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장 영웅(英雄)을 위한 영웅들의 안배!-1
천병해전의 한구석에는 백리웅풍이 백리천을 위해 꾸며놓은 아담
한 거실이 있었다. 사면에 칠백 여 권에 이르는 고서들이 차곡차
곡 정리되어 있었고, 서탁 위에는 두툼한 한 권의 책자가 백리천
을 기다리고 있었다.
쏴아아...!
철썩!
비릿한 바다내음이 석실 안에 가득해 있고 습기에 젖은 공기가 상
쾌하기 이를 데 없다.
천병해전의 뒤쪽으로부터 석실로 걸어오고 있는 백리천의 눈에는
기쁨의 빛이 일렁였다.
"좋은 곳이다! 항시 바다소리와 바다냄새를 접할 수 있고, 마음만
내킨다면 저 바다로 뛰어들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어디
있으랴...."
천병해전, 이곳은 그야말로 백리천이 가장 좋아하는 위치에 숨겨
져 있었다. 바다와 접해 있는 깎아지른 절벽에 그 한쪽 입구가 연
결되어 있는 것이다.
허나 그 입구를 밖에서는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필승대전략(必勝大戰略).
천군단 대군사(大軍師) 천뇌군(天腦君) 백리웅풍(百里雄風) 저
(著).>
두터운 책자를 집어든 백리천의 눈이 잔잔히 흔들렸다.
'아버님이 나에게 남기신 책인 듯하구나....'
백리천은 천병해전을 한 바퀴 둘러보고 마악 서실로 들어서는 길
이었다. 책장을 넘기는 백리천의 손이 보이지 않게 떨리고 있었
다.
그의 눈에 너무나도 익은 부친의 서체였다. 서명의 밑에는 작은
글씨로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이 책을 나의 사랑하는 아들 천아에게 남긴다.>
더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백리천은 그 단 한 줄에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끼고 있었다. 아
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물결치고 있었기 때
문이었다.
"치이! 간지럽게 이따위 글을...."
백리천이 짐짓 입을 내밀며 책장을 넘겼다.
"히야...!"
다음 순간, 묵묵히 책자의 글 내용을 살피던 그의 입에서 경탄사
가 터져나오고 있었다.
"역, 역시 이 천아의 아버님이시다! 삼천사백육십이 번의 대접전
(大接戰)을 직접 목격, 또는 지휘하셨다니...."
첫장에 나타난 글귀는 백리천에게 남긴 글귀였다. 헌데 그 내용이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나는 이십 년간 삼천사백육십이 번에 달하는 대소전투를 지켜보
기도 했고 또 몸소 지휘하기도 했다. 나는 선천적으로 무공을 익
힐 수 없는 체질이었으나 천군단의 대군사로서 수많은 싸움을 직
접 계획하고 또 지휘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백리천의 입이 딱 벌어졌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글이 아닌가!
이 평온하기만 한 강호에 언제 그러한 전투가 있었으며, 또 어떻
게 일개인으로서 그 많은 전투를 직접 목격할 수 있었단 말인가!
허나 백리천은 믿었다. 그것이 곧 그의 부친 백리웅풍의 글이었기
에....
<나는 기실 그러한 일이 무척 싫었다.
...중략(中略)...
결국 나는 이곳 해왕도로 은거하기 이르렀다. 다시는 전투에 가담
하지 않아도 되리라 믿으며....>
백리웅풍의 글에는 자신에 대한 한(恨)이 담겨 있었다. 자신의 두
뇌가 우수하여 천군의 명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음을 한탄하는 내
용이 은연중 담겨 있었던 것이다.
"아...!"
백리천은 새삼 부친의 영상을 떠올리며 인자했던 부친의 미소를
상기했다.
'맞아! 아버님은 사람이 죽어가는 그러한 싸움에서 도망치시고 싶
었을 거야! 나는 알아, 아버님처럼 정이 많은 분은 아무도 죽이지
못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을 죽여야 하는 전투를 지휘
하셨으니 그 심적 고통이 오죽 하셨을까!'
