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평양일대 락랑무덤의 성격
평양일대 락랑무덤의 성격에 관한 문제, 다시 말하여 평양일대에 락랑무덤을 남긴 정치세력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를 정확히 밝히는 것은 사람들에게 혁명의 수도 평양의 유구한 력사와 문화전통에 대한 옳은 인식을 주며 우리 민족사의 유구성과 문화의 우수성을 과학적으로 체계화하는 데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그것은 지난 시기 평양일대의 락랑문제가 봉건사가들과 일제어용사가들에 의해 력사적 사실과 맞지 않게 외곡되여 왔고 그 후과로 하여 오늘까지도 국제적으로 첨예한 론쟁을 벌리면서 올바른 해명을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봉건사가들속에서 평양일대를 漢나라 락랑군으로 보는 견해들이 있었다.
5세기 중엽~6세기 초 북위의 력도원은 자기의 저서 “수경주”에서 북위에 파견된 고구려 사신의 이야기라고 하면서 고구려의 평양성(오늘의 평양성)이 漢나라의 락랑군이였다고 주장하였으며,
11세기 중엽에 구양수 등이 평찬한 “신당서”에서도 “평양성은 漢나라의 락랑군이였다.”고 하였다.
이렇게 “漢나라 락랑군 재평양설”은 중국 봉건사가들 속에서 “정설”로 인정되여 왔었다.
그 후 “漢나라 락랑군 재평양설”은 일제어용사가들에 의하여 더욱 보충되여 매우 심각하고 첨예한 문제로 제기되였다.
일제의 조선 강점시기 조선 고고학을 독점하였던 일제어용사가들은 평양일대에서 락랑무덤을 마구 파헤치고 거기에서 드러난 자료를 가지고 마치도 漢나라의 락랑군이 평양에 있은 듯이 꾸며놓고 그것을 기정사실화해 놓았다.
그들은 평양일대의 소위 “락랑무덤”은 그 구조와 형식변천이 중국의 漢대 무덤의 것과 꼭 같고 거기에서 나온 유물도 중국 漢대 무덤의 유물과 꼭 같으며 그 대부분은 중국에서 만든 것을 가져온 것이라고 하면서 이것을 가장 기초적인 근거로, 대전제로 삼고 “漢나라 락랑군 재평양설”을 더욱 왜곡 보강해 놓았다.
지난 시기 일제어용사가들에 의하여 기정사실인 듯이 꾸며진 “漢나라 락랑군 재평양설”은 오늘 일본 당국자들에 의하여 일본 력사교과서들에 그대로 옮겨지고 있다.
이처럼 평양의 유구한 력사와 찬란한 문화전통이 대국주의 사가들과 사대주의 사가들, 일제어용사가들에 의하여 오래동안 이지러지고 왜곡되여 왔으나 력사적 사실은 과학적인 자료로 하여 정확히 밝혀지기 마련이다.
제1절 무덤의 형식변천을 통하여 본 평양일대 락랑무덤의 성격
평양일대의 락랑무덤에는
나무곽무덤,
귀틀무덤,
벽돌무덤
등 세가지 류형의 무덤이 있다.
그 가운데서 가장 이른 시기의 무덤은 나무곽무덤이다.
이 나무곽무덤은 앞서 존재한 이 고장의 좁은 놋단검관계 유적들인 움무덤과 돌곽무덤을 바탕으로 하여 기원전 3세기 이전에 지배적인 무덤으로 등장하여 기원전 1세기 말까지 계속 존재하다가 기원전 1세기 말~기원후 1세기 초에 이르러 보다 발전된 귀틀무덤에로 계승발전되였다.
나무곽무덤의 계승 발전으로 이루어진 귀틀무덤은 1세기 전기간 평양일대에서 지배적인 무덤으로 존재하다가 1세기 말 ~2세기 초에 귀틀벽돌무덤과 벽돌귀틀무덤과 같은 과도적인 무덤형식을 거쳐서 전형적인 벽돌무덤에로 계승 발전되였으며,
벽돌무덤은 3세기 전반기까지 지배적인 무덤으로 존재하다가 3세기 중엽부터 고구려 무덤형식인 돌칸흙무덤에로 전환되기 시작하였다.
나무곽무덤으로부터 벽돌무덤까지의 련면한 계승 발전은 무덤의 구조형식과 유물에서 뚜렷이 볼 수 있다.
한편 중국의 한 대무덤의 형식변천과정을 보면 그것은 평양일대 락랑무덤의 형식변천과 뚜렷이 구별된다.
중국의 한 나라 시기에도 나무곽무덤을 쓰긴 하였으나 그것은 전국시대의 나무곽무덤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으로서 그 변천과정은 지방마다 차이가 있었다.
전한시기에 나라의 수도였던 서안(장안)을 중심으로 하는 관중지방에서는 전한 전기(기원전 206년~기원전 135년)에 나무곽무덤은 공심전 무덤과 교체되였거나 새로 나타난 공심전 무덤과 병존하다가 전한 중기(기원전 134년~기원전 49년)에 자취를 감추었고 그 대신 벽돌무덤이 새로 나타나서 공심전 무덤과 병존하였으며 전한 후기(기원전 48년~기원후 24년)에는 벽돌무덤이 지배적인 무덤으로 되었다.
※ 공심전 무덤은
땅을 곧추 파내려 가다가 옆으로 수평되게 굴을 파고 거기에 구멍이 뚫려있는 큰 벽돌로 무덤곽을 만들고 그 안에 주검을 안치한 무덤이다.
그리고 후한시기 나라의 수도였던 락양을 중심으로 하는 관동지방에서 나무곽무덤은 이미 전한 전기에 자취를 감추었고 그 대신 공심전 무덤이 지배적인 무덤으로 되어 있었으며 공심전 무덤은 전한 중기 말인 선제시기(기원전 73년~기원전 49년)를 전후하여 벽돌무덤과 교체되기 시작하였다.
전한시기에 나무곽무덤이 비교적 많이 남아있은 곳은 장사지방이다.
이 지방의 나무곽무덤은 무제 집권시기를 전후로 하여 전한 전기와 전한 후기의 것으로 나누어보는데 전한 전기에는 나무곽무덤이 지배적인 자리를 차지하다가 전한 후기에는 벽돌무덤이 새로 나타나고 그것이 나무곽무덤과 병존하다가 기원전 1세기 후반기에는 벽돌무덤이 지배적인 자리를 차지하였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중국에서는 전한전기에 나라의 중심지역에서는 나무곽무덤이 공심전 무덤과 교체되였거나 새로 나타난 공심전 무덤과 병존하였으며 전한 중기에는 나무곽무덤이 자취를 감추어버리고 그 대신 벽돌무덤이 새로 나타났다.
특히 락양을 중심으로 하는 관동지방에서는 전한 전기에 이미 나무곽무덤은 공심전 무덤과 교체되여 자취를 감추었다.
다만 장사지방과 같은 남방의 변방지역에서만 나무곽무덤이 계속 존속되였을 뿐인데 그것도 기원전 1세기 후반기에 이르러서는 점차 자취를 감추기 시작하였으며 그 대신 벽돌무덤이 지배적인 무덤으로 등장하였다.
이와는 달리 평양일대에서는 나무곽무덤은 한 나라의 출현시기보다 훨씬 이전인 기원전 3세기 이전에 지배적인 무덤으로 등장하여 기원전 1세기 말까지 계속 존재하였으며 그것은 중국의 한대 무덤처럼 공심전 무덤을 거쳐서 벽돌무덤에로 넘어간 것이 아니라 보다 발전된 귀틀무덤을 거쳐서 벽돌무덤에로 넘어갔다.
다시 말하여 기원전 3세기 이전부터 기원전 1세기 말까지 지배적인 무덤으로 존재하였던 나무곽무덤은 기원전 1세기 말~기원후 1세기 초에 귀틀무덤에로 계승 발전되였고 귀틀무덤은 귀틀벽돌무덤과 벽돌귀틀무덤 단계를 거쳐서 2세기 초에 벽돌무덤에로 계승 발전되였다.
그리고 평양일대에서는 전한시기에 중국의 중심지역에 성행하였던 공심전 무덤과 같은 무덤은 지금까지 단 한 기도 드러난 례가 없다.
이처럼 평양일대 락랑무덤의 형식변천과정은 중국 경내의 한 대무덤의 형식변천과정과 뚜렷이 다른 로정을 거치였다.
만약 일제어용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기원전 108년에 한 나라의 락랑군이 평양일대에 설치되여 수백년동안 존재하였다면 그처럼 평양일대 락랑무덤의 형식변천이 중국 한 대무덤의 형식변천과 뚜렷한 차이가 있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평양일대 락랑무덤의 형식변천의 특성은 이 고장의 나무곽무덤, 귀틀무덤, 벽돌무덤 등이 중국의 한 나라 락랑군 설치와 직접 관련되였거나 그 영향하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 고장에서 련면히 살아온 고대 조선사람들이 남긴 무덤이라는 것을 실증해 주는 것이다.
