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제족의 선택 (6)
노환공이 제(齊)나라 진채를 공격하자 제희공도 이에 질세라 공자 팽생(彭生)을 출전시켜 공자 익과 맞서게 했다.
두 장수는 한데 어우러져 싸웠다.
공자 팽생은 제나라에서 소문난 장사였다.
손 하나가 곰 발바닥만했고, 힘은 아름드리 나무를 뿌리째 뽑아올릴 정도로 세었다. 일당백(一當百)의 장수란 바로 이런 팽생 같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런 팽생을 공자 익이 당해낼 리 없었다.
공자 익의 몸놀림이 눈에 띄게 어지러워지자 노환공은 다시 진자와 양자를 내보내 공자 익을 돕게 했다.
그러나 세 장수는 자신들 앞가림을 하기에만 바빴다.
그때 위나라 군주 위혜공(衛惠公)과 연나라 군주 연선공(燕宣公)이 제, 노나라 사이에 일대 접전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이끌고 달려와 제희공을 돕기 시작했다.
전세는 제군(齊軍)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그러자 이번에는 30리 밖에 진채를 내렸던 정여공이 대군을 몰고 와 싸움에 끼어들었다. 노나라를 돕기 위해서였다.
정나라 장수 원번과 만백은 병차를 이끌고 제희공이 머물러 있는 제나라 본영을 기습했다. 싸움은 백중세가 되었다.
이러한 광경을 성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던 기(紀)나라 공자 영계도 기회를 놓칠세라 성문을 열고 나와 제군 진영을 향해 돌격했다. 그제야 공자 팽생은 주춤하며 뒤로 물러섰다.
어지러운 싸움이었다.
제, 위, 연나라가 한 패가 되고 노, 정, 기(紀)나라가 다른 한패가 되었다.
이렇게 여섯나라 군사가 한데 엉켜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다.
기성(紀城) 들판은 각 나라 군사들이 질러대는 함성 소리로 가득찼다. 죽고 부상당하는 군사들이 부지기수로 생겨났다. 시체가 산처럼 쌓이고 흘러내린 피가 내를 이루었다.
지옥의 광경이 이러할까.
그래도 싸움은 좀처럼 끝날 줄을 몰랐다.
노환공은 병차 위에 올라 싸움을 독려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저편에서 달려오는 연선공(燕宣公)과 마주쳤다.
노환공은 잘되었다는 듯 큰 소리로 꾸짖었다.
"연백(燕伯)은 듣거라! 그대는 제나라에 아첨할 줄만 알고, 지난날 우리와 동맹하기로 한 맹세는 잊었는가?"
연나라는 땅덩어리는 컸지만 북방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중원의 문화유입이 늦은 편이다. 따라서 늘 제나라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 방지책의 하나로 연선공은 노환공과 동맹을 맺고 행동을 함께 하기로 하늘에 삽혈 맹세를 한 바 있었다. 지금 노환공이 외친 맹세란 바로 이 삽혈맹세를 말함이었다.
노환공의 꾸짖음을 들은 연선공(燕宣公)은 부끄러운 마음이 일었다.
제나라 위협에 굴복하여 생사를 함께 하기로 한 동맹국 노나라와 싸움을 벌이게 된 것에 대한 양심의 가책이었다. 연선공(燕宣公)은 고개를 숙인 채 자국 군사를 거느리고 슬그머니 싸움터를 벗어났다.
이렇게 되자 연나라와 합세하여 싸우던 위나라 군사들은 외돌토리가 되었다.
더욱이 위군(衛軍)에는 뛰어난 장수가 없었다.
위혜공(衛惠公)이 겁에 질려 몸을 뒤로 빼자 위나라 군사들은 눈에 띄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로써 팽팽하던 국면은 깨지고 노, 정, 기나라 연합군쪽이 승기를 잡게 되었다.
위나라 군에 이어 제(齊)나라 군도 무너져 내렸다.
일당백의 천하장사 팽생이 화살에 맞고 중상을 입은 것도 바로 이때였다.
노, 정, 기나라 군사들은 달아나는 제군과 위군을 추격하며 승리를 굳히려 들었다.
그러할 때 저편 들판에서 먼지가 누렇게 일며 한떼의 병차대가 달려왔다.