<허나 모든 일이 나의 뜻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었다. 짐작해 보건
대, 천군단에서는 내가 없더라도 천하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계
획을 끝까지 밀고 나갈 것이다.
해서 나는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생사의 혈전에서 기필코 승리할
수 있는 방법을 기술하여 천하를 위해 남긴다.
이것은 곧 나의 모든 것이며, 곧 나의 반생이 남긴 천하최고의 병
법서(兵法書)라 자신할 수 있다.>
백리웅풍의 마지막 글귀는 천하의 안위를 염려하는 것이다. 헌데
스스로 천하제일의 병법서라 자부하고 있음이니 실로 대단하지 않
은가.
백리천은 자신의 부친이 결코 허언(虛言)하는 사람이 아님을 잘
알고 있기에 더욱 격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님의 두뇌는 가히 하늘이 낳은 것!"
백리천은 잔뜩 긴장하여 빠른 속도로 책자를 넘기다 그 눈에 하나
가득 경외의 빛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 이렇게 철저하고 자세하게 분석해 놓으시다니...!"
백리천은 경악과 그리고 경외의 마음으로 차분히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 필승대전략.
필승대전략은 그야말로 엄청난 병법서였다.
일반의 병법서가 대부분 거대한 세력과 세력의 전투를 기록하고
있으나 이 필승대전략은 일대일, 일대이 그외 일대 다수 등의 싸
움에서부터, 군(軍)단위로 전투하는 모든 방법이 기술되어 있었던
것이다.
또한 계절, 날씨, 지형지물(地形地物)에 따른 대처 방법 등과 적
의 정보를 이용하는 정보전(情報戰), 적의 심리를 역이용하는 치
밀한 심리전(心理戰) 등, 실로 방대한 분량이 기록되어 있었다.
고대의 비본병법(秘本兵法)이나 육도삼략(六韜三略)이라한들 어찌
이 필승대전략에 비할 수 있으랴!
필승대전략은 크게 삼 장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제일장 계전(計戰).>
이것은 상대와 힘으로 부딪히기 이전에 상대로 하여금 스스로 굴
복하게 만드는 모든 방법이 수록되어 있었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百戰百勝)이라... 이 계전편의 핵
심이 되는 것은 적의 정보를 아는데 있었다.
손자병법(孫子兵法)에서도 같은 내용이 있다고 할 수 있으나 그
내용에 있어서는 손자병법을 수십 배 이상 능가하고 있었다.
이 계전편에는 간자(間者), 이른바 첩자를 활용하여 적의 내부를
혼란시키는 방법이 수백 여 가지나 수록되어 있었다.
<제이장 용병(用兵).>
여기에는 군사를 다루는 방법이 너무나도 세밀히 기록되어 있었
다.
소수의 인원으로 대군을 격파하는 방법만 해도 백여가지가 넘었
다. 특히 지형지물을 이용하는 교묘한 용병법은 실로 감탄을 금치
못할 정도인 것이다.
<제삼장 패퇴지묘(敗退之妙).>
실로 놀라운 내용이 아닌가! 놀랍게도 필승대전략의 최후의 장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후퇴의 묘인 것이다.
이른바 도주함에 있어 가장 절묘한 방법을 기술하며 후퇴의 중요
함을 피력한 것이었다.
<세(勢)가 불리함을 느꼈을 때는 후퇴해야 한다. 허나 후퇴하는
데에도 질서와 대응책이 없다면, 영원히 후일을 도모할 수 없을
정도로 패퇴하게 된다.
적의 추격을 방지하며 후퇴하는 것은 병법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다.>
제삼편을 넘기던 백리천이 고개를 갸웃했다.
대장부에게 도주란 실로 치욕적인 일이 아닌가! 그것을 필승대전
략의 최고전략으로 기록한 부친의 의도를 짐작하기 어려웠던 것이
다.
제삼편의 내용 밑에는 따로이 백리천에게 전하는 글이 있었다.