이것은 무덤의 형식변천 뿐 아니라 무덤의 구조형식에서도 뚜렷이 찾아볼 수 있다.
제2절 무덤의 구조형식을 통하여 본 평양일대 락랑무덤의 성격
평양일대에 분포되어있는 나무곽무덤, 귀틀무덤, 벽돌무덤 등 락랑무덤은 구조형식에서도 중국 경내의 한대 무덤과 다른 일련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하여 무덤별로 보면 아래와 같다.
1. 나무곽무덤
평양일대의 나무곽무덤과 중국의 나무곽무덤 사이에는 구조형식에서 일련의 차이가 있다. 그것은
첫째로, 무덤길이 있고 없는데서 볼 수 있다.
평양일대의 나무곽무덤들에는 규모에 관계없이 모두 무덤길이 없는 것이 특징인데 중국의 나무곽무덤 가운데서 규모가 큰 무덤들에는 모두 무덤길이 있다.
*“장사발굴보고” 과학출판사, 1957년판, 87~95페지
둘째로, 평양일대의 나무곽무덤에는 합장한 무덤인 경우에는 례외없이 무덤무지밑에 2개의 나무곽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나란히 놓여있다.
그러나 중국의 나무곽무덤에는 그런 형식의 무덤이 없다.
물론 전국시기의 나무곽무덤 가운데는 2개의 나무곽이 있는 것이 일부 있기는 하나 그 가운데서 1개의 주검이 들어있는 주곽으로서 크고 무덤구뎅이 바닥에 놓여있으며 다른 1개는 유물들만 들어있는 부곽으로서 매우 작은데 어떤 것은 무덤구뎅이 바닥보다 한 단 높은 한쪽 벽면에 옆으로 판 굴 속에 있고 어떤 것은 무덤구뎅이 바닥에서 한쪽 벽면에 판 굴 속에 놓여있다.
이런 형식의 무덤들은 각기 주검이 들어있는 2개의 나무곽이 좌우로 나란히 놓여있는 평양일대의 나무곽무덤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우와 같은 책, 21~23페지
셋째로, 중국의 나무곽무덤에는 앞뒤로 길게 달린 두칸, 세칸의 무덤들이 있으나 그런 형식의 무덤은 평양일대의 나무곽무덤 가운데서 볼 수 없다.
*우와 같은 책, 89~96페지
넷째로, 중국의 나무곽무덤 가운데는 무덤의 두리에 나무기둥들을 세우고 지붕을 씌웠던 살림집모양의 무덤들이 있으나 그러한 무덤은 평양일대에서 드러난 례가 없다.
*우와 같은 책, 91~92페지
다섯째로, 중국의 나무곽무덤 가운데는 “차마갱”이 붙어있는 무덤이 있으나 그러한 무덤은 평양일대에서 나타난 실례가 없다.
이렇게 평양일대 나무곽무덤은 중국의 나무곽무덤과 엄격히 차이가 있으며 자기의 고유한 민족적 형식과 매장 풍습을 담고 있다.
*우와 같은 책, 89페지
2. 귀틀무덤
평양일대 귀틀무덤의 구조형식에서도 중국의 나무곽무덤의 구조형식과 뚜렷한 차이를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첫째로, 평양일대의 귀틀무덤은 한두 기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가 외칸무덤으로 되어 있으나 중국의 나무곽무덤에는 앞뒤로 길게 달린 두칸, 세칸 무덤이 적지 않다.
둘째로, 평양일대의 귀틀무덤 가운데서 규모가 큰 무덤들은 무덤칸의 평면 륜곽이 례외없이 모두 방형인데 중국의 나무곽무덤들은 규모가 작은 무덤인 경우에는 더 말할 것도 없고 규모가 큰 무덤인 경우에도 무덤칸의 평면 륜곽이 모두 길죽한 장방형으로 되어있다.
셋째로, 평양일대의 귀틀무덤에는 무덤 안길과 무덤길이 있는 것은 례외적으로 한두 기가 있을 뿐 거의 대부분이 없는데 중국의 전한 후기의 나무곽무덤에는 거의 대부분이 무덤길이 있다.
넷째로, 평양일대의 귀틀무덤 가운데는 귀틀바닥 밑에 강돌이 깔려 있고 귀틀벽과 무덤구뎅이 벽 사이에 강돌이 채워져 있는 귀틀돌무덤이 적지 않은데 이런 형식의 무덤은 중국의 한 대무덤들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다섯째로, 전한 후기에 중국의 경내에서는 나무로 만든 관곽제도가 없어지고 그 대신 나무기둥들을 세우고 그 우에 지붕을 씌운 지상건물식의 무덤이 출현하였는데 그런 형식의 무덤은 평양일대에서 찾아볼 수 없다.
물론 평양일대의 귀틀무덤 가운데도 나무기둥을 세운 무덤이 일부 있으나 그것은 지상의 목조건물식의 무덤을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귀틀무덤의 뚜껑을 받드는 기둥의 역할을 한 동시에 무덤칸을 좌우 두 부분으로 나누는 간막이의 역할을 겸하였다.
이렇게 평양일대의 귀틀무덤이 자기의 고유한 구조형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엄연히 조선사람의 매장풍습이 담겨져 있는 무덤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3. 벽돌무덤
평양일대 벽돌무덤의 구조형식에서도 중국의 벽돌무덤의 구조형식과 뚜렷한 차이를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첫째로, 무덤칸의 배치에서 찾아볼 수 있다.
평양일대의 벽돌무덤은 외칸무덤이 기본으로 되어 있다.
그것은 귀틀무덤을 계승한데서 나타난 필연적 현상이다.
평양일대의 귀틀무덤에서는 앞으로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외칸무덤이 압도적 다수이고 두칸무덤은 례외적으로 한두 기에 불과하다.
이러한 귀틀무덤을 계승한 평양일대의 벽돌무덤이 외칸무덤 위주로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물론 평양일대에서도 두칸무덤과 여러 칸 무덤이 있지만 그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런데 중국의 벽돌무덤에서는 사태가 다르다.
례컨대 락양 소구의 벽돌무덤에서는 두칸무덤과 여러 칸 무덤이 대부분이다.
이미 전한 말기부터 여러 칸 무덤이 나타났는데 그 후 그것은 더욱 보편화되여 갔다.
*“락양소구한묘”(중문), 과학출판사, 1959년판, 15~83페지
그것은 무덤칸을 피장자가 살아 있을 때에 쓰던 살림집의 방 배치를 지하에 재현하려는 데로부터
나타난 현상이다.
그리하여 앞 뒤 두칸과 곁칸이 있고 거기에 관이 만들어졌다.
안칸과 곁칸에는 주검을 넣은 관이 있는데 이것은 생전의 살림집에서 그 방들이 침실이였던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합장하는 인원수가 껴묻거리가 증가됨에 따라 무덤칸은 더욱 커졌으며 구조도 더욱 복잡하게 되었다.
총체적으로 보아 락양 소구의 무덤은 간단한 외칸의 공심전 무덤으로부터 지상의 살림집을 상징하는 여러칸의 벽돌무덤으로 발전하였는데 이것은 외칸이 기본이고 거기에 두칸과 여러 칸 무덤이 얼마간 있는 평양일대의 벽돌무덤과는 뚜렷한 차이를 보여주는 하나의 근거로 된다.
둘째로, 평양일대 벽돌무덤의 천장은 거의 모두가 궁륭식 천장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벽돌무덤의 천장에는 기차굴식 천장, 무지개식 천장, 궁륭천정 등 여러 가지 형식의 천장이 있으며 그 가운데서 기차굴식 천장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것은 무덤칸이 장방형으로 된데서 오는 필연적 현상이다.
셋째로, 무덤칸의 측선에서도 차이점을 찾아볼 수 있다.
평양일대의 벽돌무덤은 무덤칸의 측선이 모두 밖으로 휘인 호형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무덤 축조자들이 밖으로부터 오는 지압을 막고 무덤칸의 견고성을 보장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취한 합리적인 방안이다.
이와는 달리 중국의 한 대 벽돌무덤들은 무덤칸의 측선이 거의 모두가 곧은 직선으로 되어 있다.
넷째로, 무덤칸 벽체의 축조방법에서도 차이점을 찾아볼 수 있다.
평양일대의 벽돌무덤은 작은 무덤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벽체를 벽돌을 눕히고 모로 세우는 것을 반복하면서 1~1.5m의 높이까지는 수직으로 쌓고 그 우부터는 점차 안으로 기울어지게 쌓았다.
그러나 중국의 한 대 벽돌무덤들은 거의 모두가 벽체를 벽돌을 처음부터 눕혀서 수직으로 올려 쌓았다.
다섯째로, 무덤칸의 위치에서도 차이점을 찾아볼 수 있다.