남궁장만이 이끄는 송나라 군사였다. 완패를 눈 앞에 둔 절박한 상황에서 송군(宋軍)을 본 제희공은 반색을 했다.
반면, 노환공과 정여공은 송나라 군사를 보자 예전의 감정이 다시 살아났다. 뒤쫓던 제군을 놔두고 송군을 향해 덮쳐갔다. 남궁장만은 숨돌릴 여가도 없이 노, 정 연합군의 공격을 받았다. 더욱이 제나라가 이미 패했다는 소식에 접하자 더 이상 싸울 마음이 사라졌다.
"후퇴하라!"
남궁장만은 군사들에게 외치며 앞장서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송군의 도착으로 일말의 희망을 품었던 제희공은 남궁장만의 패주를 보고 다시 실의에 빠졌다.
연나라 군대와 위나라 군대는 이미 싸움터에서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더 이상 싸울 여력이 없었다. 이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패잔병을 수습하여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뿐이었다.
퇴각을 결심한 제희공은 기성(紀城)을 돌아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한 기(紀)나라는 이 땅에서 사라질 것이요, 만일 기나라가 이 땅에 존속한다면 내가 사라질 것이다."
이렇게 맹세하고 쓸쓸히 기(紀)나라를 떠나갔다.
이때의 일을 두고 후세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제희공의 기(紀)나라에 대한 집착을 꼬집었다.
8대 전의 원한도 원한이라면 이 세상 모든 사람들 중 원한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강한 나라들은 약한 나라를 속이면서 외로운 성을 손쉽게 집어 삼킬 줄 알았지만, 그러나 어찌 알았으리오.
다른 나라가 망하기 전에 자기 군사가 먼저 패했으니, 제희공은 후세의 웃음거리만 되었도다.
멸망 직전에 다시 살아난 기후(紀侯)는 노환공과 정여공을 성안으로 초청하여 크게 잔치를 베풀었다.
"두 군후의 은혜는 자손 만대까지 잊지 않겠습니다."
그는 부고를 열어 갖은 재물을 내줌으로써 두 군주의 노고에 답례하였다.
며칠 후 노환공과 정여공이 떠나게 되자 기후는 성밖 30리까지 따라나가 눈물로써 두 사람을 전송하였다.
반면, 기(紀)나라를 치러 갔다가 크게 패하여 돌아온 제희공은 도저히 그분을 삭힐 수가 없었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지르곤 하였다.
정청에 나가서도 오로지 기(紀)나라에 대한 울분만 터뜨렸다. 그것이 병이 되었다. 제희공은 병석에 눕는 일이 잦아졌다.
해가 바뀌면서 제희공의 병은 더욱 깊어졌다.
백약이 무효였다. 명의란 명의를 다 불러 진맥시켰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제희공은 자신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아아, 끝내 기나라를 없애지 못하는구나."
그는 세자 제아(諸兒)를 병상 앞으로 불렀다.
"세자는 들어라. 기(紀)나라는 우리 제나라와 대대로 원수이다. 너는 내가 세상을 떠나더라도 기(紀)나라의 일을 절대 잊지 말라. 기나라를 멸망시키지 못하거든 아예 종묘에 들어설 생각도 하지 말아라. 내가 너에게 남길것은 오로지 이 말뿐이다."
유언이었다. 세자 제아(諸兒)는 제희공의 유명을 가슴속에 새겼다.
제희공은 또 조카인 공손무지(公孫無知)를 불러들여 제아에게 절을 올리게 한 후 당부했다.
"너의 부친인 이중년은 나의 친동생이었다. 불행히도 지난해에 세상을 떠나고 너만 홀로 남았구나. 이제 나도 이 세상을 하직할 때가 온 것 같다. 너는 세자를 잘 섬겨 새 임금에 대한 충성과 예의를 내게 하듯 하여라."
말을 마치자 제희공은 다시는 뜰 수 없는 눈을 감았다.
재위 33년. 주왕실 연호로는 주환왕 22년이었다.
제희공의 뒤를 이어 세자 제아(諸兒)가 군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제양공(齊襄公)이다.
🎓 다음에 계속........
출처 - 평설열국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