<천아야! 적이 자신보다 강함을 인정했을 때에는 후일을 도모하여
야 한다. 번연히 패배할 것을 알면서도 도주하지 않는 것은 필부
지용(匹夫之勇)에 지나지 않음을 명심해야 하느니라.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는 하등 부끄러워 할 일이 아닌 것이다.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이 가도 된다는 옛말이 있지 않더냐? 특히 지
금의 너로서는 이 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백리천의 눈에 기이한 빛이 일렁였다. 필승대전략을 덮은 그의 눈
에서 혜지와 야망의 물결이 일렁이고 있는 것이다.
"좋아! 지금 이렇게 천군단의 눈을 피해 이곳에 숨어서 무공을 익
히는 것을 수치로 생각하지 않겠어!"
백리천의 어깨가 쫘악 펴졌다.
"허나 내가 일단 무공을 완성하고 출도하였을 때에는... 누구에게
도 지지 않는 사람이 될 거야!"
아아, 백리천, 일개 칠 세 소년의 태도치고는 너무도 의연하지 않
은가!
백리천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천병해전의 뒤로 돌아 바다가 바라
다 보이는 입구로 다가갔다.
쏴아아!
철썩...!
파도가 그의 마음같이 광란하고 있었고, 그 위에 떠올라 있는 태
양 역시 그의 마음과 같이 격동으로 들끓는 듯 붉게 충혈되어 있
었다.
백리천은 태양을 직시했다.
바다와 소년, 그리고 태양..., 바다내음과 파도소리가 가슴에 웅
지를 일깨워주고 있었다.
헌데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눈을 돌리던 백리천의 눈에 문득 이채가 스쳐갔다.
동해의 금지구역인 백여 장 밖의 금해(禁海), 그 밑으로부터 은은
한 금광이 솟아올라 영롱하게 흔들리고 있지 않은가!
'저것은...?'
그는 바다 밑으로 솟아 오르는 금광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금광
은 해면에 반사되는 태양빛과 어울려 기이한 문양을 이루며 보는
이의 눈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저 빛은 여전하구나! 분명 이유가 있을 텐데...?'
백리천의 눈에 강렬한 호기심이 솟아났다.
허나 어쩌랴! 그곳의 파도는 거칠기 이를 데 없어 설혹 해신(海神)
이라 한들 접근할 수 없지 않은가!
'으음! 언젠가는 저곳의 비밀을 내손으로 풀리라!'
백리천은 내심 결심을 굳힌 후 몸을 돌렸다.
다시 서실로 들어오던 그의 눈에 문득 아련한 그리움같은 것이 피
어올랐다. 그의 눈이 고정되어 있는 곳, 바로 서가의 맨 밑단에
놓여 있는 한 장의 호피였다.
"둘째 숙부가 주신 호피, 숙부님들과 헤어진 지 이제 겨우 하루밖
에 되지 않았건만... 보고 싶으니...."
그는 불현듯 호피를 펴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 호피를 집어 들었
다.
툭!
그 순간 호피 사이에서 한 장의 양피지가 떨어지지 않는가?
"이것이 무엇일까?"
<천아에게 둘째 숙부가 전한다.>
그것은 농막의 총막주인 둘째 숙부 각진걸이 백리천에게 남긴 서
신이었다.
"아... 둘째 숙부가 적어 놓으신 것이구나."
백리천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서신을 읽어 내려갔다.
<천하에는 흙과 살아가는 순박한 농민들이 있단다. 그들이 존재하
지 않는다면 아무도 양곡을 얻을 수 없겠지.
농민들 그들은 흙과 같이 정직하고 순박하지만 때로는 자신의 피
와 땀의 결정체인 양곡을 지키기 위해 싸움을 하지 않을 수 없었
단다.>
각진걸의 서신은 그의 성품을 나타내듯 차분히 전개되어 있었다.
그의 서체 역시 태중서 못지 않은 악필이었으나 백리천은 부드러
운 미소와 함께 서신을 대하고 있었다.
<허나 농민들은 병장기도 지니지 않았고, 또한 힘도 없었지. 그들
이 할 수 있는 싸움이란 고작 자신들의 양곡을 빼앗기지 않게 감
추는 일뿐이었단다.