평양일대의 벽돌무덤은 무덤칸이 모두 반지하에 놓여있는데 중국의 한 대 벽돌무덤의 무덤칸은 거의 모두가 지하에 파묻혀 있다.
여섯째로, 중국의 한 대 벽돌무덤에는 경사진 긴 무덤길이 붙어있는 것이 적지 않은데 그런 형식의 무덤은 평양일대의 벽돌무덤에서 전혀 볼 수 없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평양일대의 나무곽무덤, 귀틀무덤, 벽돌무덤 등 락랑무덤들은 구조형식에서
중국의 한 대무덤의 구조형식과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비록 무덤축조 재료에서는 같다 하더라도 무덤의 구조형식이 서로 다르면 거기에 묻힌 사람들이 서로 다른 매장풍습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매장풍습의 차이는 거기에 묻힌 사람들이 서로 다른 생활풍습과 혈통을 가지고 있은 것과 관련된다.
따라서 평양일대의 락랑무덤을 가지고 한 나라 락랑군이 평양일대에 있었다고 주장한 일제어용사가들의 견해는 력사적 사실과 맞지 않으며 도대체 그러한 설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제3절 무덤의 유물을 통하여 본 평양일대 락랑무덤의 성격
평양일대의 나무곽무덤, 귀틀무덤, 벽돌무덤 등 락랑무덤들에서 나온 유물에서도 중국의 것과 차이가 있다.
그러한 차이는 무덤의 성격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실증해주는 또 하나의 근거로 된다.
1. 나무곽무덤의 유물
1) 좁은 놋단검(세형동검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임-동이사람)
좁은 놋단검은 후조선의 문화를 대표하는 가장 특징적이고 상징적인 무기의 하나이다.
평안남도 성천군 백원 로동자구 9호 고인돌무덤에서 드러난 좁은 놋단검은 평양일대에서 좁은 놋단검의 발생시기가 기원전 14세기이라는 것을 실증해준다.
이렇게 후조선 초기부터 쓰이기 시작한 좁은 놋단검은 나무곽무덤시기에 와서도 여전히 특징적인 무기의 하나로 널리 쓰이였다.
좁은 놋단검은 중국의 동주식 청동단검보다 무려 600여 년간이나 앞서 만들어졌을 뿐 아니라 그 형태에서도 동주식 청동단검과 뚜렷한 차이가 있다.
(운영자 주 : 사진 추후 보완예정)
좁은 놋단검은 그 전신인 비파형 단검과 같이 검몸, 검자루, 검자루 맞추개를 따로따로 만들어서 조립하여 쓰게 되어있는 것이 특징인데 중국의 동주식 청동단검은 검몸, 검자루, 검자루 맞추개 등이
하나로 직접 련결된 상태로 만든 것으로서 량자 사이에는 무기제작 방법에서 뚜렷한 차이가 있다.
량자 사이에는 또한 단검의 개개 부분의 생김새에서도 뚜렷한 차이가 있다.
좁은 놋단검의 검몸은 좁은 날의 한가운데에 세로 두드러진 등대가 있다.
등대에는 등날을 세우고 마디를 지었으며 마디의 좌우 량쪽 날에는 에임이 있다.
그런데 중국의 동주식 청동단검의 검몸은 량쪽 날이 곧은 직선형이며 그 한가운데에 하나의 등날을 세웠을 뿐 두드러진 등대도 등대의 마디도 없다.
좁은 놋단검의 검자루는 두 끝에서 가운데로 오무라들다가 한가운데에 참대마디 모양의 마디를 지은 장고모양인데 중국의 동주식 청동단검의 검자루는 한가운데에 가락지모양의 고리가 2개 끼워져 있는 원통형이다.
좁은 놋단검의 검자루 맞추개는 베개모양 또는 +모양인데 중국의 동주식 청동단검의 검자루 맞추개는 삿갓모양이다.
이렇게 좁은 놋단검과 동주식 청동단검 사이에는 그 생김새에서 뚜렷한 차이가 있으며 좁은 놋단검은 우리 선조들이 일찍부터 즐겨 써온 특징적인 무기의 하나이다.
2) 좁은 놋창끝
좁은 놋창끝도 좁은 놋단검과 같은 시기에 쓰던 후조선의 전통적이고 특징적인 무기의 하나이다.
이 좁은 노창끝은 평양일대의 나무곽무덤들에서 흔히 좁은 놋단검과 같이 드러났다.
좁은 놋창끝은 말 그대로 창몸이 좁은 것이 특징이다.
창몸의 한가운데에 세로 두드러진 속대가 있으며 자루를 꽂는 주머니 부분의 밑은 직선으로 끝나고
웃부분에 두 줄의 띠장식이 돋쳐져 있다.
창몸의 봉부는 비교적 긴 편이다.
그러나 중국의 청동창끝은 창몸이 넓고 그 한가운데에 세로 두드러진 속대가 없으며 다만 등날을 세웠을 뿐이다.
그리고 창몸의 봉부는 극히 짧으며 자루를 꽂는 주머니부분의 밑은 오무라들고 그 웃부분에 작은 구멍이 뚫어져 있는 꼭지가 1개 있을 뿐이다.
3) 놋과
놋과도 후조선의 특징적인 무기의 하나인데 평양일대의 나무곽무덤들에서도 여러 개 나왔다.
놋과는 몸체가 넙적하고 량쪽 날은 밑부분에 이르러 심히 벌어졌으며 날의 한쪽은 다른 한 쪽보다 약간 길다. 몸체 한가운데에 세로 길게 세운 등대가 있고 그 좌우에 넓은 피홈이 패여져 있다.
밑에는 한가운데에 짧고 넙적한 뿌리가 달려 있으며 몸체와 뿌리 사이에는 약간 경사진 턱이 있고
턱 바로 우에 2개의 구멍이 뚫어져 있다.
이런 형태의 놋과는 원, 란, 내 등으로 되어 있는 중국의 청동과와 전혀 다르며 우리 선조들이 일찍부터 써오던 특징적인 무기의 하나이다.
4) 쇠단검
쇠단검은 평양일대의 나무곽무덤들에서 많이 나왔는데 그것은 좁은 놋단검과 같이 검몸, 검코, 검자루, 검자루 맞추개 등을 따로따로 만든 것을 조립하여 쓰게 되어 있다.
그리고 검몸이 좁은 점에서도 서로 같으며 특히 검코, 검자루, 검자루 맞추개 등은 재질과 형태에서 좁은 놋단검의 것과 꼭 같다.
또한 쇠단검의 검집은 좁은 놋단검의 검집과 재질, 형태, 장식수법 등에서 서로 같다.
그런데 이러한 쇠단검은 중국의 한 대 무덤들에서 나온 례가 없다.
5) 쇠창끝
평양일대의 나무곽무덤들에서 나온 쇠창끝들은 좁은 놋창끝에서 파생된 것이고 중국의 한 대 무덤들에서 나온 쇠창끝은 거기의 청동창끌에서 파생된 것으로서 그 원형들이 다른 것처럼 그 후신들도 다르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6) 쇠장검
평양일대의 나무곽무덤들에서 나온 거의 모든 쇠장검들은 남포시 강서구역 태성리 6호 무덤의 쇠장검과 같이 검몸, 검자루, 검자루 맞추개 등을 따로따로 만든 것을 조립하여 쓰게 되어 있다.
이렇게 조립식으로 만든 수법은 단군조선의 비파형 단검과 그 후신인 좁은 놋단검, 쇠단검 등에서만 볼 수 있지만 중국의 동주시기의 청동단검이래로부터 漢대의 철검에 이르기까지
검몸, 검자루, 검자루 맞추개 등을 하나로 직접 련결시켜서 만들어 쓴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이것은 평양일대의 사람들이 쇠장검을 만드는 데서도 자기의 조상 전례의 전통을 살리면서 새로운 철제무기들을 만들어 썻다는 것을 말해준다.
7) 농공구형태의 무기
평양일대의 나무곽무덤 가운데서 기원전 1세기의 무덤들에서는 쇠도끼, 쇠끌, 쇠낫 등 농공구형태의 무기들이 한 조를 이루고 나온 것이 일반적 현상인데 이러한 현상은 중국의 한 대 무덤들에서는 볼 수 없다.
8) 쇠갑옷
평양일대의 나무곽무덤들인 정백동 1호, 97호 무덤을 비롯하여 일부 무덤들에서는 장방형 또는 타원형의 작은 철판들로 무은 쇠갑옷이 나왔다.
이러한 철갑옷은 당시 무사들의 전투행동을 자유롭게 보장하면서도 방어력이 위력한 방어무장이였다.
그런데 그러한 쇠갑옷은 같은 시기 중국의 한 대 무덤들에서 나온 례가 없다.
