 도래를 공식 선포하셨다. 7월 1일에는 청파동 본부교회 신축 헌당식이 있었다.
3. 미하원 한·미 관계 청문회 사건
참부모님께서 미국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자 이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조직적으로 일어났다. 그 대표적 사건이 미국 하원 국제관계소위원회(위원장 로널드 프레이저 의원) 청문회다.
1978년 3월 22일부터 4차례에 걸쳐 박보희 선교사를 증언대에 세운 이 사건은 한국 정부가 미국 의원들에게 거액의 로비자금을 제공했다는 의혹, 이른바 코리아게이트와 연결시켜 통일교회 활동을 저지하겠다는 정치적 야심 때문에 일어났다.
프레이저 의원은 통일교회가 KCIA(한국중앙정보부)의 앞잡이라고 몰아세웠으나 아무런 증거가 없었다. 청문회에서의 공방전은 프레이저 의원의 저의가 백일하에 폭로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프레이저가 정치적 야망을 위한 수단으로 한미관계, 통일교회와 참아버님의 활동을 들고 나왔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더구나 한국을 제2 월남화 하려는 음모가 밝혀지고 프레이저 자신이 소련의 에이전트임이 폭로됐다. 결국 프레이저는 1978년 9월 13일 상원의원 선거 민주당 예선에서 참패하고 정치일선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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