또한 자신들 역시 몸을 숨기지 않을 수 없었단다.
그것이 발전하여 무공이라할 수 있는 경지에까지 이르렀고, 몸을
숨긴 농민들 사이에 서로 연락하기 위한 방법으로는 한 개의 풀잎
이나 나뭇가지로 자연적인 음향을 내기에 이르러, 이것은 곧 절묘
한 음공(音功)이 되었단다.>
"아...!"
백리천이 감탄성을 터뜨렸다. 순박하기만 하여 항시 무림인들의
희생물이 되어왔던 농민들에게 이러한 절묘한 기술이 전해져 왔단
말인가!
<천하의 농민들을 무시하지 마라!
그들이 있기에 모든 사람들이 양곡을 얻어 생을 유지하고 있지 않
느냐. 이 기술이 비록 하잘 것 없는 것이라 해도 천아에게 농민들
을 아끼는 마음을 키워 주고자 하는 뜻에서 남긴다.
각진걸 서(書.>
백리천은 호피를 쫘악 펴들었다. 그곳에는 호피의 털이 뽑혀 하나
의 문양을 이루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그것은 곧 절묘한 은신
술과 놀라운 음공(音功)이 기록되어 있는 글귀가 형성된 것이었
다.
농민들이 수대에 걸쳐 발전시킨 음공들은 자연적인 소리를 인위적
으로 만들어낸 진정 놀라운 것들이었다.
입을 움직이지 않아도 저절로 새소리를 낼 수 있고, 단지 혀하나
로 비오는 소리와 파도소리 등 모든 자연적인 음향을 발출할 수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벽력음(霹靂音)까지 낼 수 있으니 어찌 하잘 것 없
다고 할 수 있으랴! 농민들은 이같은 음공을 개발하여 적에게 들
키지 않고 서로 연락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호피에는 수많은 입술모양과 혀의 움직임이 그림으로 상세히 그려
져 있었고 그 밑에는 각기 세세한 설명이 부가되어 있었다.
<천풍파멸후(天風破滅帿).>
제일 기초적인 것으로 목구멍으로부터 바람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이것은 익히기가 매우 쉬워 단지 두어 번의 연습으로도 바람소리
를 낼 수 있을 정도였다.
<폭우파천치(暴雨破天齒).>
두번째의 음공, 치아를 이용하여 빗소리를 낸다.
<해파대설음(海破大舌音).>
입술로 내는 음공, 입술을 보이지 않게 떨어내 천공을 가르는 벽
력음을 방출한다. 그 음향은 엄청나게 커 일시 상대를 놀라게 할
수 있었다.
<무형천리파(無形天里波).>
제오음(第五音), 농부들이 창안해낸 음공중 최고의 것이었다.이것
은 일체의 표정 변화도 없이 자신의 의사를 백 장이 넘는 범위까
지 전달할 수 있는 음공이었다.
소위 무림에서 사용하는 천리전음(千里傳音)과 같은 것이었다. 허
나 이 무형천리파는 천리전음과는 달리 공력이 없어도 발할 수 있
는 놀라운 것이었다.
"아아...! 어찌 인간의 입에서 이러한 소리들이 날 수 있단 말인
가!"
백리천이 입을 딱 벌렸다.
다음 순간, 그의 눈에서는 기이한 신광이 뿜어지고 있었다.
"이것을 공력을 끌어올려 사용한다면 천하의 어떤 음공보다도 강
한 음공이 되지 않겠는가!"
백리천의 뇌리로는 한 영감이 번개처럼 스치고 있었다.
그렇다!
제삼음부터는 공력을 응용한다면 엄청난 살음(殺音)으로도 사용
가능한 것이었다.
기연(奇緣)! 천군이 도저히 예측하지 못하고 있는 기연들이 이렇
게 하나하나 백리천의 일신에 모이고 있었다.
②
바다를 끼고 있는 만장단애(萬丈斷崖)의 중턱에 자리한 석동(石
洞).