9) 질그릇
평양일대의 나무곽무덤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화분형 단지, 배부른 단지, 회백색 단지, 회색 단지 등의 질그릇들은 우리 선조들이 즐겨 써오던 질그릇들이며 이런 질그릇들은 중국의 한 대 무덤들에서는 볼 수 없고,
반대로 중국의 한 대 무덤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세발솥, 세발그릇, 대, 목긴 굽 단지, 합, 관, 모단지 등의 질그릇들은 평양일대의 나무곽무덤에서 나온 례가 없다.
10) 마구와 수레부속
평양일대의 나무곽무덤들에서 나온 마구와 수레부속 가운데서 대부분의 것은 중국의 한 대 무덤들에서 나온 례가 없거나 거기의 것과 생김새가 다른 독특한 것이다.
그러한 례로서는 구름무늬와 초롱무늬를 배합하고 그 사이에 달리는 짐승무늬를 새겨 넣거나 곰, 범, 룡, 사람 등을 새려 넣은 신바닥형의 말관자, 타원통형 놋방울, 쌍방울, 을자형 동기, 권총모양의 멍에대끝장식, 방울이 달린 원통형 굴대끝 씌우개, 삿갓형 말멍에꼭지장식, 삿갓모양 기둥장식,
한가운데에 수레채를 끼우는 제형의 홈이 있고 그 량쪽에 대칭되게 여러 가지의 독특한 금동장식 금구들이 끼여져 있는 멍에대 등을 들 수 있다.
이런 독특한 마구와 수레부속들은 당시 평양일대의 주민들이 자기의 정서와 취미에 맞게 말과 수레를 장식하였던 것을 보여준다.
또한 수레모양도 중국의 한인들과는 다르게 만들었던 것을 보여준다.
평양일대의 나무곽무덤들에서 나온 수레부속들을 가지고 당시의 수레를 복원하여 보면 멍에대 한가운데에 수레채 1대를 고정시킨 T형의 멍에대를 수레함의 앞쪽 한가운데에 고정시키고 말 두 필을 메워서 끈 쌍두마차였다.
그러나 장사 203호 무덤에서 나온 수레모형과 한 대 화상전에 그려진 마차를 보면 한인들은 멍에대의 량쪽에 수레채를 각각 1대씩 고정시킨 ∏형의 멍에대를 수레함에 고정시키고 말 한 필을 메우고 끈 수레였다.
마구와 수레부속에서 뚜렷한 차이가 있다는 것은 평양일대의 나무곽무덤들에서 나온 마구와 수레부속들이 우리 선조들이 사용하던 것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1, *2 “장사발굴보고”(중문), 과학출판사, 1957년판, 139~142, 149페지
11) 몸치레거리
평양일대의 나무곽무덤에서 나온 몸치레거리 가운데는 중국의 한 대무덤에서 나온 몸치레거리와 다른 것이 많은데 그 가운데서도 특히 이채를 띠는 것은 정백동 37호 무덤과 92호 무덤에서 드러난 띠고리이다.
이 띠고리들은 앞부분이 조금 넓고 그 끝부분이 반달처럼 생긴 장방형의 은띠고리인데 가장 자리에 좁쌀알 만한 은싸락들을 촘촘히 박아서 테두리 장식을 하였다.
정백동 37호 무덤에서 드러난 것은 테두리 장식안에 범 한 마리를, 정백동 92호 무덤에서 드러난 것은 테두리 장식안에 어미룡과 새끼룡, 약 방아를 찧는 곰 녀인을 부각시키고 요소요소에 보석을 박고 금판을 붙이여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금은 세공기법으로 만든 이 띠고리들은 당대의 귀금속 공예의 발전수준을 보여주는 걸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런 띠고리는 같은 시기 중국 경내의 한 대 무덤에서는 나온 례가 없다.
다만 하북 만성과 섬서 서안 것을 비롯하여 약간 알려진 것이 있으나 그것들은 평양일대의 것과 생김새가 다르며 시기적으로도 뒤늦은 것들이다.
*1, *2 “고고”(중문) 1986년 1기, 65~67페지
그리고 중국의 한 대 무덤들에서는 나무 또는 흙으로 만든 사람모형을 비롯하여 부뚜막모형, 창고모형, 우물모형, 집모형, 개모형, 돼지모형, 오리모형, 닭모형 등 여러 가지의 도용과 목용들이 많이 나왔다.
또한 무덤에 넣어주기 위하여 흙으로 만든 반량전과 오수전과 같은 명전들이 무더기로 나왔다.
그러나 이러한 도용과 목용, 명전 등은 평양일대의 나무곽무덤에서 아직 나온 례가 없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평양일대 나무곽무덤의 유물은 중국 한 대 무덤의 유물과 명백히 구별된다.
이러한 사정은 평양일대의 나무곽무덤이 중국의 한 대무덤과 계통이 다른 조선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무덤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2. 귀틀무덤과 벽돌무덤의 유물
평양일대의 귀틀무덤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앞서 존재한 이 고장의 나무곽무덤을 직접 계승하고
그것을 더욱 발전시킨 무덤으로서 두 무덤 사이에는 유물 갖춤새, 유물의 종류와 생김새 등에서 계승성이 많이 보인다.
대표적인 것 몇 가지만 보더라도 우선 무기류에서 좁은 놋단검과 좁은 놋창끝, 쇠단검(좁은 쇠단검)과 쇠창끝(좁은 쇠창끝), 쇠갑옷(쇠찰갑), 농공구 형태의 무기로서 한 조로 드러나는 쇠도끼, 쇠끌, 쇠낫 등의 무기와 무장은 두 무덤에서 다 볼 수 있다.
또한 평양일대의 나무곽무덤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화분형 단지와 배부른 단지, 회백색 단지, 회색 단지 등의 질그릇들은 평양일대 귀틀무덤의 질그릇 갖춤새에서 기본을 이루고 있다.
이 밖에 마구와 수레부속, 띠고리를 비롯한 여러 가지의 몸치레거리에서도 계승성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유물들이 중국 한 대무덤의 유물들과 다른 것임은 앞의 나무곽무덤 유물편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다.
그러므로 나무곽무덤의 유물과 계승성이 있는 귀틀무덤의 유물들이 중국한대 무덤의 유물들과 다르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평양일대 벽돌무덤의 유물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평양일대의 벽돌무덤과 귀틀무덤 사이에도 유물 갖춤새, 유물의 종류와 생김새 등에서 계승성이 많아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다만 평양일대의 귀틀무덤과 벽돌무덤에서 드러난 유물 가운데서 문제시되는
유물들에 대해서만 언급하려고 한다.
여기서 문제시되는 유물이란 해방 전에 일제어용사가들이 漢의 락랑군이 평양일대에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그 론거의 중요한 근거로 든 유물을 말한다.
물론 이러한 유물들의 정체에 대해서는 이미 론한 글들이 있지만 락랑무덤의 성격을 리해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하여 간단히 개괄하려고 한다.
*“고조선문제연구”, 사회과학출판사, 1973년판, 139~164페지
1) 효문묘 동종
1920년에 동평양에서 철도 부설공사를 할 때에 귀틀무덤이 드러났는데 거기에서 효문묘 동종이 나왔다고 한다.
그 동종에는
“효문제의 종묘(사당)에 쓸 청동단지인데 10되들이고 그 무게는 47근이다.
영광 3년(기원전 41년) 6월에 만들었다” 고 새겨져 있다.
*“락랑군시대의 유적”(일문), 1927년 220페지
“고문화종감”(일문) 제2권, 양덕사, 1948년판, 16~17페지
일제어용사가들은 이 효문묘 동종을 가지고 평양부근에 마치 효문묘가 있었던 것처럼 주장하면서
“한 락랑군 재평양설”의 주요한 근거로 삼았었다.
그러나 이 주장은 력사적 사실과 맞지 않는 부당한 견해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것은 우선 “효문묘 동종”이 종묘(사당)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귀틀무덤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효문묘 동종이 나온 귀틀무덤에서는 연대를 잘 보여주는 “사신규구경”과 “련호문경”이 나왔다. 이 두 거울은 기원 1세기 중엽 경에 해당되는 귀틀무덤에서 흔히 나왔다.
그러므로 효문묘 동종이 나온 귀틀무덤은 기원 1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연대는 효문묘 동종이 만들어진 때(영광 3년=기원전 41년)보다 100여년이나 뒤늦으므로 그런 무덤에서 드러난 효문묘 동종을 가지고 어떻게 평양 부근에 효문묘가 있었다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을 “한 락랑군 재평양설”의 근거로 삼을 수 있겠는가?
그 부당성은 또한 시기적으로도 맞지 않기 때문이다.
“한서”위현성렬전에는 효문제가 행차한 일이 있는 군국에만 효문묘를 세웠다고 기록되여 있다.
그런데 한의 락랑군은 무제 때인 기원전 108년에 처음으로 설치한 군이며 효문제 때에는 아직 있지도 않았던 군이다. 그러니 평양 부근에 효문제가 행차한 일이란 있을 수 없으며 따라서 효문묘가 있을 리 없다.