그 단애 밑의 파도는 항시 미친 듯 광란하여 아무도 접근할 수 없
으니 그곳에 이러한 석동이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할 수 없는
곳이었다.
그 석동의 입구에 소년은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한 권의 책과
두툼한 호피가 들려 있었다.
"삼 일...! 아버님의 필승 대전략과 둘째 숙부님이 주신 음공은
이제 내 머리 속에 있다!"
소년 백리천의 눈은 더 이상 소년의 것이 아니었다. 득도(得道)한
고승(高僧)의 눈빛이 이러할까? 백리천의 맑은 눈에서는 깊고 심
오한 혜지의 빛이 잔잔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헌데 그의 독백은 실로 놀라운 내용이 아닌가! 필승대전략과 각진
걸이 준 농민들의 비전신공(秘傳神功)을 삼 일만에 모두 터득했단
뜻인 것이다.
휘익!
백리천은 묵묵히 대해를 응시하다 돌연 손에 쥐고 있던 책과 호피
를 바다를 향해 던졌다.
파라라라락!
두터운 책자는 해풍에 흩날리다 만장단애 밑으로 떨어져 파도에
몸을 실었다.
파파파!
헌데 그 순간, 기이하게도 소용돌이치는 파도에 휘말려 갈가리 찢
어지는 것이 아닌가!
호피 역시 갈가리 찢어져 형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있었다.
"저 파도...! 가벼운 물체가 떨어져도 미친 듯 광란하여 가루로
만들고 만다."
백리천의 눈은 두 개 물체의 잔해를 응시했다. 그의 눈에는 강렬
한 호기심과 어떤 야망이 담겨 있었다.
"허나 나는 기어코 저 파도 속으로 뛰어들어 금해(禁海)의 비밀을
풀고 말 것이다!"
잠시 금해를 바라보고 있던 백리천이 돌연 표정을 바꿨다. 이어
그는 입을 작게 오므려 기이한 음향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쏴아아!
철썩....!
바다가 울부짖고 있음인가?
아아, 기이하게도 백리천의 입에서 파도소리가 들려오지 않는가!
쏴아아!
우우...!
파도소리, 그리고 바다가 만들어내는 온갖 소리들, 백리천의 전신
에서 퍼져나오기 시작한 파도소리는 이내 원래의 파도소리를 삼키
며 석동 안을 맴돌기 시작했다. 이것은 정녕 신기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어느 한 순간, 파도소리가 칼로 끊은 듯 멈춰지며 백리천의 입꼬
리에 미소가 맺혔다.
"후후, 재미있는 소리야! 파도소리와 너무도 똑같으니...."
백리천이 순진하게 웃었다. 놀랍게도 그는 이미 호피에 적힌 비공
(秘功)들을 완전하게 연성한 게 분명했다.
쏴아아아아!
철썩!
또다시 백리천의 전신에서 파도소리가 울려 나왔다. 백리천은 그것
이 무척 재미있다는 듯 언제까지 파도소리를 내고 있었다.
"좋아! 만약 내가 중원에 가게 되어 파도소리를 듣지 못하면 어쩌
나 걱정했는데 내 마음대로 파도소리를 만들 수 있으니 정말이지
너무 좋다!"
백리천은 어린아이다운 기쁨을 드러내며 이윽고 몸을 돌렸다.
순간, 그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산아! 너는 지난 삼 일간 그 석벽만 바라보고 있는데 왜 그러는
거지?'
백리천은 의혹을 품으며 천병해전을 돌아 자신이 들어온 석벽으로
다가갔다. 석벽 앞에는 천해산이 석벽 쪽을 향해 가부좌를 튼 채
움직일 줄 모르고 있었다.
"도, 도련님...!"
천해산이 몸을 돌리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저는 도련님을 지켜드려야 합니다."
"...?"
"만약 누군가 이 석벽을 열고 들어오면 이 천해산이 막으려고 지
키고 있는 것입니다."
천해산의 우직하고 솔직한 말에 백리천이 고소를 머금었다.
"이제 도련님 곁에는 소인밖에 없으니 한시라도 마음을 놓을 수
없습니다."
천해산은 백리천의 표정을 보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그의 음성
에는 한 치의 가식도 엿보이지 않아 백리천은 가슴이 뭉클해짐을
느끼고 있었다.
'산, 산아...!'
백리천의 어깨가 미미하게 흔들렸다.
'나, 나는 네가 좋다! 너도 내가 좋아 나를 지키려고 하는 것을
잘 알고 있어.'
백리천의 눈이 천해산의 우직하고 넓은 등을 뚫어져라 바라보았
다.
'너의 충직한 마음... 나는 영원히 잊지 못할 거야...!'
천해산, 그는 백리천의 가슴으로 흐르고 있는 격정을 모르는 듯
석상처럼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석벽을 직시하고 있었다.
'나는 도련님을 위해 세상에 태어난 놈! 누군가 이 석벽을 열고
들어온다면 죽음으로 막으리라!'
어찌 알리오! 천해산의 이 충정은 누가 시켜서 되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었으니....
백리천과 천해산, 천하에서 가장 잘 어울리는 이들 주종간의 가슴
으로 피보다 진한 정이 흐르고 있었다.
잠시 후 백리천은 서탁에 조용히 앉아 한 권의 고서를 펴들고 있
었다. 그것은 세째 숙부 태중서가 구해준 육백아홉 권의 무공비급
중 한 권이었다.
"이 책들을 모두 독파하기 전에는 저 병장기들을 만지지 않을거
야!"
백리천은 자신의 뒤로 대해같이 펼쳐져 있는 일천 병기를 둘러본
후 다시 책자로 눈을 돌렸다. 허나 그 순간 그의 눈에 이채가 떠
올랐다.
서탁 위의 한쪽에 놓여 있는 작은 등(燈), 대숙부 모용강이 그에
게 준 구주벽화유황등이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었다.
푸른 불꽃을 내며 언제까지라도 꺼지지 않는 등불, 그것은 신비한
느낌과 함께 백리천의 뇌리에 깊은 인상을 심어주며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상하단 말이야! 이 등은 진짜 꺼지지 않는 것일까?"
백리천이 고개를 흔들었다.
이때, 백리천이 구주벽화유황등을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있자 등에
서 점차 푸른 불꽃이 거세어지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참으로 신비한 물건이야!"
백리천은 밝아지는 불꽃을 바라보고 더욱 신기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잠시 후, 백리천은 구주벽화유황등에서 눈을 떼고 들
고 있던 고서를 넘겼다.
<금검생사명록(金劍生死名錄).>
글씨가 희미하게 바랠 정도로 오래된 고서였다. 금검생사명록의
첫장에는 서신식으로 후인에게 남기는 글귀가 기록되어 있었다.
<검이 좋아 일생을 검에 바쳤노라.
검은 만병지왕(萬兵之王), 모든 병장기의 으뜸이니라. 또한 검은
만변(萬變)을 일으킴에 어떠한 병장기로도 변용하여 사용할 수 있
음이니 어찌 만병지왕이라 하지 않으랴!
검에도 생명이 있음이니 무릇 검을 다루는 자의 마음 가짐은 항시
맑은 가운데 청정(淸淨)해야 한다. 여기 노부가 생전에 터득한 검
의 길(道)을 기록하노라.
검황장자(劍皇匠子) 소단엽(蘇端葉) 서(書).>
금검생사명록에는 모두 다섯 가지의 고심한 검도 이론이 수록되어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지니고 있는 검의 형태에 따른 구분으로, 지니고
있는 검에 따라 단 한 초식씩의 검공(劍功)이 수록되어 있는 것이
다.
제일 먼저 장검 하나만을 지니고 있을 때 펼치는 검식(劍式)이 첫
장을 장식하고 있었다.
- 일검도(一劍道).
일검이 천과 지를 가르매 살고 죽음이 모두 너의 뜻대로 되리라!
- 소검만환식(小劍萬環式).