결국 귀틀무덤에서 나온 효문묘 동종을 가지고 효문묘가 평양 부근에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그것을 “한 락랑군 재평양설”의 근거로 보는 것은 력사적 사실과 맞지 않는 부당한 견해인 것이다.
2) 채협 무덤에서 나온 나무패쪽
채협 무덤은 락랑 토성에서 남쪽으로 약 2km 떨어진 곳에서 알려진 귀틀무덤이다.
그것은 평야일대의 귀틀무덤에서 보기 드문 앞 뒤 두칸으로 된 가장 큰 무덤인데 귀틀의 축조방법이 벽돌무덤의 벽돌 축조방법과 같은 것으로 보아 기원 2세기 초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무덤에서는 유명한 “채협”을 비롯하여 많은 유물이 나왔는데 그 가운데서 문제로 되는 것은 글자가 씌여져 있는 나무패쪽이다.
이 나무패쪽에 씌여있는 글자는 다음과 같다.
“견직물 세 필 옛 속료 조선승 전굉이 삼가 아전을 보내여 두 번 절하고 바치며 제사를 지낸다.“
발굴보고서 작성자는, 무덤 주인공의 옛 속료이며 락랑군 조선현의 승인 전굉이 자기 부하를 보내여 견직물 세 필을 바치고 제사를 지냈으니 무덤 주인공은 조선 현령쯤 되는 사람이였겠다고 추측하였다.
그러나 락랑구역 일대의 귀틀무덤 가운데서 가장 큰 무덤인 이 무덤이 현령급 인물의 무덤일 수는 없다.
그보다 여기서 문제로 되는 것은 나무패 쪽에 씌여있는 글이 한 대의 장례풍습과 맞지 않는 것이다.
만일 일제어용사가들의 말대로 이 무덤이 락랑군 조선 현령의 무덤이라면 나무패쪽의 글도 응당 한 대의 장례 풍습대로 씌여졌을 것이다.
원래 진한시대에 무덤 안에 넣어준 죽간(글쓴 참대패쪽)과 목간(글쓴 나무패쪽)에는 죽은 사람에게 부조로 보낸 물건과 그 수량, 보낸 사람의 이름만 씌여져 있다.
실례로 장사 앙천호에서 드러난 전국시대 말기의 무덤에서와 오리패서가만에서 드러난 406호 무덤에서 나온 죽간을 들 수 있다.
그것들에는 모두 부조의 목록과 수량, 그것을 보낸 사람의 이름만 씌여져 있을 뿐이고 그 밖의 것은 쓰여있지 않다.
때문에 “장사발굴보고”의 작성자도 죽간의 살아있는 사람들이 죽은 사람에게 부조로 보낸 물품을
적은 목록이라고 말한 한 연구자의 견해를 인용하면서 같은 견해를 발표하였다.
*“장사발굴보고”(중문), 과학출판사, 1957년판, 55페지
이상의 사실은 진한시기 무덤에 넣은 죽간이나 목간은 부조의 목록으로서 여기에는 물건의 수량과
그것을 보낸 사람의 이름만 쓰는 것이 하나의 관례로 되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런데 채협 무덤에서 나온 나무패쪽에는 진한시기의 장례풍습과는 어긋나게 물목 뿐 아니라 사람을 보내여 제사한다는 글까지 씌여있다.
따라서 문제의 나무패쪽은 漢나라의 풍습이 지배한 락랑군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상스러운 것은 또한 조선현의 승인 전굉이 자기의 옛 상관의 장례에 자신이 직접 가지 않고 자기 부하를 보내여 견직물 세 필을 바치고 제사하였다고 한 것이다.
일제어용사가들이 주장한 것처럼 평양 부근에 락랑군의 조선현이 있었다면 옛 상관의 장례에 조선 현승은 만사를 제쳐놓고 자신이 직접 장례식에 참가하는 것이 부하로서 상관에게 지키는 례의일 것이다.
그런데 옛 상관의 장례가 코앞에서 진행되는데 자신은 가지 않고 부하를 보내서 그렇게 제를 지낼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전한대이래로 유교세력이 커져서 정치적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당시로서는 도저히 그런 행동은 용납되지 않았을 것이며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만일 조선 현승이 자기 부하를 보내여 물건을 바치고 제사를 지낸 것이 사실이라면 이 조선 현은 평양 부근이 아니라 평양과는 거리가 먼 곳에 있었을 것이다.
이상의 사실들은 문제의 나무패쪽은 평양일대가 한의 락랑군이 있었다는 증거로 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한의 락랑군이 아니라는 근거로 되는 것이다.
3) 왕광 무덤에서 나온 도장
왕광 무덤(정백리 127호 무덤)은 주체 21(1932)년에 알려진 귀틀무덤(귀틀벽돌무덤)이다.
이 무덤은 거기에서 나온 2개의 청동거울로 보아 기원 1세기 말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무덤에서는 “내행화문정백식경”과 “사신규구경”이 나왔다.
왕광 무덤에서는 남자가 묻힌 서쪽 관에서 2개의 도장이 나왔는데 그 중의 1개는 량쪽에 글자를 새긴 나무도장이였다고 한다.
그 한쪽에는 “락랑태수연 왕광지인”이라고 새겼으며 다른 쪽에는 “신광”이라고 새겨져 있다고 한다.
일제어용사가들은 이 도장을 한의 락랑군이 평양일대에 있었다는 “락랑군 재평양설”의 근거의 하나로 삼았었다.
그러나 그 도장에는 력사적 사실과 맞지 않는 자료가 여러 가지로 제기된다.
첫째로, 도장의 재질이 한 대의 도장재료와 밎지 않는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한 대의 도장은 옥, 금, 은, 청동으로 되어 있는데 각기 자기의 신분에 따라서 해당한 재료를 쓰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무덤에서는 나무도장이 나왔으니 그것은 한 대의 도장규례에 벗어나는 것이 명백하다.
둘째로, 도장의 형식이 한 대 도장제도와 맞지 않는 것이다.
한 대의 도장에는 관인과 사인이 있었다.
관인에는 엄격한 제도가 있어서 거기에는 관직명만 새기게 되어 있었다.
그것은 정백동 2호 무덤의 도장이 잘 보여준다.
이 무덤에서는 남자가 묻힌 서쪽 관 안에서 백동질의 관인과 사인이 나왔는데 관인에는 “부조장인”이라고 새겨져 있으며 사인에는 “고상현인”이라고 새겨져 있다.
이처럼 실물의 도장에는 관인과 사인이 구분되여 있으며 관인에는 관직명만 새겨져 있다.
그런데 왕광무덤의 도장에는 관직명과 함께 사람의 이름까지 새겨져 있어서 관인과 사인을 겸한 격으로 되어 있다. 이것 역시 漢 대의 도장제도와 맞지 않는다.
셋째로, 글씨체가 漢 대의 도장들에 새긴 글씨체와 맞지 않는 것이다.
漢 대 도장의 글씨체는 전자체이다. 그러나 왕광 도장의 글씨체는 예서체로 되어있다.
넷째로, 도장의 크기가 격에 맞지 않는 것이다.
漢 대 관리들의 도장은 보통 한 변이 1.5cm인데 왕광의 도장은 한 변이 2.3cm이다.
이것은 한 대 관리들의 도장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크기이다.
이와 같이 왕광의 도장은 재질, 형식, 서체, 규격 등에서 한 대의 도장제도와 맞지 않는다.
만약 왕광이 漢나라 락랑군의 관리였다면 당시의 도장제도와 심히 위반되는 그런 도장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왕광의 도장은 漢 나라 락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증거로 될 수 없으며 오히려 평양일대가 한 나라의 관할 밑에 있지 않았다는 근거로 되는 것이다.
4) 왕우 무덤에서 나온 도장
왕우 무덤은 주체 14(1925)년에 알려진 귀틀무덤이다.
무덤에서는 “건무 21년”(기원 46년), “건무 28년”(기원 53년), “영평 12년”(기원 69년)등의 기년명이 있는 칠기와 “리왕”, “리한” 등 글자가 있는 칠기들이 나왔다.
그러므로 이 무덤의 주인공은 왕씨와 한씨 부부이며 무덤은 기원 1세기 후반기에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왕우 무덤에서는 한 개의 량면 나무도장이 나왔다고 한다.
한쪽 면에는 “오관연 왕우인”이라고 새겨져 있고 다른쪽 면에는 “왕우인신”이라고 새겨져 있다고 한다.
이 도장은 왕광의 도장과 마찬가지로 도장의 재질, 형식, 서체, 규격 등에서 한 대의 도장제도와 심히 어긋난다.
따라서 이 도장도 한 나라 락랑군이 평양 일대에 있었다는 근거로 될 수 없다.
5) 봉니
봉니라는 것은 다른 곳에 보내는 문건을 넣은 나무함을 도중에 열어보지 못하도록 노끈 같은 것으로 가로세로 매여가지고 그 매듭에 진흙덩이를 붙이고 거기에 군현 책임자의 도장을 찍은 것이다.
이런 봉니가 해방 전에 락랑 토성에서 200여개가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과거 봉니 가운데는 위조품이 너무나도 많아서 그것들이 다 진품인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첫째로, 한 개 유적에서 수집된 봉니의 수자로서는 지나치게 많은 것이다.
주체 25(1936)년 4월까지 200여개의 봉니가 알려졌다고 하는데 봉니를 많이 쓴 중국에서도 그렇게 많이 나온 례가 없다.
전국의 서신이 다 집중될 수 있는 한 대의 수도 장안과 락양의 성지에서도 봉니가 알려진 것이 그렇게 많지 못하다.
*“조선고고학연구”(일문), 1948년판, 363페지
우리는 해방 후 락랑 토성과 운성리 토성, 소라리 토성, 청해 토성을 비롯한 그 밖의 토성들을 발굴하였지만 단 한 개의 봉니도 나온 례를 알지 못한다.
원래 봉니 그 자체의 성질상 특성으로 하여 잘 남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락랑 토성에서 나왔다고 전하는 것들이 실지 당시의 것인가 하는 것이다.
※ 해방 전에 봉니를 위조하던 자들의 고백에 의하면 일제 골동상들과 봉니 위조자들이 수많은 봉니를 위조해서 팔았다고 한다.
둘째로, 봉니에 찍힌 도장의 크기가 당시의 도장의 크기와 맞지 않는 것이다.
무제 “원수 4년”(기원전 119년)에는 관인의 크기를 5품(1.5cm)으로 규정하였다.
그런데 봉니에 찍힌 도장의 크기는 대부분이 2~2.2cm이다.
그러니 봉니들을 진품으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셋째로, 봉니에 찍힌 군현 명이 오직 락랑군에만 국한되여 있으며 그것도 도위부 계통의 봉니가 전혀 없는 것이다.
봉니는 다른 곳에서 보낸 문건을 받아본 곳에서 나온 것이 정상의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봉니 가운데는 자기 군 산하의 현들에서 온 것도 있겠지만 린접한 군에서 보내온 것도 있어야 하며 군도 위의 것도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중앙과 빈번한 련계가 있었을 것이므로 중앙에서 내려보내는 지시나 편지에 붙였던 봉니도 응당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락랑 토성에서 나왔다고 하는 봉니 가운데는 락랑군 산하의 현들의 것만 있을 뿐이고 중앙의 것은 물론 린접 군과 군도 위의 것은 단 한 개도 없다.
더구나 한 나라 중앙에서 내려보낸 것으로 볼 수 있는 봉니가 단 한 개도 없다는 사실은 락랑 토성에 거처한 집단이 漢나라의 통치를 받지 않았던 그 어떤 독자적인 세력이였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넷째로, 봉니에 찍힌 관직명 가운데는 당시의 관직제도와 맞지 않는 것이 많은 것이다.
그런 봉니로서는 우선 “락랑대윤장”이라는 봉니를 들 수 있다.
주체 24(1935)년에 “과학적 발굴”에서 드러났다는 “락랑대윤장”을 비롯하여 그런 봉니가 락랑토성에서 8개나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거기에 찍힌 사각도장의 크기는 한 변의 길이가 2.05cm, 2.07cm, 2.10cm로서 세 종류의 관인이 있었던 것을 보여준다.
“대윤”이란 “태수”를 왕망시기에 그렇게 고친 것이다.
“한서”왕망전에 의하면 왕망은 오위장 왕기로 하여금 현도, 부여, 락랑에 옛날 한왕실이 수여하였던 인수를 회수하고 새 왕조(왕망이 세운 신나라)의 인수를 수여하였다.
왕망시기에는 “태수”를 “태윤”으로 고쳤을 뿐 아니라 수 많은 군현 명까지도 고쳤다.
례컨대 “돈황군”은 “문덕군”으로 고쳤는데 이것은 실지 유물에 의해서도 확증되었다.
*“고고학보” 1964년 1호, 56페지
또한 “락랑군”은 “락선군”으로 고쳤으며 락랑군의 속현들인 “증지현”은 “증토현”으로, "패수현“은 ”락선정“으로, ”해명현“은 ”해화현“으로 고쳤다고 한다.
그리고 현의 ”령장“도 "재”로 고쳤다고 한다.
따라서 “락랑대윤장”의 봉니가 믿을 만한 진품으로 되자면 거기에는 응당 “락선대윤장”이란 도장이 찍혀져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못하니 그것을 어떻게 진품이라고 볼 수 있겠는가?
그것은 봉니 위조자들의 손에 의하여 만들어진 위조품인 것이 명백하다.
만일 “락랑대윤장”이란 봉니가 실물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일제어용사가들이 주장하듯이 락랑토성을 한의 락랑군 소재지로 볼 수 있는 근거로는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봉니는 다른 곳에서 보내온 물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락랑대윤장”이란 봉니가 실물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오히려 락랑 토성이 한의 락랑군의 소재지가 아니였다는 것을 확증해주는 근거로 될 뿐이다.
당시의 관직 제도와 맞지 않는 봉니로서는 또한 “동이장인”의 도장이 찍힌 봉니를 들 수 있다.
“동이장인”은 2개 보이는데 하나는 한 변의 길이가 2cm이고 다른 하나는 한 변의 길이가 2.1cm이다.
“한서”지리지에 의하면 동이현은 “림둔군”의 소재지였다.
기원전 82년에 림둔군이 폐지되면서 동이현이 락랑군의 속현으로 되었다.
동이현은 림둔군의 소재지로 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아 락랑군에 합쳐진 다음에도 큰 현으로 되어 있었을 것이다.
당시 큰 현에는 현령을 두었고 작은 현에는 현장을 두었다.
동이현에는 현령이 있었고 현장은 없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결국 “동이장인” 봉니는 위조품으로 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그것이 위조품이라는 것은 또한 같은 도장을 찍었음에도 불구하고 우에서 본 것처럼 그 크기가 서로 다른 것 자체가 잘 보여준다.
“동이장인” 봉니와 같은 위조품은 그 밖에도 “장잠장인”, “장잠령인”, “수성장인”, “수성우위”, “남한장인”, “남한좌위” 등의 도장이 찍힌 것을 비롯하여 수많은 봉니들을 들 수 있다.
다만 여기서는 점제봉니에 대한 우리 학계의 검증결과를 첨부한다.
일제어용사가들은 평안남도 온천군 성현리에 위치하고 있는 어을동토성을 “점제현”의 소재지였다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점제신사비”와 함께 점제봉니들을 들었다.
그들이 소개한 봉니 가운데서 “점□장인”, “□제□인”, “점□승인”등의 도장이 찍힌 봉니들이 있다.
이와 거의 같은 형의 점제봉니들이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중앙 력사박물관에도 보관되여 있다.
이 점제봉니 가운데는 글자가 모두 똑똑히 남아있는 것은 하나도 없지만 그것들을 종합하여 보면 “점제장인”이거나 “점제승인”의 도장이 찍힌 봉니라는 것을 쉽게 판명할 수 있다.
최근 고고학연구소 연대측정집단이 점제봉니에 대한 화학분석을 하였는데 그 분석결과에 의하면 그 봉니들이 모두 성현리 토성 근방의 흙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락랑 토성 근방의 흙으로 만든 것으로 확증되였다.
※ “물성분석을 통하여 본 점제비와 봉니의 진면모”(락랑유적의 성격에 관한 학술토론회의 토론론문)
만일 “점제장인”, “점제승인”의 도장이 찍힌 봉니들이 실물이고 성현리 토성이 “점제현”의 소재지였다면 그 봉니들은 응당 성현리 토성 근방의 흙으로 만든 것이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들은 성현리 토성 근방의 흙이 아니라 락랑 토성 근방의 흙과 같은 것으로 만들어졌으니 어떻게 실물로 볼 수 있겠는가.
이처럼 락랑 토성과 그 근방에서 나왔다고 하는 봉니들은 실물로 볼 수 없는 것들이다.
때문에 “한 락랑군 재평양설”을 조작한 일제어용사가의 두목인 이마니시까지도 락랑 토성에서 수집한 거의 모든 봉니가 가짜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6) 점제비
해방 전 일제어용사가의 두목이었던 이마니시는 1913년에 평안남도 온천군 성현리(해방 전의 평안남도 룡강군 해운면 운평동)에서 “점제신사비”를 발견하였다고 세상에 공개하였다.
일제어용사가들은 이것을 유력한 근거로 내세우면서 점제비 곁에 있는 성현리 토성을 락랑군에 속하여 있은 점제현의 소재지라고 주장하였다.
점제현은 기원전 108년에 한 나라가 고조선을 점령하고 그 령역 안에 설치하였던 락랑군 25현 가운데의 하나이며 점제신사비는 이 현에서 풍년들기를 기원하여 호랑이 산신에게 제사 지냈던 산신당에 세운 비이다.