이것은 소검 하나만을 지니고 있을 때 사용할 수 있는 검식으로,
주로 여인들이 즐겨 사용할 수 있는 변화위주의 검공이었다허나
그 변화는 실로 막측하여 천하의 어떤 공세 앞에서도 능히 일신을
지킬 수 있는 것이었다.
- 쌍소천파검(雙小天破劍).
소검과 소검을 지니고 있을 때 펼치는 검공, 부드러움과 환(環)이
겸비된 절묘한 검공이었다.
<이검쌍무류(二劍雙舞流).
장검과 소검을 동시에 사용하는 검식.
이 이검쌍무류의 위력은 진정 놀라운 것이었다. 상대가 아무리 많
더라도 두 자루 검만 지니고 있으면 천하무적이라 할 수 있을 정
도인 것이다.
백리천의 입가에 고소가 맺혔다.
"이 사람이 누구인지 점잖게 허풍떠는 기술을 지녔구나!"
그가 믿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아직 무공입문(武功入門) 단계인
백리천으로서는 이 모든 내용이 허무맹랑하게까지 느껴진 것이었
다.
- 쌍검대해섬(雙劍大海閃).
두 자루 장검을 사용하는 검초, 금검생사명록의 최고초식이었다.
허나 이 쌍검대해섬은 그 펼치는 방법만이 기록되어 있지, 그 위
력에 대해서는 적혀 있지 않았다.
"이것이 최고의 초식인 모양인데, 왜 여기에는 허풍을 떨지 않았
지...?"
백리천이 책을 덮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허나 이 순간 백리천이
모르는 것이 한 가지 있었다.
이 쌍검대해섬은 그것을 창안한 검황장자 소단엽조차 생전에 펼쳐
보지 못해 그 위력을 알지 못한 것이다. 또한 검황장자 소단엽이
이미 칠백 년 전의 일대기인(一代奇人)이었음을 백리천은 알지 못
하고 있었다.
백리천은 금검생사명록을 덮은 후 눈을 감았다. 단 한 번 읽은 금
검생사명록의 모든 내용이 이미 그의 뇌리에 깊이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잠시 후, 백리천의 눈이 떠지자 그 눈에는 경악의 빛이 가득해 있
었다. 그는 암기한 금검생사명록의 오의(奧義)를 깨우치고 그 위
력을 실감한 것이었다.
"이, 이제 믿겠다. 이 책을 기록한 분의 말이 결코 허풍이 아니라
는 것을...."
백리천은 새삼 금검생사명록의 위력을 절감하고 혀를 내두르고 있
었다. 헌데, 그렇다면 백리천이 단 한 번의 되새김으로 금검생사
명록을 완전히 깨달았단 말인가?
아아,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백리천은 그야말로 고금을 통틀어
도 찾아볼 수 없는 기재가 아니겠는가!
그러했다. 백리천은 이미 천군조차 알아본 천하제일의 기재였던
것이다. 백리천은 금검생사명록을 제자리에 꽂은 후 또 한 권의
고서를 뽑아들었다.
<일만지도술(一萬智刀術).>
갑골문자로 겉장에 쓰여져 있는 제목만으로도 백리천을 놀라게 하
기에 충분한 책자였다.
"세, 세상에... 도법이 일만 가지나 있단 말인가?"
그는 혀를 절래절래 내두르며 책자를 넘기고 있었다. 이미 백리천
에게서 경이의 빛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파(破).>
<섬(閃).>
<비(飛).>
일만지도술에는 기실 단 세 가지의 도법만이 수록되어 있었다. 허
나 이 삼초식의 도법으로 일만도법이라 자신할 수 있는 도법이기
도 했다.
이 삼초식에는 그 위력이 어떻다는 설명이 적혀있지 않았다.
허나 백리천의 눈은 점차 커지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읽으며 이
미 그 하나하나의 위력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아아... 무공의 힘이 바로 이런 것이었단 말인가!"
백리천, 광오하기 이를데 없는 그로서도 신음과 경악성을 터뜨릴
정도이니 이 도법의 위력이 과연 어느 정도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