비의 높이는 1.35m, 너비 1.09m, 두께 0.12m나 되는 비교적 큰 화강석재의 비이다.
비의 앞면에는 팔분에 가까운 예서체로 쓴 79자의 글자가 한자로 새겨져 있는데 비문의 글을 우리 글로 쓰면 다음과 같다.
“원화 2년(기원 85년) 4월 무오일에 점제장 □□와 위, 건, 승, 속국이 모여서 <백성들을 위하여> 점제신사를 수리할 데 대하여 토의하였다.
□평산군 <산신인 호랑이>의 덕은 <높은 산인> 대산과 승산에 비길 수 있으며 위엄은 <우뢰와 같다>
점제고을을 도와 바람과 비를 잘 조절하고 땅을 기름지게 하며 백성들을 장수하게 하고 오곡이 잘 되게 하며 도적이 일어나지 않게 하고 <간사한 것이> 자취를 감추며 사람들이 드나드는 것을 길하고 리롭게 하고 모두 신광을 받게 하여달라.”
연대를 밝힌 글자들이 파손되여 정확히 판독할 수 없으나 이 비문은 후한시기 지방군현에서 산신숭배가 있었던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후한서” 권 3장제기 원화 2년(기원 85년) 조와 같은 책 권 18제사지 제8의 기사에 의하면 이 해 1월 산천의 여러 신들을 제사지낼 데 대한 임금의 지시가 있었다.
점제비는 임금의 이 지시를 받고 그 해 4월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비문에 “4월 무오”일이라고 씌여져 있는데 원화2년 4월에도 무오일이 있으므로 그것은 기원 85년에 후한의 령역안에 세웠던 비라는 것이 명백하다.
그런데 최근 고고학연구소 연대측정집단이 점제비에 대한 화학성분을 분석한데 의하면 그것은 온천관입체의 화강암의 생성년대와 조성성분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이 검증되었다.
생성년대에서는 흑운모를 시료로 하여 핵분렬흔적법으로 측정한데 의하면
점제비 화강암의 생성년대는 1억 2천 9백만 년±1천 3백만 년이고
온천 화강암의 생성년대는 1억 4백만 년±1천 2백만 년,
오석산 화강암의 생성년대는 1억 백만 년±1천 2백만 년,
마영 화강암의 생성년대는 1억 7백만 년±1천 2백만 년이다.
이처럼 점제비 화강암의 생성년대는 온천과 룡강일대의 화강암 생성년대보다 2천 8백만 년~2천 2백만 년이다 더 오래다.
이것은 점제비 화강암이 그 근방의 화강암과는 돌 나이에서 완전히 구별되는 다른 지방의 화강암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점제비의 화강암은 조성성분에서도 온천관입체의 화강암의 것과 다르다.
즉, 점제비의 화강암은 온천관입체의 화강암에 비하여 연은 2배, 월프람과 연, 니켈, 석, 린은 각각 2배 더 많으며 바리움은 10분의 1정도 밖에 안 된다.
카리 분석 결과에 의하면 나트리움의 함유량이 점제비에서는 2.8인데
온천관입체의 화강암은 4.1이다.
이처럼 점제비의 석재와 온천관입체의 화강암은 그 조성성분에서도 많은 차이가 있다.
이상의 사실은 점제비는 온천과 그 근방의 화강암이 아닌 다른 지방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지금도 온천과 그 근방에는 질 좋은 화강암이 많으며 평양일대에서는 그것을 많이 리용하고 있다.
그러면 왜 자기 지방의 석재로 만들지 않은 점제비가 온천 땅에서 나타났는가?
그것은 다른 지방에서 만든 것을 온천지방에 옮겨놓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7) 칠기와 청동거울
평양일대의 귀틀무덤과 벽돌무덤에서 칠기와 청동거울이 비교적 많이 드러났다.
그 가운데는 중국에서 만든 것이 명백한 것들이 있다.
일제어용사가들은 이 유물들을 “한 락랑군 재평양설”의 근거로 들었다.
해방 후에도 중국에서 만든 칠기와 청동거울이 드러났다.
칠기 가운데서 귀잔에는 그 밑바닥 두리에 바늘끝 같은 것으로 글자를 새긴 것이 있는데 거기에는 전한 또는 후한의 년호와 함께 “촉군서공”이라고 새긴 것과 “광한군공관”이라고 새긴 것이 있다.
“촉군”은 오늘날의 중국 사천성 지방이며 “광한군”은 사천성 동쪽지방을 漢나라 때에 그렇게 불렀다.
촉군과 광한군은 주로 황제에게 진상하는 기물을 만들던 곳으로 알려져있다.
그러므로 평양일대에서 나온 칠기 가운데서 “촉군서공”이라든가 “광한군공관”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 칠기는 漢나라에서 만든 것이 틀림없다.
청동거울 가운데에도 “상방작경”, “동방작경” 등 거울 제작지가 새겨져 있는 것들이 있다.
이런 거울도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이 명백하다.
그러나 그러한 유물들이 결코 평양일대에 漢의 락랑군이 있었다고 규정하는 근거로는 될 수 없다.
평양일대의 락랑무덤에서 중국에서 만든 물건이 나온 것은 오히려 이 무덤을 남긴 사람들이 당시 중국과 교역을 하였다는 것을 말해주는 증거로 된다.
그것은 중국 본토의 한 대 군 소재지의 무덤들과 비교하여 보면 더 잘 알 수 있다.
평양일대의 락랑무덤에서는 한 무덤에서 2개의 거울이 나온 것이 많으며 호화로운 고급칠기도 여러 개씩 나왔다.
그러나 중국본토의 한 대 군 소재지들에서는 거울이 나온 무덤이 매우 적다.
심지어 후한의 수도였던 락양의 소구무덤들과 장사지방의 무덤들에서도 청동거울은 매우 드물게 나왔으며 “촉군서공”에서 만든 칠기도 평양일대의 락랑무덤에서처럼 그렇게 많이 나오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평양지방이 한 대의 어느 군 소재지와는 성격이 달랐다는 것을 말해준다.
다시 말하여 “촉군서공”이나 “광한군공관”과 같은 한 나라 왕실에서 경영하는 수공업장에서 만든 칠기가 평양일대의 락랑무덤에서 많이 나온 것은 거기에 묻힌 사람들이 한 나라 왕실과 직접 교역을 할 수 있은 그러한 정치세력을 이루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여준다.
한 대의 유물은 평양일대 뿐 아니라 남부조선에서도 나왔고 바다 건너 일본땅에서도 많이 드러났다.
일제어용사가들의 말대로 사고한다면 남부조선이나 일본에도 한 대의 군, 현이 있었던 것으로 보야아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남부조선이나 일본에도 한나라의 군현이 있었다고는 주장하지 않았다.
평양일대의 락랑무덤에서 나온 유물 가운데서 절대다수는 중국의 漢대무덤의 것과 다르다.
그리고 해방 전에 일제어용사가들이 중국의 것으로 본 유물 가운데는 위조품이 많으며 중국에서 만든 유물인 경우에도 그것은 평양일대에 락랑무덤을 남긴 정치세력이 漢나라 왕실과 교역한 산물이다.
이처럼 평양일대의 락랑무덤은 거기에서 드러난 유물을 통하여 보더라도 조선적 성격이 뚜렷한 무덤이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평양일대의 락랑무덤은 무덤의 형식변천과 구조, 거기에서 드러난 유물 등에서 같은 시기 중국의 것과 뚜렷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이 무덤의 주인공이 중국의 漢대 사람이 아니라 평양일대에서 련면히 살아온 고대 조선 사람들이라는 것을 실증해준다.
그러므로 평양일대의 락랑무덤은 그 구조와 형식변천이 중국의 漢대무덤의 것과 꼭 같고 거기에서 드러난 유물들도 중국 漢 대의 유물과 꼭 같으며 그 대부분은 중국에서 만든 것을 가져온 것이라고 단정하면서 그것을 기초적인 근거로 하여 漢나라 락랑군이 평양일대에 있었다고 주장한 일제어용사가들의 견해는 력사적 사실과 맞지 않는 부당한 것이다.
그러면 평양일대에 락랑무덤을 남긴 사람들은 어떤 정치세력을 이루고 있었는가?
평양은 인류 발상지의 하나이며 우리나라 고대국가의 발생지이고 중심지이다.
우리 민족의 원시조인 단군이 기원전 30세기 초에 평양에 도읍을 정하고 단군조선을 건립한 이래로 평양은 력대로 고조선의 수도였으며 고대 문화의 중심지였다.
이에 대해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하여 옛 기록들에서도 명백히 전하고 있다.
즉 평양은 전조선(단군조선), 후조선, 만조선 등 세 조선의 수도였다.
최근 연구성과에 의하면
단군조선은 기원전 30세기 초부터 기원전 14세기 전후한 시기까지,
후조선은 기원전 14세기 전후한 시기부터 기원전 2세기 초까지,
만조선은 기원전 2세기 초부터 기원전 2세기 말(기원전 108년)까지 존재하였다.
또한 최근 평양일대에서 발굴된 고조선관계 유적자료에 대한 연구성과에 의하면 단군조선의 문화는 고인돌무덤과 돌관무덤이 대표하는 비파형 단검문화이고 후조선의 문화는 고인돌무덤, 돌곽무덤, 움무덤, 나무곽무덤 등이 대표하는 좁은 놋단검문화이며 만조선의 문화는 나무곽무덤이 대표하는 좁은 놋단검문화이다.
세 조선의 존재기간과 문화발전상은 우에서 본 바와 같은데 거기서 주목되는 것은 나무곽무덤이다.
평양일대의 나무곽무덤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평양일대의 락랑무덤의 한 류형으로서 기원전 3세기 이전부터 기원전 1세기 말까지 존재하였다.
그것은 또한 좁은 놋단검문화를 대표하는 움무덤과 돌곽무덤에서 기원되여 귀틀무덤으로 발전되기까지의 전기간 좁은 놋단검문화를 대표하는 무덤으로 되어 있었다.
이처럼 평양일대의 락랑무덤의 한 류형인 나무곽무덤은 이미 후조선시기 좁은 놋단검관계 유적에서 기원되여 만조선의 좁은 놋단검문화를 대표하는 무덤으로 존재하였을 뿐 아니라 기원전 108년에
만조선의 왕권이 무너진 다음에도 100여년간이나 좁은 놋단검문화를 대표하는 무덤으로 존재하였다.
나무곽무덤은 그 후 한식 무덤화된 것이 아니라 좁은 놋단검문화를 계승한 귀틀무덤으로 발전되였고, 귀틀무덤은 기원1세기 전기간 존재하다가 기원 2세기 초에 후한대의 벽돌무덤과는 다른 조선적 성격의 벽돌무덤으로 발전되였다.
이러한 사실은 평양일대의 나무곽무덤 가운데서 기원전 3세기 이전부터 기원전 2세기 말(기원전 108년)까지의 기간에 존재한 무덤들은 후조선과 만조선의 정치세력을 이루고 있던 사람들이 남긴 무덤이며 기원전 1세기의 나무곽무덤과 그 계승발전으로 이루어진 귀틀무덤과 벽돌무덤은 고조선의 후예들이 남긴 무덤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북한자료) 평양일대의 유물 그림자료 (생략-동이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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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재자 송준호님의 글]
믿고 안믿고 선택은 네티즌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상호 자료를 비교하여 가장 합리적인 의견을 취하십시요
이것이 바로 인터넷이 가져다 주는 힘입니다
아래자료는 본문에서 이미 설명한 각종 평양인근 유적들에 대한 그림자료입니다
일본은 평양에서 300기의 무덤 발굴을 통하여 한 낙랑군지라 조작하였고
남한 학자들은 일제의 조작된 역사를 따르고 있으나
북한은 이후 반세기 동안 10배가 넘는 3천여기의 유적을 발굴하여
중국 한대의 것과는 다른 독자적인 고조선과 그 후예들의 유물이라 주장하고 있습니다
과연 어느쪽의 말을 믿어야 할까요 ?
그 선택권은 네티즌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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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1 / 글쓴이 : 사후 / 2005-02-19 오전 06:49:34
추가자료
<환단고기>의 '단군세기'와 '북부여기'에는 낙랑군과 낙랑국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환단고기>'북부여기'
壬申元年正月樂浪王崔崇納穀三百石于海城先是崔崇自樂浪山載積珍寶而渡海至馬韓都王儉城是檀君解慕漱丙牛冬也
[임신원년 정월 낙랑왕 최숭이 곡식 300섬을 해성에 바쳤다 이보다 앞서 최숭은 낙랑으로부터 진귀한 보물을 산처럼 가득 싣고 바다를 건너 마한의 수도 왕검성에 이르니 이때가 단군 해모수 병오년 겨울이었다]
이 기록은 BC 195년 북부여 제1대 해모수단제에는 낙랑왕 최숭이 보물을 싣고 마한의 서울 왕검성으로 가는 내용입니다.
이렇게 낙랑이란 지명이 나타나고 낙랑국이 나오는데 이것은 하북성의 낙랑군과 한반도의 낙랑국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덧글 2 / 글쓴이 : 역사21 / 2005-03-19 오전 04:30:15
락랑일대 벽돌무덤의 건축적 특징에 대하여(요약)
북한의 평양일대에 한 문제가 낙랑을 비롯한 4군을 설치하여 400여년간 한반도 북부지역을 지배했다는 학설이 여전히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논문은 북한 학자들이 평양시 락랑구역 일대에서 발굴된 무덤을 실측하여 그 자료를 바탕으로 동시대 漢나라와 다른 점을 구명하여 락랑구역의 유적 유물이 한군현과 관련없는 고조선과 고구려와 계통을 같이하는 유적임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자료는 광화문에 있는 통일원 북한자료센터를 방문하여 조선고고연구란 잡지에서 요약해온 것입니다. 북한의 잡지는 아직은 '특수자료'로 분류되어 열람은 되지만 복사는 불가능하다고 합니다만 필사해가는 것은 괜찮다고 합니다. 약 6페이지 정도 분량인 이 논문을 요약한 자료이지만 역사에 관심이 있는 분들에게 도움이 될 것같아 올립니다. 참고로 북한에서는 낙랑을 락랑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제목 : 락랑일대 벽돌무덤의 건축적 특징에 대하여
출전 : 조선고고연구, 사회과학출판사(평양), 1999. 8월호
쓴 사람 : 부교수, 학사 한용걸, 오명수
평양시 락랑구역 락랑일대에서 발굴된 고분들은 2,000여기로 시대구분은 BC3세기 이전 ~ AD3세기에 걸쳐 분포되어 있다. 여기에는 나무곽 무덤, 귀틀 무덤, 벽돌 무덤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특히 벽돌무덤이 1,000여기에 이르고 이 가운데 70%정도가 외칸 무덤이다.
이 벽돌무덤의 특징은 고조선과 고구려의 특징과 비슷한데,
① 평면형태가 배부른 방형(정방형)
② 벽체와 지붕구조가 4중선 궁륭구조
③ 눕혀쌓기와 세워쌓기의 반복으로 구조적 안정성과 다양성 확보
④ 벽돌을 맞물려(홈과 촉으로 벽돌제작) 쌓아 안정성 확보
⑤ 벽돌재료와 돌을 배합하여 축조 등 5가지 특징이 있다.
락랑구역 일대의 벽돌무덤과 漢代 무덤의 차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벽돌의 화학적 성분은 락랑구역 일대의 진흙성분과 화학적 조성이 일치하며 이는 락랑구역의 무덤벽돌들이 일본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중국(漢) 본토로부터 수입한 것이 아니라 자체 생산품이라는 증거이다.
2. 락랑구역 벽돌무덤은 절대 다수(70%)가 외칸무덤이며 평면이 방형(정사각형)이지만, 동시대 한의 무덤은 절대다수가 장방형(직사각형)의 곧은 평면형태(고조선문제연구, p.119, 사회과학출판사, 1997)를 띠고 있다.
평면구도는 락랑구역의 축선은 모두 밖으로 호형(弧形)을 이루었으나 한대의 것은 곧은 직선이며, 락랑 벽돌무덤과 고구려 돌칸 흙무덤 12기의 앞칸(무덤칸)을 평면 실측하여 그 값을 비교하면 평면비의 평균값이 1.113(락랑일대) : 1.094(고구려)로 서로 유사함을 보이고 있다. 이를 통해 락랑구역의 벽돌무덤들이 고구려적 특성과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3. 천정 구성의 차이를 예로 들면, 락랑구역은 발굴된 무덤 전체가 궁륭식(vault) 천정이나, 한대의 것은 대부분 아치식 천정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는 두 지역의 무덤이 구조역학적으로 근본적인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4. 벽체 축조 방식에서, 락랑 구역은 벽돌을 눕히고 세우는 것을 반복하여 축조하였으며, 처음부터 안으로 기울어지게 쌓는 형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한대의 것은 눕혀서만 쌓았으며 수직으로 축조하는 차이가 있다.
5. 벽돌형태 : 락랑구역은 속이 빈 벽돌이 없으며 촉과 홈을 만들어 눕히거나 세우더라도 맞물리게 쌓아 올리는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한대의 것은 속이 빈 벽돌을 사용(중국건축의 역사, 평범사, 일본, 1981. p51, 70, 80)하였으며 길이 방향의 넓은 면에 촉과 홈이 있어 눕혀쌓기에 편리한 구조를 갖고 있다.
6. 기타 : 이외에 락랑구역의 벽돌무덤은 반지하 형태이나 한대 벽돌무덤은 완전지하 형태를 띠고 있는 차이가 있다.